이상과 현실 사이를 잇는 ‘정의’라는 이름나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성미 탓에 내 깜냥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라도 관심만 가면 무조건 사서 다 읽지도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는 경우가 많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 중 하나였다. 다른 철학서나 인문서에 비해서는 훨씬 읽기 쉬운 편이지만 계속해서 질문만 던지고 답은 내리지 않는 저자의 서술 방식에 질려 결국 손을 놓고 말았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 독후감 대회의 도움(?)을 받아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두 가지의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두 가지 깨달음을 중심으로 나의 의견과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철학 인문서가, 그것도 외국 저자의 책이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대한민국 사회의 분위기와 책의 발간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한 기록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이성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혹은 정의롭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감정을 너도나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설사 대중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루머에 휩쓸려 현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중이 지금 정권을 불신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또한 최근 들어 ‘정의’, ‘공정한 사회’와 같은 화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사실 나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룰을 어기는 사람(혹은 기업)에 대한 제재만 확실히 이루어진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거나 부를 재분배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즉,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쉽게 말해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진보바람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진보주의자들을 비판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이들의 주장도 일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절대자가 ‘정의(正義)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인간에게 부여한 일이 없다. 즉,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정의를 정의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현대 사회만 생각해 본다면 정의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된다. 사람의 인생을 달리기 경주에 빗댄다면, 누구나 쉽게 ‘공정한 달리기 경주가 바로 정의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정의의 정의가 엇갈린다.나를 비롯해서 어떤 이들은 경쟁의 과정에서 룰을 어기는 반칙이 없다면 그 결과는 공정하다고 말한다. 물론 ’경주 과정은 공정했어도 출발선이 다르잖아‘라고 비판할 수 있다. 출발선이 다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통계적으로도 증명되었듯 부자 자식은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의 자식은 가난뱅이가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다. 뒤처져 출발한 사람들은 더 많은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이다.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섰다고 해서 앞에서 출발한 사람을 끌어내릴 수는 없다. 출발선이 다른 것이 앞선 사람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진보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출발까지 평등하게 만들려면 자기 노력을 통해 혹은 좋은 부모를 만나 앞선 출발선에 있는 사람들의 부를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재분배도 어찌 보면 불공정이 아닌가? 효율적인 경쟁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는 것인데, 앞서간 사람들을 자꾸 뒤로 잡아끄는 것은 앞서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물론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한 출발선에 세워 놓고 ’요이~땅‘한다면 군말할 여지가 없겠지만 이것은 정말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억지로 출발선을 같게 만들려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반면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나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이 결국 ‘출발선’을 다르게 하는 요인이며 이러한 것들이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맞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인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어떤 이들은 주장한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부유한 사람의 부를 걷어서 재분배함으로써 출발선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 정의가 된다. 즉, 나와 같은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이나 타고난 환경은 그저 ‘운’으로 주어지는 현실이며 개인에게 주어졌기에 개인의 것으로 보지만 이들은 이것도 결국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고 꽤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다.이 책에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유명한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철학, 재능이나 좋은 환경을 타고남으로써 생겨난 결과는 정의롭지 못하기에 합의를 통해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 롤스의 정의론 등을 소개하며 이러한 철학들이 가지는 설득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유지상주의자’라고 규명하며(이 책에서 규명한 것은 아니고 원래부터 있는 용어이다.) 내가 옹호하는 철학인 ‘자유지상주의’의 한계와 비판할 점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간다. 자유지상주의를 대표하는 ‘로버트 노직’은 ‘국가가 계약을 집행하고, 무력과 절도와 사기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능에서 더 나아간다면 결국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므로 정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한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정도의 주장을 해왔던 것인데 로버트 노직이라는 사람의 주장은 생각보다 극단적이었다. (물론 이런 철학자들의 주장은 ‘철학’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며 실제 현실에 반영되는 과정에서는 적절하게 희석되고 순화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는 내 입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내 몸, 내 삶, 나라는 인간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다룰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의 핵심이다. 여기서부터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 특유의 논리 전개 방식이 등장한다. 마이클 샌델은 자유지상주의든, 평등주의든 철학적 신념을 과연 어떤 상황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 독자를 시험한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까지 독자를 몰아 넣은 다음 ‘이런데도 너의 철학이 옳아?’라고 얄미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를 조금 천박하게 정의하자면 ’날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래?‘이며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저자가 가정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자유지상주의를 ‘콩팥 판매’와 ‘안락사’,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식인‘이라는 세 가지 현실 상황을 통해 시험하였다. 우선 어떤 건강한 사람이 내 콩팥을 8000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콩팥 이식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장기를 부유한 고객에게 팔아 넘기려는 희한한 미술상이다. 콩팥을 어디에 사용하든,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장기는 오로지 사람의 목숨을 구할 목적으로만 팔 수 있다‘라고 하는 순간 더 이상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또, 어느 가난한 농부가 첫째 아이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콩팥 하나를 판다. 그리고 둘째 아이까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나머지 콩팥 하나를 팔려고 한다. 콩팥이 모두 없어지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이 상황에서도 콩팥 판매를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서 질문을 던지는 저자가 얄미웠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상황이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잖아!‘라고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안락사의 극단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식인‘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2001년 독일, 컴퓨터 기술자인 마이베스가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히고 싶은 사람‘을 찾는 광고를 인터넷에 올렸고 브란데스라는 사람은 그 광고에 응해서 결국 식인이 이루어졌다. 금전적 보상을 비롯한 일체의 보상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마이베스는 경찰에 체포되기 전까지 브란데스의 시체를 20킬로그램이나 먹어치운 상태였다고 한다. 나는 믿기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정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마이클샌델은 여기서 또 다시 잔인한 질문을 던진다. 자유지상주의자의 논리대로라면 성인이 서로 합의하여 이루어진 식인 행위를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지상주의‘의 원칙에 의해 빌 게이츠와 마이클 조던과 같은 부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듯이 이 희귀한 식인종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내 신념에 이렇게 큰 허점이 있는 건가?’하고 좌절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좌절이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의 저자는 모든 철학에 이러한 방식을 적용하여 지지자들을 좌절하게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답은 내리지 않고 계속 극단적인 질문만 던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실컷 남 공격만 하고 자기 주장은 하지 않는 셈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깨닫게 된 이 책의 미덕은 ‘정의는 이거야’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완벽한 정의는 없으므로 극단적 질문을 통해 무엇이 정의인지 고민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허점을 보완하고 신념을 공고히 해 나가면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1. 들어가며문학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동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하는 연구를 종종 보아왔는데 이러한 관점은 새롭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나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페미니즘의 시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려 드는 것을 목격할 때가 많았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00」연구-페미니즘적 관점을 중심으로-’의 제목을 달고 있는 논문을 보기가 꺼려지는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탁류」를 읽는 과정에서, 또「탁류」를 가지고 보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주로 떠오른 것은 ‘초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수난과 ‘초봉’과 ‘계봉‘의 대비되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것은 굳이 페미니즘-이러한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조금 과한 것 같지만-적 시각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절로 든 생각이었다.앞으로, 「탁류」에 드러난 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논하고 그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를 곁들여 작품을 분석해보고자 한다.(「탁류」에 관한 기존 연구를 살펴보면 크게 둘로 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인 평가는 ‘통속적 세태소설’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으며 식민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판을 지녔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토록 상반된 평가는 작품을 평가한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문학은 ‘현재’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2. 본론1) ‘초봉’의 수난말소리가 그럴 뿐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복성스러운 구석이 없고 청초하기만 한 것이 어디라 없이 불안스럽다. 티끌 없이 해맑은 바탕에 오뚝 날이 선 코가 우선 눈에 뜨인다. 갸름한 하장이 아래로 좁아 내려가다가 급하다 할 만큼 빨랐다.눈은 둥근 눈이지만 눈초리가 째지다가 남은 것이 있어 길어 보이고, 거기에 무엇인지 비밀이 잠긴 것 같다.윤곽과 바탕이 이러니 자연 선도 가늘어서 들국화답게 청초하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웬일인지 위태위태하여 부지중 안타까운 마음이 나게 하던 것이다.)초봉에 대한 묘사이다. 보아 알 수 있듯이, 초봉은 아름답고 청초하지만 그 인상이 초봉의 기구한 생애를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초봉의 외모를 이렇게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다분히 미신적일 수 있으나, 지금의 사람들도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부분이다.)이렇게 시작된 초봉의 수난(작가가 초봉의 외모를 이렇게 설정한 것부터 수난이라면 수난이다.)은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전개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뼈대를 이루는 것은 초봉의 수난사이고 이 골격에 살점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봉은 소설이 전개됨에 따라 점차 몰락해 가는데 초봉의 수난의 원인 제공자는 ‘남성’임을 알 수 있다. 즉, 초봉은 수동적인 존재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초봉이 경험하는 최초의 남성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장형보에 이르기까지, 남성을 만날 때마다 초봉의 수난은 점차 심화된다. 이것은 초봉이 얼마나 수동적인 여성인가를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초봉의 수동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부분이다.승재가 나서서 나를 구해 내 주고 그러고 다 그러기로 했다구!......옳아! 시방도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다시 거둬 주려고......이렇게 생각할 때 초봉이는 금시로 몸이 날개가 돋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정말 그랬구나. 그래서 저렇게 찾아온 것이고...... 그런 것을 아뿔싸! 정말 죄꼼만 참았다려만, 한 시간만 참았더라면, 한 시간만 참았어도......’)초봉은 딸에게 함부로 구는 데 격분하여 장형보를 발로 차서 죽이고 만다. 그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데 동생 계봉이와 승재가 찾아와서 말리는 과정에서 초봉은 승재가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쁨을 느낀다. 위 인용에서 보듯이, 만약 승재가 아직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장형보를 죽이게 되는 파탄에 이르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뒷일은 아무것도 염려 마시구, 다녀오십시오!”승재의 음성은 다정했다. 초봉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네에.”고즈넉이 대답하고, 숙였던 얼굴을 한 번 더 들어 승재를 본다. 그 얼굴이 지극히 슬프면서도 그러나 웃을 듯 빛남을 승재는 보지 않지 못했다.)계봉과 승재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을 모르는 초봉은 승재가 아직도 사랑하고 기다려 줄 것으로 믿고 자살 대신 징역살이를 택하겠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승재의 사랑 여부가 초봉의 삶과 죽음까지 결정하는 정도에 이르는 것이다.2) ‘초봉’의 삶과 대비되는 ‘계봉’의 삶그 볼때기 하며, 계봉이는 성질도 그렇거니와 생김새도 형 초봉이와는 아주 딴판이다.계봉이는 몸집이고 얼굴이고 늘품이 있다. 아무 데고 살이 있어서 북실북실하니 탐스럽다. 코가 벌심한 것은 사람이 좋아 보이나, 처진 볼때기에는 심술이 들었다. 눈과 이마도 뚜렷하니 어둡지가 않다.그러한 중에도 제일 좋은 것은 그의 입이다.마음을 탁 놓고 하하 웃을 때면, 시원스럽게 떡 벌린 입으로 그리 잘지 않은 앞니가 하얗게 드러나기까지 하여 보는 사람도 속이 후련하다.)계봉에 대한 묘사인데, 초봉의 인상과 매우 대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계봉의 외양 묘사를 통해 그의 앞날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계봉은 언니 초봉이 고태수와 결혼할 때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인물이다. 계봉은 초봉의 결혼을 「심청전」「장한몽」을 들어 비판하고 있고 물질을 대가로 하는 결혼과 그러한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부모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이렇게 꼬옥 좋아하구, 좋아하니깐 좋잖우? 그리구 결혼은 인제 두구 봐서, 응? 이 말 잘 들어요. 연애란 건 원칙적으룬 결혼이란 목적지루 발전해 나가는 본능을 가졌으니깐.......그러니깐 우리도 무사하게 목적지까지 당도하믄 결혼이 되는 거구, 또 중간에 고장이 생기든지 하는 날이믄 결혼을 못 하는 거구...... 그렇잖우?” )언니인 계봉과 대비되는 초봉의 결혼관이다. 계봉은 결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든 면에서 주체적인 입장을 취하고 살아간다. 매우 극단적으로 말해서 언니인 계봉과 초봉은 수동적-능동적, 소극적-적극적, 비주체적-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3) 두 여성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지금의 관점에서는 계봉의 삶은 부정적인 것이고 초봉의 삶은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어 바라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두 여성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는 어떠할까.우선, 초봉에 대해 서술자는, 소심하기는 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씨를 지닌 착한 인물로 바라보며 초봉의 몰락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초봉이의 도덕적이고 순수하며 착한 심성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후반부의 타락에 외부적인 요인인 주변 인물들과 타락한 사회가 깊이 개입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과 더불어 초봉에 대한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부정적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초봉을 동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서술자는 계봉을 소설 속에서 가장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속에 아주 잠간 드러나는 것이지만,“글세 제가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어딨수?”“그거야 사람마다 제가끔 부자루 살구 싶긴 하겠지......”“부자루 사는 건 몰라도 시방 가난한 사람네가 그다지 가난하던 않을 텐데 분배가 공평털 않아서 그렇다우.”“분배? 분배가 공평털 않다구?”이를 통해 승재와 계봉의 대화인데 계봉이 사회주의 사상을 어느정도 접했으며 그것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채만식의 여러 소설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등장인물 저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의미를 띤 사회주의자가 긍정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탁류」가 그러한 소설들과는 다른 주제의 소설이며 사회주의자로서의 계봉의 행위 또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작은 부분이 계봉에 대한 서술자의 긍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평역, 임철우고등학교 때 자주 마주쳤던 이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쓸쓸해지고 또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가장 궁금해지는 것은 미친 여자가 어떻게 됐을까, 청년은 어떻게 살아갈까와 같은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가 아닌 사평역의 실존여부이다.옛날에 읽을 때는 이름도 그럴싸하길래 실제 있는 역이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문학작품을 많이 접할수록 작품 속 지명 같은 것들이 설정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어 이번에는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역시나 실제로 ‘사평역’이라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사평역’을 어떤 역으로 대체하여 상상해야 할까. 일하는 사람이라곤 세명 밖에 없고 국민학교 교실 하나크기의 대합실의 간이역이라면 나같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골에 있어서 낡았고, 톱밥난로로 한기를 녹이는 간이역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고단한 삶 속에서 만난 사평역과 사평역의 역장은, 등장인물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따뜻하게 까지는 아니라도 미지근하게 보듬어준다. 만약 우리 또는 내가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차가운 시선을 보내거나 무시하고 지나쳐버릴 사람들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들을 절대로 냉대하지 않는다. 얼어붙은 마음에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꽁꽁 얼어붙어버린 이들을 위해 톱밥 한 줌 던져 줄 수 있는 역장이 있기 때문이다.등장 인물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고단하고 슬퍼보인다. 나름대로 이정도면 행복하다고 되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분명 세상의 한 모퉁이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병든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가는 농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출옥수, 학생운동을 하다 퇴학당한 청년, 남편 없이 자식들을 악착같이 키우고 있는 중년여자, 서울에서 몸을 파는 아가씨, 행상꾼 아낙네들 그리고 미친 여자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의 질서에서 소외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이들은 70-80년대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어느 시대든 모순을 안고 굴러가게 마련이지만 유난히, 우리나라의 70-80년대는 격정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현실 속에 소외되어 살아가는 온갖 군상들이 사평역에 모여있다. ‘사평역’의 처지 또한 이들과 다를 바 없다. 도시가 아닌 지방에 위치하여 지키는 사람이라곤 세명 밖에 없는, 멈춰주는 기차보다는 지나가는 기차가 더 많은 쓸쓸한 역이다. 이러한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처지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문학이나 영화 같은 것들은 이러한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거나 인물들의 비참한 삶을 여실히 드러내거나 또는 특유의 인간애로 감싸거나 하게 된다. 이 소설은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화자는 사평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비슷한 정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물론 이 시선은 따뜻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비윤리적인 삶을 산다고 여기는 경우라도 소설 속 화자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한 시선으로 인해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 누구 하나라도 미워할 수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며 그들도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각각 다르지만 우리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잘못됐다고 판단할 수 없다. 즉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소외된 인물들을 통해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보다는 개개인의 삶의 가치를 긍정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 또는 희망으로 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또한 ‘사평역’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 또는 우리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병든 아버지를 업고 읍내 병원에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자칫하면 불효자라 생각할 수도 있다. 농부는, 병을 가지고 몇 달 째 미뤄온 아버지나 하필 눈까지 쏟아지는 한밤중에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가게 된 상황까지 모든 게 짜증스럽다. 하지만 고통으로 짙게 고랑을 파고 있는 아버지의 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약간 죄스런 마음이 된다. 이런 농부에게 삶이란 흙과 일뿐이다. 또한 삶이란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여긴다. 극단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기독교를 믿는 나로선 더더욱 그렇다.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는 성경 구절도 있다. 나는 20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삶에 대한 농부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서울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여자는 삶의 가치를 돈에 두고 살아간다. 가난을 알기에 더욱 돈의 가치를 알고 있고, 사랑하는 두 아들과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돈 이 두가지만 있으면 만족할거라 생각하고 살아간다. 속물적이라고 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나의 가족과 물질 이 두 가지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평양의 끝을 부여잡고 (이태준, 패강랭)얼마 전 보았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이태준과 박태원이 언급됐었다. 그런데 이번에 배울 두 편의 소설 중에 마침 이태준의 작품이 있는지라 독후감을 쓸 작정으로 읽게 되었다.이번 작품도 저번에 읽었던 ‘심문’과 마찬가지로 제목의 의미를 알기 힘들었다. 소설을 다 읽고 ‘패강랭’을 검색해보니 ‘패강랭’은 패강이 얼었다는 뜻으로 패강은 대동강의 별칭이라고 나와 있었다.‘패강랭’은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해가 잘 되었고 누구라도 겪었음직한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친구를 만나러 평양에 가게 되고 변해버린 평양의 풍광을 보고 실망한다. 전에 없던 빌딩들과 경찰서가 생겼고 평양의 상징이었던 여자들의 머릿수건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평양의 사람도 변했다.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예전에 호감을 가졌던 영월이란 기생도 세월을 못 이기고 늙어버렸고 고고한 기생의 가치도 전락해버렸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현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일 뿐, 흘러가고 있는 현재에서 보면 현은 과거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뒤쳐진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점은 김과 현이 다투는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의 가치는 김에 의해 철저히 부정된다. 여자들이 쓰던 수건은 보기 좋지도 않을뿐더러 금전 낭비이며, 우리의 소리보다는 재즈와 댄스가 더 친숙하고 작가란 팔릴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방향전환을 한 김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지만 정신적 가치와 예술을 부르짖는 현은 김에게 바보취급을 당한다.더욱 슬픈 것은 ‘이상견빙지’ 즉, 앞으로 현은 현실에서 점점 더 소외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며 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주역에 있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로 소설은 끝나지만 제목 ‘패강랭’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이 끝난 뒤 계속 이어질 현실에서는 찬 강물이 아닌 언 강물이 될 것이 자명하다.결국, 이 소설의 작가는 과거의 것, 정신적 가치가 전락해 버리고 물질적 가치가 대접받는 세태를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을, 오히려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비애를 느낀다.이러한 현실 인식은 식민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김‘처럼 방향전환을 한 사람이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게다가 해방이 될 것이라는 희망마저 없기에 현에게 있어 대동강은 점점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나도 그렇거니와 그 누구라도 ‘패강랭’의 현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옛날과 지금이 달라진 모습에서, 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달라진 모습에서, 또는 자신이 배우고 옳다고 여긴 것과는 다른 현실의 모습에서 그랬을 것이다. 또, 현이 살고 있는 식민지 시대보다 지금이 더 옛것을 업신여기고,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를 숭상하는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패강랭’은 지금의 나에게 절절히 다가온다.현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지라 이른바 ‘우리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비애감을 느낀다.방학 때 나는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주파수를 항상 EBS라디오에 맞춰놓고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으면 알아서 프로그램이 바뀐다. EBS에는 ‘세계음악기행’처럼 월드뮤직을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프로그램도 있고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과 세계 단편 소설을 극화하여 보내주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시간 보내기에 아주 좋은 라디오 채널이다.지금은 없어졌지만 한참 졸릴 시간인 오후1시쯤에 ‘임동창의 풍류’라는 프로그램을 했었다. 처음 그 프로그램을 접했을 때는 다른 곳으로 주파수를 돌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 프로그램을 꾸역꾸역 듣기 시작했다. 요일마다 코너가 달랐는데 특히 임동창이라는 맛깔나는 진행자가 음악인을 초대하여 풍류를 즐기는 토요일의 코너를 가장 좋아했다. 매주 초대되는 음악인들은 피리면 피리, 어느 지역의 소리면 소리, 우리 음악의 세세한 분야에서 손꼽히는 대가들이었다.그 사람들은 자신의 소리를 진정 즐기는 사람들이었고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환경이 따라주지 않고 점점 그들이 설 곳이 줄어들지만 소리를 할 힘이 있을 때까지 하겠다고 하나같이 얘기했다. 그 중 피리 하나만을 몇십년 동안 불어온 명인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분은 늙어서도 피리를 불기 위해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호흡을 길게 하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나이가 들면 호흡이 달려 피리를 불기 힘든데 자신은 오랫동안 피리를 불고 싶어서 꾸준히 호흡을 다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피리 산조 같은 것을 연주했는데 진행자인 임동창의 추임새와 맛깔나게 어우러져 감동마저 느낄 수 있었다.
눈길, 이청준이 소설은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한 번 읽어 봤던 작품이다. 다시 읽어 보니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은 소설이 주는 감동이 우리(나의)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모두 느끼게 할 수 없으며 내가 어머니가 되지 않는 한,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그 사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어머니의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나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혼란스러우면 도덕을 강조하듯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러면서 또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자식으로서 천륜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기를 쓸 때든 독후감을 쓸 때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에서 ‘당연한 거야’라고 이야기하기가 좀 꺼려진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믿고, ‘자식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수많은 도덕적 가치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 나는 확신하기 힘들다.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은 말 그대로 ‘천륜’으로서 만고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소설에 대해 알아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실화라고 밝힌 바 있다고 나와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완전한 나의 실화다. 소설이 쓰이기 전 나와 아내와 어머니가 이미 실연했던 그 순간을 내 손을 빌려 옮겨놨을 뿐이다." 작가가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어 실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작가들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완전한 나의 실화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발가벗겨 노출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이건 내 친구 얘긴데......‘라고 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 자신인 ’나‘는 어머니에게 진 빚을 외면하려하는 부정적인 인물이다. 이런 자신을 드러낸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작가의 고백 덕분에 나에게는 이 작품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소설 속에서 나는 집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집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가족도 뿔뿔이 흩여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그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옛 집에서 저녁을 지어 먹인다. 날이 밝기도 전에 눈길을 따라 아들과 집을 나서고 산을 넘자마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아들은 떠나간다. 어머니는 이제 갈 곳이 없다. 함께 걸어 온 발자국을 따라 눈길을 외롭게 걸어간 어머니는 차마 동네로 들어서지 못한다.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로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 온 발자국만 나란히 있더구나.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놓은 저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그 길로는 차마 동네로 들어설 수가 없어 잿등 위에 앉아 한참이나 있었을 게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아침 햇살이 너무 눈에 시리더구나. 그 햇살이 부끄러워서라도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없더구나.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 그래 그러고 앉아있더니라." 어머니는 눈이 시려서라고 말한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 짧은 말 속에 어머니의 모든 감정이 담겨있다. 자식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슬픔과 고통이 아련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