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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문화교류와 서안(西安)
    동서문화교류와 서안(西安)目次Ⅰ. 서안(西安)의 자연환경Ⅱ. 동서교류와 서안의 발전Ⅲ. 도시의 유적과 유물Ⅳ. 맺음말Ⅴ. 참고문헌Ⅰ. 서안(西安)의 자연환경서안의 위치서안은 기원전 1134년 주(周)의 도읍으로 정해진 이래 중국 12개 왕조가 생겨나고 없어지고 했던 고도(古都)로서 중국의 중심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산맥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황하가 서안 평야를 감싸고 흘러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요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또한, 서안은 수?당 시대부터 중국동부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문화교류의 교차로로서 이슬람문화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이 안정된 통일 국가로서 번영을 구가했던 한나라와 당나라 때는 절정을 이루었으며, 고대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다.지리적 위치는 중국 섬서성의 성도(省都)로 섬서성 중부에 자리 잡은 관중분지에 입지하며, 수리적으로는 북위 34도~36도, 동경 108도~110도의 범위에 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400m이며, 연평균 기온은 10도 이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연평균 강수량도 500mm 전후로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하다. 면적은 9,983㎢, 인구는 662만 명이며, 9개의 구(區)와 4개의 현(縣), 64개의 진(鎭), 52개의 향(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안을 두르는 8개의 강 외에도 흑하, 석천하, 령하 등 거대 수맥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영농을 비롯한 경제활동을 촉진시켰으며, 일찍부터 왕도로서 발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Ⅱ. 동서교류와 서안의 발전360년에 걸친 중원(中原)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의 혼란상황이 6세기 말 수(隨)의 통일에 의해 종말을 맺게 된다. 이때부터 10세기 초 당의 멸망까지 중국은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일대는 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시기는청해(靑海)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토욕혼(吐谷渾)이 실크로드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서쪽으로 진출하여 토욕혼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38년 만에 멸망하고, 이어서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는 서역경영을 계승해서 완성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산재하고 있는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주요 거점에 이주(伊州), 서주(西州), 정주(庭州)를 설치하였다. 이 3개주는 오랫동안 당의 서역경영의 중요 거점이 되었으며, 타림 분지를 평정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여 천산산맥 근처의 실크로드 일대를 장악하였다.당의 실크로드의 안정된 지배에 따라 동서 문물 및 문화의 교류도 이전보다 더 활성화 되었다. 일례로 당 이전에 실크로드를 다니던 대상의 규모는 수백명으로 이루어진 큰 규모였지만, 당대에 대상의 규모는 12명 정도에 불과했다. 대상의 규모가 작아졌다는 의미는 안정이 더 보장되었다는 말이다. 즉 당이 앞서 실크로드일대를 장악하여 통제했기 때문에 상인들은 소규모의 행렬만으로도 안전하다고 느꼈다.당나라는 이처럼 많은 인력과 자금을 동원하여 서쪽 지방으로 진출해 실크로드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많은 공을 들여 실크로드에 진출하고자 하는 배경 및 원인에는 수도 서안의 위치와 관계가 깊다.서안이 있는 관중(關中)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관통하는 농업·유목 경계선의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즉 이 말은 관중평야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들을 연결되어 있는 오아시스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므로, 서쪽의 실크로드 일대가 이민족에게 점령당할 경우 수도 서안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관중지역의 황토고원은 유목·목축이라는 서로 다른 두 생활세계의 경계 지역에 있기 때문에 두 문화가 역대에 걸쳐 싸움을 벌인 지역이다. 만약에 실크로드 일대가 이러한 유목민족들에게 장악이 된다면 그들이 곧바로 중원으로 들어와 서안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과거 인구 백만의 도시 서안에는 수천의 이란인과 투였다고 한다. 이런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총칭하여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서안에는 의식주를 비롯해 각종 생활양식에 까지 이란풍의 문화가 침투해 들어갔다. 당시 장안에서 화려하게 유행한 서아시아풍 문화의 유행을 『구당서(舊唐書)』여복지(輿服志)에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개원년간(開元年間: AD 713-741) 이래 태상(太常)의 음악은 호곡(胡曲)을 존중하고 귀인의 식사는 모두 호식(胡食)을 올리고, 남녀 상관 할 것 없이 다투어 호복(胡服)을 입는다. 이의 근거로서 서안과 낙양에서 출토된 도용(陶俑)과 쿠차, 투르판 주변에서 발견된 불교벽화를 통해서 소맷부리가 작고 옷깃을 접은 웃옷을 입는 서역풍의 의복이 엄청나게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4· 5세기 이후 서아시아풍의 분식류가 관중지방 일대에서 급속히 유행을 하였다. 이에 따라 겨울밀이 본격적으로 재배를 하기 시작했다. 겨울밀이 계속 유행해 주식이 되어가자, 8세기말 세금제도인 조용조(租庸調)에서 양세법(兩稅法)으로 바뀌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Ⅲ. 도시의 유적과 유물역사에 의거한 선천적인 조건 덕분에 서안은 중국 최고의 문화보유지이다. 314개의 重點유산, 그 중 84개의 국가급/성급의 문화제와 4000여개에 달하는 고유적지, 출토된 문물 12만개 이상 등 세계의 유명 여행지의 한곳으로 뽑혀 '동방여행의 성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발굴된 진시황릉, 의 실제 모델인 현장 법사를 기리는 대안탑(大雁塔), 중원 지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지표가 되는 반파유적(半坡遺跡) 등은 너무나 유명하다. 또한 시내 중심부에 여전히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명나라 성벽은 전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옛 성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다.병마용갱 내부 모습1. 병마용갱(兵馬俑坑)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릉이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마천의 기록은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1세기가 지난 때에 저술된 것). 그는 진시황릉이 지하에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였으며 수은이 흐르는 100여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에 온갖 보물과 병사를 조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지하 궁전으로 지어졌으며 완공이 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대안탑 외관2. 대지은사(大慈恩寺)와 대안탑(大雁塔)수나라 대흥성에 있던 무루사(일설에 정각사)의 옛 땅에 648년(정관 22년) 황태자 이치가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건립한 것이 대자은사이다. 규모는 탑머리 10수원을 포함해, 건축물은 총수 1,897칸, 승려만 300경 3년)까지 11년에 걸쳐 40 여부의 경전이 한역되었다.눈여겨 볼 유물 중에는 680년 현장 법사가 석가불상을 조성해서 공양했던 불상의 대좌가 있는데 여기에 大唐龍朔(대당용삭)ㆍ二年三藏(이년삼장)ㆍ法師玄?(법사현장)ㆍ敬造釋迦(경조석가)ㆍ 佛像供養(불상공양) 이라는 5행 20자의 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대자은사에서 당나라때의 번성과 영광을 한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대자은사7층전탑, 이른바 대안탑이다. 원래 대안탑은 초창기에 약 90미터 높이의 5층전탑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탑은 높이 64미터에 기단의 길이 약 41.5미터(높이 4.5미터), 탑 1층은 한 변의 길이가 25미터 인데 층수가 높아질수록 약간씩 체감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각 층의 탑신에는 탱주가 1층부터 7층까지 8,8,6,6,4,4,4개씩 배치되었고, 두공, 첨차까지 치레하였으며, 서까래와 여러 겹의 옥개받침도 표현하여 현장탑과 비슷하면서도 더 한층 장엄한 편이다.1층 서족 출입구 위 미석(楣石)에는 불전도(佛傳圖)를 선각으로 새겨 당의 건축양식을 잘 알 수 있게 하는데 당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또 1층 출입구의 좌우벽에는 태종이 내린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함께 황태자시절의 고종이 기술한 술성기명(述聖記銘)이 각각 새겨 있는데 당대의 명필이자 명재상인 저수량이 쓴 글씨로 더욱 유명하다.이 탑은 652년 5층으로 건립되어 현장이 가져온 불경과 불상이 안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훼손되자 701년에 7층으로 개축되었다. 그후 4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반파유적 출토 채도3. 반파유적(半坡遺跡)반파 유형의 앙소문화(仰韶文化)의 표준유적이다. 서안의 동쪽 반파라는 마을에서 위수 강가 황토의 단구(段丘)에 신석시시대의 사람들이 건설한 계단식 마을로서 1953년에 발견되어, 1954∼1957년 5차에 걸쳐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여 집터 ·분묘 ·저장 구덩이 등의 많은 유구(遺構)와 유물을 발견하였다. 집
    인문/어학| 2014.04.28| 6페이지| 2,000원| 조회(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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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Ⅰ. 개관송산리 고분군 전경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제 25대 무령왕 및 왕비의 합장릉인 무령왕릉(武零王陵)을 포함하는 사적 13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소재하는 7기의 고분으로 구성된다.이곳은 백제 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공주에는 두 곳에 왕릉이 있으며, 하나가 시내로부터 서쪽 3리에, 다른 하나가 동쪽 5리 능현에 있다"고 한다. 이 기록 중 앞쪽의 “서쪽 3리 지점"에서 1971년 7월에 발견된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이처럼 송산리 고분은 동국여지승람 등의 사료를 확인시킨 유일의 중요 문화 유적이다.지금까지 발굴된 고분 7기는 높이 130m의 송산(松山)을 북쪽의 주산(主山)으로 한 남쪽 경사면에 분포되어 있는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호분, 6호분,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공산성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곰나루의 금강이 감싸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계룡산이 펼쳐져있다Ⅱ. 주요 고분고분들의 내부 구조는 크게 석실분(石室墳)과 전축분(塼築墳)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송산리 고분군의 북쪽 상부 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4기의 고분과 5호분은 현실(玄室)과 연도(羨道)를 방형으로 다듬은 돌로 축조한 궁륭상식 천정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며, 남쪽 하부의 나머지 두 고분, 즉 무령왕릉과 6호분은 벽돌로 쌓은 횡혈식전축분(橫穴式塼築墳)이다.1. 석실분(石室墳)1) 송산리 1호분송산리 1호분 송산리 고분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이다. 남향에서 약간 동으로 치우친 산의 경사면에 묘광을 파고 그 안에 벽돌 형태의 할석으로 현실과 연도를 축조한 횡혈식 석실묘인데 천정은 궁륭상식으로 축조하였다.현실은 남북이 약간 긴 장방형으로 동서의 너비가 177㎝, 남북의 길이 258㎝이며, 현실의 네벽은 벽돌 형태의 점판암을 이용하여 쌓고 높이 100㎝ 정도부터 안으로 내경하면서 사방의 벽을 올려 궁륭상의고하게 폐쇄하였다. 현실의 4벽과 연도, 천정 등의 표면에는 모두 두껍게 백회를 발랐다. 현실 바닥에는 40~50㎝ 너비의 판석을 깔고 그 위에 강자갈을 15㎝두께로 덮었다. 이외에 연도 밖까지 연결되는 배수로를 만들었다.3) 송산리 5호분송산리 5호분 송산리 고분군의 동쪽 구릉의 6호 전축분과 무령왕릉에 함께 위치하고 있다. 남향 경사면에 묘광을 만들고 그 안에 벽돌 형태의 할석으로 현실과 연도를 축조한 횡혈식의 구조로, 천정은 궁륭상식으로 만들어졌다.현실은 동서 너비 326cm에 남북 길이 345㎝로서 거의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사벽은 점판암을 벽돌 형태로 다듬어 쌓으면서 130cm의 높이에서 약 25°가량 안쪽으로 경사를 두면서 쌓아 올렸고 그 위에 마무리로 1매의 판석을 얹었다.연도는 현실의 정면 동쪽에 편재하고 있다. 현실의 벽면과 바닥, 연도의 좌우 벽면 전체는 백회를 발랐지만 조사할 때 이미 대부분이 탈락되어 있었다.현실 내에는 벽돌로 만든 2개의 관대(棺臺)가 남아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238.5cm, 동쪽의 것은 180cm정도여서 동쪽에 있던 관대의 주인이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도는 현실의 입구에서부터 90cm 간격을 두고 벽돌을 종횡으로 하여 이중으로 쌓아 폐쇄하였다.송산리 6호분2. 전축분(塼築墳)1) 송산리 6호분무령왕릉의 전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방형 전축분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백제 전축분 2기 중의 하나이다.현실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 단실(單室) 구조이며 현실바닥은 벽돌을 깔았고 동쪽으로 치우쳐 벽돌로 만든 1개의 관대를 설치하였다. 묘실을 축조하기 위하여 먼저 필요한 만큼의 넓이로 구덩이를 파고 벽돌을 가지고 갈대를 엮은 모양으로 상면(床面)을 이중으로 쌓고 또 연도 입구 중앙 가까이에 홈을 파서 묘실 바닥 밑에 배수구를 시설해 연도 바닥에서 전벽(前壁) 밑을 통과하게 하였는데, 경사도(傾斜度)를 두어 배수가 잘 되도록 하였다.현실의 4벽은 문양전(文樣塼)을 가지고 쌓아 올렸는데, 남북의 양벽은 수직93cm, 남북 간 너비 315cm의 규모이다.현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연도는 길이 290cm, 너비 104cm, 높이 145cm의 규모이고,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의 축소판으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방법도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닥은 현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현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연도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에 벽돌을 쌓아 304cm의 높이로 연도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연꽃무늬 외에도 송산리 6호분에서 사용된 전범문(錢范文)의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에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cm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벽체는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만들었다. 벽면은 좌우 벽을 상부에서 곡률을 주어 정상부에서 만나고, 전·후벽은 수직으로 하여 터널형 천정을 축조하였다. 전축은 뉘어쌓기와 세워쌓기를 반복하여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으로 축조되어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었으며, 위치에 따라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과 연화문을 다르게 배열하였다.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영창을 만들었다. 이외에 현실 벽에는 대형의 철정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현실 바닥을 1단 높여 관대를 시설하면서 그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였다.Ⅲ. 무령왕릉 출토 주요 유물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쌓여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석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2cm이고, 너비는 각각 14cm, 13.6cm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인동문(忍冬文)으로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밑에 달린 뿌리는 U자형으로 휘어졌으며 아래위로 2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엔가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금제관식(왕비)②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높이 22.6cm, 너비는 13.4cm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인동문이 있고 병위에는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③ 금제뒤꽂이, 국보 제159호금제뒤꽂이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cm, 상단의 폭은 6.8cm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개의 꼬챙이쪽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습이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새겨 넣었다. 새의 머리와 날개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⑥ 금제귀걸이(왕비), 국보 제157호금제귀걸이(왕) 길이는 11.8cm, 8.8cm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록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금제9절 목걸이(왕비)⑦ 금제 9절(7절) 목걸이(왕비), 국보 제158호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cm, 16cm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 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다리작명 은팔찌(왕비)⑧ 다리작명 은팔찌(왕비), 국보 제160호왕비의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cm, 고리지름 1.1cm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
    인문/어학| 2014.04.28| 11페이지| 2,500원| 조회(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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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의 형태와 비문 내용의 의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Ⅰ. 머리말Ⅱ. 본문Ⅲ.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머리말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번지에 위치한 이 전시관은 충주 고구려비가 도로에 인접해 있고, 비 가림 시설도 없어 보존에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라 고구려비를 보존할 목적으로 2012년 7월 19일에 개관하였다.전시관의 주요 전시물로는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와 탁본, 광개토대왕릉비 탑영 원본이 있으며, 고구려의 각종 생활유물과 고분 벽화를 소개하고 북한 국보 제8호인 안악 3호분에 대한 전시도 하고 있다. 그리고 개관 기념 전시회도 2012년 10월 19일까지 열릴 예정이다.현재과거Ⅱ. 본문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4월 8일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단국대학교 조사단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 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이며 비문 내용의 중요성으로 인해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이 비는 높이 203cm, 폭 55cm이며 자연석(화강암)을 사각형 기둥처럼 깎은 석주형(石柱形)으로써 각 면을 고르게 다듬은 다음 표면에 글자를 새긴 사면비(四面碑)인데 그 형태가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하다. 발견 당시 비문은 오랜 세월로 인한 마모와 이끼가 덮여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으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서체는 예서(隷書), 또는 해서(隷書)를 사용했다.비문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 하지만 양국의 관계를 여형여제(如兄如弟), 즉 형제관계로 말하고 있고 고구려 태왕이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으로 칭하고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문의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동이는 원래 중국(中國)에서 그들의 동방에 사는 이민족(異民族)을 부르는 칭호로 중국 주변의 민족들을 오랑캐로 낮추어 부르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단어가 충주 고구려비에 나타나있는 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신라를 자기의 주변에 있는 하위국가로 봤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목적은 비문 내용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 볼 수 있다. 비의 건립 목적에 대한 연구경향은 다섯 가지로 나뉜다.첫째, 개인의 공적비(功績碑)로 보는 견해다 태자공(太子共)이 신라와 싸워 이긴 무훈을 기념한 공적비로 보는가 하면, 다우환노(多?桓奴)의 공적비, 장수왕의 공적기념비로 파악했다. 그러나 비문의 중요한 내용은 고려태왕과 신라매금이 만난 사실이며, 태자공과 다우환노의 행위는 그에 따라 왕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부속적 성격이 강하므로 비문의 전체 내용을 특정 개인의 공적비로 의미를 한정시키기는 곤란하다.둘째, 정계비(定界碑) 혹은 척경비(拓境碑)로 규정한 견해다. 고구려가 중원지방 진출 후 신라와 국경을 확정하면서 세운 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문 내용의 핵심은 고려태왕이 신라매금과 만나 의복 등을 주면서 친선관계를 도모한 것으로 정계비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계립령과 죽령을 경계로 대치했으므로, 만약 정계비라면 오히려 이 지역에 건립함이 나을 것이다.셋째, 국왕의 순수비(巡狩碑)로 이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비의 건립연대를 문자명왕) 대로 보고 『삼국사기』 문자왕 4년 ‘남순수망해이환(南巡狩望海而還))’ 기사와 관련지었다. 그러나 비문의 5월 기사를 문자명왕 4년조의 순수와 연결시키기는 곤란하며 12월 기사와 좌측면에 국왕의 행차가 드러나지 않아 비문 전체를 순수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넷째, 고구려와 신라간의 회맹비(會盟碑)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태왕과 신라매금이 만났고, 양국의 대외관계가 드러나는 비문의 내용을 감안할 때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비문에 맹(盟), 약(約), 서(誓) 등의 용어나 희생(犧牲), 삽혈(?血) 등 맹을 규정하는 의례가 확인되지 않아 회맹 본래의 개념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다섯째, 비문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형제로 인식한 데 주목, 5세기 전반과 달리 양국관계가 소원해지자, 기존의 양국관계의 재확인 및 유지를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 보는 견해다.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영향권에서 이탈해간 신라를 회유?포섭하여 이전 관계로의 회복을 호소하고자 추진된 회동, 즉 장수왕의 정치적 의지의 산물로 파악했다.
    인문/어학| 2012.12.11| 3페이지| 1,000원| 조회(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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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인 오녀산성의 축성기술과 부속시설
    目次1. 머리말1) 오녀산성 개관2) 오녀산성의 위치와 주변 환경2. 오녀산성의 축성기술1) 굽도리공법2) 그렝이공법3) 옹성4) 바깥벽의 겉쌓기 속쌓기5) 안벽의 겉쌓기와 북주기(培土)6) 들여쌓기3. 부속시설1) 성문2) 장대(將臺), 망대3) 연못과 우물4) 차단성5) 성가퀴4. 맺음말※ 참고문헌1. 머리말1) 오녀산성 개관그림 1오녀산성(五女山城)(그림 1)은 고구려의 왕성 중에서유일한 산성으로 서기 3년(유리왕 22)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 최초의 왕성으로 기능하였다. 오녀산의 정상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총 둘레 2440m의넓은 평탄지로서 천혜의 요새지다. 산성은 북쪽과 동쪽에 연결되어 있는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가장 높고 험준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오녀산성의 축성기술과산성의 부속시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2) 오녀산성의 위치와 주변 환경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길림성 환인현(桓仁縣)오녀산(五女山)에 소재한 고구려의 성이다.오녀산의 서남쪽에는 환인분지가 있고 동남쪽에는혼강(渾江)이 있다. 오녀산의 서쪽 산기슭에서 시작되는 좁고 험한 골짜기는 통화(通化)로 흐르는혼강은 여러 산굽이를 지나 오녀산 기슭에 이르러가파른 벼랑 사이를 통하여 환인분지로흘러든다.???환인에서 집안(集安)으로 가려면통화로 통하는 육로와 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를 이용해야 했으며, 집안에서 심양 방면으로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인을 거쳐야 했다. 이와같이 오녀산성은 집안과 서쪽 지방을 연결하는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다.2. 축성기술험준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서ㆍ남ㆍ북은 주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반면, 지세가 험준하지 않은 동쪽과 동남쪽에는 주로 돌로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의 축조공법에는 굽도리공법과 그렝이공법, 들여쌓기, 겉쌓기와 속쌓기, 북주기가 확인되었다. 또한 산성의 동문에서는 옹성(甕城)이 보였다.1) 굽도리 공법(그림 2)그림 2기단부를 조성할 때 계단식으로 경사지게 쌓는방법으로 산성에서는 협곡에 쌓을 때와 높은 성벽을축조할 때 많이 적용되었다. 굽도리축조공법의 기본은높은 성벽을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기초를 한 뒤 먼저 큰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만든 뒤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있도록 하였다.?기단부를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성돌을 약간씩 뒤로 물려 쌓는 것이다.2) 그렝이 공법(그림 3)성벽을 쌓아가다 나타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아가는 돌들을 그 바위가생긴 꼴대로 그려 쪼아내고 다듬어서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것을 그렝이공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법은 장수왕릉이나 태왕릉에서도 볼 수 있다.원리는 간단하나 이 기법을 구사하는 기능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3) 옹성(그림 4)오녀산성의 동문 터에서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면서 한쪽 벽이 다른쪽 벽을 모나게 감싸서옹성(甕城)을 이루었다. 이런 형식은 오녀산성과 국내성에서만 보이므로 고구려 옹성으로는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4) 들여쌓기(그림 5)성벽을 쌓아 올리며 한 단을 쌓을 때마다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는 축조방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법은 대부분의 고구려 성에서 볼 수 있는데 오녀산성에도 그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그림 3그림 4그림 55) 바깥벽의 겉쌓기 속쌓기(그림 6)겉쌓기는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우선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으로, 머리가 작거나 뾰족한 쪽을 벽 안쪽으로 놓이도록 놓는다. 이 때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절한다. 즉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뒷부분의 두께가 엷어지고 경사가 없는 곳은 앞 뒤 양쪽의 두께가 같아진다. 한편 겉쌓기 한 쐐기꼴 돌을 가지런히 놓았을 때 성돌이 세모꼴이기 때문에 성돌과 성돌 사이 안쪽에 자연히 세모난 틈이 생기게 된다. 속쌓기란 이 세모난 틈에 돌을 꽉 맞도록 끼우고 그 틈새를 작은 돌맹이와 깨트린 돌로 채우는 것이다.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한 것은 성벽 안에 속쌓기한 돌도 성벽 겉의 쐐기꼴돌과 거의 같은 힘을 받게 한다.그림 66) 안벽의 겉쌓기와 북주기오녀산성 성벽 안벽은 바깥벽에 비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첫째, 바깥벽 겉쌓기는 주로 쐐기꼴돌을 사용한데 반해 안벽은 주로 약간만가공한 돌 이나 널돌을 사용하여 바깥벽에 비해 공력을 덜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안벽도 기단부는 큰 돌덩이를 사용한 곳도 있었다.둘째, 안벽은 들여쌓기를 하지 않았다.셋째, 안벽은 대부분 북주기를 했다. 북주기는 기단부만 한 지점도 있고 성벽 꼭대기까지전부 한 곳도 있다.넷째, 성벽 안쪽에 북주기를 하면 산비탈과 성벽 사이의 위부분이 자연히 편편하게되는데 이 곳이 말이 달릴 수 있는 길(말길)이 생긴다. 이렇게 해서 성벽 위에는 너비 2m쯤 되는 말길(馬道)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다섯째, 남벽의 성벽 기단부에 북주기를 한 바깥쪽은 위 아래로 도랑이 파져있는데 너비 2m, 깊이 1m 쯤 된다. 이 도랑은 성벽 기단에 배토할 때 파낸 것인데 비가 올 때는 물이 흘러내려가 성벽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였다.3. 부속시설1) 성문-동문남벽에서 110m 떨어진 동벽 남단에 위치하였는데, 문의 너비는 4m이다. 성벽양끝이직각으로 엇갈려 만나고 성문 옆의 북벽은 반원형을 이루면서 성문 안쪽을 감싸고 있다.이러한 형태의 성문은 기능상으로는 성문의 방어를 강화하는 옹성의 역할을 다한다는점에서 어긋문식 옹성으로 분류되지만, 형태상으로는 성문 앞쪽을 가로막은 구조물이없다는 점에서 옹성으로 분류하지 않기도 한다.-남문남벽이 동벽과 만나는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는 허물어져 그냥 트여 있는데, 너비는 3m정도이다.-서문서쪽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10m 정도이다. 양끝은 험준한 절벽으로 사이사이에 돌멩이를 붙여 축조하였는데, 허물어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성문 바깥쪽에석벽을 여러 겹 축조하고 남쪽이나 북쪽에 문을 설치하여 지그재그형으로 뚫고 지나가도록하였다. 여러 겹의 석벽으로 이루어진 장방형 옹성문(甕城問)이다.2) 장대(將臺), 망대성 꼭대기 동남쪽 끝에 속칭 점장대(點將臺)가 있는데 해발 806.32m 지점이다. 위에는자연적으로 형성된 석대(石臺)가 있다. 석대 표면은 평평하고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석대 위에는 인공적으로 파낸 둥글고 작은 구덩이가 하나 있는데 지름 10m, 깊이8cm이다. 기둥 구덩이가 남은것일 가능성이 있다. 석대의 너비는 15m, 길이는 17m이다.이 외에도 산꼭대기 주봉에서 사방 둘레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또 다른 자연 석대들도있다. 소점장대, 서남모서리 석대,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와 북쪽 절벽 위의 석대 등은모두 산 아래 동정을 살피는 데 알맞은 곳이다. 그 가운데 서문 남쪽 절벽 위의 석대가장자리에는 담장이 낮게 절반 이상 쌓여 있다. 현재 남은 것은 1~3층으로 길이 약 2m,높이 0.3~0.5m이다.3) 연못과 우물천지(天池)라고 불리는 연못이 서벽 중앙부에 가까이에 있다. 장방형으로 길이 14m, 너비6m, 깊이 2m이며, 쐐기형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연못 남쪽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우물의 벽은 저수지와 마찬가지로 쐐기형 돌로 쌓았다. 우물의 물과 연못의 물은 서로통한다. 한편 동벽 중앙부 부근에도 샘이 하나 있는데 물은 얕다. 산성의 수원 확보는 전
    인문/어학| 2012.12.11| 5페이지| 1,500원| 조회(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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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도사 성보 박물관 소개와 교육프로그램
    통도사 성보박물관Ⅰ. 박물관 소개Ⅱ. 괘불 특별전, 기획 전시실Ⅲ. 사회문화교육Ⅰ. 박물관 소개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전문 박물관으로 국내 박물관뿐만 아니라 세계 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풍부한 불화 자료를 보유한 국내 박물관으로는 유일한 불교회화전문 박물관이다.통도사 성보박물관은 1987년 10월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약 80여 평 규모의 독립 전시관 개관하였고 이와 함께 유물의 수집, 보존, 연구의 기능을 담당하는 체계적인 박물관으로 발전하여 국내 사찰 성보박물관의 효시가 되었다. 1987년 개관 이후 사용되던 전시관은 전시 유물의 증가와 박물관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1994년부터 정부의 보조와 사찰 자체 비용을 투입하여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춘 대규모의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여 1998년 10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신축 박물관은 5,000여 평의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총 1,300여 평의 실내 전시 공간과 학예 연구실 그리고 4개의 유물 수장고와 자료실, 보존 관리실, 강당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유물은 국보 1점, 보물 8점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 32점을 포함한 1만여 점으로 이는 통도사 전래의 유물을 비롯하여 수집과 기증을 통하여 입수된 것이다.소장 유물은 그 내용 면에서 선사 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유형별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특히 그중에는 400여 점에 달하는 불교 회화가 포함되어 있다. 불화는 밑그림인 초본을 비롯하여 소형 사경변상도에서 초대형 괘불에 이르기까지 분야가 다양하다. 이들 불교 회화를 중심으로 전시실을 운영함으로써 불화 전문 박물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걸쳐 모두 4개실이 운영되고 있다.Ⅱ. 괘불 특별전, 기획 전시실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괘불 특별전이다. 괘불은 건물의 1, 2층을 연결하는 중앙홀에서 전시되는데 높이 12m 이상 되는 대형 괘불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대가 마련되어있는 곳은 현존 국내 박물관으로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유일하다. 괘불은 사찰에서 야외법회 때 걸어서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로 초대형 크기라는 괘불의 특성으로 인해 개인이 필요에 의해 꺼내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외법회 때 걸려고 해도 날씨에 따른 많은 제약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보기 힘든 불화이다. 따라서 괘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불교행사를 직접 찾아다니거나 기다릴 필요없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을 방문하여 쉽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박물관 개관 이래 괘불 특별전을 매년 2회에 걸쳐 6개월 주기로 개최하여 전국 각 사찰의 괘불이 정기적으로 교환 전시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제 26회 괘불 특별전 장곡사 괘불탱은 올해 10월 21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통도사 성보박물관의 기획 전시실은 국내외 불화 특별전, 불교 관련 사진전 등 괘불 특별전과 더불어 불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를 해왔다. 현재 진행중인 전시는 연당 조해종 초대전이며 6월 3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Ⅲ. 사회문화교육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을 통하여 전통문화를 알고 또 직접실습에 참여하여 재현하는 등의 기회를 통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전통공예실기를 통하여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개인의 취미와 소질을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문화강좌의 운영문화센터에서는 불화그리기반, 서각공예반, 단청반 등 유료강좌와 문화자원봉사회 등을 대상으로 다도반 등을 개설하고 있다. 문화강좌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불화나 서각 등 특색있는 실기교육 위주의 강좌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강좌를 통해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한 수강생들의 작품을 모아 해마다 열리고 있는 성보예술제 기간을 통해 수강생 작품 전시회를 갖는다. 성보예술제는 해마다 10월 초를 전후로 열리고 있는데, 불화 작품과 서각공예 작품전이 개최되며, 부도원에서는 사라져 가는 전통다례의 맥을 잇는 헌다제의 재현도 행해지고 있다.◎ 박물관대학의 운영통도사 성보박물관의 문화사업 중 가장 활성화 된 것이 박물관대학이다. 1999년 4월에 첫 개강했다. 박물관대학은 그 동안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어도 직접 느끼고 체험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지역민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기회가 되고 있다. 강의일정은 주로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민속학, 불교미술 등 한국 미술 전반에 걸친 1년의 과정에서 강좌가 개설되어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운영되고 있다. 또, 수료 후 계속되는 과정으로 박물관대학 연구반에서는 한 학기별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데리고 좀 더 심화된 내용으로 강의가 진행될 수 있도록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인문/어학| 2012.12.11| 2페이지| 1,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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