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중국의 서구문화 수용양상과유교지식인의 대응양상1. 서론1840년과 1860년에 벌어진 1·2차 아편전쟁을 통하여 서양 문화와 사상을 접하게 된 이후, 중국에서는 기존의 유교와 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 대신 서양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서구문화 수용양상은 유교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서구로부터 받은 충격은 ‘전통과 현대’, ‘중국과 서양’의 차이와 대립을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들이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과 그에 따라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2. 본론1) 중국의 서구문화 수용과정(1) 양무운동중국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을 겪으면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 인식하였고, 그에 따라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개혁을 추구하려 하였다. 양무파는 ‘중체서용’을 내세워 전통적인 유교관료의 통치나 왕조체제를 온존시키는 동시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제일 먼저 군비의 근대화와 군수공업의 육성을 목표로 서양식 무기와 군수품을 도입하였지만, 오로지 그들의 기술만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하면서 양무운동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자강’을 위해서는 산업과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사회 제도의 근본적 개혁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2) 변법유신전통 사상과 제도는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려 했던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난 이후, 강유위, 담사동, 양계초 등이 중심이 된 변법유신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청나라 사회전반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강유위는 ‘공자개제고’를 통해 공자와 중국의 전통적 요소가 서학과 일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중학과 서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중국문명과 문화를 포기 하지 않는 중체서용론의 연장선상에 그치고 말았다. 변법유신의 실패는 전통질서와 전통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신해혁명과 5·4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3) 신해혁명과 5·4 신문화운동변법유신이 실패하고 의화단의 난과 서구 열강에 대한 청조의 기만적인 정치개혁에 대항한 신해혁명을 통하여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타도공가점’을 내세운 유교 타도운동이 확산되었다. 중국을 부정하고 서양을, 전통을 부정하고 신문화를 지향하는 총체적인 문화의 전환을 꾀한 5·4 신문화운동은 ‘전반서화론’를 제기하여 유교를 전면적으로 배척하고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 속에 서구의 기본 정신을 주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 중국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조가 나타났고, 서구화론자의 일부는 마르크스주의로, 국수파는 중국 문화본위파와 현대신유가로 전향하였다.(4) 현대 신유가동서문명의 우열 비교로 시작하여, 동서문화의 조화여부를 살피고, 이 둘의 관계를 정의하는 단계로 진행된 ‘동서문화 논쟁’과, 과학으로는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생관파와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생관의 문제에 응용하여야 한다는 과학파의 대립에 의한 ‘과학과 현학 논쟁’이라는 두 차례의 논쟁 과정에서 현대 신유학이 형성이 되었다. 이후 전반서화론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자 현대 신유가들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현대 신유가들은 동서문화의 융화와 전통과 현대의 연결에 관하여 연구하였고, 이후 4세대의 젊은 학자들은 유학의 재해석을 통하여 서양의 문화적 성과와 중국의 인문정신을 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중국대륙에서 유학은 이미 봉건시대의 유물로 취급되었으나, 문화대혁명 기간에 다시 혹독하게 비판받게 된다.(5) 문화대혁명 이후1976년 모택동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공자 사상 중 극복할 부분과 계승할 부분을 구분하자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중국은 낙후한 현실에 대해 각성하며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유교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전통과 서방, 민족과 사회주의를 논의하는 문화열이 촉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서체중용론, 철저재건론이라는 네 유파가 형성되었다.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과 중국공산당은 전통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중국적인 특수성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화와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 비판계승론을 취하였다.2) 유학부흥론과 경제관현대신유가는 전통사상에 서구사상의 일부를 가미하는 방법으로 현대적 사상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유학부흥론은 초기에는 송명리학을 중심으로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함으로써 유학의 현대화에 일조하였고, 대체적으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유학부흥론은 일본, 대만,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 후기 유가 사회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목격하면서 유교자본주의라는 경제관을 공유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가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에 장애가 된다는 막스베버의 비판에 맞서, 유교의 금욕과 근면 윤리, 그리고 높은 교육열과 같은 유교의 전통문화가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위기상황 이후 유교 자본주의가 설득력을 잃자 중국은 ‘아시아적 가치’ 대신 ‘중국의 가치’에 관심을 갖고 국학 진흥이라는 명목 아래 유교 연구 지원을 계속하며 개혁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3)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문화대혁명 당시 모택동을 중심으로 불평등 현상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평등 원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등소평이 복권하여 개혁을 추진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문제점을 해결하였고,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위해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다른 국가들과의 국교를 정상화 하는 등 대외 개방을 가속화하였다. 모택동이 농촌이나 농민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평등 원리에 충실한 반면, 등소평은 도시나 시민을 중심으로 현실적으로 불평등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도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통한 부의 향상을 중시하였다. 등소평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해방사상’과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중국공산당은 시장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를 가리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1989년, 시민들의 정부의 부패에 대한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강택민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며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적인 개혁 개방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