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다인문과학부 1001356이 지 혜영화관 앞에서 ‘효자동 이발사’의 포스터를 보았을 때, 관객들은 영화에 어떤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송강호가 어린 아이(이재응)을 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그 시대에 있었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휴먼적인 내용을, 혹 영화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있던 사람이나 역사적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은 이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부조리했던 상황을 현대인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길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휴먼스토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송강호의 연기를 통한 웃음과 조금의 감동을, 시대적 상황을 주목했던 관객들에겐 심각하고 진중하게 다뤄야 할 역사적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희화화된 영화의 모습에 실망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을 과하지 않은 상징을 이용해 심어놓았다. 영화의 곳곳에 숨어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의식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내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우선, ‘효자동 이발사’라는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효자동은 청와대가 위치한 곳으로써, 권력의 핵으로 상징이 되는 청와대에 거주한 이발사의 시선으로 영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장소이다. 그러면 그 많은 직업 중 왜 이발사일까? 이발사는 당시 일개 민중으로써 나라의 권력층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던 직업이였기 때문이다. 이미 여기서 단순히 시대적 배경에 가미된 부(父)정에 관한 스토리가 아닌 권력층과 민중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임을 예상할 수 있다.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효자동의 이발사인 성한모(송강호 분)가 대통령의 전용 이발사가 되면서 겪은 일들이다. 청와대가 위치한 효자동의 이발사인 성한모는 매우 소심하고 어리숙한 인물로 당시의 소시민들을 대표한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충직하고 정직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는 청와대를 위한 일이 곧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간첩을 잡으려 시도하고,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결국은 아들마저 스스로 위험에 빠트리는 등 권력 순응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청와대에서 고위 권력층들과 함께 만찬자리마저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한모는 단순히 그들의 입맛에 맞춘 들러리 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또한 경호실장 등 권력층에게 부당한 대우와 일을 당했을 때도 자신의 의견 피력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없이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며, 모질게 내동댕이 쳐진다. 이는 당시의 독재체제하에 권력의 가장 가까이에서 큰 고통을 받고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소시민들의 억울한 상황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다.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 성한모의 아들인 낙안이가 고문을 받는 장면이다. 극 중에서 낙안이는 전기고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어린 낙안이가 고문을 받는 이유는 ‘간첩’이라는 죄목이다. 영화를 보았듯이 낙안이의 죄목인 간첩죄는 간첩을 명목으로 한 권력층들의 횡포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죄목이 아닌 허구의 것이다. 이 허구의 것을 소시민들에게 강요하고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고 독재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려는 권력층들의 횡포인 것이다. 이러한 횡포를 통해 억압받는 어찌보면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 죄없는 순진무구한 아이들로 대표되는 낙안이가 전혀 전기 고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국현대대중문화 2차 과제물오우삼 감독의 영화 속 ‘오우삼 스타일’Ⅰ. 서론영화감독 중에는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주관을 드러내는 감독들이 있는가 하면, 한 가지 장르를 고집하며 자신의 주관과 가치관을 투영시켜 그려내는 감독들이 있다. 홍콩 느와르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오우삼 감독은 후자에 속한다. 오우삼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하는데 이는 그의 주 활동무대였던 홍콩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그리고 할리우드 진출까지 이뤄낸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홍콩 느와르의 출발점이라 불리우는 을 시작으로 홍콩 느와르의 최고 정점이자 대표작으로 뽑히는 까지 확고한 ‘오우삼식’ 영화를 통해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알리고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의 성공으로 할리우드 진출의 계기를 마련한 오우삼 감독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관철하며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대열에 오르게 된다.지금의 오우삼 감독을 만들어 준 것은 ‘홍콩 느와르‘라 불리우는 장르인데, 이는 한국의 언론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로 홍콩판 액션물을 가르키는 말로 본 어원인 ’느와르‘에 오우삼으로 대표되는 지역적 특색을 가미한 ’홍콩 느와르‘로 탄생하게 된 새로운 단어이자 장르이다. 홍콩 느와르하면 오우삼, 오우삼하면 홍콩느와르 식의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오우삼은 홍콩느와르의 대표 감독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의 감독이다. 이처럼 오우삼의 영화가 당시 홍콩에서 큰 유행코드가 되고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당시 홍콩의 정세 상황과 결부지어 볼 수 있다. 당시 홍콩은 역사적 사건인이라 할 수 있는, 영국으로의 99년 조차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와 비슷한 상황이였고, 1984년부터 홍콩은 중국과 영국의 반환 협정을 체결중에 있었고, 1997년 공식적으로 99년만에 반환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일종의 ’영웅‘적 히스테리즘을 느끼게 되는데, 자신들에게 무언가 탈출구가 되어줄 카타르시스가 필요로 트릭을 일컬음)라 불리우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연출 기법면에선 오우삼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고속촬영과 슬로모션, 발레액션 등이 그 예이고 이 밖에도 쌍권총을 난사하는 주인공과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성모마리아 등이 등장하는 것, 그림자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는 상황 설정 등을 들 수 있다. 한결같은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고수하며 그의 영화들은 계속 이어진다.이처럼 오우삼 감독의 영화가 갖는 그만의 독특한 ‘오우삼 스타일’은 오우삼 감독을 지금의 전 세계적 지위의 감독으로 만들어주었고,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자신의 영화에 열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된 클리셰들, 즉 오우삼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오우삼의 영화에서 자신들이 기대한 것을 보길 원한다. 이는 곧 영화의 성공과 영화인들의 만족감의 직결과 연관이 있는데 실제 홍콩에서 을 끝으로 오우삼은 액션배우 장 끌로드 반담과 랜스 헨릭슨을 앞세워 으로 본격적인 할리우드 데뷔를 신고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오우삼의 스타일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범작에 머물고 말았다는 평가와 함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다음 영화였던 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은 오우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양웅대립구도의 재현이었지만, 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오우삼식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는 평범한 할리우드식 액션물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1997년, 존 트래볼타,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그의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우삼만의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이는 전세계적 흥행으로 이어진다.오우삼 감독은 아시아 출신의 영화 감독이라는 핸디캡을 넘어 할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 세계적인 액션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취향에 맞추어 자신의 색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켜 온전히 서구의 입맛에 맞추지 않고 오우삼 만의 스타일로 승부해 자신의 영역을 넓힌 감독이란 점에 의의가슴을 파고들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범죄 세계를 무대로 남성적 유대감을 강조하는 액션물을 지칭하는 ‘홍콩 느와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동안의 몸을 통한 액션이 아닌 가장 현대적인 무기인 총을 들고 싸우는 등장인물들이 홍콩의 암흑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의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홍콩의 식민지 특수성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토대로 동서양의 물류 허브로서의 역할을 하며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룬 홍콩은 그와 동시에 뒷골목 시장, 즉 암흑시장이 함께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홍콩의 상황적 특수성을 토대로 오우삼의 영화에는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총격전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오우삼 감독의 어린시절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일가족은 공산화된 중국을 떠나 1951년 홍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본토를 떠나 당시로서는 사회주의 중국의 한 귀퉁이에 자본주의의 섬으로 남게 된 홍콩에서의 오우삼 가족은 너무나 가난해서 낡은 오두막집을 전전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1953년 대화재로 오두막마저 불타버려 그후 몇 년간을 거리에서 집 없는 노숙자로 살아야만 했다.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10년 동안 투병 중이었고 오우삼의 어머니가 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 오우삼은 어린 시절을 폭력과 마약, 매춘이 만연된 빈민가에서 보내게 된다. 오우삼은 자라면서 깡패들의 패싸움이나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대결을 가까이에서 접했다. 이처럼 유년시절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형편 속에서 자연스레 보고 겪게 된 암흑가의 형상들과 방황이 영화 속 암흑가 배경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젋은 시절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뒷골목의 술집들을 많이 다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은 물론, 의 주인공인 아쏭 역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 청부업자로 등장하는 등 홍콩의 뒷골목 세계를 배경선의 개념보다는 주인공들의 영웅적 행태와 우정, 형제애 등을 더 우위에 둔 오우삼의 생각을 기반으로 한 짜임인데, 이로 인해 그의 영화 속에선 단순히 경찰은 선한 사람, 무기 밀매자는 악한 사람만이 되는게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의 기저로는 당시 홍콩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들 수 있다. 1997년 중국 대륙으로의 반환을 앞두고 80년대부터 홍콩은 본격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적 상황에서 벗어나 반환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협상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점차 격동하던 홍콩의 젋은이들과 홍콩인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렸고 정체성의 혼란마저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돌아가야 할 중국 대륙에서는 천안문 사태가 터졌고, 큰 유혈 사태를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 속에 자연스레 홍콩인들은 자신들을 이끌어 줄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바라게 되고 자연스레 이러한 기대에 부흥한 오우삼 영화 속 주인공들의 영웅적 면모에 열광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시대적 요인에서 벗어나 오우삼 개인적 상황에서도 비춰볼 만한 점들이 있다. 우선 이러한 클리셰들의 기저가 될 만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겪은 수많은 어두운 경험들이 오우삼 내면의 영웅적 면모를 이끌어 냈고 이는 곧 영화 속에 표출된 것이다. 그의 청년기를 사로잡았던 당대의 현실이 바로 그것인데,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의 홍콩은 그에게도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 대륙의 공산당원과 국민당원의 충돌로 촉발된 두 번의 대규모 시위를 비롯해서 이외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갱들의 세력다툼도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영웅의 필요성에 대한 욕구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할 당시 장철 감독하에서 배움을 받은 경험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장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장철의 무협영화 전편에 흐르는 우정과 의리, 명예에 대한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면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듯이 합이 맞아 떨어지고, 지나치게 말하자면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 낸다. 총알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급박한 상황의 총격씬이 아닌 마치 우아하고 고상한 발레를 보는듯한 이런 발레액션은 오우삼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고속촬영 기법을 통해 이루어 졌는데, 지금에서는 보편화 된 고속촬영 기법을 당시에 적절히 차용해 영화 속에 분위기를 극대화하며 구현해 낸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총격전 중 가장 중요한 순간에 느려지는 화면을 통해 일원적 앙상블, 즉 비일치의 원리를 이용해 공감적 충돌을 유도해 영화 속 긴장감과 비장미를 극대화 시키는 의도를 가진다. 숨막힐 듯이 안무화된 총격전과 정교한 편집은 오우삼의 액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증거하며 세계 곳곳에서 추종자들을 낳았다. 과 에서 등장인물들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총격전이 벌어지는 주요 무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성당이다. 빈번히 등장하는 비둘기와 성모마리아상과 촛불을 중요 시각적 모티브로 이용해 시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오우삼은 특별히 영화의 내용에 상관없이 분위기에서 비장함을 끌어오고 거기서 편집과 촬영의 순수한 시각적 쾌감으로 승부하는 보기드문 형태의 액션 스타일리스트 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러한 오우삼의 폭력미학을 홍콩반환에 대한 압박감으로부터 해석 할 수 있는데, 이는 1997년 홍콩의 반환과 1989년 천안문사태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가 잘 투영된 를 통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와 정체성 혼란은 오우삼의 영화에서 극도의 폭력과 과장되고 과잉된 상태의 감정으로 표출되게 된다. 에서도 킬러와 형사의 극한적인 대립을 그려내며 점차 서로의 영웅적 면모에 이끌려 동화되는 듯한 이미지를 표현해내며, 마침내는 죽음까지 함께 하려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영웅의 비장미를 극대화 시켰다. 이외에도 오우삼이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통해 오우삼의 개인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어린
2차 과제물‘북한정치론’ 2차과제물최근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천안함 사건의 1주기도 지났다. 6월에는 한나라당이 중점 법안 `1순위'로 꼽는 북한인권법이 임시국회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예상된다. 이 모두 최근 언론에 실린 북한에 관련한 뉴스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북한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단골 문제이자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핵’ 문제이다. 이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회적인 문제가 아닌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글로벌 문제화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북핵문제는 비단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과 특히 미국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또 중대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두 나라사이의 갈등의 골이 매우 깊은 상태로 북미는 현재까지 서로 입장의 차이를 줄이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북핵 문제에 대해 벌어지는 수많은 대립과 노력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이자, 이 모든 갈등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핵 포기’는 과연 가능한 문제일까? 물론 이에 대한 수많은 주장과 분석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북한의 체제 상태로는 불가능에 더 가까울 것으로 본다.우선 ‘핵’이라는 것은 북한에게는 이미 단순한 차원의 무기가 아닌 자신들의 체제안정 도구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즉, 북핵은 북한이 표면적으로 항상 주장하고 있는 미국과의 적대 관계로부터 오는 자신들의 체제와 국가에 대한 위협을 막기 위한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번영과 붕괴까지 생생히 지켜본 북한으로써는 자신들도 그들에게 불었던 것처럼 언젠가는 민주주의의 바람으로 몰락할 수 있으며, 혹은 미국과 같은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무력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결과적으로 북한은 아주 오래전부터 외부, 내부로부터의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꾸준히 핵을 개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는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핵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에 의해 가해지는 위협으로부터의 방어수단이라고만 보기에는 모순된 사실임을 보여주는 행동들이다. 내면적으로는 핵무기를 가짐으로써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자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 강대국 즉, 민주주의 국가들의 많은 압박과 영향으로부터 굳건할 수 있다고 내적으로 북한의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과시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실로 북한이 내세우는 강성대국의 중요한 키워드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핵이라고 할 수 있다. 핵보유를 자신들의 체제의 성과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지도자는 자신이 내세우는 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그 지배의 정당화를 위해, 생겨날 수 있는 내부적인 반발을 저지하고 북한 주민들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핵이라는 무기를 체제 안정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다음으로는 오랜 기간을 통해 악화된 북미관계이다. 물론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이유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부적인 체제 안정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북한이 표면적으로 밝히고 있는 미국으로 부터의 위협 또한 주요한 요인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북한과 미국 간의 불안한 관계는 한국 전쟁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한국 전쟁 때 미국에게 매우 쓰라린 기억이 있는 북한으로써는 당연히 언제 다시 자신들이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9.11 테러 이후 예민해진 미국으로부터 ‘악의 축’, ‘깡패 국가’로 불리면서 실질적인 큰 위협을 받았던 북한은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마지막 칼날이라고 할 수 있는 핵을 가지고 미국과의 대립과 관계를 이어나간 것이다. 물론 미국과 북한이 핵 문제를 둘러싸고 무조건적으로 적대적 입장만을 취한 것 은 아니다. 1994년 북한과 미국 간의 제네바 합의도 있었고 이외에도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항상 서로의 입장 차를 줄이지 못하고 갈등의 골이 악화되는 형태의 상황이 수년 간 반복 되었다. 오히려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매번 실패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북한과 미국 사이의 신뢰가 회복될 기미 없이 더 깊은 나락으로 치닫게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결국 북한이 ‘핵’이라는 민감하고 중대한 사항으로 미국의 심기를 자극해서라도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밖에 없게된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현재의 북미 관계에는 서로를 100%, 아니 그의 절반인 50%라도 믿고 이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뢰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북한은 계속하여 미국에게는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 핵이라는 사안을 외교적으로 카드화 시킬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결국 북미간의 입장차를 줄이지 못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서로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문제가 되어 악순환이 반복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 현재 북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한은 쉽게 고리가 끊길 수 없는 문제인 듯 보인다.마지막으로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대가가 존재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다. 현재 북한이 핵 폐기를 하는 대신 원하는 것은 크게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신들의 안전 보장과 함께 경제적 지원과 함께 에너지 자원에 대한 지원이다. 하지만 1차 6자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이 원하는 대북안전보장을 제공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으나 먼저 이러한 제안을 했던 북한은 여기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북한이 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안전 보장은 북한이 진실로 원하는 핵 폐기에 대한 대가가 아님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어려운 것은 북한이 주장하는 체제에 대한 안전 보장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모호성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안전 보장이 김정일 체제 유지에 대한 보장인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보장인지 알 수 없는 북한의 불분명한 요구로 인해 미국이 그들에게 제의하는 해결책 또한 모호함을 지닐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적인 지원은 현재까지 많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중유공급이나 전력공급과 같은 에너지 자원에 대한 지원 부터 국제기구를 통한 식량공급, 또는 민간 차원의 경제적 지원까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꽤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 폐기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불완전하다. 북한이 핵 폐기의 대가로 원하며, 또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경제적 대가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핵 폐기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으며, 진실 된 속내를 드러내고 있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