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작품의 해석-딜타이의 『체험 ? 표현 ? 이해』를 중심으로-목차Ⅰ. 서 론 · 1Ⅱ. 딜타이의 해석학적 과제와 방법1.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 22. 역사이성 비판· 43. 삶의 해석 · 4(1) 시간성 · 5(2) 자서전 · 6(3) 타자이해 · 74. 체험 - 표현 - 이해 · 9Ⅲ. 딜타이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1. 삶의 표현으로서 예술 · 112. 고차원적 이해 · 113. 심리주의적 해석의 거부 · 12Ⅳ. 딜타이의 음악해석학1. 체험 표현으로서의 음악 · 132. 음악적 의의론과 실제적 적용 · 14Ⅴ. 결 론 · 16§ 참고 문헌Ⅰ. 들어가는 말“로크와 흄 그리고 칸트에 의해 구성된 ‘인식하는 주관’의 혈관 속에는 살아있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데카르트에 이르러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성 능력은 무엇이든 측정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연 과학의 이기(利器)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듯하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 수학적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정초가 마련된 이후로,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만이 확실한 지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딜타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과학의 둔탁한 방법으로 아우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삶에 대한 해석을 위해 정신과학을 제시하며, 정신과학의 객관성을 정립하여 인식론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삶’에 대한 물음은 대게 주관적인 것이어서 삶에 대한 탐구로 삶을 객관화한다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딜타이에게 삶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의 대상이며, 삶에 대한 논의 없는 지식은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식을 탐구하는 우리가 바로 삶은 사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시간 속에서 체험하고, 그 것을 표현하고, 타인의 표현을 이해하며 산다.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로 표현된 것은 우리에게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다. 말, 텍스트, 행위, 창조물 등으로 그 대상이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음악은 전체로 파악되기 힘들고, 시간 속에서만 흐름으로 파악 가능하다는 점에서 삶과 판단(선험적 종합판단)의 유형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지식을 증대시켜주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수학?자연학처럼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딜타이는 “모든 정신과학은 오늘날 현존해 있는 것에까지 이르도록 흘러온 역사에 대한 연구에 근거한다.”)라고 밝힌다. 또 “나는 나의 상태 자체를 체험하고, 나는 사회의 여러 체계들의 교차점으로서 사회의 상호작용 안에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이 체계들은, ‘내가 내 자신 안에서는 체험하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이해한 인간 본성’과 동일한 인간 본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언어 안에서 사유한다. 이 언어도 시간 안에서 생성된 것이고, 나의 개념도 시간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자기(Selbst)의 더 이상 탐구할 수 없는 심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존재(historisches Wesen)이다.”)라고 한다. 이는 인간은 역사적 맥락 안에 존재함과 동시에 인류의 역사가 그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역사의 주체이자 관찰자이다. 따라서 역사의 보편타당한 종합판단이 가능하다고 딜타이는 말한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은 역사이성으로부터 가능하기에 딜타이는 역사이성의 비판을 통해 역사적 존재자에 대한 학문인 정신과학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칸트가 순수자연과학의 기초를 순수오성의 원리로부터 파생한다고 본 것처럼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타당성과 객관성의 조건이 내적 체험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이성의 비판은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정초를 마련하기 위한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인 것이었다. ‘정신’이라고 일컬을 때 흔히 삶의 배후에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떠올리곤 하는데, 딜타이에게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재로 체험한 것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딜타이는 “어떻게 ‘개별적인 주체들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세계의 건립’이 ‘정신적 현실성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역사이성 비판의 과제로 보았다.이는 정신과학이 학(學)으로써 가능하기 위한 . 다시 말해, 자기성찰은 자신의 측면에서는 어떤 내적인 것(기억)이며, 이것이 바로 외적 표현으로서 자서전을 획득하는 것이다.)딜타이는 삶을 파악하는 도구로서의 범주들이 자서전 안에서 관련된다고 하며 “삶의 의미(Sinn)는 형성과 발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삶의 의미가 순간들의 의의(意義, Bedeutung)를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하며, 이 의의는 동시에 순간들의 체험된 고유한 가치이며, 이 가치의 작용하는 힘이다.) 딜타이는 “모든 삶은 각자의 고유한 의미(Sinn)를 보유한다. 이 의미는 의의연관에 놓여 있는데 그 안에서 각각의 기억 가능한 현재가 고유한 가치를 소유하면서도 동시에 기억의 연관에서 전체의 의미에 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개인의 삶이 가지는 의미의 고유성은 의의들의 연관과 상호작용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삶의 과정은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의미를 형성하고, 이러한 삶에 대해 기술하는 자서전은 “자신의 삶의 흐름에 대한 한 인간의 자기 성찰”)이며, “자서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자서전의 대상은 한 개인의, 삶의 흐름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나 자서전은 단지 개인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드로이젠이 언급했듯이 모든 잡무가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개인적 삶의 모든 경과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딜타이는 자기 성찰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관철(觀徹)하고, 내적인 것(체험)을 외적인 것(자서전)으로 표현하여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3) 타자 이해딜타이는 인간 자신은 역사적인 과정을 통하여 규정된 존재라고 보았다. 역사의 취급은 개인을 넘어서는 연관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의 체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관들은 개별인간들의 체험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역사적 삶의 체험이란 한 개인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삶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들의 연관이다.) 이러한 역사적 삶 속에서 자기이해와 타자 표출로 나는 ‘무엇인가를 뜻하거나, 의미하려 의도한 표현’뿐 아니라, ‘그런 의도 없이도 정신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정신적인 것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표현’을 뜻한다.) 삶이란 “그 내부로부터 알려진 인간의 체험(Erleben)”)으로, 삶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에게 단순히 한 개인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훨씬 포괄적인 인간의 내면적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동적인 체험을 파악하기 위한 정신적 과정이다. 보다 명료하게 딜타이는 이해를 “‘너’안에서 ‘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정리하자면, 구체적인 체험은 개별자에 따라 다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체험들이 맺는 내적 연관이 표현으로 드러나면 비록 타인의 삶이라도 우리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체험-표현-이해는 정신과학의 문제의식이었던 인간 삶의 해석이 객관적으로 가능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기능한다.딜타이는 “이 이해 활동은 자장가에서부터 햄릿 또는 이성 비판의 파악에까지 미친다. 돌, 대리석, 음악적 형식의 소리들, 몸짓, 낱말, 저서, 행위, 경제적 질서와 헌법에서 동일한 인간의 정신이 우리에게 말하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하며, 이해를 이제 인간 사이의 좁은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녹음된 것은 물론 인간이 표현한 돌로 된 문서, 흉내와 몸짓의 의미 전달 또는 법조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표현 형식들로 확장시킨다.Ⅲ. 딜타이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Ⅲ-1. 삶의 표현으로서 예술자연 인식이라는 것이 세속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감각 현상들의 추상화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정반대로, 삶 현실의 이해는 삶 경험, 예술, 그리고 과학적 사고 간의 밀접한 상호 연결을 통해 조건 지어진다.) 삶 경험 속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인간 세계는 예술, 역사, 추상적 과학들을 통해 일정 정도 승화된 의식으로 현현한다. 우리 각자의 삶은, 그것의 가장 기저에 있는 내용에 이르악은 구분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옮겨감과 같은 것은 없다. 천재)는 소리의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험을 통해 리듬의 발견, 혹은 화음의 연쇄를 끌어낸다.)딜타이는 비록 음악이 체험 표현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체험이 음악이 되는지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음악의 최고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딜타이는 “음악을 체험하는 사람은 -창작의 환희 속에서 기억된 것, 펄럭이는 이미지들, 늘 지나가 버리는 불특정의 소리들을 체험하는 사람- 자기 안에서 지각한다.”)고 한다. 그 사람은 리듬의 발견에서, 화음의 이어짐에서, 혹은 체험에서 출발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음악과 체험의 교호작용 속에서 음악가가 알아채지 못한 심연에 있던 어떤 것이 작품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길은 셀 수 없이 많다.우리가 음악작품에서 인지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전개되는 부분들이다. 우리는 각각의 음들을 인지할 수도,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의 음이 다른 음을 뒤따르고, 우리의 음 체계의 법칙에 따라 한 음 곁에 다른 음이 같이 울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필연성이 없다. 단지 창조라는 표현 속에 놓인 경향(Tendenz)이 있을 뿐이다.체험은 시간에 있어서의 흐름의 경과이다. 이 흐름 속에서는 어떤 상태도 명확히 대상화되기 전에 변화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이어지는 다음 순간이 이 앞선 순간 위에 증축되기 때문이다. 즉, 이 흐름 속에서는 어떤 순간도 -파악되지 않은 채- 과거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순간은 스스로를 확대할 자유를 가진 회상으로 나타난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헤르더)가 “음악은 종결된 산물이 아니라 시간화 된 ‘역동적’예술”이라고 말한바 있듯, 음악은 완성된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간 음의 하나하나가 기억되는 법이 없고, 흐름으로 남을 뿐이다. 개별적인 음을 관찰하려 시도하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을 붙잡아 두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음악 또한 .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Ⅰ : The spell of plato- 플라톤의 유토피아적 전체주의를 중심으로-칼 포퍼는 과학철학을 기반으로 그 방법론을 사회 및 정치철학에 적용시키고 있다. 과학철학의 영역에서 그의 논리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는 ‘반증가능성의 원리’가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역시 중심으로 등장한다. 과학철학에서 반증가능성은 논리실증주의에서 말하는 검증가능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검증이란 과학과 비과학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경험적으로 관찰하지 못하면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납의 원리에 기초하는 검증가능성은 늘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다.포퍼는 오늘날 일반화된 과학적 논리들이 경험에 의해서 검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반증을 견뎌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즉, 과학적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반증을 견뎌낸 명제만이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반증가능성은 사회철학의 영역에서 ‘전체주의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최선의 방법은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것’ 이라는 명제로 나타난다.이 책은 전체주의의 이념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상가들을 중에서 큰 영향을 끼쳐온 플라톤,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다룬다. 1권은 이 세 사상가중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포퍼는 고대 세계에서의 역사주의의 대변자가 플라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철학을 아주 철저히 해부코자 한다. 1권의부제가 ‘플라톤의 주문’ 인 것처럼 그는 플라톤의 전체주의와 유토피아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구축된 허구적 사상인가를 폭로한다.비판적 합리주의포퍼의 반증가능성의 원리는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러한 반증원리에 의해서 점차 진리에 접근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경험이나 감정의 역할보다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의 전통에 서면서도, 독단적 이성이 아닌 비판적 이성을 주장하는데서 연유한다. 또한 이성의 오류가능성, 반증가능성의 원리, 그리고 점진적 사회공학과 열린사회를 모두 포함하는 포퍼의 중심사상이다.만약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독단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독단적 태도는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종종 독재적이고 반민주적인 생활양식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정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는 소수 사람에 의한 진리의 독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포퍼에게 모든 앎이란 합리적 비판을 필요로 한다. 오류는 독단이 아닌 비판적 논의에 의해서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류의 개선을 통해 진리에로 점차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있지만, 절대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비판과 논쟁을 허용하지 않는 기존의 합리론과 경험론, 검증가능성의 원리에 바탕을 두는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성격을 띄는 유토피아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주의는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칼 포퍼의 그 적 : 플라톤의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역사주의의 핵심적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형태는 선민사상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역사적 발전의 법칙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이다.)플라톤은 젊은 날에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힘든 경험을 한 이후로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인 것이다(all social change is corruption or decay or degeneration.)’ 라는 역사적 법칙을 세웠다.그는 확실히 부패로 치닫는 일반적인 역사적 경향과 모든 정치적 변화를 억제시킴으로써(arresting all the political change) 정치면에서의 더 심한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이 그가 성취하고자했던 목적이다. 그는 변하지도 않고 퇴보하지 않으며, 악을 갖지 않는 국가를 세워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변화와 부패의 악이 없는 나라가 최선의 국가요 완전한 국가이다. 그것은 변화를 모르는 황금시기의 국가이며, 억제된 국가(the arrested state)이다.)플라톤의 정치 강령은 모든 정치적 변화를 억제하라(Arrest all political change)는 이상주의적 이론과 자연으로 돌아가라(Back to nature)는 자연주의적 이론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정치강령의 요소들의 일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계급을 엄격히 구분한다. 둘째, 국가의 운명과 지배계급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셋째, 지배계금은 무기휴대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에 있어서 독점권을 갖는다. 넷째, 지배계급의 모든 지적 행위에 대한 검열과 그들의 의견을 통일하기 위한 계속적인 선전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자급자족적일 수 있어야 한다.)사회정의에 있어도 전체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 전체국가의 한 성질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지배자는 지배하고, 노동자는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일 수 있다면, 국가는 정의로운 것이다.또, 플라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했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의 반대이고,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타주의와 개인주의를 동일시함으로써 개인을 철저히 무시했다. 플라톤은 “부분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개인주의를 공격하는 데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방어하는 데서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정치적 영역에서 개인이란 플라톤에게는 악 그 자체였다. 무엇이든지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것은 사악하고 불의이다.이렇듯 플라톤의 유토피아는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인 것이다. 부패는 없을지언정 철저한 계급제도와 개개인의 인격은 무시되었다. 위로부터의 의사전달로 이 사회에는 소통의 기회는 일절 없으며, 개인은 사회라는 하나의 유기체의 부분으로 전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이다.이러한 사회를 이상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포퍼는 플라톤이 잘못된 이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열린사회’를 제시한다.칼 포퍼의 열린사회닫힌 사회가 주술과 독단이 지배하는 억압사회의 특징을 갖는 반면에 열린사회는 의사결정과정에서 비판과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역사주의나 유토피아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접근방법이 아닌 ‘점진적 사회공학’으로 재구성해 가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점진적 사회공학이란 ‘반증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과학적 지식을 다루는 모든 학문 분야를 말한다.점진적 사회공학은 일거에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처하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교만, 독선과는 대조적으로 겸손을 특징으로 한다. 제멋대로 거대한 우주를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탁상공론과는 대조적으로, 현실의 인간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보편적 복지의 정당성-건강보험을 중심으로-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문제점Ⅲ. 인권과 복지Ⅲ-1. 자연법적 인권Ⅲ-2. 자유와 평등Ⅲ-2-1. 소극적 자유Ⅲ-2-2. 적극적 자유Ⅲ-3. 국가의 역할로서 복지Ⅲ-4. 복지 개념의 변화Ⅳ. 나오는 말Ⅰ. 들어가는 말현재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이 똑같은 의료혜택을 받는 건강보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소득에 따라 건강보험비는 차등으로 내지만, 혜택은 똑같은 것이다. 이는 보편적 복지의 기본적인 구조이며, 사회보험의 일환으로 가장 잘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가벼운 질환은 3-4천원으로 진료가 가능할뿐더러 약을 짓는 것도 큰 부담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증상으로만 진단할 수 없는 병의 경우에는 진료를 위해 고가의 의료기기를 쓰게 되는 경우와 그리고 수입된 비싼 약은 건강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어 큰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진단 후에는 어떤가. 큰 병은 치료비도 병의 심각성만큼 증가하여 고액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개인당 민간보험 두세 개 정도는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다. 장기적이거나, 집중적 치료, 수술의 경우에는 민간보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큰 병을 가진 환자에게는 투병의 고통뿐만 아니라 금전적 어려움도 함께 감내해야한다. 비단 이것은 환자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 친지, 친구들까지 힘겨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의 확대는 국가 재정과 국민의 조세부담이 커지는 단점이 있으며 지금의 건강보험도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 상태를 유지할 경우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할 수 있고, 민간보험의존율이 큼에 따라 의료혜택의 부익부빈익빈 현상 또한 심각해진다는 우려가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보편적 복지의 정당성을 건강보험의 확대를 중심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Ⅱ.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문제점항간에 ‘오바마도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건강보험’이라는 뉴스기사가 포털사이트 뉴스 메인 화면을 오르락내험의 비중이 크다는 것도 문제이다. 민간 보험사들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최소 자본으로 최대 이윤’이라는 기업의 이윤추구 목적을 따르기 때문에 수술, 치료에 큰돈이 들 수 있는 병에 대한 보험은 보험료도 많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상해를 입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때 보험금 지급조건이 까다롭고, 민간보험이라도 의료보험으로써 적절히 기능한다면 아무문제가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돈이 있더라도 나이가 보험사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넘어서거나, 병력이 있는 사람은 보험가입을 거부하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사회보험으로서 의료보험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시작점임이 분명한데 이것이 민간보험사라는 시장의 손에 맡겨진 것은 자유로운 시장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은 최근에 우리나라도 의료 민영화 문제가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듯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Ⅲ. 인권과 복지Ⅲ-1. 자연법적 인권인권은 '자유와 평등'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침해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두 개의 철학적 개념을 주축으로 구성되었으며,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뜻에서 천부인권 또는 생득권이라고도 한다. 이를 자연권이라고도 하는데 고전적이면서, 기본적인 인권의 개념이다. 이러한 인권의 개념정의는 일반적으로 인권이란 인간의 현실 삶과는 거리가 먼 관념적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되거나,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 혹은 법정에서 따져지는 난해한 법률 전문용어로서 간주하기 쉽지만, 사실 인권이란 보통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이다. 인권이 인간의 선천적인 권리라는 것으로 누가 그것을 일컬어 권리라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권리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천부성이 있고, 그래서 현실의 법과는 무관한 자연권적인 성격을 띠는 권리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함부로 포기할 수도 없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불가양도성의 권리라 할 수 있다. 인권 목록에 등재된 권리들 사이에는 우선순위나 가치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국가와 개인에 따라 인권이 서로 다를 수 없다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일컫는다.” 타인의 간섭에 의해서만 자유가 침해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어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무능력 상태라 해서 그것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로 볼 수는 없다.” 즉, 타인이 고의로 내게 간섭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나의 선택을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나 기회를 실제로 지니고 있지 못하더라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입장으로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자유는 특정한 저해 요인들 -타인에 의한 강제-의 결여를 지칭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특정한 기회를 약속하지 않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하이에크는 그의 협소한 자유 개념으로부터 협소한 국가 역할의 개념을 끌어낸다. 국가의 지시와 무관하게 각 개인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우며, 그러한 상황은 자발적인 시장 질서에 의해서만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 정의라는 개념 자체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도 한다. 개인들은 강제로 강요된 경우에만 집합적인 정의를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시장이 분배하는 것을 재분배하는 데 필요한 규제 권력 앞에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정부가 분배 정의나 사회 정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국가 권력을 남용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서 인권의 역할은 단지 자유 시장 내에서 개인의 자율성에 간섭하려고 하는 국가를 억제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한정된다.강압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강조하는 태도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확대를 개인 자율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며 그 대신 자유시장이야말로 개인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신자유주의는 단어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로운 거래, 계약이 이루어지는 시장, 규제완화와 재산권을 중시한다.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준칙에 의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에게 자유란,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을 행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상태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사람들은 얼마나 성취할 수 있느냐는 경제적 기회, 정치적 자유, 사회적 권력, 그리고 양호한 건강 및 기본 교육 같은 조건, 독창성의 격려와 함양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폭정뿐만 아니라 빈곤 같은, 조직적인 사회적 박탈뿐만 아니라 부족한 경제적 기회 같은, 탄압 국가의 불관용이나 과잉 간섭뿐만 아니라 공공 서비스의 부족 같은, 반자유의 주요 원천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센은 그의 이러한 ‘역량 이론(capability theory)’을 통해 ‘주체 행위로서 자유(freedom as agency)’라는 적극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사람들이 단순히 형식적 권리를 지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로 어느 정도나 자신의 선택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어떤 개인이 단순히 선택할 의사가 있는 목표와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한 목표를 구분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이 점은 ‘기능(functionings)’과 ‘역량(capabilities)’의 구분에서 드러난다. 센은 어떤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 또는 어떤 목표를 ‘기능’이라고 부른다. “소중한 기능에는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거나 예방 가능한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지역 공동체 활동에 참여할 능력과 자존감의 확보 등과 같은 복잡한 활동과 개인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능이 실행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일련의 기능을 실제로 달성하려면 그 사람에게 그 기능을 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량은 기능들 간의 다양한 조합을 이루는 데 필요한 실질적 자유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다.) 건강보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병을 가진 사람이 치료를 통해 건강해 질 수 있다면 국가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국가의 적극적 의무 이행에 있어서 존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을 들어 제도적 체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롤즈는 어떤 문제 상황에서 여러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원초적 입장’을 요건으로 든다. 원초적 입장은 무지의 베일-당사자들의 직위, 특수한 사정을 베일에 가리는 가상적 상황-과 상호 무관심적 합리성-그들은 굳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입는 것도 원치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으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입장은 권력에 따른 이익 분배를 막고, 순수 절차적 정의를 위한 것이다.위의 원초적 입장을 바탕으로 해서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이 성립될 수 있다. 제 1원칙으로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규정하고 보장하는 사회의 측면과 제 2원칙으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규정하고 확립하는 사회의 측면을 구분하고 적용될 수 있다.제 1원칙 평등한 자유의 원칙제 2원칙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허용 기준a. 차등의 원칙b.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 1원칙에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기본적인 자유들로 다음과 같다.정치적 자유(투표의 자유와 공직을 가질 자유)와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심리적 억압과 신체적 폭행 및 절단을 포함하는 인신의 자유(인신의 온전성), 사유 재산을 소유할 권리와 법의 지배라는 개념이 규정하는 이유 없는 체포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와 같은 자유들은 제 1원칙에 의거해서 평등해야 한다.)위에 열거한 자유들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서로 충돌할 경우 제한될 수 있으나 가장 우선시 되는 자유들이다.제 2원칙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때 정당할 수 있는 차등의 원리와 권한을 갖는 직위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직책은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리로 있다.
INTRODUCTION이 장에서 나는 시간에 관한 흥미로운 세 가지 퍼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위한 함축을 가지는 두 가지 이다. 나는 Arthur Prior의 ‘Thank goodness that's over!' 퍼즐과 Shoemaker의 변화 없는 시간의 가능성, 그리고 Lewis의 시간 여행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Prior의 논쟁과 변화 없는 시간의 가능성 두 가지는 A 이론)을 지탱한다.PRIOR'S PUZZLE시간에 대한 B 이론의 퍼즐에 따라 1959년에 Prior가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누군가가 말한다. 예를 들면, ‘thank goodness that's over' 이라고, 그리고 이것뿐만이 아니라 말했을 때, 어떠한 자료의 첨부도 없는 꽤 명확한, 그러나 이것은 한 자료와 무시제적 계합사(copula)의 어떤 사용이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확실히 '1954년 6월 15일 금요일이다. 는 어떤 것의 그 결론의 자료가 고맙다’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것이 그러한 것을 말할지라도. (어떠한 문제도 이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결론은 이 언설과 동시적이다‘. 왜 아무도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가?)B이론은 ‘thank goodness that's over'의 그들의 예정된 만족의 언설이 주는 자원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언설들은 오직 A 이론이 참이라면 그 만족을 가질 수 있다.그러나 Prior는 다소 그 퍼즐을 잘못 말해왔다. 그 B이론은 시간 본성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고, 시제적 문장의 의미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A 시리즈 용어들은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용어들을 내포한다). B이론은 시제적 문장 (‘히틀러의 죽음은 과거이다’라는 나의 언설)이 이것의 무시제적 문장의 다른 쪽으로써 같음을 의미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즉, ‘“히틀러의 죽음은 과거이다”의 저 언설은 히틀러의 죽음 이후에 발생한다.’ B이론의 주장은그러므로 이 경우에 대한 Mellor의 재서술은 그럴 듯 하지 않다.Prior의 예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태도의 어떤 것을 변화하는 시간적 사실을 미리 전제로 한다. 나는 고마워한다. 왜냐하면 나의 두통의 현재의 사실은 이것이 과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준다. 때문에 B 이론에서 모든 시간적 사실은 무시제적인 것과 불변하는 것이다. B 이론가들은 그러한 태도에 대해 개념이 없을 수 있다.더욱이, Prior의 퍼즐은 일반화이다. 그 문제는 단지 B이론이 ‘고마워라 저것이 끝나서'의 언설은 말도 안 될 수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 경험에 대한 많은 태도들이 말도 안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몇몇 부끄러운 에피소드가 과거로 잊혀짐으로써 더욱 더 많이 안심을 느낀다. 어떻게 우리는 B 시리즈 용어에서 이것이 이치에 맞을 수 있을까? 왜 나는 그 사실-예를 들면 2005년은 치욕스러운 2000년의 사건 이후 5년- 에 대해 안도할 수 있는가? 또는 2006년은 그 사건 이후 6년인가? 마치 동어반복들이 안도의 감정과 같은 바탕에서는 할 수 없다.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치료한 것보다 미래의 고통을 돌보는 사실을 고려하자. 우리는 훨씬 어떤 불쾌한 경험이 아직 오지 않은 것보다 우리 뒤에 있다는 것을 선호한다.. Parfit은 말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편견’ 이다. 어떻게 우리는 B 이론 위에서 이러한 태도를 설명하는가? 이전과 이후의 관계는 완벽하게 대칭적이다. 왜 고통은 최후의 시간 보다 늦게 오고, 오히려 일찍 온다는 그 사실들이 이것에 대해 더 조심할 수 있는 이유 일 수 있을까?대조적으로, A이론가는 적어도 그 흐름을 말할 수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부터 하나의 본질적인 방향을 가지고, 이것은 우리의 비대칭적 걱정 아래에 쓰인다.그들은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고통들에 대한 더한 염려는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이 우리로부터 더욱 더 멀리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의 고통에 대해구조적인 결점으로 시작한다. 이것의 결론은 형이상학적 (시간은 필수적으로 변화를 포함한다) 이다, 아직 이것의 전제는 인식론적 (시간의 통로의 우리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조건을 고려하는 것) 이다. 어떻게 형이상학적 결론은 인신론적 전제로부터 따라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오직 우리가 이것의 흐름에 깨어 있을 때에만 지나가는 것이라고 추정하는가? 더군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 - 우리의 시간의 통과에 대한 의식은 필수적으로 변화의 의식을 포함한다 - 는 모호하다. 이것은 직접적 의식과 간접적 의식 사이의 구분을 무시한다. 명확하게, 나는 직접적으로 변화 없는 시간의 의식이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나의 의식은 이 스스로 변화를 구성한다, 그러나 왜 나는 변화하는 자유로운 시간의 확실한 기간이 경과해왔다는 간적접인 증거를 가지지 않는가? Shoemake의 분석을 사용하자면, 나는 ‘어느 t 시간에, 우주는 t 에서의 어떤 마음도 포함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는 스스로 손상시켰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간접적 증거를 가질 수 있다, 우주론으로부터, 그것은 이 문장에서 시도함으로써 나를 정당화 한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Shoemake는 그 다음에 변화 없는 시간의 기간이 있는 한 세계의 예를 제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변화 없는 시간의 확실한 기간이 경과해왔다는 믿음에 대한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Shoemake는 세계는 세 가지 공간적 지역으로 나누어진다고 상상한다. : A, B, 그리고 C. 세 가지 지역 모두에 있는 사람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사람간의 전형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기이한 흐름이 있다. : 모든 지역들 중 하나는 한 해 동안 ‘언다’. 이런 식으로, 예를 들면, A가 얼었을 때, B와 C의 사람들은 A에서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해가 끝났을 때, A의 모든 것은 삶으로 돌아온다. A에서의 사람들은 마치 시간의 경과만약 A가 t1에서 t2의 B를 야기한다면 우리는 시, 공간적으로 A와 B 사이에 이어진 지속하는 인과관계의 사슬이 있다고 기대할 것이다 - Shoemake는 (P)를 포기할 개념적 장애가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한 세계가 있을 수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 (P)를 방해하는 ‘인과관계’라고 부르는 관계가 포함된 세계이다.(P)-방해하는 세계에서, 시간의 단순한 통과는 인과의 효과를 가진다. 인과적으로 표과적 변화가 진짜라는 것을 포기하면, 어떤 한 세계에서 단순한 시간적 변화는 진짜이다. 다른 세계에서, Shoemake는 일찍이 진짜 변화의 왕국으로부터 제외한 맥타가트의 변화의 세계는 진짜를 주목한다, 적어도 (P)가 방해하는 세계에서. 한 세계에서 시간의 경과는 인과적으로 효과적이다. 이 경우에, Shoemake의 상상세계는 변화 없는 시간이 있는 세계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Shoemake는 (일반적인) 변화가 없는 시간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변화가 자유로운 시간(change-free time)의 기간은 그 세계의 거주자들로부터 예측가능하다. 이 세계에서, 일반적인 변화는 진짜 변화의 한 종류가 아니다. 일반적인 변화 없는 시간의 기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변화 없는 시간의 기간은 아니다.우리는 Shoemake의 아주 그럴듯한 - 일반적인 변화 없는 시간의 기간이 가능하다는 - 논문이 B 이론가들에게는 어려운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마칠 수 있다. 어떻게, B이론가들에게, 만약 B-시리즈 관계의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는 해에 어떠한 사건도 없다면, 자유로운 변화의 시간이 지나는 한 해가 있을 수 있는가? B 이론가들에게 시간의 경과는 단지 B 시리즈로 정돈된 사건들의 구성일 뿐이다. 프리오의 난제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고려할만한 문제를 가진다. 이 문제는 B이론과 대항하고, A 이론과 잘 맞는다.TIME TRAVEL오랫동안, 시간 여행은 시간 철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다. 철학적 6년에 그의 시간 장치로 시작한 시간여행자가 1900년에 개인적 시간으로 한 시간 후에 장치 밖으로 나올 때와 같은 사람임을 말하는 것을 원한다. 정신적 그리고/또는 육체적 연속성의 관계는 개인적 동일성이 시간의 지남에 따라 나아간다고 종종 생각한다. non-time 여행자의 경우에 ‘시간의 지남' 이란 말은 모호하지 않다. 그러나 시간 여행자의 경우에 ’외부적 시간의 지남' 과 개인적 시간의 지남' 사이는 모호하다. Lewis는 우리가 시간 여행자의 개인적 동일성이 개인적시간의 관계와 정신적 그리고/ 또는 육체적 지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우리가 2006년에 시간 장치로 들어간 그 사람이 1900년에 그 장치에서 나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직각적인 판단으로 동의하는 것을 승인한다.여기까지 우리는 개인적 시간과 우리가 허락한 시간 여행이 이치에 맞음을 외부적 시간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과 시간 여행의 많은 생각들이 퍼즐들과 역설들이 여전히 숨겨져 있다. 이러한 퍼즐들과 역설들은 항상 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여행에서 보여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요청해야만 하는 질문들은 세 가지 퍼즐과 역설들이 진짜 시간 여행의 가능성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 되는지 아닌지 이다. 나는 그들이 하지 않은 것과 여기에는 과거 또는 미래로의 여행에 개념적 장애가 없다는 것을 논쟁할 것이다. 여기 몇 가지 퍼즐들이 있다.Backwards causation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반드시 역행하는 인과관계 (외부적 시간을 반영하는)를 포함한다. Lewis는 말하기를, 과거로의 여행자는 : ‘[너]는 아마도 그가 떠나기 전에 그의 얼굴을 때렸고, 때문에 그의 눈은 몇 세기 후에 검게 될 것이다.’ 또는 다시, 2006년에 그의 시간 장치에서 점화 버튼을 누른 시간 여행자는 1900년에 시간 장치에 도착하는 것을 야기한다. 역행하는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의 가능성에 대한 결점인가? 오직 역행하는 인과 진다.
사법계(四法界)육상원융(六相圓融)십현연기(十玄緣起)목 차? 들어가는 말? 몸 말1) 사법계(四法界)2) 육상원융(六相圓融)3) 육상원융의 적용4) 십현연기(十玄緣起)? 나오는 말들어가는 말Butterfly effect. 나비효과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 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으로,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가 처음 발표한 이론이다. 이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연관된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사건의 과정이 얽히고설켜 전혀 연관관계가 없어보이는 일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나비효과 이론이 발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에 기초가 되는 불교의 화엄사상이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론, 사상이지만 ‘연관관계’를 중심에 둔다는 데에서 분명 닮은 점이 있다.화엄사상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그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의 뜻이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끝없이 이어짐)한 관계이고,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 한다.예를 들어보면, 내가 입고 있는 바지와 티셔츠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 옷가지에 불과한 듯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명동에서 산 바지와 인터넷에서 산 티셔츠는 어쩌면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구입함으로써 지금 내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이다. 나를 통해 바지와 티셔츠가 만나게 되었다.이런 논리로 우리는 누구나가 세계의 모든 사람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 된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개개물물도 모두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연기론이다. 내가 이 세상의 개개물물과 보이지는 않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얘기는 반대로 얘기하면 내 속에 이세계가 들어있다는 얘기로도 될 수 있다.이러한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는 사법계(四法界),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 관계에서 성립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성(실체)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空) 하다고 보는 것이 이법계(理法界)의 입장이다.다시 말해서 이 우주만유를 갖가지의 차별상이 있는 표면에서 본것을 사법계라 하고 그 반대인 이면에서 본 것을 이법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법계와 이법계는 전연 다른 별개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인데 이를 현상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본체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에따라 둘로 나뉘어진 것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理)와 사(事)가 무애(無碍: 걸림이 없다)하다고 하는 이사무애법계가 성립된다.거듭 말하면 표면에서 보면 개개물물이 자기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천차만별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도 이면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성립되어 생멸, 변화해 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세계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서로 방해함이 없이 무애하다고 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중간고사가 끝나고 몰아치는 과제로 힘들고, 설상가상으로 놀자고 연락하는 주변사람들의 유혹을 뿌리쳐야하는 괴로운 마음에 또 힘들고, 언제 다 써버렸는지 몇 푼 남지도 않은 용돈으로 남을 한달을 버텨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또 힘들다. 이처럼 우리의 늘 갖가지의 번뇌와 망상으로 시달리는 마음을 사법계라고 하고, 번뇌 망상의 파도가 일기 이전의 고요한 그 마음을 이법계라 한다.이사무애법계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절대 즉 상대, 상대 즉 절대 하는 논리형식이 성립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중생들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으신 경계에서 이 세계를 본 것 이다.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갖가지의 차별상의 이 현상계는 혼돈과 무질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고해(苦海)와 같다. 그러나 깨달으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현실의 세계는 아 피아노가 바이올린의 그 낭낭한 소리를 흉내 내려 한다면 이 오케스트라는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만다. 각자 자기의 직분에 따라 그 고유의 소리를 낼 때 전체로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모니 속에서는 바이올린 소리는 바이올린소리, 피아노 소리는 피아노 소리, 첼로 소리는 첼로 소리를 내지만 조금도 서로 방해함도 방해됨도 없다.)이 현상의 모든 존재물들도 이와 같이 서로 방해함도 방해됨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사사무애의 법계며 이는 무애사상의 극치라 할 수 있다.세상을 이렇게 넷으로 나누어 보았다면, 그 안에 있는 사물들은 어떻게 보았을까?2) 육상원융(六相圓融)여기에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육상원융이 있다. 육상(六相)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한다. 이러한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하는 관계에 놓여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육상의 내용을 보면, 총상이란 일체 제법은 연기된 존재이니, 여러 연이 모여 성립된 전체를 말한다. 하나가 많은 이름을 갖추고 있고, 하나에 많은 덕을 포함한 것이니 부분을 총괄한 전체가 총상이다. 별상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인 각각의 연으로서, 이 별상은 총상에 의지하여 전체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집을 총상으로 하면 집을 구성하고 있는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별상이 된다. 우리 얼굴을 총상이라 한다면 눈 귀 코 입 등은 별상이다. 그러나 눈이 얼굴이고 얼굴속의 눈이다. 총상과 별상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원융이다.동상이란 별상의 하나하나가 서로 어김이 없이 조화되어 전체인 총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이상이란 별상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조화되어 있으면서도 제각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상이다.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서로 화합하여 동상, 성상의 3 상은 또 같은 관점에서 논의 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원융문(圓融門)이라 하고, 별상, 이상, 괴상도 공통된 관점에서 파악된 것으로 이를 항포문(行布門)이라 한다. 이 원융문은 평등문이고, 항포문은 차별문이다. 그런데 무차별의 원융문은 차별을 나타내는 항포문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항포 자체가 분명하면서도 항포가 곧 원융이 된다. 여기에 전체와 부분, 하나와 무량이 무애한 무진 법계의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만 이는 지혜의 경계인 것으로 바른 지혜로써 진리를 깨달아 얻을 수 있는 것이다.)3) 육상원융의 적용‘수동 필름 카메라’ (참고: Nikon F3hp) 라는 총상을 가진 물건을 살펴보겠다.카메라를 구성하는 렌즈, 거리게, 조리개, 노출계, 셔터스피드, 미러, 셔터막, 셔터 등은 별상이다.카메라의 렌즈가 거리계와 조리개, 그리고 몇 장의 렌즈 알들로 차례대로 구성되어 있고, 한 손으로 조작하기 쉽도록 둥글게 생겼다. 몸체는 손으로 잡기 편하도록 가로로 네모진 모양을 가지고 있고, 오른손으로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누르기 편하도록 오른쪽에 필름레버와 셔터버튼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잘 조화되어 우리가 지금 흔히 보는 카메라의 모양새가 갖춰진다. 이것이 동상이다.카메라의 이렇게 많은 부분들이 함께 있지만, 각각의 부분들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상이 이상이다.렌즈로 들어온 빛이 조리개를 통해 그 양이 조절되고, 그 빛은 미러에 반사되어 파인더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필름의 감도, 조리개와 노출계에 따라 셔터스피드를 조절한 후에 필름레버를 감고, 셔터를 누르면, 순간 미러가 올라가고, 셔터막이 열리면서 필름에 상이 맺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카메라라는 총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성상이다.카메라가 제 역할을 하도록 구성된 모든 것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기에 카메라가 잘 기능하는 것인데, 이를 괴상이라고 한다. 노출계의 이상으로 조리개와 셔터스피드가 어긋나면, 빛이 많이 들어오고, 것을 십현문이라 한다.화엄종에서 십현문을 설명한 것으로 두 가지가 있다. 지엄의 《일승십현문》이나 법장의 《화엄오교장》의 십현문과 《탐현기》의 십현문에는 명칭의 차이가 있다. 전자를 고십현(古十玄), 후자를 신십현(新十玄)이라 부르는데, 신십현에는 고십현에 있는 제9문인 유심회전선성문이 없다. 이 십현문은 화엄사상의 극치로서 지엄이 《일승십현문》에서 처음 논하였고 법장이 체계화하였다. 이 사사무애의 무진연기는 해인삼매의 선정이 선행되어야만 드러나는 시계이다. 즉 종교적 체엄의 세계이다.)신십현문에 바탕하여 십현연기를 알아보았다.(1)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까지는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해서 연기(緣起)하는 것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삼세현상(三世現相)은 반드시 동시에 서로 응하며, 과거에도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였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또한 동일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여, 앞과 뒤, 시작과 끝의 분별이 없이 서로 응하여, 마침내 한 덩치(一體)의 관계를 지어서 연을 일으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금으로 만든 금사자가 있다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성립하여 두루 구족한 것과 같다. 즉 바닷물 한 방울에도 백천강물의 맛이 갖추어 있는 것과 같다는 법문이다. 즉, 낱낱의 현상은 동시에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고 서로 원만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2)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고십현」의「제장순잡구덕문」에 해당하는 법문이다.「제장순잡구덕」의 현상(現相)을 설하는 것으로서, 인연으로 일어나고(緣起)있는 모든 법은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이 섞여 있으나,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 대로, 곧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제자리(本位)에 의지하여 있다. 이것이 동시일념(同時一念)으로, 걸림 없는 것을 설하는 법문이다. 즉, 모든 현상에 넓고 좁음이 있으나 서로 걸림이 없고 자유로움을 말한다.(3) 일다상용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