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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기 시대 발제문
    112992 역사학과 박수진1. 들어가며구석기시대는 지구상에 등장한 인류가 유인원과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리·진화를 거듭하면서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했던 약 400만 년 전 내지 250만 년 전부터 약 12,000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기간은 인류 역사의 99.5%를 차지하는 아주 장구한 시간이며, 지질학상 신생대 제4기 전반인 홍적세(플라이스토세, 갱신세)에 속한다.구석기시대란 용어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되었다. 19세기 중엽 고고학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기술사적 관점에서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한 뒤, 석기시대는 다시 사용 도구상 때려 만든 뗀석기(타제석기)와 갈아 만든 간석기(마제석기)에 의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되었다. 즉, 구석기시대는 원래 돌을 때려 만든 석기를 사용하던 시대를 의미했다. 그러나 뗀석기가 아주 늦은 시기까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현재 통용되지 않으며 편의상 전과 같이 구분하기로 한다.구석기인들은 매머드나 동굴곰 등 지금은 사라진 절멸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며, 뗀석기와 뼈·나무 연모 등을 만들어 사냥이나 식량을 채집하면서 살림을 꾸리고, 강가나 언덕 등에 막집을 짓거나 동굴·바위그늘을 집터로 삼으면서 무리를 지어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다. 이러한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구석기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석기에 대해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2. 구석기 시대의 석기(1) 석기먼저 석기란 돌을 깨어내어 날을 만들고 그 날을 써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도구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깨어서 만든 석기는 다른 돌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모습이 나타난다. 보시는 것처럼 사람이 만든 석기는 때린점, 격지, 겉면, 부채살모양, 조갯살 등의 특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처럼, 자연돌의 갈라진 면과 선은 불규칙적이고 울퉁불퉁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석기의 깨어진 면이나 선은 나름대로의 규칙성과 일정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ㄹ. 석기의 종류주먹도끼 : 주먹에 쥐고 사용. 짐승을 잡거나 털과 가죽을끝부분에 좌우대칭으로 날이 있어서 나무껍질을 벗기는 데 효과적이다.슴베찌르개 : 박편의 양쪽을 다듬어서 끝부분을 뾰족하게 만든 것으로, 자루를 달아 창같은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2) 석기제작 과정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물은 석기를 제작하는 행위자의 의도를 반영하게 된다. 석기제작기술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인류의 형질적 진화과정과 맞물려, 보다 복잡하면서도 정연한 제작과정을 갖게된다. 이러한 석기제작과정은 당시 구석기인의 처해진 환경 속에서 도구사용 역량, 경제활동과 노동의 관계, 기술적인 전통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시해 준다.구석기인들은 다양한 석기제작 기술을 사용해서 원하는 모양과 크기, 용도의 다양한 석기를 만들었다. 첫째로, 직접떼기방법(直接打擊法, Direct percussion)은 다른 매개체 없이 격지를 떼고자 하는 몸돌과 격지를 떼기 위한 도구로 구성된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ㄱ. 돌망치 떼기; 직접떼기깨어 내려는 돌(몸돌)에 망치돌로 부딪쳐 날을 만드는 방법으로 오랜 기간동안 쓰인 대표적인 석기 만드는 방법이다.ㄴ. 모루떼기; 직접떼기바닥에 자리한 커다란 돌(모룻돌)에 부딪쳐 석기를 만드는 방법이다. 커다란 돌들을 먼저 깨어내는 데에는 아주 유용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ㄷ. 눌러떼기; 직접떼기만들려는 돌을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사슴의 뿔이나 뼈 등을 이용하여 지긋이 힘을 주어 석기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깨어내려는 돌의 재질에 따라 이용이 좌우된다. 이 기술은 후기구석기시대에 처음으로 관찰된다. 이 기술은 후기구석기시대에 몸돌을 다루는 기술로부터 시작하여 세형몸돌 및 각종 석기를 다룰 때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석기제작자가 석기를 제작할 때 규칙적인 방법으로 모든 박리순서를 조절해 가면서 몸돌로부터 돌날을 떼어내고, 그 돌날로 석기를 만든다.둘째로, 간접떼기는 망치와 몸돌 사이에 또 하나의 매개체가 조합되어 격지를 떼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보다 정교한 박리를 할 수 있게 하며 규칙적인 반적이다.이러한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몸돌도 역시 손으로 쥐는 방식으로는 작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정기구(신체의 다른부위, 즉 무릎도 포함)에 몸돌을 고정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몸돌의 재질이 단단해서는 작업이 쉽지 않다. 이 방법은 주로 퇴적암이나 화산암제를 주로 사용하며 돌날떼기에 활용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생산물로 석기를 만드는 것이 형태의 정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기술적 바탕이 된다. 돌날은 작고 얇은 타격면을 갖게 되며 타격혹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돌날을 떼어내는 방향은 약간 대각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 결과 돌날의 측면형태는 약간 휜 형태를 보인다.ㄹ. 돌날떼기; 간접떼기길고 날카로운 조각(돌날)을 만들기 위해 중간에 뼈나 뿔을 대고 때려 만드는 방법이다. 간접떼기의 대표적인 수법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에 많이 이용되었다.ㅁ.가슴 눌러 떼기; 간접떼기가슴눌러떼기는 매우 발달된 방법으로 뾰족하게 만든 나무잡이를 가슴의 힘으로 눌러서 석기를 만드는 수법이다.3. 구석기 시대의 일상생활(1) 주거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 또는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고 살았기 때문에 굶어 죽지 않으려면 사냥감이나 열매가 많은 곳을 찾아다녀야 했고, 줄곧 이동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집을 지어도 나뭇가지 따위를 얼기설기 엮어서 이슬이나 겨우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막집을 짓거나, 동굴에서 주로 거주했다. 그러다가 사냥감이 떨어지면 곧바로 짐을 싸서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집터에는 기둥, 담, 불 땐 흔적 등이 남아 있으며, 집터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대개 3, 4명에서 10여 명이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늘 옮겨 다녔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그다지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었고, 또 그럴 만한 마땅한 도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진에 보이는 집은 매머드 뼈로 만든 주거지로 1만8천년에서 1만 4천년 전의 것이고, 이외에 추정되는 지도자는 무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동등하게 생활하는 평등 사회를 이루었던 것이다.(2) 구석기 시대 석기의 구분구석기시대는 기본적으로 석기의 종류, 만듦새의 특징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기(인류 출현 시기 또는 석기 문화의 시작~10만 년 전), 중기(10만 년 전~4, 3만 년 전), 후기(4, 3만 년 전~1만 년 전)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석기의 종류와 특징에 따라 발전하는 구석기 시대의 문화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한다.ㄱ. 전기구석기시대인류가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중부홍적세가 끝나는 기간 동안 나타난 석기문화를 말한다. 전기 구석기시대는 대략 신생대의 3기말 플라이오세의 말엽에서 상부홍적세의 초엽에 이르는 시기에 걸치게 된다.아주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그것이 자연적 타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제작된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의 것으로, 이를 비롯하여 인류가 처음 사용한 석기군을 일반적으로 ‘올두바이공작’이라고 한다.이에 속하는 석기는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지며, 형태적 정형성을 찾기 어렵다. 올두바이공작은 보다 정제된 석기로 구성된 ‘발달한 올두바이공작’으로 이어지며, 이것은 다시 매우 정제된 형태의 석기로 구성된 ‘아리안공작’으로 계속된다.날의 방향에 따라 외날찍개, 안팎날찍개, 주먹도끼 등 대형의 찍개류와 도끼류가 사용되었다. 한 개의 큰 석기를 가지고 사냥도 하고 땅도 파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찍개나 주먹도끼 등은 맥가이버 칼처럼 만능 도구였다,ㄴ. 중기 구석기시대중기 구석기시대는 약 10만 년 전부터 4,3만 년 전까지 이르는 시기로, 이 시대의 담당자는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여러 호모 사피엔스 집단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 조각들을 잔손질해 용도에 맞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한 개들의 석기공작이 기본적으로 전시대의 것을 계승·발전한 것이지만, 전반적으로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석기가 만들어졌다.중기구석기인들은 대형 초식성동물을 사냥한 흔적을 많이 남기고 있다. 바위그늘이나 야외 유적을 주기적으로 혹은 장기간 점유하면서 창이나 나무창을 이용하여 사냥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에 따라 사냥기법이 상당히 발달되었다는 것을 도구나 공반되는 동물뼈들에 의해서 알 수 있으며 또한 갈돌을 이용하여 식물을 가공한 흔적들도 이미 중기구석기에 나타나고 있다.또 이 시기에 이미 장거리 운반된 유물이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동굴 또는 바위그늘 유적 그리고 노천주거지를 반복하여 사용한 흔적들이 있으며 이 시기에는 사체의 매장풍습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다. 또한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와 예술 행위의 증거도 발견되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의 매장이 대표적이다, 분명히 구덩이를 파고 무덤을 만들었는데 곰 머리(리고르두 유적)나 양 머리(테쉭 타쉬 유적)를 다른 부장품과 함께 묻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리고르두 유적의 경우에는 도구와 함께 고기덩어리를 부장하였다.이미 이 시기에 상당한 수준의 현대적 의미의 인간성 발현 흔적이 유적에서 보여지며, 또한 발달된 언어의 사용이 체질인류학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ㄷ. 후기 구석기시대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기후가 대단히 추워지는 시기이며 체질적으로 완전한 현생인류가 전 세계적으로 출현하는 시기이다. 후기구석기시대는 해부학적 견지에서의 현대인, 즉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과 더불어 약 4만 년 전부터 시작한다.후기 구석기시대의 기후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빙하가 발달하여 약 2만년 전에서 1만 8천년 전 사이에 그 극성기를 맞이하였는데 대단히 춥고 강수량이 현저히 줄어든 기후를 만들었던 것이다.석기들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다양한 종류의 긁개, 칼, 첨두기, 조각도, 톱날 등의 소형석기가 나타났으며, 시대와 유적의 기능, 그리고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도구를 제작하는 기법이 체계화되었을 뿐 아니라 도구를 만되었다.
    인문/어학| 2014.02.10| 6페이지| 2,000원| 조회(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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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는 과학인가 평가A좋아요
    역사는 과학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내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학, 물리학, 광학, 천문학 등 어떤 수치를 이용하여 관찰하고, 측정해 하나의 법칙을 도출하는 그런 학문이다. 또 역사는 지극히 인문학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역사학은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물론 어떤 학문을 단 하나의 정의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과학으로 분류해도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많은 논란이 따른다. 다만 나는 역사는 과학과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역사에서 역사가는 지난 사료(현대사가들의 경우에는 현재 상황을)를 관찰할 수는 있지만, 역사가의 결론은 어떤 획기적인 발견에 의해 되풀이 될 수 없을뿐더러,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결과물도 아니다. 다만 역사가의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입장이 변할 뿐이다. 하지만 과학은 끊임없는 실험과 관찰로 새로운 발견을 시도할 수 있고, 되풀이 될 수 있다. 이런면에서 역사는 과학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또 역사는 과학인가 하는 문제에서 제일 핵심이 되는 과연 역사에서 일반법칙을 도출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진정한 과학은 일반법칙을 도출할 수 있을 때 존립된다는 말의 바탕 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나는 역사에서 일반법칙은 만들 수 없다고 말하는 에반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에서 비슷한 상황은 있을지 몰라도 완벽히 같은 상황은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사람들은 선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상황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우리는 흔히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만큼,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역사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이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이 문제에 대해서, 각자의 발표조에서 다양한 의견을 피력했다. 역사는 과학이라는 입장에 선 조(빨리끝내조)는 과학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이유가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어떤 행성이 충돌할 것이다.’ 하는 것은 충분히 과학적이지만 틀릴 가능성이 있는 추측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역사와 과학의 공통점을 찾는 것 대신, 과학이 과학적이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역사가 과학임을 주장하는 데에 근거나 논리가 부족했고, 후에 중립적 입장으로 돌아섰다.역사는 과학적 문제인가에 관련되어, 역사에 도덕적 관점이 포함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는 것 같다. 가령 누군가를 비난할 때에도, 그 개인의 도덕성이 아닌 역사적 정당성을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독재는 비난 받을 일이지만, 역사가는 히틀러 자체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점이 제외된다면, 이 세상의 역사는 모두 객관적이어야 한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하는 것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사실들만 남을 뿐이다. 이것은 카가 말한 해석의 중요성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과연 역사가의 도덕적 판단이 아예 한쪽 구석에 치워져야 하는지는 더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인 것 같다.
    인문/어학| 2013.05.31| 2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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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유도원도 ppt
    1. 몽유도원도의 창작배경 2. 몽유도원도의 창작자 ( 안견 ) 3. 몽유도원도의 그림 해석 4. 몽유도원도의 보존 현황 목차몽유도원도 ( 夢遊桃源圖 ) 꿈속에서 본 복사꽃 마을 . 세종 셋째 아들 안평대군 ( 安平大君 ) 의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화가 안견이 그린 작품 . 창작배 경창작배경 정유년 4 월 20 일 밤에 자리에 누우니 , 정신이 아득하여 깊은 잠에 빠지고 꿈도 꾸었다 . 박팽년과 더불어 어느 숲에 당도하자 층층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깊은 골짜기가 아름다우며 ,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마치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 무릉도원 이란 ?창작자 안견 안견 (?~1479) 조선 초기 대표적 화가 적벽도 , 청산백운도 , 사시팔경도 , 소상팔경도 등 정선 , 김홍도 , 장승업과 함께 조선 4 대 화가그림 해석 1. 전체 제 1 군 현실세계 제 2 군 도원입 구 암괴 제 3 군 도원 안쪽 입구 제 4 군 도 원 경치 * 부감법그림해석 2. 제 1 군 현실세계 .그림해석 3. 제 2,3 군 도원입구 암괴 제 2,3 군 제 3 군그림해석 4. 제 4 군 도원의 경치그림해석 5. 도원의 상층 세부보존 현황 계유정난 이후 행방 묘연 1893 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견 1950 년 초 일본 덴리 박물관 소장 일본 국보로 지정안평대군 시문 世間何處夢桃 源 野 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 多千載擬相傳 後三年正月一夜 在致知亭 因披閱有作 淸 之 “ 삼년 뒤 정월 초하루날 밤에 치지정에서 다시 이를 펼쳐 보고서 짓는다 . 청지 씀 이 세상 어느 곳이 꿈에 본 도원인가 은자의 옷차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 그림으로 두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자부하건대 수천년을 전해지리라 .참고도서 이 놀라운 조선 천재 화가들 - 안견 , 신사임당 , 정선 , 김홍도 , 신윤복 , 장승업 ] 이일수 / 구름서재 /2009_ 책 안견과 몽유도원도 , 안휘준 지음 , 사회평론 박물관 속에 숨어 있는 우리 문화 이야기 ( 옛그림편 ), 장콩선생 지음 , 살림 한국미의 재발견 ( 회화 ), 이원복 , 솔 ' 국외로 유출된 국내 문화재 7 만 6 천여 점 (2009 국정감사자료 中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3.05.31| 13페이지| 2,000원| 조회(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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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텔르완다 감상평 - 개인과 사회
    감상평영화 는 벨기에 식민지배의 말로인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 그 사이에서 그저 사람을 구하기 위한 폴 루세사바기나 개인의 사투로 이끌어져 간다. 두 민족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우리는 폴 개인과 그의 가족에 시선을 맞추고 그들에 이입되어 같이 사건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한다.영화 속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호소하는 요소들이 많다. 마치 역사가가 어떤 직접적 표현을 하지 않고도 묘사를 통해 도덕적 평가 등과 같은 것들을 할 수 있듯이, 감독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장면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평가나 가치관을 내비친다. 먼저 영화 속에서 유엔은 명실상부한 허수아비다. 그들은 그저 내전을 방관할 뿐이다. 분노한 후투족이 피 뭍은 유엔의 군모를 던지는 장면은 얼마나 유엔이 무능력한지를 보여주며, 과연 유엔이 사건을 처리할 적절한 세력인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유엔을 대표로 하는 ‘백인’의 존재는 그러하다. 다만 그들 내에서도 부각되는 인물은 존재한다. 유엔의 올리버 대령과 아처여사는 방관적인 유엔의 태도에 분노하며 적극적으로 투치족을 보호하는데 힘쓰고 또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독은 백인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가하기도 하고, 실리적인 국가와 반대되는 이런 인도적 인물들을 통해 백인을 옹호하기도 하는 것이다.또 상황에 관계없이 중간중간 들려오는 RTLM 라디오의 격양된 목소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이 결코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며 극적이고 위험한 상황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상황속에서도 간간히 들려오는 총소리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며 함부로 편안한 분위기를 즐겨서도 안된다.영화에서 정작 사람들은 외모만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구분하지 못한다. 내전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것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 것인가. 감독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지금 상황 속에서 투치족은 쓰레기 같은 존재야.’‘바퀴벌레 같은 투치족’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전에 외국인만이 호송될 때, 그들이 안고 있는 개를 통해서 ‘투치족은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고 말해준다.영화에서 주인공인 폴은 그의 가족과 이웃을 구하기위해 모든 것을 동원한다. 군인을 매수하기도하고 기자들을 독려하기도 하며,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군인을 통솔할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1천여명의 투치족을 구했다. 그렇다면 과연 폴은 민족적 영웅인가? 사회로 나아가 넓게 보면, 폴은 확실히 수천명의 투치족 구한 민족적 영웅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어떤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폴과 가족은 안락한 방이 있고, 폴과 타티아나는 맥주나 와인을 즐긴다. 극히 대비적으로 길거리에는 투치족의 시체 수십만구가 널브러지지만 말이다. 폴의 개인적 이기심이나 영웅적 면모를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없이 그도 개인적 인물일 뿐인 것이다. 다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어 좀 더 평범하고 일반적인 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폴과 가족, 그리고 그 이웃의 이야기는 단순 1천명의 이야기만을 시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속에서 투치족 전체를 볼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13.05.31| 2페이지| 1,000원| 조회(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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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척준경 서평
    척준경(拓俊京)-반역자인가 충신인가역사학과112992박 수 진척준경은 고려 인종대의 전설적인 장수다. 그의 용기와 담대함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무용담을 읽고 있으면 소설을 읽는 듯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척준경은 우직한 맹장이자 용장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무인이 아닌, 정치가로서의 척준경은 어떠한가. 아둔하리만큼 순진하고 용맹한 장수였으나 정치적 셈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기록사적으로 어쨌든 그는 반역자였다.척준경은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였다. 그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104년 무렵이다. 북방의 여진족이 그 세력을 확장하자, 고려 조정은 평장사 임간을 보내 동여진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대패하였다. 그 때 추밀원별가에 지나지 않던 척준경이 임간에게 무장한 말과 병기를 청해 홀로 패퇴하는 고려군 사이를 비집고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었고 이로써 여진군이 혼란에 빠져 퇴각한다. 척준경은 이 싸움을 계기로 천우위록사참군사의 벼슬을 제수 받는다. 하급관리가 총사령관에게 직접 말과 무기를 요구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대담한 성격을 알 수 있다.또 윤관과 연을 맺어 윤관을 따라 여진 정벌에 관여하고 적장 2명을 죽이는 등 무공을 세우고, 함흥을 손에 넣은 고려군은 계속 북진 길주와 주변 고을을 장악하고 동북 9성의 축성작업에 돌입한다. 이때 어느 정도 피해를 수습한 여진족은 대반격을 개시, 1108년 윤관과 오연총은 8천의 정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가한촌 병목의 작은 길로 진군한다.척준경은 아우 척준신(拓俊臣)이"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은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척준경은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거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답변하며 급히 정예병사 10여명을 거느리고 적진 속으로 돌격하여 여진족들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게 했다. 순식간에 적군 10여명을 죽이고 윤관을 구출한 찰나,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나타나 윤관과 오연총을 구출하였다. 무사히 영주(英州 : 고려가 점령지에 설치한 9성 중의 하나)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하였다. 윤관은 영주성으로 돌아와 척준경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양자로 대우하였로 대하였고, 척준경을 합문지후로 승격시켰다.또 1월 26일, 여진족 2만명이 영주성을 공격해왔다. 병력이 절반정도 밖에 안되는 고려군 지휘부는 농성전을 결의했으나 척준경은 혼자 반대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2만명에 돌격 한바탕 헤집고 19급을 베었다. 윤관과 지휘부는 감격에 겨워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고 한다. 2월 11일 웅주성이 여진족 수만명에게 포위당했고, 구원군이 오지 않자 척준경은 밤중에 밧줄타고 성벽을 내려와 100km가 넘는 적진을 주파하여 정평에서 구원부대를 이끌고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웅주성까지 진격, 그대로 성으로 가지않고 길주에 주둔하던 여진족 본대를 무찔렀다. 웅주성 사람들은 척준경을 보자 울면서 환영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여진의 침략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나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여기까지 그의 삶은 한편으론 무식하리만큼 강직한 고려의 맹장으로서 치켜 세울만하다.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장군이 있었음을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정치가로서의 그의 삶은 평가를 달리한다.먼저 여진족을 정벌할 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용맹을 떨쳤던 척준경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진족을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1115년 음력 1월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완안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황제라 칭하자, 그해 음력 8월 천조제가 15만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이때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어 금나라와의 싸움에 군사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대다수의 신하는 군사를 보낼 것을 주장했으나 척준경은 김부일·김부식 등과 함께 여진족 정벌 이후 국력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천조제는 금나라군과 싸워 또 한 번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천조제는 음력 11월에도 사신을 보내 고려군의 출병을 요청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1123년 참지정사, 이부상서를 거쳐 1124년 12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임명됐다. 그러나 문신 관료들의 멸시와 무시로 1125년 4월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에 인종은 최식, 이후를 보내 그를 달래어돌아오게 했다. 1125년 다시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1126년 음력 3월 조정에서 금나라를 받드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금나라가 강대해졌으므로 섬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군신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그는 자존심으로 나라의 보안을 그릇 되게 만들기 보다, 나름의 국제 정세를 파악할 줄 알았던 것이다.척준경은 인종(仁宗)이 등극한 후 권력을 잡은 이자겸을 돕게 되며, 이유는 명확치 않으나, 이자겸의 다섯째 아들인 이지원(李之元)이 척준경의 사위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자겸은 척준경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준경의 딸을 자기의 아들과 혼인시켜 사돈지간이 되자고 권고했고, 척준경은 이자겸의 제안을 수용한다.인종은 이자겸이 분에 넘치는 전횡을 일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1126년(인종 4) 음력 2월 지록연(智祿延) 등이 인종의 뜻을 받들어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척준신과 척순도 살해당하고 궐 밖으로 시체가 던져졌다. 이에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분개한 나머지 “임금과 짜고 이들이 내 아들과 동생을 죽였다” 하며 대궐에 불을 질렀다. 이로서 이자겸의 난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 척준경은 거사에 가담한 장군들과 문관들을 죽였다. 이자겸은 강압적으로 인종의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도록 했으며, 이 일 때문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이자겸 일파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인종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척준경에게 이자겸이 신의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바칠 것을 권유했다. 이 무렵 마침 이자겸 아들의 종이 척준경의 종에게 궁궐을 태운 죄를 힐난했는데, 이 내용이 척준경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이 틈을 타 최사전이 척준경을 찾아가 회유하자, 그는 거사의 결행을 약속하고 인종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이에 척준경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가족들을 체포하였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을 표창하고 위사공신(衛士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또한 문하시중으로 삼으려 했으나, 척준경은 이를 사양하였다. 동년 6월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에 녹훈되고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에 임명되고, 상주국에 녹훈되었으며 부인 황씨는 제안군대부인에 봉해진다. 그해 음력 11월 인종은 척준경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공신당에 걸게 했다.그러나 척준경의 위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내세우며 권세를 부리려 하자 인종은 척준경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언(正言) 정지상이 척준경의 옛 죄를 들어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1127년 음력 3월 암타도(巖墮島)로 귀양 가게 되었다.1127년 음력 3월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라는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이배되었다. 인종은 1128년 음력 4월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참작하여 척준경의 귀양지를 암타도에서 고향인 곡주로 옮기게 하였으며, 1130년 음력 10월에는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하며 가족들과 한곳에 살도록 했다. 또한 1132년 음력 11월에는 척준경의 아들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게 하였다.1144년(인종 22) 인종은 척준경을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에 임명, 바로 상경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종은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자손들에게도 출사길을 열어주었다.척준경은 장수로서의 업적만 본다면, 더 잘 알려진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에 이름을 나란히 해도 손색 없을 만큼, 그가 여진정벌에 기여한 공은 엄청나다. 그는 전투에 담대할 뿐만 아니라 가족보다 군인으로서의 충을 먼저 생각할만큼 우직한 장수였다. 또 전투에서 무력은 야사가 아닌 정사에 기록되었으나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권력과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척준경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양분된다.
    독후감/창작| 2013.05.31| 5페이지| 1,000원| 조회(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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