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20대일 것 같았던 나에게도 30대가 찾아와 어느새 35살이 되었다. 이제 사회에는 정년의 개념이 없어졌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싱글로서의 삶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다. 나에게는 다섯 살 차이나는 언니가 있는데, 요즘 언니와 나의 고민은 어머니 부양이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시절부터 언니와 나를 키우신 어머니는 우리 자매를 기르시느라 자신의 노후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그래서인지 항상 우리 자매에게 자신의 노후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셨다. 어머니가 직장에서 은퇴하시려면 아직 4년이 남았지만, 은퇴 후에 어머니를 어떻게 모실 것인지는 항상 걱정이었다. 국민연금은 이미 재원이 고갈되어서, 그 비용만으로 어머니가 생활할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람도 모두 들어드리고 싶다.직업의 특성상 자주 해외로 출장을 가는 내가 어머니를 모시면 어머니께서 적적해 하실 것 같고, 간호사인 언니도 바쁜 업무 때문에 가정을 돌보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어머니 부양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언니는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대신 어머니께 살림과 육아를 부탁드렸지만 어머니께서는 거절하셨다. 따라서 언니와 나는 가정에서의 부양은 힘들 것으로 판단 해 시설을 알아보게 되었다.실버타운이 많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수요에 비해 공급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기에 많은 걱정이 되었다. 요즘에는 40대에 예약을 해놔야 은퇴 후에 입주할 수 있기에 미리 입주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언니가 근무하는 실버타운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 입주비용은 20년 전부터 어머니께서 가입해두신 사설연금을 통해 충당하기로 했고 대신 매달 생활비는 언니와 내가 드리기로 했다.어머니를 보며 나는 문득 결혼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요즘 사회는 예전과는 달리 부모는 자식에게 의존하려 하지 않고 자식 역시 부모를 모시려고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결혼은 하지 않아 자녀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없기에 그에 대한 부담은 없다. 따라서 노후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연금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연금에 가입했다. 물가 연계형 상품에 가입했지만 날이 갈수록 오르는 물가 때문에 이 역시도 한계가 있어 걱정이다.이런저런 생각을 뒤로 하고 곧 있을 어린이날을 위해 조카의 선물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렀다. 내가 봤을 때는 다 똑같은 장난감인 것 같은데 핀란드 산 목재로 만들어져 다르다느니, 두뇌 발달에 더 도움이 된다느니 하며 본래 가격의 5~6배를 부르는 직원들을 보며 짜증이 났다. 요즘은 대부분의 집안에 아이가 한명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이에게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아이들 장난감가격은 날이 갈수록 비싸지기만 한다. 언니가 결혼을 늦게 했기에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를 위해 선물을 사고 나와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지하철역으로 가는 데, 길이 너무 많이 막힌다. 앞을 보니 또 데모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길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 데모는 정년을 보장하라는 공무원들의 데모다. 정년의 개념이 없어지고 실제로도 정년이 사라지자, 이미 정년의 개념이 무의미해진 사기업의 노동자들은 괜찮았지만, 소위 ‘철밥통’이라고 까지 불리던 안정된 직장이었던 공기업과 국가기관의 근무자들은 매일 같이 데모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열심이다.겨우 지하철을 탔지만 지하철은 역시나 오늘도 앉을 자리가 없다. 이미 노약자석은 연세 지긋하신 노인 분들로 가득 찼고 그 나마도 더 연세 높으신 분들이 타시면 서로 양보하는 실정이다. 일반석도 어린 학생들이 타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서서가고 있는데 옆에서 할머니와 어린 학생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노인공경도 모르냐는 할머니와 노인임이 벼슬이냐는 학생이 육두문자까지 남발하며 싸우고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집에 도착해 TV를 켜니 어김없이 노인자살과 황혼이혼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기사들이 씁쓸하기만 하다. 미혼인 내게 그러한 기사들은 언제나 고민이다. 노년에 쓸쓸히 살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혹시나 결혼한다면 늙어서 이혼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나처럼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출산율은 급감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24였던 합계출산율이 낮다고 난리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 수준만 된데도 감사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초 고령사회로 진입한 마당에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보니 정부에서는 아이를 낳거나 아이가 있는 개인과 부부들에게 막대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가 있는 부부들에게만 지원을 했지만, 요즘에는 싱글맘, 싱글대디 에게도 같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 중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임대아파트를 무료로 지원하고 있고 소득공제와 같은 세금혜택도 엄청나게 제공 중이다. 또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전환해 부모들의 부담을 줄이고 있다. 가계 지출 중 상당수를 차지해왔던 사교육비 지출은 대학 입시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조선의 심장, 경복궁사정상 교수님과 함께 경복궁을 방문하지 못한 나는 개인적으로 경복궁을 방문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경복궁 안의 많은 나무들은 이미 겨울채비를 하며 수줍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리포트를 위한 답사라기보다는 혼자 산책을 나온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미 5월에 타 학교 친구와 답사를 했기 때문에 경복궁은 익숙하고 친근했다.우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지났다. 광화문의 현판이 새로 제작 된지 2달 만에 나무가 갈라지는 현상을 나타냈다는 뉴스를 보고 갔기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육안으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현판의 손상정도는 심했다.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의 문화재가 허술히 재건되고 관리되고 있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이유를 밝히고 관련자들을 확실히 문책해야 한고 생각하며 중문인 흥례문을 통해 근정문으로 가기 전 영제교를 볼 수 있었다. 영제교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다리로 이 다리를 건너야만 근정전에 들어갈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궁궐 입구 전에는 다리가 있는데 이는 신하들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사념을 떨쳐내고 정무나 본인들의 업무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근정전에 가기 전에 왕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는 길과 신하들을 품계에 따라 설 수 있게 배치한 것을 보며 조선은 확실한 신분질서로 인해 유지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으로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이다. 주로 근정전은 신하들이 왕에게 새해인사를 하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던 정무를 보던 곳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계룡산 갑사에 방문해 대웅전의 지붕장식에 매료되었던 나는 이번에도 근정전의 지붕에 매료되었다. 근정전의 기둥위에 보면 용머리와 같이 생긴 것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모양이 무척 신기했다. 찾아보니 이것을 ‘공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공포는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 맞추어 댄 나무 부재로, 건물의 가장 중요한 의장적 표현으로써 장식의 기능도 함께한다고 한다. 아쉽게도 근정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고 이를 고종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과정속에서 모양이 변형되었다고 하는데 그 전의 지붕장식도 같았을지 의문이 들었다.근정전을 지나서는 사정전을 볼 수 있었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인 편전으로 ‘사정’이라는 이름은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사정전 좌우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이라는 보조편전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온돌이 없는 사정전과 달리 온돌방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춘전과 천추전은 사계절 이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왕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고 놀랐는데, 이렇게 사시사철을 일하려면 그 정도 시설은 갖춰져야 했을 것이다.다음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둘러보았다. 단순한 침전이 규모가 큰 이유는 왕의 침소 주변에 상궁들이 머물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갔다. 강녕전은 왕의 침소일 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극에서 왕이 중요한 국사를 볼 때는 침소로 신하들을 불러들였던 것이었을까. 또한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었는데 이는 왕이 용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자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의 침전답게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교태전의 뒤에는 왕비의 후원인 아미산이 있었다. 아미산은 경회루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은 인공산인데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모양을 닮아 아미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 사극에서 이마를 보고 아미라고 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나 흥미로웠다. 아미산에는 계단식 화단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굴뚝을 뽑은 것이 있었다. 아미산의 굴뚝을 보며 지금 저런 굴뚝을 제작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지혜롭고 대단한 분이었는지 더 자랑스러웠다.강녕전과 교태전을 둘러본 후 경회루로 향했다. 경회루는 규모가 큰 연회를 개최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라고 했다.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가서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구경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이곳에서 구리로 된 오조룡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궁궐의 화재를 다스리기 위하여 연못에 용을 넣어놓았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적 윤리에 입각해 나라를 통치했지만 이처럼 상징적인 면을 인정하는 모습에서는 유교 윤리는 통치 윤리에만 적용되었던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달라진 중국의 위상에도 무척 놀랐지만 더욱 놀랐던 건 바로 ‘공자’였다. 당시 나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 중국내에서 달라진 ‘공자’의 위용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2010년 2월.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제작 된 영화 ‘공자’의 개봉을 보며 시대에 따라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공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경우는 많다. 일례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러하다. 지금도 여러 주장이 첨예하지만, 당시에는 군부에서 방송까지 장악해 폭도들이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해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를 나라에서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광주 사태‘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련 된 피해자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고, 정부에서도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이 사건에 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이와 같이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나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치가 새로이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대다수가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고전(古典) ‘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다.사실, 이전 비평문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에 관해 썼는데, 도덕경을 읽으며 ‘아, 역시 꼭 읽어야 하는 고전(古典)인 데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고전(古典).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문학 예술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전적 의미 중 주목해야할 부분은 ’시대를 초월하여’이다. 현대의 우리가 ‘고전(古典)’으로 인정하고 있는 상당수의 책이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쓰인 당시부터 현재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니. 역시 위대한 책인가 싶다. 하지만 ‘창조된 고전’에서는 지금의 고전이 처음부터 보편적인 가치가 있어서 저절로 고전이 된 것이 아니라 교육제도와 정치적 영향에 의해 가치 있는 텍스트가 되었다고 주장한다.이 책이 일본 문학 정전(正典) 형성 과정에 관한 것이기에 이러한 ‘고전(古典)’의 가치 형성 과정을 일본만의 독특한 과정으로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례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은 당시에는 풍자와 해학적 표현 때문에 ‘표현이 저속하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표현 덕분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고전 문학 추천 목록과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이 처럼 고전은 불변의 진리와 같이 고정된 가치를 가지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특히 그 중에서도 정치적 담론 속에서 역사적으로 변화한 문학 작품인 것이다.이러한 문학 쪽에서의 접근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 각 분야의 정전(正典)에 대한 연구와 접근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일례로 일본의 가부키는 과거 도시 서민을 위한 단순한 오락적 연극이었으나, 일본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국민적 통합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국극(國劇)으로 숭상되었다. 이와 같이 한 대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나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그 대상에 관한 도전이나 모독이 아니라 개개인과 집단,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작품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가치 있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작품들을 추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잠재적으로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은 물론 작품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비판 없는 수용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이로 인해 사회 내에서 다양한 의견은 사라진다.고전의 가치와 문학사적 위치는 창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그 자체의 가치는 충분하다. 책에서 중요한 사례로 쓰이는 일본의 중요 고전(古典) 「만요슈」의 경우에도 책의 저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고전(古典)으로 인정받은 과정과, 그 과정에 얽혀있는 문파들 사이에서의 정치적 논리와 갈등이다. 이 책의 가치가 다소 과장된 면은 있다고 하지만, 「만요슈」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며 일본의 사상사 및 생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만요슈」의 경우와는 반대지만,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된 허준의 「동의보감」이 그러하다. 이 책은 한의학계에서 「동의보감」은 당시 중국의 의학서적을 짜깁기 했다며, 내용에 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이 책의 형성과정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미래1. 서론- 연구 배경 및 목적2. 본론2-1) ‘디지털 노마드’의 증가 배경 및 추세2-2) ‘디지털 노마드’의 현재 위상2-3) ‘디지털 노마드’의 영향3. 결론- ‘디지털 노마드’의 羽化를 통해 본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1. 서론연구 배경 및 목적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인류의 기술 발전에 힘입어 21세기 인류는 지능을 가진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인 ‘호모디지쿠스(Homo digicus)’로 진화하였다. 더욱이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개발과 보급으로 인해 휴대폰 사용을 생활화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도 등장하게 되었다.이러한 신인류의 등장은 모두 디지털의 발전으로 인해 가능해 졌다. 디지털의 발전으로 인해 사용자가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인 유비쿼터스(Ubiquitous))가 환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류는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디지털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또한 환경적인 면과 더불어 사고와 가치의 변화에서도 현대사회가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의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사회 현상인 노마드적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고 이로 인해 기존의 가치관과 사회체계에서도 변화가 오고 있다.)더욱이 한국은 스마트 폰(Smart Phone)의 보급으로 인해 기존 사회의 구조가 재편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따라서 본 논문은 디지털 노마드의 유래에 대해 밝히고,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디지털 노마드는 그 기반을 디지털에 두고 있지만 이 둘이 어떠한 상호 작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증은 없다. 그리고 디지털 공간이나 노마드적 사고 각각의 개별 특성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 졌으나 연개 되어 이루어진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의 가치와 그들의 미래에 대해 밝힌 연구 또한 미흡하다그렇기 때문에 학문적 접근을 통해 디지털 노마드의 의의를 밝히고, 그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2. 현재의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2-1) ‘디지털 노마드’의 증가 배경 및 추세‘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는 말은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가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를 갖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널리 알려졌다.)본래의 노마드는 ‘유목’이라는 말의 라틴어로써 단순한 ‘유목’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노마드’는 단순히 공간적인 유목이라는 뜻을 넘어 자유로운 사고와 가치를 지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이고 있다. 즉 노마드형 인간들은 어느 한정된 공간에 정착하는 것을 거부하고, 틀에 박히고 고정되어 있는 사회적 합의를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현대사회에서는 디지털이 발달함으로써 디지털과 결합해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로 쓰이기 시작하며 그 의미를 확장해 가고 있다.‘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는 휴대폰, 노트북, PDA등과 같은 첨단 디지털 장비를 휴대한 채 자유롭게 떠도는 사람으로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고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사람을 뜻한다.)이러한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증가 배경에는 가족 제도의 변화가 크다. 가족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차지했던 농경사회를 지나 우리사회는 산업사회로 진입했고, 이는 핵가족화를 가속화시켰다. 이렇게 가족 간의 유대관계가 약해지면서 점점 사회는 개인화 되었고, 때마침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디지털 또한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발전된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이전에는 가족사회에서 만족시켜주었던 욕구를 여러 전자 기기들을 통해 해소하게 되었다.‘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범위를 지정할 수 없기에 그 규모를 파악할 순 없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자기기는 대부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기기들이 많다. 그리고 ‘노마드’의 특성은 자유로운 이동이기 때문에 인터넷 중에서도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범위를 무선 인터넷 사용자로 놓고 그들의 규모를 파악해 보면, 복수응답 기준 대한민국의 만12-59세의 인구 중 54.9%가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2010년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이에 따른 가입자의 증가로 인해 이 비율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2-2) ‘디지털 노마드’의 현재 위상현재 우리사회에서 ‘디지털 노마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가 전자기기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 중 상당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파악된다. 얼리 어답터란 제품이 출시될 때 가장 먼저 구입해 평가를 내린 뒤 주위에 제품의 정보를 알려주는 성향을 가진 소비자군(群)을 뜻한다.) 최근에는 얼리 어답터보다도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른 제품 교체 주기를 지니는 디지털 스와프족도 등장하고 있다.소비자들은 얼리 어답터들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업은 그들에게 무료로 제품을 지원하는 등의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들을 유치한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광고보다도 더욱 효과가 있기에 기업에서는 얼리 어답터들에게 지원하는 비용 또한 늘리고 있는 실정이다.또한 디지털 노마드족 중에서도 휴대폰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그리고 디지털의 발달로 인해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람들은 호모모벤스(homo movence))로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인류들의 규모는 증가하고 있고, 새로운 개념을 지닌 신인류에 대한 용어들도 나날이 쏟아지는 실정이다.이를 토대로 봤을 때,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의 위상은 상당히 높은 편임을 알 수 있다.2-3) ‘디지털 노마드’의 영향‘디지털 노마드’의 영향은 대체적으로 문화에서의 변화에서 드러난다.우선 생활양식의 변화로 싱글족의 증가를 들 수 있다. 디지털 노마드 족은 자신의 가치를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자유롭게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가족제도에 얽매이길 원치 않으며 독신을 즐긴다.) 따라서 이로 인해 독신자가 증가하고 새로운 부부유형으로 DINT 족이 등장하였다. DINT족이란 Double Income no time의 준말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 바쁜 업무로 미쳐 돈 쓸 시간이 없는 신세대 맞벌이 부부를 지칭하는 말이다.)다음으로는 소유 문화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동이 가장 중시되는 노마드 들에게 소유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그들은 소유에 욕심을 내지 않고 대신 공유와 임대를 통해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디지털 노마드의 소유관이 물리적 소유에서 활용적 소유로 변화하고 있기에 특히 주거 분야에서 그 특징은 두드러진다. 이 밖에도 리스와 렌털 문화가 보편화되고 확대되는 것 또한 ‘디지털 노마드’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특히 ‘디지털 노마드’와 이로 인한 스마트폰 사용의 증가는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웹상에서 친구·선후배·동료 등지인(知人)과의 인맥 관계를 강화시키고 또 새로운 인맥을 쌓으며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인 SNS의 대표적인 서비스로는 페이스 북과 트위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SNS의 발전은 ‘디지털 노마드’시대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페이스 북(FaceBook)이나 트위터(Twitter)와 같은 SNS 서비스를 통해 이용자들이 실시간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사회의 다양한 사건, 사고의 실시간 전파가 가능해짐과 동시에 자유로운 의사소통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분야는 정치 분야이다. 실제로 이전의 선거에서 TV토론이나 홍보책자등으로 자신들을 홍보했던 후보자들은 2010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블로그나 트위터를 통해 유권자들과 소통했다. 그리고 실제로 SNS를 효율적으로 이용한 후보자들이 당선되면서 디지털 노마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의 등장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그러나 SNS는 사생활 침해와 일차적인 인맥형성이라는 단점 또한 지니고 있다. 실제로 2010년 10월 미국 뉴저지 주 럿거스대의 신입생이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룸메이트가 설치한 웹캠을 통해 동성연애 장면이 대학 전체로 생중계되자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낀 당사자가 웹상에 짧은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 것이다.) 또한 SNS에 올리는 사적 이야기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더불어 웹상에서의 인맥은 보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지닌 안티(Anti) SNS족도 등장하고 있다.)이 외에도 지나친 디지털 중독과 이로 인해 외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물려는 칩거증후군을 지닌 사람들인 코쿤족(Cocoon))이 등장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3. 결론- ‘디지털 노마드’의 羽化를 통해 본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본 연구는 디지털 노마드의 등장 원인과 그 기반에 대해 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디지털 노마드의 특성과 이로 인한 영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살펴봄으로써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현대 사회에서 디지털 노마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현재 그들의 추세를 살펴봄으로써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에 대해 그 규모를 예상해 보았다. 디지털 노마드의 미래에 대해 예측하기 위해서는 현재 그들의 위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신조어로 대변되는 그들의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디지털 노마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하고자 디지털 노마드로 인한 영향 중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의 사례를 분석해보았다.
The Verger그날 오후에 네빌스퀘어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세례식이 있었다. 그리고 알버트 에드워드 포어맨은 여전히 성당지기가 입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알파카로 만든 것이 아니라 늘 변치 않는 청동으로 만든 것처럼 주름이 잘 잡혀있고 빳빳한 새 가운을 장례식과 결혼식을 위해서(네빌 스퀘어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은 상류층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 대단히 선호되는 성당이었다.)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번째로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그 가운을 자기만족을 가지고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가운은 아주 품위 있는 그의 직무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이 없이는(집에 가려고 그 옷을 벗었을 때) 그는 다소 불충분하게 입은 당황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가운을 펴고 다리면서 신경을 썼다. 그가 이 성당의 성당지기였던 16년 동안 그는 연이어 지급되는 가운들을 결코 버리지 못했다. 그의 낡은 가운들은 갈색 종이에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서 그의 침실 옷장 제일 아래 서랍에 있었다.성당 지기는 말없이 바빴다. 페인트칠된 나무 덮개를 대리석으로 된 성수반위 제자리에 놓고 병약한 할머니를 위해 가져온 의자를 치웠다. 그리고는 교구목사가 제구실에서 일을 끝마치기 기다렸다. 그러면 그는 그 방에서 정리를 하고 집에 갈수 있을 것이었다. 곧 그가 제단주변의 사제석을 가로질러서 걸어와, 높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난간을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의 성직자가 입는 옷(cassock)을 입고 있었다.“무엇 때문에 아직도 여기 있어?” 하고 성당지기가 혼잣말 했다. “내가 차를 마시고 싶은걸 모르는 건가?”교구목사는 최근에야 임명됐는데, 40대 초반의 얼굴이 붉은 정렬적인 남자였다. 그런데 알버트 에드워드는 낭랑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설교했고, 보다 더 귀족적인 교인들과 식사를 상당히 많이 했던 노장파의 성직자인 전임자를 그리워했다. 그는 교회가 교회다운 것을 좋아했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다. 그는 매사그에게 시간을 주면, 그는 배울거야.”그 교구목사가 복도 아주 멀리서 걸어 내려왔기 때문에 그가 성당지기에게 예배당에서 어울리는 것 이상으로 목청을 높이지 않고 말을 걸었을 때, 그는 걸음을 멈췄다.“포어맨 씨, 잠시 제의실로 오실 수 있으세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좋습니다. 목사님.”교구목사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서는 그와 함께 교회로 올라갔다.“훌륭한 세례식 이었다고 생각해요, 목사님. 어떻게 아기가 목사님께서 잡으시자마자 울음을 멈추는지 우습더군요.”“나는 아기들이 자주 그러는 것을 관찰했어요.” 교구목사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 “결국 그들과 더불어 충분히 세례식 연습을 한 셈이죠.”그는 항상 칭얼대는 아이를 그가 안는 방법에 의해 조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과 그의 소백의의 구부러진 부분에 아이를 안는 것을 흥미를 가진 찬사를 가지고 보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그에게는 은근한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성당지기는 그의 재능을 가지고 칭찬하는 것이 교구목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교구목사는 알버트 에드워드를 앞서 제의실로 들어갔다. 알버트 에드워드는 두 사람의 교구위원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는 그들이 들어온 것을 앞전에 보지 못했다. 그들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했다.그들은 둘 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고, 알버트 에드워드가 성당지기로 있던 만큼 교구위원으로 있었다. 그들은 전임 교구목사가 몇 해전 이탈리아에서 가져왔던 멋진 식탁 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교구목사는 그 두 사람 사이의 빈자리에 앉았다. 알버트 에드워드는 식탁을 가운데 두고 그들과 마주했다. 그리고는 좀 불안하게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했다. 그는 아직도 오르간 연주자가 말썽을 일으켰고 그들 모두가 일을 수습하려고 처했던 소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네빌스퀘어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과 같은 성당에서는 스캔들 같은 것들을 만들 수 없었다. 교구목사의 붉은 얼굴 위에는 결연한 온화함의 표정이 지는 않은 태도로 서있었다. 그는 성직에 임명되기 전 고용살이를 했었다. 그러나 아주 좋은 집들이었고 그래서 그의 행동거지는 나무랄 때가 없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사환으로 시작해 점차 4번째에서 첫 번째 하인까지 차근차근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리고 일 년간은 미망인의 집에서 단독으로 집사노릇을 했고, 성 베드로 성당의 공석이 나타날 때 까지는 자기 밑에 두 사람을 두고 퇴역 외교관 집에서 집사 노릇을 했다. 그는 키가 크고 여위었고 근엄있었다. 그는 공작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공작 역할을 전문적으로 하는 보수파 배우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는 요령도 있었고 건실함과 자신감도 있었다. 그의 성격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는 공작은 아니지만 적어도 duke일을 전문으로 하는(역할) 보수파 배우처럼 보였다.교구목사가 싹싹하게 말문을 열었다.“포어맨씨, 우리는 당신에게 말할 유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요. 당신은 이곳에 여러해 동안 계셨지요. 당신이 당신의 직무를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만족스럽게 충실히 이행하셨다는 데에 우리는 의견 일치를 봤습니다.”두 교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뭔가 특별한 사실을 제가 알게 되었어요. 그 사실을 교구위원들에게 알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했지요. 놀랍게도 저는 당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성당 지기는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지난번 목사님도 그것을 알고 계셨어요. 그는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그는 늘 말씀하셨죠. 이 세상에는 자기 취향에 맞게 배울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어요.”“이것은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놀라운 일이네.” 장군이 소리쳤다. “여기서 16년 동안 성당 지기로 있으며 읽거나 쓰는 것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거요?”“저는 열두 살에 고용살이를 시작했어요. 요리사가 저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저에게는 글을 배우는 요령이 없었던 것처럼 보여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해서 저는 전혀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없고요. 제 생각 싣기 때문에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아주 잘 알게 되죠. 제 처가 상당히 학식이 있어서, 제가 편지한통이 쓰고 싶을 때는 그녀가 저 대신에 써주죠. 저는 사설 마권 판매인이 아니니까요.”두 명의 교구위원들은 교구목사에게 난처한 기색을 보였고 테이블을 내려다 보았다.“그런데 나는 이 문제를 이 신사 분 들과 상의를 했네, 그리고 그들은 이 상황은 곤란하다는데 의견일치를 봤다네. 네빌스퀘어의 성 베드로 성당과 같은 성당에서 읽고 쓸 수 없는 성당지기는 둘 수가 없네.”알버트 에드워드의 여위고 누런 얼굴은 붉어졌다. 그리고 그는 불안하게 움직였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날 이해해주게 포어맨. 나는 당신에게 늘어놓을 불평을 가진 게 아니라네. 당신은 일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하고 있다네. 나는 당신의 성격과 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하지.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한탄스러운 무지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의 위험을 감수할 만한 권한은 없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중에 대한 문제일세.”“하지만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까? 포어맨씨?” 장군이 물었다.“없습니다, 장군님. 저는 지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젊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글을 배우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글을 배웁니까?”“우리는 당신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싶지 않아요.”교구목사가 말했다. “하지만 교구위원들과 나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석 달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끝나는 날 당신이 읽고 쓸 수 없다면 당신은 나가야 될 것 같아요.알버트 에드워드는 신임 교구목사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에게 성당지기 직책을 준 것을 사람들이 실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상류층의 신도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곧추세웠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작정이었다.“죄송합니다, 목사님.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네요. 저는 너무 늙어서 새로운 재주를 배울 순 없어요. 저는 읽고 쓰는 법을 모른 채 상다.”“그런 경우라면 포어맨 씨 당신은 떠나셔야 합니다.”“네, 목사님, 잘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후임자를 당신이 찾으시는 대로 기꺼이 사직서를 제출하겠습니다.”그러나 통상적인 예의바름을 지니고 있는 알버트 에드워드가 목사와 교구위원들을 뒤로 교회문을 닫고 나왔을 때 그는 그에게 가해진 타격을 견디어 냈던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제구실로 천천히 돌아가서 성당지기 가운을 걸이 못에 걸었다. 그는 가운이 보았던 아주 웅장한 장례식과 멋진 결혼식을 생각하며 한숨 지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는 코트를 입고 모자를 손에 들고 교회 복도를 걸었다. 그는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나왔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광장을 걸어 나왔지만 슬픈 생각에 잠겨 진한 근사한 홍차 한잔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이어진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길을 택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남에게 구속받지 않는 생활을 몇 년 간 하고 난 후 가사도우미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구 목사와 교회위원은 그들이 좋아하는 데로 말할 수는 있었지만 네빌스퀘어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실제로 운영한 것은 그였다. 일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상당한 액수를 저축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기엔 충분치 않았고 해가 갈수록 생활비는 더 들었다. 그는 이런 문제로 골치 아플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성당지기들은 로마의 교황들처럼 평생 그 교회에 있었다. 그는 교구목사가 그가 죽고난 뒤 첫 번째 일요일 저녁예배시간에 하게 될 오랜 충직한 봉사이자 모범적인 성격을 지닌 고 알버트 에드워드 포어맨에 대한 긴 설교를 종종 생각했다. 알버트 에드워드는 비흡연자였고 완전한 금주가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허용 폭은 갖고 있었다. 그는 저녁 먹을 때 맥주 한 잔을 마셨고, 피곤할 때는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웠다. 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