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목 차Ⅰ.서론Ⅱ.푸틴의 생애(대통령이 되기까지) ‥‥‥‥‥‥‥‥‥‥‥‥‥‥‥‥‥‥‥‥2◎어린 시절과 대학 생활‥‥‥‥‥‥‥‥‥‥‥‥‥‥‥‥‥‥‥‥‥‥‥‥2◎엘리트 KGB요원 푸틴‥‥‥‥‥‥‥‥‥‥‥‥‥‥‥‥‥‥‥‥‥‥‥‥3◎정치적 스승 소브차크와의 조우‥‥‥‥‥‥‥‥‥‥‥‥‥‥‥‥‥‥‥3◎크렘린 궁‥‥‥‥‥‥‥‥‥‥‥‥‥‥‥‥‥‥‥‥‥‥‥‥‥‥‥‥4◎제2대 러시아 대통령이 되기까지‥‥‥‥‥‥‥‥‥‥‥‥‥‥‥‥‥‥4Ⅲ.푸틴의 시대‥‥‥‥‥‥‥‥‥‥‥‥‥‥‥‥‥‥‥‥‥‥‥‥‥‥‥‥‥‥5ⅰ.정치개혁‥‥‥‥‥‥‥‥‥‥‥‥‥‥‥‥‥‥‥‥‥‥‥‥‥‥‥‥‥5ⅱ.경제개혁‥‥‥‥‥‥‥‥‥‥‥‥‥‥‥‥‥‥‥‥‥‥‥‥‥‥‥‥‥8ⅲ.대외정책‥‥‥‥‥‥‥‥‥‥‥‥‥‥‥‥‥‥‥‥‥‥‥‥‥‥‥‥‥9Ⅳ.결론 ‥‥‥‥‥‥‥‥‥‥‥‥‥‥‥‥‥‥‥‥‥‥‥‥‥‥‥‥‥‥‥‥10《참고문헌》‥‥‥‥‥‥‥‥‥‥‥‥‥‥‥‥‥‥‥‥‥‥‥‥‥‥‥‥‥ 11Ⅰ.서론러시아가 70여 년간 공산당 통치를 끝내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향한 체제 개혁을 시도한지 15년을 넘었다. 새 세기,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등장한 푸틴 정권은 체제 개혁을 조기에 마무리 짓고 새로운 러시아로 발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푸틴은 2000년 3월 26일 대통령 선거에 의해 제2대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이전의 경제적 침체기에서 벗어나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이로 인해 푸틴은 재선을 거쳐 총리로 물러나 있는 현재까지도 러시아 정치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곧 러시아의 2012년 차기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푸틴이 출마하여 당선될 것이라고 점쳐지기도 한다. 현 대통령인 메드베데프는 푸틴을 위해 대통령 선거 출마 포기 선언을 한 이때에 2004년 푸틴에 대한 지지율도 71.3%에 육박하는 믿기 힘든 수치를 입증하는 결과이다.이렇게 러시아를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게 이끌어갔던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해 알아보자.Ⅱ.푸틴의 생애(대통령이 되기까지)◎푸틴의 어린시절아버지는 푸틴이 하는 일은 동독 드레스덴에서 벌어지는 정치 활동과 잠재적인 적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이었다. 동독에 부임할 때 푸틴은 최고 작전책임관으로써 다음에는 부장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부장 수석보좌관직으로 올랐고 이는 이미 지도급임을 보여주는 것이다.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동독 정부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KGB지부가 당시 속수무책이었던 상황에 푸틴은 가슴 아파했다.◎정치적 스승 소브차크와의 조우동독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푸틴은 KGB체제에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푸틴은 KGB를 그만두고 학계 진출에 목적을 두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학위 취득과정을 밟기 시작했는데 이때 소브차크의 보좌관으로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소브차크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니 적이 생기게 되고 전직을 문제 삼아 비난과 협박을 가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당시 푸틴은 KGB 요원의 신분을 지니고 월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틴은 KGB에 사표를 던지고 사실을 공표하였다.1991년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소련은 무너지게 되었다. 소련이 해제되고 소브차크 의장은 렌소비에트에 대외관계위원회를 신설하였고, 푸틴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외교역프로그램은 국가 독점으로 국영회사에는 문제가 많았다. 시장경제체제로 돌입한 러시아에 맞지 않았음으로 서구와 협력하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였다. 이때부터 푸틴이 실용주의자가 되었다.1992년 소브차크가 최초 민선시장으로 당선되기까지 푸틴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1996년 이후 시장선거는 소브차크 인지도가 낮았고 선거 전략의 미숙으로 고배를 마셨다. 이후 푸틴은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푸틴에게 있어서 소브차크는 정치적으로 대부라고 볼 수 있었다.◎크렘린 궁힘든 실직생활 4개월여가 되던 1996년 8월 푸틴은 동향(同鄕)인 제1부총리 알렉세이 A. 볼샤코프의 추천으로 대통령 총무실 부실장의 직책을 받고 법무와 해외자산 문제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크렘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크렘린 궁으터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총리로 나타났지만 다음 대통령직 이행 임무를 맡았고 2000년 3월 26일부터 제 2대 러시아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첫 번째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쥬가노프, 야블린스키, 툴레프, 지리노프스키를 가볍게 물리쳤다.1999년 겨울과 2000년 봄 대통령 선거전은 앞선 국회 하원의원(두마)보다 조용하게 진행되었는데, 쥬가노프와 야블린스키는 푸틴과 경쟁되지 않았고, 프라마코프는 1월에 후보에서 자진해서 물러났다. 푸틴은 언론 선동이나 정당에 의지하지 않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1999년 가을 푸틴이 을 창당한 것은 조직 구성과 이념 공약을 조직한 것일 뿐이었다. 푸틴은 선거에서 53%의 지지율을 확보했고, 이는 당원들의 푸틴을 향한 견고한 위임의 표시었다.Ⅲ.푸틴의 시대푸틴이 집권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체제적으로 안정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소련의 해체이후, 러시아는 국가 총체적인 변혁기를 거치면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본주의화로 전향을 위한 급진적인 국가정책 때문에 사회,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했다.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권력배분의 갈등과 정치·경제적 비대칭의 심화는 연방관계를 개인적, 지방적, 인종적 성격과 같은 주관적인 변인들에 토대를 두면서 관료의 부정부패 발생에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혼란을 가중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러시아 경제난과 사회적인 불안요소는 정국의 혼란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재정적 적자가 계속되어 1998년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다. IMF와 대외적인 차관 도입으로 인한 부채만 증가시켰고, 임금 및 연금의 체불로 이어졌다. 자연히 파업의 확산, 빈부의 격차 심화를 불러일으키며 국민 생활수준이 악화되었다. 국방비가 삭감됨으로서 군복무 환경의 악화는 군내부의 불만을 조성하게 되고, 옐친 정부는 병력감축과 군 조직 개편 등 군 개혁을 위한 지휘체로그램-2003~2004년간 행정개혁 실행 조치-정보기관 개편-국가공무 체계법-정부행정조직 개편관료주의의 개선공직사회 쇄신슬림화-효율성 제고관료들의 저항과 반발언론 개혁-ORT방송 국영기업 지분 인수-시보드냐 폐간, NTV 지분 인수 및 경영진 교체-TV-6 폐쇄정치수단의 통제자유 민주 가치와 상치사법 개혁-사법개혁을 위한 실무위원회 설치-형사소송법, 법관지위에 관한 법, 헌법재판소법의 개정-중재소송법, 중재재판소법-민사소송법-러시아법체계에 관한 법 개정 등민주주의 발전의 법칙 기틀 마련 푸틴 정부 개혁 정치의 주요내용 및 영향위는 권력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있고,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는 내용도 있다. 그에 반해 권력집중화를 모색하고, 정적을 견제하며, 친정체제 구축에 일조하는 내용도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안도 있지만, 관료와 올리가르히들의 저항 등 반발을 불러오는 내용도 있다. 정책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지만, 의회의 행정부로의 종속을 심화시키는 정책내용도 들어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정치개혁 내용들이 단순히 제시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정치무대에서 실질적으로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재벌들의 정치참여 배제와 정부, 재벌 간 유착관계를 끊고자 했으며 공정한 시장경쟁의 원칙을 견제하기 위해 엄격한 법의 적용 원칙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또 국가 상징물 채택하고 연방관구제도 도입, 연방법에 위배되는 지방법 정비 등 국가체제를 공고히 시켜 나가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푸틴이 실시하는 정책에는 특유의 요소가 있는데, 첫째 목표지향과 정책 효율성의 강조라 볼 수 있다. 푸틴은 초기부터 민족적 애국주의적 성향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면서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위해 법질서 및 국가기강 확립하고, 국익 우선의 외교 노선 추구 등을 강조하였다. 특히 “강대국 러시아의 재건”등 뚜렷하고 단순 명료한 국가비전을 제시하면서 국가취약성의 극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둘째 정치개혁 추진의 정치성(精緻性)이다. 푸틴의 정치개혁이 추진순서, 정책입안,동에 있어서 규제를 완화하여 기업의 참여를 늘리고자 시도하였다. 기업 활동 보호법을 제정하고 행정기관의 기업 활동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축소하였으며, 면허대상 기업 활동 분야를 축소(2,000개→100개) 및 면허취득 절차간소화하고 기업창업 시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였다.②공공부문 개혁정부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우선시 되었는데, 연방 정부부처를 통·폐합(30개→17개, 2004.4월)하고 공무원 정원을 20% 감축하였다. 또한 기존 부처의 기능을 정책기능과 집행기능으로 분리하였고, 집행기능은 처(agency), 청(service)단위 기관으로 바꿨다. 그리고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간 관계 조정을 위하여 주지사 선출제도를 변경(직선제→간선제, 2005.1월)하고 정부예산제도 개선을 위해 예산회계법(treasury code)을 개정하고 통합예산제도를 도입하여 연방예산구조 확대했다.③은행 개혁예금자보호법을 제정하였고, 예금 보호 관리 기구를 설치하였으며 중앙은행의 시중은행 건전성 감독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국제재무보고기준을 도입하였다.④연금제도 개혁Pay-as-you-go라는 시스템 개선에 착수하여 기존 Defined Benefit(DB) 시스템에 본인 기여금 납부액에 따라 연금이 차등 지급되는 Nominal Defined Contribution(NDC) 시스템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연금·사회·의료펀드 기여금을 통합한 단일 통합 사회세를 도입하고 개인연금펀드(provident fund) 및 투자 규정을 신설하고 공공혜택(social benefit) 지급방식을 현물에서 현금으로 변경하였다.⑤노동개혁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꾀하기 위해 신노동법을 제정하였다. 노동자, 노동조합, 사용자의 권리를 명확화 하였고 노동시장 유연화 규정(해고, 임시고용계약, 단체교섭절차)을 도입 하였으며, 최저임금, 노동시간, 초과근무, 휴가, 체불제재 규정 신설하였다.⑥토지개혁지(농지 제외) 소유·매매·저당절차를 규정하고 외국인은 러시아인과 동일하게 토지 및 건물을 구입하고 보유권리 인정(주거용?상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1. 고르바초프의 출생과 배경2. 1985-1987년 시기3. 1987-1989년 시기4. 1990-1991년 시기5. 맺음말1. 고르바초프의 출생과 배경‘그의 출생은....’미하일 세르게이비치(고르바초프)는 한창 기근이 심한 때에, 혼탁한 냇가의 조그만 집에서 태어났다. 냇물이라고는 해도 스타브로폴 스텝 지대의 단단한 지면에 생겨난 길고 가느다란 균열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곳의 기근은 천재(天災)가 아니었다. 국가에 의한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스탈린은 모국인 러시아 남쪽에서 살고 있는 자유를 사랑하는 농민들에게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해빙이 시작된 3월 2일, 그것은 미하일이 태어난 1931년의 일로서, 스타브로폴 사람들은 전에 없던 심한 공포 정치 속에서 악마와 같은 행위에 희생되어 갔다.고르바초프도 살아 남지 못하리란 공산 쪽이 더 높았다. 스탈린이 그의 집단 농장화 정책에 저항하는 농민을 진압하고자 일으킨 인위적인 기근에 의하여, 식료품이 완전히 바닥이 나버린 1933년 가을부터 1934년 봄에 의하여, 식료품이 완전히 바닥이 나 버린 1933년 가을부터 1934년 봄에 이르기까지, 고르바초프의 고향 부락은 인구가 3분의 2로 감소해 버렸다. 수수로 만든 엷은 수프로 연명해 가는 게 고작이었는데, 수확한 옥수수를 국가에 몰수당하고 난 다음은, 쥐구멍에서 긁어내 온 옥수수 알 때문에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1살과 2살짜리 유아가 하나도 남김없이 아사해 버렸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를 가르친 적이 있다는 교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완전히 쇠약해져 버린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매장하는데도 같은 묘에 두세 명씩 묻기도 했답니다.”하지만 아기였던 미샤(고르바초프)는 예부터 생명력이 강한 가계에서 태어났다. 고르바초프의 선조는 전형적인 온순한 러시아 농민과는 거리가 먼 우크라이나의 카자흐였다. 지주로부터 도망쳐서, 처녀지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우크라이나와 돈 지대를 떠나 코카서스로 알려이다.“그는 스스로 모스크바 대학으로 진학할 결심을 했습니다.”하고 역사교사는 말한다. “누구의 권유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양친이나 학교 모두 그만한 영향력이 없었어요.” 하는 것도 영어 교사의 말이다. 실제, 교사들은 이 훈장이 대학 진학에의 티켓이 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스타브로폴이라는 일개 지방에서는, 그것도 국가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체제 하에서는 누구 한 사람도 미샤 고르바초프의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학(無學)인 데다 지방 당 엘리트 사이에서는 크게 지위도 없었던 양친으로서는, 그의 출세를 원조해 줄 수도 없었다. 그는 독자적인 힘으로 장래를 손에 넣기 위한 도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안성맞춤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는 데 있어서는, 겨냥이 정확한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노동 적기 훈장ㅡ 스타브로폴을 떠나기 위한 티켓ㅡ에 추천된 후보자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려 놓아 준 인물은 지역 전체의 콜호즈 의장 그레고리 고르로프였다. 현재 고르바초프와는 가족 전체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고르로프는, 평생을 관료로서 살아온 인물답게 입매가 야무져 보이는 백발의 남성이다. 1949년에는 이 지방에서는 유력한 당 간부로서, 프리볼노예 집단 농장의 의장을 맡고 있던 미샤의 조부 고프카로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 고프카로의 손자인 미샤는, 다른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특성ㅡ즉, 당에 대한 철저한 충성심ㅡ의 소유자임을 나타내어서 동지 고르로프를 만족케 하였던 것이다.모스크바 국립 대학은 가장 권위 있는 최고 학부였다. 그곳의 수험생으로서의 고르바초프의 경쟁 상대는, 모스크바의 엘리트 계급 자제들만이 아니라, 전선에서 훌륭한 훈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온 복학생들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대학이나 소수지만 ‘농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 ‘농민’출신의 수험생 중에서는, 미샤의 노동 적기 훈장만큼 훌륭한 노동 훈장을 수상하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하지만 미샤는 숱한 난관을 돌파하지 않으면 프의 말에 의하면, 법학부에서 최고인 당 관리로 뽑히고 나자 ‘고르바초프는 타협하는 것에 저항을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되어갔다. 그것이 나중에 타협의 천재로서 나타난 것이다.’소련에서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자기 이득을 취하기에 급급한 정계에서는 보호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스타브로폴의 검찰관이라는, 말하자면 출발점으로 되돌아 버린 고르바초프에게 있어서는 유력한 후원자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보호하고 키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연장자를 찾아내서 이용한다고 하는 계획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청년 시대, 인생 중에서 연상인 남성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기를 인정해 줄 만한 인물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 그의 부친이 5년 간이나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르바초프가 사회에 나와서 ‘부친역’과 만났을 때에 반발을 느끼는 원인으로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그에게 힘을 빌려 주었던 모든 보호자의 기대에 답하여, 그들 모두에게 깊은 충성심을 표했다. 그들을 앞지르려고는 하지 않았으며,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그는 확실히 자신의 의문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점차로 그의 후원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직감적으로 읽어 내는 기술을 터득해갔다. 또 그들의 어조나, 행동, 복장이나 표정에서도 특징을 파악하고, 자기를 그것에 맞추어 갔다. “고르바초프는 최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잔혹한 습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가 1985년 크레믈린 정상에 서기 4개월 전까지의 서방 보도 기관이 논평이었다. 확실히 폭력행사는 고르바초프의 무기가 아니었다. 잔혹함 대신에 그는 타고난 ‘선동자’로서의 소질을 갖고 있었다. 만약 지겨운 아파라치키 관리직이라는 지위에 만족할 수 없다고 한다면, 고르바초프는 자기가 가진 자질을 무기로 삼아 앞길을 터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민한 직감력, 개혁자로서의 연기력, 또 색깔을 달리 해야 할 때를 잘 타는 탁월한 능력 등을 이용해서 그는 잇속에 밝은 카멜레온이 요소가 허다하고 경제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성장과 생산성이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또 소련의 기술과 기량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도 인정하였다. 소련의 생산물들은 값비싸고 질이 형편없으며, 소련의 삶의 질은 서구와 일본에 비해 분명이 뒤떨어졌다. 소련은 그 주요 경쟁국에게만 뒤처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은 세계의 이류 국가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끝으로,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소련 사회의 구조에 스며들어 있다고 본 광범하게 퍼져 있는 냉담, 나태, 부패, 냉소, 소외ㅡ시민적 미덕의 붕괴로 요약되는 증상들ㅡ를 공격하였다.고르바초프가 보기에, 자신이 한꺼번에 식별한 모든 결점들ㅡ그리고 그는 그 결점들이 서로를 강화하고 있다고 보았다ㅡ은 소련의 군사력과 정치력을 훼손하였다. 더욱 나쁜 것은, 그것들이 소련 사회주의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 지도자는 개혁된 소련은 선진적 기술을 가진 번영하는 경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체제, 그리고 세계의 의 여타 국가들과의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등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면, 소련 사회는 근대 사회주의의 훌륭한 모범이 될 것이며, 곧 전세계 국민들의 대다수를 사회주의 대의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당 관료제에서 성공의 길을 걸어가면서 체득한 신중함을 갖고 있는 고르바초프는 처음에 경제 분야에서의 온건한 변화만을 제안하였다. 공업 활동을 “가속화하자”는 그의 호소는 주로 비용을 삭감하고 원료를 좀더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경영자들에게 권고하는 식이었다. 그는 또 노동자들에게 좀더 열심히 일할 것을 촉구하였고, 급여 및 기타 상여금을 노동 성과와 연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끝으로, 그는 공작기계 공업을 최신화하기 위해 비상 기금을 내놓았고, 공작 기계 공업이 다른 공업 부문에 선진 기술을 제공하기를 기대하였다.1985년이 지나가면서, 고르바초프는 체제뿐만 아니라 태도와 행동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혁을 진행시키는데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냈다. 그해 말까지 그는 새로운 개혁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은 중앙 계획을 유지하였고, 대부분의 공업들은 여전히 국가 소유로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서방 언론의 일부 기사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소련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와 그의 고문들은 5건의 주요 경제적 변화를 개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들은 매일매일의 정책결정을 분산시키고, 공장 및 소매점 같은 여타 경제 단위들을 자급자족과 이윤추구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려 하였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계획은 각 공장 경영자들로 하여금 무엇을 만들지,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지,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판매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요구하였다.개혁가들은 도매거래에서 경쟁을 고무하고자 하였다. 일부 생산물에 대해, 그들은 구입과 판매 계약을 자유입찰하게 했으며, 그들은 이 절차를 통해 경제 단위들이 비용 효율적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개혁가들은 너무 비싸거나 너무 값싼 물건들은 구입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저비용과 고품질 모두를 발생시킬 것이었다.고르바초프는 또 레스토랑이나 수리점 같은 소매점과, 의류 및 가정용품 같은 경공업에서 협동조합으로 소유된 사기업체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숙련 경영자들이 기존 업체들로부터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프로그램은 이미 고용된 사람들은 협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협동조합은 재산(토지 제외)을 소유할 수 있었고, 회원들은 그들 사이에 이윤을 분배하였다. 새 조직들은 독자적으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는데, 가격은 통상 국가가 설정한 가격보다 높았다. 협동조합은 1987년과 1988년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과중한 국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협동조합들이 국영 상점에는 없거나 국가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품질의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큰 이윤을 올렸다.게다가 고르바초프는 해외 무역과 외국의 소련 투자를 장려하였다. 았다.
2와 3의 미학과 민주주의의 모델론숫자 2, 둘 이라는 개념은 도교철학 등에서는 질서와 조화의 상징을 나타낸다. 그리고 음과 양으로 나누어 반대 쌍이 결합한 완전성을 상징한다. 중국문화에서 둘 이라는 것은 행운의 숫자다. 서양의 수학자인 피타고라스에게 숫자 2는 다양성을 뜻했다. 이처럼 숫자 2는 고대부터 인간세계를 지배해온 기본적인 개념이다. 인간을 분석할 때에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고 선과 악, 신앙을 기준으로 나눌 때에는 신앙론자와 무신론자로 나눈다. 그러나 둘이라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즉 남성과 여성처럼 원래부터 당연히 나누어져 있는 것들을 정의해야 할 때, 더 이상 절충의 여지가 없는 개념에만 쓰여야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둘이라는 요소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과 관계하는 것들을 서로 대립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영장류인 인간은 본능상 복종하기 싫어하는 성질이 있어서 자신이 이것을 택하면 저것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또는 저것을 이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현재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숫자2는 대부분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진보와 보수, 소수의 경제적 지배와 다수의 피지배, 남과 우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숫자 2는 중간이 없다. 나와 너를 갈라서 싸우기 일수 이고 자본주의과 빨갱이로 나누어 이념 전쟁을 한다. 여당과 야당으로 나누어 절충점이 없이 서로의 주장과 비판만을 동시에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살펴 보건데 한나라당은 한미 FTA를 국회 본회의 하루 전에 야당 몰래 날치기통과 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한미 FTA라는 비준 안이 있고 그것을 통과시키는 비준 안 국회 통과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숫자 2이다. 여기서 부족했던 것은 공정한 절차라는 제 3의 요소, 숫자 3이다. 비준 안 처리 과정에 있어 국민과 충분히 소통했는가? 그리고 야당과 결론에 거의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의 충분한 토론과 타협, 절충을 거쳤는가? 만약 그렇게 충분한 절차를 거쳤다고 판단했다면 하루 전에 갑자기 소집하여 야당의 아우성과 최루탄 속의 국회 안에서 굳이 비준 안 처리를 왜 했을 지는 세 살 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수준의 상황이다.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개념이 숫자 3이다. 숫자 3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성한 숫자다. 피타고라스에게는 완벽한 조화를 뜻한다. 통합의 숫자1과 다양성의 숫자 2가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만으로는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없기에 제 3의 요소를 도입한 사례는 아주 많다.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행정부는 3권으로 서로 분립되어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서로를 견제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적절한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것은 숫자3이다. 적은 것과 과한 것의 중간이기 때문이다. 음식도 골고루 적당히 섭취해야 건강에 좋고 운동도 적당히 해야 생활에 불편함도 없고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무엇이든 중용의 뜻을 헤아려야 좋다. 인간세상은 그러한 것이다.따라서 민주주의의 최상의 모델을 생각할 때는 숫자 3을 도입해야 한다. 어떠한 대상에 예속되기 쉬운 인간이 모인 사회라는 곳은 예속을 매개로 필연적으로 이분화 되기 쉽다. 게임에는 룰 이라는 것이 있어서 개개의 유저들은 불만이 없이 플레이 한다. 민주주의라는 현대의 담론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소통을 통해 절충하는 법을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혹자는 법 자체가 룰이라고 문제제기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론을 내는 방법일 뿐이지 룰은 아니다. 서로의 주장을 통해 바로 결론을 도출하려하면 여러 가지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갑과 을의 주장이 있을 땐 그 주장의 중간점을 찾아 서로가 수긍해야 한다. 그것이 룰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절충점을 찾는 것을 말한다. 공정한 절차란 바로 소통이다. 현대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대부분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것들 이다. 소통이 없으면 절충 또한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용의 개념을 도입한 숫자 3인 소통은 우리들의 뇌리에 당연히 각인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요인Ⅰ. 서 론Ⅱ. 선행 연구Ⅲ. 가설설정과 연구방법Ⅳ. 연구결과Ⅴ. 결 론♣ 요 약 ♣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요인이 논문은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쟁이 활발한 이 시대에서 한국인의 삶의 만족이 어떠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삶의 만족도 향상을 위해 경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 분야 별로 각 행복결정요인을 도출하여 만족감에 주는 영향을 분석하고자 하였다.이 연구는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의 한국인의 삶의 질 조사 2001 서베이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삶의 만족과 행복감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소득과 정치참여, 사회적 유대와 신뢰, 그리고 문화적 기반시설이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행복결정요인을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과 효율적 정책의 필요성, 사회적 측면의 결정요소를 위한 기반시설 확충과 인식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Ⅰ. 서 론2007년 대선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경제성장의 화두로 부각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로 당선시켰다. 국가 경제가 성장하면 기업환경이 우호적으로 변화하여 영업이익의 증대와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얼어붙은 내수경기도 활발해 질 것이다. 국가가 돈이 많아지면 사회보장제도에 쓸 수 있는 자본도 많아 질 것이고 이러한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이다. 그래서 과반이상의 국민들은 바로 이러한 긍정적인 순환 고리를 생각하며 경제성장의 상징인 이명박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명박 후보는 경제성장을 우선시 하겠다는 주장을 대선기간 내내 강력히 했고 초고속 승진의 이력과 탁월한 능력을 인증한 기업가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경제악순환 고리를 끊고 선순환 고리로 전환시킬 적임자의 역할을 확실히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시 하여 기업을 성장시키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이익이 창출될 것이라 생각하으로 복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 주어지는 것이고 복을 받아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선행적 개념으로 받아 들여 진다. 하지만 인간에게 복은 수동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누려야할 능동적인 것이다. 건강한 신체를 받은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이기 때문에 오히려 복은 물질적인 것이고 행복은 추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행복과 복을 이분법적 사고로 이분화 시켜 논의의 대상에 포함시키려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온다. 이지선 외(2001)는 행복과 복은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 연구에서는 23개의 관련 개념을 선정하고 한국국적의 234명의 대학생과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행복한 사람과 복 받은 사람의 특징을 각 5개씩 선정하도록 하였다. 예비연구를 통해 도출한 장수, 건강, 명예, 돈, 사회적 안정, 집안배경, 부모, 운, 친구, 애인, 배우자, 낙관적 성격, 직업, 좋은 국가, 외모, 종교, 안정감, 흥미와 열정, 사랑, 여가시간, 자기만족감, 자유, 인내심, 삶의 목표, 자기 조절능력 등 23개 요인들을 제시하여 각 5개씩 선택하도록 하여 행복한 사람과 복 받은 사람의 특징을 분류하였다.결과를 요약하면, 행복한 사람은 자기만족감, 건강, 낙관적 성격, 사랑, 흥미와 열정 등의 순으로 선택하였고 복 받은 사람은 건강, 돈, 친구, 애인, 배우자, 부모, 낙관적 성격 등으로 각각 선택하였다. 공통된 특징으로는 건강과 낙관적 성격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행복과 복은 서로 다르지만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을 알 수 있었다.이 연구는 객관적 기술을 이용한 조사로써 주관적인 요인의 상관관계를 밝히기에는 부족량 정보량을 갖고 있는 한계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거대한 분류체계 속의 주요 행복결정요인을 선택하여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줄만한 객관적 자료 또한 반드시 제시할 수 있어야하고 이론적 관심을 갖는 경제적인 측면이 삶의 만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소득만이 행복을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결정요인은 아니라는 것을 앞서 선행연구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 대한 결정요인을 추가로 알아볼 것이다.Ⅲ. 가설설정과 연구방법1. 가설앞에서 제시한 삶의 만족과 관련된 요인은 인간의 감정, 즉 욕구와 본능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분석했던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요인을 기초로 매슬로우가 주장한 인간의 욕구를 이루는 구조적 이론을 참고하여 경제, 사회,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총 4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각 분야별로 삶의 만족에 대한 선행연구에서 2012년을 살아가는 현 시점에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결정요인을 선별하여 삶의 만족도와의 관련성을 측정할 것이다. 덧붙여서 그러한 상호작용 관계로 미루어 네 가지 요인을 변수로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 향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한 검증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해 보았다.첫째.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소득의 수준에 영향을 받는다(경제적 요소).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한국인의 삶에서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관계이다. 삶의 질과 만족도에 대한 기존 연구들에서도 소득수준은 행복의 주요 결정요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소득수준에 따른 행복의 상대적 강도를 살펴보는데서 그쳤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소득수준의 구간을 정하여 각 구간 별 삶의 만족도를 분석할 예정이다.한국인의 월 평균소득은 약 200만원이다. 월 평균소득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삶의 만족감이 더 약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얻는 소득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남의 소득을 알고 싶어 하고 신경을 쓰게 되며 그로인해 자신의 소득에 대한 만족감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 2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삶의 만족감이 더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월 평균소득을위하여 회귀분석을 이용하여 결과를 도출한 을 추가적으로 제시하였다.앞서 가설에 대한 설명대로 소득이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에 주는 영향은 많을수록 만족도가 올라가는 단순한 측정이 아닌 고소득 구간에 들어서게 되면 소득이 삶의 만족도는 관련성이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이미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득보다는 다른 요인에서 삶의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참여는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변수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할 것으로 예상된다. 참여는 우리의 삶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바꾸는 행동이 아닌 간접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반면 근로여건과 여가생활은 조건이 좋을수록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가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대와 신뢰는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선행연구에서 언급한 심리적 안녕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고 그것이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구성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Ⅳ. 연구결과은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와 서론 및 선행연구에서 제기한 상관요소들과의 관계의 결과를 나타낸다. 이 표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와 같이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의 비율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수치상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종속변인의 개별변수 값의 분류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나 개별변수가 동일한 종류의 수치로 이용되었다면 두 종속변인간의 수치상의 차이는 더욱 좁혀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의 독립변수별 비율분포도로 보나 개별변수별 비율로 보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두 개념은 유사한 개념인 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경제적 구성요소 중 한국인의 삶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월 평균 가계소득은 수치가 높아질수록 삶의 만족도도 더불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소득구간이 높아지면 이전 소득구간보다 삶의 만족도 비율이 더욱 확장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월 450만 원 이상의 고소득을 올린다고 말한 응답자 전체가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하였다. 이것은 37237109없음115910024여가시간**중요함72082596206보통1651812657중요하지 않다14196여가시간의 정도많다1502012545적당하다3441827389적다3144025896없음91237539주당 근무시간2-30시간23321532-60시간338442839962-90시간168191345392시간 이상113104출처: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2001).주: 무응답은 표기하지 않았음.변 수응 답삶의 만족도행복감만족함만족하지 않음행복함행복하지 않음경제월 평균가계소득**149만 이하78.4%21.6%53.6%46.4%150-249만91.048.9671.6828.32250-349만94.195.8178.4221.58350-449만96.153.8589.7410.26450만 이상10001000정치일반 사회참여중요하다89.7410.2672.1427.86중요하지 않다89.9710.0373.5626.44정치활동 참여**중요하다88.8411.1672.8327.17중요하지 않다92.147.8673.5826.42정치참여 자유중요하다88.8111.1973.2926.71중요하지 않다90.759.2572.9527.05사회학교, 직장 대인관계**중요하다89.9410.0672.9627.04중요하지 않다89.5210.4874.2925.71친구**중요하다90.049.9673.5526.45중요하지 않다87.8812.1266.6733.33사랑과 애정중요하다89.210.869.5330.47중요하지 않다90.39.775.1224.88직장 대인관계의 만족도**만족94.025.9885.3314.67보통87.9312.0767.2432.76불만족50.0050.0025.0075.00우정과 동료애**중요하다89.6610.3473.1826.82중요하지 않다90.499.5172.8927.11문화여가시설**부족하지 않다89.6210.3874.3425.66부족함89.3110.6968.5031.50없음92.747.2680.6519.35여가시간**중요함89.7810.2274.3125.69보통90.169.
사회적 자본 쇠퇴에 대한 각 계의 입장 정리토크빌이 시민 결사체의 예술을 꽃피운 나라로 감명받았던 미국에서 바로 시민사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퍼트남 (R. Putnam)은 지적한다. 퍼트남에 의하면, 1965년 이래 시민들간에 비공식적인 방문과 사교에 쓴 시간은 1/4이 감소하였고, 클럽이나 시민단체조직에 참여하여 쏟아 붇는 시간은 거의 절반이 감소하였으며, 사친회, 엘크클럽, 여성유권자연맹, 적십자, 노조, 볼링리그와 같은 전통적인 자발적 결사체의 회원 수는 25%에서 50%까지 감소하였다. (Putnam, 1996) 미국에서 1973년과 1993년 사이에 정치집회, 연설을 포함한 집단적 정치참여가 1973년과 1993년 사이에 36% 감소하였고, 동네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공적모임에 참가율이 39%, 정당을 위한 활동은 56%나 감소하였다. 시민적, 종교적 결사체의 회원들의 숫자도 급감하고 있다. 매주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1950년대의 48%에서 1970년대에는 41%로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노동자들의 결사체인 노조의 가입율도 1952년에는 32.5%에 달했으나 1992년에는 15.8%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 자선 단체의 회원도 줄어들고 있다. 1964년이래 여성단체 총연맹의 회원은 반이상 줄어들었고, 1969년 이래 여성유권자연맹 (League of Women Voters)의 회원도 42%나 감소하였다. 1970년이래 보이스카우트의 회원은 26%, 적십자회원은 61% 감소했다. 친목단체인 라이온스는 1983년 이래 12%, 1979년 이래 엘크스는 18%, 슈라인즈는 27%, 제이시는 44%, 메이슨은 1959년 이래 44%의 회원감소를 보이고 있다. (Putnam, 1995) 퍼트남교수는 "나홀로 볼링" (Bowling Alone)이라는 논문에서 미국에서 볼링리그의 감소가 자발적 시민적 결사체를 통한 공동체적 참여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1980년과 1993년 사이에 볼링인구는 10% 늘어 방대한 회원과 관료조직을 갖춘 '제3부문' (third sector)인 '우편리스트' 조직' ('mailing list' organization)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우편리스트 조직은 미국퇴직자협회 (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 AARP), Sierra Club (환경),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여성), Oxfarm, Metropolitan Museum of Arts (박물관), Ford Foundation (재단), Mayo Clinic (병원)등이 있다. (Putnam, 1997: 47-48) 그러나 퍼트남은 이러한 제3부문은 공동체 형성을 통한 사회적 연결 (social connectedness)의 감소를 반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우편리스트 단체에서 회원들은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회원들은 공동의 상징과 이데올로기로 연결되어 있을 지 모르나 서로 간에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모든 2차결사체는 비영리단체이지만, 대부분의 거대 비영리단체 (하바드대학, 포드재단, 메트로폴리탄오페라)는 관료조직이지 2차결사체가 아니다. 따라서 제3부문의 성장이 사회적 연결의 증대로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Putnam, 1996)퍼트남의 미국의 시민사회의 쇠퇴와 사회적 자본의 감소 주장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셔드슨 (M. Schudson)은 먼저 퍼트남의 통계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셔드슨은 다른 통계자료 (Verba, Scholzman, Brady, 1999)를 인용하여 1967년에서 1987년 사이에 공동체문제해결조직의 회원 수는 31%에서 34%로, 지역문제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일한 사람의 비율이 30%에서 34%로 증가하였다고 밝혔다. 둘째, 워싱턴에 소재한 우편리스트 조직을 2차결사체가 아니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편 리스트 조직에서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지 않고 수표만을 nt)과 찬성운동, 도덕적 다수를 주장하는 기독교 우익운동과 진보적 기독교 운동 등이 정당과 국가기구 바깥에서 동시에 일어나 균형을 이루었다. 이 시대를 시민적 덕성의 쇠퇴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스카치폴 (Skocpol)은 시민사회의 쇠퇴라는 퍼트남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퍼트남의 자료가 세대간의 차이, 시대적 변화를 경시하여 자료의 왜곡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교육받은 여성은 주부로서 사친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나,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여성들은 자식들을 사립학교로 보낸 뒤, 자신은 직장이나 전국적 전문단체에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친회의 회원은 줄지는 모르나 다른 결사체의 참여는 증가하여 전체적으로는 시민사회 참여율의 변화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퍼트남은 사친회의 회원이 줄고 참여강도가 낮아지는 것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Skocpol, 1996, 1999) 또한 스카치폴은 미국의 시민 결사체가 전문가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퍼트남이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많은 미국의 시민 결사체는 '회원없이 대변인 들만으로" (advocates without members)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대변인들에게 결사체의 운영을 맡겨 놓은 채, 자신들은 자신이 등록되어 있는 결사체가 담당하지 않는 영역에 자원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Skocpol, 1999) 미국퇴직자협회 (AARP)는 50세가 넘은 3500만명의 회원을 자랑하고 있으나 단지 5-10% 만이 지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신입 회원도 지부 모임에서 초청받아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우편으로 가입하고 있다. 미국퇴직자 협회는 지방에 뿌리박은 연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Skopol, 1996)퍼트남의 미국시민사회 논쟁의 두 번째 주제는 왜 시민사회가 약화되고 있는가이다. (Putnam, 1996, 1999 퍼트남은 시민사회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을 속도전에 따른 시간적 여유의 부족, 경제적 어려움 (또는 물질적 풍요), 주거 이동의이라고 주장하였다. (Putnam, 1996)이에 대해 셔드슨은 TV는 시민적 참여활동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TV는 생태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쇠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TV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베니거 (James Beniger)는 셔드슨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디지털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전자시민사회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에서 의사소통하는 것은 타운 홀 회합에 참가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으나 '나홀로 따로따로 소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터넷 상에서 '나홀로 함께'라는 것이다. 인터넷이 개인들이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함께 공동체"를 실현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에서 시민들이 공동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표를 공동으로 최고의 완벽한 예술의 경지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토크빌의 이야기가 디지털 시대의 미국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스카치폴은 TV가 시민사회의 부침에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으나 TV는 시민사회에 제약과 동시에 기회로도 작용하였다고 주장한다. (Skocpol, 1996) TV와 전자매체는 이중 직장에서 피곤한 몸으로 귀가해서 TV를 보면서 전자 여론조사에 응답함으로써 국가 수준에서 사회적 연결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카치폴은 퍼트남이 대중의 레져행태의 변화에 시민사회의 쇠퇴의 책임을 묻고 있다고 비판하고 시민사회의 쇠퇴는 정부와 기업의 기득권 엘리트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만 (Lehman)은 밴필드 (E. Banfield)의 '무도덕적 가족주의'의 개념으로 시민사회와 사회경제적 요인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밴필드는 남부 이탤리인 시실리의 극심한 빈곤과 후진성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선을 위해 함께 행동하지 못했다는데 기인한다"는 명제를 내걸고 그러한 마을을 지배하는 정신이 '무도덕적 가족주의'로 개념화하였다. 무도덕적 가족주의하에서 핵가국의 진보주의자 (민주당)와 보수주의자 (공화당) 모두 시민사회가 약화되었다는데 동의하고 약화된 시민사회의 재건 (repair)만이 미래의 미국의 희망이라는데 초당파적으로 합의하였다. 대표적으로 공화당의 댄 코츠 (Dan Coats) 상원의원은 "Projects for American Renewal"이라는 프로젝트 하에서 19개의 법안을 발의하였다. 이 법안들은 붕괴의 위기에 처한 가족, 교회, 이웃공동체, 자발적 결사체를 재건하기 위한 지원을 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Policy Review, Jan-Feb 1996) 민주당의 브래들리 상원의원도 미국사회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워싱턴의 중앙정부에서 주와 지방으로 권력 이전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시민사회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Time Present, Time Future: A Memoir에서 제기하고 있다.그러나 시민사회가 다시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하면서도 민주당과 공화당,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시민사회의 원인과 시민사회 활성화에 대한 다른 처방을 내놓고 있다. 먼저 왜 시민사회가 약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신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상반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시민사회 쇠퇴의 원인을 거대 복지국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들의 복지를 책임져 주겠다고 등장한 복지국가가 가족, 교회, 시민결사체 단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위와 기능을 복지 전문관료들에게 이양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웰페어 체크가 아버지의 지갑을 대체하였고, 사적 자선기금은 정부지출로 대체되었으며, 교회 자원자들은 아마추어라는 이유로 붶겨 났고, 슬럼정화 프로젝트에 의해 오랫동안 살아왔던 공동체가 통채로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Policy Review, Jan/Feb, 1996) 사회보장 (social security)에서 학교급식에 이르기까지 관료화된 복지프로그램은 시민들로 하여금 서로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에 모든 것을 의존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