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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산 운영 레포트
    생산 운영 레포트- 해태제과 -강의명 : 생산운영관리교수님 : 김정대학 과 : 사학과학 번 : 5020572이 름 : 박기윤- 목 차 -1. 서론선정동기2. 본론1) 해태제과의 기업 소개⑴ 기업 이념⑵ 기업 성장 과정⑶ 윤리 경영⑷ 연혁2) 해태제과의 기업 전략⑴ 해태제과의 SCM과 물류① SCM 정의, 필요성, 기능② 해태제과 통합물류센터 도입배경③ 물류센터 통합 후 개선된 점⑵ 핵심역량과 SWOT 분석3. 결말※ 참고자료1. 서론선정동기“2009년 제8회 한국 SCM 대상”수상해태제과는 2005년 크라운제과로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SCM 및 물류발전의 우수성과 성공적인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한국 SCM 대상을 수상하였다. 해태제과는 기업이 인수된 뒤에도 꾸준한 노력으로 기업을 회생시킬 수 있었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노력들 중 공급망 관리의 꾸준한 개선의 노력들이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과거의 해태제과는 물류거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영업서비스 부분에서도 주문처가 많고 과정이 복잡했다. 예컨대 전국 6개 공장과 1개의 물류거점에서 주문을 받다보니 영업사원은 7번을 주문해야 했다. 이는 각 공장마다 생산하는 제품이 달라 품목별로 주문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문을 함에 따라 차량 1대 분량이 안될 경우 적재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재고를 싣는 경우가 발생해 부동재고가 늘었다. 또한 주문을 여러 번하다보니 하역도 여러번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해 작업량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재고량 감소, 운영비 절감, 영업지원 등을 위해 물류가 달라져야 했다. 그에 따라 최근 해태제과는 물류전문업체에 자사의 물류개선 컨설팅을 의뢰했고 CJ GLS로의 의뢰를 통해 해태제과가 전국에 10개의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비효율과 낭비요소가 많다고 지적받고, 중부권에 허브센터를 만들어 전국을 커버 하는 거점 및 네트워크 재편을 제안받게 된다. 이에 따라 해태제과는 물류통합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통합물류센터인 허브센터를 구축함으로써 수많은 개선을 이루게 된다. 이 는 사람, 무슨 일이든 즐길 수 있는 인재인 낙인이 있다. 또 동북아 제일의 제과기업으로 제과업계의 확실한 리더, 업계발전 선도를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고객으로부터 사랑받는 창조형 리더 기업으로 업계의 발전을 선도하고 공정경쟁질서를 주도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을 기업의 미래상으로 보고 있다. 기업의 목표에는 질적으로 충실한 회사로 고객의 사랑을 받는 창조형 회사를 지향하고 있으며 애용고객에게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내부고객에겐 자기계발과 역량을 강화시키며 협력고객에겐 상생정신을 강조하고 주주, 투자고객에겐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하며 국가와 사회에는 우량기업으로 위대한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영전략의 목표는 국내 최고의 역사와 전통기업, 좋은 회사로 장수하며 문화기업으로 발전하여 문화경쟁력, 즉 체력과 지력, 감성 고객중심의 문화로 고객 존중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개념 식품을 개발하여 인류의 생명과 건강에 기여함을 경영전략의 목표로 삼고 있다.⑵ 기업 성장 과정해태제과는 1945년 10월 3일 “해태제과 합영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해방과 함께 순수한 민족자본과 우리 기술로 세워진 국내 최초의 식품회사로서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인이 창업하였다. 해방 이 후 극도로 피폐하고 혼란스러웠던 사회경제적 상황하에서 원료난과 자금난 등의 악조건이 계속 이어졌고, 1946년에는 상무부의 긴급물자계획에 따라 미제 드롭프스 900만 톤이 수입되어 국내 제과시장을 휩쓸면서 많은 군소업체가 도산하였다. 그러나 해태제과는 생산품목을 다양화하고 질적 향상을 꾀하여 1947년 국산품 전시회에서 「웨하스」, 「제리」 등이 우수성을 획득하면서 품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판매조직이 거의 와해되었으며, 국민들의 극심한 생활고로 불황의 시기를 맞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영등포 양평동에 3,500평의 대단위 공장부지를 조성하였으며,처리되는 시련을 맞게 되었으나, 식품회사로서의 오랜 역사와 부도 이 후 자체적인 극복노력, 해태 브랜드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1999년 출자전환을 성공리에 마무리 지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CVC, JP모건, UBS캐피털 등의 투자 그룹이 결성한 UBS 컨소시엄으로부터 외지유치를 마치고, 건설하고 투명한 제과전문기업으로 거듭난 이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재성장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러던 중 투자 그룹으로 결성된 UBS컨소시엄의 투자 회수 차원에서 M&A 전략에 따라 2005년 1월 크라운 컨소시엄에 의해 국내 토종기업으로 새롭게 태어나, 국내 최고의 제과 전문기업을 넘어 동북아 제일의 제과 기업으로 새로운 도약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⑶윤리 경영윤리경영의 실천을 위해 해태제과는 고객만족을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모든 법규의 준수와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국민의 퐁요로운 삶과 사회발전에 공헌하고 협력회사와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여 신뢰와 협력의 기초 위에 공존공영하며 모든 임직원은 쾌적한 환경, 조화로운 문화 속에서 명예와 품위를 유지하며 공정하고 자율적, 창의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⑷ 연혁20092009 한국 SCM 대상 제조부문 수상 [한국 SCM학회]20092009 대한민국 윤리기업 대상 문화경영부문 수상 [이코노믹리뷰]2005.01크라운 콘소시움 해태제과 경영권 인수신임 윤영달 대표이사 취임2004.03브라보콘 광고대상 개최뉴욕페스티벌 광고상 수상(홈런볼, 연양갱 TV광고)2004.04한국소비자대상 수상(해태 고향만두)2004.09과자쇼핑몰 오픈2004.10아이스크림 쇼핑몰 오픈2004.102004 물류대상 대통령표창 수여2004.112004 장애인고용 촉진대회노동부장관상 수상(천안공장 인사담장자)2003.01엔터테이먼트 포탈 아이부라보 닷컴2003.03Http://www.ibravo.com오픈2003.04한국로지스틱스학회 최고 경양자 대상 수상2003.071.11해태- 가루비 합작법인 설립1991.08주식분산 우량기업 선정1988.08HAITAI - JAPAN 현지법인 설립1987.07HAITAI - AMERICA 현지법인 설립1987.03MEIJI - 해태합작판매 주식회사 현지법인 설립1987.01해태제과공업(주)를 해테제과(주)로 상호변경1984.05광주공장 완공1983.08해태 - 바툭 합작사 현지법인 설립 (껌 생산)1976.12대단위 종합 껌 공장 완공1976.03금성유업(주) 흡수합병 (현 안양공장)1974.04아이스크림 공장 신축1972.05우량공모 법인으로 대통령상 수상1972.03기업공개1967.12비스킷 공장 신축,초콜릿 완전 제조라인 및 비스킷 스틸밴드오븐도입1961.01해태산업 주식회사 흡수합병 및 용산구 남영동 공장과 동대문구 보문동 공장을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이전1960.07해태제과 합명회사를 해태제과 공업 주식회사로 상호변경1959.07해태산업주식회사 설립. 비스킷 생산1945.10해태제과 합명회사 설립. 캔디, 카라멜 생산2) 해태제과의 기업 전략⑴ 해태제과의 SCM과 물류① SCM 정의, 필요성, 기능SCM 정의 : 제품의 생산단계에서부터 소비자에게 최종적으로 판매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연결시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매, 생산, 물류, 판매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제하고 관리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SCM의 필요성①기업의 부가가치 중에서 60~70% 정도는 Supply chain에서 발생- 기업 단독적이고 내부적인 개선을 통해서는 그 효과가 한계에 다다름②매출의 10~40가 SCM 비용- 채찍효과로 알려진 정보 전달의 지연 및 왜곡 확대 현상③재고 감축을 통한 경쟁력 차별화④소비자 주도의 시장 환경 변화SCM의 기능 : SCM의 기능은 크게 전략, 계획 실행으로 나뉠 수 있으며 각각의 기능 별로 여러 세부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세부 기능들에 대하여는 업종 및 기능별로 다수 존재한다.전략 :SCM Strategy공급사슬 전체의 최적화 차원에서 공급사슬의 설계 및 개선 짧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자보다 빙과류의 물류센터가 많은 것은 리드타임이 더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빙과류는 주문 후 빠르게 공급하지 못하면 판매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여름철 성수기의 아이스크림 판매는 주문 후 얼마나 빨리 상품을 공급하느냐가 관건이다. 아이스크림통에 제품이 없는데 이를 채우지 못하면 소비자는 경쟁사의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따라서 얼마나 빨리 매장에 도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아이스크림은 과자보다 많은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다거점 체제는 소비자에게 빠르게 상품을 공급하는 이점은 있지만 물류운영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다거점 체제를 운영하면 보관 · 하역비가 많이 들고, 물류센터마다 관리인원이 있어야 하므로 운영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각 거점에 재고가 있다 보니 보유재고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태제과는 물류거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영업서비스 부분에서도 주문처가 많고 과정이 복잡했다. 예컨대 전국 6개 공장과 1개의 물류거점에서 주문을 받다보니 영업사원은 7번을 주문해야 했다. 이는 각 공장마다 생산하는 제품이 달라 품목별로 주문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문을 함에 따라 차량 1대 분량이 안 될 경우 적재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재고를 싣는 경우가 발생해 부동재고가 늘었다. 또한 주문을 여러 번 하다보니 하역도 여러번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 작업량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재고량 감소, 운영비 절감, 영업지원 등을 위해 물류가 달라져야했다. 해태제과는 물류전문업체에 자사의 물류개선 컨설팅을 의뢰했는데 CJ GLS가 해답을 제시했다. CJ GLS는 해태제과가 전국에 10개의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비효율과 낭비요소가 많다고 지적하고, 중부권에 허브센터를 만들어 전국을 커버하는 거점 및 네트워크 재편을 제안했다.③ 물류센터 통합 후 개선된 점첫째, 물류비 절감이다. 우선 거점 집약에 따른 보관 및 상하역비가 절감됐다. 운송비도 절감됐다. 복합 연계 수배송, 물류업체 공동 수배송 시너지, 불필요한졌다.
    경영/경제| 2014.04.12| 9페이지| 1,000원| 조회(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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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레포트 - 비교광고
    성공적인 비교광고를 위한 조건사학과 박기윤정진석목 차1. 비교광고란?1-1. 비교광고의 개념1-2. 비교광고의 예시2. 사례와 분석2-1. 헤지스2-2. 자동차(현대 그랜저 등)2-3. 마이피플2-4. 엠파스2-5. SK/KT2-6. 프렌치카페/내츄럴치클3. 결론1. 비교광고란?1-1. 비교광고의 개념비교광고의 정의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경쟁적 포지셔닝’에 대해 알아보자.먼저 포지셔닝이란, 소비자들의 인식 속에 자사의 제품이 경쟁 제품에 대비하여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위치를 말한다. 기업들은 자사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포지셔닝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다. 포지셔닝의 유형은 제품의 속성, 이미지, 사용자, 모델, 사용상황 등이 있다. 그 유형 중, 경쟁적 포지셔닝의 하나로 경쟁제품에 의한 포지셔닝은 소비자의 마음속에 인식된 경쟁제품 대비 자사 제품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비교광고(comparative advertising)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1-2. 비교광고의 예시비교광고의 대표적인 예로 펩시, 아이리버, 페덱스를 들 수 있다.? 펩시(pepsi)펩시는 점유율 1위의 코카콜라(coca-cola)를 따라잡기 위해 많은 비교광고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비교광고로 뽑힐 만큼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재미있는 광고가 많다.타제품보다 펩시를 찾는 사람들이많아 자판기 앞바닥이 닳아있다.빨대도 펩시말고는 다른 제품은피해간다는 재미있는 광고이다.? 아이리버애플사를 겨냥한 아이리버의 재미있는 비교광고이다. 아이리버읙 광고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먹고 있는 사과는 애플(Apple Inc)사를 연상케 한다.? 페덱스(FedEx)페덱스는 미국의 세계 최대의 물류 특송 서비스 업체이다. 첫 번째 광고는 전 세계로 택배물을 운송하는 독일의 국제적인 운송 회사인 DHL을 겨냥한 광고이다. 두 번째 광고는 국제 화물 운송회사인 UPS를 겨냥한 광고이다.2. 사례와 분석2-1. 헤지스(hazzys)요즘 들어 대표적인 비교광고 사례로 알려져 있는 빈폴과 폴로에 물 안으로 들어간다. 이는 각각 빈폴과 폴로의 시대는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폴과 폴로를 입던 사람들이 이제 헤지스로 간다는, 헤지스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광고이다. 이광고의 다음부분에는 두 사람이 헤지스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카피의 ‘폴’도 빈폴과 폴로의 ‘폴’에서 따왔다. ‘굿바이 폴’은 폴로와 빈폴에 굿바이하고 헤지스를 입으라는 뜻인 것이다. 하지만 이 비교광고는 단순히 헤지스 측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런 헤지스 광고가 나가자 빈폴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11월호 패션 잡지에 빈폴 광고 바로 뒤에 헤지스 광고가 실리자 빈폴의 제작사인 제일모직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 빈폴은 이것은 엄연한 비방광고라며 광고 대항사 쪽이 이것에 대해서 경고했고, 대행관련 업무를 중단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에 헤지스측이 이 같은 것은 비도덕적 행위라며 반발했다. 비방광고와 비교광고의 구분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듯 이 광고는 비방광고와 비교광고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효과는 좋았다. LG패션은 광고가 나간 뒤 하루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광고 이전 1500명에서 광고 이후 5천명까지 늘었다고 밝혔다. 2000년 출발한 후발주자로, 트래디셔널 캐주얼 브랜드 시장에서 3~4위에 머무르고 있던 헤지스 로서는 일단 ‘스캔들’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헤지스는 헤지스를 빈폴, 폴로와 함께 ‘빅3’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이 광고를 실었다고 밝혔다. 우리 브랜드가 두 브랜드보다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허장성세를 부리기보다는 솔직한 광고로 승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2-2. 자동차우리나라 현대자동차는 비교광고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히 세계에 이름 있는 브랜드사의 유명한 차 모델들과 비교하면서 그 광고의 효과를 보려 하고 있다.오른쪽 사진은 외국에서 나가는 현대자동차 CF의 한 장면이다. 이 광고는 처음부터 자동차계에 SUV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랜드로버사의 SUV와 드러내고 비교한다.이처럼 장점으로는 비교를 함으로써 외국에서 나가는 현대자동차의 대표적 비교광고이다. 일본의 세단의 왼쪽광고는 우리나라의 광고이다. 일본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계단을 내려온다. 조용히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일본세단의 조용함을 말해 주는 듯 하며 문구에도 일본자동차는 조용하고 편안하고 부드럽다 하며 일본의 세단을 칭찬 하는 듯 하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랜저는 타 보셨습니까?” 하는 말에 여자는 흠 짓 멈추게 된다. 현대자동차에서 일본의 도요타사를 겨냥해 만든 광고이다. 일본 기모노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그 광고를 찍은 후에 현대자동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 도요타 고급 세단과 비교해서 견줄 만 하다는 현대차의 자신감 표출로 받아들여졌다.?그랜저는 3월 광고 이후 판매량이 2월 5,030대, 3월 6,725대, 4월 7,399대를 기록,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렇게 이미 세계 1위라고 할 수 있는 도요타 사와 현대의 차를 비교 하면서 도요타의 차에 대한 현대의 자신감으로 받아 들여 진 것이다. 도요타에 자신을 견주고 자신이 도요타와 비슷한 그리고 더 나은 자동차라는 자신감이 사람들이 현대자동차를 보는 인식을 높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2-3. 마이피플최근 전자기기의 스마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를 잡으면서 스마트폰 시장이 계속 커지는 추세이다. 이렇게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에 따라 스마트폰 무료 메신저 시장도 지속적인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중 카카오톡은 무료 메신저 시장을 선점하면서 현재까지 1위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후발 주자인 마이피플은 카카오톡을 따라 잡기 위해 카카오톡을 겨냥한 비교광고를 내보냈다. 다음 마이피플은 지난 4월, 인지도 높은 걸그룹 소녀시대를 모델로 세운 ‘마이피플-가갸거겨’편을 공개했다. 앱 유저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무료쪽지, 그룹대화, 음성쪽지 등의 기능은 카카오톡과 마이피플 모두 탑재하고 있지만 카카오톡과는 달리 마이피플은 무료통화가 가능하다.광고에서 경찰로 분한 소녀시대 멤버들은 “말로 하자 우리”, “토크라 그러면서 왜 말을 못해”, “왜 말을 않으니 무료통화까지 가능한 진짜 메신저 마이피플을 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광고이다.마이피플은 이 광고와 함께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앱스토어 다운로드 순위에서 카카오톡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기능을 강조한 비교광고 전에 비해 그 후 가입자수가 급증했다. 이에 카카오톡 측에서 공지사항을 통해 “요즘 카카오톡이 국민앱으로 인기를 끌다보니 뉴스는 물론 광고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카카오톡의 출연료가 그리 비싸지 않을 것 같으니 많이 출연시켜주세요”라며 대응했다.비록 아직까지는 카카오톡의 1위 자리를 빼앗지는 못했지만 마이피플은 이 비교광고로 인해 2인자의 자리를 확실히 하며 현재 광고 전의 약 2배인 700만명의 이용자에게 서비스하고 있다.2-4. 엠파스검색포털의 후발주자였던 엠파스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장을 입력해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서비스로 다른 포털사이트 검색엔진 보다 우수하다며 여러 비교광고를 내보냈다. 엠파스가 처음 선보였던 광고는 1999년 ‘야후에서 못 찾으면 엠파스’였다. 당시 검색포털의 선두주자였던 야후에 견줘 엠파스의 성능이 뛰어나다는 메시지였다. 마케팅 비용이 넉넉지 않았던 엠파스로서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이 비교광고를 통해서 엠파스는 인지도가 상승하는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엠파스의 비교광고는 야후에서 끝나지 않았다.2001년 엠파스는 라이코스 상징물 검정개와 엠파스를 상징하는 안경 쓴 토끼와의 경주에서 토끼가 이기며 “이것밖에 못할래?”라는 비교광고를 내보냈다. 이 노골적인비교광고에 인터넷 사용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경쟁기업과의 차별점을 극대화하지 못한 채 노골적이기만 한 비교광고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기 때문이다.엠파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03년 ‘지식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는 광고를 방송에 내보냈다. 네이버의 ‘지식검색’을 겨냥한 비교광고였다. 여기서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났다. 엠파스 광고를 네이버 광고로 오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이미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나, 자기회사에 불리한 점은 피하고 유리한 점만을 과장하여 광고하거나 경쟁사를 비방하는 경우가 있어 많은 문제가 있다. 여기서 나오는 개념이 비방광고이다. 비방광고란, 사업자가 자기의 것보다 경쟁사업자의 것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인정된 근거가 없는 내용으로 표시·광고하여 비방하거나 또는 불리한 사실만을 표시·광고하여 비방하는 행위를 말한다.우리는 기업이 보다 효과적인 비교광고의 효과를 보기위해 지나친 경쟁사와의 광고혈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역효과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분석해보았다. 그 사례가 통신사와 프렌치카페, 내츄럴치클의 사례이다.2-5. SK/KT스마트폰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은 통신사 선택 시, 기기나 통신비 뿐만 아니라 인터넷망을 고려사항에 넣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의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있는 KT와 SKT는 자사의 광고에 경쟁사에 대한 묘한 심리전을 펼침으로써 서로 견제하는 광고 시리즈물을 만들고 있다.초반에 이 둘의 광고는 비방광고라기보다는 비교광고로 시작했다. 인터넷망에는 크게 3G 방식과 Wi-fi방식이 있고, Wi-fi는 무선통신망을 이용하기에 3G와는 달리 데이터접속 시에 부가비용이 들지 않는다. 먼저 KT가 ‘어디서든 인터넷을 할 수 있다’라는 컨셉으로 올레 Wi-fi 존을 광고하며, ‘다른 통신사는?’이라는 물음에 자사와 경쟁사인 SKT의 Wi-fi 존의 수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비교광고를 했다.이에 SKT가 들고 나온 것은 3G전략을 사용한 '콸콸콸' 시리즈이다. KT가 Wi-fi의 양으로 승부수를 걸었기에 SKT는 3G 인터넷망의 질에 승부수를 띄우며 대응광고를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Wi-fi 마크를 그린 살수차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와이파이존 쫓아다니지 마라’는 카피를 덧붙이며 KT의 광고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KT와 SKT는 이후로도 다양한 양상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점점 비교를 넘어선 비방광
    경영/경제| 2014.04.12| 15페이지| 1,000원| 조회(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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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고중 2012 레포트 -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경기와 심판에 대한 연구
    레 포 트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경기와 심판에 대한 연구강 의 명 : 서양고중세사교 수 님 : 은은기 교수님학 과 : 사학과학 번 : 5020572이 름 : 박기윤목 차1. 올림피아 제전 경기의 탄생1)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배경2)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기원3)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엘리스 주최4) 휴전 선언의 배경2. 올림피아 제전경기와 심판1)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개최 전 심판의 역할① 심판의 선출방법② 심판의 인원변화③ 심판과 참가선수 자격과 심사규정2)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진행과 심판의 판정① 경기종목② 경기종목 변천과정③ 종목별 규칙에 따른 심판 판정과 차별 사례3)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시상과 심판의 권위4) 올림피아 제전경기 폐막 후 심판의 권한① 심판과 조각상② 심판 판정의 공정성3. 결론4. 참고문헌1. 올림피아 제전 경기의 탄생1)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배경고대 그리스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환경은 그리스 초기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게 해를 둘러싼 섬들과 동쪽의 아나톨리아 해안, 남쪽의 크레타 섬과 북아프리카 해안인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그들은 아카이아인, 도리아인, 이오니아인으로 나뉜다. 그들은 발칸반도 북방 유목민으로 기원전 2000년경부터 남하하기 시작했다. 아카이아인과 도리아인은 기원전 1400년경 크레타를 점령하고, 아카이아인 일부와 이오니아이은 에게 해 연안 섬과 소아시아(터키)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고대 그리스 역사가 시작되었다.기원전 110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 에게 해 여러 섬, 소아시아 서해안에 정착이 끝나가면서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의 변화가 심한 기후로 여름의 강렬한 태양과 고온 건조한 겨울의 간혈적인 비, 강우량의 변화 또한 심했기에 물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리스는 뜨거운 기후와 차가운 기후의 중간위치기에 힘과 지성을 향유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히려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지내는 그한 제 26회와 제 28회의 경기를 피사가 주최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보가 주자한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 피사가 경기를 주최한 것이 아니라 일부 대회에 한하여 그보다 짧은 기간 동안만 피사가 개최한 것으로 본다. 실례로 엘리스가 페이돈과 판탈레온이 주최한 올림피아 제전경기를 무효처리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피사가 제전경기를 계속 주최했다고 한 스트라보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할 것이다. 또한 엘리는 제 48회 대회를 피사의 다모폰이 경기를 개최하려 한 것은 무력으로 막았다고 한다.따라서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처음부터 줄곧 엘리스가 주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끊임없이 올림피아 제전경기 주최권 다툼이 이어지다가 엘리스가 피사에게 자신의 나라에서 뽑은 16명의 여성들에게 피사의 숭배신인 헤라 신상에 옷을 짜서 바치도록 하는 화해를 청하였고, 그녀들이 처녀들의 경기인 헤라에아도 주관하도록 하였다.올림피아 제전경기 초기에는 엘리스와 피사가 경기주최가 제례행사를 분담하여 개최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전경기 횟구가 거듭되면서 역할분담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이 후 제례행사보다 경기행사의 비중이 점차 성대하게 확대, 진행됨에 따라 올림피아 제전경기와 주최권이 천천히 엘리스에게 옮겨오는 계기가 되었다.이 후 엘리스는 피사 다모폰 왕의 동생 피로스와 트리필리아의 디스폰티움이 재차 개최권을 요구하는 행동을 단호히 진압했다. 엘리스는 피사와 트리필리아를 종속시키면서 주최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 우승자 명단을 보면, 마지막으로 피사인의 이름이 나타난 시기는 제 48회 이후로 추측하며 기원전 570년경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기원전 5세기의 엘리스에서 주조된 주화에는 앞면에 번개를 내리치는 형상의 제우스상과 뒷면에 뱀을 문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이 주화는 엘리스가 명실상부한 제우스신을 섬기는 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경기 주최국임을 것을 확인시켜주는 유물이라 생각된다.4) 휴전 선언의 배경아리스토텔레스와 플레곤에 의하면, 세 도시국가 대표자인 엘리라서 심판의 수도 8명으로 줄었다. 제 108회 대회부터 다시 10명의 심판이 선출되었다.심판인원이 10명으로 확정되면서 3명이 한조로 3개조로 나뉘어 3명은 전차 경주, 3명은 5종 경기,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그 외의 경기를 감독하고 판정했다. 가장 연장자 1명은 제전경기 전반을 통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문헌에 나타난다.제전경기 초기에 심판들은 헬라노디카이라 하지 않고 아고노테타이라 지칭되었다. 제전경기 전반적인 것을 왕이 관장하고 그 바로 아래 직접적인 운영을 심판이 맡아서 직무를 수행했으므로 심판이라는 직위는 엘리스의 최고 관직이었다. 따라서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심판직을 맡은 사람의 권위와 역할은 매우 컸음을 믿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심판은 귀족의 색깔인 자주 빛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그들은 업무를 시작하기 전 피에라 라는 샘에서 돼지를 공양하고 그 샘물로 목욕을 하고 헬라노디카온이라는 심판 숙소에 입소했다. 그들은 노모피라케스라는 법을 보호하는 호법관에게 10개월간 제전경기의 진행 방법과 규칙을 배웠다. 따라서 이들은 선출되는 시점부터 1년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는 엘리스가 모든 심혈을 기울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올림피아 제전경기를 치뤘음을 의미한다.한편 경기참가 희망자들은 자신의 도시국가에서 10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했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했다. 10개월간 훈련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제전경기 후기에 가서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③ 심판과 참가선수 자격과 심사규정제전경기에 참가할 선수들은 엘리스에 개최 1개월 전에 도착하여 심판의 엄격한 감독과 지시를 받으며 합숙훈련을 했다. 엘리스에는 출전선수 예정자들이 육상경기에 5종 경기, 레슬링과의 권투, 판크라티온 등과 그 밖의 경기를 훈련하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훈련을 전후로 한 시기에 심판은 수준 미달 선수의 출전자격을 박탈하고, 선수들의 가계 혈통 검사를 통해 그리스혈통임을 확인하고, 성인 경기에 참가할 성인과 소년 경기에 참가할 소년을 구별하고, 말과 란다? 즉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신에 대한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초기에는 스타디온 경기만이 치러졌을 것으로 주장한다.제전경기는 헤라클레스가 형제들과 경주한 시합에서 비롯되었다는 오랜 집착 때문에 스타디온 경주만이 진행되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그러나 두 견해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확실한 사료는 없다. 스타디온 거리가 제우스 신전 앞에서 제단까지의 거리와 동일한 것을 보면, 제우스신에게 빨리 가까이 가려는 종교적 의미를 확실히 함축하고 있다.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제 33회 대회에 이르면 파트로클로스 장례경기에 나오는 종목의 거의 모두가 채택되었다. 요컨대 고대 올림피아 제전 경기는 초창기에는 육상경기 위주로 진행되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새로운 경기 종목이 하나 둘씩 늘어났을 것이다.② 경기종목 변천과정제 1회 대회부터 제 15회 대회까지 육상경기 위주로 경기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경기 종목도 스타디온, 디아울로스, 돌리코스로 불리는 지금의 200, 400, 500m에 해당하는 육상경기로 초장기의 경기종목이 한정된 것을 볼 수 있다.이들 경기 중에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스타디온 경기였다. 그것은 제 13회대회까지 유일한 경기 종목이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연도는 이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으로 그 연도를 대신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이것이 제례행사의 기본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제 14회 대회에서 디아울로스가 채택되었고, 제 15회대회부터는 돌리코스가 채택되어 육상경기의 틀이 확정되었다. 제 18회대회에서는 5종 경기와 레슬링, 제 23회대회에서는 권투, 제 25회대회에서는 테트리폰, 제 33호 대회에서는 마술과 판크라티온이 추가되었다. 드디어 제 33회 대회를 기점으로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전반적인 주요경기의 틀이 갖추어졌던 셈이다. 제 33회 대회 이후로 채택된 경기종목을 위해서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기가 주요 경기의 틀 속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채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령과 트럼펫 경기를 제외한 소년 경기, 아페네, 칼페,되었다. 체급의 구별은 없었다. 앞서 밝혔듯이, 반칙이 나오면 경기 경기에서와 같이 반칙이 나오면 경주 경기에서와 같이 심판이나 경찰관들에게 채찍질과 매질 그리고 실격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참가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투구나 청동 그릇에서 알파뱃 글자가 씌어진 조 추첨표를 골랐다. 같은 글자를 뽑은 두 선수가 서로 상대가 되었다. 만약 참가선수가 홀수라면 한 명은 부전승하여, 그는 다음 상대와 상대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이 같은 선수를 앉아 있는 선수라 하여, 그는 에페드로스라 불렸다. 또한 한 명만이 참가했다면, 그가 경기없이 우승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는 아코니테이라 불렸다. 그는 먼지도 묻히지 않은 채 승리했다고 불려지기도 했다.파우사니아스가 전하는 판정 사례를 보면, 기원전 전 5세기 시칠리아의 메세네 출신인 레온티스코스는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레슬링에서 두 번 우승했는데, 그 특기가 상대 손가락을 비틀어 넘어뜨리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를 꺾고 비트는 것은 반칙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판의 눈을 속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제 104회 대회의 판크라티온 경기에서 우승한 시퀴온의 소스트라토스도 동일한 수법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때로는 반칙 행위가 통했다고 생각된다. 제 192회 대회의 레슬링에 출전한 엘리스의 폴뤽토르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기게 하려고 상대 선수를 매수했다가 발각되었다. 그러나 심판은 양 선수가 아닌 양쪽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했다고 전한다. 부정선수에게 물리는 벌금으로 제작한 제우스 상은 자네스라고 불렸다. 그 비문에는 부정행위의 내용도 적도록 했다. 그 자네스 신상의 하나는 엘리스 짐나지움 안에 세웠다고 한다. 선수들이 주의 깊게 행동하라고 경각심을 주기 위한 암묵적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권투권투는 오늘날의 경기장인 링 위가 아니라 모래밭에서 치러졌고, 체급이 없었으며 휴식시간이나 제한시간도 없었다. 레슬링과 마찬가지로 상대 선수가 패배를 인정하는 둘째손가락을 쳐들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행위가
    인문/어학| 2014.04.12| 24페이지| 1,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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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근대사 레포트- 루소 사회계약설
    서양근대사 레포트사학과 5020572 박기윤서양근대사 레포트루소 - 사회계약설서양근대사 레포트 : 루소 - 사회계약설강의명 : 서양근대사교수님 : 은은기 교수님학 과 : 사학과학 번 : 5020572이 름 : 박기윤목 차1. 루소 사상의 시대적 의의…루소에 관한 새로운 이해…루소 해석에 대한 새로운 두 가지 조류…루소의 현대적 의의2. 루 소… 루소의 생애… 루소 사상의 배경… 사회계약설3. 루소에 대한 역사적 평가4. 참고문헌1. 루소 사상의 시대적 의의…루소에 관한 새로운 이해과거에 대한 지속적인 재구성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은 과거의 인물 가운데 루소는 그에게 귀속된 정교함의 깊이와 그를 보는 방법에서 일어난 변화의 중요성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사실이 최근 3백 년간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루소에게 더 많이 일어난 것은 그가 현재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와 위대함에 대한 충분한 증거이다. 우리는 오늘날 그에 관하여 더 잘 아는 것은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처음으로 정당히 평가하는 방식으로 루소를 읽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루소가 우리 생각과 우리 시대 무제에 대단히 근접해있다고 느낀다.현대의 비평과 독자는 루소 사상의 통일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루소의 고뇌와 긴장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루소의 근본적인 의미, 곧 체계나 완전함을 추구하는 어떠한 시도도 능가하는 의미를 보기 때문이다. 부자와 강자 및 문학과 철학의 공허한 세계에 반대하는 고독한 인간의 기적을 발견하고, 루소의 핵심 사상이 『에밀』에서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데는 이미 약 1세기 전 아미엘(Amiel)과 같은 시인의 민감한 본성이 필요했다.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데피네 부인(Madame d'Epinay)의 악의에 찬 묘사와 볼테르(Voltaire)의 지독한 조롱 및 버크(Burke)의 잘 모르고 내린 판단이 칸트(Kant)의 루소 독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흔앙정부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은 본질적으로 신념공동체이며, 특정한 정의 이념을 구현하는 법의 공동체이다. 심지어 민족은 다양성의 화중에서조차 함께 유지되는 의지이며, 대지의 아름다운에 대한 부착물이다. 이런 사실은 민족국가의 모든 전통적인 외부 장식물이 전복되고 점진적으로 소멸하지만, 루소가 폴란드 민족의 존속을 예견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공상주의자로 묘사될 수 없는 충고를 할 때 낙관론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는 이류를 설명해 준다. 폴란드의 무정부적 전통, 계층 분열, 토지제도, 관습, 시민정신은 폴란드 민족 이념과 그 궁극적인 실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민족이 어떻게 상호 접촉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며 루소는 민족주의 시대에 당혹스런 쟁점 가운데 하나를 제기한다. 루소는 19세기 자유주의 구호 가운데 하나인 “교역이 평화를 장려한다”는 명제를 약화시킨다. 루소의 관점에서는 국제무역 관계의 경쟁이 전쟁을 촉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환상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상호 의존은 극심한 경쟁관계를 생기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급자족하는 국가의 자율성이 정체된 사회 내의 긴장을 초래하여 마침내 이웃국가에 폭력을 행사할 태세를 갖추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따라서 루소의 경고가 지닌 중요한 가치는 상품의 급속한 교환이나 다른 경제정책에 근거하여 국가 사이에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일소시키는데 있다. 그러나 루소의 분석은 인간이 민족공동체 내에서 상호 경제적으로 행동하는 데 압도적인 비중이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결론은 똑같다. 인간사에 따라 일어난 변화에서는 언제나 부정의와 혼란의 심화가 예상된다.루소가 품은 생각은 재산의 축적과정, 돈에 대한 의존도 증대, 기술과 예술의 진보, 더 많은 사치, 시화한 빈부격차의 결과, 도시에 거주하는 사회인이 궁극적으로 겪는 고독이었다. 이런 모든 현상은 루소가 이상으로 간주한 ‘평범한 상태’에 상반되었다. 이 모든 결과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경제관계로 뒤얽힌 연결망에 걸린 그는 마침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고 남은 기간을 ‘자기교육’, 즉 ‘자기 개혁’에 바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자기 교육이 노이로제를 극복하도록 만들었다.자기 교육이라는 자연 속에서의 독서생활 및 독학을 통해 지적 준비를 끝나친 루소는 1740년 스물여덟 살 때 바랑부인의 보호에서 떠나 넓은 세계로 새 출발을 하였다. 1742년 30세 때 그는 꿈꾸던 파리로 갔다. 그 때 유명한 디드로와 그림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알게 되었고 사교계와 살롱에 출입했다.파리로 돌아와 병까지 얻은 루소는 실의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그의 위안자는 그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의 세탁부이자 그보다 아홉 살 아래인 테레즈 르바쇠르였다.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이유는 기분전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레즈와의 동거생활은 그가 죽기까지 30여 년이나 계속 되었다.루소는 친절하긴 하지만 신분의식이 강한 귀족들과 부자들의 호의에 종속당하는 것이 싫어 독립을 얻는 대신 극심한 가난이라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생계를 도모했던 악보 베끼는 일로는 테레즈와의 작은 가계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루소는 아이들을 훗날 알아볼 수 있게 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고아원에 넘겨버렸다.자신의 자식까지도 버려야했을 정도로 가난과 병 등 역경에 시달리고 있던 루소는 1749년 초가을 어느 날 무신론과 유물론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반센느성에 감금되어 있던 디드로를 면회 가는 도중 무료하면 읽으려고 가져간 『메르퀴르 드 프랑스』란 잡지에 실린 디죵 아카데미의 현상논문의 논제인 『학문과 예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어떤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 현상문이 눈에 띈 순간 루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순간적인 영감을 느끼고 이에 응모할 결심을 했다.이리하여 세상에 루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루소 사상의 배경루소의 낭만주의는 가장 독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계몽주의의 가장 특기할 만한 철학적 공헌이다. 루소는 비록 개인적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허영심이 강하고 성미가 급하이신론자들과 달랐던 점은,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그가 이성보다 감정을 더 신뢰하려고 한 데 있다. 『사교대리 사부와야르의 신앙고백』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태도를 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 사교 대리는 여러 요긴한 부분과 매우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여러 부분에 의거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것들을 자기 자신이 심정에 고취되어 취한 자기의 입장을 남에게 옹호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다. 루소는 그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는 세계에서 쓸쓸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러나 낭만적인 풍경의 아름다움을 내다보았을 때, 그는 혼자 외롭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종교에서나 도덕에서나 그의 이른바 ‘높은 철학의 원리들’이라는 것으로부터 여러 결론을 끌어내려 한 사람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꼈다. 그는 추상적 추리보다 그 자신의 정서와 취미에 훨씬 더 많은 신뢰를 두었다.루소는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철학에 있어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원시적 생활을 이상적인 것으로 표현하였으나, 언제까지나 원시적 생활을 이상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에 반대하여 감정에 호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성을 불신했던 까닭에 한 번도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감정과 헛되고 공상적이고 혹은 악의에 찬 감정과 구별하는 기준을 시사조차 할 수 없었다.… 사회계약설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제기한 문제, 즉 자연상태를 상실하여 타락한 인간과 황폐한 사회를 어떻게 재건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해답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상태 속에서 생존하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물의 저항력이 강해져서 각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계속 생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초과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인류가 생존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멸망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나쁜 정념에 물들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게, 그리고 건강 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인이 지닌바 평등과 자유, 그리고 고유한 선량성과 미덕을 그대로 지니고서 보다 고급의 형식인 올바른 사회국가 속에서 인간의 자연성을 유지하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참으로 훌륭한 입법자의 기교에 의해서 참다운 국가를 성립시켜야 하는데 루소는 그러한 국가의 원칙을 독자적인 사회계약설로 해명한 것이다. 이 원칙을 위해서 그의 종래의 자연법 학자들이 인정한 여러 가지 착오를 준열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테면, 흔히 국가권력의 기원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강자의 권리라든가 전쟁포로를 노예로 만드는 정복권이라든가, 국민이 그 권리를 어떤 조건 아래 지배자에게 양도하는 복종의 계약이라든가 하는 것을 철저히 구명하고 있다. 그러한 조건들이 정당한 이유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혔었다. 여기에서는 특히 구체제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근본된 착오를 의미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서 그 비합법성과 배덕성을 가장 엄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이와 같이 루소는 참다운 사회, 참다운 정치제제는 어디까지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전원일치의 약속을 맺어야 하며, 그 약속이 사회의 기초인 동시에 국가를 형성하는 오직 하나의 정당한 방법, 즉 사회계약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일반의지라는 개념이 설정되고 있다. 사회계약 속에 일반의지가 들어있는데, 사회계약은 일반의지를 형성시키고 일반의지가 천명하는 것은 바로 주권의 행동이며 법률을 구성한다. 이렇게 해서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에 관해 루소는 『사회계약론』제 1편 제 8장 ‘사회상태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이와 같은 자연상태로부터 사회상태로의 이행은 인간에게 극히 현저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본능 대신에 정의를 기본으로 삼게 하고, 이제까지 결여되어 있던 도덕성을 부여해준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육체의 충동 대신에 의무의 소리가 들리고, 욕망 대신
    인문/어학| 2014.04.12| 18페이지| 1,0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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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목차1. 관찬사서 동국통감의 해제(1) 세조대 동국통감 편찬목적 및 배경(2) 편찬과정(3) 서술체재와 내용2. 사찬사서 동국사략의 해제(1) 편찬배경(2) 편찬인물(3) 체재와 내용(4) 역사관과 사학사적 의의이름 : 박기윤학과 : 사학과학번 : 50205721. 관찬사서 동국통감(1) 세조대 동국통감 편찬목적 및 배경동국통감(東國通鑑)는 1484년(성종 15년)에 완성되었지만 그 편찬사업은 세조의 발의로 1458년(세조 4년)부터 시작되었다. 세조 때 편찬 목적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빠진 부분은 여러 사서에서 채집하여 보충한 다음, 그것들을 올바르게 체계화하여 서술한 편년체 통사를 만드는데 있다. 세조는 정치적으로 군주의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실지회복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다. 통국통감의 편찬에 직접 발의하고 관심을 기울인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래 고기류의 사서들에 씌어진 내용은 고대국가의 시조(始祖)나 군주들의 출자(出資)를 신성화하고, 군주의 치적이나 행적 등을 과장되게 미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문종과 단종 양대에 걸쳐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전제왕권의 확립을 추구하였던 세조의 정치이념과 고기류의 역사인식과는 상호 부합되는 면이 많다.(2) 편찬과정성종 14년 이 때 고려사절요와 삼국사절요를 합한 통사로서 동국통감 의 편찬을 제기한 사람은 서거정이었다. 이 때 동국통감의 편찬에 누가 참여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서거정이 연주시격(聯珠詩格)의 주해와 병행하여 동국통감 편찬을 진행하자고 제의했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연주시격의 주해에 참가한 사람들이 역시 동국통감도 편찬하지 않았나 한다. 여기에는 서거정, 노사신, 허종, 어세겸, 유순, 유윤겸, 등 6인이 참여한 바 있다. 만약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모두 훈구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이므로 이 때 완성된 동국통감은 훈구세력의 역사인식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종은 이 때 완성된 동국통감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다시 편찬하도록 지시하였다. 특히 이 때 성종이 불만을 가진 부분은 사론이었다. 서거정 등 동국통감 편찬자들은 기존의 사론들만 그대로 인용하였을 뿐, 자신들이 직접 사론을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거정은 후인의 비난이 두려워 사론을 쓰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있다.성종이 사론을 더 첨입하여 편찬하게 한 동국통감은 신편동국통감이라 불렀다. 그 때의 배경에는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 한창일 시기였다. 신편동국통감에는 204개의 사론이 새로 첨입되어 모두 382개의 사론이 수록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신편동국통감뿐이다. 따라서 위의 두 책을 비교할 수 없지만 새로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론이 더 첨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서술내용도 변경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구편동국통감은 훈구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음에 비해 신편에서는 훈구세력뿐만 아니라 신진 사림 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음에서 그것을 추정할 수 있다. 신편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서거정, 이극돈, 이숙감, 정효항, 김화, 이승녕, 표연말, 최보, 유인홍, 손비장 등이다. 이들 가운데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이고 또 최항을 매형으로 둔 대표적인 훈구대신의 하나였다. 그는 집현전관으로 출발하여 여러 관산사업에 관여한 바 있다. 이극돈과 이숙감은 세조대에 공신의 칭호를 받은 인물들이다. 특히 이극돈은 영남사림과 반목을 계속하였고 무오사화 때 사림을 대거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이외에 정효항, 김화, 이승녕 등은 크게 현달한 가문 출신은 아니다. 아마도 서거정과의 개인적 관계의 의해 동국통감의 편찬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표연말, 최보, 유인홍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성종대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편찬자의 구성으로 인해 신편동국통감은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입장을 모두 반영하는 절충적인 성격의 역사서가 되었다. 한영무 교수님의 경우 훈구파와 사림파가 합쳐서 조선 정치의 기준을 정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여튼 신편동국통감은 훈구와 사림의 융합으로 편찬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3) 서술체재와 내용동국통감의 본문은 외기. 삼국기. 신라기. 고려기로 크게 나뉘어 편년체로 서술되었다. 먼저 외기는 단군조선부터 삼국 이전인 삼한까지의 역사를 다룬 편목이다.삼국기는 신라건국 때로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인 문무왕 9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편찬자는 범례에서 삼국의 세력이 균적하므로 어느 하나를 정통으로 삼을 수 없어 삼국기라 한다고 하였다. 삼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묶어 서술한 것은 동국사략에서 처음 시도되었으나, 여기에서 권근은 신라가 먼저 건국되었다가 맨 나중에 망했기 때문에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기를 서술한다고 하였다. 즉 삼국 중에서 신라를 가장 부각시켰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으로 신라기는 문무왕 9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시기 즉 고려 태조 18년, 신라가 고려에 흡수될 때까지 역사를 다룬 것이다. 이 편목은 동국통감에서만 특징적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고려기에서는 고려태조 18년부터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체제상 특징은 삼한 중 마한을 먼저 서술했다는 것과 삼국을 무정통으로 보는 듯 하나 공식적으로 최초로 신라를 내세워 신라 전통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전반적으로 동국통감의 내용은 기존 사서들을 저본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면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동국통감이 주자학적 서술태도를 더욱 강화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사림계열의 사서들은 노골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동국통감의 내용을 축약하고 있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내용상 특징에는 사대교린의 정치기사가 기본 입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토크기나 인구파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또 사론을 통해서 감상윤리를 강조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공리를 배격하였다. 문관과 무관의 차별은 존재하였고 철저한 유교주의로 불교를 비판하여 이단을 배격하였다. 위정척사는 한 말 뿐만 아니라 조선시기부터 있었다.다른 특징에는 신라 초기 왕호를 가진 경우 그대로 왕호를 사용하였으나 여왕의 경우는 여주로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북진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면서 고구려의 강대함을 칭송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을 살펴봤을 때 정치사를 다루면서 국력보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문화에 관심이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사론의 성격동국통감의 사론은 성격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국통감 이전의 사서에 실린 사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편찬자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기왕의 사론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써넣음을 원칙으로 하면서 춘추대의와 강상윤리 그리고 숭문주의의 방향을 강조한 것은 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빠진 것을 더 찾아서 서술하고 기타 사실을 고증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의 사론 등은 삭제하고 있다.2. 사찬사서 동국사략(1) 편찬배경16세기에는 새로이 등장한 사림들이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국가와 사회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왕도 사상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를 추구하고 향약(鄕約) 등을 통하여 명분론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역사인식의 면에서도 도학적 역사관이 심화하여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한 가치평가를 중시하고 주자의 정통론과 강목법을 수용해갔다.16세기에는 관찬사서 대신에 사림 개인에 의한 사찬사서가 만들어지는데, 이 시기 사림들이 만든 대표적인 역사서술 형태는 사략형(史略型)의 사서였다. 사략형의 사서는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체재를 모방하여 동국통감을 축약한 사서였다. 동국통감을 줄여 만든 만큼 기본적인 차이는 없으나 체재의 변경, 내용의 강조, 사론의 선택 등에서 새로운 점이 나타나며, 개인에 의해 씌어졌기 때문에 편찬자에 따라 역사인식상의 차이도 드러나고 있다. 사략형의 사서는 교육의 교재로 널리 활용되어 도학적 역사인식을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편찬 동기는 동국토감의 재정비와 더불어 정치적인 기묘사화 등 현실의 좌절감에 의한 역사인식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2) 편찬인물눌재 박상의 본관은 충주로 그의 집안은 본래 개성에서 살다가 박상의 할아버지 대에 회덕으로 이사하고 아버지 대에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처가인 광주로 옮겨 살았다. 박상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진사로서 은산군사가 되었고, 아버지인 박지흥이 세종 때 진사가 되었을 뿐 현달한 집안은 아니였다.박상은 박지흥의 3남 중 둘째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삼형제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호남에서 유명했다고 하는데 박상의 형인 박정은 김종직에게 잠시 배웠다고 하는데 이 무렵에 그의 집안은 사림계열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박상은 형인 박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연산군 때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전라도 도사, 사간원 헌납 등을 거친 그는 담양부사로 있던 중종 10년 6월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의 폐비인 신씨의 복위를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남평에 유배갔다가 조광조 등의 사림들의 석방을 적극 주장하여 중종 11년 3월 방면되었다. 그의 신씨복위상소는 성리학적 명분을 천명하고 반정공신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훈신과 사림 사이의 갈들이 표면에 직접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인문/어학| 2014.04.12| 5페이지| 1,000원| 조회(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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