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소논문 : 예배자 예수』과 목예배와 예전교 수교수님학번/ 반이 름제 출 일목 차Ⅰ. 서론............. 1Ⅱ. 본론............. 11. 예수님의 예배와 예전 이해 ............... 1(1) 유대교의 신앙과 경건의 전통을 따랐다.......... 1(2) 성전에서의 활동............ 1(3) 회당 예배에 참여.......... 2(4)유대교 경건 형태에 대한 논쟁........ 2(5) 예수님의 예배와 예전이해와 새로운 시도...... 3ⓐ삶과 예배................ 3ⓑ예배의.9참고도서.......... 10Ⅰ. 서론예배란 무엇인가? 우리말에서 문자적으로 보면 예배란 예를 갖추어 절한다 라는 말로 이해된다. 물론 예배란 교회가 주일의 공식 모임에서 행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구약성경에서 아밧이란 말로 표현되었고, 그 의미는 봉사하다, 섬기다 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말로 샤하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뜻은 굴복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엎드리다, 숭배하다, 순종하다 하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역사적인 예배이다. 역사적인 예배란 예배의 시작이 역사속에서 이루어 진 것을 의미하며, 기독교 역사의 오랜 과적 속에서 예배가 성장,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뜻한다.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와 예수님의 예배 이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님이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던가? 하는 것과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아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예배를 실천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Ⅱ. 본론1. 예수님의 예배와 예전이해예수시대는 유대교를 통하여 성전제사와 회당예배 이 두 가지 종류의 예배가 시행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예배에 어떻게 관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1) 유대교의 신앙과 경건의 전통을 따랐다.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그 시대의 유대종교의 신앙과 전통에 따라 살았다. 예수님이 예배의 여러 형태에 대하여, 그리고 토라와 유대 종교의 전승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첫째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의 신앙고백이요, 둘째는 종말론 적인 메시아의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전자는 예수님인들은 시비하였다. 그리고 청결의 규례와 관련해서도 씻지 아니한 부정한 손으로 떡 먹은 것에 대하여 시비하였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 죄인으로 불려진 자들과 유대공동체에서 쫒겨난 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교제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고, 토라의 규례와 전승의 효력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 종교의 관습과 경건의 모양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심한 논쟁을 하셨다. 이러한 논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제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기존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성경신학자 로마이어는 마가복음 2:21~22절의 말씀과 마가복음 14:58절의 말씀을 서로 연관 지워 해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언하고, 이스라엘의 성전 예배를 극복하며, 역사의 완성에 대한 예언과 함께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예배를 제정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혜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의 맥락에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예배의 차이점과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적절한 해석으로 판단된다.(5) 예수님의 예배와 예전이해와 새로운 시도예수님이 그의 말씀과 행동에서 예배의 올바른 이해와 예배와 예전의 모습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 준 거은 구체적으로는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에 대한 표현들 외에도, 식탁의 교제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예수님은 유월절 준비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의 나눔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새로운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만찬이 새 언약과 결부된 새로운 예배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언급하였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한 말씀은 성찬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최후의 만찬의 축제는 초대교회 예배를 위한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예전의 근본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삶과 예배예야 할지 정답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복종의 삶을 통해 예배의 가장 완벽한 형식 혹은 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희생적인 섬김의 모범만은 아니었다. 예수의 복종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①아버지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복음서 기자 중에서 누가만 소년 예수의 성전 방문 사건을 기록한다. 거기서 예수는 많은 교사들 사이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질문을 했다고 나온다. 앞에서 누가는 성전에서 예수가 할례 받는 사건을 기록하는데, 이 모두가 유대인으로 예수가 신실하고 복종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매년마다 예수는 신실한 부모를 따라 유월절 추제를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갔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처음 선포한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9)이런 특별한 관꼐 때문에 예수는 성전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성전이 전통적으로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곳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온 대로 이스라엘, 메시아, 열방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는 모습은, 예수의 끊임없는 예배자적 자세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였다.②기도하는 것예수는 종종 조용한 장소에 숨어 자신과 남을 위해서 기도했다. 세례 받을 때도 기도했고, 열두 사도를 선택하기 전에도 기도했으며,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묻기 전에도 기도하셨다. 변화 산 사건 전에도, 재판과 고난을 받기 위해 준비 할 때도 기도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표현했다.③ 예수와 회당공관 복음은 갈릴리 회당에서 예수가 한 행동에 주목한다. 그곳에서 가르치고, 치료하고, 서기관들과 백성의 다른 지도자들과 비공식적으로 토론했다. 회당으로 번역되는 ‘시나고게’라는 단어는 다양한 모임을 지칭하는 헬라 어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모임을 의미했다. 기독교의 ‘교 포기하지 않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 은혜 속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로 복종하라는 도전을 한 뒤, 따라오는 장에서는 그 의미를 정리한다. 독자들을 ‘형제’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임을 자각한 이들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다. 이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장면은 출애굽기 19장4~6절과 20장 1~3절 같은 예배의 기원을 보여주는 장면과 비슷하다. 이것은 신명기 10장 14~22절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 구원을 위해 먼저 나서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하나님과의 맞물림의 모습, 예배를 제시하고 이를 따르도록 명령한다. 그리스도의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도 새로운 복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내적 변화보다는, 우리 전체를 헌신하고, 세상속의 실제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로서 ‘산 제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시고, 성령이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하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이미 거룩한 제사가 되었다.3. 예수의 최종적 예배예수는 죄인도 하나님의 큰 거룩하심 앞에 나갈 수 있는 정결 방법을 알려 주셨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의 피 흘림 또는 죽음은 죄인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흠 없고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죗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물은 제사장 자신이다. 예수 안에서 제사장과 제물이 하나가 되어 율법이 제시한 제사의 완성형이 만들어짐으로써,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 예수의 제사장적 사역은 자신을 직접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이를 통해 ‘더 낳은 약속에 기초한’ 새 언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사역있다.
1. 들어가는 말변증학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나의 신앙에 대해 재조명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생각이 요즘 평자의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무렵, 이 과제를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기독교 변증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혹시 반틸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성향을 잘 알 것이고 그것은 이 책을 읽을 때 참고가 될 것이다.반틸은 이 책을 통해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비그리스도인을 믿음의 영역으로 이끌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평자는 이런 그의 자세에서 평소의 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그를 존경하게끔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진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한답시고 타협적으로 살았던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얘기 중 상당 부분은 과격하게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를 깊이 알고 나면 그가 얼마나 진리에 대해 목말라 했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평자는 그런 그의 생각을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이 책에 대해 비평하려고 한다.비평은 장별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그 내용의 시사점과 미흡한 점, 그리고 평자가 느낀 점에 대해서 주로 말하려고 한다. 부디 무지한 자의 글이 시대를 향해 진리를 외쳤던 한 학자의 깊은 고민의 흔적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평을 이어가고자 한다.2. 독자로서 바라본 반틸의 변증론먼저 책의 형식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2장에서는 기독교의 실재론에 대해서, 3장에서는 기독교적 인신록을, 4장에서는 기독교 윤리학, 5장은 기독교 변증학(접점), 6장은 기독교 변증학(방법론), 7장은 기독교 변증학(권위와 이성), 8장은 일반은총과 스콜라주의, 9장은 전제에 입각한 논증, 10장에서는 기독교의 변증, 그리고 마지막 11장에서는 암스트레담과 구프린스턴을 제목으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그럼, 1장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도써 이후에 서술될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한 듯하다.2장에서는 기독교의 실재론을 다루고 있다.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데, 저자는 여기서 영원적 단일성과 복수성, 시간적 단일성과 복수성, 죄와 죄에 따른 저주로 소제목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히 2장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구체적 보편’이라는 철학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 보편이란 개념은 본래 관념론 철학자들이 추상적 개벼라와 추상적 보편이라는 논리적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는 것을 피할 목적으로 인출해 냈던 것이지만 자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나는 저자의 변증학적 자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전제주의(자존적 하나님과 성경의 무오성을 전제)에 입각한 변증을 주로 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인과의 논쟁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2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존재는 궁극적이며 영원하지만 피조물적인 존재들은 그 성격상 파생적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평자는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동안 자연을 바라보았던 평자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영원하시고 궁극적인 하나님을 늘 전제로 두고 그가 보여준 사물에 대해 재해석자로서 바라본다는 사실을 늘 가슴 속에 깊이 품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어떤 면에서는 독자처럼 기존의 기독교인에게도 더 확고한 변증적 자세와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3장에서는 기독교 인식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해하는 지식과 하나님께서 세계를 이해하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자의식과 동일연장적이라(God's Being is conterminous with his self-consciousness)고 얘기한 부분이다. 저자 자신도 이 점이 거듭 강조되어야만 할 중요한 포가 되어 유익하였다.4장에서는 기독교 윤리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앞에서 존재와 인식(지식)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살펴보았다면 여기서는 인간의 행위 또는 행동에 대한 기독교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윤리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제시함에 있어서 선행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정의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로부터 취한다고 말한다. 이 장은 윤리학과 기독교적 인식론, 윤리학과 기독교적 실재론, 인간의 최고선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자는 윤리학과 기독교적 인식론 부분을 주목해 보았다.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죄와 죄에 따른 저주, 그리고 중생한 의식을 기독교적 입장으로 차례대로 언급한다. 그러면서 로마 카톨릭교와 복음주의의 입장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데 그들의 입장으로서는 비기독교적인 입장에 대해 철저하게 도전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평자는 중립적이고 타협적인 자세의 위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즉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애쓰는 것 같지만 결국에 그들은 비기독교적인 입장에 동조를 하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5장부터 7장까지는 기독교 변증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5장은 접점에 대해서, 6장은 방법론에 대해서, 7장은 권위와 이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평자는 5장의 내용 중 지식에로의 개혁에 대한 저자의 언급에 주목하였다. 여기서 저자는 죄악된 인간의 전체적 구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새로이 교정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찰스 핫지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것은 지식에로의 개혁(?ι? ?π?γνωσιν)이라는 것이다. 지식 속에서(in knowledge) 개혁된 것이거나 아니면 지식에 의하여(by knowledge) 되어진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에로(unto knowledge)개혁된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그저 한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참된 방법론은 오로지 전제에 입각한 간접적 추론 방식(the indirect method of reasoning by presupposition)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저자는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인 성경을 옹호하는 논증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에 있어 하나님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제에 입각한 간접적 방법론 이외에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얘기이지만 그의 이런 방법론은 절충이나 타협을 좋아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에게 큰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7장에서는 기독교 변증학의 권위와 이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서두에서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는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 즉 엑스 카세드라(ex cathedra)가 궁극적이라면 개신교에 있어서는 성경이 교회와 교회에 속한 교사들의 모든 결정에 우선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기독교적 견해들과 현대신학의 견해들, 로마카톨릭과 알미니안의 입장에 대해 언급하고 이에 반해 개혁주의 입장은 어떤지에 대해서 말한다. 평자는 이 장에서 현대 신학의 견해들을 읽으며 슐라이에르마허, 테일러, 월리암 템플 대 주교, 칼 바르트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대부분 최종적 기준을 인간의 인격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궁극점이 되고 최종점이 되는 것이다. 한편 개혁주의적 그리스도인도 때때로 전도에 있어서는 개혁주의적 자세를 유지하지만 논증에 있어서는 알미니안주의자일 경우가 많다는 저자의 언급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죄인의 얼굴에서 철가면을 쪼개어 벗겨내며 그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강제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적 전도요 개혁주의적 변증학이라고 얘기한다.8장에서는 일반은총과 스콜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 소제목을치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는 리델보스의 견해를 소개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로마 카톨릭은 전적 타락을 믿지 않는 반면 개혁주의 신학은 전적 타락을 믿는다는 얘기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이 죄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그들이 자연인을 대함에 있어서 타협적, 절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개혁주의적 입장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인가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전제와 우주의 모든 양상이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인간이 행하는 모든 해석적 노력을 위한 발판과 축이 성립된다는 것을 겸손하나 과감하게 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8장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의 증인된 삶이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9장에서는 전제에 입각한 논증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9장의 제목이 이 책의 전체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장은 어떠한 사실의 진술이기보다는 저자가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견해에 비판을 가한 제이 올리버 부쉘 2세에 대한 반박이 주 내용이다. 여기서 저자는 그의 견해를 비판했던 부쉘에게 자신의 견해를 쉽게 설명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이 9장을 잘 살펴보면 이 책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평자는 이 장에서 저자의 접근 방식이 전통적 방식과 다른 점을 얘기한 부분에 주목하였다. 그는 인생을 해석함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이 성경에 호소하기는 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권위를 부인하고 도리어 인간의 경험에 호소하였다면 자신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계시로 믿는 성경에서 출발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계시가 어디서 나타나든지 간에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는 객관적 명료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칼빈과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위한 접촉점을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 내부에 신성에 대이다.
제 1부 서 론1장. 칼빈과 어거스틴의 비교현대 기독교는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반 문명권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서구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가 미래를 향한 신학적 방향을 모색할 때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 과거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 연구, 어거스틴 연구, 그리고 칼빈과 어거스틴에 대한 비교연구는 초, 중세 기독교나 근대 유럽 기독교 문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일 뿐 아니라, 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에 있어서도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최근의 어거스틴 연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각각 발견되어 출판된 두 가지로 인하여 매우 활성화 되었다. 이 두 가지 발견은 이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어거스틴의 “서간문”과 “설교문” 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은 로마시대 후기에 북아프리카에서 교회를 섬겼던 어거스틴의 생생한 초상화를 제공해 주고 있다.첫 번째 발견은 “디프약 편지들”이다 1980년대에 출판되어 “디프약 편지”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편지들은 어거스틴을 후기 로마 시대 북 아프리카 지역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전형적인 교회의 신학자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필사본들을 새로 목록화 하는 작업을 하다가. 당시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어거스틴의 설교문들을 새로 발견해 낸 것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397년에서 416년 사이에 행해진 설교문들이었다. 따라서 이 “돌보의 설교문”을 통해 로마 제국 말기에 북아프리카 교회를 책임지고 있었던 교회의 지도자 어거스틴을 만날 수 있다.이와 같이 최근에 발견되어 편찬된 디프약의 편지와 돌보의 설교문은, 어거스틴의 신학과 목회의 무대가 되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북아프리카 교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네덜란드 역사학자로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오버만에 의하면 칼빈은 박해의 위협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갔던 실제적인 한명의 교양에서, 티코니우스의 7규칙을 성경의 비밀을 여는 열쇠로서,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티코니우스의 규칙들이 독자들에게, 비록 성경의 모든 어려운 구절들을 다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거룩한 문서의 비밀을 관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언급하면서 추천하고 있다.티코니우스 7규칙에서 첫 번째 규칙은 주님과 그의 몸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구별하는 것을 이성이 도와주었듯이, 이성은 또한 몸의 오른쪽과 왼쪽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즉 티코니우스의 두 번째 규칙은 교회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규칙에서 티코니우스는 그가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해석 할 때, 율법의 자녀로부터 언약의 자녀를 나누고 있으며, 이것은 초대 기독교의 주석에 있어서 티코니우스의 해석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규칙에서 종과 유에 대한 티고니우스의 예언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종은 부분이고 유는 전체이며, 유의 일부가 종이 된다. 유의 예언이라는 것은 솔로몬이라든지 예루살렘 등이 역사적 실체와 교회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이며, 다섯째 규칙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부분이 전체를 가리키고 전체가 부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여섯째 규칙에서는 성경의 때를 현재의 날과 연결시켰다. 소돔의 롯의 경우와 같이, 오늘날의 믿는 자들 또한 교회 안에 존재하는 죄를 범한 구성원들과 분리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일곱째 규칙은 교회 안에서 신비롭게 역사하고 있는 적그리스도와 “죄 된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티고니우스의 개혁적 영성은 어거스틴을 통해 북아프리카의 범주를 넘어 보편 교회에 기여하게 되었다.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주의자였다가 출교 당했던 티코니우스로부터 종말론과 교회론과 두 도성 사상을 수용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부활과 교회의 천년이라는 개념 안에서, 티코니우스의 규칙서를 반영하면서,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를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 보았다. 왕들과 민족들이 주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보편 교회의 확장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독특하고 포괄적인 장점은, 그가 로마에서 만났던 세계주의적인 교회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을 때 조우했던, 즉 터툴리안, 키프리안, 그리고 티코니우스으로 연결되는 북아프리카의 교회론 모두를, 자신의 교회론 안에 끌어안은 점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와 어떻게 관계하면서 발전해 가야할 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통찰로 이해된다.5장 어거스틴의 세례관세례는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중요한 성례로 예수님께서도 직접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세례는 그 신학적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게 시행되고 있는 교회 예전들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 교회는 세례가 과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통찰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제기되는 이런 문제들의 해법을 찾고자 할 때, 기독교 역사를 통해 세례가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인물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는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서 신학적 유산을 물려준 인물이었다. 특히 어거스틴이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세례의 유효성 문제로 인하여 나타난 도나티스트 운동과 대결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세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현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도 큰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세례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으로 연결되는 북아프리카의 사상적 경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터툴리안은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서 교회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세례를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 것이다. 터툴리안은 세례를 교회 일치의 중요한 요소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례를 춥애굽과 관련해서 해석해 내고 있다도의 진리를 지켜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8장 칼빈의 경건사상칼빈의 경건은 그가 활동했던 16세기의 역사적, 신학적, 영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6세기를 일괄하자면 중세는 해체되었으나 근대 세계는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던 과도기였다. 철학적으로는 보편보다는 개체의 가치가 중시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제국의 환상이 무너지면서 유럽의 각 민족국가가 각성되고 시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신학적으로는 중세 말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어거스틴주의가 부흥하고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그의 신학 사상의 한 측면이라기보다는 그의 전체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이요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경건 개념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가 되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 된 인간이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교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주며, 이점에 있어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내향성과 인격주의는 근대적 경건과 일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예배는 경건생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태도를 말하는 칼빈의 경건은 진정한 지식과 진정한 예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칼빈의 경건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 즉 창조주요 구속주인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말씀 앞에 열려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과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과의 교제를 지탱해주는 틀이 된다. 칼빈이 볼 때 복음은 인간의 심령을 파고 들어가 그 영혼 안에 닻을 내린 후 그 인간의 전체적 삶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신학전체 사회와 동일시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 다른 역사적 시대들과는 구별되는 시기였다. 칼빈의 국가개념을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국가의 위치를 중세의 문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는 교회가 문명과 결합되어 있었다. 국가는 한편 거룩한 기구로 받아들여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결과로 여겨졌다.칼빈에게 있어서 국가는 단지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해독제로서, 또한 단지 악에 대한 처벌 정도로서만 간주되지는 않았다. 국가는 항상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임명된 선하고 거룩한 기구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주의의 영향은 칼빈에게 있어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국가론에서 국가가 어떻게 교회 즉 칼빈 자신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구별된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대조적이지 않다. 더구나, 칼빈의 교회는 세속 권위에 의해서 후원을 받으면서 심지어 국가보자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소멸되지 않는다. 현세의 정치적 질서는 최후의 날까지 종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날에는 어떤 정치적인 권위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서 우리는 칼빈의 국가론이 종말론적인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인간이 이 땅에서 존재하고 생활하는 한, 정치적인 권위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권력은 한시적인 것이다. 국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선을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칼빈의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지만, 시민 정부의 사역은 거룩하게 임명된 그 자신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된다. 따라서 칼빈 그 자신의 사상과 칼빈주의의 전통 속에서 국가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거룩한 기관이다.칼빈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가르침은 일종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자신의 개혁교회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하이었다.
목차1. 서론 ………………………………………………………………………………………………… 12. 문서설의 흐름 ……………………………………………………………………………………… 13. 학자들의 양상 ……………………………………………………………………………………… 23.1. 아스트뤽 ……………………………………………………………………………………… 23.2. 헤르더 ………………………………………………………………………………………… 33.3. 아이히호른 …………………………………………………………………………………… 33.4. 게데스 ………………………………………………………………………………………… 43.5. 드베테 ………………………………………………………………………………………… 43.6. 에발트 ………………………………………………………………………………………… 43.7. 투흐 …………………………………………………………………………………………… 53.8. 후펠트 ………………………………………………………………………………………… 53.9. 그라프 ………………………………………………………………………………………… 53.10. 벨하우젠 ……………………………………………………………………………………… 64. 문서설이 가진 문제점 …………………………………………………………………………… 85. 결론 ………………………………………………………………………………………………… 9참고문헌 ……………………………………………………………………………………………… 101. 서론구약 연구의 흐름의 중요한 큰 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문서설이다. 구약을 연구할 때에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문서설이다. 하지만 칼빈을 따르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문서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서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구약 연구의 많은 부분에서 문서설이 차지하기 때문에 문서설을 넘어갈 수는 없다.본 리포트에서는 문서설의 흐름을 살펴본 후, 각 학자들의 이론들을 살피고 문서설을 비판하도록 하겠다.2. 문서설의 흐름소위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성경도 비평적인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후대에는 비평 이론들의 상투어가 되어 버린 사상들이 처음으로 초기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책 Leviathan에 오경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실었다(1651년). 그는 모세의 죽음이나 여러 시대착오적인 기록 등 모세의 저작설을 부어할 만한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하비스는 오경 전체의 저작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신명기 11-27장은 모세가 썼으며, 그것은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비스는 에스라가 오경의 최종 편집자라고 생각하였다.비록 오래 전부터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문헌이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철학자 스피노자이다. 베네딕트 스피노자는 비정통 유대인으로서, 그의 책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가 1670년 출간되자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오경이 모세를 3인칭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죽음을 기술하며, 후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세가 오경을 썼을 리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면서, 이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두 자료들에서 가져와 결합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경의 주 편집자는 모세보다 900년 후의 사람인 에스라(주전 5세기)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오경 안에 여전히 중복과 모순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에스라 역시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마무리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였다.그의 생각은 아스트뤽에 의해서 계승되었는데, 그는 의사였으며, 창세기의 저작에 사용된 것에 기초해서 이 두 문서를 구분하기는 하였지만 기실 아스트뤽 자신은 창세기에 대한 모세 저작설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방법론은 그가 내린 결론들로부터 곧 분리되어졌으며, 그 다음 세기의 학자들 및 그 이후의 학자들은 화의 배경이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구약을 연구한 최초의 구약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3.3. 아이히호른(J. G. Eichhorn, 1752-1827)아이히호른은 헤르더의 영향을 받기는 했어도 상당히 보수적인 합리주의자였다. 그에 의해서 계몽주의 시대의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구약성경의 연구도 세밀한 조사의 원리를 사용해야함을 주장하며 성 경 연구가 성직자의 권위나 종교적인 교리, 그리고 모든 교회의 전통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아이히호른의 연구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는 [구약 입문]을 썼으며, 구약성경의 개론적인 내용을 담은 총서의 형태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구약성경 비평학의 아버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는 히브리 성경의 문학적 위대함에 감동을 받았지만 초월적인 내용을 담은 거룩한 책이라기보다는 히브리 민족의 문학적인 성격이 더 강한 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이히호른의 작업 가운데 하나는, 문서의 기초를 이루는 자료가 다양한 문학적 형태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사하는 것과 이미 독립 되어있던 문서의 단어나 구절이 갖는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아이히호른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1-2장을 J문서와 E문서로 구분했으며, 이것들이 한 익명의 편집자에 의해서 편집되었다고 주장했다.3.4. 게데스(Geddes)게데스는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1792년에서 1800년 사이에 걸쳐서 모세오경의 기원에 대해 단편설이라는 이론을 전개시켰다. 그는 1792년에 오경과 여호수아서를 번역해서 출판했고 1800년에 [비평적 논평]을 발표했다. 이 두 작품에서 게데스는 모세오경의 형성이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편집자가 수많은 단편 사본을 자료로 해서 모세오경을 편찬했으며, 이들 단편 사본 가운데 일부는 모세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신 명칭을 구별하는 것이 오경의 자료를 두 개로 나누는 기어 잇으며, 그 연대는 대략 사사기때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주전 500년 경에는 앞서 언급한 세 문서의 편집자들이 육경의 편집 과정 속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때때로 “결정 가설”로 불리는 이 이론은 후에 헤르만 후펠트에 의해서 개조되었다.3.7. 투흐(J. C. F. Tuch)투흐는 보충 가설을 마지마긍로 정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창세기 주석]에서 오경이 두 개의 문서 자료에 의해서 단단히 묶여 있으며, 이 두 문서는 신 명칭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확실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엘로힘 문서는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료였으며, 기초 문서의 신 명칭을 자기 것으로 사용함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았다. 여기에 투흐가 솔로몬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한 야웨 문서의 여러 부분을 추출하여 엘로힘 문서에 보충해서 만들어진 것이 오경이라는 것이다.3.8. 후펠트(Hermann Hupfeld)후펠트는 창세기 자료들을 상세하게 조사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전의 비평 학자들에 의해서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 기초 문서가 사실은 두 저자가 만들어낸 복합적인 산물이라고 주자했다. 그리고 이 두 저자는 똑같이 엘로힘을 신의 명칭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들 가운데 두 번째 저자가 그의 언어적 특성이나 문체에서 엘로힘 문서의 저자보다 야웨 문서의 저자에 더 근접해 있으며, 경향으로 볼 때는 제사장 계급의 분위기를 짙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를 종합해 보면, 오경 혹은 육경의 편집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네 개의 문서가 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야웨 문서(J), 둘째는 엘로힘 문서(E), 셋째는 제사장 문서(P)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명기(D)가 바로 이것들이다.이 이론은 원래 보충 가설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의 중심은 원래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네 개의 자료들을 편집하여 그것들을 현재의 서로않으므로, J 자료와는 달리 E 자료에는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없다. J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E는 좀 더 엘로힘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구별이 된다. 이 문서는 J보다 한 세기 정도 이후에 쓰인 것으로 간주되며, 북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자의 견해는 북왕국의 문제 및 요셉과 같은 북왕국적인 인물들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추론된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는 E는 J나 P보다 단편적이다. 이 문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시작되며, 민수기 32장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신명기의 몇몇 구절도 역시 E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셋째 자료는 대부분 신명기다. 벨하우젠의 공헌 중의 하나는 D와 P의 순서를 뒤집은 것이다. 따라서 고전적인 문서비평학이 구분해낸 세 번째 자료 층은 바로 D이며, 이 문서는 오경 중에서 그 이름의 기원이 된 신명기에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자료의 장르와 문체 때문에 이 자료는 큰 내러티브 자료들인 J와 E와 구분된다. 앞서 보았듯이 신명기는 율법에 관한 일련의 설교다. 신명기에는 율법 준수를 촉구하는 권면들과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르 사랑하라는 긴급한 호소와 불순종의 위험에 관한 경고등으로 가득하다. 신명기의 트징적인 하나님의 명칭은 “여호와 우리/너희 하나님”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을 각각 여호와나 엘로힘으로 부르는 J와 E자료와, 신명기 자료를 구분해 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신명기의 핵심 부분은 요시야의 치세 중에 성전에서 발견된 문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이때 발견된 문서가 어떤 형태를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논쟁들이 있어 왔지만 말이다. 경우야 어찌됐든 거의 모든 비평학자들은 D를 요시야 시대의 것으로 본다(7세기말). D가 오경의 처음 네 권으로까지 확장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문서의 영향력은 정경의 전체에 걸쳐서 강하게 느껴진다.넷째 자료는 제사 자료(P)다. P는 아마 오경의 네 자료층 중에서 가장 -9장)
설교의 이해와 작성 - 김창훈 교수님저자 김창훈은 건국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의 칼빈신학교(Th.M.)에서 구약을 공부했으며 남아공의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예언자적 설교로 설교학 박사학위(Th.D.)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4년여 동안 광주 산수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다가 지금은 한국교회와 강단의 회복을 소망하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본서의 목적은 이 설교집을 통해서 복음서가 제대로 설교되기를 원하고, 강단에서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올바르게 선포하는 데 격려와 도전이 되는 것이다.본서는 저자가 목회하던 광주 산수교회에서 주일 낮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일종의 설교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만큼은 독자들에게 대화의 형식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의 말씀을 가볍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어려운 성경구절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학적 기초위에 일반인들이 알기 쉬운 단어들로 집필되었기에 깊이 있는 해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쉽고 재미있게 읽으면서 깊이 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본서는 성경의 각 장의 장절을 알맞게 구분되어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함께 볼 수 있는 주석서의 역할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설교보다도 한절 한절을 깊이 있게 다루며 강해설교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성경을 읽으며 하나의 구절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때 본서에서 찾아본다면 그 구절이 더욱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그리고 본서는 참고서의 역할을 한다. 공부를 하며 항상 함께해야 할 것이 참고서이다. 참고서는 알지 못하는 부분을 집을 수 있고 쉽게 흘겨 넘겨갔던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본서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을 읽을 때에 본서의 순서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한 뒤 본서를 읽게 된다면 소홀히 했던 부분이나 읽으면서 잘못 이해했던 부분을 바로 잡을 수 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로 시작한다. 원래 원문에는 이 1절의 동사가 없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구절이라기보다는 주제 또는 제목이자 마가복음의 기록의 목적으로 볼 수 있다.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이 동격으로 연결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복음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 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요한복음5장 18절과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다음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 히브리어로 ‘메시아’인 ‘그리스도’는 ‘어떤 사명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는 자’ 또는 ‘어떤 직분에 임명된 자’를 의미한다. 사무엘하 7장 12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선포는 예수님께서 다윗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것이다.마가복음의 핵심 내용은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3년 동안이나 숙식을 같이한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조명하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1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은 ‘복음의 시작’이다. ‘복음의 시작’에서 소유격인 ‘복음의’는 기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복음의 시작’은 ‘복음(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시작’ 또는 ‘예수님을 통한 시작’을 의미한다. ‘시작’이라는 단어는 헬라말로 ‘Αρχη’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라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애초에 원하셨던 삶의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기를 원하고 기대하시는 것이다.2. 막 1:14-15의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적용하시오,14절에서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체 사역의 핵심을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분의 사역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걸로 말씀하신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하나님의 복음’은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있는데 먼저 시간적 배경으로는 15절의 ‘때가 찼다’는 말에서 볼 수 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와 예정 가운데서 지금까지 계획하고 준비하셨던 하나님의 때가 다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하셨고, 또한 구약 전체를 통해서 300번 이상 말씀하셨는데 그 때가 된 것이다.14절을 보면 ‘요한이 잡힌 후에’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하신 시점이 ‘요한이 잡힌 후’라는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까지 30년을 잘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그때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둘째로 공간적 배경으로는 본문에서 ‘갈릴리에 오셔서’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행하셨다.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15절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 개념보다는 통치적 개념이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아야 한다.15절 마지막부분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기 위한 요구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라엘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던 것이 문둥병이 단지 전염성이 있다거나 죽을병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의 순전함과 온전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주셨던 명령이었다.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문둥병 걸린 사람을 치료하신 사건을 단순히 어떤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며, 이 사건 속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과 본질이 나타나 있단ㄴ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문둥병 걸린 사람의 치유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위치가 없어지고 새로운 언약 공동체 또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드러내고 있다.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자나 병을 고치는 자로 인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무분별하게 자랑한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 막 2:23-3:6에 나타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쓰시오.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첫 번째로 주일을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쉼을 위한 구별이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구별이다. 쉼을 위한 구별은 창조의 질서에 속한 것이다. 구약을 보면 땅은 6년 동안 경작하고 7년째 되는 해는 쉰다. 그리고 육체는 칠 일 중 하루를 쉰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여기서 쉼은 육체적인 쉼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회복을 말한다. 즉, 회복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예배를 위한 구별은 창조와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 구별된 날을 의미한다. 창조와 구원을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가장 잘 표현 될 수 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귀하고 우선되는 일은 없다.두 번째로 주일을 기억하라 이다. 주일을 구별되게 지키기 위해서는 주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했다. 주일을 함께 지키는 것이다.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우리의 기쁨과 감사는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다.안식일은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쉼과 회복을 경험하는 날이다.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예배하는 날이다.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쉼과 회복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날을 기억하며 잘 준비해야 한다.5. 제자들을 선택한 배경과 목적을 기술하고 적용하시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게 된 배경은 우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께 오는 무리와 대적하는 무리가 점점 늘어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역을 마치신 후에 이 구원 사역을 전할 제자들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3:14-15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함께 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먼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께선 그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셨다.두 번째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도 예수님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그들을 통하여 복음이 확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6. 막 3:20-30에 있는 ‘성령 훼방죄’에 대해 설명하고 적용하시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 구절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로 많이 오해받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씀은 문맥과 당시의 상황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