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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의 기행
    REPORT목차Ⅰ.머리말Ⅱ.본론1.커피의 발견2.커피의 어원3.커피의 역사4,커피의 전파경로Ⅲ.맺음말Ⅳ.참고문헌Ⅰ.머리말오늘날 커피는 인류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지구상에 인간과 커피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출현하였는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동서양 물건교류의 역사라고 해서 여러 교류 물자중 어떤 것을 할까 고민하다가 평소에도 자주 마시는 커피에 대해 조사해 보려고 한다.Ⅱ.본론1.커피의 발견커피의 기원에 대한 설은 크게 두 가지이다. 에티오피아 고원 발견설과 오마의 발견설인데 에티오피아 발견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커피가 문헌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A.D 900년경으로 아라비아 내과 의사인 라제스의 의학서적에 기록되어 있다. 커피는 처음에는 유목민족이 철마다 이동할 때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그리고 술, 의약품을 거쳐 음료로 사용되어졌는데 그 시기는 A.D 1100년경이었다.·에티오피아의 발견설에티오피아의 고원 아비시니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양치기 칼디가 양떼들이 흥분상태로 뛰노는 것을 보고 그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목장 근처의 나무에서 빨간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 사실을 수도원 원장에게 알려 열매를 따서 끓여 먹어 보니 전신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꼈고 다른 제자들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 소문이 각지에 퍼져 동양의 많은 나라들에게 전파되고 애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설이다.·오마의 발견설이슬람 나라 아라비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오마는 아라비아 모카의 수호성주 세크칼데의 제자로 중병에 시달리는 성주의 딸을 치료한 후 그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발각되어 오자브라는 지방으로 유배당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커피를 발견한다. 그 후 오마는 이를 의약제로 사용하여 큰 효과를 발휘, 이로 인해 면죄를 받아 고향에 돌아간 후 커피를 전파하여 널리 퍼졌다는 설이다.·마호메트의 전설이슬람교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병에 걸려 앓고 있을때 꿈에 천사 리니 더 많은 향이 퍼져 나왔고, 실수로 물에 빠뜨렸는데 물이 신선하고 시분을 좋게 하여 피로까지 회복 시켜주는 것을 알게되어 예맨으로 돌아와 보급시켰으며, 그 효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음료를 아랍어로 '힘'과 '에너지'를 뜻하는 카후아로 불렀다.2.커피의 어원커피는 프랑스에서는 ‘카페’, 미국에서는 ‘커피’, 일본에서는 ‘고히’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카페나 커피가 나올 수 있었던 그 어원은 과연 무엇일까?커피라는 말의 뿌리는 에티오피아의 카파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카파란 ‘힘’을 뜻하는 아랍어로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나무가 야생하는 곳의 지명이기도 하다. 이 말은 ‘힘과 정열’을 뜻하는 희랍어 ‘kaweh'와 통한다. 그리고 카파가 아라비아에서 ’qahwa(와인의 아랍어)'가 되고 터키에 건너와 ‘카베(kahve)'로, 유럽에 건너가 ’카페‘로 불려지고 있다. 영구에서는 처음에 ’아라비아의 와인‘으로 불리다가 커피가 유업으로 전파된 지 약 10년이 지난 1650년에 블런트 경이 coffee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불리고 있다.3.커피의 역사커피나무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오늘날처럼 마시는 음료로 발전한 곳은 아라비아 지역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1000년결 이미 커피를 볶아 삶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즉, 에티오피아를 발원점으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지역에 뿌리를 박고 조용히 그향을 주변 나라로 퍼뜨린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터키에 이르러 음료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이때까지만 해도 커피의 재배는 아라비아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이슬람교 세력의 보호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커피의 종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는 커피의 가공법이 발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터키에서 유럽대륙으로 퍼져 나간 커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전래된 것이라 하여 이교도 음료로 배척했으나 결국에는 종교의 벽을 뚫고 점차 유럽전역에 퍼지게 되었다.현재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인 커피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4.커피의 전파경로▶ 커피가 최초로 언제 어디에 경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고한다.675년경 홍해 근처의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 경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하고,575년경 아랍의 무역상이 커피를 가져와 지금의 예멘 지역에서 최초로 커피가 경작되어 그 후 오스만터키 제국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주장도 있다고한다.모카(Mocha)항은 15~16세기에 커피의 주요 수출항이었으며 아랍은 싹이 날 수 있는 생두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였다고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약용이나 종교 의식에 주로 사용되었다고한다. 최초의 커피숍은 키바 한(Kiva Han)이 1475년 콘스탄티노블(지금의 이스탄불)에 생겼다고하며, 커피는 이슬람제국에 의해 유출이 철저히 통제되었지만 1650년경 인도 출신의 바바 부단(Baba Budan)이라는 이슬람 승려가 커피 씨앗을 몰래 훔쳐와 인도의 마이소어(Mysore) 지역에 커피를 심었다고한다.커피는 1612년 베니스의 무역상들에 의해 처음 유럽에 소개되었는데, 그 후 빠흔 속도로 커피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기독교계에서는 아랍인들이 즐겨 마셨던 커피를 '악마의 검은 음료'라고 비난 하였다고하는데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VIII)는 커피를 옹호했다고한다.네덜란드에서는 1616년 예멘의 모카에서 커피나무를 훔쳐 온실에서 재배하였으며, 그 후 1658년 실론에 커피를 처음 심게 되고 1690년 인도네시아 자바에 커피를 처음 경작했다고한다. 얼마 후 네덜란드 식민지 국가는 유럽의 주요 커피 공급처가 되었다고한다.미국에는 1668년에 소개되었다고하며 뉴욕, 필라델피아 같은 동부지역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게되었다고하며, 카리브해와 중남미 지역에서는 프랑스 장교'Gabriel Mathieu do clieu'가 1720년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 섬에 커피를 심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전파되었다고한다.빨간선- 주로 아라비카노란선- 로부스카▶ 에디오피아→1000년경 아라비아 지역에서 최초로 마심→터키에서 음료로 자 열매를 갈아서 동물 지방으로 싸서 섭취하면 힘이 샘솟게 된다는 것을 발견함. 이 열매가 커피로 판단됨.·600년 경 -이디오피아의 염소치는 목동 칼디가 커피를 발견하여 수도승들에게 전파함.·1000년 경-아랍의 무역상들이 예멘에 농장 규모로 처음으로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함.그들은 또한 커피의 원두를 끓이면 "까화(qahwa:잠을 쫓는다는 뜻)"라고 불리는 음료가 된 다는 것을 발견함.·1453년-당시 중동의 지배국인 오스만 터어키에 의하여 커피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소개됨. 그 곳에 최초의 커피 상점인 키바한(Kiva han)이 1475년에 개점함.터키의 법은 만일 남편이 아내에게 매일의 몫의 커피를 제공하지 못할경우 남편과 이혼할 수 있다고 법으로 승인함.·1511년-메카의 부패한 지사 카일 베그(Khair Beg)가 그의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반역을 모의한다고 판단하여 커피 마시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술탄(황제)은 '커피는 성스러운 것'이므로 그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통치자를 파면시킴.·1600년 -무역상들이 커피를 이탈리아에 전파하자 대단한 관심이 쏟아졌다고합니다. 그러자 교황 크렐멘트 3세는 로마에서 그의 자문역들로부터 오스만 제국의 음료수인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이단이라고 결론 지어 금지 시켜 줄 것을 청원했답니다. 그러나 교황은 커피를 금지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커피에게 세례를 줬다고합니다. 이로서 커피는 그리스도 교인의 음료수가 되었다고합니다.·1645년-이태리에서 최초로 유럽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1652년에는 영국, 1672년 에는 프상스 파리에서도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고합니다.·1675년-터키에 살던 비엔나 사람인 프란츠 게오르그 콜시츠키라는 사람이 중부 유럽최초의 커피 하우스를 열었고 커피를 분쇄시켜 여과해서 우려내고 우유를 첨가시켜 섬세하게 커피 마시는 법을 성립시켰다고합니다.·1690년 경-네덜란드는 모카라는 아랍의 항구에서 커피나무를 밀수했고 그것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커피를 상업적으로 경작 하지만 프랑스령 총독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만다. 자신들의 커피 농장이 확산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던 가이아나 프랑스령 총독.하지만 멜로는 총독 부인과 헤어지면서 그녀로부터 커피나무 한 줄기와 씨가 있는 꽃다발을 받아 이를 심어 브라질을 산업화하는데 성공했다고한다.·1773년-영국이 홍차에 관세를 지나치게 높이자 미국인들이 '보스톤 항구 앞 바다를 차 주전자로 만들자'고 결의한 후, 홍차를 실은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고한다.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애국적인 임무가 되었다고한다.·1886년-커피 도매인이었던 조엘 치크(Joel Cheek)가 그의 인기 있는 커피 블렌드를 테네시 주에 있는 내쉬빌 호텔 이름을 따서 [맥스웰 하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한다.·1900년-힐스 형제가 진공 양철통에 담긴 분쇄 커피(레귤러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고하며, 그럼으로써 [힐스 브라더스 커피]가 탄생했다고한다.·1901년-최초의 용해성 인스턴트 커피가 탄생했다고한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일본계 미국인인 사토리 카토라고한다.·1903년-루드비히 로셀리우스라는 독일의 커피 수입업자가 연구가들에게 쓸모 없게 된 커피를 왕창 제공했고 그것으로 인해 풍미를 잃지 않고 원두로부터 카페인을 제거하는 과정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는 이 브랜드의 이름을 '상카'라고 지었고, 상카는 1923년 미국에 소개되었다고한다.·1906년-과테말라에 사는 영국 화학자 조지 콘스탄트 워싱턴이 그의 은으로 된 커피 주전자 주둥이에 가루 같은 응축물이 형성된 것을 발견 했고, 몇 번의 실험을 거쳐 최초의 대향 생산용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했다고한다.(Red E Coffee) 그러나 사업적으로는 실패했다고한다.·1938년-브라질은 자국에서 대량생산되는 커피가 너무 많아 폐기되는 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네슬레사(社)에 의뢰했다고하며, 네슬레사(社)는 이것을 계기로 냉동 건조식 커피를 발명했다고한다. 그 후 네슬레는 네스카페를 만들어 스위스에 소개했다고고한다.
    생활/환경| 2012.06.23| 9페이지| 1,5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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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의 새로운사상의 형성. 토마스아퀴나스
    중세의 새로운 사상의 형성, 토마스 아퀴나스12세기까지 유럽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그 중에 이슬람을 통한 고대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만남,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발견은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사회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신앙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과거의 권위들과 성서, 교부, 공의회, 교황에게만 의지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신앙 문제를 볼 때 좀 더 자세하고 확고한 이해를 위해 그 이전보다 훨씬 깊고 넓게 이성과 개념적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비역사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아퀴나스는 바로 그런 작업을 할 때에 있어 객관성과 논리적 엄격성을 충실히 지키면서 단호하고 과감하게 수행해나갔다. 나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이시기에 아퀴나스는 어떠한 철학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개념을 이야기하고자 하였고,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하다 지금부터 알아보고자 한다.먼저 아퀴나스는 1225년 초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날짜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나폴리와 로마 중간에 있는 아퀴노 지역, 로카세카 성의 이름난 가문 출신의 란돌포경과 나폴리 귀족 출신의 테오도라 사이에서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다섯 살에 몬테바시노의 베네딕초 대수도원에 보내졌으나 이후 초등 교육을 중단한 채 수도원을 떠나 나폴리 대학에 입학한다. 이것은 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데, 아퀴나스가 태어나던 즈음 프리드리히 2세가 현재의 독일에서 이탈리아 지역까지 통치하면서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시도로 인해 여러 차례 교황과 갈등을 일으켜 13세기 초 이탈리아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당시 나폴리는 아리스로텔레스와의 만남이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곳으로 아퀴나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퀴나스에게 사유의 길을 열게 하고 연구 기반을 닦아준 스승은 ‘전과박사’라고 불리는 알베르투스로 도미니코회의 석학이었으면 아퀴나스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그는 두 가지 선구적인 일을 하였는데 하나는 자연과학자로서 자연철학적 저술을 통해 새로운 결실을 맺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관해 박과사전을 지필하고 12세기 이후 새롭게 연구된 아리스로텔레스의 저서와 아랍 유대교의 문천들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합하는 과제를 제자인 아퀴나스에게 남겨주었다.1256년부터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퀴나스는 3년 동안 파리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1259년 로마 교황청의 요청으로 강사와 자문 자격으로 이탈리아로 가서 10여년을 보냈다. 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의 상당부분을 쓴 것도 바로 이시기라고 한다. 1269년 그는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곧이어 대학내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통해서 온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같은 이교 철학자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와는 어울리지 않게 보였기 때문인데 잠시 이들의 차이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과정을 규칙적이고 불변하는것이라하고 기적을 배제하였고 스스로 완성된 자연이며, 영혼의 사멸·천국과 부활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기적을 인정하였으며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영혼 불멸·천국과 부활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아퀴나스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신앙에서부터 이성의 역할과 영역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앙과 이성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성은 비록 온건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당시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1269년부터 1272년까지의 파리 생활은 아퀴나스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 기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이론에 대해 관심이 가장 높았던 때이기도 하다. 실제 이 기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인 『자연학 주해』, 『형이상학 주해』, 『영혼에 대하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스 축일 미사에서 신비 체험을 하고 강의와 글쓰기를 멈추게 되었는데, 그는 중단 이유를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긴다면 한날 지푸라기처럼 느껴졌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이유로 『신학대전』은 3부에서 중단되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는것이다. 아퀴나스의 사상은 가톨릭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순조롭지 못한 과정을 거쳤으며, 그는 한때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하였고 죽은 뒤 시신이 훼손당하기까지 했다.지금까지 아퀴나스 생애를 중심으로 그가 사상을 형성하는 과정과 배경, 그리고 영향을 받거나 중 것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없었다면 그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이 둘의 신앙과 이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아퀴나스의 주장이 ‘믿기 위해 이해한다’ 라는 것을 밝힌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알기위해 믿는다’ 와는 앞뒤가 다르다. )아우구스이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이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이것을 통해 앏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또 삶과 앎이 철저하게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성이나 지식보다는 신앙이나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구별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구별된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을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이렇게 아퀴나스는 자연적 이성을 통해 인식되는 철학적 진리는 그 영역 안에서 신앙과 모순되지 않고 신앙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이성을 전제로 하는 신앙을 주장했다.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상대적인 차이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알기 위해 믿는다믿기 위해 이해한다위로부터의 인식아래로부터의 인식이성에 우선하는 신앙이성에 토대한 한 신앙신앙에 토대한 이성신앙으로부터 자율적인 이성신비주의적 특징합리주의적 특징공통의 토대: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아퀴나스의 전체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스콜라적 학문 방식, 스콜라주의에 대해 보고자 한다. ‘스콜라’는 학교를 뜻하는 라틴어 ‘schola'에서 유래하는데, 일반적으로 스콜라주의는 중세의 특징인 정신적인 태도와 철학적 방식 또는 이와 비슷한 사유 방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11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대학에서 그리스와 로마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결합하여 일관된 체계를 마련하려던 학문적 경향이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 보다는 고대에 이미 획득된 지식을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의 양식은 대학 강의에서 이루저진 강독과 물음, 토론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잘 보이는데 단편적인 것을 이해하고, 논쟁하고, 증명하는 방법과 서로 다른 견해를 조정하는 방법을 중시하는 방식이다. 아퀴나스 저작에서 볼 수 있는 토론의 전개 방식에서는 우선 물음으로 제기되는 주제에 대한 학설이나 주장이 소개되는데, 주로 교회의 권위 잇는 교부나 신학자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이중 앞서 아퀴나스와 비교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사회과학| 2012.06.23| 3페이지| 1,000원| 조회(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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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산책
    중세산책중세시대는 처음에 어떤 갑작스런 사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과도기적 단계를 거쳐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작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물음이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 대다수는 유럽에서 중세시대는 로마가 정복당한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중세 유럽을 건설한 사람은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 카를 대제였으며, 바로 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오늘날 유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국가, 독일과 프랑스가 생겨났다.」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은 독일통치자까지 자극하여, 상대국가들과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게 만들었다. 여러 작은 왕국과 혈통 국가는 빠르게 성장했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남프랑스에서 독일 작센 비장과 튀링엔 지방에 이르는 자신의 통치 지역과 그곳의 여러 민족들을 통합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제국을 이루는 국민들의 혈통이 다르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 역시 너무 달라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못했다. 이는 통치자의 정복의 욕심과 다른국가들과의 과도한 경쟁심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프랑크 왕국의 통치자들은 중세시대 내내 통용되었던 여러 가지 전통을 도입했다. 제국통일에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옛날부터 내려온, 황제와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이었다. 여기서의 서약은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인정과 유대가 밑바탕이 되었다. 두 번째 요소로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국가 통치와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사실상 충성 서약과 기독교는 둘 다 실제 세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세 유럽을 지탱케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왕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왕권이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서 어느 정도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확신했다. 제관식 그림을 보면 왕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왕관을 하사받는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다.」유럽의 중세시대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상태에 있었으나, 기독교로 인해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통일을 이뤘다. 기독교신자들은 신앙심이 굉장해서 종교적인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를 통해 상당부분 분쟁을 줄일 수 있었다. 카를 대제와 통치자들은 처음에 무력으로 하려했다가 실패했던 통일을 기독교가 정신적으로나마 성사시킨 것이다.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나왔지만, 중세시대에 와서 민주주의 개념은 잊혀졌다. 일반 평민은 평소에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법 앞에서 조차 평등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배적인 삶에서 벗어나려 애쓰기 보다는 자신의 운명으로 의연히 받아들였다. 이는 내세를 바라다보며 현세를 살아갔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이 불행한 현세는 미래의 행복한 내세를 위해 건너가야 할 험난한 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게 해주는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영주, 기사, 농부 그리고 농노)「게르만 족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민족의 대이동 시기와 이로 인해 발생한 로마 제국과의 전쟁 중에 평화로운 때보다 더 단합해야만 했다. 게다가 라인 강과 리메스의 서쪽 이전 로마 지역에서는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이 땅을 빼앗기자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한 시기에는 관철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가 필요했다. 영토가 원래 각 종족이 정착해 살았던 전 지역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커져서, 예전에 통치방식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그리하여 종족의 상위층에서 왕을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의 안녕을 맡겼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는 왕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충직한 관리를 뽑아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했다. 관리는 왕이 직접 선발하였으며 중요 임무의 일부를 맡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충성 서약은 이때부터 쓰게 된 것이다.그러나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은 군사제도로 인해 충성 서약을 한 일부 자유민이 영락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자유민 중에는 부자도 있었지만 가난뱅이도 있었다.)「왜냐하면 전쟁이 발생할 경우 서약을 한 자유민은 출정하느라 자신의 농장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복무기간 동안 자신의 장비 일체를 스스로 조달해야 했지만 급료를 따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결국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자유민은 비자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전체 인구중에서 비자유민의 수가 증가했다.비자유민과 노예와 같은 하류층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노예는 주인의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었으며, 중세 초기에는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기 때문에 노예의 자식도 당연히 노예였다. 그러나 운이 좋은 경우 예외도 있었다. 중세시대의 국민 상당수는 노예가 됨으로써 비자유민이 되었다. 비자유민과 농노는 토지를 소유할 수가 없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조세를 바쳐야만 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지주전호제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되겠다. 비자유민은 노동력 말고는 소유한 것이 없었으며, 전쟁이 발생할 경우 보병으로서 군복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노예는 군복무가 금지되었다. 계급의 상하이동이 어려운 중세였지만, 예외는 있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비자유민은 일반자유민보다 약간 높은 지위인 하급 귀족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비자유민은 왕실 또는 군대를 통해서 자유민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어느정도 가능했다.
    독후감/창작| 2012.06.23| 3페이지| 1,000원| 조회(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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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출현1. 제국주의(1) 제국주의① 의미 :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이를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경향② 제국주의의 성격 : 제국주의는 자국의 세력을 팽창시키려는 잘못된 민족주의와 정치, 사회적 불안을 대외 팽창으로 덮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음(2) 제국주의의 성립배경① 경제적요인-자본주의의 발달 : 19세기 말, 과학 기술이 진보하고 제2차 산업 혁명이 진전되면서 자본주의가 크게 발달-해외시장확보의 필요성 :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상품의 원료를 얻고, 상품을 팔거나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② 비경제적요인-증가한 인구를 위한 식량확보-우월적 민족주의-선교사업, 인도주의2. 제국주의국가들의 팽창 정책(1) 제국주의국가들의 군비 경쟁① 군비경쟁 :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군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② 영국과 독일의 경쟁 : 특히, 해군력의 증강을 두고 영국과 독일 사이에 경쟁이 치열(2)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① 식민지 쟁탈전의 전개 :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약소국들은 거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전 지구 육지의 1/5과 전 인류의 1/10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음② 제국주의 국가들의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 결과, 국제 관계가 매우 위태로워짐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분할1.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소개되자, 유럽 열강이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시작→제국주의 열강의 분할로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① 영국의 종단 정책 : 수에즈 운하를 매수하고, 남쪽의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의 카이로를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② 프랑스의 횡단 정책 : 알제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진출하여, 아프리카를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파쇼다 사건(1898) :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③독일: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제국주의적 침략은 하지않고, 상인들의 진출을 후원④이탈리아: 뒤늦은 통일로 문제가 많았지만 위신을 위해 진출하나, 프랑스에 의해 좌절2. 유럽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1) 유럽열강의 아시아 분할① 영국 :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미얀마,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② 프랑스 :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③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향료 무역을 독점(2) 유럽 열강의 태평양 분할①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② 미국의 태평양 분할 : 미국은 에스파냐와 싸워 필리핀을 얻었고, 1898년에는 하와이 제도를 병합제국주의 열강의 대립1. 유럽 열강의 대립(1) 삼국 동맹① 배경 : 통일 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삼국동맹을 맺었음② 동맹국 :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가담(2) 삼국 협상① 배경 : 독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삼국 협상을 맺었음② 협상국 : 프랑스는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응(3) 유럽 열강의 대립 : 유럽 열강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게 되었음2. 국제적 긴장의 격화(1) 비스마르크 실각 후의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의 변화①비잔티움과 바그다드 간의 철도부설권을 차지, 베를린을 연결 →3B정책②영국의 케이프식민지와 카이로, 그리고 인도의 캘커타를 연결 →3C정책(2) 모로코 사건①제1차 모로코 사건→빌헬름2세의 탕지르항 공식방문으로 발생: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프랑스 지지로 독일이 물러남,그러나 대전의 발생을 예감하는 위기감 조성②제2차 모로코 사건→독일이 모로코를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음: 모로코의 내란으로 프랑스의 군대를 파견하자 잇따라 독일의 군함파견으로 인해 일단락(3) 발칸 반도① 발칸 반도 :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날카롭게 대립②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 : 슬라브 족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오래 전부 터 이 곳을 탐내던 세르비아가 분개(4) 발칸 전쟁
    사회과학| 2012.06.23| 5페이지| 2,000원| 조회(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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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주의국가의 계보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제Ⅰ부. 서유럽14세기와 15세기에 유럽의 경제와 사회가 겪은 장기적인 위기는 중세 말 봉건적 생산양식이 직면한 난관과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격동을 치룬 유럽 대륙이 맞이한 최종적인 정치적 결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16세기에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의 중앙집권화된 군주정은 중세 사회구성체의 피라미드식으로 분산된 통치권뿐 아니라 신분의회 및 봉건가신제와 완전한 단절을 보여주었다.엥겔스는 그러한 군주정들을 ‘낡은 봉건귀족과 새로운 도시 부르주아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급적 균형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대의 경제적·정치적 지배계급은 중세와 동일한 봉건귀족이었다. 물론 귀족은 중세가 막을 내린 후 수세기 동안 형태상의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여전히 귀족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며, 귀족계급의 어떠한 ‘정치적’ 자격박탈도 절대주의 국가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절대주의 국가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봉건귀족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절대주의 국가는 결코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간의 중계자가 아니었으며, 귀족에 대항하여 태동하는 부르주아의 도구는 더더욱 아니었다.절대왕정 시대에는 상비군, 상설적 관료기구, 국민적 조세, 법전, 통일된 시장의 초기 형태가 도입되었다. 이 모든 특징들은 현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이 유럽적 봉건적 생산양식의 핵심적인 제도인 농노제의 소멸과 같은 시기에 나타났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절대주의를 부르주아지와 귀족간의 균형의 나타내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노제의 폐지 자체가 농촌으로부터 봉건적 관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노동이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되기 위해서 그 사회적 존재조건들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한, 농촌의 생산관계는 여전히 봉건적이었다.그리고 전쟁은 봉건제 하의 지배계급에게 잉여착취를 확대시키는 가장 합리적이고 신속한 방법이었다. 절대주의 국가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장을 위해서 구축된 기구였다 부여함으로써 국가 내에서 대귀족들이 후견제를 형성하는 것을 봉쇄하였다. 보통 이들은 국가 자체에 대한 엄격한 경애심으로 물들어 있어, 야심을 가지고 있거나 불만에 찬 대귀족의 음모에 대항하여 국가의 이익을 떠받들 확고한 결심이 있었다.절대주의는 궁극적으로 귀족의 집단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나, 귀족은 중세도시에서 발전해온 상업 부르주아에게 적응해야 했다. 중상주의(mercantilism)는 절대주의 시대의 지배적 이론으로, 세계에는 고정된 양의 상업과 부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금괴나 주화의 유출을 금지한 반면 상품의 수출은 장려하였다. 그러한 경제적 보호주의, 해외로의 팽창은 초기 부르주아지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한편 후기 봉건국가를 강화시켰다.또한 모든 통치자는 “모든 사람들에 관한 것은 모두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한다”라는 원칙 하에 중요한 세금을 위해서는 특별히 소집된 회의체, 즉 신분의회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왕국의 신분의회’는 관습적으로 귀족, 성직자, 도시의 시민을 대표하였으며, 세 개의 회의로 조직되거나 혹은 뚜렷이 구별되는 양원(귀족원/평민원)체제로 조직되었다. 그 제도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조세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생겼으나, 그런 목표를 채우는 동안 군주에 대한 귀족의 잠재적인 집단 통제력을 증대시켰다.스페인은 절대주의화의 일반적 과정 속에서 질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시기의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게 스페인 절대주의가 초래한 영향과 충격은 ‘보통을 넘는 것’이었다. 스페인 왕정의 우월성은 두 가지 자원의 결합에 기인하였는데, 우선 그 하나는 스페인 왕가가 유럽의 다른 어떤 가문들보다도 왕조간의 결혼계약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었다는 점이다. 스페인 절대주의는 1469년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간의 결혼에 의해서 이루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났다. 무어 인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써 국토 회복 운동(Reconzuista)이 완성되었으며, 나폴리가 병합되고, 나바라를 흡수 하였았다. 카페 왕조는 일 드 프랑스에 있는 원래의 근거지로부터 점진적인 통합운동 속에서 종주권자로서의 권리들을 외부로 서서히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플랑드르로부터 지중해까지 그 권리들이 미치게 되었다.프랑스 군주국가를 붕괴시킨 세 가지 큰 사건은 15세기의 백년전쟁과 16세기의 종교전쟁, 17세기의 프롱드 난이었다. 중세적 군주정으로부터 절대군주정으로의 이행은 이 위기들에 의해서 매번 중단되었다가 그 후에 가속화되었다. 이 위기들이 가져다준 종국적인 결과는 루이 14세 시기에 서구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는 왕권숭배의 창조였다. 프랑스 절대주의는 17세기 마지막 수십 년간에 제도적 신격화를 달성하였다. 루이 14세 치세 동안 완성된 국가구조와 그에 일치하는 지배문화는 유럽 귀족 태반에게 모범이 되었다.그러나 베르사유의 정치적 명성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부르봉 절대주의의 조직상의 완성은 군사적 팽창이라는 지상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르봉 절대주의는 스페인 절대주의보다 내적으로 훨씬 강력하였고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또한 프랑스 절대주의에 대항해서 늘어선 세력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강력하였다.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판매를 위한 새로운 관직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작위는 경매에 부쳐졌다. 또 강제대부와 공채를 확대하고, 화폐가치를 조작하였다. 최초로 귀족도 모면하지 못한 ‘인두세(capi-tation)’가 부과되었다. 인플레이션, 기아, 인구감소가 농촌을 황폐화시켰다.섭정기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물가의 장기적 상승과 상대적인 농업의 번영, 인구의 회복이 있었던 경제적 팽창의 시대였다. 농업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생산 분야였지만, 공업과 상업은 괄목한 진보를 이룩하였다. 프랑스 공업은 18세기 동안 생산에서 약 60% 성장하였다. 그러나 교역, 특히 식민지와의 교역은 훨씬 더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식민지 무역은 프랑스 무역의 3분의 2나 차지하였다. 상업상의 붐은 자연이 도시화를 촉진하였다. 비록 영국이 산업화의 수준에설적인 기반을 가진 근대화된 육군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섬나라라는 여건 때문에 그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헨리 8세와 그 세대의 영국 귀족들은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비용도 많이 들고 아무 쓸모도 없는 튜더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권위는 급속도로 뒷걸음질쳐갔다.튜더 왕조가 왕령지를 마구잡이로 팔아치운 탓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던 찰스 1세는 훨씬 더 발전된 절대주의의 구축을 꾀하였다. 그리고 전쟁의 수행과 그것에 책임이 있는 대신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의회를 무기한으로 해산시켜버렸다. 의회와 국왕 사이의 팽팽한 상황은 스코틀랜드에서 깨어졌다. 영국 절대주의는 무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데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국왕이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당한 군사적 패배 문제를 처리하려고 마지막에 가서 소집하였던 의회는, 보다 오래된 헌정체제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면서, 스튜어트 왕정이 이룩한 모든 업적들을 죄다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상업화된 젠트리와 자본주의적인 도시 그리고 일반 수공업자층과 요맨층에 의해서 영국 절대주의는 그 중심에서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영국 절대주의는 성숙기에 접어들지도 못한 채,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서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제Ⅱ부 동유럽서구의 절대주의 국가는 봉건적 공납의 금납화를 받아들인 봉건계급의 재편된 정치적 기구였다. 그것은 점차 도시화되어가는 경제 속에서 일어난 농노제의 소멸에 대한 보상이었다.동구의 절대주의 국가는 가난한 민중들이 누렸던 전통적인 공동체의 자유들을 이제 막 일소해버린 봉건계급의 억압기구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도시생활과 저항이 일소된 상황속에서 농노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장치였다. 동구에서의 영주반동은 새로운 세계가 위로부터의 강제에 의해서 창출되어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관계에 투여된 폭력의 양은 서구에 비해서 훨씬 많았다.중세의 서구 봉건제가 동쪽으로 팽창하기 이정에 동구의 주요 슬라브 사회구성체들은 어디에경우를 보여준다.15세기에 폴란드에게 져서 복속된 이후로 오랜 동안 쇠퇴의 길을 걸어오던 이 유력한 군사성직 교단의 해체는 기사단원들과 평신도 지주들을 융합시키고 또 동프로이센에서 최초로 통합된 영주계급을 탄생시켰다. 이 새로운 통치체제에 대항한 농민봉기는 즉시 진압되었고 브란덴부르크와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이 지역에도 확립되었다. 농촌지역에서는 추방과 농노화가 진전되었다.브란덴부르크 절대주의의 진화는 초기 서구 왕정의 행정 발전경로와 아주 유사한 경로를 거쳤다. 그러나 1672-78년 전쟁의 발발은 서구적 경로와의 급격하고 결정적인 단절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최고병참국이 사실상 국가의 모든 행정기구를 제어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이후 군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재위1713-40)은 군대의 규모를 늘렸으며 관료기구는 능률화되고 합리화되었다. 지금까지 국가기구는 왕령지의 관리와 조세징수를 각각 책임지는 왕정의 사적 재정기구와 공적 재정기국의 두 축으로 분리되어있었는데, 이제 이 둘을 외교, 사법, 종교 업무를 제외한 모든 행정에 책임을 지는 '최상급 재정군사왕령지 통수부'라는 중심기구로 통합하였다. 국왕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후일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프로이센을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였다.폴란드에서는 동구의 어떤 나라보다도 봉건제 말의 위기가 덜 격심하였다. 흑사병이 이웃 나라들을 휩쓸고 있을 때 폴란드는 그에 부수한 역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흑사병은 대체로 모면하였다.폴란드 농민의 농노화가 법적으로 공포된 것은 16세기를 경과하면서 더욱 가혹해진 농민의 농노화는 즐라흐타의 새로운 번영을 보장하였던 시기이다. 폴란드 귀족은 동구의 어떤 사회집단보다도 당시의 발트 곡물무역 붐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유럽의 곡창이 되었으나, 경작기술은 낮은 수확률과 더불어 유치한 수준에 머물렀다.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출현한 귀족계급은 유럽에서는 유례가 없었다. 권력을 장악한 귀족은라졌다.
    사회과학| 2012.06.23| 7페이지| 2,000원| 조회(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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