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1. 제목호모 루덴스적 놀이의 귀환?2. 주제호모 루덴스 개념에서의 놀이는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엔 무리가 있고, 발전시켜 연구해야할 필요성이 있다.3. 개요서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해준 호모 루덴스의 개념본론- 현대사회에서 호모 루덴스적 놀이의 귀환을 주장하는 노명우- 시장지배질서 하에서의 놀이- 신격화된 개념인 호모 루덴스적 놀이- 하위징아 놀이 개념의 한계, 그리고 변화와 연구의 필요성결론- 현대사회에서 발전시켜야할 필요가 있는 호모루덴스적 놀이의 개념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호모 루덴스’의 개념은 자연을 개조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에만 주목했던 종래의 사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놀이에 대한 성찰은 현대에 와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사회에서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이성에서 감성을 강조하는 경향 아래 호모 루덴스의 개념이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노명우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에서 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놀이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재조명하고 현대 사회에서의 놀이에 대하여 고찰한다.노명우는 19세기를 거치면서 시장지배질서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호모 루덴스가 사라졌다며 현대사회에서 놀이를 통한 호모 루덴스의 귀환을 주장한다. 시장지배질서 하에서의 놀이는 전문화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놀이이며, 이것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시장관계 속에서의 놀이는 바뀌어야 하는 대상이며, 호모 루덴스적인 놀이만이 진정한 놀이인 것일까?요한 하위징아와 노명우에 의하면, 놀이는 특정 이해관계나 목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지배질서 하에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제공되는 놀이는 놀이처럼 보여도 놀이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놀이 제공자의 의도가 이익추구에 있다고 할지라도, 놀이 수용자는 놀이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놀이를 즐기며 그것에 대해 열광하고, 다른 부차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가령, 노명우는 한 인터뷰에서 최근까지 인기를 끈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놀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의 노래와 춤에 많은 사람들은 열광할 수 있었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강남스타일이라는 놀이를 즐겼고, 그것에서 재미와 기쁨을 느꼈다.강남스타일과 같은 놀이가 호모 루덴스적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은 정의된 호모 루덴스적 놀이가 너무 이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의 놀이에서는 자율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놀이가 일상적이거나 실제의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또한 깔려있다. 특히 하위징아는 놀이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미’와 관련시켜 개념화하고 있는데, 여기에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 등의 특징이 더해지면서 놀이는 ‘순수한 무언가’로 규정된다. 놀이의 개념이 마치 신격화되는 것이다. 놀이가 신격화되고 순수하고 고귀한 무언가로 묘사되면서 현대사회의 놀이는 부정적이고, 변화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특히 하위징아는 17세기 남성들이 화려하게 차려입는 궁정 예복에 관심을 가졌던 것을 놀이 정신이 만개한 것으로 보았으며, 우월한 계층에서 만들어진 문명이 대중에게 전파될 때 쇠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놀이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19세기 역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귀족층의 권위가 쇠퇴하고 전통문화와 대중문화의 분리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하위징아의 놀이와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기 보다는 현대에 맞게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호모 루덴스의 개념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살려, 하위징아가 제시한 개념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카카오스토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다2010년대 들어서부터 가장 핫한 키워드 중 하나는 단연 SNS일 것이다. 과거에 비해 오프라인으로 사람을 직접 마주하기 보다는 온라인상으로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를 이용하여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흔한 요즘, SNS는 현대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느끼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미투데이, 인스타그램 등등 수많은 SNS에 파묻혀 지낸다.다양한 sns가 범람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이제 우리는 수동적으로 남들이 쓰는 sns를 따라가기보다는 여러 sns 대안들 사이에서 자신의 성향에 보다 잘 맞고 사용환경이 적합한 sns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빠른 정보전파 속도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sns의 파급력이 큰 요즘, 사람들이 어떠한 sns를 사용할 것인가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들어 카카오스토리가 그 동안 sns시장을 제패했던 페이스북을 누르고 급부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만하다. 올해 4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공개한 국내SNS이용률 순위는 카카오스토리(31.5%), 페이스북(28%), 트위터(19.4%), 싸이월드(17%) 순으로, 카카오스토리가 페이스북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기록했다. 카카오톡 친구가 올린 이미지를 감상하고 댓글을 작성하는 이 간단한 서비스가 페이스북의 아성을 제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무수히 많은 군중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뽐내야 하는 페이스북보다 카카오스토리가 한국적인 정서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먼저, 카카오스토리의 경우 과거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싸이월드와 흡사한 폐쇄성을 보여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네트워크 인맥인데, 카카오스토리에서 친구맺기는 한국인의 일상 소통수단으로 자리잡은 카카오톡에 등록된 친구목록 안에서 이루어진다. 최소한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 카카오톡에 등록되어 연락이 가능한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친구맺기가 가능한 페이스북의 네트워크가 넓지만 동시에 약한 반면에, 카카오스토리의 네트워크는 보다 끈끈하다. 친구추가가 가능한 친구 수 역시 페이스북은 5000명인데 반해, 카카오스토리는 500명뿐이 되지 않는다.이런 네트워크 인맥 구조를 기반으로 해서, 페이스북은 넓고 얕은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이 어떠한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무슨 댓글을 달았는지도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정보들과 내가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무수한 외침들이 뉴스피드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우리는 오히려 지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이야기 역시 누군가의 뉴스피드 위에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데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카카오스토리의 제한된 관계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찾고, 나를 드러내는 부담도 다소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카카오스토리가 한국적 정서에 보다 들어맞는 또 다른 특징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실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따로 시간을 내어 안부를 확인해야 하고,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는 뉴스피드에 친구들의 게시물이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우리는 그저 뉴스피드를 넘기면서 터치 한 번으로 손쉽게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반면에 카카오스토리는 친구들의 소식을 간단하게만 보여주며, 관심을 표현하려면 따로 그 친구의 게시물로 들어가 확인을 해야한다. 이런 카카오스토리의 능동적 관심표현 방식은 더욱 깊은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인권사업,그리고 그 활용20 이Ⅰ. 서론박정희 정권 시절은 현재의 한국경제를 이루는 주요 산업의 발판을 마련하고, 일제치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던 나라를 세계 10위안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은 중요한 눈부신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밝은 측면과 이에 가려진 철저한 인권탄압, 경제 성장 제일주의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바탕으로 한 어두운 측면이 공존하던 때였다. 특히 쿠데타 세력이 행했던 강압적 통치의 기본적인 수단은 군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행정부와 입법부의 역할을 했던 당시 최고의 권력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민주주의국가를 표방한 나라에서, 민주적인 선거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항하는 저항세력은 위수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동원, 진압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쿠데타 이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중앙정보부를 세우는 일이었는데, 이는 국민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하였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권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중요시했던 정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반공과 조국근대화를 제1의 목표로 내세우게 되면서 의도적으로 인권 관련 제도들을 만들고, 보여주기식의 인권 행사 등을 크게 개최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인권 관련 사안들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통제하고 독점하려 했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어긋나게, 이를 적극 활용하여 현재의 인권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에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정부가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국민들이 인식하고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4년의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등은 이를 활용하여 억압적인 정치체제에 맞선 저항으로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보았을 때,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던 1960년대는 인권이라는 가치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던 정부의 인권사업 속에서 70년대의 인권운동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인권사업들을 살펴보고, 이것이 의도치 않게 어떤 식으로 국민들의 저항운동의 시초가 되었는지 알아볼 것이다.Ⅱ-1.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인권 관련 정책박정희는 집권한 이후에 인권옹호과라는 것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인권옹호과는 현재의 인권전담기구처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거나 국민들에게 인권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라는 것 보다는 그저 그럴싸해 보이는 민주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인권옹호과는 인권옹호주간 행사를 주관하거나 이와 관련된 잡지, 신문 등을 발행함으로써 정부의 인권사업을 홍보하였다. 인권옹호과는 매년 ‘인권연보’ 라는 인권전문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예산과 인력 부족의 이유 등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인권 홍보지답게 ‘인권연보’는 인권사업과 관련된 정부의 모든 활동을 수록하고 있었다. 정부에 등록되어 있는 인권옹호기구의 활동내용들도 소개하고 인권상담 실적을 알렸으며, 여러 단체들의 인권상담 내용도 실었다. 뿐만 아니라 인권의 날 행사, 기념식 등도 모두 실었고 ‘세계인권선언’ 과 같은 인권 관련 법률 자료 또한 수록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저항세력에 대해서 강압적이고 억압적 통치방식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정부 비판적인 내용들 또한 꽤 실렸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적인 인권사업답게 이러한 비판적인 내용 또한 싣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정부가 비판 또한 귀담아듣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권에 대한 의미가 희미했던 그 시절에 인권에 대한 외부의 의견을 참고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은 ‘인권침해사건처리규정’ 이라는 것을 만들어 인권상담소를 설치하고 인권침해사건 조사와 법률 상담 등을 맡겼다.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인권사업을 펼치면서도 저항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거나 정권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폭력과 고문을 행사하곤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잡지 ‘인권주간’ 에는 인권에 관련하여 여러 사람에게 시상을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간첩 사건을 조작하며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시상은 고아원, 미혼모시설 등 자력으로 설립하여 이들을 보호한 사회사업가들에게 주로 주어졌는데, 이 역시 구색 맞추기 인권사업의 일환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돕는 인도주의적 모습을 홍보하는 동시에 국가가 미처 부담하지 못한 사회복지 부분을 민간에게 자연스레 떠넘기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Ⅱ-2. 국민에 의한 인권사업의 활용이러한 정부의 인권사업아래, 여러 사회단체들과 인권옹호단체는 정부 기관에 등록되어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고 해서 전부 다 국민들의 외면을 받지는 않았다. 몇몇의 인권옹호단체와 같은 경우, 국민들은 상담을 요청하거나 인권침해의 실상을 고발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한국인권옹호협회는 정부에 맞서 인권침해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저항한 대표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인권옹호협회는 인혁당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정부의 잔인한 고문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중앙정보부가 인민혁명당을 공산주의단체로 조작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조사과정에서 나체로 물과 전기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한국인권옹호협회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한국인권옹호협회는 특별조사단까지 구성하여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소 가치가 없던 인혁당 사건의 무리한 조작으로 중앙정보부 폐지론까지 나온 상황에서, 한국인권옹호협회의 고문 사실 폭로까지 더해져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끌려갔던 일부는 석방되고, 나머지는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이 끝이 났다. 비록 고문자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보상 등은 받지 못했지만, 강압적이고 통제적이던 정권 아래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인권옹호단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이렇게 정부의 허가를 받은 인권옹호단체의 문제 제기 외에도 사회적 약자들이 직접 정부에 인권문제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부가 인권사업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한 ‘인권주간’ 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당시의 버스 여차장들은 18시간에 달하는 장시간의 노동, 식모보다도 못한 낮은 임금, 교도소만큼 엄격한 기숙사 생활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울시에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며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인권주간의 인권옹호위원회는 여차장의 근로실태 조사를 벌였고 수색한 버스회사를 인권주간에 입건하기도 하였다. 비록 사실상 여차장들의 근로조건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여자에 대한 전근대적 계급의식이 남아있던 당시에 사람들에게 여차장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고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신들이 받는 처우에 대해서 인권문제라 판단하고 스스로 인권옹호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 인권침해자로 자신들이 일하고 있는 소속회사를 지목한 것은 우리나라 인권사에 있어서 큰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