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와 경제-선진국과 후발국에게 주는 의미Ⅰ. 인구와 경제1. 인구와 경제의 관계한 국가의 부는 인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생산성의 변동이 제약적이던 사회에서 국가의 인구규모는 국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경제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부의 크기는 점차 인구규모보다는 생산성의 변동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기술혁신이 중요해지고, 생산성의 질적인 측면이 주목받고 있다. 인구의 질, 즉 인적자본에 대한 중요성 또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GNP= 인구규모 X 1인당 생산성 = 인구규모 X 인구의 질)2. 2차 대전 이전의 인구관공자·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인구가 적정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14C 아랍인인 이븐 칼둔(Ibn Khaldoun)은 인구의 밀집이 노동의 분업을 가져와 더 큰 효율을 창출한다고 생각했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상주의 이론에 따라 부의 원천인 인구증가를 위해 해외이민유출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선 중농학파는 생산물의 증대가 인구의 증가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콩도르세(Condorcet)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식량의 증산을 가져오므로 인간은 인구의 과다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시장의 규모는 인구의 규모와 분포에 따라 결정되므로, 경제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구의 증가에 좌우된다고 보았다. 맬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기근이 일어나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하락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농업 기술의 진보로 인해 생산성의 향상이 충분히 나타나면서 맬서스의 암울한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3. 2차 대전 이후의 인구관인구문제가 본격적으로 관심 받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적인 인구증가가 일어나면서였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이 낮아지고 출산율은 증가하면서 인다.인구증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 소비인구의 증가를 통해 수요를 증대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생산인구의 증가를 통해 공급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본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공급여력이 부족한 후진국에게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비인구가 증가하면서 저축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투자되는 자본은 줄어든다. 이와 동시에 노동공급이 증가하고 노동의 수확체감이 심해지면서 결국 소득수준이 낮아진다는 것이다.인구증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노동 부문에 문제가 있는 경제에서는 인구의 증가가 분업과 전문화 등으로 인해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인구증가가 기술진보와 생산성 증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더 긍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구가 많아지면 지식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외부효과가 작용되고, 이는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져 생산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최근에는 기술진보를 인구의 양적측면만 부각시키기 보다는 질적인 측면에서 보려고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술진보나 생산성의 향상이 인적자본을 축적해나간 결과라고 주장하는 내생적 성장모형이다. 이 내생적 성장모형은 기술진보의 궁극적 원인을 인적자본의 축적이라 보고 있다.Ⅱ. 각 나라들의 역사적 사례1. 영국의 사례영국의 인구는 18세기 중반 이후에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이는 인근 유럽국가와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가장 큰 요인은 출산율의 증가였다. 인구가 증가하는 동시에 인클로저 등의 영향으로 농업에서의 생산성 증가가 일어나면서 맬서스 트랩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영국경제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실질소득의 증대가 같이 일어나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인적자본에 대한 관리가 우수해서, 도제제도의 원활한 작동과 이를 도운 행정적·법적 제도로 인해 더욱 경제성장에 유리하였다.)-그림1. 연간 인구증가율과 실질임금지수)-2. 독일의 사례19세기 동안 독일의 인구는 급성장했다. 평균 수명의 연장과 출생률의 증가로 인해 매년 80만 명 정도의 인구가 늘어났 이상 자국의 농업 생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수입을 통해서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인구 증가는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력을 충분히 제공해 주고 국내 소비시장을 확대하여 기업의 생산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계와 교통수단의 발달이 진행되고, 농업 부분에서의 수확량과 질이 향상되어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또한 인구의 증가는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키면서 여러 대도시들이 생겨났다.)3. 일본의 사례일본은 산악이 많고 농경지에 적합한 토지는 협소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토지에서 효율적인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려면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경작하는 토지·노동 집약적인 농업이 적합하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가족단위의 노동력을 이용한 소규모 농경이 보편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다. 이는 단순히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량의 확대 혹은 생산물의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면서 그 결과가 소득의 증대로 이어져 생활수준의 향상을 기대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생산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힘든 노동과 장시간의 노동은 나중에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투자가 되었다. 농업기술에 관한 서적 또한 대량으로 유포되어 농업기술의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면서 자립하게 된 농민은 신분적 자유가 생겼기 때문에 결혼율과 출산율이 상승하였다.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사망률(특히 유아사망률)이 점차 감소하면서 농촌인구의 증가는 1%를 넘어섰다. 지력(地力)의 회복을 위해 비료의 사용도 일반화되었다. 다음 표는 소가족 경영의 일반화로 세대규모가 축소되어 한 쌍의 부부와 직계자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을 보여준다.)-표1. 신슈 스와 지방의 평균 세대규모)-연 대1671-17*************1-18*************1-1876평균세대규모7.046.344.904.424.25표준편차1.912.481.840.870.41변동계수0.270.390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흔히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수출의 지속적인 증가와 대외 지향적 경제발전의 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인적자원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해방 이후의 지속적인 인구 증가는 인구증가 억제를 국가의 목표 중 한 가지로 채택하게 만들었다. 7차에 걸친 경제사회발전계획에서도 인구성장률의 조정과 인구분포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출생률이 낮아지면서 인구증가율이 3%에서 1%내외로 안정되었다.) 평균자녀수가 줄어들면서 경제 부양률이 감소하였고, 이는 자녀들의 교육수준이 향상으로 이어져 그 결과 노동의 질적 향상이 일어났다.)-표2. 한국 경제의 성장요인 분석, 1963-2000)- (단위: %)항목1963-19701970-19791979-19901990-20001963-2000국민소득100.00100.00100.00100.00100.00총요소투입48.6455.1165.8853.4752.90노동투입41.0639.8939.7428.5036.08자본투입7.5815.2226.1424.9816.81총요소생산성51.3644.8934.1246.5347.10자원재배분2.807.116.480.184.75규모의 경제13.0316.1817.9216.0516.80환경오염 방지0.000.00-0.29-0.85-0.25불규칙 요인17.228.76-8.70-8.393.57기술진보18.3212.8418.7039.5422.24-그림2. 경제적 부양률 변화추세)-5. 인도의 사례인도의 경우 2001년의 인구가 약 10억 3천만 명에 달한다. 소비시장이 거대하며 내수시장이 탄탄하다. 인도와 같은 경우에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노동연령인구의 증가가 상당기간동안 예상된다. 15~60세의 노동연령인구가 2025년 까지 계속 증가할 예정이며, 2015년에는 10대 인구가 약 5.5억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가능연령인구 규모의 증가는 인도의 성장가능성을 더욱 높여줄 것이다.-표3. 과거 50년간 평균 .57.84. GDP(요소가격)3.93.73.25.65.66.15. 일인당GDP2.01.50.83.43.64.0Ⅲ. 결론: 인구와 경제의 관계가 선진국과 후발국에게 주는 의미1. 선진국에게 주는 의미현재 선진국들에게 출산율의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은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출산율 저하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출산율의 저하로 인해 장기적으로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면, 정부 입장에서는 세수가 줄어들고 복지비용이 늘어나게 된다. 인구규모에 대한 조절이 불가피하다면, 인적자본과 사회적 시스템의 질적 향상에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저명한 저자인 마쓰타니 아키히코는 그의 저서에서, 인구의 감소가 진행되는 미래사회에도 풍요를 보장받기 위한 대안으로 ‘개인?기업?정부의 다양화’를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들은 점차 유연화되는 노동시장을 받아들이면서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기업은 규모의 경제에서 벗어나 다각화를 시도하며,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통해 정책을 집행한다면 인구규모의 감소는 국력의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2. 후발국에게 주는 의미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는 후발국들은 각 나라의 사정에 맞는 인구정책이 필요하다. 먼저 노동인구의 규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가에서는 인구증가가 필요하다. 일본의 경제사학자 하야미 아키라는 그의 저서의 마지막 장에서, 인구를 소득이 가장 높고 수요도 많은 생산연령인구(15~64세)로 한정한다면 1995년을 정점으로 감속국면이 이어지는 것이 일본사회의 불황의 실질적인 원인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출산율의 장려를 위해 공공의료부문의 발전과 출산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 인적자본의 질적 향상이 더욱 필요한 국가에서는, 인구 억제 정책과 국민 교육의 제공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후 일부 개도국에서는 자녀수가 가임자녀수보다 훨씬 미달하는 3.8~6.4명으로 추가출산을 원치 않는 경우가 30~70%에 달하였지만, 피임에 대한 지식과 실천이 저조하여 원치 않는 출산이 일어났.
한국 외환위기의 전개와 특징 및 의미Ⅰ. 한국 외환위기의 전개1. 배경: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한국 경제는 1995년 하반기 이후 하강국면에 진입하고 있었으며, 1996년에 들자 기업의 매출이 줄고 수익률도 둔화되었다. 세계적인 공급과잉까지 일어나자 제품 단가가 하락하여 교역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함께 해외여행 경비와 외채이자 부담이 크게 증가하여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였다.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가 대폭 증가하였으며, 특히 단기 외채의 비중이 급증하였다. 우루과이라운드의 타결과 경제협력기구(OECD)가입 이후, 상품뿐만 아니라 금융과 같은 서비스 분야의 개방이 가시화 되었다. 그러나 금융감독체제 등 경제·사회제도의 개혁이 미흡한 상태여서 불안감이 제기되고 있었다. 고금리·고이자 등 고비용 현상과 함께 국제경쟁력약화·기업수익률 저하 등으로 표현되는 고비용·저효율 현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의 부실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불안 또한 높아졌다.2. 전개(1) 외환위기의 전조1996년 말 노동법의 변칙 통과에 반발하여 이듬해에 약 한 달간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당시의 총파업으로 인한 생산 차질은 2조 8,500억 원에 달했는데, 이는 1996년 한 해 동안의 파업으로 인한 생산차질액 1조 8,000억 원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도설이 나돌던 한보그룹이 1997년 1월23일에 부도 처리되었다. 자산 규모 5조 원에 비해 총 부채가 6조 6,000억 원에 달하였으며, 막대한 부실규모는 채권금융기관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이 되었다. 한보의 부도는 해외자본의 시각에서도 충격적이어서 일본에서는 한국계 은행의 지점들의 단기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수습에 나선 한국은행 총재가 한국계 은행의 해외지점에 대한 지불능력을 책임지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외신들의 한국금융위기 보도와 함께, 무디스가 1997년 2월20일 조흥·제일·외환은행의 장기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하향 조정하였다. 일반 중소기업은 다소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국내 경기는 여전히 부진한 상태여서 진로·삼립·기아 등 여러 기업들이 부도 위기를 맞게 되었다. 4월18일에 S&P는 한보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의 장단기 신용등급을 한 단계 하향 조정하였다. 6월27일에는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들이 부실징후가 보이는 기업들에 대해 만기도래여신은 회수하고 신규 여신은 억제해나가면서 기업들의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면 외환시장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달러화 약세에 영향을 받은 수출 증가와, 국내경기의 부진으로 인한 수입증가율이 대폭 축소된 데 따른 것이었다. 정부는 해외자본유입의 확대를 위해 외자도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였고, 이로 인해 국내 은행들의 해외 차입 여건이 호전되었다. 정부는 금융기관들이 기업들에 대한 부도유예협약을 맺게 하고, 부실채권의 효율적 처리를 위한 기구를 조성·확대하였다.(2) 외환위기의 가시화1996년 들어 엔화의 약세 등으로 수출이 부진하던 태국은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었고 동시에 부동산 경기가 공급과잉으로 인해 침체에 빠지면서, 부실채권이 증가하여 태국의 외채상환에 대한 국제신뢰도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9월에 무디스는 태국의 단기외채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였다. 당시 태국은 1990년 이후 자본자유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복수통화 바스켓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미 달러화의 비중이 80%에 달하면서 사실상 바트화가 미 달러화에 연동되어 있는 고정 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트화에 대한 절하 기대심리가 확대되자, 헤지펀드(hedge fund)들의 투기적 공격과 해외자금의 철수·태국 기업의 달러매입이 나타났다. 태국 중앙은행이 방어에 나섰지만 투매현상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7월2일 관리변동환율제도로 전환하면서 미 달러에 대한 바트화의 환율이 16%나 절하되었다. 바트화의 위기는 순식간에 주변 동남아 국가로 전염되면서 동남아 전체가 외환위기에 휘말리게 되게 되자,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를 긴급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화자금을 단기로 조달하여 장기자산으로 운용하는 데서 발생한 자산·부채구조의 기간 불일치(mismatch)였다. 원·달러 환율은 미 달러화 강세와 국내금융시장의 불안정성 증가로 달러화에 대한 약세를 보이면서 점차 절하되었다. 외환 당국의 외환 공급이 있었지만, 이러한 매도 개입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큰 폭으로 절하되었고 외환보유고가 감소하였다.(3) 외환위기의 심화1997년 10월17일, 대만이 환율방어를 포기했다. 10월23일 홍콩의 주가는 10.4%의 대폭락을 기록하였으며, 이는 해외자본의 홍콩 달러에 대한 투기적 성격의 선매도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제 동남아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한국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국내에서는 대기업의 연쇄 부도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월15일에 쌍방울이, 12월 5일에는 한라그룹과 고려증권이 부도 처리되었다. S&P와 무디스는 한국 금융기관의 장·단기 신용등급과 한국의 장·단기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다. 해외언론들이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비관적인 보도를 내보내자 정부가 나서서 해명하였으나, 국제금융시장에서의 한국 경제에 대한 악성루머는 계속 이어졌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기아사태 처리의 방향이 혼미해지면서,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고조되어 종합주가지수가 폭락하고 외국인의 순매도세가 이어졌다. 종합금융회사들의 여신이 지속적으로 축소되자 한국은행이 지원에 나섰다. 콜금리와 회사채 수익률도 급증하였으나, 문제는 이러한 고금리에도 자금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종합금융회사들의 지속적인 여신 축소와 대기업의 부도가 줄을 잇는 가운데 금융경색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표2.시장금리 변화추이)- (단위: %)19961997199812월11월12월1월2월3월4월5월회사채12.5714.0824.3223.3319.7818.9618.1917.89콜금리12.3914.5425.4928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직접 정리했다. 정부주도의 부실기업 정리는 대체로 구제금융의 제공이나 다른 기업으로의 인수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관치금융이 보편화되자 기업의 차입경영이 확대되었고, 정부가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위험을 안아주자 대기업과 은행은 불사불패라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보편화되어 정경유착의 심화로 이어졌다. 한국 경제의 외형은 선진국에 근접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재무구조의 건전성 등에서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표3. 재무구조의 국제비교)- (단위 : %)국 별한 국미 국일 본대 만연도별1994199619971998979795자기자본비율24.824.020.224.439.434.953.9차입금의존도44.547.754.250.825.533.126.2유동비율94.691.991.889.8134.9129.8129.4고정비율220.2237.0261.1242.5166.0133.0109.7이러한 상황에서 기업과 금융기관은 핵심역량의 증대보다는 외형성장에 치중했다. 유동성 위험에 대한 인식도 부족해서, 단기자금을 조달하여 장기시설투자나 장기대출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형적 성장은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석유화학·자동차부문 등에 대한 기업 간 과잉중복투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벌그룹 내의 부실기업을 안고 가는 이른바 선단 경영도 나타나 경제적 비효율이 더욱 누적되었다. 기업의 자기자본수익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표4. 민간기업부문의 부채와 수익률)- (단위: %)199119921993199419951996부채-자본비율309.2318.7294.9302.5286.8317.1자기자본수익률5.533.664.227.5611.032.02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생산기술개발에 주력하다보니, 핵심기술분야에서는 선진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요 원자재와 부품·자본재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지속적인 대일무역 적자가 나타났다. 후발국과의 기술수준 격차는 좁아졌지만, 선진국과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었다.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은 더딘계는 이와 같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가고 있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상품과 서비스 거래의 표준화는 어느 정도 진전되었으나,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지배구조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흡했다. 회계감사 등의 관리 감독도 부실하여 흑자 기업으로서 적정의견을 받았던 기업이 갑자기 도산하는 사례도 있었다. 투명성에 의심을 받게 되자 한국 경제의 신뢰도는 급속히 추락하였다.2. 해외로부터의 충격: 세계화로 인한 자본거래의 자유화(1)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무관심자본 자유화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 한국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해외자본 도입 및 해외진출이 용이해졌다. 이들은 환율이 크게 변동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금리가 높은 국내시장보다 해외에서의 차입을 선호했다. 이러한 추세로 인해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하였으나, 경상수지는 수출주력상품인 반도체 등의 국제가격 하락으로 인해 적자를 나타냈다. 경상수지의 적자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으며, 자본수지의 흑자는 부동산과 같은 비생산적 투자에 활용되거나 지나친 소비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채규모가 급격히 증가하였다.(2)국제적 외환위기의 파급효과-무리행동(herd behavior)1990년대에 들어 해외자본은 신흥시장진출에 열성적이었다. 공산주의의 몰락 또한 비 서방국가에 대한 위험을 축소시켰다. 만일 잘못될 경우 투자대상국의 정부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현상도 발생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기업과 은행에 대한 불패신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무모한 투자가 지속되던 상황에서 비관적 전망이 나오면 무리행동(herd behavior)이 나타나 해외자본의 순유입이 순유출로 급반전하게 되는데, 이는 단기 위주의 외채규모와 해외자본의 변화로 인해 나타난다. 이득을 취하기 위한 투기자본의 적극적인 공격은, 실제로 태국 바트화에 대한 무리행동(herd behavior)을 유도하여 동남아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자본의 자유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외환위기의 파급효과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