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을 통해 이루어진 여성의 문자생활 >세종 25년 12월에 창제된 훈민정음은 창제 직후부터 찬사를 받으며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자를 중요시하는 당대 분위기 속에서 외면 받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물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목적이 ‘순수 한글’만을 사용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마저도 당시 세종의 신하들 중 반대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최만리가 '기예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했던 한글은 놀랍게 창제 이후 400여년이 지난 1894년 7월 8일, 마침내 국가의 공문서에 국문을 써도 좋다는 규정을 얻어내었다. 한글이 이처럼 퍼지게 된 데에는 백성들이 반절법 등 훈민정음 사용방법을 통해 언문을 배웠고, 그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너른 사용에 이르게 된 것인데, 그 자세한 내막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조각난 자료들의 일관성을 찾기가 난해하기 때문인데, 나는 범위를 좁혀서 ‘조선시대 여성의 한글 사용’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하겠다. (이야기에 앞서, 글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백두현의 “조선시대 여성의 문자생활 연구”를 참조하여 쓴 글임을 밝힌다.)당대의 공식문자인 한자로부터 소외된 여성들에게 있어서 한글의 출현은 비로소 그들에게 문자 생활을 부여하게 되었다. 한글은 주로 여성들의 사적인 영역에서 소통의 도구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한글 사용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편지였는데, 한글로 주고받은 편지인 언간은 특히 조선 후기 여성들의 어문생활 중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바깥출입이 제한되었던 여성들에게 언간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경우 여성들이 주고받는 정보는 주로 실생활과 관련되거나 주변인의 현황 등에 관한 것들이다. 대개는 자녀와 어머니, 부부 혹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주고받은 언간 등 가족 간에 오고갔던 언간들인데, 예컨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전해지는 의 자료 중 모녀>부부>부녀 간의 순서로 그 분량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모녀간의 언간 왕래가 가장 많은 것은 의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바로 언간에서의 발신자가 ‘여성’인 경우가 68.4%인 반면 남성인 경우는 28.2%밖에 되지 않으며 수신자의 경우에도 여성이 92.8%이며 남성은 3.8%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남성과 남성 간에 오고간 언간은 전혀 없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언간은 여성을 위주로 한 의사소통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언간의 내용 중에는 ‘편지’나 ‘유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즉 편지라는 의사전달 매체가 그들의 생활에 차지한 비중이 크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도 문자생활과 관련된 도구나 어휘들인 ‘붓’, ‘벼로(벼루)’, ‘죠?(종이)’와 이들 도구로 쓰인 ‘글시’와 ‘언문’등의 어휘들도 몇몇 자료에 나타난다고 한다.언간의 내용 중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에서 엿보이는 내용이 그것이다. 1612년에 작성된 이 편지는 곽주가 외가에 간 아이들에게 언문을 가르쳐 달라고 장모에게 청하는 내용으로, “아우 자식들이 거기에 간 김에 언문을 가르쳐 보내주십시오. 수고로우시겠지만 언문을 가르쳐 주십시오. 말하기 조심스러워 하다가 이렇게 아뢰옵니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짐작해볼 때 17세기 초기에는 이미 사대부가 여성들은 언문 사용에 능통했으며 집안 아이들의 한글 교육을 담당했던 것이다. 곽주의 편지에 아이들의 언문 학습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으로 보아 어린이에 대한 한글 교육을 상당히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cf) 최근에 1555년 것인 보다 앞선 16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복원된 일이 있다. 이는 ‘나신걸’이 멀리 함경도 경성 군관으로 부임 받아 가면서 부인인 ‘신창 맹씨’에게 안부를 전하며 가정사를 챙기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하소'와 같이 당대의 부부 사이에 주로 사용되었던 경어체로 적혀있다.◀복원된 나씨의 편지언간 외에 각종 한글 고문서에서도 여성의 한글 사용 예를 엿볼 수 있다. 고전소설 에는 이도령이 춘향에게 써준 한글 혼인 계약서가 나온다. 그밖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한글 문서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여성이 직접 작성한 것들이 있는데, 예로는 1687년 서울 남부동에 사는 됴지원의 처 정씨가 친정의 증조부 정엽의 사당을 지킬 사람이 없다며, 자신이 친정의 신주를 돌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라든지, 경술년에 오월쇠의 어머니가 관가에 붙들려 갔다가 도망친 오월쇠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청에 낸 진정서 등이 있다. 그 밖에 청원서 등 여성이 관아에 올린 그러한 것들은 공적 차원에서 한글을 사용한 문자생활 자료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또 한 측면으로는 ‘明文’이 있다. 이는 매매를 증명하기 위한 문서인데, 사비 ‘분례’가 주인 아가씨에게 바친 문서이다. 이는 ‘분례’가 직접 쓴 것인지 대필한 것인지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천민 사비가 발급의 주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자료라고 한다. 이 문서는 양반가 여성뿐 아니라 천민에 속하는 여성들도 한글을 통한 문자생활에 참여했음을 보여 준다. 한글 고문서의 경우 크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소지나 상언, 명문, 분재기, 수표는 공적 성격을 지닌 문서이고, 유언이나 의례류 문서는 사적 문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이 한글을 통해 공사 간의 일처리에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여성들의 문자생활의 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 가족의 해체, 복원만이 해답일까? >‘가족‘에 대해 내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의는 혼인이나 혈연관계에 의한 집단일 것이다. 대개 그 구성원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지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러한 가족의 형태만을 ‘정상 가족’으로 지정하여 이를 벗어나는 범위는 모두 ‘비정상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국가에서 지정하는 이러한 가족이라는 지위는 반대로 비정상가족의 범위에 속한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문제시하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정상가족이 현대사회에 가장 이상적인 가족 형태일까?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꾸준히 증가하는 이혼율과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이혼을 단순 일탈이 아닌 새로운 자기계발 내지는 행복 추구를 위한 하나의 경로 정도로 인식하는 추세이다. 이혼을 겪은 연예인이 예능 프로에서 당당하게 이혼 사실을 밝히고 대중들로부터 공감과 응원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분열에 대한 한국 사회의 거부감이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절감한다. 최근에는 김조광수 영화감독이 동성 연인과의 결혼을 선언해 사회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은 상태이며 그들을 법의 틀 안에서 가족으로서 보듬어주지는 못 하겠지만, 대중들이 그들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데에 보이는 반응은 확실히 덜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경제적 요인이나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로 비정상가족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가족에 대한 의미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과 에서는 이러한 ‘정상가족’의 형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제부터 이 두 작품에 대해 은 가족 해체의 원인적 측면에서, 은 새로운 가족 형태의 측면에서 접근해보도록 하겠다.의 주인공인 ‘영작’에게는 무용가인 아내 ‘호정’이 있으며 둘 사이에는 입양한 아들이 있다. 겉보기엔 평범한 가정이다. 그러나 영작은 사진작가인 여성과, 호정은 옆집 고교생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영작의 아버지는 간암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 ‘병한’은 남편의 병을 개의치 않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한 마디로 ‘콩가루 집안’인 셈이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이들의 불륜 행각은 정작 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문제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다른 여자 좀 만나고 다니는 게 문제가 되는 거니?’라는 영작의 말에 ‘아니. 아니니까 가서 많이 만나.’ 하고 대답하는 호정의 대화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생전 처음 오르가즘이란 것을 느꼈다며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자랑스레 말하곤 행복해하는 병한의 모습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불륜이 윤리적 죄의식을 느낄 만한 것이 아니며, 무거운 죄의식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륜 행위를 통해 각자의 행복을 충실히 누리고 있는 걸까? 그 이전에 그들은 무엇 때문에 결핍을 느끼고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했던 걸까?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결핍’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중심에는 영작의 아버지가 있다. 영작의 아버지는 6.25세대로서 분단의 아픔을 겪어 어머니와 여동생 없이 삶을 보낸 인물이다. 물론 후에 새 가정을 꾸리게 되어 그 결핍감이 조금 해소될 수도 있었겠지만, 죽는 순간에도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며 북에 남겨둔 가족들을 그리는 그를 보면 한국 전쟁의 상처가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잔해로 남아 일평생을 괴롭혔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결핍된 삶이 그로 하여금 술과 담배 없이는 못 살게 만들었고 그 결과가 간암으로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내인 병한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아래에서 자란 영작 역시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사회적으로 고지위라고 할 수 있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영화에서 영작의 심리 변화는 불륜녀와의 잠자리 이외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저속한 내용을 담은 불륜녀와의 통화를 엿듣고도 ‘당신이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호정에 말에서 추측할 수 있듯, 영작은 늘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대처해왔을 것이며, 게다가 아내와의 원만하지 않은 관계나 불임 상태는 그의 고립감을 더 가중시켰을 것이다. 불륜녀와의 잠자리에서 다소 가학적인 행위를 하며 본능에 충실한 짐승과 같은 그는 불륜녀와의 관계에서 억압된 자신을 거침없이 쏟아내려고 한다. 마치 그 고립감을 성행위로부터 보상받기라도 하듯 말이다. 반면 호정에게는 또 다른 결핍이 있는데, 바로 성적 욕구의 충족에 대한 결핍이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욕구 충족의 행위이자 정서적인 교감이기도 하다.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더 성관계를 안 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녀는 가정에서 성적으로도 억압받으며 정서적인 결핍 또한 느꼈을 것이다. 그 결핍감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바로 입양한 아들의 죽음인데, 그 죽음이 영작의 탓이라고 여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영작과의 관계는 지속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그들 부부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엮어놓고 있던 끈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를 결심한 그녀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아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듯, 그녀의 마음을 잡아보려고 온 영작을 돌려보내고 신나게 대걸레를 미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을 짓누르던 ‘가족’이라는 이름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홀가분해 보인다. 즉 그녀는 자신이 속해있던 기존 가족의 붕괴를 애써 복원하려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등학생인 ‘지운’의 아이를 갖게 된 그녀가 아이와 앞으로 함께 꾸려 갈 새로운 가족이라는 형태는 그녀를 행복하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에서는 혈연관계에 의한 가족은 아닐지라도 또 다른 가족 형태의 길을 열어둠으로써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의 에피소드로 분류되는데, 여기서는 그 중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미라’와 ‘무신’과의 관계만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집을 나가서 한동안 연락도 되지 않던 골칫덩이 ‘형철’이 어느 날 불쑥 누나인 미라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발생한다. 미라가 형철을 반기는 것도 잠시, 형철이 자신의 아내라며 무신을 데려오게 되면서 미라와 무신의 어색한 동거는 시작된다. 한편 무신에게는 전남편과 그의 전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있었는데, 딸애가 미라의 집을 알고 찾아오고서부터 넷은 한집 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미라의 유일한 핏줄이던 형철이 다시 집을 나가서는 연락이 두절되고, 정작 혈연관계가 아닌 셋이 아이러니하게도 한 ‘가구’를 꾸려가게 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보이는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생계나 주거만을 함께하는 관계에서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미라와 무신을 둘 다 엄마라고 부르는 ‘채현’의 모습, 그리고 염치없이 그들을 다시 찾아온 형철을 내쫓고 오순도순 김장하는 일에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제 영락없는 가족이다. 즉 ‘가구’로 시작한 그들의 관계는 하얗게 세어버린 무신의 머리카락이 보여주는 세월만큼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정으로 인해 ‘가족’으로 깊어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등장인물들은 지하철 플랫폼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 하고 제각기 지나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서로 의미 없는 관계였으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즉 혈연적 유대를 벗어난 비 혈연적 관계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기본위(egoism)’의 진정한 얼굴 >- 나츠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현대 일본의 개화』, 『런던탑』대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란 권리의 측면에서 개인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이는 때로 이기주의(egoism)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전혀 다른 말로, 개인주의란 개인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이기주의란 개인 혹은 개인이 속한 집단만의 이익을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양쪽 다 목적이 개인, 즉 자기 자신이라는 데에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주의가 자유를 근간에 두고 있는 데 반해 이기주의는 일종의 독단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그 차이는 명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혼용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친구에게 ‘저 친구는 너무 개인주의적이야.’하고 말하는 상황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난색을 표하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엄연히 다른 거라고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사회는 개인을 주장하는 것을 이기적인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곤 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집단주의적 사상은 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이타심의 결여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즉,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평화를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정해놓고 자아존중감은 오만이라 여긴 셈이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이라는 범주에서 더 나아가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주의와 국가주의가 반대개념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주의하고 있다.개인 행복의 기초가 되어야 할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내용으로 삼고 있음이 틀림없지만 각자가 향유할 그 자유라는 것은 국가의 안위에 따라서 온도계처럼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 국가가 위험해지면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고 국가가 태평하면 개인의 자유가 확장된다는 말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인격이 존재하는 이상,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국가가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는데도 단지 개성의 발전만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나의 개인주의』, p.67이처럼 그는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는 공존할 수 없는 절대적 적대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의 영향을 주는 양립 가능한 개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이 모여 형성되는 단체가 바로 국가인데, 엄연히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이 국가의 안위가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도 오로지 나, 나, 나 자신만을 외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에 대한 존중이 부재한 상태로 외치는 개인의 자유는 방자함이다. 나츠메 소세키 또한 『나의 개인주의』에서 이 부분을 꼬집고 있다.반드시 타인에게 영향이 없는 한, 나는 왼쪽을 향하고 여러분은 오른쪽을 향해도 지장 없을 정도의 자유는 자신도 견지해야 하고 타인에게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내가 말한 개인주의입니다. 금력, 권력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니까 없애버려!”라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이니 골탕 먹여버려!”라든지, 나쁜 일도 없는데 그냥 그것들을 남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개성은 그것으로 완전히 파괴되며 동시에 인간의 불행도 거기에서 파생됩니다.-『나의 개인주의』, pp.70~71.즉 개인주의는 본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아 또한 존중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고 싶었던 ‘자신이 주체’인 개인주의는 방황하던 그에게 한 줄기 길을 열어준 ‘자기본위’라는 네 자인 것이다.나츠메 소세키에게서 ‘자기본위’의 탄생을 말하려면 결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일본의 개화이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을 겪은 세대인데, 이때에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을 흡수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근본은 교육에 있다고 여기어 교육 내용도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 시기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을 국가의 발전에 방해된다며 제거하는 등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를 양극단에 세워두는 위험한 국가주의가 팽배하던 때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서양 문화의 파도에 휩쓸려 본래의 모습을 잊고 남 흉내 내기에 급급한 일본의 실상을 그는 이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냉철하게 이 같은 현상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타인본위로 껍데기만 서양을 쫓는 사람들처럼 그도 영국 유학 생활에서 마찬가지로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타인본위로 뿌리 없는 개구리밥처럼” 방황했다고 표현했는데,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드는 의구심과 공허함을 통해 결국 ‘자기본위’ 네 자를 스스로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영문학에 대한 불안과 방황 등은 일본인인 자신이 서양인의 시각에 애써 맞추려 하던 노력으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서양 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비단 일본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 또한 서양을 무분별하게 쫓고 우리 문화는 철저하게 무시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적인 것은 낙후되었거나 수준이 뒤떨어진 것으로 보았고, 서양의 것은 무조건 세련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만연했던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국악은 기생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고, 아리아를 부르고 서양 고전음악을 연주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음악이라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리도 ‘자기본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서양문화를 쫓기에 바빴던 우리는 서서히 우리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갖는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 서양 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시각으로 문화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자기본위’의 명제 안에는 그의 철학과 사상이 묻어나 있다. 어쩌면 그가 『나의 개인주의』에서 말하고자 했던 ‘자기본위’는 그의 문예에 대한 신념에만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의 주축을 이뤘을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읽은 텍스트에서 그가 당시의 일본을 통찰한 것이라든가, 상류 사회의 자제들 앞에서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의무나 책임을 역설한 것 등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인데, 타인과 달리 ‘그’만의 시각이 공고하게 구축된 사실을 나는 『런던탑』에서 또한 엿볼 수 있었다.
< 격정적 시대의 중심에 서서 마주보다 >언제부턴가 쫓기듯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4학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조급함은 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시험공부를 끝내고 쌓인 과제더미까지 해치운 날이 되어야만 나는 학교가 아닌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연중행사정도로 만나는 친구들은 늘 내게 생기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내게 사색의 시간을 하루에 한 번도 주지 못 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학점의 ‘노예’로 살고 기업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세상은 나에게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사고하는 법보다는 어떻게 해야 표면적으로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지, 능력이나 사람 됨됨이 따위는 어떻게 내세워야 하는지를 머릿속에 주입시켰다. 내가 사는 세상은 좋은 대학에 좋은 과를 가서 훌륭한 학점을 받고, 좋은 기업을 들어가야 인간 취급받는 곳이었다. 그래서 난 그 가운데에서 늘 열등생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우등생’의 축에 어찌어찌 껴보기라도 할 그 날을 기다리며 각종 서적들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인문계열 통폐합 추진이나 졸업유예제의 확산에 관한 기사들이 ‘사회’면을 채우고 있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은 몇 달 동안이나 ‘정치’면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말라붙은 입술로 쓴 맛을 다시는 것도 잠시, 책상으로 돌아오면 난 어깨를 짓누르는 과제의 무게에 정신을 놓을 지경이라ㅡ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따윈 까맣게 잊고 다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그런데 문득, 내가 해부당하고 있는 개구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손발이 온통 핀에 박혀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이. 21세기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 아래 힘없이 놓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순종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것밖에는 없었고, 난 그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삶에 울컥, 하는 것도 잠시였다. 어쩌면 차라리 그게 속 편할근원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았다. 빠르게, 남들보다 더 높이 가려 발버둥 쳐야 했고 그게 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내겐 그게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게 잔잔히 굳어있던 마음에 찬물을 확 끼얹은 느낌이었다. 무한경쟁 속에서 옳다 그르다 정도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쉬쉬하는 분위기, 그 안개 속에 섞여 들어가야 ‘모범 대학생’일 수 있는 20대의 마음이 과연 나와 크게 다를까. 다들 방향과 생각은 달라도 각자 가슴 속에 불길 하나쯤은 이미 피우고 있지 않았을까.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20대, 그리고 나. 나는 지금을 감히 격동의 시대라 이름 붙이고 싶다. 그것도 고요한 격동이다.그런데 그 적막 속에서 하나 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현재 대학가 곳곳에선 진심을 담은 대자보가 게시판에 붙기 시작했고 ‘안녕하지 못 한’ 20대의 울분은 서서히 끓어올라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잠했던 내 마음도 요동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여전히 손발이 결박된 채지만ㅡ모기만한 소리로라도 외치고 싶은 열망이 들끓는다. 이제부터 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ㅡ‘근대’라는 격변기의 중심에 있었던 작가들과 마주하여 한번쯤 과감히, 현대를 살고 있는 내 목소리를 내보고자 한다.[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다가가 인사하세요. Hello!]우연히 마주친 TV 공익광고를 보고 기가 찼다.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다가가 인사하세요. Hello!’라는 내레이션에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낯선 땅에 와서 혼란스러울 그들의 물음에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자, 는 것도 아니고 멀뚱 서있는 외국인에게 가서 인사를 하란다. 그들을 극빈대접하며 온 국민이 웨이터가 되어 그들을 모셔야 한다는 건가? 『실수』에서 이상은 달러를 뿌리고 가는 귀중한 손님이 인력거에 탄 채 간혹 조소 비슷하게 웃기도 하고 손에 쥔 지팡이를 들며 여기저기 가리켜보이던 광경을 목격했다. ‘파문에 의하면 서양의 예의준칙으로는 이 손가락질하는 버릇은 크나큰 실례’라는데, 그들수 있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영어를 조금도 하지 못 했다. 아주 간단한 단어조차도. 그들은 한국어와 영어만 할 줄 아는 내게 난처한 기색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어만 했다. 대단히 당당한 자세로.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프라이드가 부러웠다. 혹자들은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그들을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니 그때는 분명 영어 전공자인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었다.서양의 정치적·경제적 파워를 전면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서구 권력에 이처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과연 그 안에서는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너희들은 다르기를…]나츠메 소세키의 『도련님』에서 비춰지는 학교의 모습과 우리 사회는 너무도 닮아있다. 돈과 권력에 의해 사회가 움직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 가치로 추앙한다. 가진 자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법칙에 순응하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는 현재에도 존재하며 너구리도, 빨강셔츠도, 딸랑이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현재의 20대는 어느 쪽인 걸까?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다 전차에 몸을 실었던 도련님일까.나츠메 소세키의 창작 바탕에는 ‘메이지 시대’가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막부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 과정 속에서 혼란의 바람은 불가피했다. 복종적인 신민의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이들은 ‘자유 민권 운동’을 통해 정치 참여를 요구했고, 옛 귀족들과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세력 사이의 알력이 심화되면서 몇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의 정신 사조 키워드가 ‘근면’, ‘자조’, 그리고 ‘교육’이었다는 내용이 일본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 3대 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이 떠오른다.) 『그 후』에서 다이스케는 이러한 시류를 거부하고 독서나 예술 활동에 몰두한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가 중시한,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 놓여있는 일본이 중시하는 가치들을러고 나면 눈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하니 너나 할 것 없이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지.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게나, 대개는 바보일 터이니까. 자신의 일과 자신의 현재, 아니 눈앞의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이니 어쩔 수 없긴 해. 정신적인 피로와 신체적인 쇠약은 불행하게도 항상 붙어 다니는 법이니까.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해 가고 있어. 일본의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밝게 빛나고 있는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지 않은가? 온통 암흑이야.」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못 한다. 물질 가치가 힘을 갖는 사회에서 그는 생계유지를 피할 수 없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왔던 ‘일’에 뛰어든다. 근대화의 태풍에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 다이스케, 그도 결국엔 신경 쇠약의 길을 걷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 후』의 책장을 덮은 후 며칠이 지나서도 위에 인용한 구절이 내내 마음에 쓰였었다. 다이스케가 바보 같은 날 꾸짖은 것 같아서. 그리고 다이스케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바보로 살아야 하는 걸까.소세키는 『마음』에서 ‘선생님’을 통해 ‘나’가 자신과 같은 시대를 되풀이하여 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메이지시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정신없이 휩쓸려가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어둠’을 직시할 것을 부탁한다. 다음 세대가 똑같은 오류를 겪지 않기 위해 ‘내면의 고통’이라는 숙제를 안겨준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생님’은 ‘나’에게 어떤 사상 따위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길이 옳은 길이라며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고뇌의 여지를 주었을 뿐이다. 그 배경에는 소세키의 ‘자기본위’ 네 글자가 깔려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공허했고, 불유쾌했고, 막연했다던 소세키는 타인본위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자기본위의 삶을 택했다. 후에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에서 드러나나 이념 따위에 가두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인간이 하나의 주의로 정리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세키의 말에서 나는 대한민국에 만연한 어떠한 주의와 색깔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어떠한 주의라는 것에 예속되는 순간 자기 안에 있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셈이거늘, 한국은 정권에 이견이 있으면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한다. 색깔로 사람을 규정하는 일이 응당하다면, 나는 분홍색 정도 될 것 같다. 우습다.한편 시대의 과오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다음 세대에서 바통을 이어받지 않길 바라는 것은 루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광인일기』에서 피해망상증 광인의 일기 형식을 빌려 당대의 식인 풍습을 낱낱이 파헤친다. 단지 식인 풍습에 그치는 것이 아닌, ‘아이를 잡아먹는’ 봉건 유교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그는 마지막에 ‘어린이를 구해야 할 텐데…’ 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다. (다른 책에서는 ‘어린이를 구하라!’와 같이 좀 더 강경한 태도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는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어른들의 잘못된 길을 답습하지 않길 바라는 루쉰이 외치는 각성이었다. 실제로 루쉰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사랑 없이 ‘외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정신 차려, 인간아… 그런데, 가능할까?]그렇다면 루쉰이 이토록 처절히 외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그 해에 북경에서도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대대적인 5·4운동이 전개되었다. 5.4운동은 단순히 일본의 산동반도 할양과 이를 허용한 군벌정부에 대한 항의시위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중국)에 대한 총체적 반성으로 이어졌다. 1916년 창간된 잡지 이 이미 서구의 근대사상으로 통하는 통로이자 반항운동의 기지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의 주요 멤버 중 하나가 바로 루쉰이었으며, 그가 강의를 맡았던 베이징대학이 시위의 진원지가 되었다. 은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을 사상적인 기준으로 세우고 ‘반봉건’, ‘개성해방’ 등의 구호를 실천 논리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유교사상을눈길들.
< 왜 영화의 엔딩은 화이트 스완의 죽음이었을까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음악 중 하나로 더욱 유명한 . 고전 발레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발레극은 의 소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낮에는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되고, 마법을 풀기 위해서는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야 하는 백조 오데트 공주와 그녀를 구하려는 지그프리트 왕자. 그러나 왕자는 오데트의 쌍둥이인 흑조 오딜의 꼬임에 넘어가 오데트는 영원히 백조로 남게 된다는 내용은 익히 들어왔으므로 아마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말은 지금부터다. 안무가에 따라서 는 사랑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해피엔딩과 백조가 죽는 비극적 결말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영화 속 의 엔딩에 있어서 후자를 선택했다. 왜 감독은 비극을 택했을까. 단순히 ‘스릴러’라는 장르에 부합하는 결말을 이끌어내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에 대한 질문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 비로소 출발한다.현대의 스토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어쩌면 뻔할 지도 모를 ‘흑과 백’이라는 단순한 이분(二分)의 대치를 사용하여 감독은 인간의 억압과 본능이라는 관념을 색상 안에 투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색상의 대조에 식상함을 느끼기 이전에 우리는 의 인물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 ‘니나 세이어스’는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늘 자신을 통제하고 채찍질하며 연습에 매진하는 발레리나인데,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가 옷을 입혀주고 방 안 가득 인형을 쌓아두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 즉 청초하고 순수한 백조와도 같다. 그런 그녀에게 백조와 흑조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여왕 백조(swan king)’ 역할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고, 그녀는 예술 감독 ‘토마스’로부터 흑조 역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가 표현할 수 없는 흑조의 모습은 백조 같은 그녀와는 정반대인데, 흑조는 자유로우며 매혹적으로 자신을 뽐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흑조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렇게 니나는 흑조로 변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그럼 그녀에게는 없는 ‘블랙 스완’을 그녀는 외부적인 통로를 이용해서라도 찾아야 하는 걸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블랙 스완’은 니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닌 내부에 갇혀있던 캐릭터였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니나가 토마스의 키스를 받아들이다 그의 입술을 깨무는 장면이다. 이는 늘 수동적일 것 같던 니나의 반항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며, 토마스 또한 그녀로부터 흑조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어 그녀를 여왕 백조로 캐스팅할 수 있게 이끈 부분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발레연습이 끝난 후 집으로 향하는 길에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을 수차례 마주치게 되는데, 그 여성의 얼굴은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니나 자신이다. 밝은 계열의 옷을 입고 경직된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녀와, 검은 옷을 입은 여유 있고 당당한 표정의 그녀가 엇갈리며 지나가는 부분은 흑조와 백조의 본격적인 대치를 암시하게 되는 부분이다. 또한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입는 ‘옷’의 변화를 읽는 것인데, 초반에는 밝은 톤의 옷만 입던 그녀가 어느 순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의상 탈의에 지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변화하는 과정을 ‘옷’이라는 외면을 통해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장치로써의 역할을 수행한다. 즉, 이로써 니나의 내면에는 흑조 또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그렇다면 온실 속 화초처럼 통제 하에 살아온 그녀가 자신 안의 욕망을 이끌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녀의 욕망은 다양한 방향으로 분출되는데, 먼저 발레단에서 오랜 시간 정상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베스에 대한 동경이다. 니나 자신도 발레단 내에서 주인공(main character)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길 꿈꿔왔기에 그녀에게 베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베스의 귀걸이와 립스틱 등의 소지품을 훔치게 되는데, 그 훔친 물건들을 자신이 지니고 있음으로써 그녀는 주인공이라는 욕망의 대상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켰거나 그로부터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토마스에 대한 욕망이다. 매번 자신의 결핍된 여성성을 꾸짖으며, 자신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 하는 토마스. 이런 토마스가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에서는 니나로부터 흑조로서의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녀를 유혹하고 있는 듯하나, 사실 여성성을 갖지 못 한 자신을 탈바꿈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며 토마스에게 섹슈얼리티를 발휘하길 원하는 것 또한 그녀다. 그녀는 점점 토마스에게 여자로서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녀의 여성성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자유분방한 성의식을 지닌 발레리나 릴리다.릴리는 몸에 힘을 들이지 않고 춤을 추며, 밝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또한 한밤중에 그녀의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사과를 할 줄 아는 당찬(한편으로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릴리에 의해 니나는 엄마의 통제를 거역하고 술집으로 향한 후 처음으로 일탈을 시도하게 되는데, 릴리가 마약을 권할 때 거부하는 것과 다음날 리허설이 걱정되니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니나의 말에서 그녀 안의 ‘통제’와 ‘본능’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니나는 통제를 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남성들과 몸을 섞고 릴리와 동성애를 즐기는 환상에 빠지며 점점 자신에게 내재된 욕망을 표출하기 시작하는데, 엄마의 울타리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그녀를 형성하는 데 있어 릴리는 큰 몫을 한 셈이다.그러나 다음 날, 릴리에 대한 욕망은 불안감으로 변한다. 결국 리허설에 늦은 니나의 자리를 대신해 릴리가 리허설에 서게 되고 그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극도에 치달아 스스로를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구토를 하고 발가락들이 서로 맞붙는 환상을 느끼고, 릴리를 유리조각으로 찔러 죽이지만 그것 역시 환상이었다는 것 또한 그녀의 불안한 심리를 내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불안한 상태로 백조로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큰 실수를 함으로써 백조의 공연은 실패로 끝난다. 실패의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백조’의 모습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릴리의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고 피로 물든 자신의 배에서 유리조각을 빼내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그녀가 죽인 것은 곧 자신 안의 ‘화이트 스완’이었으므로 어쩌면 무대 위 백조의 실패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조로 분장하고 난 후의 그녀는 다르다. 공연은 매우 성공적으로 흘러가며, 공연 도중에 그녀의 몸에서 흑색 깃털이 점점 돋아나면서 결국 화려한 날개가 형성되는데 그녀의 흑빛 날갯짓은 이제 그녀가 완전히 흑조로서 성숙해졌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 후 다시 백조가 된 그녀는 스스로 몸을 던져 죽게 되고 공연도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