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서론2. 임나일본부설3. 과거 역사의 진실성1) 중국 송서에 실린 내용2)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내용4. 결론5. 참조1. 서론서기 2333년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페이지마다 계속해서 등장해왔던 일본. 역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류와 싸움만의 반복이 아니다. 때로는 종속적인 관계가 되기도 했었고, 때로는 형제의 나라가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원수같은 관계가 되기도 했었던 것 이다.현재의 한국과 일본은 각 분야마다 다른 관계의 양상을 띄고 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일본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가는 제2의 경제대국이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는 약간 뒤떨어지지만,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고 있는 경제 강국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일본과 많은 물자교류를 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우리나라와 일본과 중국은 동아시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로서 EU, NAFTA 등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서로간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면에서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다른 분야들과는 조금 다르다. 1910년 경술국치, 일제는 우리의 조상에게 입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가혹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독립을 주장하는 열사들을 잡아들인 후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시기에는 조선 남자들을 강제로 징집했으며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고 갔다. 1950년대에는 6.25를 바탕으로 세계 제2차대전 패전국의 아픔을 극복해나가며 경제를 발전시켜갔다. 이러했던 과거 일본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사회적인 교류에 있어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현재 일본은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독도를 자신들의 행정구역 안으로 편재시킨 후 세계 각국에 잘못된 정보를 유포시키고 있다. 또한, 5세기경 발견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자신들의 멋대로 해석해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은 모두 자신들의 세력권이었다는 식민사관)중 하나인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5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세력배치와 중국 송서에 실린 객관적인 분석자료를 토대로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의 역사적 진실성과 타당성에 대해 분석해 볼 것이다.2.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설이란 스에마쓰 아카아즈의 [임나흥망사]에서 처음 주장되어진 학설이다. 6세기 초 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되는 한 가운데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주변 소국들의 모임이 나타나고, 이 과정에서 ‘임나일본부’가 등장하였다. 임나일본부에서는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 등 왜인의 성씨를 가진 관인들이 나타나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주도하며 한반도 남부의 세력권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임나일본부설은 남선경영설이라고도 불리며,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로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으로 진구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 4읍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역사책으로서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한편으로 너무나 치우쳐있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중국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송서가 남아있고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대한 논쟁도 분분하다. 이 내용들은 에서 자세하게 서술하도록 하겠다.3. 과거 역사의 진실성(1) 중국 송서에 실린 내용438년 (진)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관작을 요청451년 (제)“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에 임명477년 (무)자칭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요청478년 (무)“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받음일본의 학자들은 왜왕이 438년과 477년 중국 송의 황제에게 나라들을 다스릴 관직을 요청한 사실을 바탕으로, 왜왕은 중국에게 우리나라의 지배를 인정받았으며 5세기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의 모든 지역은 일본의 세력범위 내에 속한다고 주장한다.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왜왕이 지배를 인정받고자 두 번이나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백제는 제외된 것을 바로 보아, 5세기 경 중국에게 세력범위를 인정받는 나라는 백제뿐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사정범위 바깥이었기에 계속된 일본의 요청이 귀찮았던 나머지 중국에서 다른나라들에 대한 지배권을 형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고 보고 있다.하지만, 우리학자들의 주장은 임나일본부설을 사장시키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존재한다. 과거의 우리나라는 철저한 중화사상에 입각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화사상에 입각했던 나라가, 중국이 왜를 형식적으로만 인정했다고 해서 진짜로 왜를 형식적으로만 바라보았을 것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과거 한국은 중국과 사대의 관계를 가졌으며 매번 조공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단순한 사대의 관계가 아닌, 변방 오랑캐국과 세계 중심국가의 서열정리와도 같은 과정이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로에 관한 입장을 바라보는 모습은 달랐고, 처해있는 현실을 분석하는 모습도 상이했다고 할 수 있겠다.(2)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내용영락 6년 : 왕이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별, 58개의 성과 700개의 촌을 얻음영락 8년 : 일부 군대를 변경에 보내 막사라성, 가태라곡을 획득영락 9년 : 백잔이 맹서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 남으로 평양 순시. 신라사신이 왜가 신라에 침입한 사실을 알림영락 10년 : 보병,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영락 14년 : 왜가 법토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 화통한 백잔군을 왕이 몸소 토벌"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해석: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광개토대왕 비문은 모두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첫 번째는 고구려의 개국 설화를 말하고 고구려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적인 공헌에 대한 설명이고, 세 번째는 능묘를 지키기 위한 수묘인 300호를 배치했다는 내용이다. 그 중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두 번째 부분으로, 일본에서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새겨진 신묘년조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는 것을 근거로 들며 5세기경에는 왜가 한반도의 남부를 영유하였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는 취약점이 있으니, 가장 오래된 반박설로 재일사학자인 이진희선생이 광개토대왕비문의 조작설이 있다. 이 설은 일본 관동군이 마모된 부분을 석회석을 발라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 살았던 4세기 후반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적으로 가야가 오랫동안 일본의 점령을 받았더라면 관련 유물이 발굴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옛날 가야지역에 유물에서는 독자적인 가야 유물만 발굴되었다. 이러한 반박근거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할 수 있는 여지는 많을 수 있다고 하겠다.4. 결론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광개토 대왕릉 비석, 중국 송서에 쓰여있는 내용, 그리고 칠지도에 새겨진 내용까지. 조상들이 과거에 새겨놓은 몇 자 안되는 말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한자 한자가 소중하고 귀중하다. 만약 칠지도의 전문이 완벽했더라면, 한 글자도 빠져있지 않았더라면 일본과 우리의 지긋지긋하게 긴 공방은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4세기 근초고왕이 이끌었던 백제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이끌던 고구려의 전성시기가 시작되었다. 위로는 연해주와 만주, 아래로는 백제와 신라에 이르기까지 광개토대왕은 수많은 영토를 차지했고 권력의 상징인 광개토대왕비를 세웠다. 하지만 고구려가 자신의 권력을 내세우기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의 발단이었다. 일본은 신라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었다며 1920년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내세웠으며 한국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앞서 말했듯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중국의 송서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의 논점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데 송서에는 왜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요청했던 도독제군사호의 관직이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