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 그리고 서민귀족차례1. 몰리에르● 작가 연보● 몰리에르의 생애2. 서민 귀족● 발레-희극의 창시● 서민 귀족● 서민 귀족을 보고1. 몰리에르● 작가 연보1622 - 1월 15일 파리에서 wid 포클렝의 아들로 출생.본명은 wid 바티스트 포클렝Jean-Baptiste Poquelin1631 - 몰리에르의 부친이 궁정 실내장식업자의 직위를 얻음.제쥐이트계인 콜레쥬 드 클레르몽에 입학하여 인문주의 교육을 받음.1632 - 모친인 마리 크레세 사망.1637 - 부친의 직위를 상속하기로 서약.1640 - 오를레앙에서 법률학 공부.1641 - 가상디와의 만남.1643 - 루이 13세와 리슐리유 추기경 사망.1월 부친의 직위 상속을 포기함. 6월 마들렌느 베자르와 함께‘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 Theatre 극단 설립.1644 - 1월 처녀 공연을 하였으나 실패.6월 28일 최초로 ‘몰리에르’라는 예명 사용.1645 - 8월 극단 문을 닫음. 빚으로 감옥에 투옥됨.10월 베자르 가족과 함께 파리를 떠나 지방 유랑생활을 시작함.1646 - ‘뒤 프렌느’ 극단에 입단하여 소극 공연.1650 - 극단의 지휘권을 인수받음.1653 - 콩티 공의 후원을 받음.1655 - 리용에서 창작된 첫 희극 『덤벙쟁이』발표.1656 - 두 번째 작품 『사랑의 원한』발표.1657 - 콩티 공이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후원이 끊김.1658 -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 앞에서 코르네이유의 『니코메드』를 상연하지만왕의 흥미를 끌지 못함. 하지만 여흥거리로 공연한 『사랑에 빠진 박사』로큰 성공을 거두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을 이탈리아 극단과 함께 사용할 권리를 얻음.1659 - 11월 파리에서의 첫 성공작인 『웃음거리 재녀들』발표. 이탈리아 극단이 떠남.1660 - 5월 『스가나렐』발표.10월 프티 부르봉의 철거로 3개월 동안 공연을 중단함.1661 - 1월 루이 14세로부터 팔레 르와이얄 극장의 사용을 허락받고는 죽을 때까지이 극장에서 공연을 함.2월 『동 가르시 드 나바르극 『아내들의 학교 비판』로 유례없는 대 성공을 거두지만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음.1663 -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아내들의 학교 비판』과 『베르사이유 즉흥극』발표.1664 - 1월 몰리에르의 장남 루이 출생. 루이 14세가 루이의 대부가 되지만 11월 사망함.라신느의 『테바이드』공연.1월 루브르에서 『강제 결혼』공연.5월 베르사이유에서 『엘리드 공주』와 3막의 『타르튀프』를 공연하지만,『타르튀프』는 1669년까지 공연이 금지됨.1665 - ‘왕립 극단’ 칭호 획득. 2월 산문 희극 『돈 쥐앙』을 공연하지만 15회 공연후에 금지당함. 9월 베르사이유에서 『사랑이라는 의사』공연.1666 - 루이 14세의 모후의 죽음으로 2월까지 극장문을 닫음.6월 『인간 혐오자』, 8월 『본의 아닌 의사』, 12월 『멜리세르트』발표.1667 - 1월 『희극 전원극』, 2월 『시실리 사람』발표.『타르튀프』를 개작한 『파뉠프 또는 사기꾼』을 공연하나 1회 공연 후금지당함. 병에 걸린 몰리에르는 4, 5월 연극 활동을 중단함.1668 - 1월 『앙피트리움』, 7월 『조르쥬 당뎅』, 9월 『수전노』공연.1669 - 몰리에르의 부친 사망. 2월 『타르튀프』에 대한 금지령이 풀려 5막 운문으로 된 결정판이 상연됨.10월 『푸르소냑 씨』공연.1670 - 몰리에르의 병을 풍자한 르 불랑제 드 샤뤼세의 『우울증에 걸린 엘로미르』가발표됨.10월 『서민귀족』공연.1671 - 1월 『프시케』, 5월 『스카펭의 간계』, 12월 『에스카르바냐스 백작부인』발표.1672 - 2월 몰리에르의 동반자이자 동료였던 마들렌느 베자르의 죽음.3월 륄리와 불화.3월 『여학자들』발표.9월 셋째 아들 피에르가 출생하지만 10월에 사망.1673 - 2월 10일 팔레 르와이얄 극장에서 마지막 희극인 『상상병 환자』공연.2월 17일 4회 공연 중 쓰러져 몇 시간 디에 집에서 숨을, 거둠.21일에서 22일 밤 생-조셉 묘지에 안장됨.몰리에르 극단은 ‘테아트르 드 마레’극단과 병합되고 팔레 르와이얄 극장을떠나 게네고 극장에서 러 신화가 존재하지만, 20세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별로 많지 않다. 몰리에르는 1633년 경부터 콜레쥬 드 클레르몽이라는 파리 귀족이나 상류층 부르주아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 고전과 철학 등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몰리에르는 연극인으로서의 어떠한 성향도 보이지 않았으며, 후의 그의 대표작인 『타르튀프』나 『돈 쥐앙』이 보이는 자유주의 작가로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재학 시절 콩티, 가상디, 베르니에 등 인맥을 쌓았다.몰리에르는 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연극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연극에 대한 열정은 어린 시절에서 왔다고들 한다. 몰리에르의 외조부는 어린 몰리에르를 ‘오텔 드 부르곤뉴’극장에 자주 데리고 갔다. 그 시절의 기억이 몰리에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몰리에르는 1643년, 21세에 가업과 부르조아로서의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돌연 ‘일뤼스트르 테아트르’극단을 조직하여 연극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뤼스트르 테아트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보통 실패담만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 때 대성공을 누린 시기도 있었으며 국왕의 삼촌인 가스통 도를레앙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원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는 몰리에르 극단의 자질이나 상연되는 작품의 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비극으로 유명한(몰리에르 극단은 비극으로 성공하고자 했다) 기존의 다른 두 극장이 파리에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비극이라는 같은 레퍼토리를 공연하는 3개의 정규 극단이 경쟁할만큼의 연극 관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한 몰리에르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보석금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단원들은 유랑길에 오르게 되었다.2. 유랑 시절 (1645~1658)몰리에르의 유랑 시절은 생각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프랑스 남서지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뒤 프렌느 극단의 지휘권을 맡아 귀엔느 총독인 에페르농 공작의 후원을 받기도 했고 후에는원자로 엎기도 했다. 오비주 백작과 콩티 공의 후원 하에 그는 랑그독 지방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하지만 오비주 공작의 갑작스런 죽음과 콩티 공의 기독교 귀의로 인해 그의 호시절은 막을 내리고 그는 파리로의 귀향을 결심한다. 뒤 파르크 부부와 카트린느 드 브리같은 뛰어난 배우를 보유한 그는 귀향 전 여러 번 파리를 방문하며 후원자를 찾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1658년 13년 만에 파리로 귀향했다.3. 파리에서의 재 데뷔와 성공 (1658~1661)천의 목소리와 천의 연기를 자랑하던 훌륭한 배우였던 몰리에르는 뛰어난 연출가인 동시에 배우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극단장이기도 하였다. 당시 비극을 주도하던 ‘오텔 드 부르곤뉴’ 배우들의 웅장하면서도 과장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발성법과 제스처가 정석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다변이고 음량이 풍부하지 못했던 몰리에르의 음성은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오텔 드 부르곤뉴의 배우들에 맞서 자연스럽고 구어에 가까운 신발성법을 제시하였다.1658년 루이 14세의 형제인 필립 도를레앙의 후원을 받아 루브르에서 국왕과 궁정인들 앞에서 코르네이유의 『니코메드』를 상연할 기회를 얻은 몰리에르는 비극 공연이 별로 국왕의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고 판단, 프로그램에 없었던 소극 『사랑에 빠진 박사』를 여흥거리로 공연하겠다고 즉석에서 제의하였다. 이 소극의 공연으로 몰리에르는 궁정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로 희극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프티 부르봉에서 공연할 허가를 받았다. 당시 희극 전문 극장으로 알려져있던 프티 부르봉에서 하지만 그는 선입견을 깨고 보통의 극단으로 인정을 받고자 코르네이유의 비극을 공연했다. 프티 부르봉의 초기 시절 그는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비극을 향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제 1의 익살꾼”으로 놀림을 당하는 등 입지가 탄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웃음거리 재녀들』과 『스가나렐』의 큰 성공으로 극단의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됨은 물론 몰리에르 극단의 위치도 확고해졌다.갑작스런 프티 부르봉 철거계 몰리에르는 비극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동 가르시 드 나바르』라는 비극이 완전히 망하고나서야 몰리에르는 비극작가 겸 비극배우로서의 열정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은 희극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몇 달 후에 발표된 『훼방꾼들』은 연극과 발레를 접목시킨 새로운 장르라는 점에서 몰리에르의 재능을 확인해주었다.4. 문학 논쟁과 투쟁 (1662~1669)몰리에르의 비극에 대한 집착과 환상은 5막 운문으로 이루어진 몰리에르의 첫 대희극인 『아내들의 학교』의 유례없는 성공 이후 완전히 치유되었다. 여자의 교육과 결혼 문제를 제기한 이 연극은 큰 성공과 아울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극작가들은 연극 이론과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도덕가들은 여자들에게 부도덕한 행위를 조장해 신성한 결혼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아내들의 학교』를 비난했다. 몰리에르는 『아내들의 학교 비판』과 『베르사이유 즉흥극』으로 그 비난에 응답했다. 자신의 작품을 벗어나 희극 자체를 위해 투쟁을 시작한 몰리에르는 비극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희극 옹호자로 변신하였다. 『타르튀프』는 독실한 신앙가와 종교인들의 거센 비난을 받은 문제작으로, 파리 극장에서의 공개상연이 금지되는 수난을 당했다. 몰리에르는 『돈 쥐앙』을 발표하여 적대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지만 이 작품 또한 5주 후에 공연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에게 특별 지원금을 하사하고 왕립 극단으로 승격하며 지원해주었지만 『타르튀프』는 한참동안 재연되지 못했다. 몇 년 뒤에야 팔레 르와이얄에서 공개적으로 초연을 올릴 수 있었던 『타르튀프』는 몰리에르의 작품 중 최고의 입장수입을 기록한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이 시기는 몰리에르 개인적으로는 부부 갈등,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들의 죽음, 병의 증상 출현 등 힘든 시기이기도 하였다.5. 말년기 (1670~1673)그에 관한 모든 도덕적, 문학적 논쟁이 끝난 시기로 그는 죽기 전 4년 간 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소극과 대희극을 번갈아 발표하고 코르네이유와 공동으로 『프시였다.
교부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를 기독교적 신에서 찾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만물의 창조주인 신의 부재는 곧 자기 존재 자체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으며 신의 말을 곧 진리라고 생각했다.이러한 중세 철학은 각각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그 대표 철학자로 하여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중세 철학 초기 각 교부들을 중심으로 신학적 교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펼쳤던 것을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이라고 부른다. 그 뒤 스콜라(수도원의 학원)을 중심으로 교리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논의했던 것을 스콜라 철학Scholastic Philosophy라고 부른다.중세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 철학을 그리스 철학과 섞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세계의 시작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의 해답으로 그리스인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다. 탈레스는 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엠페도클레스는 그를 발전시켜 흙, 공기, 물, 불의 4원소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으며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은 소립자로 조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질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은 이와는 상이하다. 기독교인들은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 말한다. 만물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대답은 곧 그 철학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철학은 시작부터 그 맥을 달리했고 그렇기에 기독교 철학은 그리스 철학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개별 철학으로 자리잡는 듯 했다.그런 기독교 철학을 그리스 철학과 결합해 기독교 근본 교리를 전부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교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부로 일컬어지며 그의 사상은 반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중세 철학을 지배하였다. 중세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대해 짚어보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11월 13일,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어머니에게 양육되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다. 370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나 당시의 방탕하고 문란한 풍조에 이기지 못하고 그 자신도 방탕한 청년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 때에 한 여성을 만나 동거해 아들을 가졌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마니Mani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마니교도들은 오르마즈드Ormuzd라고 하는 빛의 신과 아리만Ahriman이라고 하는 어둠의 신의 존재를 믿는다. 두 신은 영원히 존재하며 영원히 대립한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하기만 한 하나님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악과 고통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겨 마니교의 교리를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4년 수사학 교사로 밀라노에 직장을 얻었고 그때도 여전히 마니교의 신앙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때 한 논문을 접하게 된다. 빅토리누스의 라틴어 번역인 ‘플라톤파’의 논문이며 플로티누스의 《에네아데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라 주장하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마니교의 이원론이 아니고서도 악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해결책이었고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을 깨닫는 첫 단계가 된다.이후 수사학과 철학에 능한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심플리치아누스 및 폰티시아누스의 전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386년 여름 그는 세례를 받았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한 도시에서 사제로 서품받은 후 그는 설교 활동에 힘썼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며 인간의 완성에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중요하다 강조하였고 그의 은혜론, 신학적 인식론, 영성 신학 등의 분야에 대한 사상은 빠른 속도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자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그의 평생을 저술 활동과 신앙 활동에 바쳤다. 427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을 위해 봉사하다 병이 옮아 430년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Confessiones』, 『행복론De beata vita』, 『독백론Solilopuia』, 『신국론De civitate Dei』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져 오고 있는 것은 단연 『고백록』이다.『고백록』은 397년부터 400년까지 3년의 시간에 걸쳐 쓰여진 13권의 책이다. 1권부터 4권에는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담았으며 5권부터 9권에는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10권에는 『고백록』을 쓸 때 자신의 학문적 위치, 신앙과 철학에 대한 깨달음 등 자신의 현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기억, 시간, 창조에 대해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 분석했다. 11권부터 마지막 13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부분으로 창세기 1장을 해석해 두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응하는 기독교의 신관에 대해 확실히했다.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자 했다. 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첫째는 영원한 진리로부터의 증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증명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떤 행위를 볼 때 그것을 올바르다 혹은 올바르지 않다고 평한다. 여기서의 ‘기준’에 인간의 모든 행위를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기준은 보편적이어야하고 타당하여야하며 영원해야한다. 그 기준의 근거 또한 마땅히 온전해야하고 또 완전해야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근거를 신으로 둔다.
존 로크(John Locke)들어가는 말17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 철학의 새로운 경향은 유럽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대표된다. 영국의 경험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유럽대륙의 합리론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철학적 태도로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철학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베이컨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일반화의 원리를 찾아내는 귀납법을 참된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새롭게 제시하는데, 이는 지식의 기원을 경험에 두는 영국 경험론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러한 철학적 경향은 홉스와 로크로 이어진다. 로크는 17세기 영국의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영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다. 그러므로 수업 주제인 그의 인식론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로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로크가 살았던 시기의 영국의 시대상황,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나서 그의 저서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제1권과 제2권을 중심으로 본유적인 이론적 원리의 부정, 단순관념과 복합관념, 제1성질과 제2성질, 실체 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1. 시대 상황로크가 살았던 17세기의 영국은 정치, 사상적으로 혼돈과 변혁의 시기였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첫째, 사회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계층의 등장을 들 수가 있다. 봉건 농노제하에서 착취당하던 농민들이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새로운 지주가 되어 영주나 귀족을 압도하는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이 16세기 중반부터 생겨난 젠틀맨 또는 젠트리라고 불리는 호농 계층으로서 이 젠트리들이 런던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상인들이나 영국 각지의 모직물 산업의 자본가들과 손을 잡았고, 17세기에 들어서는 국왕에게 대항하여 정치권력을 스스로 쥐려고 한 것이 17세기의 정치위기를 낳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둘째,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들독재가 이어졌다. 1642년부터 6년간에 걸쳐 국왕과 의회의 대립이 절정에 달해 양측은 군대를 풀어 혈투를 벌였고, 1649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찰스 1세 국왕을 잡아 사형에 처하고 최초로 국왕이 없는 공화제 국가가 영국에 탄생했는데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또 다른 중요한 사건으로는 명예혁명을 들 수가 있다.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절대왕정이 부활한다. 시민들이 제임스 2세의 폭정에 대항해 1688년혁명을 일으켜 오렌지 공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명예혁명으로서 17세기의 왕권과 의회의 다툼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전제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된다.2. 생애와 저서존 로크(John Locke)는 1632년 영국의 남서부 서미싯(Somerset) 주의 링턴(Wrington)이라는 시골마을의 청교도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머싯 치안판사의 서기 일을 하는 하급관리로서 가정 형편은 풍족한 편이 아니었다. 1646년, 로크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School) 학교에 입학하였고, 1652년 20세가 되던 해에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Church College) 대학에 입학, 1656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658년에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 같은 해에 크라이스트 처치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그러나 로크는 당시 스콜라철학이 지배하던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당시 새롭게 발전하는 실험과학과 의학에 관심을 가져 보일(R, Boyle), 후크(R, Hooke)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을 하였으며, 씨드넘(T, Sydenham)과 같은 저명한 의사들과 교분을 맺고 의학공부를 하였다. 1666년에는 영국 노동당의 창시자이자 후일에 샤프츠버리(Shaftesbury) 백작이 된 에슐리 경을 만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주치의 겸 고문이 되었다. 샤프츠버리 백작은 당시 찰스 2세의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로크도 이 샤프츠버리 백작 오츠로 돌아갔고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1704년 세상을 떠났다.로크의 저서로는, 인간 인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 및 한계를 세밀하게 탐구한『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시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이 있고, 1688년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저서『정부에 관한 두 논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가 있으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프랑스와 북유럽의 개신교를 압박하는 상황을 보고 출판한, 종교적 자유를 강력히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저서『관용에 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89)가 있고, 영국의 엄격한 교육관을 대변하는 교육서로서 『교육에 대한 몇 가지 단상』(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1693),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기독교의 합리성』(An Rean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이 있다. 그 외의 저작으로는 시대의 공적인 문제에 관한 로크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저작중의 하나로서 『이윤 저하와 화폐가치 증대의 효과』(Consequences of the Lowering of Interest and Raising the Value of Money) 등이 있다.3. 타고난 사념에 대하여로크는 『인간지성론』 제1권에서 이론적 원리와 실천적 원리로 나누어서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본유적인 이론적 원리에 대해서 부정하는 부분만 살펴보고자 한다.3.1 본유적인 이론적 원리의 부정.로크는 본유주의자들이 보편적 동의를 토대로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본유적 원리에는 보편적 동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서로 동의하는 어떤 명제나 사물의 경우 어떤 보편적 합의에 이르는 길을 자신이 별도로 명시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본유적 원리를 부 명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지능이 떨어지는 백치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이 명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본유주의자들이 본유적이라고 말하는 동일률이나 비모순율에 대해서 보편적 동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이 본유적인 이론적 원리가 본유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만약에 어린아이들이 본유적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지각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에 무엇인가 각인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 어린이나 바보 등은 알지 못하므로 마음에 자연적으로 각인되어 있지 않다.무엇보다 아이들이나 백치는 명백히 이들 원리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지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모든 타고난 진리에 꼭 수반되어야 할 보편적 동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이 지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는 진리가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각인하는 일에 무엇인가 의미 표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진리를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무엇인가를 각인하고도 이것을 지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이들이나 백치에게 영혼과 마음이 있고 이들 영혼이나 마음에 그러한 각인이 있다면, 아이들이나 백치는 싫어도 그 각인을 지각해야 하고, 이들 진리를 알고,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위에 대한 반론으로 “누구나 이성을 쓰게 되면 이들 명제를 알고 그것에 동의하게 되며, 이로써 충분히 본유적임은 증명된다.” 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 주장이 이성에 의해 확실하게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진리는 모두 본유적이라는 의미가 된다면 공리나 정리는 모두 본유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이성의 사용에 의해 발견된 더 이상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유주의자들은 정리는 본유적 원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성이 발견해냈다는 것이 본유적임을 증명하않고 구별되지 않으며, 또 타고난 것이라고 증명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정반대인 것이다.-다른 반론으로, ‘어떤 명제가 제시되고 그 안에 사용된 용어가 이해되자마자 그 명제에 동의함’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유적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리가 아닌 ‘단 것은 쓴 것이 아니다.’ 라는 명제도 ‘달음’과 ‘씀’의 관념을 이해하면 사람들은 이 명제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리가 제시될 때까지 알지 못하는 기간이 있다는 것은 공리가 본유적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리고 본유적인 명제라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위해 제시될 필요도 없다.4. 관념에 대하여로크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은 백지’와 같아서 경험을 통해서만 관념을 얻을 수 있다. 이 경험은 감각을 통해서 얻어지는 외적 경험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내적 경험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적 경험은 외적 경험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외적 경험이 모든 관념의 근원적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4.1 단순관념과 복합관념감각과 반성을 통해서 처음으로 얻어지는 관념을 단순관념이라고 하고 이것은 지식의 재료로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단순관념이 외적, 내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에 도입되면 마음이 이것들을 결합, 연결, 추상화하여 복합관념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흰색, 폭신함, 가벼움, 부드러움 등의 단순관념을 마음이 결합하여 솜이라는 복합관념을 만들어 낸다. 그 외에 외적, 내적 경험이 함께 작용하여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계기 (繼起)관념이 있는데 쾌, 불쾌, 고통, 기쁨 등의 관념으로서 어느 한편에 귀속시키기는 어려운 것들이다.4.2 제1성질과 제2성질로크는 인간의 지각이나 사유의 직접적인 대상을 관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에 어떤 관념을 낳는 능력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체의 성질이라고 한다. 커피 원두에는 ‘둥글다’, ‘검다’, ‘딱딱하다’, 라는 관념을 우리 내부에 낳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커피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에 있어서 ‘둥글다’, ‘딱딱하다의
『라케스』 - 니키아스와 라케스《라케스》는 ‘용기’라는 주제를 두고 니키아스(Nikias)와 라케스(Lach?s)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벌인 논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책이다. 《라케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유명한 두 장군인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대립 구도이다. 둘은 말하는 방식, 말하는 내용, 감정선에서도 극명한 대립을 보여 주며 용기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대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간략하게 짚어나가며 둘의 대립 구조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다.《라케스》는 뤼시마코스(Lysimachos)와 멜레시아스(Mel?sias)의 자식 교육에 대한 걱정에서부터 그 내용을 시작한다.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는 각각 훌륭한 정치가이자 장군을, 아테네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귀족파 지도자를 그 아버지로 두었다. 그 두 아버지는 명망이 높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나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는 그 둘이 정작 자신들의 후손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 시키지 않아 자신 둘은 아버지에 비해 아주 초라한 모습이라고 한탄, 자신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 다짐한다. 즉 자신들은 자식의 교육에 대해 이바지하여 그 두 자식을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뤼시마코스와 멜레시아스는 어떤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배울 거리라고 추천해 준 ‘중무장 전투술’에 대해 두 장군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여기서 등장하는 두 장군이 바로 《라케스》 작품의 대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라케스와 니키아스이다. 라케스는 경험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물로 당대의 유명한 장군이다. 니키아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떨치던 훌륭한 장군이었으나 라케스와 다른 점을 꼽으라면 니키아스는 장군임과 동시에 부유한 귀족들의 대변자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니키아스는 뒤에서도 살펴 보겠지만 신중하고 논리적이며 소크라테스적 논의에 익숙한 사람으로 그려진다.이들의 본격적 논의는 이 두 장군이 이 대화에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이며 시작 된다. 소크라테스를 그 자리로 데 일에 그 근거를 둔다.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증거로 하는 라케스와는 다르게 니키아스가 소크라테스를 추천하는 이유의 근거는 간접적 경험을 그 증거로 한다. 니키아스는 자신이 직접 소크라테스의 어떠한 면면들을 엿본 것은 아니나 소크라테스가 추천해 준 사람의 훌륭함으로 소크라테스의 훌륭함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둘의 이러한 대립 구조는 대화 전반에 걸쳐 계속 된다.소크라테스를 논의에 끌어들이는 데에 뤼시마코스가 동의하자 셋은 ‘중무장 전투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니키아스는 여러 근거를 들어 중무장 전투술이 젊은이들에게 유용할 것이라 주장한다(181e~182d). 그가 든 근거들은 이렇다. 첫째, 중무장 전투술은 젊은이들의 신체 단련에 유용하다. 둘째, 중무장 전투술은 기마술과 함께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배울 거리이다. 셋째, 중무장 전투술은 실제 전투에서 도움이 된다. 넷째, 중무장 전투술은 전법과 장군의 지휘술의 초석이 된다. 다섯째, 중무장 전투술을 익힌 사람은 실제 전장에서 더욱 용감해질 수 있다.라케스의 의견은 다르다. 라케스 또한 자신만의 근거를 들어 중무장 전투술이 배울 가치가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182e~184c). 첫째,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중무장 전투술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스에서 군사력으로는 으뜸가는 사람들로 그런 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군사 훈련법이라면 그것은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중무장 전투술이 훌륭한 것이라면 중무장 전투술을 익힌 사람들은, 스스로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비극 작가가 이를 다른 나라가 아닌 아테네에 와서 공연하는 것처럼, 그것을 응당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케다이몬의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가서 그 기술을 선보이니 라케스는 이를 근거로 그 기술이 대단치 않음을 주장한다. 셋째, 다른 모든 분야에서 이름을 얻는 사람들은 그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적 활동을 한다. 중무장 전투술을 전투에 있어 전문적자체의 유용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한 바를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게 라케스는 실제적으로 중무장 전투술을 배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뤼시마코스는 도움을 얻고자 했던 두 훌륭한 장군의 의견이 대립되는 것에 당황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어느 한 쪽에 찬성표를 던질 것인지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판단은 다수의 동의가 아니라 훌륭한 앎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인시키며 그러므로 자신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말과 굴레의 비유를 들어 말에게 굴레를 씌울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말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지 굴레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얻고 이와 같이 자신들의 논의는 중무장 전투술이 아닌 ‘젊은이들의 혼(psych?)을 위한 배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85e).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의 혼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논점을 전환하는 것에 성공한다.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신들이 젊은이들의 혼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 조언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 자신에게 교사가 있었는지, 그 교사 자신이 훌륭했는지, 많은 젊은이의 혼을 보살폈는지, 우리 또한 가르침을 보였는지를 확인하거나 혹 교사 없이 스스로 전문가가 되었다면 그가 다른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신은 그 두 가지에 전부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뤼시마코스에게 니키아스와 라케스가 훌륭한 교사를 두었는지 아니면 스스로가 전문가의 자질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를 권한다. 뤼시마코스는 그 제안을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여 니키아스와 라케스에게 소크라테스와 ‘설명을 해 주고 받으면서’ 검토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부탁한다.니키아스는 자신이 이미 소크라테스의 ‘심문’이 익숙함을 밝히며 소크라테스가 대화에 참석할 때에 우리의 논의는 젊은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되기 말이든 할 자격이 있다 말한다.니키아스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주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의 태도를 검토 받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반면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대해서는 생소하다 고백하며 그러나 언행이 일치된 사람의 말은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한다. 바로 이 부분이 라케스의 허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라케스는 아직 소크라테스가 논의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데에도 불구, 그의 행동만으로 그가 말하는 것 또한 훌륭할 것이라 짐작한다. 엄밀하게 이것은 언행일치를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보고 그것이 훌륭하다고 여긴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의 언변을 보고 난 뒤에야 언행이 일치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케스 본인은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토로하고 있으나 기실 라케스는 말보다는 행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일 뿐인 것이다.논의는 곧 중무장 전투술에서 젊은이들의 혼에 어떻게 훌륭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논점이 전환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 훌륭한 것인 지에 대해 훌륭함 전체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 큰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 중 하나를 채택하기로 한다. 그들은 마침 이야기하고 있었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무장하고 싸우는 법’에 대한 배움이 지향하는 바 즉 많은 이들에게 ‘용기’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소크라테스는 우선 라케스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 촉구한다. 라케스는 당당히 용기를 ‘제자리에서 버티며 적들을 막아 내고자 하며 달아나지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190e).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도망가며 적들과 싸우는 경우에도 용감한 경우가 있다 지적하고 또한 어떤 쾌락에, 어떤 이들은 고통에, 어떤 이들은 욕망에, 어떤 이들은 두려움에 있어 용기를 가지고 있다며 이들 모두에 있어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다. 이에 라케스는 용기를이제 무엇이 지혜로운 인내인지에 대해 알아 보는 것으로 발전한다. 라케스는 앎을 가지고 인내하는 자가 앎 없이 인내하는 자보다 덜 용감하다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라케스의 논의가 어리석은 인내는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는 앞의 논의와 모순된다는 점을 짚어낸다. 라케스는 용기에 대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괴로워한다.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니키아스는 주저하지 않고 용기란 ‘두려워할 것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 말한다(195a). 라케스는 의사나 농부와 같은 장인들도 모두 자기 기술 분야에 있어 두려워할 것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으나 이것을 용기라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반박하고 니키아스가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비난한다. 니키아스는 라케스의 이 반론에 대해 라케스의 사례는 그저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사례들일 뿐이며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은 어떤 특정한 기술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오직 용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다며 라케스의 반박에 응수하나 라케스는 니키아스가 예언자들을 용감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며 비꼰다.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에게 야수의 용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묻는다. 라케스는 이에 덧붙여 모두가 용감한 것으로 인정하는 야수들이 우리보다 지혜로운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반대하여 야수를 용감하지 않다 말한 것인지 묻는다. 니키아스는 두려워할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겁이 없고 어리석은 것이라 대답하며 실은 아주 많은 사람들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그저 겁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 말한다. 라케스는 이에 버럭 화를 내고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에게 니키아스가 명망 높은 소피스트와 교류하는 자임을 상기시키며 논의를 진행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에게 두려워할 것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은 곧 장체 있게 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에 대한 앎과 동일하다는 것에 동의를 얻어한다.
순자의 천론과 성악설에 대하여전국 시대, 중국의 패권을 놓고 7개의 강국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이른 바 칠웅(한, 위, 조, 제, 진, 연, 초)의 시대.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지식인들의 책임감은 막중해진다. 그것은 전국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이때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사상을 토로했는데, 지금의 산서 하북성인 조나라에서 태어난 순자[荀子 : B.C. 298? ~ B.C. 238?]도 그런 사상가들 중 한 명이었다.순자는 공자의 직계 제자인 자하[子夏]와 중궁[中弓]의 학통을 계승한 명명백백한 유학儒學자이다. 하지만 순자는 전통적인 유학사상과는 달리 자연천[自然天]을 주장하고, 성악[性惡]을 주장함으로써 유학파에서 이단시 되었다. 자신이 속해있는 학파인 유학파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면서까지 그가 주장했던 사상은 과연 어떤 사상일까.1) 천론[天論]공자[孔子]에게 있어서 천[天]이란, 세계의 운동과 변화의 배후에서 그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이다. 맹자[孟子]에게 있어서 천[天]이란, 인간 도덕성의 원천으로 인간에게 성품을 부여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공맹을 거쳐 유학에서는 천[天]을 최고의 궁극적 실재[實在]로 보았다.하지만 순자는 천[天]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것은 요 임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 임금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天行有常. 不爲堯在, 不爲桀亡.](『천론』이렇게 순자는 천[天]을 의지를 지닌 존재가 아닌 자연현상으로 보았다. 천[天]과 인간을 분리[天人之分]한 것이다. 천[天]이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기존 유학자들을 완전히 부정해버린 것이다.인간의 노력을 버리고 하늘을 사모하면, 곧 만물의 실정을 잃게 될 것이다. 천론.천[天]과 인간을 분리하며 순자가 말하려고 했던 바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인간의 자주성[自主性]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천[天]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천[天]의 하급이 되어 비자주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온전히 저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천[天]이 부여한 본성으로, 내가 배워 익힐 도덕이 아니라 천[天]이 내려주는 도덕을 품고 살아간다면 인간은 천[天]의 뜻대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 비자주라는 말의 한자 뜻 그대로 자신의 주인이 되지는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천[天]에 대한 종교적, 미신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주성을 믿은 순자가 공자, 맹자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더 확고했던 것 아닐까?2) 성악설[性惡說]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善]하다고 했다.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주장하며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을 알고, 도덕에 능하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벼슬은 천[天]이 사람에게 준 인의충신[仁義忠信]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은 선[善]할까?이에 반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惡]하다고 했다.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간의 작위의 결과이다. 성악.사람이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싶고, 고단하면 쉬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배고파도 먼저 먹지 못하는 것은 어른에게 양보해야하기 때문이요, 고단해도 감히 쉬지 못하는 것은 어른을 대신해야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성정대로만 하면 사양할 까닭이 없고, 사양하면 오히려 성정에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러면 사람의 성정은 악한 것이고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것이다. 성악.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므로 배우고 익히고 행하려고 노력해서 선[善]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 자체은 아주 매력적이게 들린다. 천론[天論]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을 믿고 있음이 느껴진다. 천[天]이 부여해주는 선[善]을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나에게는 다소 수동적으로 들린다. 물론 맹자가 주장한 바가 이미 선[善]하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에게 인의충신[仁義忠信]이 주어져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닌가. 그에 비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고 오직 학습과 수양을 통한 노력으로 인간은 선[善]해지는 것이라는 순자의 주장은 내게 인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느껴지게 한다.또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서는, 그렇다면 악[惡]이 어떻게 창조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못주고 있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에서는, 고요하며 매우 맑고 밝은 자유를 지닌 성인[聖人], 대인[大人], 지인[至人]이 우주의 중심에 서서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성악설[性惡說]의 다른 부분에 비해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긴 하지만 명백히 선[善]의 창조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나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