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름길서론“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우리가 자신에게 의문을 가진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위해 스스로를 고찰하고 남과 비교하며 답을 찾아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아니 수 세기가 지나더라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정복하고 탐구하며 거의 모든 것의 진리를 찾고 정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정작 ‘우리 ’는 누구인가? 라는 간단한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을 찾지 못한다. 수천년.. 아니 수만년 동안 축적이 되온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의 답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답을 스스로 어디서 찾겠는가.본론이 강의의 내용은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한번쯤 스스로에 대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강의이다. 근래에 김난도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것이 현대의 청춘들은 방황을 하고 있고 미래,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성 등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감각적 쾌락을 통해서 그 공허함을 채우려하고, 쾌락적 감각을 통해 행복을 느끼려한다. 우리 스스로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1차원적으로 느끼는 감각 본능에 충실하다보니 이런 향락에 쉽게 빠지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 하는게 사실이다. 생각하는 지성인이라 불리는 대학생들이지만, 스스로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는 감각적 쾌락의 함정과 행복을 동일시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한다.그렇다면 감각적 쾌락이 행복이 아니라면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행복은 어떠한 행동자체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행복은 예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물질적 이익을 통해 풍요로운 삶 같은 것 이 아니라 도덕적 예술적 행위의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고 잘못된 질문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고 존엄성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행위자체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위에 대해 반문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인간다움을 퇴락시키는 비윤리적인 의미로 보고 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어떠한 행위에서 나오는 결과물에 집착을 한다.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하는 행위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행복을 흔히 느낀다고 표현하다 .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스스로의 만족감일 뿐이지 행복이 아닌 것이다. 일전에 개인적으로 읽었던 정신분석학 관련 책에서는 봉사활동의 행위를 이렇게 설명을 했다. 봉사활동의 행위는 봉사대상을 도우며 본인이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 라는 것에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 이다. 물론 옳지 않은 말일수 도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만족감(결과물)은 스스로에 대한 위안으로 밖에 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결과라는 것은 행복과는 중요하지 않다. 행위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야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행위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되고 그런 이런 행위에 대한 결과로써 물질적이든 만족감과 같은 성취감에서 행복을 찾으면 옳지 못하고 도덕적 예술적 행위자체에서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타인의 대한 불신, 스스로에 대한 불만 등은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안정을 찾기 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안정은 쉽게 찾을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 같은 1차적 위안을 통해 안정감을 찾고 행복을 느낀다고 착각하는 게 일수이다. 하지만, 이러한 1차적 위안은 우리가 스스로 그것은 옳지 못하다. 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한다.) 우리를 하여금 더욱 더 불안을 야기 시킨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러한 사회적 불안, 불신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 즉,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적 현상들이 정말로 부정적인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불신, 불확실성, 불안 과 같은 본인이 느끼는 것은 본인의 마음에서 안정을 찾지 못해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에서 그 현상들을 이해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욱더 확장하여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창조주가 있다고 전제를 한다면 인간은 결국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이다. 자신의 이해와 더불어 창조주와의 이해(=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강의 “행복을 찾아서“의 주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고 언젠가는 흙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마저도 유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무한하길 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무한하게 느낄 순 없을까? 있다면 어디서 무한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답은 앞에서 제시한 불안의 최종적 극복에 답이 나와 있다. 결국 창조주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주와의 관계, 이해, 지속적인 교제를 통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삶 동안 그리고 인간이 죽어서까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결론과연 나 또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일련의 행위의 과정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라고 반문에 본다. 나도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타자와의 의사소통에 중요시하며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세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동시에 나 스스로를 감추어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나 자신을 더욱더 위축되고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옷을 벗는 것과 같이 창피함을 무릅써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내안의 행복을 찾기 위해선 나 자신을 이해하려 힘써야한다. 더욱이 우리를 만든 절대자(창조주)와의 소통도 해야지만, 우리는 살아서 그리고 죽은 후에 까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가치가 생긴다. 인간이 우선 실존하고,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개성으로써 만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안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내안의 나는 언제나 남과 비교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로 하였다. 더 나아가 창조주와의 정신적 교감을 이루며 나의 거짓된 삶이 나의 실존적 삶으로 바뀌길 기대해 본다.
전 시 회감 상 문과 목 명:담 당 교 수 님:소 속:학 번:이 름:제출일:제 7 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대의 변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수많은 공간속에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미디어 환경 속에 노출되고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0.1ms채 안되는 시간 속에서도 많은 정보들이 지나간다. 이러한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우리는 0.1%도 안되는 정보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취합하며 창조한다. Big data들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도 예술은 존재한다. 예술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고대부터 작가에 따라, 주제에 따라, 시대에 따라 예술은 변화해왔고 인류문명이 진화함에 따라 예술작품은 진화해 갈 것이다.현대에 들어 등장한 예술이 바로‘ 미디어 아트’이다. 미디어 아트는 비디오 아트는 물론 웹 아트와 게임 아트 등을 포함하는 예술 장르다. ‘미디어 아트’는 우리 시대의 기술이 반영된 우리 시대의 예술이라는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확장, 변화하고 있다. 시각에만 의존해온 기존 미술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의 오감에 호소하고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육감의 기억을 되살리는 능력은 미디어 아트가 갖는 또 다른 매력이다.‘미디어 아트’는 회화. 조각같이 한 가지 형태의 예술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대가 다양한 형태의 기술과 정보가 존재하듯 ‘미디어 아트에도 여러 가지 특징들이 존재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Spell on You’라는 주제로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는데 여러 작품들 중에서 ‘미디어 아트’의 특징별로 각각 소개하고자한다.1.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간극을 줄이고 여러 가지 매체를 혼합하는 혼성,데스크톱 밤, 2011마우스 커서가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컴퓨터 프로그래밍, 설치 및 프로젝션, 사운드엑소네모: 인터넷 기반 활동이 작품은 라이브 퍼포먼스의 형태로 인간이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는다. '퍼포머'이자 ‘엔터테이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컴퓨터프로그램이자 마우스 커서이다. 커서가 화면 위를 종횡무진누비며 소리와 영상 등 다양한 파일을 차례로 실행한다. 이 설치 작품에서 전개되는 ‘퍼포먼스’에 인간은 개입하지 않는다.고급기술인 컴퓨터프로그램과 음악을 조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내지른다. 쉽게 접하는 컴퓨터 효과음을 이용하여 리듬과 멜로디를 새롭게 만들어 내었다. 인간 대신 커서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씩씩하게 활약한다. 관객은 커서의 ‘모험’과 그 때마다 일어나는 예상 밖의 사건을 손에 땀을 쥐며 즐기고 공유한다.2. 관객이 직접 작품을 조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상호소통성,크로우드로우 CROWDRAW, 2012군중에 의해 조작되는 페인트건에브리웨어 everyware방현우, 허윤실 작품(서울거주, 활동)CROWDRAW는 친구와 친구 사이, 그리고 또 그 친구와의 소통이 무한 확산되는 소셜 네트워크 공간에서 웹과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세계에서 함께 점을 찍어 현실세계에 한폭의 벽화를 완성하는 ‘십시일반 드로잉 프로젝트’다.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가상 세계에서 페인트탄을 구매하고 폐허가 된 건물 벽에 쏘는 미션을 부여받는데, 이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공동 창작의 주체이자 프로젝트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사용자들이 참여하여 남긴 흔적들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는 페인트건 기반 드로잉 로봇을 실제로 원격 구동하는 데에 사용된다. 수많은 사용자들이 스마트폰 앱의 가상 공간에서 페인트탄을 쏘았던 이력은 서버에 기록되고, 이 기록은 실제 공간에서 페인트탄을 장전한 자동 로봇 장치를 원격 구동하여, 건물의 벽면에 진짜 페인트 탄을 쏘아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참여는 뉴미디어 작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CROWDRAW는 기존 뉴미디어 설치가 제안했던 관객 참여의 경계를 확장한다. 참여자는 CROWDRAW를 통해 뉴미디어 설치 작업의 관람이나 체험을 넘어 창작, 배포, 광고 및 경제적 지원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관여하고 실제로 작품의 핵심이 되어 작업을 완성한다.3. 관객을 시뮬레이션 환경 속으로 끌어들이는 몰입의 방식,사이 BETWEEN, 2012프로젝션, 트랙킹카메라, pc, 사운드, 가변크기하이브 HYBE (Hive for Hybrid Environment)한창민, 류신웅, 황재웅HYBE의 In Between은 인터랙티브 장치인 모션 트랙커(motion tracker)를 이용해 관객들에게 연극적 상황을 제공한다.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오는 관객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에게 다가가는 보이지 않는 인물의 발자국 모양을 프로젝션 이미지로 보여준다. 빈 공간을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인물의 발자국이 다가오는 동안, 관객은 유령이나 투명인간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는 존재는 불편함을 야기한다.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소수자나 이방인, 소외된 인간들, 약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다가와서 자신에게 접촉하는 경험을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물론 이것을 재미있는 놀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를 다녀온 소감‘우연과 필연‘이번 전시회는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전시회가 아니었나 싶다. 현대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고 나 또한 졸업하고 기술을 진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기술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술을 반전시킬수록 우리는 인간성의 상실과 소통, 환경의 재앙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소통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고 본능이다. 소통의 부재에 발맞춰 나온 개념이 SNS이지만 차가운 기계 속에서 나오는 메시지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우린 알 수 없다. 마주 보지 않고 다양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과 동시에 진실은 숨길수 있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이 글자 하나하나가 인간을 차가운 기계처럼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