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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항공 2016 하반기 공채 합격 자소서
    대한항공 2016 하반기 공채1. 지원동기: 22살이 되던 해 겨울, 말 그대로 펑펑 내리는 눈을 가르며 처음으로 인천 국제공항이라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체크인은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입국 수속은 어떻게 밟는지 제대로 알고 가지 못한 탓에 계속해서 공항을 헤매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하였습니다. 탑승 시간은 계속 다가오는데, 모노레일을 타는 게 맞는지, 면세품은 인도장은 어디 있는지 계속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지막 탑승자인 저를 계속 찾고 계시던 승무원께서 저를 발견하시고, 저와 같이 뛰시면서 최대한 빠르게 면세품을 인도받고,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그 순간은 제게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감사함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점차 그 모습에 제 모습을 겹쳐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소와 책임감으로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비행을 위해 힘쓰시는 승무원 분들의 친절과 강인함이 가진 힘을 느끼며,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탑승구까지 안내해 주시고 다시 뒤 돌아서 뛰어가지던 승무원 분의 뒷모습이 제가 지원하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2. 입사 후 계획 및 포부: 먼저, 객실 승무원으로써의 본분과 그 역할에 충실하여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여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일을 최대한 잘 수행하기 위해서 꾸준히 해온 복싱과 같은 운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체력관리를 할 것이며, 안전사고 대피 요령 등의 안전 교육과 응급처치에 관한 관심과 지식, 그리고 경험을 꾸준히 증대시킬 것입니다.또한, 승객 분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승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더 나은 비행을 위한 발전 방향을 꾸준히 모색할 것입니다. 그리고 맡은 바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단련과 긍정적인 사고의 발달 역시 꾸준히 발전시킬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취업| 2016.10.17| 1페이지| 3,000원| 조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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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나 항공 2016 하반기 공채 합격 자소서
    아시아나 2016 하반기 캐빈1. 아시아나항공을 지원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서술해 주십시오.: 22살이 되던 해 겨울, 말 그대로 펑펑 내리는 눈을 가르며, 처음으로 인천 국제공항이라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과 보이는 모든 것이 거대한 공항에 들어선 순간 공항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과, 그 규모가 지니는 압도감에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습니다. 마치 신세계에 들어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그러나 체크인은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입국 수속은 어떻게 밟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계속해서 공항을 헤매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하였습니다. 탑승 시간은 계속 다가오는데, 모노레일을 타는 게 맞는지, 면세품은 인도장은 어디 있는지 몰라 계속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지막 탑승자인 저를 계속 찾고 계시던 승무원께서 저를 발견하시고, 저와 같이 뛰시면서 최대한 빠르게 면세품을 인도받고,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그 순간은 제게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감사함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점차 그 모습에 제 모습을 겹쳐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소와 책임감으로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비행을 위해 힘쓰시는 승무원 분들의 친절과 강인함이 가진 힘을 느끼며,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탑승구까지 안내해 주시고 다시 뒤돌아서 뛰어가지던 승무원 분의 뒷모습이 제가 지원하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2. 본인의 특성과 성장배경에 대하여 기술하여 주십시오.: '서비스의 여왕'. 이는 제가 대학 4년 내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획득한 호칭입니다.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여유치 못한 탓에,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각종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여야만 했었습니다. 편의점, 카페, 음식점, 옷 가게 등등 4년 내내 끊이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접했고, 그 대부분은 서비스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곳마다 고용주와 동료들 모두 제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위와 같은 호칭을 붙여 주었습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잦았고, 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이면서 일을 할 때에는 오히려 내가 즐거워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변했습니다. 내가 즐겁게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객에게는 물론 저 스스로에게도 여러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단 억지로라도 즐겁기 시작하면 진정으로 즐거워지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서비스직에 특화되어 고객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여러 기술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친절과 긍정적인 사고, 미소뿐 아니라 순발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민첩하며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가르침 받은 것 이상으로 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저를 다시 고용하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몇 번 재고용되어 일하기도 하였습니다.3. 개인적인 어려움과 희생을 각오하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행동했던 경험을 서술해 주십시오.: 2014년 8월, 저는 캐나다 센테니얼 컬리지의 교환학생을 위한 출국을 이주일 앞두고 있었습니다. 교환학생은 대학 입학 전부터 제 오랜 꿈의 하나였고, 이를 위해 휴학까지 하며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저는 많이 들떠 있었고, 하루, 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중 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고, 지인에게 사기를 크게 당하여 충격으로 몸져누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곁에는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고, 저 역시 아픈 어머니를 홀로 두고 캐나다에 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오랜 제 꿈을 포기하는 일이었고, 다시 교환학생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이고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환학생은 다른 방법을 통해 비슷하게 경험할 수 있지만, 어머니 곁에 있어드려야 할 시기는 이 때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교환학생을 포기하고, 저는 어머니 곁에 남기로 하였습니다.이 후로 제 선택을 후회하며 많은 밤을 울다 지쳐 잠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저는 전에 없던 돈독한 가족애를 얻어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이 경험이 오히려 제 삶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취업| 2016.09.12| 2페이지| 3,000원| 조회(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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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벌개혁 평가B괜찮아요
    경제성장과 분배의 문제국사학과 20120290 이민지청년실업 문제, 비정규직 문제, 독거노인 문제, 저소득층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타나는 문제일까? 그럴 리 없다. 이는 경제성장을 한만큼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더 많이 분배할 만큼 더 많이 성장하길 기다릴 것인가? 이제는 분배해야할 때이다.지난 3월 16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아시아의 불평등 분석’에서 한국은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해 1위를 기록했다. 여기에 대해 IMF는 한국의 소득 분배의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적인 구조”하고 말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이유가 비정규직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대기업-정규직와 중소기업-비정규직의 이중구조를 지적하는 것은 IMF뿐만이 아니다, 국내외 전문가는 물론 OECD 등의 국제기구들도 이러한 이중구조가 한국 경제 발전을 크게 저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개선을 권고하고 있다.조사에 따르면 대기업ㆍ정규직 임금을 100(2014년 기준)으로 봤을 때 중소기업ㆍ비정규직은 34.6으로 격차가 3배 가까이 벌어졌다. 심각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층 사다리도 여전히 부실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낸 ‘대졸자 직업이동 경로조사(2010)’ 분석 결과를 보면 중소기업 정규직이 대기업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은 6.6%,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대기업 정규직 전환비율은 단 2.8%에 불과했다.정책방향을 일자리 보호에서 근로자 보호로 전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세부적으로 경기둔화 시 해고비용 감축 등으로 고용 유연성을 높이고, 정규직·비정규직 간 인건비 격차 축소로 비정규직 고용 유인을 줄이도록 했다. 또 비정규직 사회보험 적용을 확대하고 정규직 근로자 고용보호 완화, 사회 안전망 확충, 비정규직 근로자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인문/어학| 2016.09.12| 1페이지| 1,000원| 조회(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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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평전
    고종- 양극의 평가, 그 사이 어느 즈음에 위치한 인물인가- 대중들에게 고종의 이미지는 대체로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시대에 발 맞춰 나가지 못한 왕, 전근대적 사고에 갇힌 왕으로 종종 표현되곤 하는데, 1980년대 이후 고종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 되고 있다.고종이야 말로 18세기 영정조의 정치 이념인 “군민일체의 인식아래 신분적 불평등을 배제하는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을 계승한 인물이고 이런 전통의 입장에서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고종이 기존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이들은 심지어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일제가 심어놓은 것이며, 역사학계에서 고종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로 대중들의 인식이 여전한 것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그 사실과 어느 정도 가까운 것인가? 과연 고종은 기존의 대중들의 인식과 최근의 이러한 주장들, 그 사이 어느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인가?1863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의 오른 고종은 당시 제왕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였기 때문에, 즉위 이후 약 10년간 경연 등의 제왕교육을 통해 집중적으로 군주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고종은 당시 약 10년 동안의 1300회에 걸친 경연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면서, 이 무렵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아울러 17세기 중엽이후 조선 사상계를 풍미했던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문명국가로서의 문화적 자존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심으로 ‘제국으로서 중국’ 곧 청국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고종은 기존에는 전통적인 화이관념과 더불어 이렇게 제왕교육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동안에 벌어진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여러 사건을 통해 서양에 대해 야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과 정보들을 접하게 되면서 점차 개화세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고종은 이러한 사건들을 청나라에 파견한 견청사절단을 통해 주로 접하였으며 당시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불리던 박규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도 개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였다.이에 따라 이후 고종은 미국과 조미수호조약 등 서양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 직후 교서를 통해 기존의 대외정책을 전환할 필요성을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도서기’와 같은 절충적인 논리를 새로운 정책전환의 기본원칙으로 제시함으로써, ‘문명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살리는 동시에 ‘이용후생’의 원칙 등에 입각한 부강책을 절충하여 수용해갈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은 곧바로 전국 각지에 산발해 있던 척화세력과, 대원군 세력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결과적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게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자주적 근대화의 추진은 단절되었다.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당시에 고종 스스로도 분명한 개화의지가 존재하였고, 개화정책의 추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개화정책이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정치세력의 저지가 존재하였고 또, 근본적으로는 고종 스스로 정치력에서의 문제가 존재하였다.고종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외세의 도움을 요청하여 외국 군대의 군사력을 동원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이 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된 후에도 러시아와 미국 등의 외세를 끌어들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고종의 정치력의 배후에는 언제나 외세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후 을미사변 직후에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고종이 많은 정치세력과 백성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또 다른 원인으로는, 고종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주관을 들 수 있겠다. 1863년 즉위 이후 계속된 제왕교육을 통해 고종은 자신 나름대로의 군주관을 형성했다고 보여지는데, 고종의 군주관, 그 중심에는 ‘군부론’과 ‘군사론’이 있었다. 군부론과 군사론은 군주가 곧 백성의 어버이이자 스승이라는 군사부일체를 완성시키는 논리체제였다. 군부론에서 군주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백성을 친 자식처럼 돌봐야 하는 존재였고, 이에 대가로 백성들로부터 부모를 향한 절대적인 효가 전환된 형태인 충을 요구하며 군주권의 정통성 확보와 안정적 수행을 보장받으려 했다. 여기에 만백성을 바르게 교화하고 인도해야 할 스승과 같은 존재인 군주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고종 스스로 군부와 군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한 것임을 한탄하는 모습을 종종 찾아 볼 수 있으며, 갑오개혁 이후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군사와 군부로써 그 역할을 적극 수행해 나갈 것이며, 백성들은 이를 전적으로 따르고 백성 된 도리를 다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고종에게 있어서 군부론과 군사론은 스스로의 정치력에 있어서 그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행했다고 보여 진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군주관을 통해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려야만할 존재로만 파악했기 때문에, 백성의 정치 참여와 협조가 군주권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고 백성에게 군주를 따르고 충성으로 효를 다하는 신민으로써의 역할만을 기대하였다. 때문에 고종은 백성들을 믿지 못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890년대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심해진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등으로 자신의 군주권의 위협을 느끼면서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하였다.1890년대 이후 고종은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교육 방침을 제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여 군주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였다. 고종은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군주권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고 결과적으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법으로 정해 황제로서의 절대적인 전제권을 공고히 하였다.대한제국에 대한 평가 역시 고종에 대해서 만큼이나 양극으로 갈리고 있는 실정이나, 이는 대한제국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고종의 근대화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고, 고종의 자신의 군주권을 황제로써 확대하려는 단순한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고종의 의도와 가까웠는지는 이후의 고종의 행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종은 대한제국의 선포 후 국가기구의 권한을 의정부보다는 왕실의 궁내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더구나 국가기구의 통합성을 저해하고 있었던 것은 인사문제에서 더 극심했다. 의정부의 고위 관료는 고종의 의향에 따라 빈번히 교체되고 많은 경우 측근 인물 10여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맡았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회전문 인사’였던 셈이다.또한, 고종은 국가 운영 중에서도 군사력의 증진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는 단적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광무개혁을 단행하는 와중에 국가 재정의 40%를 군사력 강화에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에도 고종은 국민군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고종은 여전히 왕과 국가에 충성하는 용병제를 고집하였는데, 이는 국민군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의 일정한 권한을 주어야했기 때문이다. 이는 강력한 군주권을 우선시하였던 고종으로서는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인문/어학| 2016.03.22| 3페이지| 1,5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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