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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압구정거리 조사
    의류학탐색의류학 탐색 과제를 받고서는 처음으로 어디에 갈까 예린이와 함께 많은 고민을 했다. 명동, 홍대, 동대문은 너무 흔하기도 하고 많이 가본 곳이라 좀 더 특별한 곳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은 압구정 이였는데, 압구정도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흔한 곳 이였지만, 나와 예림이 모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선택 하게 되었다. 제일 큰 실수는 아무런 조사 없이 방문했다는 것이 나에겐 크나큰 실수였다. 아무 조사 없이 덩그러니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갔을 때는 생각보다 휑했다.왼편 사진처럼 로데오 거리는 사람도 없고 길거리에는 패션을 알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잘못 선택 한 것일까 하고 후회할 즈음에 의류 매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명브랜드들도 많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름 없는 옷가게가 더욱더 요즘 트랜드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명 브랜드보다는 일반 옷가게를 더 자세히 본 것 같다.오른편 사진을 보면 핑크색으로 전체 매장을 꾸며 무채색으로 어두운 로데오 거리에서 혼자 돋보이는 효과를 가졌다. 이 브랜드는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없어서 일반가게라고 만 생각 했던 곳이다. 이 브랜드는 영국 브랜드이며 유명한 런던의 군복에서 유래된 와펜들과 빈티지한 뱃지들이 부착된 가방을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스타일과 귀여운 디자인에 패셔니스타들은 열광하기에 이르렀고, 곧 PAUL’S BOUTIQUE라는 브랜드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유니크에 포커스를 맞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살리기 위해 가방에 달린 와펜의 디자인은 다양함을 보여주며 판매 또한 영국의 유명 편집&브랜드의 일부매장에서만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장을 자주 볼 수 없는 것 같다. 대체로 매장들이 무채색인 반면 핑크색으로 눈에 딱 보이게 디자인해서 눈도 가고 젊은 느낌이 난다.왼쪽 사진은 엄청 나게 큰 매장을 전부 사용하고 있어서 처음 듣지만 매우 유명한 브랜드처럼 보였다. 외관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속에 전시된 것들과 배치가 딱 봐도 비싸보여서 부담스러웠다. ‘아 내가 모르는 브랜드가 생각 보다 많구나’ 라는 생각과 반성하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리누이에 관한 정보는 연예인들이 자주 매는 백팩이라는 것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방 이 유명한지 가방만 나왔고, 해외 브랜드인지 국내 런칭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만 나왔다. 우리가 운이 좋게도 때마침 압구정에 이번 4월에 입점 한 것이였다.위에 사진에 나온 매장의 디자인이 매우 특이한데, 간판에 이름조차 없어서 특이했다. 매장 유리창엔 매우 큰 사진이 붙어있었고, 일반 옷가게 치고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눈길이 갔다..그 외의 로데오 거리에 있는 일부 매장들 사진이다. 로데오 거리는 명동이나 홍대 쪽 가보다가 봤을 때 조금 실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생각보다 작아서 한시간만에 같은 곳을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것 같다.안목 높이려고 간 것도 있고 보고서 쓰려고 간 의미도 있는데, 로데오 거리는 둘 다 채우지 못한 느낌 이였다. 우리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압구정역 바로 앞에 현대백화점이 있는 것을 알고 그곳도 들려보기로 했다. 집 앞 현대백화점 자주 갔지만 혹시나 하고 들른 곳은 명품들이 있어서 놀라웠다. 처음 현대백화점에 가면 바로 샤넬과 루이비통 전시가 있었다. 이런 명품들은 타임스퀘어에서만 한번 봤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줄서 있어서 부담스러워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었다. 인터넷 외에 매장과 진짜를 처음 보는 경험 이였다.여기서는 타임스퀘어와 반대로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밖에서만 매장 구경을 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매장들이 대부분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사진 찍기도 곤란 하였다. 사진을 찍다가 찍으면 안 된다는 소리도 들으면서 우리는 사진을 찍어댔던 것 같다.1층 중앙에는 다른 백화점들과 마찬가지로 화장품들을 팔았고 그 테두리에 명품들이 즐비했고 샤넬은 딱 봐도 샤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비통은 생각한 것과 달랐고, 프라다나 나머지는 생각보다 그 브랜드의 특징이 없었던 것 같다.1층에 있던 명품들이 2층에도 또 있었고 2층에 디자이너들의 옷들도 팔고 있었다. 이상봉 디자이너 작품도 있었는데, 이상봉은 한글디자인이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생각과 다르게 한글 디자인 제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옷들이 생각보다 이상봉디자이너 작품이라는 특징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 옆 일본 디자이너 isseymiyake는 딱 봐도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옷 하나같이 주름이 잡혀있어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사회과학| 2012.11.04| 5페이지| 1,000원| 조회(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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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코스테, 크로커다일 브랜드조사
    브랜드 요약“캐주얼 엘레강스의 상징인 라코스테는 유명한 테니스 챔피언 르네 라코스테가 1933년에 설립한 의류브랜드입니다. 라코스테는 여성, 남성, 아동을 위한 독특하고 창의적인 제품군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의류, 신발, 향수, 가죽제품, 안경, 시계, 주얼리, 홈웨어, 라코스테 브랜드는 전 세계 114개국에서 유통되고 있으며, 직영매장, 백화점, 그리고 엄선된 유통 네트워크를 통해 매 초마다 2개의 라코스테 제품이 팔리고 있습니다. 총 매출액이 40억 유로를 초과하여 이중 90%가 자국인 프랑스가 아닌 해외에서 판매된 것입니다. 2008년 4월부터 미셸 라코스테가 LACOSTE S.A의 화장을 크리스토프 셰뉘 (Christophe Chenut)가 CEO를 맡고 있습니다. 드방레는 라코스테의 의류 및 가죽제품에 대한 전 세계 라이선스를 보유한 파트너사로 2009년 6월부터 호세 루이스 두란 (Jose-Luis Duran)이 경영하고 있으며, LACOSTE S.A는 드방레 지분의 10%를 보유하고 있습니다.브랜드의 발전“설립 이래 7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라코스테는 우아함과 편안함을 결합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성장하였습니다. 오늘날 라코스테의 생활 예술은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신발, 향수, 가죽제품, 안경, 벨트, 시계, 홈웨어, 주얼리 등 폭넓은 컬렉션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스포츠 분야와 일상 용품분야에서 자리매김 한 라코스테의 성공은 진정성과 능률성 품격이라는 기본 가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악어는 테니스 챔피언인 르네 라코스테, 그리고 골프 챔피언인 아내 시몬느와 딸 캐서린의 스타일을 구현하고 있습니다.”폴로셔츠의 탄생1920년대 말, 르네 라코스테는 자신의 경기에서 입을 통기성 좋은 면 소재의 유니폼을 디자인했습니다. 착용감이 좋고 땀 흡수가 잘 되어 미국 테니스 코트의 열기를 이겨내기에 용이한 셔츠였습니다, 당시 무겁고 두꺼운 소재의 긴 소매 시트 셔츠를 입어왔던 테니스 선수들에게 이는 일대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라코스테사가 선보인 첫 번째 셔츠는 당시의 옷들보다 전체적으로 약간 짧고 반소매에 리브드 칼라가 있는 흰색 셔츠였습니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이 소재가 바로 라코스테의 상징인 “저지 쁘띠 피케” 원단입니다. 1933년 라코스테는 거물 의류제조업자 앙드레 질리에 (Andre Gillier)와 함께 동업을 시작, 악어 로고가 새겨져 있는 폴로셔츠의 대량생산을 개시하였고 이로써 라코스테 L.12.12가 탄생 되었습니다. L.12.12는 라코스테의 제품번호로, L은 라코스테, 1은 쁘띠 피케 면 소재, 2는 짧은 소매 디자인을 의미하며(긴소매인 경우 1312), 뒤의 12는 르네 라코스테에게 부여된 버전 번호입니다. 이로써 라코스테는 로고를 옷의 바깥 면에 새겨 넣은 최초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악어로고의 기원“라코스테의 악어로고 기원은 1923년 프랑스의 테니스 르네 라코스테 (Rene Lacoste)와 데이비스컵 대회의 프랑스 대표 팀 주장 알란 무어 (Allan H. Muhr)가 한 내기에서 시작됩니다. 프랑스 대표 팀 주장은 만약 라코스테가 프랑스 대표 팀의 중요한 경기에서 승라 히면 악어가죽 가방을 선물해주기로 약속하고, 사연을 들은 기자가 Boston Evening Transcript 신문에 기사를 내며 라코스테에게 ‘악어(crocodile)’라는 별명을 최초로 지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인들은 경기에서 결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악어라는 별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닉네임이 되었습니다. 그 뒤 라코스테의 친구인 삽화가 르베르 조루주 (Rovert George)는 라코스테가 경기장에서 입는 블레이저 상의에 자수로 악어 그림을 수놓아 중ㅆ습니다. 라코스테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경영/경제| 2012.11.04| 8페이지| 1,000원| 조회(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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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류학탐색 앞으로의 미래생각하기
    의류학 탐색제가 의류학과를 지원하게 된 제일 첫 발걸음은 전문계 고등학교로 진학 한 것 이였습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패션 쪽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중3때 전문계 특별전형을 노리고 전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과도 제가 지원한 학교에 있는 5개 과중에서 ‘섬유패션디자인학과’가 단순히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1지망으로 썼고 그렇게 저는 패션디자인학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처음엔 패션 쪽에 관심도 없고 어려웠기 때문에 하기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서양의복구성이라는 실습에서 바느질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제가 손바느질을 해야 했고 재봉틀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는 중학교 때 컴퓨터그래픽스 자격증도 따고 재봉틀도 사용한 적이 있어서 너무나도 잘했고 수준차이가 났습니다. 선생님은 옆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매번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부러워 저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직접 재봉틀 학원을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친구들 몰래 재봉틀 학원을 다녔습니다. 학교 끝나면 매일 같이 학원으로 달려가 소심했던 제가 아줌마들 틈에서 재봉틀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다니자 저도 모르게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과마다 과와 관련된 동아리가 있었는데, 저희 과에는 염색동아리와 기능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능반은 기능대회를 나가는 동아리라서 실력이 부족 했던 저는 염색동아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한 결과인지 과 선생님께서는 제게 꼼꼼하고 이해하는 속도가 빠르다며 기능반을 들어오라 권유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들어가고 싶었던 기능반에 들었고 이 또한 의류학과를 지원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저는 그렇게 선생님의 권유로 학원을 포기하고 기능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기능반은 쉬는 날 없이 밤 9시까지 남아서 옷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대회가 다가오면 밤10까지 남아야했고 방학도 없었습니다. 매일 남아서 연습해야 하는 일상에 무척이나 힘들었고 내신 성적도 떨어지자 좌절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능반은 실력을 많이 향상 시켜주었고 지원도 많이 해줘서 일본대학에도 갔다 오는 등 많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특히 대회에 출전한 것이 많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한때 애들 보다 잘한다는 실력만 믿고 많은 자만을 했었고 처음 나간 대회에서 저는 저의 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정말 저에게 이렇게 와 닿을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단지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잘하는 ‘아이’일 뿐 이였습니다. 많이 연습했다고 생각하고 나간 대회에서 실력차이를 경험하자 많은 좌절과 함께 포기도 생각했었습니다. 국가대표 김연아 선수가 손쉽게 메달을 따는 것을 보고 생각 없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김연아의 연습시간을 듣고 포기를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10만 시간의 법칙을 듣고 저는 그 시간의 10분의 1도 하지 않고 안 된다고 포기하려 한 제가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번 바깥세상을 한 개구리였고 저의 연습시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기에 다시 도전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 번째 대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상이 목적이 아닌 경험을 위해 혼자서 나갔고 생각지도 못했던 장려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전 정신을 쌓아준 기능반은 저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대회에서 대상을 탄 사람은 대학생 이였는데, 서울여대에도 이렇게 의류학과에 관련된 동아리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의류학과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은 친구들이 선생님보다 저에게 더 기대어 묻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반장 활동도 좋았고 과대표에 출전한 것도 좋았습니다. 이 경험들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긴 하였지만 저는 반의 일원으로서 친구들을 가르치고 도우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기능반에 들어가 배우면서 다른 친구들보다 이해력과 실력이 좋아졌습니다. 실력이 좋아진 후부터는 친구들이 계속해서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뿌듯함이 있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친구들을 가르쳐주느라 제 진도가 느려졌어도 좋았습니다. 매시간 모르는 친구들을 도와줬는데 하루는 제가 학교대표로 홍보하러 나가 실습수업을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제가 없어서 선생님한테 계속 물어보느라 선생님이 힘들어하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힘들어하셔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저에게 그만큼 의지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친구들을 가르치고 의지가 되는 패션과 선생님이 꿈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한 방법들을 조사하였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발이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 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서울여대에 들어왔고 서울여대가 교직이수가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서울여대에서 교직이수를 하기 위해서는 2학년 2학기까지 전공은 4과목 이상, 교직은 2과목이상(각 평균평점이 80점 이상) 이수한 학생이여야 하며 의류학과에서는 5명 뽑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학점이 중요한데, 저는 이미 다른 친구들보다 미리 배웠기 때문에 제가 못하고 잘하는 과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중간고사 때 배웠다고 생각해 조금 쉽게 봤던 것 같습니다. 배웠다고 우습게보고 너무 공부를 안했던 저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알고 있다고 배웠다고 자만하지 않고 처음 배운다고 하고 차근차근 공부하려고 합니다. 또한 만약 교직이수를 했다고 해도 꼭 선생님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여러 분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하는 과목을 학점을 잘 못할 꺼라 생각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꼭 필요할 것을 알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입니다.또한 교직이수만 한다고 해서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제가 패션과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하면 제일 먼저 충고해주는 것이 학생 수가 줄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을 안 뽑는다는 것 이였습니다. 물론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선생님이기는 하나, 욕심이 많은 것인지 저는 패턴사도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일 인기 많은 직종인 디자이너, MD도 해보고 싶고 일반 브랜드에 취직도 해보고 싶습니다.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알지만 경험을 위해서든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을 위해서 자격증들은 최대한 많이 따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염색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컴퓨터그래픽스 필기를 합격한 상태입니다. 실기를 위하여 현재 교양과목으로 컴퓨터그래픽 수업을 듣고 있고 나중에는 컴퓨터 활용 능력도 따보려고 합니다. 우리 학교에 양장기능사 자격증을 위한 수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일 따보고 싶은 자격증 중 하나입니다.자격증도 중요하지만 의류 분야를 위해서는 안목도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저는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문화생활도 많이 해보면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아침마다 백화점을 돌고 오는 학생을 얘기해주셨을 때 나도 꼭 저렇게 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백화점은 옷사러만 갔었는데, 안목을 위해서는 아이쇼핑도 매우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 시간 나는 틈틈이 문화생활도 즐기고 아이쇼핑도 하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교수님들께서 과제에 쫓겨서 학생들이 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들 하셨는데,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과제 시간은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문화생활을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반 음식점에서 알바하고 있었는데, 나현신 교수님과의 면담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패션이 많이 활성화가 되어있는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류 매장 아르바이트도 하는 것 또한 안목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해볼 생각입니다.
    독후감/창작| 2012.11.04| 4페이지| 1,000원| 조회(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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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여대 패션쇼를 보고
    주제 1 ? 서울여대 패션쇼를 보고패션쇼의 전체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전체적으로 옷벌수와 시간은 적당했다고 생각한다. 딱 지루하지도 않고 적당히 보여줄 수 있는 시간과 간격 이였다고 본다. 또한 각 스테이지 별로 시작과 마무리를 각 스테이지 이미지에 맞게끔 다르게 한 점도 좋았고 스테이지마다 전부 겹치는 이미지 없이 각 스테이지마다 보이고자 하는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줘서 좋았다. 잘한 스테이지와 조금 부족한 스테이지를 섞어 순서를 배열하여 집중도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스테이지 시작 전에 보여준 영상들이 쇼 완성도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쇼의 완성도도 조금 떨어뜨리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피날레가 피날레치고는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쇼 중간에 했던 한국적 이미지를 살려 전통 문양이 들어간 옷들이 있었던 스테이지를 피날레로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든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첫 번째 스테이지는 좋았지만 그 스테이지 마지막 디자인은 뒤에서도 너무 많이 나왔단 것이 아쉬웠다. 전구 달은 옷들에서도 보이고 괜찮은 디자인도 아니였는데 여러 벌 계속 나온 것이 조금 아쉬웠고 남자모델 있는 스테이지도 생각보다 옷을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4번째 Poco A Poco는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는 알겠지만, 디자인적 면으로는 별 다른게 없었다고 생각한다. 제일 생각에 남고 멋있었던 스테이지가 한국적 이미지를 살린 스테이지와 전구를 이용한 스테이지였다. 불빛을 이용했다는 것이 제일 참신했다. 기억에는 남지만 별로였던 스테이지는 아이들 나온 스테이지였다. 재봉질도 별로였고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 또한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7번째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10번째는 독특한 디자인들이였지만 잡지에서 본 것 같은 옷들이 있었다는 점이 아쉬웠다.주제 2 - 나의 미래의 패션쇼고등학교를 디자인고등학교 나와서 패션쇼를 고2학년 때는 과 동아리에서 고3때는 졸업 작품으로 패션쇼를 했었다. 그때 두 번 모두 드레스여서 피날레였는데, 이번에는 한복으로 피날레장식을 해보고 싶다. 항상 모든 패션쇼에서는 드레스 한복 모두 있으면 드레스가 피날레 한다는 것이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한복으로 피날레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독후감/창작| 2012.11.04| 1페이지| 1,000원| 조회(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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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명시 미국시 발표 대본
    1. 안녕하세요. 5주차 발표를 맡은 ~이라고 합니다. 저희 조는 미국의 시를 발표하겠습니다.2.먼저 목차를 보시면 whitman (휘트먼) Emily E.dickinson (에밀리 디킨슨) Robert Frost(로보트 프로스트) sylvia plath (실비아 플라스) edgar allan poe (애드거 앨런 포) 순서로 보겠습니다.3. 제일 먼저 walt whitman 월트 휘트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휘트만은 1819년에 태어나 189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자율시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시인입니다.4. 그럼 휘트먼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휘트먼은 뉴욕주 롱아일랜드 헌팅턴 웨스트 힐즈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9형재 중 2째로 태어났습니다. 휘트먼은 4세 때 브루클린으로 이사하였고, 사업투자 실패로 살집을 전전하였습니다. 휘트먼은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전반적으로 인정 없고 불행한 시절이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가정 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여 인쇄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으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2명의 변호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했고 그 다음으론 롱아일랜드의 주간지 인쇄견습공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며 휘트만은 여기저기에서 인쇄기 및 조판에 대해 배웠습니다. 1835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 신문 편집 등 직업을 여러 번 바꾸었습니다.- 그 후 뉴욕으로 옮겨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 Eagle》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전부터의 염원이던 프리 소일파의 주간신문 《자유민 Freeman》을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민주당 보수파의 공격을 받고 겨우 1년 만에 사임하게 됩니다.-이동안, 휘트만은 지역도서관에 자주 들러서 거리의 변론회에 들어가 극장에 발길을 옮길 다.- 그러나 1888년 재차 중풍이 발작한 후, 1892년 폐렴(肺炎)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5. 휘트먼의 모든 시는 ≪풀잎≫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집 한 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시집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시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가 바로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총 52편으로 되어 있는 장시이지만, 전체 시편에 걸쳐 일관된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뒤가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는 정연한 서술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각 시편은 사실상 독립된 시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ㆍ영혼ㆍ자연ㆍ민주주의ㆍ미국ㆍ미국인에 대한 주제는 전반적으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song of myself는 시가 너무 길어서 저희가 중간생략을 하였습니다. 일단 한번 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에서 자신이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개인주의자임을 밝힙니다. 그에게 개인은 곧 우주이고 신입니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존엄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휘트먼의 가장 긴 시이자 최고 걸작인 <나 자신의 노래>는 바로 존엄하고 신비로운 인간의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를 통해 독자들이 개인으로서의 자아, 다른 인간 속에서의 나 자신, 그리고 세상 만물과 우주 속에서의 나 자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 각 개인이 사소해 보이지만, 개인을 중심으로 한 입장에서 하나의 개인이 또는 하나의 개체가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6. 휘트먼이 시로써 진정 쓰고자 했던 것은 성격의 운율을 이용한 자유시 형식의 미국적인 서사시였습니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 그의작품에는 두양상이 모두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미국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사람이며- '자유시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기도 합니다.- 그는 자비로 출판한 시질 '풀잎'을 내면서, 일상적 인교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부친의 편벽된 고집과 사춘기 이후의 실연사건으로 인하여 한평생을 오로지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1847년 마운틴 홀리요크 여자학원에 입학 하였으나 1년만에 중퇴, 시작에 전념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후 1855년 목사인 찰스 위너즈를 만나 칼뱅주의적 정통주의 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칼뱅주의란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의 사상 및 그 감화를 받은 프로테스탄트주의의 개혁사상을 의미하고 교회적으로는 개혁파 또는 장로파라고 하는 교회조직의 신앙과 신학을 가리킵니다.- 에밀리디킨슨은 생전에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소수의 시인과 지식인들과 꾸준히 서신으로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은둔생활을 지속하면서 가사 일을 끝내고 홀로 자신의 이층방안에 틀어박혀서 시에 자신을 털어놓았고 풍경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무한한 상상과 고뇌와 사랑과 공포를 실어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시와 바꾼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습니다. 그녀는 시를 통하여 사랑과 그 사랑의 단절, 죽음과의 싸움, 영생 또는 불멸에 대한 철저한 모색, 그리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수행해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시에 투사한 점에서 진정한 시인이라고 찬양 됩니다.- 그녀의 천재성이 널리 인정받은 것은 사후, 여동생 라비니아 노크로스 디킨슨(Lavinia nocross Dickinson)이 에밀리의 시를 모아 시집을 낸 후의 일입니다.- 원래 그녀의 시는 당시의 다른 시들과는 많이 달라 생전에는 대중에게 인정 받지 못하였고 겨우 4편의 시만 시집에 쓰였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휘트먼은 시풍이 노래하거나 이야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미지가 간결하게 응축되어 있으며 운율에서나 문법에서나 파격적 인데가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미지즘이나 형이상학적인 시의 유행과 더불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9. 디킨슨이 쓴 시중에서 HOPE IS THE THIN주어 말합니다. 아무리 거칠고 암울한 상황이고, 아무리 어두운 절망일지라도 희망이라는 작은 새를 결코 당혹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이는 희망은 연약한 노래를 부르는 작은 새이지만, 아무리 거센 폭풍이 불어오더라도 결코 그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지요. 약함이 강함을 이겨내는 역설을 작은 새와 폭풍의 이미지를 빌려 노래하고 있습니다.10. 세 번째로 볼 Robert Frost(로버트 프로스트)는 휘트만 이래로 미국 시인의 자리매김 중에서 그이 명성에 있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스트는 1874년생이며 1963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11. 프로스트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로스트는 1874년 샌프라시스코에서 태어났습니다. 11세 때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 소년으로 자라다가 1885년 아버지가 그 곳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및 누이동생 지니와 함께 대륙을 횡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뉴 햄프셔 주 세일럼이라는 마을에 주저앉았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다닌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몇 년을 불안정하게 살았습니다.- 12세가 되기 전까지 공부를 싫어하고 책 읽기를 싫어했던 프로스트는 로렌스 고등학교에 4년간 다니면서 갑자기 공부에 굉장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892년 졸업생 대표이자 학급 시인으로 졸업한 후 다트마우스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문을 충분히 닦았다고 주장하면서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출세 같은 것에는 별로 야심이 없는 듯, 이것저것 밥벌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로렌스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신문 기자 노릇도 했고,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가할 때면 시작(詩作)에 몰두하였고, 1890년 이후에 많은 시를 발표하였으나, 1913년 전에는 단지 몇 편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시대에 너무 앞섰던 것 이였습니다.- 1895년 결혼한 그는 교편을 잡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2년 이상을 그는 로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느끼자 그는 일종의 위안으로 혼자서 시 쓰는 데 더욱 힘쓰게 되었고, 어쩌다가 한 두 편이 팔리기도 하였습니다.- 40세 이후부터 프로스트는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16년 미국 국립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그는 네 차례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40개 이상의 대학 및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1963년 1월 29일 세상을 떠납니다.12. 로버트의 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전체적인 시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버트의 시는 세상 일에 관한 논의의 과정 및 결과인 어떤 잠정적 결말을 보여줍니다.- 또한 대화체 또는 독백체를 사용하여 독자의 정서나 정신을 함께 고조시킵니다.- 그가 체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주제를 강조하지만 뒤에 숨기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로버트의 시는 매우 사실주의적입니다.13. 이번에 볼 시는 the road not taken (가지않는 길)입니다. 이시는 소박한 전원의 정서를 인생의 문제로 승화시킨 서정시입니다. 일단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의 제재는 숲 속에 난 두 갈래의 길이며, 주제는 삶에 대한 희구와 인생행로에 대한 회고입니다. 숲 속에 나타난 두 길은 운명 앞에 나타난 두 갈래의 인생행로와 상호관계를 가지며 펼쳐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시의 원제가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인 것을 보면 자신이 걸어온 길보다는 걷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에 나오는 길은 바로 인생의 길이다. 인간은 동시에 두 길을 갈 수 없으므로, 바로 여기에서 인생의 고뇌와 인간적 한계가 생겨난다.‘ 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처럼 외면적 표현과 내면적 음영(陰影)이 이중적인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 시의 특징입니다. 즉, 외면적으로는 자연풍광인 숲 속을 쉽고 단순하게 노래하고 있으나, 인생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내면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중의적(重義的)으로 표현하었고
    인문/어학| 2012.11.04| 5페이지| 1,000원| 조회(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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