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자유로운 아나키스트 이회영목 차Ⅰ. 서 론..............p.1Ⅱ.이회영의 생애...p.2Ⅲ. 이회영의 항일민족운동과 아나키즘 수용.............p.41) 중국에서의 항일민족운동 .p.42) 아나키즘 수용p.63) 아나키즘을 실천한 항일운동 .............p.84) 이회영의 원대한 꿈, 그리고 좌절.......p.9Ⅳ. 결론...............p.10Ⅴ. 참고문헌........p.11Ⅰ. 서론이회영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한일병합’이라는 시대의 불운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가산을 정리해 독립자금으로 마련한 뒤,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안일한 삶을 포기하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다 바치는 살아간 것이다.그의 활동을 잠시 살펴보자면, 우당 이회영은 1867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이회영은 1867년 4월 21일 서울시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우당이다. 그의 집안 대대로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에서 활동해 온 가문이었으며, 아버지 이유승은 우찬성·행이조판서를 지냈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이회영의 일생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제 1기는 태어나서부터 30세까지의 민족의식의 형성기이며, 제 2기는 1896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로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이고, 제 3기는 1920년 이후 1932년 사망할 때 까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아나키스트로서 활동 했던 시기이다.이회영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다가 이상설, 여준 등과 만나 교우하였고, 그들과 함께 신흥사에서 합숙하면서 수학·역사·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이회영은 이후 이상설 집 서재에서 정치·경제·법률과 동서양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편,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는 데 솔선수범하였다.이토 히로부미가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온 1905년, 이회영은 이상설과 이시영을 찾아가 민영환 등에게 을사보호조약 조인을 저지할 것을 부탁하였다. 한편, 이회영은 협객인 나인영·기산도 등과 모의하여 오적 암살을 꾀하나 실패하였다. 나아가 외부대신 박제순 딸과 조카의 결혼도 파기하고 절교를 통보하도록 하였다.1906년, 이회영은 친상을 당하였으나, 1908년에야 고향에 돌아와 대상을 치르고, 이상설·여준·이동녕·장유순 등과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모의하고 이상설을 서간도 용정에 파견하여 그해 10월 서전의숙을 세우는 것에 동참하였다.이회영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일제의 부당한 조선 침략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한다.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이상설을 추천하고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동을 개시하자 여기에 이회영과 함께 신채호, 김창숙도 참여하였다.1924년 이회영은 김창숙, 신채호, 유자명, 김원봉과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위해 행동조직인 의열단을 후원하는 한편, 이을규, 이정규, 정회암, 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회영은 신흥무관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였다.1925년 이회영은 조카 이규준과 아들 이규학, 이성춘 등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된 행동조직인 다물단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이 조직이 북경 중국 유림에 침투한 일본 고등 밀정 김달하를 암살하면서 위난을 겪게 된다.1929년 이회영은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을규, 정화암, 백정기, 김종진, 오면직, 이달, 엄순봉 등을 북만에 파견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는 한편, 김좌진 장군이 추진하는 ‘재만한족연합회’ 조직에 대거 가담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시도한다.1931년에 만보산 사건과 9월 18일 유조구 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일본 관동군의 중국 만주지방에 대한 침략전쟁인 ‘만주사변’으로 독립운동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자, 상해로 급히 철수하여 그곳에서 이회영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으로 추대됐으나 고사하고 연부역강한 유자명을 회장으로 선임한다. 기관지로는 『남화통신』을 발간한다.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중국인 왕아초 등과 상해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 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한다.흑색공포단은 천진 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했고, 천진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해 그 일부를 파괴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사령관 무토 대장을 암살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이회영은 북행을 결심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연로한 66세였다.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의 발전을 다 지켜보지 못하고, 1913년경 맹보순에게 전보(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해 이시영·이동녕 등을 체포할 목적으로 형사대를 파견했으니 급히 피하라는 것.)를 듣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모두 이상설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피신처로 꼽았으나, 이회영은 이를 거절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조국 광복의 큰 계획을 이룬다면서 빈손에 알맹이 없는 애기만 하면서 북쪽 땅 한 귀퉁이에 모여 있으니 어느 세월에 무슨 기회를 답답하게 앉아 기다린단 말인가? 동지 여러분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몸을 보호하시오. 나는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해오겠소.’이회영은 1913년 봄 국내로 밀입국한 이후 1919년 재망명하기까지 국내 각지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중국 관내 및 만주와 미주 하와이, 일본 등에 산재한 해외 동포들과도 깊은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회영이 국내에 머물던 약 6년간의 활동은 극히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므로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나마 이관직을 통해 알려진 진실 중의 하나는 이회영이 추진한 고종황제 망명 계획이다. ‘한일합방’의 최종 인가자인 고종황제가 해외로 망명하여 합방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증명한다면, 그 폭발성이란 가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한 나라의 황제가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직접 피력하고 광복운동의 전면에 나선다면, 각처에 산재한 독립운동세력의 일치단결은 물론 국내외의 동시 다발적인 무장봉기도 가능해진다. 더욱이 친일파나 기득권 관료들도 명분을 뺏기게 되고, 양반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히 와해되어 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게 뻔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도 12월 고종황제가 밤중에 식혜를 먹은 후 갑자기 복병을 일으켜 괴로워하다가 반시간 만에 서거하고 만 것이다.이회영은 서둘러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2월 베이징으로 재차한 이회영은 이시영과 이동녕을 다시 만났다. 그 당시에는 중국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는 등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기세가 불같이것은 아니다.”라고 술회했다. 즉, 자신이 이러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이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닌 자신이 본래 자유주의적인 자유사상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 이회영이 자신이 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에 대해 직접 술회한 것이 있지만, 나 또한 이회영과 관련된 자료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회영이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의 하에서 자라난 사람 치고는 그의 정신상태, 그 사상 자체가 굉장히 실용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것 같다고 느껴졌다.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이회영은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헌법 기초를 마련할 때, 정부 조직계획을 반대하여,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보황파 라고 오해 받은 적이 있다. 그가 고종망명계획을 세우고, 임시정부 조직에 반대하는 등 그 때문에 보황파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그가 그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즉, 정부 조직 하에서 독립 운동하는 것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각 운동단체들의 자율성이 보장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툼이 많아지고 단합이 어려워진다. 또한 정부가 조직된다면, 지위와 권력 차지를 위해 독립운동가들 간에 다툼이 일어날 것을 이회영은 예견한 것이다.나 또한 이회영처럼 정부 조직보다는 차라리 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해서 목표는 동일하되, 각 운동단체 스타일에 맞게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라보는 이상은 같은데, 그 방법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 내분이 쌓인다면, 오히려 이것은 일제를 도와주고, 일제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이회영의 아나키즘 수용의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유교적 소양도 한몫을 하였다. 이정규는 이회영의 태도를 유교적 소양과 연결하는데, 즉 이회영이 약관 때부터 자유·평등을 주장하면서 신분제도의 불평등을 배척한 것, 관료들의 권위주의와 지배욕을 저주해서 관리가 되는 것을 단념한 것, 또 자기과시를 싫어하고 공명을 바라지 않은 것 등은 공자가 말한 부지불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회영 자신도 유교적 소양 위에서 아나키즘을 수용
교육열 올바로 보기1.「교육열 올바로 보기」 내용 요약「교육열 올바로 보기」에서 저자는 우리의 교육열 현실과 교육열에 대한 정확한 이해, 교육열의 정의, 교육열의 재발견, 교육열 연구의 방향과 한국교육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우리는 교육으로부터 기회가 풍부한 교육, 평등한 교육, 자유를 보장하는 교육을 원한다. 우리는 국민의 교육권과 학습권이 보장되는 교육체제를 원한다. 우리는 교육이 우리의 인격함양과 함께 개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충분히 개발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교육이 건강하고 강인한 체력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한국은 결코 교육기회의 나라가 아니다. 오직 교육이 중복되고 반복되고 낭비되고 있는 나라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교육은 양이 넘치면서도 질적으로 크게 왜곡되어 있고 매우 비효율적이다. 게다가 조기 해외유학, 불법유학에 교육이민까지 적지 않다.우리 사회는 교육열도 높고 교육경쟁도 세계 최고로 치열하고, 교육을 많이 공급하고, 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국제경쟁력은 최하위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사교육비 비중이 세계 최고이다. 그러나 교육투자 효율성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즉, 학업 성취도를 사교육비를 포함한 전체 교육비 투자비와 대비해 비교하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다. 제도교육과 그 소비자들(결국 국민)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점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 국가에 의해 공급·통제되는 교육에서 국가의 관여가 너무 많고 깊숙하여 획일화 되고 소비자의 요구에는 둔감하다. 획일적 평준화 교육의 공급, 교육행정의 비효율, 국가의 교육에 대한 지나친 관여 등은 교육공급의 경직화를 초래할 뿐이다. 즉, 교육제도를 통하여 공급된 교육의 질과 소비자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간의 불일치 현상이 커졌다. 결국 사적교육투자는 한도가 없고, 공적교육투자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입시위주 교육과 맞물려서 사교육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이로써 상에도 문제점이 있다. 바로 교육체제와 경제체제 간의 상치이다. 교육을 지원하기도 하고, 교육받은 인적자원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경제체제는 보다 자유자본주의적인데, 교육체제는 매우 획일적이고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두 체제 간의 불일치는 이 사회에 여러 가지 부작용과 혼란을 낳고 있다.교육을 둘러싼 환경은 다양화되었고, 그 변화는 교육체제에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교육이 다양화되어야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갈등의 표출도 줄어들게 된다. 다양화된 교육체제에서는 어느 정도 각 집단마다 자기들의 교육욕구를 만족시킬 방안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교육체제는 더욱 자유주의화·경쟁체제화·다양화되어 타 체제와의 일관성을 높여야 한다.그렇다면 과연 교육열이란 무엇일까? 교육열은 개념화하기 위해 개념들을 잠깐 정해보자. ①교육열은 중립적인 것이다. ②원인으로서의 교육열과 결과로서의 교육열은 구분되어야 한다. ③결과로서의 교육열이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데는 원인으로서의 교육열에 작용하는 제도적 ·정책적 환경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④ 교육열은 그 생태환경에 따라 가변성과 적응성이 높다. ⑤교육열은 사회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발생되는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려는 형태로 표현된다. ⑥교육열은 학습된 것이며 역사적으로 누적·확산되어 왔다.교육열의 본질적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교육열은 교육을 통한 자녀 성취 욕구 또는 자녀교육 투자동기이다. 교육열은 자녀를 위한 성취욕과 자녀를 통한 성취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교육열은 교육행위에 관한 일상적인 동기체제라고도 한다. 교육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교육을 시키고자하는 동기나 열의를 말한다. 그래서 교육열은 ‘시킴’혹은 ‘유도’의 의도가 강한 것이다. 김영화 외의 연구에서는 교육열은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망과 실제로 교육을 위해 투입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교육열 그 자체는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뿐이라는 점이 확인되어야 한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교육열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과과 도덕주의적 잣대를 버려야 한다. 따라서 교육열을 수용하여 충분히 발휘하도록 유도해 내는 일이 교육 정책 당국자와 교육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육열 생태환경은 열악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정책적 과제는 교육열이 자원화 될 수 있는 교육열 생태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마지막으로 교육열과 그 정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정책에서는 교육정서자본인 교육열을 자원화해야 한다. 교육열에 대한 각종 부정적 인식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교육열은 그 속성상 억제가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제적 교육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교육열 자원화를 위해서는 교육열 정책을 세워야 한다. 교육열 정책 환경이 지금도 수용정책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인식해야한다. 국내 환경뿐만 아니라 세계화와 정보화 역시 교육열 수용정책을 지원하는 쪽으로 환경이 변하고 있다. 교육열 정책을 세우려면, 교육열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불식시켜야 한다. 교육열은 사회악이 아니며, 각종 교육문제의 원인제공자도 아니다. 오히려 교육열은 자원화 가능성을 내포한 무한 에너지이다. 교육열 정책은 분석적·수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열 정책은 기존 교육문제와 정책을 새롭게 보는데서 출발해야한다. 즉, 교육열의 수용과 자원화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최소화하고 자원 활용을 최대화하는 길이기 때문이다.2.「교육열 올바로 보기」 서평「교육열 올바로 보기」에서 저자는 교육이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교육열에 관한 생각을 시작으로 교육열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한 교육열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저자는 교육열을 중립적 개념으로 취급하고 단순한 도식적 논리로부터 탈피하였다. 저자는 교육열을 ‘교육을 통한 자녀 성취 욕구 또는 자녀교육 투자동기’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교육열을 ‘잘람, 해외유학, 출세주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생각이 좀 달라졌다. 저자의 말처럼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세주의 교육관에 대해서 나쁜 것이라는 공통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교육이 개인의 출세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고, 출세 할 수 있는 능력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출세를 해야 하고, 교육이 가능하면 그러한 인재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스스로도 ‘교육열’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강하였다. 언론에서 말하는 대로 ‘과잉 교육열’이 사교육비를 높인다는 등 항상 부정적인 견해만 보아왔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나는 교육열 그 자체를 이해하지 않고, 교육열이 높은 것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특성으로 극성인 학모들에 의한 과잉 교육열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출세주의 교육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출세구조와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교육이 정상적인 출세를 돕는 것을 비난 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에서 명문고, 명문대를 선호하고 그에 따라 출세의 길이 확정되는 구조와 방법이 잘못된 것이 맞다. 다만, 출세를 위해 자식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는 학모의 과열화된 교육열이 문제인 것이다. 다양한 생각을 하고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창의성이 발달할 시기에, 엄청난 양의 학습지를 풀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독서실 또는 학원 강의를 들으러 가는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의 모습이 과연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 자식을 위한 부모라면, 교육소비자로서의 학부모들은 표출하는 문화적 행위를 통해 생태적 환경을 수정·변형시키는 힘을 갖고 있기에 교육부(국가)를 탓하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높은 질의 교육을 요구해야한다. 즉, 단순 입시준비 교육에 국한하지 말고, 자녀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보다 높은 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교육에 적극적으로 참 저자는 우리나라의 교육열 정책이 한국인이 가진 엄청난 교육열을 자원화 할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교육열 억제 정책을 교육열 자원화 정책으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다. 교육열을 수용하는 정책이어야 교육열을 자원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엄청난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 교육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국내 교육제도가 교육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하루 빨리 국내 교육 제도를 다양화·고급화·자유화 시켜야 한다. 또한 교육열에는 그 나름의 속성, 운동법칙, 결합법칙이 있기에 이런 속성과 법칙에 맞도록 교육열 정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국가는 국가주도적·관주도적·획일주의적 통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은 국가의 개입이 매우 심하였고, 그 결과 국가의 요구나 필요만 투입된 구고조정안이나 개혁안 등 실패를 잉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 현상에 개입해야하는 사람은 그 일에 전문가이거나 당사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교육기관과 교육자의 자율성이 높아야지 국가의 간섭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지금까지 나는 교육열 올바로 보기」의 저자의 의견과 주장에 전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교육열 과잉 현상이 교육정책의 책임이 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7·30교육조치의 과외금지조치 등 과거 교육열 억제 정책이 현재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과외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는 억지이다. 저자의 말의 논리를 살펴보면 과거의 과외금지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마치 현재 활성화 되어있는 학습지 산업·방송 과외 등, 기존과외 대체형 신형 과외등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적절치 못한 의견이다. 과외금지조치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학모들은 더욱 질 높은 교육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녀를 명문대로 진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보다 많은 다양한 교것이다.
교육 리더십 이 문서는 나눔글꼴로 작성되었습니다 . 설치하기목차 1 부 . 21 세기와 학교교육 1. 21 세기와 학교교육 2. 포스트모더니즘 등장 3. 21 세기오 학교 교육 방향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5. 학교교육의 방향 2 부 . 학교장 리더십 1. 학교장 리더십 2. 학교장의 변혁적 리더십 3. 학교장 리더십 방향 설정 2 /10목차 3 부 . 교사 리더십 1. 교사리더십의 등장 2. 교사 리더십의 의의 3. 교사 리더십 대상 및 영역 4 부 . 새로운 리더십 이론 1. 변혁적 리더십 2. 카리스마 리더십 3. 문화적 리더십 4. 도덕적 리더십 5. 감성적 리더십 6. 분산적 리더십 3 /10제 1 부 21 세기와 학교교육 4 /101. 21 세기와 학교교육 · 지식기반사회란 ? 지식이 개별 사회주체 및 국민경제 전체의 성과와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를 이루는 사회 . ⇒토지 , 노동 , 자본의 중요성은 낮아지고 지식과 정보를 습득 · 활용 · 창출하는 능력 즉 지식이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되는 사회 . ⇒ 지식의 창출과 확산 , 습득과 활용을 통해 각 영역의 주체들이 혁신능력을 배양하고 이러한 능력이 성장의 기반을 이루는 사회체제 . 1) 지식기반사회의 등장 5 /101. 21 세기와 학교교육 1) 지식기반사회의 등장 6 /10 (1) 지식기반사회 촉진 요인 ⓵세계화 - 1970 년 이후 국가 간 상호의존이 강해지고 , 다국적 기업의 출현→ 자연스럽게 태동됨 . 경제 + 정치 , 문화 , 교육에 신속히 파급되고 있다 . ⓶정보화 - 정보화 수준이 개인과 조직의 생산성과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됨 . 교육방법의 획기적 변화에 기여 ⓷일의 형태와 일의 기회 , 지식내용의 변화 → 교육은 유연성에 대비한 다양성과 창의성개발에 중점 , 팀티칭 , 네트워크적 학습방법 고려 . ⓸지식의 폭발적 증가1. 21 세기와 학교교육 (1) 포스트모더니즘 등장 · 포스트모더니즘 -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으로 보는 경우 (after) 모더니즘의 단절로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 교사가 가르치는 지식과 가치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 .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10 /101. 21 세기와 학교교육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11 /10 (2) 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과정 변화 ·‘ 타일러 모형’에 대한 적절성의 문제 제기 → 포스트모더니즘적 , 구성주의적 관점 에 의한 교육과정 개발은 목표와 결과를 연결 짓는 일관된 체계가 아니라 , 과정 중심적인 것 . 즉 , 알려지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학생과 교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고 의미를 구성해 가야 한다 .1. 21 세기와 학교교육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12 /10 (3)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경영 방향 · 오늘날 청소년들의 다양한 삶의 양식들은 복장 , 노래 , 언어 , 태도 등을 통해 자유롭게 분출 → 세상은 계속해서 포스트모던한 사회로 이행 , 반면에 교사와 학부모들은 여전히 모더니즘적인 사유의 틀로 포스트모던한 청소년들의 형태를 파악 → 상호 불신 ⓵ 포스트모더니즘 교육관 -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진리의 주체임을 확인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허용적인 자세로 세상과 사물을 넓게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 ⓶ 학교교육은 주입식 지식위주 교육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통해 개방적인 자세와 사고력 증진 시키는 교육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1. 21 세기와 학교교육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13 /10 (3)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경영 방향 ⓷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하기 때문에 , 학교경영자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수업활동을 지원 , 조장 , 다양성을 최대한 허용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를 가꾸어야 한다 . ⓸학교경영에 있어서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일반 통행식의 지시 · 명령을 사라져야 하며 , 흑백논리도 지양되어야 한다 .1. 21 세기와 학교교육 4) 포스트모더니즘과 학교교육 변화 14 /10 ~ 에서 ~ 으로 교사중심 지식과 기능 획득 개인적 과제 크게 요구된다 . : 학교장은 학교 내에서 행정 전문가 , 학생을 잘 가르치고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는 교육 전문가 , 민주적 변혁을 지향하는 자 , 여러 기관과의 상호 협력체로서의 학교 대변자 등의 역할이 요구됨 ∴ 관리자가 아닌 , ‘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 .2. 학교장 리더십 1) 학교장 리더십 20 /10 (1) 학교장 리더십의 개념 · 교육리더십 : Sergiovanni 는 협의의 개념 - 교실에서의 교수 · 학습 , 장학과 평가 , 직능 개발 등과 관련한 학교장의 리더십 // 광의의 개념 - 수업조직 , 교육과정 개발 , 수업계획 수립과 관련된 개념 차원 구성요인 하위내용 교육자로서의 리더십 비전제시 학교교육 목표 설정 , 학교특성화 노력 교육활동 개선 지향성 선도적 추진성 학교 교육과정 편성 · 운영 교직원 조직의 전문성 및 효율성 개인적 배려 교사에 대한 이해 , 학생에 대한 이해 성과 기대 평가 및 평가 결과 활용의 적절성 교육성취 및 만족도 행정가로서의 리더십 비전 제시 교육활동을 위한 시설 및 여건의 적절성 선도적 추진성 예산 집행의 효율성과 투명성 학교 밖 인적자원의 활용 개인적 배려 학교조직 내 의사결정의 민주성 인사 관리의 전문성 , 공공성 성과 기대 시설 , 설비 , 재정의 효율성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관계 표 -2 학교장 리더십의 구성요소2. 학교장 리더십 2) 학교장 의 변혁적 리더십 21 /10 (1) Podsakoff et al.(1992) 변혁적 지도성의 특성 제시 ⓵비전 제시 – 다른 사람에게 발전성과 영감을 불러 넣는 것 . ⓶적절한 모델 제시 - 교사들이 따르도록 모범을 보임 ⓷집단의 목표 수용을 촉진 – 교사들 간의 협동을 증진 , 공동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교사를 돕는 것 . ⓸높은 과업수행을 기대 - 수월성 , 질 , 교사의 높은 과업성과에 대한 지도자의 기대를 나타내는 행동 ⓹개별적인 지지를 표현 ⓺지적인 자극2. 학교장 리더십 2) 학교장 의 변혁적 리더십 22 /10 ⇒ 학교조직이 새로운 동 일어나면서 ‘교사’가 교육개혁의 핵심주체라는 인식이 강하게 형성 · 김병찬 (2005) 은 1980 년부터 시작하여 1990 년대에 본격화된 교사 리더십 논의 배경을 ⓵주요 국가에서 추진하던 국가주도 또는 교육행정가 주도의 교육개혁의 한계 ⓶수평적 협력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학교 재구조화 추구 ⓷조직 구성원 모두의 주체적 참여와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 주의의 영향 ⓸리더십은 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구성주의의 인식론의 등장 1) 교사리더십의 등장 27 /103. 교사의 리더십 (1) 교육 리더십 의미 · 교사 리더십이란 ? - 교사가 사명감과 교육 대상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 그리고 미래적인 교육 비전을 가지고 전문적이면서 의욕적으로 교육 활동을 실천 → 학생의 교육적 성장 , 모든 구성원과 교육관련 조직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는 실천적 역량을 의미 . · 리더십은 ‘리더’에게 필요한 능력의 의미 x. → 다양한 입장이나 전문지식 , 기능을 가진 사람이 각각 그 입장과 능력에 기초하여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는 ‘영향력’인 것이다 . ∴ 팔로워들과의 관계에서 우호적 , 자발적 관계를 형성 → 구성원 집단에 활력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기능을 가진 동력 2) 교사리더십의 의미 28 /103. 교사의 리더십 2) 교사리더십의 의미 29 /10 구분 학교장 리더십 교사 리더십 주체 교장 교사 대상 교사 ( 주 ), 학생 , 학부모 , 교육행정기관 , 지역사회 등 학생 ( 주 ), 동료 교사 ( 상하수평 ), 학부모 , 지역사회 등 관계영역 학교경영 , 교육 수업지도 , 생활지도 , 학급 / 조직경영 , 동료교사 관계 , 학부모 관계 특성 management+ relation teaching+ management+ relation 목적 학교 효과 향상 교육의 질적 효과 향상 교사 문화 , 학부모 문화의 변화 관계특성 성인 : 성인 ( 교사 ) 성인 : 학생 ( 미성년 교육수요자 ) 성인 : 동료 ( 성인 ) 성인 : 학부모 ( 성인 교육수요자 ) 표3 카리스마적 권위 , 영감 , 지적 자극 , 개별적 배려 ) ⓶ 카리스마 리더십 - 리더의 특성과 행동에 대한 부하들의 지각에 의해 결정되며 , 부하들의 지각은 리더십이 발휘되는 상황과 부하들 개인의 욕구 및 전체의 욕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 . ‘ 관계적이고 지각적인 것’ 34 /103. 새로운 리더십 이론 35 /10 ※ 카리스마적 리더의 특성 · 카리스마적 리더는 높은 수준의 자신감 ,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 , 영향력에 대한 강한 욕구 , 동기유발 → 구성원들로 하여금 리더의 판단을 신뢰하도록 한다 . · 유능하고 성공적이라는 인상을 타인에게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 →복종의지를 높인다 . · 역할 모델링 (role modeling) · 강한 준거적 권력을 가진 리더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높은 성과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 이러한 목표달성에 헌신하도록 유도 . ·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뿌리 깊은 가치 , 이상 , 열망 등과 집단의 사명에 관련된 이념의 목표를 구체화 . · 구성원들의 자긍심과 성공에 대한 신뢰를 높임 . ⇒ 카리스마적 리더는 집단의 사명과 유관한 동기를 유발하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한다 .3. 새로운 리더십 이론 36 /10 기간 접근방법 강조점 1940~1950 특성론 리더의 능력은 타고난 것 , 리더와 비리더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 1950~1960 행위론 리더십 효과는 리더의 행동과 관련 , 성공적인 리더와 비성공적인 리더는 그들의 리더십 유형에 의해 구별됨 1960~1980 상황적응론 리더는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음 . 상황에는 리더와 부하들의 특성 , 과업의 성격 , 집단 구조 등이 있다 1980 년대 초반 새로운 이론 ( 카리스마 리더십 포함 ) 리더는 새로운 비전을 필요로 한다 . 표 -4 시대별 접근 방법에 따른 리더십 이론3. 새로운 리더십 이론 ⓷ 문화적 리더십 - 도덕적 리더십의 표현형으로 , 학교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다른사람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 공유된 가치의 형태로 구체화되어서 문화로 나타ow}
도산 안창호의 4대 정신과 민족개조론목 차Ⅰ. 서 론.............p.1Ⅱ.안창호의 생애...p.2Ⅲ. 안창호의 민족개조론.........p.41) 민족개조론의 4대 정신.....p.42) 민족개조론 의의와 한계....p.8Ⅳ. 결론...............p.10Ⅴ. 참고문헌........p.11Ⅰ. 서 론도산 안창호(1878-1938)는 조선의 수난기에 태어나, 조선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한 뛰어난 민족 선각자였다. 특히 그는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대내적으로 조선 자체의 정치적 부패·분열의 시대에 존재했다. 게다가 그는 경술국치를 경험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하에 처해지는 현실을 목도하였다.)60평생을 오직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여 몸 바쳤던 도산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다. 첫째, 도산을 일생을 민족 독립 운동에 바친 애국적 정치가로 보는 시각이다. 둘째, 국민 교화와 계몽에 헌신한 성실한 교육자로 보는 시각이다. 셋째, 민족개조사상 등을 제시한 뛰어난 사상가로 보는 시각이다. 넷째,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가졌던 인격적 민족 지도자로 보는 시하였고 그때 여동생인 안신호가 태어났다. 여덟 살까지는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아홉 살에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여 열세 살이 될 때까지 당시 보통 가정처럼 집안일을 도우며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사건은 열한 살이 되던 1888년 부친을 여읜 것이다. 열네 살이 되던 1892년부터 열여섯 살까지 3년 동안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면서 동네 선비인 김현진에게 전통적인 학문인 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년 안창호에게 유일한 계몽자가 되고, 안창호에게 민족주의를 심는데 중요한 영향을 준 몇 살 위 선배인 필대은을 만나게 된다. 필대은은 안창호가 서울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나 독립협회 가입 그리고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추축된다. 1894년, 안창호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청·일 전쟁이 반발하였고,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난 외국 간의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안창호는 필대은과 격렬한 토론을 통해 “외국세력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그리고 안창호는 서울로 올라가 예수교 장로회에서 설립한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한 후 1896년 졸업을 한다. 이 기간 동안 영어와 서양의 선진과학문물을 수학하고 예수교 장로교에 입교하였으며 이때 구세학당이 입교와 동시에 세례를 주었으므로 안창호 역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1896년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온 안창호는 조부의 주선으로 이혜련과 약혼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 여동생 안신호와 약혼자인 이혜련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만민공동회에서의 뛰어난 연설로 대 웅변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3년간 경기·황해·평안 각도를 순회하면서 애국연설과 계몽강연을 하였다.1899년 안창호가 21살이 되던 해, 독립협회는 정부의 명령으로 영구히 문을 닫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에 선임되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1913년 5월 13일에는 1910년 해체되었던 청년학우회를 계승하여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동지를 발기인으로 하는 ‘흥사단’을 창립하였다.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이 주로 상해로 모여들었고 도산 역시 미국에서 상해로 건너 왔다.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6월 28일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대동단결을 강조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성하고 연통제를 만들었다. 또한 7월 13일에는 내무총장 명의로 대한적십자사를 설립하였으며, 8월 23일에는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을 발간했다.1921년 43세 때는 임시정부내각 통일에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여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발기했다. 동년 1월 24일 임시정부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임하고 2월 27일 이동휘·이시영·신익희가 안창호에게 국무총리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한편 2월 18일에는 국내로 귀국할 뜻을 밝힌 이광수를 강력하게 만류하기도 하였다.1922년에는 서울에 수양동우회의 발족을, 평양에는 동우구락부의 설립을 지시하였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 회의가 개최되고 안창호는 대표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결성과 독립운동 근거지인 이상촌 건설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탐사하기도 하였다. 3월 3일에는 미주흥사단의 자금을 지원받아 남경에 1,500평의 땅을 구입하여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안창호사상의 핵심과 정수가 요약되어 있는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작성하여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주인 된 책임의식을 갖고 상호신뢰로 협동할 것을 호소하였다.마흔아홉 살이 되던 1927년에는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연설을 하다가 중요. 또 ‘회개하라’ 하였소. 나는 이 ‘회개’라는 것이 곧 ‘개조’라 생각하오.)도산의 민족개조론의 핵심 정신은 4대 정신으로 말할 수 있다. 도산이 민족개조론에서 주장하는 4대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다. 도산이 무실역행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08년에 창립된 청년학우회 취지서라고 할 수 있는데, 도산은 “우리가 하는 청년운동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숭상해야 한다. 언변보다 실행을, 형용보다도 내용을 준수해야 한다. 그것이 ‘무실역행’이다.”라고 했다. 그 후 1913년 창립 창립당시 도산이 직접 지은 흥사단 약법 2조와 3조에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다.제2조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 하며 덕·체·지 3육을 동맹수련 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제3조 본 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좌와 같은 실무가 있음.1. 무실역행과 충의 용감과 단결의 정신을 고취하여 덕육에 관한 학과를 강습하여 덕성을 기르게 함.2. 유연(柔軟) 병식(兵式) 기계 등 체조와 각종 운동을 연습하여 체육에 관한 학과를 강습하여 기력을 강장케 함.3. 보통 상식을 수양하고 고등학술을 전수하거나 기예를 학습하여 일종 이상의 학술 혹 기계를 해득케 함.도산은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설을 통하여 혹은 서한을 통하여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4대 정신으로 건전한 인격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비록 조선의 현실이 일제강점기 하에 처해있어 일제가 거슬려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표현을 달리 할지라도 쉽고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말로 4대 정신의 실천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민족개조론의 4대정신인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무실(務實)은 힘쓸 무, 열매 실, 참되기를 힘쓰고, 진실 되기를 힘쓰자, 실질에 힘쓰자는 뜻이다. 무실의 반대는 거짓이다. 거짓말 하지 말자 속이지 말자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직실로 반영이 되어 민족의 개조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말로는 조선의 독립을 외치지만, 뒤로는 일제와 타협하고 안일한 상태에서 머물고 싶어 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지적하는 것 같다.)충의(忠義)는 교차 반복을 버리고 표리부동을 버리고 교언영색을 버리고 의리를 지키며 책임감이 있고 신용을 세우자는 것이다. 충의는 忠誠과 信義를 뜻하는 것으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고 한다. 흔히 ‘忠’이라고 하면, ‘忠君愛國’ 혹은 ‘忠孝’의 忠을 연상하여, 봉건적 질서 하에서 家臣의主君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충의 일부에 불과하다. “무실역행을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 곧 忠義의 인물이다. 따라서 무실역행은 곧 충의의 기초가 된다. 도산은 이와 같은 신의를 중요한 자본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약속을 잘 지키고 정직하고 근면한 것은 곧 무실역행의 실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사실 민족주의자들이 처음부터 타협적 민족주의자, 비타협 민족주의자들로 나눠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은 무실역행의 기초가 되는 ‘충의’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충의의 깊이 정도가 그를 투철한 독립운동가로서, 일제 해방을 부르짖는 한 주체로서 나아가게 하거나 또는 일제와 타협하는, 심지어 일본인보다 더 심하게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는 친일파로 만드는 중요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용감(勇敢)은 옳은 일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돌진하며 어려움을 당할 때는 힘차게 견디고 참음을 가리킨다. 나약하고 겁나한 태도를 청산하고 자기성격의 결함과 주위환경의 곤란을 이기고 정복하는 적극적 정성을 기르는 것이다. 용기는 정의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신념에 따라 거리낌이 없이 일관된 삶을 사는 것이 용기다. 도산은 용감의 정신을 순수한 우리말로 “날쌔자”로 표현했다. 이는 동작이 날렵하고 주저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용감은 절대적으로 이었다.
『부르주아 전』을 통해 알아본중간계급의 자세지은이 피터 게이│ 옮긴이 고유경, 『부르주아 전』, 서해문집, 2005목 차Ⅰ. 서 론.............p.1Ⅱ. 부르주아의 욕망 그리고 방어............p.21)부르주아의 섹슈얼리티......p.22)부르주아의 공격성............p.33)부르주아의 불안...............p.4Ⅲ. 빅토리아 시대 정신.........p.5Ⅳ. 결론...............p.5Ⅰ. 서 론이 『부르주아 전』은 문학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 계급의 삶을 다루었는데, 특히 부르주아지의 섹슈얼리티, 공격성, 취향, 사생활에 대한 중간계급의 태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뚜렷한 특징은 부르주아지의 ‘이중성’이다. ‘이중성’은 부르주아지의 섹슈얼리티, 사형제도, 불안,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르주아 그 자체 내에서도 적용된다. 중간 계급이라고 하는 ‘부르주아’는 결코 형평성을 띠는 계급이 아니다. 부르주아 내에서 아주 사소한 차이로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족벌주의, 질투, 뒷공론 등이 만연했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부르주아를 좀 더 세분의 섹슈얼리티의 ‘이중성’의 경우, 슈니츨러 그 자체가 부르주아의 대표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슈니츨러의 일기를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슈니츨러는 숱한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자신이 진정 반한 여성이 처녀성을 갖길 바라면서 ‘남성’인 자신은 그러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의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이렇듯 부르주아지들은 한 계급으로서 ‘동질성’ 보다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19세기 부르주아들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불안이 이 시대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불안은 근대의 질병으로, 19세기인은 불안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일 수도 혹은 현실적일 수도 있었고, 내면의 스트레스 혹은 객관적인 경고 신호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이외에 19세기 부르주아의 또 다른 특징은 ‘예술’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페라, 음악회, 연극, 공공 전시회와 사설 전시회를 찾았다. 이런 장소는 휴식을 취하거나 연애하는 곳, 또는 사업상의 모임을 갖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 경우에서도 부르주아지의 ‘이중성’이 나타나는데, 정신적 즐거움보다 육체적 쾌락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오페라하우스의 2층 발코니 그늘에서 창부들을 찾았다. 그리고 19세기 말까지 진보적 회화와 문학작품보단 감상적이고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한 번만 들어도 쉽게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 또는 매주 모든 문명국에서 발간되는 가정지에 등장하는 판화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부르주아지였다.나는 『부르주아 전』에서 크게 ‘부르주아의 욕망 그리고 방어’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을 위주로 탐구하여, 19세기 부르주아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 책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한계를 서술하고자 한다.Ⅱ. 부르주아의 욕망 그리고 방어1)부르주아의 섹슈얼리티)슈니츨러와 ‘귀여운 아가씨’들의 관계를 보면 그가 소년기의 갈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혹이 생긴다. 그가 그에 대한 집착이 있었겠지만, 특히 슈니츨러는 처녀성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 상대 여성이 처녀성을 이미 잃었다면, 그는 그 상대여성에 분노를 느꼈다. 슈니츨러가 이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직·간접적인 여성비하가 전통적인 이중 도덕을 가진 대다수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이런 뻔뻔한 일면과 달리 슈니츨러는 불쾌한 남성 주인공들을 창조하여 자신의 너무나도 진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풍자할 만큼 복잡 미묘한 인물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뻔뻔한 인기주의자이고 동침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도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도시 남성, 요컨대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잖은 남성은 ‘타락한’여성과 결혼할 수 없다는 당시의 가르침이 신사인 척하는 부르주아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에게 있어서 여성의 순결에 대한 숭배야말로 이중 도덕의 본질적 요소였다.위 글은 처녀성과 관련하여 부르주아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구절이었다. 현 시대에도 슈니츨러와 같은 남성들이 존재한다. 지금은 신분제가 폐지되고, 암묵적으로 평등하다고 하는 이 시대에도 19세기 빅토리아인처럼 이중 도덕을 갖고 여성들을 평가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 성질, 총체적 경험들이 현 시대의 연속선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와 21세기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남성들의 이중 도덕성 이라는 본질적 특성은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그것은 시대적 유산으로 남겨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지은이 피터 게이가 매우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터 게이 스스로도 과거에 대한 시각을 ‘현실’세계와 접목시키려 애썼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내가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부르주아 남성들의 여성의 성 억압 또한 이중 도덕의 본질적 요소였다고 생각 한다.위에서 나타나는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부르주아 혐오자들이었다.)그들은 특히 중간계급의 섹슈얼리티를 비웃었다. 중간계급의 육체적·정신적 파탄이 예절과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르주아 혐오자들이 부르주아에 대한 과장이 심하며, 얼마나 날조와 조롱이 심한지 알 수 있다. 피터 게이는 실제로 성적 선택의 가능성은 훨씬 다양하고 즐거웠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 시대의 많은 부르주아지는 에로스에 대해 당소 당혹감을 느꼈다고 한다. 즉, 한편으로는 교회의 가르침과 문화적 전통을, 다른 한편으로는 유서 깊은 사회적 관습에 대한 회의와 자연스런 욕구의 유혹을 따르려고 애섰다는 것이다.이 주장은 부르주아지의 ‘이중성’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지금 현대인들도 언제나 역할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데, 과거 부르주아지라고 역할 갈등이 없었겠는가. 오랜 옛날부터 ‘종교적 관습’에 얽매여있던 과거 사람들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물질문명인 산업혁명, 인쇄혁명 등등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차지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종교적 관습’ 때문에 언제나 역할 갈등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좀 더 자유개방주의적인 사회로 변해 가는데, ‘부르주아지’가 ‘교회’의 가르침에 얽매이고 있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이중적이게도, ‘교회’의 가르침을 겉으로 지키는 척 하면서, 안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갔다. 이 점을 부르주아 혐오자들은 중간계급의 예절과 침묵이라는 겉모습으로 위장했다고 지적한 것이다.2)부르주아의 공격성)빅토리아 시대는 1859년 찰스 다윈이 획기적인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공격욕은 생래적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되어 왔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계명은 심각한 경쟁자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정치와 산업, 외교와 사회정책에 나타나는 냉혹함을 정당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빈민과 병자, 광인과 노인에 대한 박애주의적 지원은 감상적인 인도주의적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강격한 논객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강대국이나 서로 다른 인종 간의 전쟁은 자연에 들이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의 합리성을 주장하며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가 한 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공격성에 대한 변명이 시작되면서,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 파시즘·나치즘이라는 인종주의가 만연해지고,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을 일으켰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따지고 보면 우생학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결국 부르주아의 공격성에 대한 변명은 20세기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킨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지 않는가 싶다.)어떠한 형태의 공격성이 용인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의들 중에서 사형에 대한 논쟁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옹호론자들을 야만인들보다 못한 존재로 비난했다. 이에 사형옹호론자들은 그들을 남성성을 결여한 나약한 감상주의자들이라고 비꼬았다. 근대 국가는 교수형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 암묵적으로 묵인함으로써 관중의 가장 추악하고 원시적인 공격 본능을 충족시켰다. 디킨스는 교수형을 실업자나 게으른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카니발이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유복한 부르주아나 호기심 많은 귀족들은 사형집행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마차나 방을 임대했다.사형제도는 전형적인 ‘공격성’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권위를 갖게 만드는 제도이다. 사형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가장 선호되었던 것이 흉악한 범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수감을 실험해 본 결과는 수감된 범죄자 중 이전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고되고 있다. 21세기에서도 사형제도와 관련해서 많은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사형제도폐지론자들은 범인도 개인의 인권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권력 하에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형제도 옹호론자들은 19세기 빅토리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질서라는 신성한 계약을 유지하거나 복원할 필요성을 강변했다. 즉 범죄자로부터 궁극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의 죽음은 유일하고도 적절한 대사라는 것이다. 물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