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amestown (Jamestown Settlement)제임스 타운 식민지는 1607년 5월 14일에 지금의 미국 버지니아 식민지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영국 식민지로, 아메리카에서 성공한 첫 번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 식민지이다.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이라고 명명했다.2. History of Jamestown Settlement제임스타운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정부가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였다. 1604년 4월에 설립된 버지니아 회사는 투자 위험 회피에는 관심이 없었다. 런던 회사(후일, 버지니아 회사로 변경)는 굶주림이나 보안관을 피해 온 사람들을 모집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신사 계층의 모험가도 끼어 있었고, 향신 가문의 젊은 자제도 종종 섞여 있었다. 1606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특허장을 하사받은 런던 회사는 신속하고도 과단성 있게 움직여 버지니아로 향할 탐험대를 출범시켰다. 1606년 12월 혹은 1607년 초에 144명이 탄 세 척의 배가 영국을 떠나 1607년 4월 26일 체서피크 만에 닿았다.이 항해에서는 오직 104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들은 체서피크 만에서 제임스 강을 따라 올라갔다. 1607년 그들은 이곳에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이라는 식민지를 지었다.제임스타운의 초기의 삶은 가혹했다. 그 지역은 낮고 습한데다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막강한 인디언 부족의 영역과 맞닿아 있었다. 질병, 해충, 내부반란 만연하였으며 식량과 보급품은 항상 부족해 겨울이면 잔인한 굶주림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1607년 5월 백여 명이던 제임스타운의 주민은 그해 9월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1년 만에 정착인의 70%가 사망하면서 제임스타운은 실패한 전 식민지인 로어노크 식민지의 수순을 밟아가는 듯하였다. 급속도로 인구가 줄어든 데에는 식량 부족이 주원인이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한 남자가 아내를 잡아 먹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존 스미스 대위의 강력한 지휘 아래 정착인들은 인디언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배워 경작, 영국에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제임스타운의 성공은 많은 영국인들이 약 백여년 동안 많은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동남부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타운과 이후 그 근처에 건설된 식민지의 대부분은 북부의 청교도 정착지들과 달리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후에 미국 북부 사람들과 문화적인 마찰을 빚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1. Plymouth colony (New Plymouth, The Old Colony)플리머스 식민지는 1620년부터 1691년까지 북아메리카에 개척된 영국 식민지의 선구 지역이다.플리머스 식민지는 필그림 파더스로 알려진 종교 분리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버지니아 식민지의 제임스타운과 함께 북미 지역에서 설립된 가장 초기의 영국 식민지이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최초로 상당한 규모의 영구 개척지가 되었다. 또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인디언과 가장 초기의 유혈 전쟁이 된 필립 왕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와 합병되었다.플리머스 식민지는 미국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플리머스 시민들은 제임스 타운의 많은 개척자처럼 기업보다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이었다. 식민지 사회 또한 법적 체계는 시민의 믿음에 짜여 진 것이었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과, 또 그것을 둘러싼 사건은 미국의 신화가 된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북아메리카의 전통이 된 플리머스 바위이라는 기념비를 낳았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비교적 단기간에 소멸되었지만, 오늘도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것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 왔다.
헨리필딩 Henry Fielding1. 필딩의 생애헨리 필딩의 생애에서 가장 먼저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가 18세기의 어느 작가보다도 귀족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났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필딩은 웨스트민스터 학교와 더불어 당시의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양대 명문교 중의 하나인 이튼학교에서 열두 살 때부터 열여섯 살까지 수학하였다. 이후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게 될 조지 리틀턴, 윌리엄 피트, 그렌빌 형제 등은 필딩과 이튼 동창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 덕에 그는 철저히 직업 작가로서 궁핍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그럽 스트리트 작가(Grub street)들이 출현한 시대이면서 돈벌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조롱의 대상이었던 이 시대에, 귀족 출신이면서도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했던 직업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필딩의 계급의식과 사회관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그의 모든 작품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필딩의 극작가로서의 경력은 그의 문학적 경력 전체에서도, 18세기 전반 영국의 극장 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정확히 『거지의 오페라』가 대성공을 거둔 1728년부터 극장 공연물에 대한 사전 검열법이 통과된 1737년까지 10년, 즉 18세기 전반 런던 극장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로 활약했다. 특히 그의 이튼 학교 동창생들인 리틀턴, 피트 등이 주축이 되어 권력에서 배제된 휘그들과 볼링브로크를 추종하는 토리들을 아우르는 범야권을 형성하고 1735년~ 37년 시즌에는 그 누구보다 격렬한 반월폴 풍자극을 써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톰 존스』가 출판된 것은 1749년으로, 이시기는 필딩의 생애에서 최고의 전성기로 볼 수 있으나, 반면에 그가 친여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도를 더해오던 그의 적들의 맹렬한 비방과 공격은 그의 성공이 가시화 될수록 더 강력해져, 이 작품은 찬사를 받은 만큼 악의적인 비판도 많이 받았다.필링이 활동한 시대는 거의 모든 문학 작품, 특히 새로 나타난 소설이란 장르는 소위 소설적 주인공의 창조를 통해 그 해담을 나름대로 추구했다.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수완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다이엘 디포우소설 속의 주인공들, 미덕에 대한 사무엘 리처드슨과 헨리필딩의 서로 다른 해석, 조셉 앤드류스나 톰 존스의 타고난 착한 천성과 그들의 모호한 신분의 문제 등은 모두 그 해답 찾기의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조셉과 톰의 경우에서 보듯, 디포우나 리차드슨에 비해 필딩의 소설이 위의 물음들에 대해 훨씬 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또 작가로서 앞서 언급한 그의 특수한 배경과 생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이러한 불확정성은 디포우나 리처드슨 소설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필딩 소설의 트레이드마크인 독특한 화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한 반면 늘 A인지 B인지 나는 결정하지 않겠다 라고 버릇처럼 말하는 저 인상적인 필딩적 화자와 관련이 깊다.2. 주요작품[조지프 앤두르즈](Joseph Andrews. 1741)정식 명칭은 《조지프 앤드루스와 친구 에이브러햄 애덤스의 모험기》인 이 소설은 1742년 출간되었으며 이전까지 희곡만을 쓰던 필딩은 뒤에 평생의 라이벌 소설가가 된 새뮤얼 리처드슨의 《패밀러 Pamela》(1740)에 크게 자극되어 작품을 쓰게 된다. 《패밀러》에서 전형적으로 구현된 중산층의 미덕인 ‘분별력’을 비판하기 위해서 필딩은 패러디 《섀밀러》를 이용해 그 분별력 속에 숨겨진 위선과 허영을 폭로했으며 이 같은 반 리처드슨적 태도는 필딩의 첫 소설인 《조지프 앤드루프》에서도 이어지게 된다. 이 소설은 처음엔 《패밀러》에 대한 패러디로 시작했지만 필딩 나름의 소설관과 도덕적 가치를 나타낸 독자적인 소설이 된다. 이 소설에서 필딩은 악덕을 폭로함과 동시에 바람직한 덕목을 제시한다.대략적인 내용은 주인공 조지프는 신분이 높은 부비 부인 밑에서 일을 하다가 그 부인의 유혹을 받자 이를 거절하여 해고되고, 옛 친구인 애덤스 목사와 함께 도중에 갖은 일을 겪으며 고향에 돌아가 애인 파니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며 조지프는 리처드슨의 소설의 여주인공 'Pamela'의 남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자서(自序)에서 이 작품을 '산문에 의한 희극적 서사시'라 선언했는데, 작품내에서 '우스꽝스러움'을 다루면서 리처드슨의 비극적인 주제 및 분위기와는 반대로 유쾌한 희극으로 방향을 설정한다. 그는 우스꽝스러움은 ‘짐짓 꾸밈‘에서 나오고 그것은 또 ’허영’과 ‘위선’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허영과 위선을 들추어 내는 자신의 작업을 오거스턴 시대의 풍자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는다.[톰조운즈](Tom Jones)《 톰 존스》가 출간된 1749년에는 소설 장르가 형성중인 시기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칭도 확립되지 않았다. 필딩은 확립되지 않은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18권으로 구성 된 『톰 존스』의 각 권 마다, 맨 처음의 챕터는 작가 자신이 본 이 장르의 이론을 규정 내지 피력하고 있다. 자기 소설이 만들어진 과정과 방식을 밝힌다는 것은 이전의 디포우나 리처드슨과는 다른 생각이었고, 필딩 자신 역시 자신의 작품이 허구임을 공공연히 밝히며 새로운 장르의 규칙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고 밝힘으로 써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 를 시도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또한 톰 조운즈에서 필딩의 기법은 상당부분이 극작의 경험에서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유의 기법으로서는 무대소도구에 해당되는 사소한 물건을 이야기 전개에 이용하는 기법이라든가.,빈번한 추격장면이 되풀이되는 추격의 모티프, 의사영웅체(mock-heroism)의 사용, 시간의 처리 기법 등을 사용했다.필딩은 사물이나 행동은 그것이 놓이는 맥락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며, 따라서 여러 맥락들을 폭넓게 숙고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 때문에 ‘사실’에 집착하기 보다는 음미하고 반추한다. 이런 필딩 소설의 특징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작가를 대변하는 작중 화자이다. 필딩 소설의 트레이드마크와 도 같은 이 자의식적인 화자 (Self-conscious narrator)는 독자와 동반자가 되어서 끊임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인물과 이야기들에 대해 논평한다. 따라서 독자는 작중 어느 인물보다도 화자를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필딩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비유들 중 맨 첫 번째 비유에서 소설을 음식, 소설가는 음식점 주인, 독자는 고객에 비유하고, 중요한 것은 음식재료가 아니라 그 조리법이라고 말하며 기법의 중요성을 일치감치 강조하면서 그의 예술관과 그 속에 함축된 진지한 도덕적 관심을 표했다. 이외에도 작가는 독자가 통상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모습을 보인다든지, 독자가 납득할 수 없는 궤변을 늘어 놓아 독자의 신뢰성을 잃는 아이러니를 농하는 등, 다양한 효용을 선보이고 있다.
0. 고대영어 (Old English)(1) 영국으로 향한 사람들450년 로마군대가 영국에서 철수 하고 난 후, 영국에 있던 켈트인은 이 곳 저곳 에서 온 침략자에 의해 흡수되거나 살해되었다. 그 침략자들인 게르만족 앵글인과 네덜란드 북부와 독일의 서부 늪지대에 살며 영어와 가까운 방언을 사용하는 프리슬란트인은 영국으로 들어가서 토착민인 켈트인을 쫓아냈다.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두 집단과 이들과 친척관계인 북부유럽의 또 다른 두 집단인 색슨인과 주트인 역시 영국으로 향했다. 이 4개의 집단들은 영국에서 서로 다른 지역에 정착했으며, 언어에 있어서 변형을 일으켰고 그 변형들 중 일부는 영국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색슨인은 그 뒤 에도 유럽대륙 까지 계속 번영했지만, 앵글인과 주트인은 사라져버렸다. 앵글 인이 사라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는 잉글랜드로 알려지고 그 언어는 잉글리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왜 그리하였는지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이들은 사실상 문맹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시기는 암흑시대라고 할 수 있다.(2) 고대영어켈트인은 매우 문명화 되고 세련된 민족이었다. 수돗물이나 중앙난방 같은 문명의 혜택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계속되는 수많은 침략자들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로마인은 367년 켈트인은 최소한 1000년 있었음에도 이들은 남겨놓은 것이 거의 없다. 영국의 여러 지명이 켈트 어나 로마 어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서도 일상의 어휘만 놓고 따진다면 , 로마인이 남긴 단어는 다섯 개뿐이고 켈트인 역시 스무 개도 안 되는 단어를 남겼다. 이런 갖가지 결핍 속에서도 새로 정착한 앵글로색슨인들은 가능성이 풍부한 언어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언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더해지자 언어는 놀라운 속도로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영국은 유럽 어느 곳 못지않게 뛰어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고대 영어에는 일곱 가지의 강변화동사와 세 가지 약변화 동사가 있었으며 형용사와 대명사의 굴절도 다양했다. 정관사의 성도 여러 개였으며 형용사의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문법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고대영어는 고대영어의 철자와 발음차이를 잠깐만 익혀도 현대 영어 사용자가 여느 고대 영어 텍스트의 상당 부분을 읽을 만큼 현대영어와 차이가 많지 않다. 오히려 음가 면에서는 고대영어가 더 간단하기도 하다. 즉 고대영어에는 상당한 미묘함과 유연성이 있었고, 이러한 특징을 발판삼아서 문화적 개화를 했다.(3)바이킹 침략과 영어의 풍요이러한 문화적 부흥이 시작되자마자, 영국과 겨우 발전을 시작한 영어는 바이킹 침략자들에게 또 공격을 당했다. ‘노르인’ 이나 ‘데인인’ 으로 불리는 이들 바이킹들은 850년 템스강을 , 거슬러 올라와서 영국과 몇 년 동안 전투를 했으며 878년 영국측의 승리로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데인로’ 선이 그어지면서 북쪽은 데인인, 남부는 잉글랜드 인이 영국의 지배권을 나눠 갖게 되었다. 북쪽을 지배하게 된 데인인은 영국 북부에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북부지역에서 어떤 지역은 고대영어만 쓴 반면 바로옆지역인데도 고대 스칸디나비아 어만 쓰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하지만 이 두 언어는 곧 완만한 합병에 들어갔다. 고대영어에서 스칸디나비아 어중 상당수가 채택되어서 영어의 풍부함을 더해줬으며, 다양한 동의어들도 창출해 냈다. 단어뿐만이 아니다. 영어는 스칸디나비아어의 특정한 문법 형식을 채택하기도 했다.2. 중세영어 (Middle English)0. 노르만인의 정착1066년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바이킹들인 노르만인이 영국으로 향했다. 이들 노르만인 들은 프랑스에 정착한 후에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상상이 프랑스 적인 것으로 변했었는데 사실상 표준 프랑스 어 라기보다는 방언에 가까운 언어였고 그래서 노르만 프랑스 어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노르만인이 영국에 뿌리를 내리자 더욱 두드려 졌다. 후에 이 언어는 영어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 줬으며 영어의 생존에도 기여를 했다. 노르만 인의 정착 후 헨리 4세 이전의 왕들은 모두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평민들은 계속 영어를 사용했으며, 통치자가 비 영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즉 이 시기에 귀족계급은 프랑스어를, 농민계급은 영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분열상은 지금의 영어에도 남아있는데 평범한 직업들은 앵글로색슨 식 이름이고, 좀 더 숙련된 직업은 프랑스식 이름인 것이 그 예 이다. 이처럼 노르만 프랑스 어가 계속 사용되면서 영어는 아무런 공식적인 지위도 없이 300년 넘게 표류하였으며 동시에 영어 사용에서의 지역적 용법의 차이만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