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지은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출판사 : 소담출판사책이름 : 모래의 여자지은이 : 아베 코보출판사 : 민음사글자수 : 3846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모래의 여자 비교와 대조부제 : 비선택적 희망과 고통의 상관관계'당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갑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이런 질문을 접하면, 뜬구름 잡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이렇게 되묻곤 한다." 나는 혹시 이런 질문과 마주볼 자신이 없어, 실현이 힘든 목표를 잡고 그것을 달성하며죽을 때가지 질문에 대한 답하기를 유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내가 주위 지인들에게 저런 질문을 한다면, 먹고 살만하니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거라며 핀잔만 받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회피하고 주변만 맴돈다.들끓는 사랑에, 더러운 운명이라 욕하는 사회에, 쳇바퀴 돌 듯 무너져 내려오는 인생 앞에서, 모두 다, 무너지고, 쓰러지며, 다시 한 번 추스르는 과정을 겪게 된다.그 때야말로, 자신의 존재이유와 삶의 방향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게 마련이다. 이 때, 실존의 상황으로 가면서 스스로를 격리시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스로 본질의 ‘나’를 찾기 위해 사막으로 가야 할까?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돌고 돌아 결국, 그 곳까지 이르면서 본질을 찾아가는 걸까?원래, 스님과 수도승처럼, 세계의 흐름과 단절되어 내면에 집중을 하면 본질을 찾게 된다는 것이 정론이다. 그러나, 적어도 ‘모래의 여자에서’ 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만큼은 이 정론은 크게 벗어난다. 결국 그들이 원한 것은, 본질을 찾는 고고한 삶도, 실존하느냐, 실재하느냐 따위의 철학적 의문의 해결도 아니었다. 두 작품 모두, 실상 주인공들이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받아들이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실존과 실체의 미묘한 막 사이에서, 그들 모두 무너지고 쓰러져, 그들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운 것이다.모래구덩이 속 집이 한 채, 독일 시골 어느 한 마을, 그 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한 여자는 붙잡는 사람이고 한 남자는 붙잡힌 사람이다. 붙잡는 여자는 모래에, 결혼에 잡혀 있다. 여자는 혼자가 힘들어, 사랑에 기대어, 남자를 붙잡는다. 그 두 커플 모두, 심연의 괴로움에 잠겨있다. 여자는 괴로운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데 나오지 않고, 남자는 나올 수 없는데 끝없이 나가려 한다. 여기 있으면 저기 가고 싶고, 저기 있으면 여기 오고 싶다. 여자는 '여기'도 '저기'도 별 수 없다는 걸 안다. 남자는 '여기'보다 '저기'가 더 보람되다고 믿는다. 자기가 '여기에 있어야 할 명분’을 알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절망적인 사랑의 존재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끝없이 파고들기에, 탈출을 단념할 수 없다. 몸부림만 계속될 뿐 그들은 여전히 모래 아래 낮은 곳에서 밀려오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퍼낸다.짐승 같은 여자, 점 같은 마음, 지극히 냉소적인 인물, 당연하게도 가족을 모두 다 잃으면서, 인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대면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함정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 받는 여자, 사랑 받음으로써 우위에 서는 여자, 갈망의 존재가 되는 여자, 그녀 또한, 그에게 권총을 건네주는 넓은 아량을 베풀 만큼 냉정한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다.회의적인 남자, 지극히 열정적인 인물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남자는 안간힘을 쓰면서 여자를 달래고, 협박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마치 베르테르가 사랑이라는 지독히도 행복하지만,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듯이, 하지만 언제나 그들의 노력은 제자리이다.정상에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과 모래여자의 모래처럼, 그들 역시 탈출을 해서 은총을 입으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 도시에서도 그에게 특별한 자유란 없었기에, 단지 반항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일 뿐이다. 여기서의 반항은 단지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의 반항이다. 모래의 남자처럼, 쉽게 순응하지 않고, 끝없는 탈출시도를 하거나, 베르테르처럼 주위의 시선과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간접적 저항인 자살을 통해서 자기 감정의 중요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말이다.“납득이 안 갔어 어차피 인생이란 거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그들의 모습이 유독 안타깝고 슬프게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누구나 하나씩 저마다의 형태로 이루어진 돌이나 모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자처럼 숙명으로 알고 고통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처럼 발버둥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여자가 거기에서 살고 남자가 거기에 가게 된 이유, 인간이 저마다의 돌을 짊어지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래는 이렇게 예정되었으니 어떤 행동을 하든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사고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지나서 결국 부메랑처럼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납득이야 안 가지만, '여기' 를 떠나 '저기' 로 가면 회한이 남고 '여기' 남아 '저기'에 가지 못하면 갈망이 남는다. '인간은 각자 타인에게 통용되지 않는 신조를 갖고' 사는데,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각각의 방법으로, 포기하며, 타협하고, 결국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현실일지라도.두 작품이 이렇듯 묘한 거리를 두고, 같은 맥락을 걸어가지만, 분명 큰 차이는 존재한다. 두 작품의 여자들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삶과 인간에 대한 의문투성이로 혼돈을 헤매었을 것이다. 여자는 모래를 파내면서, 사랑에 괴로워하면서, 인간의 숙명과 삶의 부조리에 눈을 떴다. 희망이 없는 노동, 감정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아니, 그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기에 묵묵히 순응할 뿐이다.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두 작품이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이유는 바로 주인공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때문이다. 삶의 비극적 숙명에 눈을 떠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남자는 결국에는 도망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는 늪에 빠지고 울부짖는다. 베르테르의 사랑이 그리도 미어지는 것 또한, 그의 의식이 깨어있기에, 끝없이 갈구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아직도,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살아가는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알 수 없을 그것은, 나와 세상의 괴리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만큼 세상의 압박은 더 해갈 것이기 때문이다.그 괴리의 끝에서, 베르테르는 최후의 통첩으로 자살을 택했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이용했던 그는 진정 이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남자는 포기와 순응을 거쳐, 그것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 곳에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새로운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살아갈 것이다.비록 세상이 그들에게 존재할 공간을 허락하지 않아 거리로 혹은 그보다 못한 곳으로 떠돌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살면서 그 상처는 깊어지고 또 다른 상처가 덧씌워진다. 아무도 그 연속되는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에 있으면서 밖을 동경하고, 밖에서는 안을 동경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세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