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근대화론의 안경 벗기기 - 허수열의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1. 식민지근대화론과 허수열의 문제 제기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논쟁은 점차 ‘숫자’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통계에 입각한 실증적 연구 성과를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로 내세우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GDP(국내총생산), 1인당 GDP 등 국민경제 관련 지표들이 시대상을 읽는 도구로 주목받은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낙성대 연구소를 필두로 수량경제사적 분석방법을 도입하여 한국 경제의 장기적 변화를 연구해왔다.본 책의 저자인 허수열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치열하게 공방을 펼쳐왔다.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은 『개발 없는 개발』(2005) 이후 식민지근대화론 측에서 제기된 비판 중에서 농업부문과 관련된 것을 반비판할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결과로 말하자면 여전히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이 타당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 경제 변화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은 U자형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 곡선의 역사상 위에 조선후기에 대해서는 조선 스스로 몰락했다는 ‘조선후기 위기론’과, 일제의 개발이 해방 후 한국경제 발전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는 ‘일제시대 개발론’이 있다.일제 초기가 문제되는 이유는, 일제 초기 조선은 농업 생산이 압도적이었고, 식민지근대화론에서 말하는 U자 곡선의 제일 바닥에 해당한다. 이 바닥이 침식될수록, 즉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을 과소평가할수록, 조선의 위기나 일제의 개발이 뚜렷해진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은 해방 후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데에 주력해온 한국 역사학계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부당한 지배를 인정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그런데 허수열은 이들의 연구에서 1910~17년의 기간에 실증상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농업 생산이 가장 압도적인 시기에 농업에 대한 통계가 부실했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일제시대 GDP에 대한 추계에서는 이런 통계상의 문제를 충분히 에 따라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허수열은 오로지 일본인들에 의한 개발만 보이는 안경을 벗기고자 한다.2. 1910년대 김제·만경 평야와 벽골제 논란이영훈은 조정래의 을 ‘광기의 소설’이라고 공개 비판하면서, 소설의 주 무대인 김제·만경평야가 오늘날의 비옥한 평야지대가 된 이유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들과 수리조합의 개간 사업을 들었다. 이 곳은 수리시설이 없는 황무지였을 뿐이었고, 1910년 이후에야 곡창지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사에서 벽골제를 저수지로 보느냐 방조제로 보느냐는 큰 차이가 생긴다. 벽골제는 AD 330년 축조된 한국 最古의 저수지라는 것이 通說-축조연대와 위치에는 의문이 있다.-이다. 벽골제가 저수지였다면 그 아래의 평탄지는 관개되는 沃野일 것이고, 만약 방조제였다면 그 지역은 갯벌이나 갈대밭이 된다. 따라서 허수열은 방조제설에 대해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며 정면으로 반박한다. 먼저 , , , 등의 기록을 통해, 벽골제가 큰 저수지로 축조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반면 벽골제에 관련한 실록 기사 중 유일하게 이영훈이 언급한 것은 의 김제군 기록이다. “역이 1이니 내재요, 옛 큰 방죽은 벽골제이다.[신라 흘해왕 21년에 비로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800보이다. 본조 태종 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뜨렸다.]”라는 글이다. 단 한 줄의 기사로 다른 기사들을 가리는 이영훈의 주장은 힘이 실리기가 어렵다. 즉 벽골제 안팎이라고 할 만한 기사들을 뒤집을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허수열은 발굴 조사와 실측 자료를 통해 토목공학적 관점, 해안수리학적 관점에서의 방조제설을, 기후 변화 연구들을 토대로 재반박하고 있다. 방조제설은 평균해수면이 현재보다 높았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기존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보았을 때 현재보다 벽골제 인근 해역의 평균해수면이 더 높았다고 하기 어렵다. 허수열은 옛 문헌에 벽골제가 저수지로 축조되었다는 것과, 광대한 면적의 수전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살림살이가 윤택해진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그러나 허수열이 제시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김제·만경 평야는 저기복성 평탄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농경에 유리하기도 하지만, 농업용수 조달이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고대 이래 수원개발을 위한 노력이 되풀이되어온 지역이었고, 벽골제는 그 상징적인 존재다. 벽골제에 대한 통설은 여전히 유효하나, 벽골제가 저수지 기능을 제대로 한 것은 “지난 1700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의 기간에 벽골제는 제방의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내려왔다.” 조정래가 묘사하는 정도의 풍요로운 지대는 아니었으나, 이영훈처럼 사실상 불모지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매우 자의적이다.3. 토지 개량과 개량 농법.허수열이 보기에 식민지근대화론의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에 대한 견해 역시 재래적인 농업발전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인에 의한 농업개발을 과대평가하는 조선왕조 위기론과 일제시대 개발론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의 농업생산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고 본다. 여기서 허수열은 농업생산에서 1910~17년간을 문제 삼고 강조한다.허수열은 농업생산량 증대에 고려해야 할 요인은 많지만 일단 재배면적 확대와 단보당 생산량 증가를 위주로 본다. 재배면적과 농업 기반 시설 변화를 살핀다. 토지 개량은 관개 개선, 지목변환, 개간·간척 등으로 분류된다. 이중 개간과 간척의 대부분은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기록이 잘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증대된 면적은 조선 전체 경지 면적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지목 변환-대부분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것에 있어, 1918년까지의 통계는 없으나 1919년까지 이루어진 누계가 4천 정보 남짓으로 1936년 누계된 약 6만 정보에 비하면 규모가 협소하다. 관개 면적을 확인할 때는, 제언·보 수축 사업 상황을 토대로 1918년까지는 재래의 제언·보를 원래 기능대로 회복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한다.조선총독부 의 든 개간과 지목변환에 의한 수도작 재배면적 증가는 1910년대와 맞지 않아 기각했다. 유세지 통계는 조선왕조시대 과세기준이 되므로 의미 있지만, 정확도가 문제된다. 토지조사사업 기간에 경지면적이 2배가 뛰었다는 것은 그 부정확을 의미하기도 한다.허수열은 이와 함께 우량품종 보급, 비료투입 증가 등 개량농법 보급이 농업생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다룬다. 관개면적 확대나 비료투입 증가는 1910~17년간보다는 1918년 이후, 특히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는 1920년 이후에 크게 증가한다. 그러므로 여러 요인들 중 1910~17년간에 다른 기간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 것은 우량품종 재배면적이 사실상 유일한 것이다. 과연 우량품종 보급 확대로 농업생산이 급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 때 분석의 기본 자료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이다. 그런데 동일한 자료를 놓고도 허수열은 정체를, 식민지근대화론은 급증을 확인한다. 이는 자료 해석 차이에 기인한다. 단지 수량적 방법으로 무장했다고 해서, 꼭 객관이나 합리와 가깝지는 않은 듯하다.아무튼 식민지근대화론은 우량품종과 재래품종 재배지의 단보당 생산량의 차이를 품종 자체의 생산성 차이로 해석한다. 그런데 허수열은 간단히 반문한다. 가령 우량품종 재배지가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거나 개량농법 도입이 활발한 곳의 경우라면? 품종 격차 이외의 다른 요인이 충분히 격차를 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미곡 단보당 생산량 추이에서 1914~29년만 떼어 보면, 단보당 생산량은 0.8~1.0석 사이에서 변한다. 이는 회귀선을 넣어도 추세적 증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결국 문제시되는 1910~14년의 4개 연도를 포함해야만 미미한 증가를 말할 수 있게 된다.4. 농업 생산성의 장기적 변화허수열은 일제 초 농업생산의 변화를 조선후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장기간의 변화 속에서 고찰하여,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관이 조선왕조 시대 말기 농업의 양상과 일제 농업 개발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끝에 그 귀결이 낙년과 논쟁이 있었다. 김낙년은 소작인 수입이 동일(경쟁에 의한 평준화)하다고, 허수열은 소작료율 동일이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여기서 허수열은 자신이 ‘일본인과 조선인 소유 논의 생산성 격차가 5배가 된다는’ 가정을 세웠던 것에 대해 논리적 오류를 시인한다. 일본인 소유 실제면적보다 그 소유 경지면적이 2~3배가량 넓다는 것은 그 소유지의 가치-토지생산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때 민족 단보당 생산량을 보면 비율상 5배 차이가 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수열이 보기에 이는 자신의 해석이 잘못되었을 뿐 추계는 틀리지 않았고, 그렇다면 논 가격 격차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고 고친다. 토지생산성은 그보다 낮겠지만, 정량화 방법은 마땅치 않다. 그래서 라는 조선 식산은행의 자료를 통해, 김낙년은 일본인 토지 생산성을 조선인 것에 비해 28.5% 높고, 허수열은 같은 방식이더라도 전제를 소작료율 일정으로 놓아 격차는 2배인 57%가 난다고 본다.두락당 생산량 중에서 지주가 수취하는 비율이 일정하다면 두락당 지대량 자료에서 생산량 추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지대율이 일정하여도 지세와 종자를 누가 부담하고 짚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지주가 수취하는 몫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가면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執粗法이라는 소작방법이 보급된다. 수확 이전에 지주 혹은 그 대리인이 소작인과 더불어 수확량을 예상하고, 그 중에서 1/3은 지주가 차지하고 2/3은 소작인이 차지하는 방법이 보통이다. 이 경우 지세와 종자는 소작인이 부담한다. 轉嫁가 있으므로 실질적 수취 몫이 늘어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주가 추수기에 기록되는 두락당 지대량은 감소하게 마련이다.19세기 중엽 이후 집조 혹은 정조법으로 지대 수취방법이 전라·경상 지역에서 광범하게 변하여, 19세기 말이 되면 검견과 정조가 압도적이 된다. 한편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총독부는 납세의무자를 명확히 하고자 토지소유자가 납세하도록 제도를 변경시켜갔다.
0. 김성칠과 『역사 앞에서』김성칠은 1913년부터 1951년까지 불과 39년의 생애를 살다갔다. 그의 약력을 대강 살펴보면, 일제하에서 대구고보를 다니다 동맹휴학 사건으로 1년간 구금되었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식민지 엘리트들이 선망하는 직장으로 꼽히던 조선금융조합에 입사해 이사가 되었으며, 1942년 서른 살에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농업, 농촌 사회 문제의 역사적 기원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짧은 삶의 기간에도, 수많은 번역과 저술, 기고를 남긴 총명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1946년 그가 정리한 는 6만 부가 넘게 팔린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다.지금 우리에게 김성칠은 의 저자로 회자된다. 여기에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2월부터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4월, 고향 영천에서 괴한에 피습당해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 쓰인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1993년 처음 출간되었고, 2009년 정병준의 해제와 교주를 추가한 개정판이 나왔다. 정병준은 이 책을 두고 “일기라는 사적 기록의 형식을 취했지만, 저자가 역사가로서의 소명 의식을 자각하고 쓴 공적 기록이자 일종의 사론, 사설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적는다. 김성칠은 6.25가 터졌음에도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일기에는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전쟁 발발, 인민군 점령 하의 생활상, 국군 수복 전후의 좌우 갈등이 충실히 적혀 있다. 이 기록은 중간파 지식인의 비판적 인식과 사회사 연구 등으로 그 가치를 넓혀갔다.1. 개인의 일기 기록김성칠의 일기에는 시국에 대한 걱정이 녹아있지만, 대체로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이 있다. 먼저, 내용에 앞서 일기라는 형식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일기를 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우리가 당시의 현실을 언어에 갇힌 정지된 이미지만으로 조우하지 않게 한다. 일기 기록이 갖는 일차적인 의의라 하겠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 기록은 그 자체로 주어진 특성을 갖게 마련이다. 주관적이고 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성칠은 시대와 자신의 주변 인물에 대하여 그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다. 결국 이는 시대상의 한 단면일 따름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사건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한 시대의 증언이자, 역사적 유물이다. 『역사 앞에서』를 읽을 때에는 이에 대한 이해가 수반될 필요가 있다.커다란 사회의 흐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 개인의 궤적은, 역사에 입체적인 부피감을 덧칠하는 것쯤으로 생각된다. 보고 들은 일을 매일 같이 진중하게 적어 내려온 김성칠의 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신중한 관점을 보유하고 있다. 작자뿐만이 아니라 그가 만나는 다양한 시대정신들을 관망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정말로 거기 있는 느낌을 받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과 개인이 맺는 관계망을 본다. 적재되어 온 하루하루의 상들은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는 김성칠의 일기가 비단 민족의 비극을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한 삶의 결을 겹쳐보는 데서 오는 감동이 더 크다.[2] 김성칠이 자기 개인의 기록을 역사 기록으로 인지한 것은 역사학도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문 문투보다 한글을 더 잘 쓰려 했던 때문인지 글이 둥글둥글하다. 신경림을 인용하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모두가 너무 아무렇게나 살고 함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도 하게 된다. 지금은 어떤가. 즉각적인 단상의 공유가 매우 활발하다. 표현하기는 쉽고 빠르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감은 모자란 편이다. 순간적인 짧은 의견들이 도배가 되는 인터넷 세계를 생각하면, 새삼 숙연해진다.2. 해방 공간과 6.25 전쟁 : 중간파 김성칠[1] 해방 후의 삶 해방 공간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결정적으로 터져 나온 공간이다. 물론 그 이전-대략 3.1 운동부터 그 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좌우좋게 분류하고 가르는 것은 오독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더 풀어서 말하면, 김성칠의 관점에서의 평가이므로 어떤 인물이나 시대상의 평가가 적절하고 동의할 만하다는 것은 아니고, 김성칠의 일기를 읽듯 역사는 깊이, 세밀하게 읽는 과정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역사를 어느 쪽으로 왜곡하느냐보다, 역사를 생각하는 분량 자체가 적다. 역사를 진영 논리의 근거로 끌어다 써먹고, 인식 자체는 공백이다. 대선을 맞아 ‘역사 인식’ 운운하는 것이 우습다.김성칠은 해방 후 금융조합연합회 본부과장에 임명되어 12월에 서울로 올라간다. 본 책에 묶인 일기는 이 무렵부터 남아있는 것이다. 김성칠은 이 간부직을 기꺼이 여기지는 않았다. “구회장 이하 일인 간부 환시하에서 다시 미인의 사령을 받게 되니 얼굴에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다”거나, “이 변란통을 이용해서 좀더 좋은 자리를 하나 얻어둘 양으로 분주하는 여러 사람들의 틈에 나도 한몫 끼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고 썼다. 그런데 이전에 이미 식민지 최고의 직장 중의 하나였던 금융조합에 취직하여 성을 다해 다니지 않았는가 해서 헷갈린다. 현실적 조건이며 유순한 성품에 그러했겠거니 한다.해방 후의 동향을 볼 때, 김성칠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 꽤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립분자라는 단어가 종종 나온다만,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좌우 이념 대립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단지 학구에만 안온하기에는 사회적, 시대적 요구가 너무 거대하지 않았나 하여 ‘실천적’이지 못한다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할 수도 있으나, 나 역시 그러한 이념 갈등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심정적으로는 그 입장을 이해하였다. 그가 자신의 본분을 알고 어설프게 나서지 않음을 택한 것은 그 같은 성품으로서는 그러한 자극적인 선동에 금세 스러졌을 것이다. 합리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참 지난하다. 전쟁을 거치면서 스스로 무기력이란까지의 일기는 김성칠의 일상 가운데 추렸으므로 온건한 민족주의와 사상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의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 그저 학구라는 온실에만 갇혀있었다 하기엔 그 또한 실학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고 계몽적인 성향도 있어 저술과 번역, 교육을 일로 삼은 듯하다. 1950년 새해를 맞은 그의 맹세 가운데 몇 개 적는다.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제 잘한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붓 끝에 올리지 말 일. 남의 잘못, 학설의 그릇됨을 타내지 말고 제 바른 행동과 제 깊은 공부로써 이를 휩싸버릴 것. 사소한 일이라도 먼 앞날을 헤아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생각해서 말하고 행할 일.” 역사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남기는 흔적을 허투루 하지 않음인가보다.[2] 한국 전쟁의 기록 『역사 앞에서』의 핵심은 1950년 6월부터 12월까지의 기간이다. 김성칠은 북침을 명백하게 여겼지만, 이에 대응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도 불신했다. 전쟁은 민족의 운명을 예측불허의 상태로 끌고 갔다. 6월 26일 일기에서는 “은은히 울려오는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괴뢰군에 대한 비방과 욕설로 가득 찬 지면을 대하니 내일이나 모레쯤은 이 신문의 같은 지면이 괴뢰군에 대한 찬사와 아부로 가득 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었다”고 적는다. 전쟁 상황에서 양심은 사라지고, 불합리에서 오는 불편을 견뎌야 했다.6월 27일은 대통령 이승만이 국회에 알리지도 않은 채 피란길에 올랐다. 국무총리 신성모는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갔다는 발표를 번복했다. 김성칠은 전쟁에 대해 파악하기를 “동기로써 보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니, 그들은 피차에 서로 남침과 북벌을 위하여 그 가냘픈 주먹을 들먹이고 있지 아니하였는가. …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인민을 채찍질하여 밤낮으로 침공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고, 하나는 큰소리만 뻥뻥 하였을 뿐 사실은 침략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도 게을리 하였었고, 또 한편의 종주국은 졸개야 어느 지경에 가든 한번 씨름해보라고 무책임한 지령을 내렸고, 한편안재홍, 조소앙 같은 중립파들은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 듣기 좋았다고 기록한다.6월 28일 김성칠은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이를 본다. 서울대 깃대에는 인공국기가 걸렸다. 김성칠의 일기에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그가 당면한 인민재판, 식량 문제, 의용군 강제 모집, 토지개혁, 노동법령, 선거, 서울대의 변화 등의 일상이 안타까운 어조로 정리되어 있다. 7월 11일 기록에 따르면 쌀값은 전쟁 전보다 5배가 폭등했고, 북한은 서울시민이 굶주리는 이유가 피난 가는 한국정부가 비축식량을 한강물에 버렸기 때문이라고 선전했다. 한편 그는 공산주의 선전 방식에 대해 “든가 든가 하는 문구들은 어떠할까.” 하며, 보다 인간적인 이상을 생각한다. 그에게 같은 것들은 과도하게 치우쳤고 삭막했다.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사람들 마음에 숨겨진 극단적인 본능까지도 건드렸다. 7월 초 김성칠은 자신의 복숭아나무를 훔쳐본 청년들이 주인을 반동으로 몰아 내쫓으면 그만이라는 대화를 엿듣고는 두려움에 질려했다. 그는 친한 친구들을 잃고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면서 더욱 예민해졌다. 그리고 7월 중순, 미군의 폭격이 본격화되었다. 김성칠은 시민들이 외려 폭격에 희망을 품는 것 같다고 평했다. 북한의 점령 정책에 대한 반감이 컸다. 김성칠은 미군과 한국인이 싸움을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가 더욱 슬프다”고 탄식한다. 그에게는 이념에 따라 사람을 가르지 않고, 민족 전체에 대한 애정이 있다.김성칠은 유엔군의 반격이 임박하였을 때 몸을 숨겼다. 그는 대한민국에 충성하지도 인민공화국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홀로 전전긍긍했다. 반동분자로 찍힐까 비슬비슬 두려워했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게 될 수도 있었다. 그에게 희망은 유엔군 4만 명이 증강되어 온다는 소식이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인민군 1개 소대 16명이 그의 집에 머물렀다. 강경에서 차출된 의용군들은 2주 훈해했다.
《소송》과《법 앞에서》를 통하여 본 인간의 실존의식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악몽과 부조리를 연상케 하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일의적인 해석을 용인하지 않아 종종 출구 없는 미궁에 비유된다. 그런데 이러한 출구 부재의 답답한 환경은 곧 카프카의 인물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짤막한 아포리즘의 기록들을 들춰보면, 그는 우리의 실존을 입구의 빛도 출구의 빛도 보이지 않는 터널의 한가운데 멈춰 버린 기차 승객의 상황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소송》에서 요제프 K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체포”됨으로써 지루한 소송의 터널에 던져진다.소송은 K의 현실적 삶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새로는 갑작스레 비합리적인 세계가 잠입한다. 그는 실체를 명료히 알 수 없는 법원과의 대결에 나서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러나 K는 제대로 대처할 힘이 없다. 소송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고 결국은 유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성격의 것이었다. 요제프 K가 겪는 좌절과 불안은 죽음 이외에는 별다른 출구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완전함에서 기인하는 필연적인 운명인 셈이었다. 따라서 소송의 최종 판결에 따른 K의 죽음은 “개 같군!”이라는 그의 탄식으로 요약되고 만다.한편 그의 죽음은 “대성당에서” 만난 한 교도소 신부가 들려주는 어느 문지기의 우화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카프카는 자기 문학의 테마를 짤막한 이야기로 압축시켜 놓은 경우가 많은데, 《소송》에서는 ‘문지기 전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이다. 《법 앞에서》 자체는 소설보다 먼저 독립적으로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해서, 반드시 《소송》과 관련지어 해석되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 작품의 문맥에 놓고 보았을 때, 그 텍스트는 비유담의 성격을 띠며 병치하여 볼 가치를 지닌다. 소설과 가까워지는 ‘점근선’을 그리는 연필과 같다.시골에서 먼 길을 걸어온 남자는 '법'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런데 힘센 문지기가 그를 저지하며,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말한다. 문지기는 농담하듯 문 안으로 들어가 보라 권하면서도, 문을 통과할수록 더욱 강한 문지기들이 있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시골남자는 뇌물도 써보고 문지기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문지기의 옷깃에 붙어 있는 벼룩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한다. 시골남자는 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긴 세월을 보내다, 어느 날 법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를 보고 나서 결국 임종을 맞이한다. 마지막 순간 시골남자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어째서 저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은 것인가요?”/“여기는 당신 말고는 아무에게도 입장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입구는 당신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종국적으로 그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골 남자를 포함한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는 요제프 K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상은 카프카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자기 자신과의 대결, 그 실존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로 점철된다. 그들의 길은 ‘간과할 수도 그러나 극복될 수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어진 삶이다. 둘의 구조적 유사성을 더 찾아보면, 문지기는 익명의 관료 조직의 말단에 대응하고 더 힘센 문지기들이 있다는 것도 법원의 무한한 계층 질서와도 맞닿는 부분으로 보인다. 시골 남자의 수단을 가리지 않은 노력은 K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헛되이 발버둥치는 것과 비슷하다. 시골 남자는 K처럼 소용없는 수단들만 동원했던 것이다.나아가 문지기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서는, 요제프 K가 행한 익명의 관료기구에 대한 저항 방법과 그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신부는 K에게 “당신은 남의 도움을 너무 많이 구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그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님을 꼬집는다. 이는 스스로에게서 불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인간에 대한 책망이다.) 그의 목에 칼이 닿기 직전, K는 창문을 여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K는 아직 도움이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내지 못한 반대 변론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그를 향해 손을 쭉 뻗어보지만, 그것은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K는 자살의 의무를 느꼈으면서도 그 죽음마저 타에 의한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었다.우화에 대한 해석에서 요제프 K와 신부는 입장을 달리한다. K는 권력의 희생자라는 개인적 감정을 시골 남자에 투영해서 문지기가 그를 기만해 법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본다. 반면, 신부는 법에 고용되었더라도 그 내부를 모르는 문지기는 그 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본다. ‘아무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을 보낸 남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답은 제시되지 않으며, 이 우화는 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저 결과만이 부각된다. 본 작품의 서술자가 요제프 K가 체포되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한 것처럼 말이다. 시골 남자는 빠져나올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고, 그는 ‘들어가려고 시도는 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순응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K도 마찬가지로 변한다.요제프 K는 ‘진정한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계속해서 법원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시도했지만, 파악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각성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면, 카프카가 이 작품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인 것이다. 요제프 K는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그로테스크하고 연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최종 판결이 무슨 죄목으로 비롯된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시골 남자가 닿고자 했던 ‘법’이 무엇인가를 알려는 것만큼 요제프 K의 죄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찾는 시도는 수없이 이루어져왔지만, 일면적이고 불충분한 설명에 그친다. 다만 그 죄가 원천적이라는 성질은 파악이 가능한데, 그것은 카프카가 “죄와 상관없이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이 유죄”라고 적은 것에서 자명해진다.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빌리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 대가를 지불하는, 실존에 대응하는 태도에 따라 누군가는 서른한 번째 생일의 아침의 광채를 볼 수도 있다. 즉 주어진 죄가 파악할 수 없이 절대적이라면, 그에 따른 구속에서도 죽음 말고 다른 갈등 해소의 길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인간은 팔을 걷어붙이고 “자기 속에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지속적인 확실성을 지녀야 한다”). “곧 만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속하려고 한다면 개개인은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법원 화가 티토렐리는 K에게 ‘무죄만을 믿고 의존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경우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요제프 K에게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검은 옷을 입고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앉아있을 때였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 그리고 일과 날고대 그리스 서사(敍事) 시인, 헤시오도스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에게 신(神)을 만들어준 것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라 하였다. 호메로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그만큼 손에 꼽히는 시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스러운 호메로스와 달리,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배경과 환경에 대하여 스스로 진술해놓은 것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소아시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그리스 식민시인 퀴메 출신으로, 해상 무역에 실패하여 그리스 본토 중부 보이오티아 지방의 아스크라에 정착한다. 폐쇄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농민 기질은 헤시오도스의 성격은 물론 그의 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헤시오도스가 ‘낭랑한 노래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어린 시절의 그가 목동 시절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 헤시오도스가 헬리콘 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무사 여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시인의 지팡이와 목소리를 주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서 개최된 암피다마스를 위한 장례식 경기(競技)에서 우승하고 받은 세발솥을 무사 여신들에게 바친다. 아마 헤시오도스는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들에게서 시와 수사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헤시오도스는 농사를 짓지 않고 방랑하던 부류는 아니었다. 나이가 든 헤시오도스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작은 농토를 갈아 힘겹게 생계를 유지했다. 지주들의 세계와는 먼 소농의 삶은 퍽퍽한 것이었고, 헤시오도스 또한 그러한 생활을 찬양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그리스에 문자가 보급된 지 약 50년이 지난 기원전 70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헤시오도스의 시들 중 첫 번째 서사시는 후일 신통기 라는 제목이 붙여진다. 신통기 는 신들의 계보(系譜)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기술한 것이며, 또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기도 하다. 반면, 일과 날 은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을 그린다. 이는 황금시대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으로, 교훈시로서 헬레니즘·로마 시대를 보 및 신들과 인간의 교접을 중심으로, 복잡한 그리스 신화를 간결하게 조직화한 것이다.원초에 카오스가 있다. 카오스는 뒤에 생겨날 우주가 들어갈 빈 공간이다. 그 다음에 생긴 것은 가이아(대지)이다. 세 번째는 에로스였다. 카오스에서 에레보스(어둠)와 닉스(밤)가 생겨나, 이들이 교합하여 헤메라(낮)과 아이테르(허공)을 낳았으니, 에로스는 창조적인 원동력이다. 가이아는 우라노스(하늘)와 우로스(산)와 폰토스(바다)를 탄생시킨다. 가이아가 우라노스, 또 폰토스와도 교합하고, 그 자식들은 또 그들끼리 교합하여 우주는 계속해서 생성을 거듭한다. 그리고 우라노스가 우주 최초의 통치자가 된다. 우라노스의 잔혹한 학대 행위로 인해,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의 티탄 신족은 반란을 일으킨다. 막내인 크로노스가 제 아버지를 거세(去勢)하면서, 티탄 신족은 우주의 통치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뒤이어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의 막내아들 제우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힘을 모아 그들을 제압한다. 곧, 제3대인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족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시 중간에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회향풀 줄기 속에 불을 훔쳐갔고, 제우스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헤파이스토스에게 여자를 만들게 한다. 여기서는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최초의 여자는 일과 날 에서 판도라로 부른다. 뒤이어 올림포스 여러 신의 자손인 여신들이 인간과의 교접으로 부족과 신 같은 자식, 영웅들이 나타나는 경과를 묘사하고, 헤시오도스는 무사 여신에게 “여인들의 무리에 관해” 노래하기를 청하며 끝을 맺는다. 이는 여인들의 목록 의 서두(序頭)로 본다.종합하면, 헤시오도스는 신통기 에서 현재까지 우주의 역사를 추적하며, 인간이 매일 만나는 여러 힘들의 본성을 밝히고 있다. 헤시오도스가 본인의 신화를 얼마만큼 신뢰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관념적인 사고 같이 직접적 표현이 난해했던 것에 신화라는 외피를 둘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접근이다. (천병희, 284) 신화는 세더 많다. 그의 신화는 체계적이며 추상적이다. 헤시오도스가 현상들에 대한 추상적 관념을 의인화하여 명칭과 신격을 부여하고, 이러한 현상들이 인간의 삶의 현실에 작용하고 있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헤시오도스는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역사를 은유하고 있다. 원주민을 정복하고 정착했던 그리스인들의 정체성, 피정복민들에 대한 정복민의 합법적 통치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상고기 그리스 사회에서의 귀족들의 통치권의 정당화하는 근거도 삽입되어 있다. (백경옥, 275)제우스의 지배권 쟁탈전에서 보이듯 물리적 힘보다는 지혜와 기술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정신의 힘을 중시함이 드러나 있다. 그러한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됨일 것이다. 헤시오도스가 전한 신들의 계보 중 제우스의 결혼에 관련된 몇몇 에피소드에서 그 통치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보다 강한 아들을 낳도록 예견된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아들 대신 삼키는 것에는, 메티스라는 지혜-새로운 통치자의 덕목을 얻게 되었음이 내포되어 있다. 법의 여신 테미스와의 결혼에서 낳은 질서, 정의, 평화의 여신들, 운명-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와 한계-의 세 여신을 낳았다 함은 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서 에우리노메와의 세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름다움, 우아, 기쁨의 여신은 정당하고 영속적인 질서의 부산물을 의미한다. 보수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이와 같은 신들의 탄생은 정의를 수호하고 지혜를 가진 통치자에 의하여 인간 세상에 점진적으로 평화와 질서가 갖추어졌으며, 출생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상황을 간파한 인간이 정신의 힘으로 존재의 영원성을 추구하게 된 과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백경옥, 267)신통기 는 앞서 주지한 바 엠피다마스를 기리기 위하여 개최된 장례식 경기에서 낭송되었다. 엘리트계급과 하층계급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던 상고기 그리스에서 지배계급이 주관하는 경연장에서 시를 낭송하였던 서사 시인들은 그들이 예술적 소재로 삼았던 신들의 전통이나 가치관 등을 통하여 메 이후 야기되었던 사회 제반의 분쟁, 각종 송사 등에 있어 재판관의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에 그들의 권위와 합법성을 지지할 이념적 근거를 시를 통해 제공되었다. (백경옥, 273) 요컨대, 헤시오도스는 신통기 에 그리스인들이 널리 전승해왔던 신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더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사변(思辨)까지 세 요소를 버무려 문명화된 초기 그리스 사회의 통치자인 귀족들의 통치권의 정당성을 은유적으로 담아냈다고 하겠다.아울러, 헤시오도스가 제시하는 신들의 역사에는 폭력적 상황에서 정의로운 질서로의 이행을, 세계의 생성에서부터 당대까지의 근본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제우스는 단순한 주신(主神)이 아니라, 세계 질서의 궁극적인 수호자이면서 정의의 원리이자 집행자로 묘사된다. 만일 시가 제우스 시대의 도래 과정에 그쳤다면, 그것은 신화를 통한 과거사의 정리일 수는 있어도 현재, 미래까지 총체적으로 조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양승태, 206) 제우스가 불의와 무질서를 다스려 실현한 현재의 질서는 제우스의 절대 권력이 보증하는 정의의 세계이다. 동시에 수많은 신들은 각기 존재의 의미를 지니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펼쳐져 있다. 시인은 여신들의 노래를 인간의 음성으로 전하는 편집자이다. 다시 말해, 신통기 는 무의미한 나열이 아닌, 신들의 계보를 현실의 당연한 질서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며, 곧 인간 세계의 구성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천이다.일과 날 : 그리스 소농의 삶과 ‘정의’신통기 가 우주의 구조를 밝히고 활동하는 힘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면, 일과 날 은 농부의 일상생활을 포괄적으로 그리며 농부가 할 일들에 관하여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천병희, 291) 마지막 60행 부분 정도가 ‘날’의 부분인데,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시들과 달리 독특하게,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든다. 헤시오도스는 형 페르세스(Perses)와 유산 다툼을 한 개인적인 사건을 계기로 보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모두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즉 정의와 믿음이 상실된 사회였다.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회에서 헤시오도스의 정의에 대한 믿음은 매우 굳건함을 볼 수 있다.소송은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 ‘불화(不和)’ 일반에 대해 설명된다. 시에 따르면 불화는 지상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칭찬받을 것이고, 하나는 비난받아 마땅하니 서로 기질이 다르다. 하나는 사악한 전쟁과 다툼이고, 다른 하나는 제우스가 대지에 앉혀 인간들에게 큰 이익이 되게 한 것인데, 게으른 사람도 일하도록 부추기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페르세스는 바로 전자에 속한다. 헤시오도스는 페르세스가 성공하려면 후자의 불화-선의의 경쟁을 하여야 함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뒤이은 송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페르세스와 헤시오도스는 유산을 분배한다. 그런데 페르세스가 나중에 헤시오도스 몫의 일부를 가로채고, 왕들-바실레우스들을 뇌물로 매수했다. 그리고 그 왕들이 형제 사이의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소송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정의와 원칙을 옹호하는 헤시오도스는 소송이 공정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데, 그 두 가지 이유는 첫째, 형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더 많은 몫을 차지했다는 점, 둘째, 형이 소송을 하느라 일을 게을리 하여 재산을 탕진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정의와 직업적 성공이라는 이중 주제가 도출되는데, 부도덕하고 비생산적인 소송과 대립된다.(천병희, 292)인간의 힘겨운 생존에 대하여 시인은 교훈과 경고를 준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타고 장사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헤시오도스는 그 운명이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다툼의 결과라고 본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와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게 하였다. 그에 대한 제우스의 응징은 판도라라는 아름답고 교활한 여자이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신통기 에서보다 구체화된다. 여기서 헤시오도스가 여자를 악(惡)으로 보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