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시대 2012.10.06. (토)『제국의 시대』 (7~13장)18세기말~19세기 초 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구조과 특성을 가지고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향유한 문화, 사상, 학문, 예술 등은 어떤 것들이었으며, 그런 삶 속에 존재했던 불확실성의 위기가 초래한 전쟁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먼저 7장에서는 이 시대를 주도한 ‘부르주아’라는 계층을 확실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특히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부르주아가 되었거나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었으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징적인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고 한다. 또 이러한 부르주아만의 특색(변화) 중에서 가정에서 나타난 것들은 여성 해방과 관련이 있는데, 여성해방 즉 이 시기 등장하기 시작한 신여성에 대해서는 8장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여성들의 자유 발현, 교육 등을 통한 사회 진출은 특기할 점이기는 하지만 유럽 지역, 그 중에서도 일부분의 지역에서, 일부분의 계층에서만 두드러질 뿐이라고 하였다. 또 이런 여성해방의 특성은 예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술의 역사야말로, 1870년대~1914년까지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를 잘 드러내 주며, 이 시기에 매우 번영했다고 한다. 한편 과학은 예술과 달리 주체적으로 혁명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학혁명의 과정과 부작용 등을 분야별로 설명하고 있다. 11장에서는 또 다른 지적인 위기인 이성의 변동과 그 모습을 살펴보았고, 12장에서는 이전까지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여러 국가들의 혁명에 대해 서술하였다.7장의 제목은 “누가 누구인가? 부르주아의 불확실성”이다. 여기에서 부르주아의 불확실성이라 함은 본문을 읽기 전에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을 구분 짓는 기준이 불확실하다는 것만을 뜻한다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읽어보니 이것 외에, 부르주아들 자신들이 가졌던 세계와 자신들에 대해 가졌던 불확실성이란 뜻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이 시기주의에도 전쟁에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을 진정한 세계사회와 문명으로 나아가는 진화과정의 일시적인 한 단계로 보았으며, 민족적 독립을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또 전쟁에 대해서는 때로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피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민족주의를 확장하고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는 제국의 시대에, 이러한 정서들이 세계의 정치적 현실과 더 이상 조화되지 않은 것은 명백했다 356.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들이 한 부분,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들로 구성된 부분”이었다 358.이에 대해 8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글 첫머리에서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극소수에 불과한 유럽 중간계급 여성들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역사가의 입장에서 여성의 조건의 변화와 변동에 주목하는 것은 정당한 작업이라고 밝혔다 360. 비록 그 당시 세계적으로는 미미한 변화일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기도 하고, 모든 일에는 시작이란 것이 있는데 이 시기 이 지역 중간계급 여성들의 변화를 시작으로 점점 그 영향이 세계적으로 번져 더 많은 지역, 더 많은 계층의 여성들의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챕터 내내 필자는 자신이 파헤친 내용이 그 당시에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라 국지적이고 특수적인 내용임을 강조하여 논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한 것 같다.여성해방의 배경으로는 출생률 하락과 미혼·만혼(晩婚) 등으로 인해 여성들의 자유가 확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의 부모들에게 어린이들을 점차 가중되는 부담으로 만들었던 사회적 변화에 기인했다. 즉 유아노동의 금지와 노동의 도시화는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제공했던 적당한 경제적 가치를 제거하거나 감소시켰고, 만약 이 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들보다 더 잘살 수 있으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보다 적은 수의 가족, 즉 각자에게 보다 적절한 보호와 자원이 제공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했기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376. 두 번째 징후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획득하게 되었던 스포츠에서의 보다 커다란 자유였다 377. 스포츠는 집안과 가문의 제한을 탈피하여 젊은 남성과 여성들이 서로 상대방을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378. 또 여성들의 옷차림에서도 해방의 징후를 볼 수 있다. 이제 여성들은 다리부터 시작하여 신체의 일부를 드러냈다. 짧은 치마, 버려진 코르셋, 새롭게 발견된 움직이기 편한 옷들과 같이 이 모든 것들은 자유의 표시였고 자유를 향한 외침이었다. 한편 1918년 이후 여성해방의 옷차림은 戰前의 아방가르드들이 최초로 개척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위기와 모순을 포함한 부르주아 사회의 이념은, 종종 혼란스럽게 하고 또 혼란스런 표현을 하고 있는 예술에서 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399.이 시기 예술은 대단히 번영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 그 향유층도 지역적, 계급적으로 모두 넓어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를 쌓은 상위계층이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하위계층을 위해 문학·예술 작품 등을 보급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405. 이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 의한 부자들의 투자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19세기에 예술은 자신감과 승리의 표현으로 창조되기도 했으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러한 면이 퇴색되었다 411~412. 이후 20세기의 예술은 혁명화되긴 했으나 스스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려 했던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은 과학과는 매우 달랐다 436.우주를 이해하는 인간의 방식, 즉 과학은 부르주아 세계에서도 물론 변형·진화되었다. 하지만 그 발전되고 발견된 이론·현상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흡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440. 또 과학 혁명의 존재와 영향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부와 북서 유럽 등의 지리적으로 일정한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다 463. 과학은 교육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다. 과학과 이성의 진전에 대한 증거는, 전통적인 종교의 급격한 후퇴였다 470.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종교적인 신념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생겼고, 그에 따라 진보는 세속화가 함께 전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종교는 1900년대 초기에 지적·정치적으로 후퇴했다 474. 종교의 쇠퇴는 사회적 변화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는데,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도시가 시골보다, 큰 도시가 작은 도시보다 경건함이 덜한 것이 분명했는데 당시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2.이와 같은 민주화와 세속화의 결합이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혜택은 좌파들에게 돌아갔는데, 과학과 이성과 진보에 대한 낡은 부르주아적 신념이 정작 붐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시기에서였다 475. 19세기 중반 자연과학의 진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사가 어떠했든, 마르크스는 그의 생애와 지적인 정열을 사회과학에 헌신했다. 역사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 대한 마르크스적 개념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476. 사회과학은 본질적으로 인류의 행위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인류란 자신들의 문제에 관한 한 중립적이거나 관찰자가 되기 힘들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발전과 사회과학의 발전을 비교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생명이 없는 세계로부터 삶의 세계로 옮아감에 따라 그리고 특히 인류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고 그것을 다루는 생물학적인 문제로 옮아감에 따라, 자연과학에서도 이데올로기성이 더욱 현저해졌다 478. 사회과학의 핵심은 원시적 상태에서 현재에 이르는 인간의 발전과 그와 같이 발전을 거쳐 온 현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늘 다양한 ‘단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진보가 초래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점차 진화의 이론을 통해 그토록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역사와 과학은 서로 분리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479. 경제학과 언어학 등도 사회학의 한 분야로서 번성하던 시기가 있었다. 경제학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라고 묘사될 수 없는 모든 거래행위를 원천5년 동안은, 사람들은 잘살게 되었고, 돈 있는 자들에게는 인생이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황금의 시대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 나라들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장래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지만 진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시대’였다. 그들의 사회와 정치체제는 상당한 정도로 관리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구상의 보다 넓은 지역은 이러한 상황과는 분명 거리가 멀었다. 이들 지역에서 1880년부터 1914년까지의 세월은, 혁명의 시대였다 490. 레닌이 1908년에 ‘국제정치의 도화선’이라 부른 것처럼 1914년에 지구상의 넓은 지역에서 발생했던 예측할 수 없었지만 회피할 수는 있었던 일련의 침략이 아니었더라면 안정, 번영, 자유주의적 진보가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관념은 매우 피상적인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1917년 이후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되고 번영된 나라 자체들도 바로 그 사회가 만들어낸 단일하고 상호의존적인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시작된 지구적인 혁명적 동요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의 세기는 주변부 사회경제의 낡은 구조와 사회의 균형을 침식시키고, 기존의 정치체제와 제도들의 안정성을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주변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는데, 러시아와 중국혁명, 그리고 페르시아와 터키 혁명이 역사적으로 미친 충격이 그 예이다. 서구 부르주아 민족국가들과 제국들의 기준에서 보면 이러한 고대적 정치구조들은 허약하고 시대착오적이었으며, 사회적 다윈주의(사회진화론)를 신봉하던 많은 동시대인의 생각으로 곧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들이다. 1910~1914년간의 혁명, 그리고 유럽의 경우 다가오는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만들어낸 것은 단절과 몰락이었던 것이다 491. 즉 고대 제국들은 새로운 개념의 제국들의 단순한 희생자들이었을 뿐이었다. 고대제국들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비등한 상대가 되지 못하면, 당연히 붕괴?정복되거나 종속되게 되어 있었다 493.이런 고대 제국들의 혁명 중에서 우리나라의 모습593.
근대사회사연구 2012.09.20. (목)『제국의 시대』 (1~6장)제1장 혁명 100주년(1) 18세기와 19세기1880년대의 세계는 1780년대와 비교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지도화되었다. 또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발명으로 일컬어지는 철도와 증기선이 발명되었다. 이로 인해 지리적으로는 더 작아지고, 더 지구화되어갔으며, 지구의 경계는 이동하는 물질적 생산물들과 이념들, 자본과 통신, 상품들과 사람들의 무리와 더불어 전에 없이 협소해졌다. 또 인구밀도가 높아져 인구적으로는 더 커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분화에 휘말려들었다.(2) 제1세계와 제2세계1880년 무렵에 이르면, 크게 보아 발전된 부분과 지체된 부분, 지배적인 부분과 종속된 부분, 부유한 부분과 가난한 부분이라는 하나의 세계 체제에 함께 묶여 있는 두 부분으로 세계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세계를 바꾸어놓은 경제혁명을 배경으로 한 서구 나라들과 나머지 나라들 간의 차이가 점점 벌어져갔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 두 세계 간의 경계는 불명확하고, 각 부분 안에서도 구분이 지어질 수 있으며, 그 안의 몇몇 사회들은 큰 카테고리의 특성에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1880년경의 유럽은 세계를 지배·변형시킨 자본주의적 발전의 기원적인 핵심부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제2세계’ 전체는 종속적이고 후진적인 지역에 속했으며, 19세기 역사에서 희생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진보된’나라란, 국제적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적 경제발전의 기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크며, 광범위하게 자유주의적이고 대의적인 종류의 법적·정치적 권리를 확실하게 향유하는 영토 내 개인 거주자들의 집합인 시민들로 구성되어있는 나라다. 非발전된 세계의 대부분은 이러한 형태의 국가, 혹은 이와 유사한 국가조차도 전혀 갖고 있지 못하였는데, 일부는 유럽 열강들의 소유물들로 구전히 일본인들을 깔보았다. 그것은 서구의 진보가 생물학적 이유로 획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인종’에 의해 구분되었는데 인종이란 이념은 국제적 진보의 축제가 유치되었던 국제 박람회에 스며들었던 ‘진보’라는 이념만큼이나 이 시대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인류는 정열적이고 능력 있는 중간계급 무리와 유전적 열등함이 인간적 열등함으로 귀결되었던 다수의 대중들로 구분되었다. 생물학은 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 특히 스스로를 우월한 인간으로 운명 지어 졌다고 느꼈던 사람들에 의해 요구되었다. 지배계급들은 백인들이었고 혹은 적어도 자신들을 백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었다.제2장 경제가 속도를 바꾸다(1) 대공황의 발생과 그 모습1873년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 매우 격렬한 공황을 발생시켰다. 세계의 생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이 시기를 공황이라고 칭하는 것은, 지속된 ‘가격하락, 이자하락, 이윤하락’으로 인하여 이윤획득 가능성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먼저 농업에서는 많은 생산량으로 농업제품의 가격이 하락하자 농업 생산을 포기하거나, 일부 지역은 자연적 재해까지 겹치는 등 농업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불만에 국가적 대응으로 영국은 농업을 방치·포기하였고, 덴마크 등은 신중하게 농업을 근대화 시켰다. 독일·프랑스·미국 등은 농산물 가격을 유지시킬 수 있는 관세를 선택했다. 비정부적 대응으로는, 주로 빈농들이 선택한 대량이민과, 상당 규모 토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들이 선택한 협동이라는 두 가지 대응이 있었다.기업 또한 가격·이윤의 공황 그리고 이윤율의 공황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산업상의 신기술로 생산물은 엄청나게 증가하였고,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했으며, 경쟁적인 생산자들과 산업경제의 규모 자체가 증가하여 전반적으로 거대하게 팽창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소비해 줄 대량 시장이 아직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먼저 가격의 하락을 세계적인 국의 시대의 세계경제이 시기 세계 경제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지리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기반을 가진 경제였다. 특히 기초 생산재 부분에서 국제시장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중심부와 주변부 모두 성장하는 가운데 합쳐지고 통합되어 갔다. 둘째, 이전의 영국 중심의 경제에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주요한 국민 경제들의 등장으로 다원적이게 되었다. 즉 제국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국가경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셋째, 이 시대에는 의약품의 과학화, 첨단 기술의 가정화가 이루어진 기술혁명의 시대였다. 넷째, 자본의 집중이 나타나, 기업과 대기업을 구별하게 만들었고, 자유경쟁시장을 후퇴시켰다. 다섯째, 대중적 소비라는 소비품 시장이 변화하여, 대중매체의 창조와 대량생산, 분배상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여섯째, 경제의 제3부분, 즉 공적·사적인 사무실과 가게, 다른 서비스 부분에서 노동의 절대적·상대적으로 성장하였다. 일곱째, 정치와 경제 간 밀착이 증가했다.제3장 제국의 시대(1) 제국주의에 대한 해석운송망과 통신망의 밀도 증가는 이전에는 주변적이었던 후진지역들을 세계경제의 일부가 되게끔 만들었으며, 오랜 부와 발전의 중심지들 사이에 먼 지역들을 둘러싼 새로운 이해관계를 형성시켰다. 즉 세계경제는 ‘진보된’ 자들이 ‘후진적인’ 자들을 지배하는 그러한 세상, 제국의 세계로 분명하게 전환되는 듯했다.여기서의 제국의 시대는 명백하게 새로운 유형인 식민지 제국의 시대였다. 식민주의는 보다 광범위한 분석을 위한 출발점을 형성하였고, 식민지 정복에 대해 최초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제국주의’(imperialism)란 단어가 1890년대에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단어가 되었다. 병합과 통치는 주로 188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유럽과 아메리카 바깥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세계는 형식적으로 몇몇 국가들의 공식·비공식적인 통치·정치적 지배 아래 영토들이 분할되었다. 소수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의 분할은 지구가 강자와 약자로, ‘진보’와 ‘후진’ 오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치가들을 찾아보기는 점차 힘들게 되었다.(2) 제국주의의 영향제국주의의 경제적 충격은 매우 중요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부와 종속부 간의 관계가 고도로 비대칭적이었던 까닭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평등했다는 점이다.제국주의 국가들은 기후와 지리적인 문제로 인해, 기술적인 발전은 원거리에 독점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존재하는 원재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중심부 국가들의 의존에 따라 중심지 나라들의 대중적 소비를 위한 음료와 식품들을 공급하기 위하여 급속하게 팽창하는 국제시장이 창출되었다.이런 변화는 산업화되거나 산업화하고 있던 나라들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세계를 변화시켰다. 나머지 세계들은 그들이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던 세계시장으로의 수출을 위해 점차 특정화된 생산물의 재배지로, 즉 복합적인 식민지·반식민지 지역형태로 전환되어 갔다. 종속된 생산자들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말에 시작된 이러한 제국의 시대는 1929~1933년간의 대공황까지 계속 되었다. 이 시대에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생산하는 기초재에 대한 가격 기능이었던 까닭에, 제국의 시대동안 그들의 위상은 점차 취약해졌다.한편 식민지는 열강들이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열등함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었다. 즉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식민지의 획득은 그 자체의 가치를 불문하고 일종의 신분적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또한 제국의 시대는 문화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발전된 소수에 의한 지구의 정복은 강제와 제도에 의해 사회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상징과 이념 그리고 정서 또한 변형시켰다.전통적인 비서구사회에서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가치들은 무력과 군사적 기술만이 믿을 수 있는 시대에서 점차 생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반면, 거대한 만국 박람회장의 식민지 전시관 등으로 표현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종속국 인식은 이데올로기적이었고, 일반적으로는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들의 우월감을 강화시켰다. 제국주의 행정가와 군인들이적 풍자의 시대임이 드러났다.한편 민주화는 서서히 정치의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배계급과 이들과 이해가 결부되어 있는 계급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져서,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거나 국가의 존재 자체 여부가 문제시될 정도였다. 또 국가의 엘리트들이 예견한 대로, 정치의 지속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심각했으며 특히 경제적인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사회혁명이라는 대중운동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서, 당시 제도화되어 있던 사회의 정통성을, 사회의 생존 자체를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 새로운 정치에서 얻은 스스로의 성공을 기반으로 한 경력자들과 부자들의 부패, 그리고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정당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당쟁, 그리고 선동에 의해 선출된 의회의 비효율성 등으로 인해 문제점은 점차 커져갔다. 이렇게 정치적 영역에서 자신들과 표면적으로 절대 화합할 수 없는 세력들이 부상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정부가 알아차렸을 때, 그들의 본능은 그것들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이에 서구의 정치적 사회들과 지배계급들은 잠재적·실질적으로 전복적인 대중동원을 통제하는 데 그런대로 성공했다. 대부분의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의 서구국가들에서는 1875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은 경고와 탈선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안정기였다.이 시기 새로운 정치상황은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적 상황에 종속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편 정치적 민주주의와 번영하는 자본주의 간의 결합은 견고하지 못했는데,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입헌정부의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의 번영하고 잘나가던 경제는 어디까지나 소수에 한정된 것이었다.민주적 낙관주의, 즉 역사적 불가피성에 대한 믿음은 역사의 보편적인 진보를 중지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미래에 대한 보편적인 모델이 되지는 못했다.제5장 세계의 노동자들(1)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불가피하게 선거권은 확장되어갔지만, 선거인들 다수의 삶은 가난하거나 불안정하거나 불만스럽거나, 혹은 이었다.
農巖 金昌協의 學統과 政治 參與1. 安東金氏 家門의 성장2. 김창협의 學統(1) 家學과 湖西지역의 영향(2) 서울·경기지역의 영향3. 김창협의 정치참여(1) 肅宗 8년~15년(2) 己巳換局(3) 숙종 15년 이후(4) 노론계 정치론 형성《 목 차 》조선사림정치사 연구 농암 김창협의 학통과 정치 참여1. 안동김씨 가문의 성장현실의 권력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념 혹은 철학·사상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이념 또는 철학·사상의 역할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이 같은 의미에서 정치인과 지식인 또는 정치와 지식의 결합은 필연적이었다. 유학을 이념으로 했던 조선사회에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과 그 이념을 실천하는 정치인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동일한 인재양성·공급체계 안에 있었다. 안동 김문은 바로 그러한 인재양성·공급체계를 가문 단위에서 구축하여 조선후기의 상당기간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동 김문은 17~19세기 조선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상징이었다. 17세기 金尙容·金尙憲 형제에서부터 조선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안동 김문은 19세기까지 정치권력의 핵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을 지배한 이념과 지식의 중심권에서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의 권력은 학맥이나 정치적 인맥보다도 가문 중심으로 형성·계승되고 있었고, 안동 김문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경향을 주도한 집단이었다.)안동 金門은 15세기에 서울에 世居하기 시작하였고, 中宗代에는 사림적 지향과 훈신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가, 宣祖代에 사림 명문의 반열에 오르고, 김상용·김상헌 대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그것은 지방 사족이 사림적 지향을 지닌 중앙의 명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사림 성향과 명족 성향이 이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애초부터 예정된 길이기도 하였다. 京居士大夫들은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식을 보편적으로 가졌지만, 동시에 ‘서울’이 갖는 유무형의 장점을 배경물은 김창협이었고, 그의 동생 김창흡과 손자 김원행이 그 뒤를 이었다.)2. 김창협의 학통김상헌?김상용 이래 전승되어 온 가학의 전통과 함께 다양한 사승관계를 통해서 김창협의 학문은 형성되었다. 구체적인 학문 내용에 있어서는 호서지역 송시열 계열 서인들과는 다소 구분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7세기 서울·경기지역과 호서지역 서인들의 학문경향을 절충했으며, 오히려 서울·경기지역 서인 학풍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즉, 송시열계 노론 의리론과 주자학 연구의 큰 원칙은 견지하면서도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17세기 서울·경기지역 서인의 학문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김창협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을 열거해 보면, 먼저 가학 및 호서지역의 영향을 준 인물로는 金尙憲, 羅星斗(1614~1663), 宋時烈(1607~1689) 등을 들 수 있으며, 서울·경기 지역 서인 중에는 李端相(1628~1669), 趙聖期(1638~1689)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대에 유력한 서인 계열 인물들로서 각기 고유한 학문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 이 인물들의 각각의 학풍을 살펴보면 김창협의 학풍이 성립되는 과정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1) 가학과 호서지역의 영향우선, 김상헌 이래 형성된 가학을 김창협 학문형성의 중요한 기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상헌은 尹한壽(1537~1616)의 제자로서 문학에 능하였고 병자호란 당시 和議를 반대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김상헌의 문학 전통과 의리론은 김창협의 사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학문 또한 기본적으로 문학과 의리론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항의 燕行과 그 과정에서 얻어진 중국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학문형성의 요소이다. 김창협은 중국 서적들을 포함해서 중국의 가장 최신의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그가 독창적인 문학론과 성리설, 현실인식을 전개할 수 있었던李端相의 딸과 혼사를 맺는다. 당시 이단상은 벼슬을 그만두고 楊州에서 講學하고 있었다. 김창협은 이러한 이단상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것은 이단상이 죽는 1669년까지 계속되었다. 김창협은 이단상의 언행을 기술하여 그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이단상은 大文章家였던 李廷龜(1564~1635)의 손자로서 문학을 가학으로 전수 받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 계열에 동조하고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일부 구분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단상은 易學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특히 소옹 상수학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단상은 송시열에게서 너무 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고, 원칙과 실천을 중시하는 《소학》과 같은 기본 경전을 읽으라는 충고를 받았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송대 학자 여조겸(1137~1181)에 대한 입장에서도 보였다. 이단상은 여조겸이 自號하던 ‘大愚’ 두 자로 스스로를 면려하고자 송시열에게 이것으로 설을 지엊루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대해서 송시열은 주자가 여조겸의 학문을 병통으로 여긴 뜻이 있었는데, 지금 이단상이 주자보다 뒤에 태어나 어찌 다시 이처럼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호칭하려 하는가 하며, 의문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단상과 송시열이 가지고 있었던 미묘한 학풍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단상은 현종대 일어난 公義·私義 논쟁에서도 송시열과는 달리 공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조성기의 학풍 또한 이단상과 흡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조성기는 이단상처럼 소옹학에 심취해 있었으며, 특히 소옹 상수학의 인식론적 근거였던 觀物論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이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一理 관념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는 여조겸의 사학과 경세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심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기울였고, 漢唐 국가 규모에도 찬성하여 일부 사공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성기는 김창협보다 사실 김창협의 동생인 金昌翕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창흡은라고 하는 주자학의 종지를 주장하는 동시에 지각을 심의 고유한 속성으로 돌려 심의 ‘허령불매’를 강조하고자 했다.즉, 김창협은 서울·경기지역 서인의 소옹 상수학과 심학의 전통을 잇고 있었고, 이기론에 있어서도 조성기의 일리 강조의 영향을 받아 호서지역 서인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호락논쟁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화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현실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3. 김창협의 정치참여(1) 숙종 8년~15년김창협은 24세에 송시열을 만나 “나이는 적으나 스승 삼을 만하다”는 칭찬을 받으며 서울의 嫡傳 제자로 부상하였고) 1682년(숙종 8) 32세로 급제하여 經筵에서 명성을 날리며 문학과 경술을 겸비한 신진 儒臣으로 촉망받았다.) 김창협이 출사하였던 숙종 8년무렵은 노·소론의 분기가 가시화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는 송시열·박세채 등을 불러 士論을 保合할 것을 부친 김수항에게 권하였다.) 애초 김수항이 調停에 힘쓴 데에는 그의 권유도 작용했던 듯하다. 廟堂을 견제하는 대각의 기능을 강조하였던 평소의 생각도 신진 사류의 정서와 상통하였다.) 따라서 서인이 노·소로 분당할 무렵, 상대적으로 연소하였던 소론에서는 그를 매우 기대하였다.) 그의 선택은 결국 노론이었지만, 동년배가 많았던 소론과의 정서적 유대도 깊었다.)또한 당시의 정세는 숙종 10년 김석주가 급서한 이후 ?戚勢力이 구심점을 잃고 위축되어가자, 점차 국왕은 정국의 주도권을 신장시켜갔다. 노론과 소론이 상호견제하던 정국하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王權의 신장은 왕실과 관련을 맺으며 재등장의 기회를 엿보던 남인의 세력화에 빌미를 제공하였다.이 무렵 안동김씨 자체적인 성향변화도 주목할 수 있다. 김수항으로 대표되는 관료적 기반과 함께 숙종 13년 김창국(김수증의 아들)의 여식이 숙종의 후궁(후일의 寧嬪)으로 책봉되는데서 보듯 궁중세력과 연계를 모색해 나간 안김의 위상변화는 부상하는 남인세력 견제에 적극적인 역할 수행이 요구되었던 것이다.)(2) 己巳換局김창협앙을 초래하는 화근이니 손자 이름의 돌림자를 ‘謙’으로 하여 謙退를 항시 생각하라고 당부하였다.)그의 유훈은 안동 김문의 가풍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절의를 중시하고 관료로서 출사하였던 기존과는 다른, 학문에 진력하는 도학의 가문이란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안동 김문은 일시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自靖하였다. 김창협(김수항의 2자)의 처세는 당시 그들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4) 노론계 정치론 형성김창협은 치열해지는 붕당정치의 중심에서 자정하는 모습과 노론 중심의 是非明辨觀을 동시에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두 태도가 자신에게 이중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불출사는 私議와 私情을 지키는 불가피한 선택일 따름이었지, 의리에 불가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풍속과 교화에 보탬이 되길 바랬다.) 자신에게는 겸퇴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세도를 위한 일이었고, 출사는 부차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자정 논리는 의리 실현을 위한 역설적인 선택이었다.의리를 위한 김창협의 의지는 큰 형 김창집을 代筆한 상소로 인해 간접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그가 대필하였던 상소는 총 8편이었는데, 부친 김수항의 행적을 판정한 것들이 중심이었다. 그는 부친 김수항이 남인 吳始壽의 사사를 주도했다는 오해를 풀고자 했으며, 김수항은 ‘尹拯의 背師’문제에서도 다소 중립적이었음을 밝혔다. 한편 三田渡碑를 지었던 李景奭의 절의 문제에 대해, 김상헌이 이경석을 높이 평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김상헌의 평가는 의례적인 언사였다고 판정하였다.) 당시 여러 정치논쟁에서 김상헌과 김수항의 행적은,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유리한 명분을 쌓을 수 있는 중요한 전거였다. 양 붕당은 증조 김상헌과 부친 김수항의 행적을 권위 있게 대변하였던 김창협 등의 견해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상소는, 비록 대필이었지만 적극적인 정치 행위였다.)또한, 김창협은 현실 정치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매우 정치적인 활다.
* 1. 근대 개항 개관19세기 조선을 둘러싼 대외정세는 서양 열강에 의해 전통적인 화이론적 체제가 붕괴되는 가운데, 조선을 둘러싼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유지욕과 일본의 대륙팽창욕이 부딪치면서 대외적 위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중국의 경우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뒤 1842년 남경조약체결로 서구제국주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그 뒤 1856년 Arrow호 사건을 계기로 천진조약(1858), 북경조약(1860)을 연이어 체결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조약체결의 결과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장으로 변하고 말았다.일본은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구제국에 대해 쇄국정책을 고수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페리가 거느리는 군함이 에도만에 들어가 통상을 요구하자, 서양의 막강한 군사력을 알고 있던 일본 최후의 막부인 도쿠가와막부는 굴복하여 1854년에 미국과 화친조약을, 1858년에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200년 동안 지속해 온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이어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하여 서구제국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를 선언한 메이지정부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채택하여 ‘탈아외교’를 지향하고, 대내적으로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모토로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제도의 모방운동을 벌였다.당시 조선은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 조선의 일관된 대외정책은 쇄국양이었다. 당시 양반유생을 비롯하여 일반백성 절대 다수가 공감하고 있던 국론이었으며, 조선조 500년 동안의 통치이데올로기였던 주자성리학의 배타성과 독존성에 기인하고 있었다.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왕정을 복구하고 아울러 서구의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식산흥업과 부국강병 정책을 핀 일본은 그해 11월, 조선정부에 왕정이 복고되었음을 알리면서 새롭게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이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 정부는 ‘왜양일체’의 입장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187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이 자국의 유치한 산업과 영세한 상인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시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조항이다. 그리고 부록과 장정에는 일본화폐의 유통과 관세주권의 포기, 그리고 미곡의 무제한 수출허용 등이 규정되었는데, 이는 조선경제를 일본경제에 예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사회의 면에서도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이와 같은 침략적이며 기만적인 조약은 실제 무역 및 상거래에서 조선 정부와 상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그 때문에 외교적 갈등까지 빚어진 일이 빈번하였다. 조선 정부도 대일조약의 불평등성을 깨닫고 불리한 조항을 개정하기 위해서 대일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일본의 위협에 떠밀려 부당한 조약을 거듭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임오군란 이후에는 제물포조약과 수호조규속약, 갑신정변 이후에는 한성조약을 강요당하였다. 또한 일본은 조선이 청국·미국·영국 등과 맺은 조약에서 유리한 것은 철저하게 균점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은 무력 외에도 외견상 평화적 수단인 조약을 이용해서 조선을 침략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획책하였다. 이토를 한반도에 파견하여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한 것이다. 보호조약안을 가지고 온 이토는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들을 매수·협박하였다.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지원과 헌병들이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의 핵심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내정은 통감이 관할한다는 것이엇다.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이 사실상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로서의 국권을 상실하였고, 일제의 반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2. 계몽운동계몽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나 ‘구국계몽운동’, 또는 ‘애국문화운동’·‘자강운동’·‘실력양성운동’ 등으로 불리는데, 국권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전개된 교육 언론 문화 부문의 실력양성운동을 의미한다. 이다. 3·1운동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펼치면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세력은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나누어졌다.조선인 대지주, 자본가와 일부 지식인들은 3·1 운동이 좌절한 뒤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총독부가 내건 문화정치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는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했다. 호남지방의 대지주이자 자본가인 김성수의 계열은 민족개량주의의 본보기였다. 여기에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지식인·종교인들이 모여들었다.1921년 5월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의 주간직을 팽개치고 귀국한 뒤 논설위원이 된 이광수는, 1922년 5월 최린이 경영하던 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민족개량주의를 대중에게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3·1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없이 옮겨가는 변화”라고 하면서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등과 같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독립을 하려면 먼저 민족성부터 개조하고, 민족부르주아가 수양동우회와 같은 단체를 만들어 주도권을 잡아야한다고 하였다.민족개량주의자들은 1924년 무렵 민족독립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자치론을 들고 나왔다. 이광수는 1924년 1월 2일에서 6일까지 에 신년사설로 ‘민족적 경륜’을 실어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고 하였다. 이 무렵 김성수, 송진우, 최린 등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펼쳐나갈 정치결사로서 연정회를 조직하려 하였다. 민족개량주의의 이러한 의도는 불매운동으로 번진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진 민족개량주의는 실제로 민족독립을 포기한 친일의 타협노선이었다. 사회주의운동 등과 대립하면서 민중을 기만한 민족개량주의는 민면하여 물산장려운동은 곧바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운동은 조선인 기업의 힘을 키워 보자는 뜻이었지만 자산가계층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으로 여긴 한계를 지녔다.실력양성운동은 반일성향을 지닌 사회운동을 통제하려던 일제의 속셈과 민중·사회주의 운동의 힘을 누그러뜨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 민족개량주의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운동이었다.*3. 신채호의 민족주의 계열인 것 같음1920년대 국내의 민족주의 운동은 ‘문화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과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에 형성된 신지식인층이 국권회복운동기 자강론적 민족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문화운동론은 낡은 문화의 청산과 진보적 신문화 건설을 주장하는 신문화건설론과,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해 독립의 능력과 자격을 갖추자는 실력양성론이 중심적인 논리였다. 민족의 실력은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의 총합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구성원 각자가 신사회에 적합한 자질을 갖추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논리도 나타나 정신개조론, 민족개조론 등과 같은 인격수양론도 문화운동론의 주요 부분을 차지했다.문화운동가들의 국가건설 지향은 사회주의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체제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전망하였다. 따라서 구래의 전통적 관습과 관행은 타파되어야 할 대상으로, 민중은 계몽되고 개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1920년대 국내의 민족주의운동은 근대사회 형성에 필요한 가치와 덕목을 교육하고 계몽할 ‘중추세력’형성에 역점을 두는 엘리트주의적 특성을 띠고 있다. 사회변혁론의 관점에서는 점진주의적이며 온건한 방법론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투쟁과 혁명보다는 조화와 합의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회발전을 위해 계급갈등은 해소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민족 전체의 여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운동에서의 실력양성론은 논리적으로 정치적 실력양성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광무신문지법을 제정하여 그 규제를 강화하였다.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하고 있던 의 반일국권회복운동이 크게 부각되는 것도 그러한 점에서 이해된다. 일제는 1908년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외국인이 발행하던 신문에 대해서도 규제가 가능하게 하였다. 이미 신문지법의 개정에 앞서 통감부에서는 의 사장 베델의 국외추방공작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던 사건도 있었다.한말의 신문들은 1904~1905년을 전후하여 그 논조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부국강병 문명개화를 강조하는 계몽적인 입장이었으나,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하자 논설과 보도기사 연재물 등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계몽에 진력하였다. 친일정권이나 일제의 활동을 비난하면서, 당시의 민족현실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그 부당성을 알린 것을 비롯하여, 가 일제의 국권침탈을 비난하는 논설을 자주 게재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 신문들은 1907년 초부터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국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하여 국난극복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한국사와 외국사를 크게 중시하고 있었다.대부분의 신문은 문명개화론 및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의병의 무장투쟁과 같은 국권회복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의 경우에는 이 점에서 다른 신문들과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의 신문들은 현실론을 내세워 무장투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을 전제로 한 문명개화론에 크게 집착하고 있었다.*5. 독립협회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침략행위와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국의 체면을 손상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대내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내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서 국민적 통합을 이룩해띠었다.
발해 문왕의 정치체제정비< 차 례 >I. 머리말II. 본문1. 문왕의 즉위와 대당관계2. 중앙체제정비와 전제왕권의 강화3. 문왕대의 천도4. 지방 제도 정비5. 유학과 불교의 발전6. 문왕의 대외정치III. 맺음말I. 머리말발해 문왕 大欽茂는 발해 전성기의 초석을 닦은 왕이다. 여기에서는 발해 제 3대 왕인 문왕이 즉위한 당시 시대적 배경을 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할 것이다. 또 高王·武王의 영토 확장 정책에 이은 문왕의 영토 확장 모습과 그의 선대들과 비교되는 문왕 특유의 문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문왕대에 해동성국이라는 발해 전성기의 틀이 다져져간 모습들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선대들의 영토 확장의 결과물인 넓은 영토를 천도, 지방행정구역 편제 등을 통해 정비하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달라진 발해의 위상과 함께 변하게 된 신라, 일본과의 관계도 간단히 소개하겠다.II. 본문1. 문왕의 즉위와 대당관계武王 大武藝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였다.) 대무예에게는 원래 長子인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있었으나 唐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次子인 대흠무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제 3대 문왕이 되는 대흠무는 737년 무왕의 뒤를 이어서 즉위하여 793년 3월 사망하기까지 57년간이나 발해를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은 발해의 전체 존속기간에서 거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단지 이러한 산술적 수치만으로도 그의 시대는 발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에 앞섰던 고왕 大祚榮이나 무왕 대무예의 통치시대가 발해의 건국기로서 주로 무력을 바탕으로 대외정복을 행하던 시기였던 데에 비하여, 그의 시대는 이러한 밖으로의 무력 정복이 마무리되면서 내부통치에 힘을 기울여 국가기틀을 확립하던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문왕이란 그의 諡號(시호)를 통해서 확인된다. 원래 시호는 당사자가 죽은 뒤에 그의 행적을 감안하여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왕처럼 것은 대당관계의 개선뿐 아니라 왕권의 안정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당은 책봉을 통해 문왕을 적자로서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문왕은 친당파를 사면함으로써 양국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이처럼 당과의 화평관계가 유지되자 발해의 국제적인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었다. 그리하여 762년 당은 발해를 정식국가로 승인하고 대흠무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시켜 책봉하면서 검교태위(檢校太尉)를 가수하였다. 이는 대무예대부터 발해의 국력이 꾸준히 성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대흠무가 대내외적으로 체제를 정비한 결과였다. 게다가 755년 일어난 안록산(安綠山)의 난과 뒤이은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그 국내정치가 심각한 상태에 도달했고, 그에 따라 발해를 보다 적극적으로 그 세력권으로 회유함으로써 동북지방에 대한 안정을 꾀하려는 당의 의도도 깊이 내재해 있었다.)2. 중앙 체제 정비와 전제왕권의 강화발해의 중앙 통치조직은 고왕(대조영), 무왕(대무예)대를 거치고 문왕(대흠무)대에 이르러 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고왕과 무왕대는 건국 초였던 만큼 주로 영토확장과 보전에 치중하였고 따라서 지배체제의 정비는 대흠무의 치세기에 이루어졌다. 특히 당과의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된 뒤 정비된 중앙행정관제는 당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무래도 발해는 신생국이다 보니 통일신라에 비하여 당제를 훨씬 더 모방하였다. 그렇지만 발해가 당의 관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며 발해 나름의 독자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대조영대에 이미 당과의 외교적인 관계가 열렸지만 당의 관제 수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문왕이 즉위한 다음해인 738년 6월,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三國志』·『晉書』·『唐禮』『三十六國春秋』를 구하고자 하였고, 현종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唐禮』는 『大唐開元禮』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까지 사용되던 貞觀禮와 懸慶禮에 서로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이를 정비하여야 한다고 張設이 당 현종에게 건의함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도성으로서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건국지인 구국을 비롯하여 현주, 상경, 그리고 동경이다. 구국은 현재의 중국 길림성 돈화시 오동성(敖東城), 현주는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 그리고 동경은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이 그 유지(遺址)로 비정되고 있다.) 그 각각의 위치는 오른쪽 지도를 참고하여 알 수 있다.여기에서는 문왕대에 이뤄진 세 차례에 걸친 천도에 대해, 그 시기 및 배경과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1) 구국에서 顯州(中京顯德府)최근 중국은 중경의 치소라는 서고성에 대하여 대대적인 발굴 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2000~2002년, 20004~2005년의 서고성에 대한 5년간에 걸친 발굴결과인『서고성』보고서에서는 서고성을 “현주”로 비정하고, 동시에 중경현덕부고지라고 하였다.)대흠무는 지배체제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대조영 이래의 도읍인 동모산을 떠나 뒷날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당시의 현주로 왕도를 옮겼다.) 발해의 천도에 대한 기록이 단편적이라서 천도 지역과 시기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발해의 천도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①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신당서』 권 43 하)② 天寶末 欽茂徙上京 直舊國三百里 忽汗河之東(『신당서』 권 219)③ 貞元時 東南徙東京…復還上京(『신당서』 권 219)④ 顯州 渤海國 按皇華四達記 唐天寶以前 渤海國所都 顯州後爲癸丹所倂 又有集·唐二州 竝撥屬本州 東至遼州九十里 又三百九十里至東京 西至宣州百二十里 南至乾州七里 北至醫巫閭山 (『武經總要』前集 권 16 하)이를 보면, 현주 즉 중경현덕부는 천보 연간(742~756)에 도읍하고 있었던 곳이고, 상경으로 천도한 시기는 천보 말년이었다. 그리고 정원 연간(785~805) 초반에 다시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그 뒤에 상경으로 되돌아왔다.)그런데 ②에서는 마치 舊國에서 上京으로 도읍을 옮긴 것처럼 쓰여 있다. 이에 따라 천보 연간에 도읍하고 있었수월할뿐더러 거란 등의 침입에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면서도 북방의 흑수말갈 등을 제어)하기에는 더 이롭다는 점을 강조한 연구도 있다.)발해의 상경 천도가 내재적 발전에 따라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상경성의 내·외부 성벽 윤곽과 궁전의 대체적인 규모 및 구조는 비교적 분명하게 소개되었으므로 천도의 사전 계획 유무를 가릴 최소한의 근거는 확보한 셈이다. 상경 천도가 안록산의 난 때문에 부랴부랴 이루어진 것이라면 치밀한 공간 구획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문왕이 말년에 거처를 동경으로 옮긴 사이 상경에 대한 대대적인 재건축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후로도 상경은 130여년 간 발해의 도읍이었기에 몇 번의 수축이 불가피했다는 점만큼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3) 상경에서 東京으로정원(貞元, 785~804년)연간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하였다. 동경은 고구려의 책성이 있었던 곳으로 고구려 중심지 중 하나였다. 동남으로 바다에 접하여 日本道의 출발점이자, 新羅道의 출발지였다. 이곳으로 천도한 시기는 대략 785년경 또는 7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그런데 785년경 이뤄진 동경 천도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천도계획 하에 이뤄졌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수도의 규모면에서 이러한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동경이 일반적인 천도계획에 의해 이뤄졌다면, 동경의 규모가 전 수도인 상경보다 크거나 최소한 비슷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천도 이전에 수도로서의 격을 갖추기 위한 도성의 재정비나 확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경은 처음 설치 된 이후 천도를 위해서 크게 구조가 확장되었다거나 격이 달라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중경과는 규모가 거의 비슷하고 상경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이것은 상경을 대신하기 위한, 계획적 정비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동경 천도는 한 국가의 성장과 그 위상에 걸맞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중심지인 수도로서의 격을 갖춘 정식 천도가 아니라 특정한 원인 또는 목적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신당서』에는 상경, 동경으로 천도하였다고 서술하였으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도읍, 왕성 등으로 서술하여 서로 모순되는 것같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송나라 때의 사학가 구양수 등은 100여년 전의 발해행정기구를 알고 있는 사실에 의해 서술하다보니 상경, 동경으로 천도했다고 쓴 것이고, 가담은 대흠무가 상경으로 천도한 사실까지에 의거하여 썼기 때문에 현주는 왕이 도읍한 곳이고 그곳에서 정북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신라 천정군에서 책성부까지 이르는데는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만약 발해 제3대 문왕이 785년 동경용원부로 이주한 사실까지 보고 썼다면 책성부라고 하지 않고 동경룡원부 혹은 용원부라고 서술했을 가능성이 더욱 많다. 가담의 생애 가운데서 어린시기와 연로한 시기를 제한다면, 가담은 주로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와 같은 시대에 생활한 사람으로 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도리기(道里記)』를 썼기 때문에 이면에서는 『신당서』보다 실용가치가 더 크다. 문왕이 중경, 상경,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위의 문헌기재로 보아 서경과 남경을 포함한 5경이 문왕후기 발해경내에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또한, 발해 5경제의 건립과 실시는 당나라 5경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당나라는 742년(문왕 대흥6)에 3경을 설치하였고, 757년(문왕 대흥21)에는 5경을 완전히 정비하여 실시하였다. 742년은 발해 문왕이 수도를 중경으로 옮기던 해이고 757년은 문왕이 수도를 상경에 옮겨 통치하던 때이다. 757년부터 문왕은 29년간 상경에서 전국을 통치하다가 785년에 수도를 동경으로 옮겨 9년간 통치하였다. 그러므로 문왕 대흠무는 당나라 5경제가 완전히 설치된 후 37년 동안 통치하였다. 때문에 발해는 문왕후기에 당나라의 5경제를 본받아 본국경내에 5경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발해는 제 3대 문왕 대흠무 후기에 5경제가 실시되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