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 모방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초실재가 존재하게 된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지각하게 된다- 오히려 실재보다는 비현실적인 이미지 또는 시뮬라크르를 초실재로 지각하게 된다2. 개인 이미지 메이킹- 첫인상은 55%의 시각, 38%의 바디랭귀지와 목소리, 7%의 대화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3. 쟁점관리 pr- 조직이나 개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요인들을 사전에 발견해 대응해나가는 pr 전략4. 대인 간 커뮤니케이션- 이용매체는 면대면, 전화, cmc(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5. 저맥락, 저문화 문화- 외재적 의미 표현(내재적 x)- 외향적 반응- 낮은 수준의 헌신, 철저한 시간 엄수6. cmc 커뮤니케이션-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 블로그, 이메일 등을 통해 일대일, 일대 다수, 소집단 등 쌍방향으로 송수신하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주제는 면대면과 cmc의 효율성 비교연구7. 미지의 자아- 타인에게 안알려진, 자신에게 안 알려진 자아8. 일관성 이론-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긴장을 느끼게 되면 긴장을 감소시켜 편안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즉, 생각이나 태도가 균형을 이룰 때 편안함을 느끼며, 불균형을 이룰 때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9. 커브스 헬스클럽의 errc10. 브랜드- 차별적이지만 좋지 않은 시장 진출이 어려워 브랜드 파워가 있다 (x)11.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쌍방향- 소비자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제품, 서비스, 기업에 대한 연상, 그리고 관계커뮤니케이션, 소비자에게 인식하고 지각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은 소비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벌이는 광고, 홍보 등 다양한 설득 커뮤니케이션12. 휴먼브랜드 애착연구- 인기는 대중들이 휴먼 브랜드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 유대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13. 깨친 유리창의 특징- 사소한 곳에서 발생하며 예방이 용이하다(x): 예방이 쉽지 않다- 깨진 유리창을 발견해도 그냥 스치고 지나간다(o)- 초기에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지 않으면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o)- 깨진 유리창을 투명테이프로 숨기려 해도 여전히 보인다(o)- 깨진 유리창을 제대로 수리하면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준다(o)14. 쟁점/의제 설정이론- 방송만을 통해 중요한 쟁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론(x): 다양한 미디어 통해- 쟁점 현저성: 쟁점이 빈번히 노출되어 실질적으로 영향을 주는 쟁점에 영향을 미친다 (o)- 개인적 관여도: 쟁점이 개인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자각하는 정도 (o)15. 쿰스의 위기 대응전략- 환심사기 전략강화: 우리의 긍정적은 부분을 검토하자초월: 실제 문제는 더 심각하다칭찬: 여러분의 조언에 감사드린다.16. 위기 상황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일관성- 불확실성관리- 위기 대응- 위기 해결- 위기 교훈17. 위기 회복탄력성이란?- 다시 튀어오르거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 온다 또는 역경과 어려움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힘이라는 뜻으로 정신적 저항력, 스트레스나 역경에 대한 정신적인 면역성, 내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역경을 성숙한 경험으로 바꾸는 능력 등으로 정의한다. 위의 정의들을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위기회복탄력성은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위기를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18. 파우웰의 효율적 경청19. HURIER- H, 듣기: 나는 화자가 어려운 말을 화더라도 집중해서 듣는 편이다.- U, 이해: 나는 화가 많이 난 상황에서도 상대방 말을 잘 듣는 편이다, 나는 화자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편이다.- R, 기억: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I, 해석: 나는 대화 시 화자의 목소리 어조에 민감한 편이다.- E, 평가: 나는 최종 의사 결정하기 전에 화자의 말이 논리적이었는지를 분석한다.20. 감정 대화- 감정 대화에는 열정과 따뜻함을 내포한 대화도 있고 실망과 분노를 유발시키는 대화도 있을 수 있다.- 흔히 대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되는 것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감정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미리 한다면 상대방과 느낌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이 타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나? 억제해야 하나?21. 효과적인 대화법(CARE)- C(집중): 상대방의 이야기를 집중하면서 적극적으로 경청, 눈맞춤, 적극적인 자세로 경청- A(인정):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거나 끼어들지 않는 것- R(반응): 부드러운 표정, 고개 끄덕임, 앞으로 기울이는 자세, 맞장구- E(감정통제): 대화 도중에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나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그 순간에는 감정을 잘 조절22. 호감의 원천, 후광효과 이론23. 칭찬과 유머의 기술- 고래 반응이란 부정적인 면 또는 못한 일보다는 긍정적인 면 또는 잘한 일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24. 업무 수행의 ABC를 실행하라- A(활력소): 실천 가능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구체적 업무 훈련 목표를 설정하여 범고래들을 칭찬 또는 물고기 등의 먹이를 줌으로서 동기화 시킨다, 즉 지원들에게 동기 부여를 해야만 업무 수행과 관련한 적절한 태도가 나올 수 있다.
< 한국사, 뿌리 깊은 이야기 과제 2 >조선대학교과목: 한국사, 뿌리 깊은 이야기제출일자: 2019.05.31문1) 당신은 A국가의 최고 통치자이다. 이웃 나라인 J국이 전쟁을 일으켜 침공해 왔다. 뜻밖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방어선이 뚫렸고, 당신이 있는 수도가 위험해졌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국가의 형태, 시대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중세시대의 왕조국가로 가정해본다면 우선적으로 각 부의 핵심 관료들과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병력, 식량을 보존시키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최고 통치자와 핵심 관료들이 죽거나 적에게 사로잡힐 경우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하고 적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당시에는 왕이 잡히고 수도가 함락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패배 혹은 멸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적군이 쉽게 점령할 수 없는 곳까지 대피한 후 현재 정보를 취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최고 통치자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인식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 적은 대규모이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들이 존재해야 국가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전에 생각해볼 수 있는 상책은 항복이다. 전쟁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전체적인 피해와 항복했을 경우 J국이 제시하는 조건의 저울질이 먼저 필요하다.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닌 경우 대부분의 경우에는 항복을 선택한다. 명분보다는 반드시 실리를 취하고 소수를 위해 다수가 피해를 입지 않는 경우라면 반드시 항복한다.하지만 전쟁을 지속해야하는 경우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암살단을 파견하는 것이다. A국은 본인이 집권한 이래 J국의 상인, 백성, 농부, 기생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할 수 있는 암살단을 훈련, 조직화해왔다. 1개 조의 인원은 약 10명 내외로 하여 15개조를 파견하여 5개 조는 J국의 왕 혹은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J국의 인사들을 암살한다. 나머지 5개 조는 각각 J국의 내분을 유도하거나 J국의 다른 인접국에 접선하여 J국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은 매우 크지만 확률이 1할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투자한다.그와 동시에 현재 적군의 병력, 식량, 함락에 걸리는 예상 시간, 대피에 걸리는 시간, 대피로 등등 다양한 조건들을 종합하여 종합 수도 대피 계획을 수립, 실행한다. 최고 통치자인 나의 역할과 목숨도 중요하지만 백성의 역할과 목숨도 중요하므로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함께 작전에 참가한다. 또한 각 지방에 왕족, 장군들을 파견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각개전투를 유도하여 적군의 보급선을 끊는데 주력을 다 한다.
1-(1) 신라의 건국과 성장신라는 진한의 12개 성읍국가 가운데 하나, 마한은 54개 성읍 국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백제, 박혁거세- 석탈해,박혁거세 거서간-차차웅-이사금(임금)-마립간-왕, 내물=나밀=나물마립간4세기 나물마립간 때부터 중앙집권귀족국가로서의 시작(김씨의 왕위 독점 세습)석씨는 왕족에서 제외되고 박씨는 왕비의 성으로 남음, 신라 하대에 박씨 왕이 다시 등장신라는 눌지마립간(417~458) 때에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지증왕과 법흥왕 때에 이르러서였다.2-(1) 신라의 발전신라’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 는 뜻이었다. (德業日新 罔羅四方) - 덕업일신 망라사방신라는 지증왕 때에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우경이 시작되고, 수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생산력의 발달)* 이사부의 성씨는 김씨(김이사부, 나물마립간의 4대손, 삼국유사에서는 박씨로 기록, 논란이 있음)* 지증왕 때 순장 폐지신라는 지증왕의 개혁을 거친 뒤의 법흥왕에 의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성하였다.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하였다. 법흥왕 23년(535)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다.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법흥왕 14년(527)~22년(535) 경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 이차돈의 순교(하얀 피가 꽃이 됨)* 이차돈의 성씨는 박씨(박이차돈)불교의 공인은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신라의 비약적 발전을 추진한 것은 진흥왕(540~576) 이었다. 진흥왕은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여 신라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거칠부의 성씨는 김씨(김거칠부, 나물마립간의 5대손)‘개국(開國)’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하였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황룡사를 창건하였다.(불교를 진흥)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의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를 쳐서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한강 상류 지부적 성격의 집사부의 수상인 ‘중시(中侍)[뒤에 시중(侍中)]가 상대등보다 중요시 되었다.1-(1) 통일신라의 사회와 경제신라의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사전(賜田), 마거[목마장], 조(租) 등을 받았다. 일반 관료는 녹읍(祿邑)을 지급 받았다. 녹읍이란 그 수급자가 토지로 부터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조(租), 용(庸), 조(調) 체제에서 조(租), 용(庸)의 수취를 의미한다. 신문왕 9년(689) 녹읍을 폐지하였다.대신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官僚田)이 지급되었다. 또한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주어졌다.이는 전제왕권의 강화된 것과 관련된다. 신문왕때 폐지되었던 녹읍이 신라 하대에 가면 다시 부활된다. 대신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이는 왕권이 약화되고, 다시 귀족들의 힘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귀족들의 중심지는 왕경인 금성(金城)이었다. 금성에는 178,936호가 살았다고 한다. 금성에는 35금입택(金入宅)과 4절유택(四節遊宅)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귀족들의 중심지는 왕경인 금성(金城)이었다. 귀족들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고,노동(奴童)이 3천 인이요, 갑병(甲兵)과 우(牛), 마(馬), 저(猪)가 이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1) 통일신라의 문화통일신라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지배한 것은 불교였다. 신라에는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등 교종의 5교가 성립되어 있었다. 이들 여러 교파 중에 화엄종이 가장 귀족사회의 신임을 받았다. 신라의 화엄종을 처음 종파로서 성립시킨 인물이 의상이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원효는 당대의 고승 중에는 예외적으로 당에 유학하지 않았으나 중국에서조차 존경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유교(儒敎)도 새로운 사상으로 대두되었다. 유교의 대두는 전제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정비와 관련이 있다. 이 유교를 주로 신봉한 것은 육두품 출신들이었다.고(張保皐)는 신라 흥덕왕대(826~836)에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황해를 가로질러 신라와 당의 연해 지방을 연결하는 일대 세력권을 구축하였다.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와 권력을 차지하게 됨. 장보고(張保皐)는 신라의 왕위쟁탈전에 끼여 듦. 신무왕(神武王)을 왕위에 오르게 함.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는 문제로 중앙 귀족들에게 암살 당함.2-(1) 장보고 세력의 형성 과정장보고(張保皐)의 도당 시기난 당에서의 행적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장보고는 신라의 청해진과 당의 적산포를 양축으로 하여 일대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황해를 중심으로 하는 연안세력의 교역과 교역로는 한반도 내의 세력에게는 발전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것이었다. 능력있은 자들의 도당(渡唐)이 활발해 짐. 여기에 장보고의 세력 기반이 된 재당 신라인 집단의 형성이 이루어진 것.3-(1) 장보고 세력의 성향장보고 세력의 기초가 되는 인적(人的) 기반은 지역별로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적산포 중심의 도당 신라인. 다른 하나는 청해진 관할 하의 서남해안 주민들. 장보고 세력은 모두 신라 골품제 체제하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부류들이다. 이들은 이미 또는 점차 신라의 사회 체제로부터 이탈해 가고 있던 세력들이었다.장보고 세력은 기존의 신라 사회로는 편입되거나 회귀할 수 없었다. 장보고 세력은 기존의 신라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장보고와 신라 왕실의 통혼 기도는 신라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기존의 체제 질서 안에서 청해진 보다 우위에 있던 무주(武州) 출신 염장(閻長]에 의해 장보고는 암살되고, 그의 세력은 소멸되었다.4-(1) 장보고 세력의 의미장보고 세력이 이룩한 새로운 지배질서는 신라가 안고 있던 골품체제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이는 제2, 제3의 장보고 세력과 같은 세력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실제 장보고에 뒤이어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출현하였다.특히 해상세력에 기. 이를 통하여 우리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역사적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은 자주적 통일이었다. 고려는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신라의 통일과는 달리 자력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중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고대(古代)’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넘어,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로 역사가 발전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지방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 중앙에만 집중되어 있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3-(1) 고려 초기 왕건의 정치태조 왕건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풍수지리설, 그리고 유학이었다. 불교와 픙수지리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반면 유학은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태조 왕건의 정치적 자세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에서 전통적인 제도의 모순과 폐단을 시정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태조 왕건의 정치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 왕조의 기반 확립이었다. 태조 왕건의 또 하나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민심의 안정이었다. 태조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당시 사회의 사상면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 지리도참설· 민간신앙, 그리고 유교를 정치면에 모두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태조 왕건은 광범한 친선정책과 포섭정책을 시행하였다. 호족을 비롯하여 신라와 후백제의 잔존세력 그리고 발해유민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1-(1) 고려 초기 왕권과 호족고려 시대를 크게 나누면 4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번째 시대가 호족의 시대이다. 호족의 시대는 대체로 918~981년까지이다. 이 시대의 왕권은 약하였으며 강력한 호족세력의 지지를 받는 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고려 초기의 정권 형태를 호족연합정권이라 부르고 있다. 왕권이 호족과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호족세력이 강대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방 호족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닌 채단 국왕에게 돌아갔다. 이어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된다. 무신들은 강화를 반겨하지 않았다. 무신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강화에 대한 반대를 노골화 하였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폐하고 정권을 잡았다. 무신정권의 유지와 항몽정책의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을 복위되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임유무가 일시 정권을 잡았으나 원종에 의하여 살해되었다.이로써 무신정권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1-(1) 고려의 대외 정책과 국제 관계고려의 대외 정책은 기본적으로 북진친송정책 (北進親宋政策)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북진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위하여 송나라와는 친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려의 북진정책은 태조 이후 후대의 여러 국왕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은 자연스럽게 북방 민족과의 충돌의 가져왔다.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외교 담판, 강동6주 획득거란의 2차 침입: 개경 함락, 양규의 선전으로 격퇴거란의 3차 침입: 강감찬의 귀주 대첩여진은 발해의 지배하에 있다가 발해가 망한 뒤에는 고려를 상국으로 섬겨왔다. 아골타(阿骨打)에 의하여 여진은 통일되어 건국(1125년)되니 이것이 금(金)이다. 금은 건국 후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중요시 하였던 나라는 송(宋)이었다. 고려는 송을 문화적 선진국으로 생각하였다. 송의 문화는 고려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송판본은 고려 목판인쇄의 발달에, 송자(宋磁)는 고려 청자(靑磁)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1-(1) 고려의 불교무신정권 이후 고려 불교에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선종에 있어서의 조계종(曹溪宗)의 확립이었다. 의천(義天)은 교선통합(敎禪統合)을 주장하였으나, 교종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의천은 교관겸수를 주장하였고,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였다. 조계종을 크게 떨친 승려는 지눌이었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한다.
나르시시스트 홍길동: 혁명은 없다홍길동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개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신분제도와 그로 인한 차별,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그가 만든 ‘활빈당’이란 도적떼의 의미에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에 따르면 "우리 이제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탈취치 말고, 악 읍 수령과 방백의 준민고택하는 재물을 노략하여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할지니, 이 동호를 '활빈당'이라 하리라“라고 활빈당을 정의하고 있다. 즉 홍길동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활빈당이라는 조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활빈당의 활동은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경제적 불평등 해소는 청동기 시대에 빈부격차가 발생한 후 지금껏 인류 최대의 숙제이자 숙원이었다. 자본론을 저술한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평등 이데올로기의 공산주의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외면하였고 결국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으로 실패한 사상이 되었지만 그전까지 인류의 주류 이데올로기로써 지구의 절반이 이 사상에 사로잡혔다. 그 후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여러 가지 사상이 등장했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많은 고민과 수정이 이루어졌다.또한 나폴레옹과 같은 일명 혁명가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인물들은 그 시대의 사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식과 더불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왔다. 따라서 홍길동의 활빈당 활동은 과연 홍길동이 진실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부자들에게서 재산을 뺏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본질적인 경제적 불평등은 해소될 수 없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이 주창했던 여전론, 균전론 등과 같은 토지제도 개혁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홍길동은 도덕적인 우월감에 취한 나르시시스트이던가 혹은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비전도 제시 못하는 무능한 인간인 것이다.본문을 확인해보면 “이 아이 점점 자라매 기골이 비상하여 한 말을 들으면 열 말을 알 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일일은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 왈. 이 아이 비록 영웅이나 천생이라 무엇에 쓰리오. 원통하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홍길동은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고 영웅이라 불릴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인물로 설명되며 의적 활동을 했을 때 홍길동의 힘과 술법, 재능은 도저히 평범한 인간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홍길동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혁명가라기보다는 광적인 나르시시스트일 확률이 더 클 것이다. 만약 정말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했더라면 ‘천재이자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홍길동이 재물을 노략해서 나누어주는 하책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하는 정의로운 자기 모습을 사랑했을 뿐이다.
< 성 평등 >자주 울어도 되는 남자와 조신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조선대학교제출일자: 2019.05.09제출일자: 2018.10.31현재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슈는 아마도 성 평등이 아닐까 싶다. 최근 몇 년간 성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하였고 이는 일명 ‘페미니즘’ 활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페미니즘의 부작용과 과격한 활동에 대한 남성들의 불만도 증가하면서 남녀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이는 각종 수치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는데 2019년 05월 01일 세계일보에 따르면 사회 이슈 가운데 남녀 갈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으며 사회 분야에서는 '성(性)'에 관한 이슈는 상위 10위 중 6개로 나타났다. 이 중 ‘미투 운동(나도 당했다)’은 2위에 올랐고 4위인 ‘구하라 남자친구 폭행 사건’과 5위 ‘이수역 폭행 사건’은 남녀 간에 벌어진 폭행 사건으로 특히 이수역 사건의 경우 사건의 경위를 둘러싼 치열한 남녀 공방이 일었다. 6위에 오른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7위 ‘낙태죄 폐지 논란’ 등도 남녀 간 논쟁으로 번졌다.안타깝게도 이러한 논쟁과 갈등은 성 평등을 위한 어떠한 방향성도 제시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 평등과 성 갈등을 바라보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첫째는 관점의 확대이다. 세상은 각기 다른 종교, 가치관, 신체, 사회적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합체이다. 그러나 현재 세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남성’, ‘여성’ 이 두 가지의 성별이라는 틀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관점과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자신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은 동지이지만 경계선 밖은 무조건 적으로써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성’을 결국 죽게 만든다.인류가 현대를 맞이하면서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많은 인종, 종교, 문화가 한데 섞이게 되었으며 ‘글로벌, 한류, 세계 무역, 다국적 기업’ 등은 이를 잘 보여주는 용어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관점과 태도는 살아남을 수 없고 살아남아서도 안 된다.성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동성애,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등등 근대적인 기존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고 강요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이며 결국 성차별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과 생각이 있다. 모든 사람의 외모가 똑같지 않듯이 성 평등에 대한 생각도 다양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성 갈등을 해소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둘째는 성차별에 대한 이해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우선시 돼야 할 것은 그 문제의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성차별과 성 갈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고민이 필요하다. 성차별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유교의 영향을 빼놓을 수가 없다. 유교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삼종지교’라는 도덕 규범이 있다. 이는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로 여자는 어려서 어버이께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의미한다. 특히 조선 중기에 성리학이 더욱 발달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성차별은 가속화되었다. 이것이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그동안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고 희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남성들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아주 사소한 언어에서부터 사회적 진출까지 많은 분야에서 여성들은 억압을 받아왔다. 비록 지금에서는 많은 여성차별이 해소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많은 차별들이 남아있다. 특히 성차별 교육과 제도는 아주 미미한 상태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지원과 교육, 법률 개정, 제도 개선 등이 있어야만 반드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다만 이러한 차별에 대한 원인을 남성에게 돌리는 것 또한 잘못된 태도이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성 역할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일반적으로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남성이 사냥을 전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모든 국가들은 농경이나 목축, 전쟁 같은 노동력이 많이 소모되는 생산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권력과 돈이 남성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것이다. 여성들이 여성으로써의 역할을 강요받았듯이 남성 또한 남성으로써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따라서 성차별의 해소를 위해서는 성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이해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선결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