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식(스캇 맥나이트)우리는 몸을 사용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가시적이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몸으로 ‘영성을 행하고’싶은 욕구가 있다.바로 이런 면이 금식을 하는 데 있어 문제를 야기한다. 금식은 몸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촛불이라든가 성화, 기도 방석에는 익숙하지만 온몸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어색하다. 금식은 몸의 언어인데 그것은 몸에 대한 이미지에서 나온 말이다. 몸과 영혼이 통합된 건강한 몸 이미지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는 한 몸의 언어인 금식도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고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몸으로 ‘영성을 행했다’. 하지만 교회 역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이러한 몸의 중요성은 놀라울 만큼 하찮게 되어 버렸다.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하나님을 이 땅 위에 드러내고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다스린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비롯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성경은 모든 측면들은 유기적인 통합체를 이루며 함께 기능한다. 에이콘(형상)은 각각의 측면들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하나의 통합된 인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양한 측면들을 두 가지 법주, 즉 ‘몸’과 ‘영혼’이라는 범주에 소속시켜 버렸다. 여기서 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을 그다지 좋지 않는 것이고, 영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선하고 영원하다. 만약 근식이라는 기독교 전통의 깊은 차원을 다시금 발견하고 싶다면, 반드시 몸과 영혼으로 나뉜 두 범주를 결합시켜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인생의 엄숙한 시기를 제대로 대면하고 자연스럽게 금식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날 사람들은 몸에 대한 교회의 잘못된 관점을 물려받았다. 이 이원론은 서양인 DNA의 한 부분이 된것이다. 서구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몸과 영혼의 분리되지 않는 유기적 통합을 받아들이는 데 늘 어려움을 겪어 왔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몸 이미지는 흔히 네 가지로 정리해 보면 1)정복해야 오로지 하나님께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 금식의 핵심이다.자연스런 반응으로서의 금식에 대한 강조는 금식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께 공감하게 되고, 엄숙한 상황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성격의 인물들이 금식을 했던 가장 일반적인 상황은 죄의고백이 필요한 엄숙한 순간이었다. 이런 중류의 금식은 ‘몸의 돌이킴’이라고 부를 수 있다.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간은 모모가 영혼의 통합체였기 때문에 회개는 자연히 금식이라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거짓된 깃에서 돌이켜 빛의 길로 들어서고 , 백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비통한 심정을 공감하는 그 순간은 지극히 엄숙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순간에 음식을 먹지 않기로 선택했다.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회개와 같이 매우 엄숙한 상황에도 좀처럼 금식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몸과 영의 고상한 통합성을 좀더 의식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몸의 돌이킴이 필요하다.-사순절과 고난주간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절기를 만드시고 그들이 해마다 기념해야 할 것을 일러 주셨다. 해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한가지 일을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바로 지난해에 지었던 모든 죄를 회개하는 일이었다. 그 날을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이라고 불렀고,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째 달의 10일을 ‘속죄일’로 지키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고백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덮어 주셨고 성전을 정화했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다시 화목한 관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는 금식은 필수였다.금식의 정의를 속죄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첫째로, 죄를 고백하고 속죄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둘째로 그럼 엄숙한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응은 육신의 안락과 즐거움은 물론 먹는 일조차 단념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주님을 만난 후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잘 알려진 사실 외에도 사도행전의 저자는 또 한가지 사실을 들려준다. 사울이 그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 순간은 그에게는 너무나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고, 자신의 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고, 하나님이 그의 죄를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절절히 공감했던 순간이었기에 바울은 사흘 동안 완전금식을 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몸을 돌이킴을 위한 호소금식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하는 몸의 돌이킴이다.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로 표현하는, 윌 몸에 베어있는 몸의 언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의 돌이킴은 회개와 회심의 순간, 용서와 치유하는 은혜를 경험하는 엄숙한 순간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국가적인 도덕성의 위기사사기 19-20장에 나오는 한 레위인과 그의 첨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 백성의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절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레위인은 첩은 유다 땅 베들레헴 사람이었고 레위인든 에브라임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자신의 원래 습성대로 간음을 행한 후 남편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레위인은 아내를 찾아 길을 나셨다. 마침내 그녀를 찾은 레위인은 그녀를 데리고 다시 에브라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던 날 밤, 그들은 베냐민 지역에 위치한 기브아라는 곳에 이르렀고, 한 노인이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다. 레위인이 지역에서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기브아 남자들은 그 집으로 몰려가 노인에게 레위인과 성관계를 맺을 테니 그를 끌어내 달라고 요구했다. 다급해진 레위인은 자신의 아내를 그 남자들에게 내주었고 그들은 밤새도록 그녀를 무자비하게 강간했다. 여인은 간신히 그 오인의 집까지 돌아왔지만 결국 문 앞에서 쓰러져 버렸다. 레위인은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일을 했는지 안중에도 없이 그녀를 향해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다. 하지고 지목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사랑하는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아들의 갑작스런 병과 잇따른 죽음 앞에서 다윗이 보인 반응은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일체 중단한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지’않으셨고 뜻을 바꾸지 않으셨지만, 다윗은 몸의 간구를 멈추지 않았다.-마음의 간절한 소망우리는 때때로 무언가를 원하기도 하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뭔가를 원하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서 몸으로 간구하기도 한다. 사무엘상 1:1~20을 보면 한 여인의 절박한 갈망이 몸의 간구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나는 아이를 갖기 원했고 스스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한나와 함께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간 남편 엘가나는 한나에게 두 사람 몫의 희생 제물을 주곤 했다. 한 몫은 한나를 위한 것이었고 또 한 몫은 있지도 않는 한나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이러한 배려는 도리어 한나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녀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을 엘가나의 두 번째 아내 브닌나였다. 자녀가 있었던 브닌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는 조롱하며 멸시하곤 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여기를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했다. 실로의 성전에 올라가 온몸으로 간구했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래 왔듯이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한나의 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었다. 금식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몸의 간구를 통해 통합된 인격으로 거룩한 소망을 표현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귀감이 될만하다.-하나님의 인도이스라엘를 꾸몄다. 어느 나르 그는 요나단이 다윗을 두둔하는 것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창을 꺼내어 요나단을 죽이려고가지 했다. 다윗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울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다윗의 목숨을 이미 파로 목숨이나 다를바 없었다.아바지의 의도를 알아챈 요나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하고 금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격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나단이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따나고 그 달의 둘째 달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느 ㄴ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의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요나단의 금식은 자기 자신이나 다윗의 목숨을 보존 해 주실것을 바라는 몸의 간구가 아니었다. 그것을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비통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침구 다윗에게 확식하게 임박한 줌음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안겨준 수치에 대한 충격으로,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금식하기 시작했다.-슬픔과 금식슬픔이야말로 모든 형태의 금식의 밑바탕에 있는 동기임에도, 이 슬픔이라는 주제를 충분히 언급하는 책은 드물다. 사실 앞서 다룬 ‘몸으 돌이킴’으로서의 금식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슬핌이 너무나 커서 먹기를 거부하는 행위다.’몸의 간구’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로운 상황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서는 결코 만족되지 않을 간절한 소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슬픔을 금식이라는 집에 이따금 찾아오는 불편한 가족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몸의 탄식’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게 금식의 본질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비통한 상황에 압도당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고 그 상황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기 위해 음식을 거부한다.-바울과 몸의 훈련우리는 무언가를 얻기위해, 즉 하나님의 용서나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몸의 훈련으로서의 금식은 더 거룩해지고,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다.MAT1
종교개혁사상앨리스터 맥그래스15세기 말 유럽에서는 교회건축이 유행 하고 있었으며 순례자와 성자의 유물수집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조된 종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제도교회가 책임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거에 대한 비판여론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신앙 쇠퇴의 증거로 인정되었던 이러한 비판은 실제로 신앙의 성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공교회의 권위는 낮아지고 일반인의 신앙이 고조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의 증가는 주로 평신도들에게 국한되었었다. 15세기 독일의 신앙에서 중요한 측면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이었다. 교구 성직자의 낮은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은 것을 반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말과 가축 무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이런 낮은 성직자 임금에 조금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과세 면제 혜택은 일반인들의 반발을 야기 시켰다.르네상스 후기에 프랑스 주교들은 대다수가 귀족 출신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귀족적 배경과 감독 및 고위 성직자 신분은 그들의 장인들과 농부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1520년대의 경제적인 생존위기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수 있었다. 프랑스 종교개혁은 1520년대 중에 고위성직자들과 농촌주민들 사이에서 점점 증폭되어갔던 이러한 긴장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교황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독일이 그러하였다. 루터가 1520년에 쓴 유명한 개혁논문 [독일 귀족에게 고함]은 교황과 성직자의 비행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그 전 세기에 회자되고 있던 비슷한 목록과 병행된다. 루터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교회에 대한 불만의 전통에 보조를 맞춤으로써 그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중세 후기의 대중 신앙에서 가장 중요환 요소는 어쩌면 죽음과 관계된 신앙과 종교행위를 함께 나누는 집단일 것이다 여기에서 사제의 참석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죽은 자를 위한 그러한 의식에 참석하게 하는 비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에 성직자가 반감을 사는 일이 불 교리에 대한 권위에 도전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중세 후기의 신학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하며 교황은 세속 통치자들에게 그의 종교적인 뜻을 관철시킬 능력을 일어가고 있었다. 중세 후기 교회는 이처럼 이중적인 권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종교개혁의 형성에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관련이 깊다. 20세기의 저술가들에 의해 ‘인문주의’란 용어가 사용되면서, 우리는 보통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반종교적인 철학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14,15,16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상당히 종교적이었으며 그들의 관심은 기독교회를 철폐하는 쪽보다도 오히려 갱신하는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인문주의’란 용어는 정작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었다. 이 용어는 대학에서 ‘인문학’ 이나 시, 문법, 수사학과 같은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인문주의를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인문주의를 고전학문과 언어학에 전념하는 운동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둘째는 인문주의를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으로 보는 견해이다. 먼저 첫번째 견해를 살펴보면 인문주의는 본질적으로 고전 시대 연구에 전념하는 한문운동이라 여겨질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록된 웅변의 모델로서 고전을 연구하며 거기에서 영감을 얻고 또한 훈련하고자 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의 저술들은 글과 말에서 웅변실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되고 있었으며, 고전학문과 언어학에 대한 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즉 고대의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둘째의 견해는 인문주의 저술들이 강도높게 연구되고 많은 인문주의 작가들이 플라톤주의를 애호하고 있었으나 다른 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좋아했다. 이는 르네상스 전체를 총괄해서 인문주의가 철학적으로 동질성을 지녔다고 여기는 주장에 장애가 되는 요소이다. 또한 어떤 인문주의자들은 마수로가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런 것은 이 운동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와 조화되기 어렵다. 즉 인문주의가 어떤 일관된 철학을 결여하고 있었고 어떠한 하나의 철학이나 정치사상으로 이 운동이 지배되거다 자신들에 맞는 것을 수용하고 개발 시켰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스위스의 인문주의는 강력하게 윤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윤리적 행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성향은 칭의론 과의 관계가 깊은데 루터파가 교리를 중시하도록 자극했던 문제들이 스위스 권역에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칭의는 관심 밖의 문제였다. 따라서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루터는 도덕을 위협하는 과격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는 비엔나 대학과 바젤 대학에서 교육받은 쯔빙글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슬로라 주의는 1250~1500년 기간 융성하였으며 종교적 신념들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강조점을 두었던 중세시대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 는 특정의 신앙체계를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신학을 조직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아퀴나스는 모든 운동이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제일 원일이 존재하고 제일의 부동의 원동자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 이론의 비평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고 여겼다. 곧 기독교 신학 본유의 합리성을 철학을 활용해 증명하고 다양한 요소들의 관계를 세밀히 조사하여 기독교신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스콜라주의는 잘해야 변증법을 능숙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만, 서투른 라틴어로, 호소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는 수사학과 변증법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에 전자의 우월한 호소력은 사실상 후자의 쇠퇴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초에는 많은 학생들이 스콜라주의가 전통적으로 지배해온 대학을 피하고 인문주의 교육 프로그램을 지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6세기가 시작될 즈음에 그 학문의 중심지에서조차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어거스틴 사상의 중심 주제는 인간 본성의 타락이다. 그는 죄를 생득적인 인간 본성으로 묘사한다. 그것을에 많은 비평가들이 ‘펠라기안’ 이라고 낙인찍은 칭의론을 받아들였다. 이것의 핵심적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다. 이 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칭의에 필요한 조건을 규정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그를 받아들이시기로 정하신다. 즉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하나님은 계약에 의거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비아 모데르나와 펠라기우스의 유사성은 모두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다. 즉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상해야 할 의무 아래 둔다고 보았다.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교리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있는 인간의 구속을 성취셨다는 것이다. 구원론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구속 체험을 묘사하는 용엉이며 ‘칭의’는 구원론이란 용어가 이루는 이러한 연계망의 한 구성요소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의롭게 된 상태를 가리키며 루터는 종교개혁 프로그램에서 중심문제는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를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은혜’를 이야기 했다.‘은혜’ 란 자격이 없고 합당하지 않은 인간에 베푸시는 신적 호의를 의미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어떤 것이 필요한데 그 어떤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발흥하는 가운데 그 중심문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해 교회는 어떠한 확신 있는 답도 제시할 수 없었다.루터는 초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세우셨으며, 이 계약에 의해 하나님은 최소한의 특정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만 한다고 주장하며 비아 모데르나의 견해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루터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 가 편벽되지 않은 신적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개인들을 완전히 공평하게 심판하신다. 만일 개인이 칭의에 필요한 기본적인 전제조건들을 충족시키앙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준비된 상태에 잇는 것이다. 신앙의 효력은 믿음의 세기에 달려 있지 않고 믿는 대상에 대한 의존성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을 우리 믿음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다.세 번째 조항에서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그녀)가 자기의 믿음으로 믿기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칭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시며 그래서 죄인에게 필요한 모든 행위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의’ 는 우리가 칭의의 전제조건을 충족시켰는지를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그 전제조건을 충족 시킬 수 있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다.개혁교회는 사도교회의 영적 모델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새 소망으로부터 생겨났다.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사상의 하나는 시의 주권 개념이다.쯔빙글리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문제는 더 이상 교과서적인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의 존재여부에 관해 직접 겪었던 문제였다. 쯔빙글리의 신학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절대적인 하나님 주권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완전한 의존성을 이해했던 것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 개인이 구원받거나 정죄되는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이며, 그는 영원 전부터 자유롭게 결정을 내리는 분이다. 쯔빙글리에게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곧 행위의 핵심이며 주권자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제기하시는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 루터는 ‘율법’ 과 ‘복음’ 을 날카롭게 구별하지만, 쯔빙글리는 이 둘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본다.쯔빙글리로 하여금 마침내 인문주의와 결별하게 만들었던 것은 갈수록 높아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관심이었다.칼빈의 사상은 인간의 죄성과 신의 전능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 관심은 예정 교리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길들이고 낮춰서 순종하게 만들었다’ 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무능성과 하나님의 전능성이라는 ”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그는 서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을 자신의 손자의 이야기를 통해 소개한다.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손자가 아내인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성경을 펴서 평상시와는 달리 침묵가운데 경건하게 읽는 행동을 했다는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상상 속에서 이것을 비유로 발전시킨다. 유진 피터슨, 그는 이 책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들었던 성 요한의 권면을 우리에게 전해준다.영적 독자들의 성경에 대한 그 사랑스럽고 순진한 행위가 평생에 걸쳐 경건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독서로 지속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소홀히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대로 살기 위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성경이 존경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지적한다.유진 피터슨은 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독서법을 권한다.성경을 삶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계시 의존적 독서법,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다.일반적으로 렉치오 디비나는 ‘성경 읽기, 묵상, 기도, 관상, 4단계의 과정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그 동안 카톨릭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독서법 혹은 기도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진 피터슨은 ‘온갖 영성’들로 만연한 기독교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길로 이 렉치오 디비나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의 고질병이 성경을 소유하고 있을 뿐 제대로 읽지 못하는 데에 있다는 진단과 거기에 따른 유진 피터슨의 처방전이기도 하다.그렇다고 유진 피터슨이 렉치오 디비나를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관상 기도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관상은 삶이다. 관상이란, 말씀이 곧 생명이라는 믿음 위에 입각한 삶이다. 그는 렉치오 디비나를 성경을 읽는 방법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 텍스트를 살아내는 도(道)인 것이다.그 길에는 도처에 ‘독자여, 주의하라’는 경계 표지판이 서 있다. 책장을 덮고 기도의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순간,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일상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영적 독서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때다. 영적 독서는 책보다 삶에 방점을 찍는 독서다. 성경을 들고 읽는 독자는 무엇을 읽고 있는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주여,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책상머리가 아닌 생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그 길에는 도처에 ‘독자여, 주의하라’는 경계 표지판이 서 있다. 책장을 덮고 기도의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순간,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일상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영적 독서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때다. 영적 독서는 책보다 삶에 방점을 찍는 독서다. 성경을 들고 읽는 독자는 무엇을 읽고 있는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주여,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책상머리가 아닌 생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또한 는 은유는 말의 능력을 신뢰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영적 독서는 성경과 말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표현을 빌어서 성경이 말씀을 존중하는 독자를 요구한다고 말한다.‘언제든지 책에만 얼굴을 묻지 않고, 종종 뒤로 기대서 자신이 다시 읽은 문장을 생각하며 그 의미가 혈관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는’ 독자라야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다. 영적 독서는 무엇보다 성경 언어의 신성함을 존중하는 독서여야 하는 까닭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읽기가 성경을 모독하는 행위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유진 피터슨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한 과제가 성경의 신성한 언어를 모독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손아귀에 쥐고 자기 편리나 유익을 위해서 지식이나 성공 비법 혹은 영감만을 얻으려는 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짓이다. 성경은 그들의 손에서 이용 대상으로 축소되고 경영학 교과서나 학자들의 현학취를 위한 지식과 시용 텍스트로 전락한다. 이것을 그는 ‘하향 모독’이라고 부른다.유진 피터슨에 따르면 성경 언어의 신성함을 모독하기는 하향 모독보다 상향 모독이 더 위험하다. 상향 모독은 성경을 숭배의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것이다.상향 모독의 대상이 된 성경은 일상어의 울림을 지닌 평범한 삶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소유하고, 옹호하고, 기림의 대상으로 과장된다. 그는 영국과 북미 청교도주의의 위대한 기념비로 칭송 받는 킹제임스흠정역(KJV)을 오늘날 상향 모독으로 가득 찬 오역이라고 주장한다.이러한 성경 모독은 성경을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이 주권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점에서 성경은 여느 책과 다르다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첨하지 않고 즐겁게 해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들어오시게 하려고 읽는 독자를 거부한다. 다만 성경이 계시하는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 읽는 독자를 요구한다.그렇다면 어떻게 참여적인 독서를 할 것인가? 그것은 성경의 방식에 독자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성경의 독자는 성경의 언어가 가진 형식과 문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유진 피터슨이 훌륭한 독자로 제시하는 사람은 이런 주해가다. ‘연인들의 여유로움과 집중력을 가지고 문장 부호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상하게 사용된 전치사를 음미하고 의외의 위치에 놓인 명사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 정도면 그만큼 텍스트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가져달라는 말이다.유진 피터슨은 성경의 형식과 언어가 관계적이고 참여적인 독서의 길을 연다고 말한다. 성경적인 방식은 ‘세계는 이것이다’는 명제처럼 세계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계시의 세계를 열어보고 그럼으로써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한다. 그는 성경의 모든 책은 이야기로 되어 있고 실재와 이 세상, 우리의 인생도 전부 이야기라고 단언한다.이야기는 우리를 바르트가 말한 ‘성경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 하나님의 계시라는 크고 거대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되 텍스트를 해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가 증언하는 세계에 참여하도록 책을 먹으라는 것이다.는 은유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독서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어떻게 읽으셨을까? 사실, 이 물음은 놀라운 물음이면서 불온한 것이기도 하다.그리스도교 사상사는 성경을 읽는 독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숱한 논쟁과 분열의 역사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바른 독서법을 찾아가는 노력과 함께 독서법의 다양성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바벨론 물가에서 성경을 읽었던, 렉치오 디비나의 원조들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절망적인 역사를 돌파하는 희망을 찾게 했던 그 말씀의 능력을 상상했다. 바벨론 물가에 선 그들에게 성경은 칼과 창보다 강한 유일한 무기였다. 그들에게 렉치오 디비나의 자리는 적막한 수도원이 아니라 포로된 땅이었고 광장이었다.어쨌든 유진 피터슨은 우리에게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없을 것 이라고 충고한다. 이 책은 렉치오 디비나의 실제를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지난날 어거스틴이 들었던, 소녀의 말을 전한다. “집어 들고 읽으라. 그리고 이 책을 먹으라.”
신론/인간론/기독론III. 기독론(3)A. 개혁주의(칼빈의) 기독론(칼빈, 강요 I, )1.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그리스도는 중보자 직분을 행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야 했다.인간이 되어야할 필연성: 단순하고 절대적인 필연성은 아니었다. 인간이 되는 것이 필연적이 아니었다.그 필연성은 사태의 본질에 있다. 다른 방식으로는 인간을 도울 길이 없었던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인간에게 사랑과 자비를 품으시는 하나님께 그 필연성이 있었다.2. 화목의 과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과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인간들과 공유하는 것이 주된 일. ‘불순종으로 멸망한 사람이 그것[화목]에 이르기 위해서는 불순종을 상쇄할 만한 순종을 드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키고,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해야 한다’ (xii. 3).3. 완전한 인간으로 죽으심: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시기 위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파커, 97)따라서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셔서 “배고픔과 주림과 추위 같은 인간 본성의 결함들”에 종속되셨다 (xiii. 1).4. '조정', '조절'을 통한 성육신 가능성: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이러한 면들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면들을 철저하게 조절하셨기(adaptation) 때문이다.‘extra’-Calvinisticum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밖’, 즉 ‘그리스도 밖의 그리스도’.5. 하나의 그리스도그러나 칼빈에게는 하나의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지만 둘이 아닌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신성이 육신 안으로 전환되심으로써 하나이시지 않고 인성을 하나님 안으로 취하심으로써 하나이시다. 본질 substance의 혼합에 의해서가 아닌 인격의 결합에 의해서 하나이시다.6. 양성연합의 유비’인간은 두 본질 (substantiae, 실체들 혹은 존재들)로 구성되며, 두 본질은 각자의 특성을 상실할 정도로 뒤섞이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가 아니며, 육체는 영혼이 아니다. 어떤 속성들은 있지 않았다.”(Stanley Grenz, 조직신학, p. 413.)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진정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 사시기 위해 스스로 신성을 점차적으로 발현하게 하셨던 것이다.(4) 양성연합의 유비양성 연합은 각 본성이 섞여있되, 각 성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칼빈은 이를 마치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섞여 있어 각 특성이 구분 못할 정도로 있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영혼은 신체가 아니며, 신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은 영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신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으며, 또 신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영혼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사람 전체에 대해서 하는 말을 각각 영혼이나 신체에 대해서 한다면 반드시 부적당하게 된다. . .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된 한 인격(person)이 있으며, 이 인격의 기반으로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이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Institutes, II, xii, 1.)그러나 과연 이 유비가 적절한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비록 현대의 몇몇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유비를 수용하지만 거의 제한적으로 수용한다는 점, 그리고 칼빈 이후 초기 개혁파 신학에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벌코프는 양성 연합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인간의 영혼과 물질이 혼합되지 않으면서 밀접하게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듯이 그리스도의 양성 연합도 마찬가지 원리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유비가 중보자의 양성 연합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L. Berkof, 조직신학(하), 권수경, 이상원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p. 554-55.) 버스웰은 찰스 하지가 칼빈의 이 유비를 제한적으로 수용한 것을 언급하면서 하지의 이러한 견해는 틀렸다고 하였다.(J. Oliver Buswell, 조직신학(2권), pp. 95-96.) 버스웰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실질적으안고 있었다 (케노시스 실재=신의 특권 영광 버리심; 신의 형태, 모양, 본질을 버리지 않고서). (칼빈에게는 이러한 문제 없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도 있었지만 하늘에도 동시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역사적 인간이면서도 신의 속성을 지님으로써 신의 형태를 버릴 수 없었을까?Brentz(감추었다) 이땅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신의 속성들을 가졌을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사시면서도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셔서, 전능, 전지 편재하실 수 있었으며 이러한 행동은 안보이는 가운데 행해졌다. – 강보에 뉘였을때나 무덤에 있을때에도 역시 권능을 일으킬수있다.Chemnitz: 신의 속성들을 지니고 계셨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Formula of Concord 1577: Chemnitz편을 들었다. krypsis (concealment, hiddenness)가 아닌 kenosis 개념 도입.Tubingen and Giessen Schools: 튜빙겐학파 (Brentz 후계자들)는 신의 속성이 감취어진 것 (krypsis)이지, 버려진 것 (kenosis)이 아니다. 감취어진 상태에서, 종의 형태 속에서 사용되었음. 그러나 기센학파 (Chemnitz 후계자들)는 신의 속성을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계셨으나, 사용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온전히 kenosis의 삶을 사셨기 때문이었다.3. 근대 독일의 케노시스 기독론 전개케노시스 기독론은 19세기 중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중요한 논쟁에로 이끌었던 신학으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언급한 바 있는 (빌 2:7;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heauton ekenosen]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헬라어인 ‘에케노센’에서 ‘케노시스’라는 개념을 차용,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이론이다.케노시스 기독론은 정통 기독론을 그리스도에 대한 과학적 해석과 화해를 시키려고 의도되었다. 이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변호하였으며 또한 예수를 ‘실제의’ 인간으로 강조하는 현대의, F. Godet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었다. (Godet에게는 성자의 전지, 전능, 편재성과 아울러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까지도 온전히 포기되었다. 그리스도가 갖고 있었던 예언자적인 통찰력은 전지성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소유하였던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게스에게는 그리스도가 세계 지배자로서 행동하지 아니하였다고 믿었다. 성육신의 삶 기간 중, 성령에게 세계 지배권이 위임되었던 것이다. 로고스가 자기의 사역을 마친후 이 권한이 성자에게 다시 귀속되었다는 것이다.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중지 되었다고 믿었다.로고스의 영원한 자의식도 역시 사라졌다고 믿었다.--------------------B. 근대 영국의 케노시스 기독론I. 영국의 케노시스 기독론 발전1. Charles Gore (1853-1932)Lux Mundi (1889)의 The Holy Spirit and Inspiration에서 언급. 시편에 대한 다윗의 권위를 주께서 잘못 인용하였다 (시110: cf. 막12:37). 이 실수는 주께서 제한된 지식을 지니셨기에 가능. 이 사실로 미루어 자신을 비우셨음을 암시.그리스도가 계시하신 것과 그가 사용하신 것 구분. 그는 구속에 관한 모든 것 계시,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사용하심으로써 계시하셨음. 태양이 떠올라라는 말에서, 일반적인 당대의 지식 사용을 확인할 수 있음. 이런 구도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 때와 그 시를 모르실 수 있었다 (막13:32).성자 하나님의 윤리적인 결단이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살게 하였다. 자기를 낮추는 자발적인 자기 제한을 몸소 허락하시는 사랑의 놀라운 그 비길데 없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것이다. 성육신의 논리는 분석될 수 없다. 성경을 보라. 성자는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적인 특권을 실제로 버렸다.그리스도는 두 개의 자의식 소유 (신의식, 인간 의식). 따라서 이중의 삶을 사시게 되었다. 이 문제를 그는 그리스도amorphosis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신성은 농축된 잠재성의 형태로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 잔재하여 있었던 것이다.결론(신학적 의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정통기독론 세우려 노력교부들의 기독론 전개를 정통 신학적 의도에 맞게 수정함정통 기독론 재수립: 독일의 케노시스 기독론-성공인가 실패인가, 아니면 판단유보인가?결: 일부분 성공적, 그러나 결정적 부분에서는 실패함.II. 영국의 수정 케노시스 기독론: H. R. Mackintosh의 정통 기독론 재수립 기여1. 성육신의 원리와 이론성육신의 이론 (독일 케노시스 신학)성육신의 원리 (성육하신 하나님의 희생과 지극한 사랑의 표시--형이상학적 어려움 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윤리적인 속성을 지닌 성육신 사건을 인정함으로써 성육신 타당성 입증)케노시스 이론을 포함한 형이상학적 성육신론이 어떻게 성육신이 일어났는가에 초점.멕킨토쉬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삶은 어떻하였는가에 관심. 어떻게 이것이 가능?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2. 케노시스의 필요성그리스도는 지금 신이심.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신성은 영원. 그의 지상의 삶은 두말할나위없이 인간의 삶. 그에게서 두 개의 의지를 가진 두 의식 소유자임을 상상할 수 없음.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인간이면서도 신이심을 말하여야 하는데, 이는 그의 케노시스 상태를 상정해야함이 필연적. 자기를 비우는 종교적 행위 필연적으로 발생하였음. 순종, 시험 그리고 죽음에서. 어떤 인간의 삶도 그가 갖는 신성을 미리 어떤 식으로든 조정하지 않고는 불가능.그리스도의 자기비우심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이시다; 그의 신성은 영원하다; 그의 지상 삶은 분명코 인간의 삶이었다; 우리는 두 개의 의지 의식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없다)real but non-metamorphic kenosis 실질적이나 인간으로 변형되지 않는 케노시스.신약성경은 예수의 무지 무력 공간제한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성자는 성육신후 실질적으로 신적인 삶을 포기하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