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nd semester 생각하는 독서토론,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3)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Chapter1. 왜 지역마다 행복은 다르게 나타나는가?① 행복지수로 보는 세상1인당 GDP 지수사회적 지원 지수건강한 삶 기대 지수삶의 선택에 대한 자유 지수관대함에 대한 지수부패율 지수반사회적인 잔여량 지수95% 신뢰구간Chapter2. 행복을 느끼는 장소(지역)은 어디인가?①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곳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자.Chapter3. 라다크 사람들이 겪은 변화를 정리해보자.① 두번째 장에서는 '개발'이 시작되었을 때 어떻게 라다크가 사회적, 생태학적, 경제적으로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욕심, 불관용(不寬容), 실업, 인플레이션, 환경오염이 시작되고 지난 몇 세기동안 유지되었던 생태학적 균형과 사회의 조화를 위협하는 동안 라다크인들은 근대화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즐기기 시작했다. 라다크 사람들이 겪은 변화를 여러 측면에서 찾아보자.1. 인구적 측면:2. 경제적 측면:3. 기술적 측면:4. 교육적 측면:5. 공동체 측면:②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봅시다.읽을거리: 천의 얼굴을 가진 국제개발“1,400억 달러의 '블루오션' 시장, 기업의 귀가 솔깃한 이야기다. 바로 해외원조시장이다. 지금까지 해외원조시장은 주요 선진국만의 독무대였다. 그러다 지난 2009년 11월 우리 정부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 가입으로 우리 기업들의 원조 부문 블루오션이 생겨났다. (중략)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재건, 병원 건축, 고속도로 설계 등 대형 원조사업들이 경쟁력 있는 우리 기업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 (KOICA) 박대원 이사장의 칼럼, 서울경제. 2011. 5월 4일자)“(공적개발원조(ODA) 분야에서 최대 최고위급 국제회의인) 세계개발원조총회가 2011년 11월 29일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신한 한국의 위상을 알리되 이를 통해 새로운 한류가 세계로 번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원조국 도약 실감하는 세계원조총회’ 헤럴드경제 사설. 2011년 11얼 29일자)“국내 사회복지 시장은 레드오션이라고 봐요. 정량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국내 유수의 사회복지 기관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아프리카로 가는 거죠. 국내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펼치지 못한 이상을 그곳에서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죠. 저희는 나가면 땅을 사고 건물을 세웁니다. 복지 인프라를 만드는 거죠. 소유권은 우리한테 두지만 운영은 현지 분들에게 맡기죠. 사업이 종료되더라도 운영권은 넘겨주고 돌아올 겁니다.” (A 사회복지법인 해외사업팀 관계자)일반적으로 제3세계 국가의 빈곤 완화와 경제와 사회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국제개발이라 하고 이를 위한 시민사회, 각국 정부, 국제기구, 민간기업 등의 활동을 국제개발협력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못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누구를 위해’ ‘왜 하는가’의 질문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이렇게 국제개발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에 대한 토대를 세우기 전에 국제개발 ‘협력’을 강조하다 보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중심에 서지 못하고 개발의 조력자여야 할 외부인들이 오히려 주체가 되는 일이 생긴다.사실 국제개발협력만큼 천의 얼굴을 가진 것이 없다. 한쪽에서는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에게 끼니를 나누어 주거나 학교에 보내 주는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제자원활동을, 또 다른 편에서는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원조사업을 말한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국제개발은 한국식 토건 개발주의, 정량적 성과주의, 건설주의와도 쉽게 만난다.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국제개발 사업은 크게 건축과 건축 아닌 것 두 가지로 나뉜 말이 있을 정도다. 이는 사실 한국에서 개발 혹은 발전 (Development)라는 단어가 이해되고 쓰이는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데, 우리에게 개발이란 늘 무언가를 부수고 짓는 일로 여겨 져 왔다. 그러니 국제개발도 우리 안의 토건국가 개발주의에 국제적(‘International’)이란 수식어를 붙여 그 공간적 범위를 넓힌 것 정도로 이해된다.우리가 한국 사회 안에서 개발을 이해하는 방식을 좀더 들여다보자.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개발은 무엇보다 사회적 혹은 생태적 가치를 금전적 가치로 치환하는 과정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단기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건설 사업으로 이해된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에서 이를 두고 사회경제적인 해석은 미학적인 해석과 불리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먹고 살기 바빴던 근대화 과정을 거쳐 ‘아파트 공화국’이 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개발’’이란 이름으로 행해 온 것들은 사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무엇을 아름답다고 혹은 좋다고 느끼는 지를 반영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청계천 개발의 경우도 그 본질이 무엇이든 운영을 둘러싼 경제적 타당성이 어찌하든 그것이 일단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고, 새만금 개발의 경우도 자연생태학이 어찌하든 일단 그 거대한 규모가 갖는 스팩터클에 넋을 빼앗긴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감성으로는 개발의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이라든지,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나 생태계의 파괴의 문제가 핵심에 놓이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따르는 소수의 희생으로 치부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상황이 이러니 국제개발협력이란 이름을 걸고 하는 활동도 한국 사회가 공유하는 개발에 대한 철학과 그 결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식 개발에 국제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민간과 공적 영역의 여러 파트너들과 협력하는 일이 그대로 ‘국제개발’ 혹은 '국제개발협력'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부수고 짓는 것이 개발이 되고 서울 용산이나 제주 강정에서처럼 현지 주민들의 이주 문제와 환경파괴 문제가 고스란히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