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을 읽고낭만주의라는 개념은 살면서 많이 들어 봤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낭만주의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물어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정확한 정의를 모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딱히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도 ‘아, 그런 식이구나’라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뿐 낭만주의의 표상을 확인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영웅』은 이랬던 나에게 처음으로 ‘낭만주의란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영감을 주었다. 물론 내가 살면서 책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나로 하여금 삶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와 낭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자극을 주었다. 삶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으라고 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닐까 싶다. 특히 감정적인 부분에 매마른 사람에게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주인공이 스스로에 대해 다른 이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 이유로 첫째로 어쩌면 이리도 부끄러우면서도 중후한 의미를 지닌 어구들을 스스럼없이 뱉어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충격이 있었고, 다음으로 이러한 대화, 또는 독백이 작품 전체의 흐름과 분위기를 이끌고 주인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만약 이러한 대화와 독백이 없었다면, 페초린은 일종의 정신병 환자 또는 허영심에 가득찬 악역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어느 순간 페초린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그루슈니츠키와의 결투 후 받은 베라의 편지를 읽고 난 후, 베라를 향해 미친 듯이 말을 모는 페초린의 모습은 꿈에라도 나올 듯이 아련하고 생생하게 나의 감정을 고무시켰다. 대강의 줄거리만 아는 ‘상식적인 사람’이 보면 당연히 그것은 페초린의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페초린의 내면을 아는 독자들과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슴아프고 아련한 이야기이다.‘상식’과 ‘이성’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과 낭만의 영역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 작품은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품을 다 읽었음에도 낭만의 영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잘 내리지 못하겠다. 어쩌면 내가 느꼇던 것은 페초린을 통해 느낀 감정일 뿐, 다른 상황과 다른 주인공의 작품이었다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현실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얻을 수 없는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던, 삶의 목표가 무엇이던, 그것이 스스로와 타인에게 감동, 또는 감정의 고무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사람마다 모양도 깊이도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이 살아가는데 없으면 안되는 공기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의미있고 진취적이고 낭만적인 삶의 방향을 잡고 싶다면 찾아보거나 표현해 볼 가치가 있다.
『죄와 벌』을 읽고많고 많은 러시아 문학 작품 중에서도 러시아 관련 계열 종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명성으로는 단연 손꼽히는 작품중의 하나가 『죄와 벌』이라고 생각한다.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유명한지라, 책을 읽기 전에도 어느정도 줄거리와 작품의 인상은 알고 있었다. 물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은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내용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알고 있던 내용 이외의 300페이지 정도는 ‘내가 이걸 왜 읽고있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을 정도로 난해한 여러 가지 잡다한 내용들-주정뱅이의 한탄, 또는 주인공의 갈수록 처절하고 안쓰러운 자기합리화와 상황 묘사, 지나치게 상세한 배경설명 등-이 자리잡고 있음이었다. 가장 유명한 러시아의 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라 그런가,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높은 문학적 소양의 벽이 있는것일까라는 생각 조차 들었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며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이러한 작품의 모든 요소들이 결국 인물의 내면과 성격, 주제와 교훈 등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한 작가의 애씀, 노력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작가가 아닌 이상 주인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내용들이 모여 인물 내면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러한 생각으로 볼 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다양한 모습과 인물상의 깊이를 드러낸다. 가볍게 생각하면 그저 한낱 별볼일 없는 가난한 청년상, 사회의 패배자 또는 범죄자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의 독백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세상과의 격리와 거리감, 이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범인성과 동시에 정신분열적인 모습들은 그가 단순히 경제적인 약자가 아닌 보다 깊은, 심리적이고도 근본적인 내면적 요소의 이질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그런데 사실 그의 독백을 읽어보면 심한 반감이 느껴질 정도의 이질감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물론 노파와 노파의 여동생을 살인한 후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 페트로비치(예심판사)에게 심문당할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지만, 나름의 합리적인 사고-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라도-와 훗날 소피아를 통한 일말의 회개-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로 추측하여-의 모습도 보여준다. 이질적이면서도 이해가 갈 듯한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해주는, 매우 심도깊은 이 인물의 죄상과 벌과 회개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라주미힌같은 다른 중요한 인물들에 등장에도 불구하고 유독 주인공에게만 시선이 쏠린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나 싶다.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연대기가 작품의 시작부터 나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사실 나를 비롯한 몇몇 대학생들은 가난 등의 삶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신과, 그와는 반대로 머릿속에 넘쳐나는 범인적인 생각들로 인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회가 죄라고 단정지은 선을 넘어버릴 때, 우리도 언제나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인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라주미힌에게 본인의 의지를 담았을 지도 모른다. 이성적이고 대인배적이고 정의로우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죄와 벌』은 주제의 전달이나 그것의 의의가 중요하지 않았다. 라스콜로니코프의 인물상이,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 내면에 존재한 모순적인 자기형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작품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인상이 아닐까 싶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제목부터 ‘죽음’이 들어가는, 우울하기 짝이 없을 법한 작품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의 위대한 대문호라 불리는 톨스토이의 작품이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나 내용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우울한 내용의 소설’이라고는 결코 치부할 수 없다. 이 짧은 단편 소설에 삶과 죽음, 인생의 방향, 행복과 슬픔, 양심과 기만이 모두 녹아있다. ‘두께 보니까 내용도 별로 없고 그냥 무거운 주제에 별로 재미는 없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면, 앞으로 제목만으로 선입견이 생기는 병이 고쳐질 지도 모르겠다.짧은 내용이지만, 이반 일리치의 일생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의 희로애락을 단편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반은 자신의 인생이 점점 자신의 행복과는 멀어지고 병을 얻음으로써 죽어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독자로서 온전하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이반은 그가 추구했던 ‘무언가 상류층다운 삶’, 또는 ‘객관적으로 행복한 삶’에서 멀어지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각으로만 그것을 해결하려다 고난에 봉착했을 것이다. 호감을 사는 사람이었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고통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사실 이반의 일생 자체만으로는 그의 고난에 대해 공감이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철저히 자신만의 기준을 잣대로 평가하는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나무라거나 비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반과 이반의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심리 때문이다. 작품의 첫 페이지부터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분명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얘기해 놓고 모두가 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모습 없이 자신들의 인사 이동이나 승진에 관심이 쏠려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친한 동료인 포트르 이바노비치는 카드게임에 관심이 쏠리질 않나, 심지어 이반의 아내였던 프라스코비아는 국가로부터 얼마나 돈을 더 얻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기까지 한다. 이반이 스스로의 생각으로만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이유는 타인의 ‘기만’을 견디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반은 기만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게라심에게만큼은 잘 대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읽고간만에 읽은 정말 난해한 작품이었다. 사실 눈의 피로를 느낄 정도로,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읽기 힘든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지금까지 읽은 소설과는 달리 시선점이 끊임없이 오락가락하여 굉장히 읽기 피곤했다. 물론 단편 소설인 만큼 적은 페이지로, 그것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배경과 심리를 자세히 묘사하다보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단순하다. 하지만 이 짧은 줄거리에 비해 작가의 고증이 깊게 녹아있다. 오히려 짧은 만큼 독자의 굵은 영감을 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면, 인간의 이기심과 무정함,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 잘 드러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도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화려한 선내와 배의 하부의 모습, 부의 풍채를 풍기는 사람들과 폭풍우와 싸우는 사람들, 이 밖에도 계속되는 대조 속에서 바로 직전에 읽었던 작품과의 유사함을 느꼈다.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신사는 나름대로 자신이 본보기로 삼은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려 하지만, 무의미한 향락일 뿐 어떠한 의미조차 부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이의 희생을 모른채 향락을 추구한 결과로 돌아온 것은 허무한 죽음과 잊혀짐 뿐이었다. 하물며 높은 지위의 인물의 위엄을 나타내긴 커녕 시신이 배에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게된다. 슬프게도,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이 자리잡게된 세상에서는 이미 타인에 대한 인정(人情)은 없어진지 오래, 인간은 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일과 사람 이외의 것은 하등 생각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삶의 의의를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작품 후반부에 이 작품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나는 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바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며 ‘신’, 또는 ‘예수’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장면. 이 한 장면으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졌던 모든 문제의 해결 방향이 정해지고 만다. ‘예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작품의 모든 대조가 나타내는 의미가 즉시 이해되고 만다. ‘예수’는 사회의 낮은 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온 ‘신’이다. 그러나 ‘신사’를 비롯한 이기적이고 ‘예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바로 ‘선장’이라는 ‘예수’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고 만 것이다. 비단 선장 뿐인가? 돈, 겉모습, 탐욕 등 모든 것이 다른 ‘신’이 될 수 있다. 세상을 위해 희생당하는 모든 것을 잊은 채 이단의 길에 빠진 말로는 당연히 처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진정한 ‘신’을 섬기는 데에 있다. ‘예수’가 그것이 되며, 그는 곧 사회의 낮은 자들, 사회의 본질을 위해 희생하는 자들인 것이다.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장면으로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찾았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가장 완벽한-과학적이지는 않은- 해결책이 제시 된 것이다.
『벚꽃 동산』을 읽고군대에 있을 적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은 경험이 있다. 자의로 읽은 것이 아니라, 휴가를 위해 반강제로 읽었다. 그래도 이름만 많이 들어봤을 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접해본적이 없어서, 다른 책보다는 『햄릿』을 선택했다. ‘희곡’이라는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고, 읽기 좀 어려웠지만 재밌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은 작품 중 하나이다.그런데 『벚꽃 동산』은 너무 희곡스럽다고 해야할까, 정말 읽기도 힘들뿐더러 아무리 나의 상상력을 동원해도 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화제를 휙 돌려버리거나 이유도 모르는 장면 전환의 반복으로 인해 정신이 사나워졌다. 끝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대화-귀부인들끼리의 대화같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꼼꼼히 읽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뮤지컬 본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세세한 줄거리는 남아있지 않지만, 오히려 중요한 장면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사실 작품의 중반부에 들어서야 줄거리의 흐름이 파악 될 만큼 플롯이 정신없이 흘러가지만, 취임새나 감정적인 표정의 묘사,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경 전개와 인물간의 관계는 그간 읽었던 소설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자본 계층을 대표하는 로빠힌과 귀족 계층을 대표하는 라네프스까야 간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둘의 대화하는 장면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어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그야 희곡이니까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간만에 희곡을 읽어서 그런지 더 인상깊었던 것 같다.물론 이 작품이 이러한 요소만으로 체홉의 4대 희곡이라 불릴 만큼의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계층간의 갈등-의견적 갈등이지 결코 물리적인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과 이것이 해소되는 과정이 이 희곡에서는 소설의 함축적 요소와는 다르게 직관적이고 빠르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해준다. 비록 경제적으로 몰락했어도 귀족의 보수적인 품위를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라네프스까야와, 신흥 자본 세력이고 라네프스까야를 돕고자 품위보다 실리를 권했던 로빠힌의 이야기는 사상이 변해가던 과도기적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실 ‘신분 계층’이 중요하다고 하기 보다는 두 계층의 ‘생각’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를 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 안에서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영광과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버려야 할 요소이다. 다시 말해 라네프스까야가 틀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나, 아냐의 위로로 알 수 있듯이 미래의 삶을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 피르스의 죽음 역시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