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그의 감각적인 신세계Ⅰ 서론 - 들어가기Ⅱ 본론 - 그의 생애1. 그의 유년기 시절2. 그의 가족과 성격Ⅲ 결론 - 그의 감각적 신세계1. 황지우의 예술적 가치2. 황지우가 생각하는 시Ⅰ 서론 - 들어가기사실 황지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낯익지도 않은 시인이다. 정지용이나 윤동주와 같은 시인에게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고등학교 문학 문제집에 수록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정도의 시로만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 작가론 수업을 통해 황지우에 대해 알아가며 그의 시를 배우고 그와 관련된 논문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번 수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인생과 시를 통하여 작가론을 써 보고자 한다.Ⅱ 본론 - 그의 생애1. 그의 유년기 시절그는 1952년 1월 25일에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고향이 바닷가였던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첫 시를 창작해 내었다. 이라는 시로 그는 등단하게 되는데, 그의 첫 시집 속 첫 번째 시이기도 하다. 시 에는 그의 바닷내음이 나는 어린 시절의 과거가 잘 나타나 있다. 황지우는 해남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에 광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초등학교일 당시에 광주에서는 자유를 향한 시위가 한창이었다. 황지우는 8살, 어린나이에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그 현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과 기억은 그의 눈과 마음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되었다. 라는 작품에서 그러한 그의 경험이 잘 나타나 있는데, 어린 시절 그 현장에서의 기억이 성인이 된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황지우에게 유년 시절은 죽음과 현실을 뼛속 깊게 인식하는 순간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광주로 와서 그는 유년 시절 때 맞이한 죽음과 또 다른 얼굴의 죽음, 그리고 삶과 마주치게 되었지만, 최초의 인식이라는 특이성으로 그의 마음 깊이 그 순간들이 박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에게 가난은 그의 어린 시절 시절부터 그의 이름 옆에 딸려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듯 시를 썼다. 에서도 가난은 자신들의 어떠한 관례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언급하듯이, 유년 시절에도 가난은 그에게 사무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들이 황지우의 유년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거 유년시절의 시간들이 당시의 그리고 현재의 그를 만든 큰 주춧돌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던 듯하다.2. 그의 가족과 성격그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요소로는 가족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족의 ‘전통’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가족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황지우의 가족 중에서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인 황광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58년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시절 어지러웠던 태풍의 시대를 보냈고 그 시대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구속과 제적 그리고 수배생활을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줄곧 ‘운동’에 헌신해온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솔섬에 모여 떠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피붙이들은 바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여기서 솔섬은 그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조들이 내내 살아온 고향으로 마음의 자궁이다. 이것은 솔섬이 그에게는 삶의 근원지라는 뜻이며, 그러한 솔섬의 바다를 배경으로 어머니가 있다. 그로 인해 화자가 있고 그 근원을 시작으로 화자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어머니는 내지의 삶, 붙박음의 상징이고, 그 어머니는 현세적 욕망의 구현의 실체로 어머니가 바다로 가고자 하는 것을 만류하는 것은 그 바다가 시련·죽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에서는 껴안기에 어색한 딸아이의 초경을 보며 “생이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된다. 딸아이의 초경 앞에서 이루어 낸 것이 별로 없다고 느끼며, 회의감을 가진다. 황지우는 그의 시 ‘늙어 중산층의 딸”인 여자를 자신의 아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가난을 함께 극복해준 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황지우로 하여금 계속해서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 바로 가난이고 그것을 함께 극복해 준 것은 바로 그의 아내일 것이다. 황지우의 가족사를 살펴보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난 그리고 사랑이다.황지우의 푸근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냉철하고 직설적이며 날카로운 문체로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에게든 타자에게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초월적 세계를 선망하고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기 보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현실과의 조화를 원한다. 황지우는 개인적 초월을 거부하고 세상과 더불어, 아픈 사람들과 더불어 거듭나고자 한다. 황지우는 어려서부터 주위가 산만하고 어른들 말대로 회찰이 심했다. 어린 시절 엿보기를 좋아했던 황지우가 오늘날 자기풍자를 통해서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풍자는 희화적인 비틀기나 그로테스크한 과대 묘사 또는 낯설게하기 등을 통해 대상을 공격하여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으로 설명된다. 황지우의 자유분방한 유희정신과 형태 파괴의 시세계는 새로움과 낯설음으로 독자들을 충격하며 당대 현실의 모순과 폭압성을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풍자의 양상은 자기풍자이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자기풍자를 통해 부정적인 현실과 이에 순응하는 자신을 아울러 비판하는 것이다. 황지우가 보여주는 자기풍자는 무엇보다 구체적 현실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시즘에 의해 훼손된 개인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다양한 풍자적 어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황지우의 자기풍자가 항상 심각하고 진지한 어조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시편들에서 희극적인 감각을 자아내며 다양한 풍자적인 어조를 보여준다. 또한 날카롭고 신랄한, 때로는 익살스러운도 다투지 않은 것은 순전히 황지우의 부드러움과 여린 마음씨 덕분이었다고 한다. 황지우의 약간 여리고 내성적이면서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면모가 있는 점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약속 시간에 지각하는 일이라고 한다. 보통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시간과 장소를 잡으면 상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데 황지우를 많이 만나 본 사람들은 대개 일정한 어떤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그를 기다리기 보다는 아예 술집에서 마냥 마시며 기다리는 것이 속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황지우의 성격을 정리하자면 대체적으로 성격이 작품을 압도하기보다는 작품이 성격을 능가하는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날카롭고 신랄하며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현이 많으며 ‘콜라주’기법을 가져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검열에 오르지 않게 돌려 말하는 식을 쓰고 있다. 이는 황지우가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인 것이다. 공포를 이기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공포를 직시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띠는 성격만을 보아서는 실제의 황지우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듯 하면서도 강렬하다. 이처럼 황지우의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은 부드러움을 뛰어넘어 강렬하고 날카롭게 작품 속으로 투사시키고 있는 것이다.Ⅱ 결론 - 그의 감각적 신세계1. 황지우의 예술적 가치황지우는 왜 시를 쓰는 것 일까? 황지우는 왜 대중과 시를 통해 의사소통 하고 싶어 하는 것 일까? 황지우는 자신과는 다른 자아의 확인을 위해, 또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자아를 보여주기 위해 시를 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가 쓴 시는 자신이 습득한 경향, 자아와 긴밀히 닿아있다. 그래서 우린 앞서 그의 환경과 생애를 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예술적 가치, 즉 그의 인생이 담긴 가치관을 알아 볼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첫 장에 실린 위의 시는 내면의 세계를 그리면서 시인의 현실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시에 나타나는 솔섬은 죽음, 결핍,전남 해남에 위치한 배다리 마을이다. 배다리 마을은 섬이 아닌 내지인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고향은 완도군 고마도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 ‘솔섬’이다. 네 살 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광주로 이사를 했지만 그의 조상이 뿌리내려온 곳이 고마도였고, 명절 때면 아버지와 함께 솔섬을 찾았기 때문에 그의 무의식에는 솔섬의 고향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솔섬은 황지우의 깊은 내면 속 자아가 늘 머무르고 있는 곳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솔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황지우의 세계관의 기저가 된다. 이후 황지우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현실인식을 통한 현실 비판과 반성의 촉구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황지우의 70년대 생활을 연대기식으로 기록한 이 시는 삶에 대한 태도로 미루어보아 그에게 유년기 시절 각인된 이미지가 청소년기, 청년기 끊임없이 모든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방황하게 한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반유신체제 시위에 참가한 일과, 유신체제 하에서 겪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인이 된 후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마주하고 그의 부정적 현실 인식이 가난과 죽음에서 억압과 폭력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부조리로 옮겨가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시대에 시로써 최전방에 서게 된 것이다. 황지우는 스스로 시를 쓴 목적, 형태 파괴의 시를 썼던 이유, 그것이 시로써 실현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게 그 세계관이 ‘새로운 삶을 회구하는 남성적 낭만주의’라고 평가되고 있다. 즉 이런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제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작가의 작가론은 단지 한가지만의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작가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소재를 얘기 하면서 독자들이 공감하게끔 만들며 시를 통해 의사소통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독자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시는 독자들에.
한국근대사목차Ⅰ.머리말1. 조선시대 일제 식민지 경제 지배정책1)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2) 1920년대 산미증식정책Ⅱ.본문1. 일제의 식민농정과 종속적인 상업적 농업의 확대1) 일제의 식민농정과 상업적 농업의 종속적 개편2) 상품작물의 변동과 상품생산의 전개양상3) 상품생산의 주도층2. 농민층 분해와 농업위기1)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제의 확대2) 농업 생산력 위기와 반제, 반봉건 농민투쟁의 발전Ⅲ.맺음말1. 한국의 경제성장과 일제 식민지의 경제 지배정책에 연관성1) 식민지 수탈론2) 식민지 근대화론3) 식민지 비교연구론2. 일제 식민지 정책과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3. 사회주의 운동Ⅰ.머리말1. 조선시대 일제 식민지 경제 지배정책1)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토지조사사업은 ① 자본주의적 토지제도 확립으로 식민통치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행정구역 ·도로 ·헌병주재지의 설정을 하며, ② 일본인의 정착에 필요한 토지확보의 수단으로 필요하였고, ③ 무지주(無地主) ·무신고 토지의 국유화로 통치기구의 재정을 굳건히 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실히 하며, ④ 전통적인 양반계층의 지주권을 일제법상의 식민지적 지주계층으로 개편하여 식민사회 기반을 구축하고, ⑤ 거주를 토지와 결부시켜 한국인의 동정을 살핌으로써 영구적인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하며, ⑥ 모든 자원과 세금파악을 확실히 하는 수탈경제(收奪經濟)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零細小作人) 또는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 %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총독부는 이들 토지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의 이민(移民)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었다.2) 1920년대 산미증식정책산미증식계획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일본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함으로써 수립된 것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일본대 초반에 이르러 전면 실시되었다. ‘산미증식계획)(1920)’과 ‘제2기 육지면장려계획(1919)’, ‘잠견백만석증수계획(1925)’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식민농정으로 조선 농업은 마침내 종속적인 상업적 농업 체제로 전면 개편되었고, 수탈적 상품화 확대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1920년대 초반부터 농산물 상품화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1894년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략은 조선 수공업을 급속히 몰락시켰다. 이로 인해 지역의 면업은 거의 자급생산 수준으로 몰락하였고, 일용 잡화품의 생산도 대량으로 침투하는 일본 제품 때문에 해체위기를 맞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식민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자국 자본에게 초과이윤을 실현한 독점적 상품시장을 확대시켜줌과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이 종속적 상품생산을 궁박적으로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였다. 또한 일제는 자본수출과 농업식민책을 결합하였다. 일제의 자본수출은 농업 부문에 국한하면 크게 보아 두 방면으로 이루어 졌다. 하나는 산미증식계획 등의 농업 식민책과 결합하여 자본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을 개설하거나, 또는 농촌고리대의 방식으로 자본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자국 자본이 이 같은 방식으로 농업 부문에 수출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주선하고, 투자자들이 종속적 상품생산의 확대를 통해 최대한의 식민지 초과 이윤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재정적, 금융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식민지의 상업적 농업 재편을 견인하게 하였다. 1920년대에 개시된 산미증식계획, 잠견증수계획 등의 식민농정이 농산물 상품화 확대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물론 이 같은 상품생산의 확대는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고자 철도 및 도로망을 확충하고, 근대적인 금융망을 확립한 것도 한 몫을 하였다. 경부선을 부설하고 철로와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수운으로만 이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지역에서도 우마차나 자동차를 이용하여 농산물을 유통시키는 것이 가능해졌고, 수운보다는 도로와 철로를 이용한 육운이 농산물 유통의주도로 화학비료 사용을 확대하게 하였다. 이 같은 식민농정의 강요가 결국 지주 수중에 쌀의 집중을 강화시켜 생산의 실질적인 증가 없이도 쌀 상품화의 비약적인 확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쌀의 상품화는 산미증식계획기에 논 면적의 증가가 큰 지역일수록 그만큼 더욱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면화 : 면작에서 상품생산을 발전시킨 주된 계기는 일제의 원면자급정책이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면화산출이 많아지면 일본은 멀리 해외 제국에서의 원면 공급을 바랄 필요 없이 가격 및 운임이 저렴한 원료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905년 조선 육지면 재배를 보급하고 확대하는 식민정책을 실시하였다. 1912년 ‘제1기 육지면장려계획’이 실시되었다. 이 계획은 육지면 재배를 확대하는 계획이었다. 제1기 장려계획이 끝나자 1919년 ‘제2기 육지면장려계획’을 실시했다. 여기서는 육지면의 증산목표가 대폭 확대되었다. 일제는 오로지 달성 목표만을 위해 농가경제상 면작이 곤란한 영세소작농에게도 면화 생산을 강요하였고 부적합한 지역에도 재배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성과는 저조하였다. 육지면 재배사업은 조선총독부가 본국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었고 그런 관계로 육지면의 생산기반 조성에만 역점을 두었을 뿐 공판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육지면 재배가 확대되었음에도 면화의 상품생산은 1920년대 말까지 부진하였다.- 콩 :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이 지역의 콩 상품생산은 대일 수출에 바탕을 두고 성장한 까닭에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도 꾸준히 발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콩 상품생산도 얼마 가지 못해 감소하고 말았다. 콩의 상품생산을 급감시킨 요인은 첫째, 일제가 콩의 수입선을 조선 북부 지역과 만주 지역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상품생산이 감소하였지만 북부 지역에서는 콩의 상품생산이 크게 발전하였다. 둘째, 일제가 이 지역에서 콩의 재배를 줄이고 대신 면작을 확대하는 식민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육지주도층도 크게 변화되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변화는 영세농민층의 ‘환금적 투매’ 즉, 궁박 판매가 크게 확대된 것이다. 이를 확대시킨 원인은 조선 농촌을 일본 자본주의의 상품시장이자 자본수출시장으로 강제 편입한 식민정책이었다. 요컨대 소농민들은 시급히 제반의 생활비와 부담공과를 지불해야 하는 강압적 사정 때문에 시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해 생산한 쌀의 대부분을 무리하게 염가방매 해야 했던 것이고, 1정보 미만의 토지소유자와 영세소작인 조차도 부득이 팔기위해 쌀을 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주목할 변화는 지주층이 주도하는 상품생산이 비약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지주층의 상품생산은 반봉건적인 소작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지주의 생산비는 지가에 대한 이자와 각종 부담금, 관리비가 전부였고, 그 생산비는 애초 농민의 생산비와는 무관할 수 있었다. 이런 특성에 유의해 일제는 침략 초기부터 지주제를 확대 강화하는 방향으로 식민정책을 수립하였고, 그러한 지원은 지주들이 상품생산을 비약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지주적 상품생산을 발전시킨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들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농민들이 오랜 반봉건투쟁을 통해 획득한 영소작권 등 토지소유에 대한 일제의 권리를 무상으로 박발하였고 오직 지주계급에게만 소유에 관한 모든 권리를 배타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로써 지주계급은 자신의 이익과 권력만을 증장할 수 있게 되었고 달리 생계방도가 없는 소작농민은 지주의 가혹한 요구에도 무조건 복종해야만 했다. 지주계급이 전체농민과 농업 전반을 통제하도록 농업지배기구를 수립했다. 또한 1920년대 말까지 철저히 자기 위주로 시행한 소작정책이 있다. 그리고 지주 위주의 금융정책을 실시했다. 지주들은 이와 같은 지주 보호육성정책을 밑받침으로 각종의 방면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만을 증장시켜가면서 소작료 수탈을 강화하고 상품생산을 확대시켰다. 일제하에서 지주적 상품생산의 발전을 선도한 것은 농기업형의 일본인 농장지주들이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품생산은 농업생산의 주재인 영세소농경영을 몰락시키고, 조선 고유의 합리적 농법체계를 교란시킴으로써 결국 조선 농업의 생산력 기반을 급속히 공동화 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종속적 상품생산 체제가 동요되는 위기가 야기되었다. 이러한 농업위기는 반제, 반봉건 농민투쟁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불러왔고, 나아가 식민지 지배 자체를 전면적으로 동요시켰다. 조선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려 했던 여러 운동들은 비록 그 투쟁 대상은 다양했으나 지주제를 농업지배기구로 한 일제의 식민정책에서 비롯되어 발생하였던 점에서 공통성을 지녔다. 그래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식민지 지배 자체를 정치적 지배를 타도하는 반제정치로 본격적인 반제정치투쟁의 막을 올린 사회주의 운동)은 그 가능성을 앞당겨 현재화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사회주의 진영의 이러한 투쟁방침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농민운동을 농민조합운동으로 수렴시키고, 단순한 경제투쟁에서 민족해방운동, 민족혁명으로 발전시켰다.Ⅲ.맺음말1. 한국의 경제성장과 일제 식민지의 경제 지배정책에 연관성1) 식민지 수탈론)근대주의론은 국민국가 수립, 자본주의 공업화, 시민사회 성립이라는 서구의 역사경험으로부터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근대변혁의 과제를 도출하지만,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내재적 발전론은 발전의 기본 동력을 안과 아래로부터의 계기, 즉 민중에게서 발견하고, 그 전개양태를 민족해방운동에서 찾음으로써 체제변혁적인 지향을 담고 있다. 근대주의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각각 체제옹호와 체제변혁이란 근본적인 지향의 차이를 보이지만,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이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토대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민족운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다. 그런 바탕에서 일제의 침략 만행과 야만적 수탈을 강력 비판하였다. 이 같은 근대사상(近代史像)은 한국 사회의 민족자존의식과 반일주의적 정서에 기초하여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