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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2차 대전의 발발원인과 배경, 진행 그리고 종식과 그 후, 관련 문제제기
    제 2차 세계대전Ⅰ. 문제의식Ⅱ.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1. 불안한 평화 - 베르사유체제의 붕괴(1) 독일의 재군비(2)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원정2. 아시아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1) 중일전쟁3. 유럽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1) 스페인 내란(2) 히틀러의 독일 외교(3)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의 대두(4) 뮌헨협정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5) 체코 붕괴 이후의 유럽(6) 독일·소련의 불가침 조약Ⅲ.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1.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의 붕괴2. 독일의 전격전(1) 서부유럽전선(2) 동부유럽전선3. 태평양 전쟁4. 연합국의 전시외교Ⅳ.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그 후1. 전쟁 후 각 국의 상황(1) 식민지의 독립(2) 제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미친 영향2. 국제연합Ⅴ. 문제제기Ⅵ. 참고문헌Ⅰ. 문제의식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베르사유 체제로 들어서게 되나,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안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승국의 이익에만 치우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패전국에 대한 과도한 억압 그리고 미국이 빠진 무기력한 국제연맹은 독일의 반발을 부추기게 된다.베르사유 체제 붕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부상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을 적극 제재하지 않았고 당시 대공황으로 인해 국내정치에 몰두하였다. 이 때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팽창야욕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체주의의 팽창을 시도한다. 영국은 1938년에 이르러서야 유화정책의 환상에서 깨어나 프랑스와 군사협력을 도모하게 된다.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3국 동맹을 맺고, 결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된다. 추축국과 미국, 소련이 참가한 연합국과의 대결구도로 맞서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자세한 원인과 각 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이유,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전시외교를 통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고, 연합국이 전쟁을 중일 당사국이 화해를 이룩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도 일본의 항의에 부딪혀 중단하였다. 미국의 경우도 비슷하다. 도덕적인 견지에서는 일본에 강경히 항의했으나 실제적인 행동을 취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3. 유럽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1) 스페인 내란 (1936년 7월~1939년 3월)스페인 내란은 단순한 국내 문제가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만든 국제적 사건이었다.스페인 내란파시즘은 대공황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계급 갈등이 심해진 유럽 국가들에게 마치 해결책인 양 여겨지면서 확산되었다. 그런데 1936년, 이탈리아만큼이나 파시즘의 기세가 높았던 스페인에서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반파시즘의 인민 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사회개혁 정책의 추진은 전통적 세력인 교회, 지주 계층, 그리고 군부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배계층과의 갈등으로 내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가톨릭교회와 지주, 군부의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인민전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파시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스페인은 이제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장이 되었다.스페인 내란에 대한 열강의 태도1) 독일과 이탈리아: 독일과 이탈리아는 당초부터 프랑코군을 지원했다. 무솔리니는 프랑코 군을 지원함으로써 장차 서지중해의 지배를 꿈꾸고 있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스페인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가 중앙유럽 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결국 인민 전선 정부는 무너져 버렸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란을 통해 다가올 제2차 세계 대전에 대비한 대규모 실전 연습을 치른 셈이었다.2) 소련: 소련은 독일과 이탈리아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데올로기로 보아 소련은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군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칭. 전세계 노동자들의 국제적 조직. 제3인터내셔널열강의 태도체코 정부는 독일군이 국경지대에 집결했다는 정보에 따라 예비군을 동원하였으나 이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이 아닌 정보에 의거해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 경고를 했다. 히틀러는 거짓 정보에 입각한 열강의 간여에 모욕을 느꼈다.영국은 프랑스 국경이 독일군에 의해 공격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부 국경을 보장할 수 없다는 각서를 전달하였다. 즉 체코 문제로 프랑스를 도와 유럽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체코를 지원할 수 있는 국가는 프랑스뿐이었으나 프랑스가 단독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영국은 동유럽 문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8월 말~9월 초 체코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자 체코 정부는 헨라인이 요구한 8개 항 중 7개 항을 수락한 새로운 협상안을 제의하며 중재를 요청하였다.(4) 뮌헨 협정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체임벌린·히틀러 회담 (1938년 9월 15일)9월 12일 히틀러는 체코 내 독일인을 독일 정부가 보호해야한다고 연설했다. 이를 계기로 수데텐의 난동이 거세졌다. 그 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은 서로 협력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수데텐은 합병돼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장차 전쟁을 도발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9월 18일에 런던에서 체코 문제를 토의하였다. 결국 양국 정부는 독일어 사용자가 주민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며 할양 후 새로운 국경을 인정하라는 내용의 제안을 체코 정부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만일 체코가 계속 저항한다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하였고 체코는 양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한편 히틀러는 헝가리에게 체코와 어떠한 국경선도 보장하지 말라고 충동질하였다. 또 헝가리가 체코에 요구할 사항은 자신에게 먼저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폴란드 정부에게도 같은 문서 제출을 요구하였다. 이들 문서를 이용해 체코를 분해하려는 것이었다.9월의 위기영국은 히틀러의 요구 사항 히 불화가 커졌다.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로 하여금 소련의 볼셰비즘 확산을 저지하고 궁극적으로 소련을 침공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과정과 실패1939년 4월 14일 프랑스 정부가 소련 정부에게 동맹 교섭을 제의함으로써 소련과 서유럽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섭은 6월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에 소련은 7월 24일 정치협정을 미루고 군사협정부터 체결하자고 제안하였고 영·프도 동의하였다.그러나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회의는 유사시 소련군의 폴란드 영토 통과 문제로 곧 난항에 봉착했다.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독일의 침공을 받아 소련이 이에 지원하는 경우 소련군이 폴란드 영토를 통과해야 되는데 폴란드 정부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부의 승인 문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리벤트롭 독일 외상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조인하려고 23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소련과 서유럽의 교섭은 완전히 끝나버리게 되었다.독·소 불가침 조약 (1939년 8월 23일)배경독일의 최대 목적은 소련이 폴란드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만약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다면 영국이나 프랑스가 폴란드에 대한 군사지원을 단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독일은 폴란드에 압력을 가하여 요구하는 바를 수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1) 두 나라는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으며 모든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2)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다른 나라는 그 제3국을 어떠한 형태로도 지원하지 않는다. 또한 두 나라 중 한 나라에 대항하는 어떠한 세력 형성에도 참여하지 않는다.(3) 조약의 효력기간은 10년이며 서명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한다.7월 24일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교섭하려고 하자 독일은 소련과의 교섭을 서두르게 되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은 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의의와 평가이 조약은 히틀러로 하여금 계획대로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을 촉발전' 이라 불리는 소련 침공계획이 확정되었다.그러나 소련 침공은 장기전으로 변하여 히틀러의 전쟁수행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가져오게하였다. 이 전투는 4년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독일의 완패로 끝났다. 완패를 하게 된 이유는 첫째,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진입하려는 필사적인 기도를 했지만 목표를 이루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둘째, 소련군은 기습에 독일군은 막지 못하고 신속한 승리를 이루지 못했다.이것은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군사적 전환점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전환점이 수반되었다. 소련, 영국, 미국의 대연합이 탄생된 것이다.3. 태평양 전쟁중국과 일본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국가를 세운 후 그 지역의 자원을 착취했다. 루거우차오사건 이후 베이징·톈진을 점령한 일본은 전화를 상하이로 확대시키고, 1937년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시민 수십만을 살육하였다.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하며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중국 자체가 너무 광대해 전쟁은 고착 상태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제는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전황을 악화시켰다.일·소 분쟁 : 노몬한(Nomonhan) 사건 (1939년 5월~9월)소련이 중국의 국민정부와 1938년 8월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고 나서면서 관동군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이었던 만주국에 상주한 일본 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이다.과 소련군 간의 수차례에 걸친 충돌이 일어났다. 1939년 7월, 마침내 관동군은 몽골 국경을 넘어 진격했으나, 노몬한 부근(만주와 몽골 국경)에서 소련군의 반격을 받아 일본 군부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투 도중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소식을 접한 일본은 서둘러 소련과 타협하였다.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군부는 일본군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동안 주장해 왔던
    사회과학| 2016.05.22| 30페이지| 3,000원| 조회(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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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사유체제의 형성과 붕괴
    - 목차Ⅰ. 문제의식Ⅱ. 종전과 베르사이유 체제의 태동1. 제 1차 세계 대전의 종전2.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이유 체제의 태동3.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과 해결 노력4. 전후 국제정세의 주요 변화Ⅲ. 베르사이유 체제의 진행1. 라팔로 조약2. 프랑스의 루우르 점령과 독일 배상금의 축소3. 로카르노조약4. 부전조약의 성립Ⅳ.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1. 대공황과 결과2. 파시즘의 발흥3.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4. 이탈리아와 독일, 일본의 팽창정책과 무기력한 국제기구5. 독, 이, 일의 접근 과정6. 뮌헨 조약Ⅴ. 문제의식에 대한 결론Ⅵ. 문제제기Ⅰ. 문제의식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국제사회의 5대 강대국이 된다. 이들은 전후처리를 위해 파리에 모여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였다.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을 기초로 국제연맹규약의 초안이 마련되고 국제연맹규약은 베르사유조약의 제1편이 되었다. 베르사이유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의의를 지닌다.이 보고서는 첫째, 파리강화회의에서 결정된 전후 처리문제에서 강대국의 입장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전쟁 후 강대국들은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전후 처리, 특히 독일 문제 관해 의견이 충돌하였다. 각국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게 된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전후 처리가 이뤄졌는지 알아보고자 한다.둘째, 베르사이유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된 베르사이유 체제는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1차 세계 대전 이후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의 원칙이 잘 적용 되었는지 알아보고 베르사이유 체제가 세계 대전을 막을 효과적 체제를 구축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셋째, 전쟁 직후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가 독일의 부흥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어떤 외교를 펼쳤는지 알아보려 한다. 알자스·로렌 문제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적대적 관계를 이어왔다. 프랑스는 전쟁 이후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다. 전쟁전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오스트리아연합국과 생제르맹조약 (1919.9.10)전쟁 전에 비해 아주 작은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와의 접경지역, 헝가리와 접경지역인 클라겐푸르스트 지방, 부르겐란트 지방은 국민투표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영토의 축소뿐만 아니라 인구도 감소하였다.불가리아뇌이조약 (1919.11.27)여러 지역을 할양하게 된다. 또한 무장해제와 함께 배상금을 지불하였다.오스만, 터키세브르 조약(1920. 8.10)터키제국이 종언을 맞이하였다. 또한 이집트, 수단, 키프러스, 트리폴리, 모로코, 튀니지 등은 영유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라비아는 독립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는 연합국이 위임통치하게 되었다.2) 베르사이유 체제 탄생① 베르사이유 조약의 조인파리강화회의 후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된 1919년 6월 28일은 사라예보사건이 발발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조약의 조인장소는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던 '거울의 궁전'이었다. 회의 장소가 파리인 까닭에 평화회의 의장은 프랑스의 정부수반 클레망소가 맡게 되었다.② 베르사이유 조약의 주요 내용● 독일 본토의 할양- 독일은 보불전쟁으로 획득하였던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한다.- 라인 강 양안 50KM 이내의 지역은 영구 비무장화한다.- 라인란트에 조약의 담보로 연합군이 주둔하며 주둔군은 독일의 조약의무 이행여부에 따라 5년마다 점진적으로 철군하여 1935년 완전 철군한다.● 독일 식민지의 상실 및 국제연맹 위임통치- 독일 제국은 전 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며, 이후의 문제는 국제연맹이 결정한다.● 독일의 군비 축소- 독일군의 병력은 국내 치안유지를 위한 10만 명으로 한정한다.- 독일은 전차, 독가스, 전투기, 잠수함을 보유할 수 없다.- 독일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명으로 제한한다.● 전승국에 배상금 지불- 독일은 연합국에게 끼친 모든 손해에 관한 책임을 인정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매년다. 워싱턴 회의에서 결정된 조약들로 이른바 워싱턴 체제가 이루어져 1931년 만주 사변까지 근 10년간 동북아 국제 질서를 지배하게 되었다.4. 전후 국제정세의 주요 변화- 국제 정치의 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변화 : 전후 영국은 미국과의 우열다툼에서 동등한 위치 또는 열세에 위치하면서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의 종말을 보게 된다. 전쟁이 유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은 완전히 황폐화 되었다. 또 영국은 육·공전에서의 약점을 보완해야만 하는 내적인 문제를 지녔고 외적으로는 독일로부터의 저항과 이에 대한 프랑스와의 이해관계 대립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워싱턴체제) 이후 영국은 종래의 팍스 브리태니카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고립 : 러시아는 제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장기전에 버텨 낼 경제력이 없었으며 전황의 악화와 국민 경제의 파탄으로 반정부론이 들끓었다. 1917년 3월 8일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대모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고 병사와 학생들도 호응해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0년 소비에트정권이 세워졌다.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으로 참전했지만 소비에트 혁명으로 인한 국내 혼란으로 독일의 항복 전에 독일과 평화 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전후 승전국 위주의 국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1922년에는 우크라이나와 연방을 형성함으로써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이 확고히 정립되어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Ⅲ. 베르사이유 체제의 진행 : 독일의 부활 가능성과 일시적 평화1. 라팔로 조약(1922년 4월 16일) - 독일·소련 접근, 고립 탈피시도제 1차 대전 이후 세계 문제 전반을 토의하기 위한 제노아 회의가 1922년 4월 10일 개최 되었다. 회의 도중 독일과 소련의 대표들이 제노아에서 20마일 떨어진 라팔로에서 비밀리에 회동해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발표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프랑스와 폴란드는 우려했던 위협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2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이탈리아는 팽창주의의 준비기간으로 들어섰다. 이탈리아는 1926년 독일과는 중재조약을 체결하여 유대를 공고히 하였으나 반파시즘운동의 본거지인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 독일 : 히틀러의 등장과 베르사이유 조약의 파기① 히틀러의 등장㉠ 히틀러의 등장1919년 9월 하러K. Harrer와 드레흐러 A. Drexler가 창설한 소규모 단체인 독일 노동당에 히틀러가 가입해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독일 노동당은 당시 만연해있었던 민족주의 운동을 지향하였다. 1920년 2월 히틀러는 독일 노동당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나치스당을 창건하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스당은 베르사이유 체제의 타파를 당 강령으로 삼았다. 1921년 8월 히틀러는 드레흐러를 물리치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브뤼니 수상의 의회 해산으로 실시된 1930년 9월 독일의 총선거에서 나치스당은 영향력을 확장시켜나갔다.총선거 후 나치스당은 보수 세력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산업계와 군부의 지원을 추구함으로써 세력을 확장시켰다. 마침내 1933년 1월 자본가들의 권익 보장을 약속한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다. 집권한 히틀러는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돌격대라는 나치스 진위대를 통해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히틀러는 이후 입법권을 장악하여 전권을 쥔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히틀러의 등장 배경당시 미국의 원조로 지탱되던 독일 경제는 대공황으로 붕괴되었다. 1932년 독일 노동자의 42퍼센트가 실업자로 전락하였다. 생존의 위험에 처한 노동자들 중에는 대공황을 안겨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의 뒤를 따르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본가와 중산계급은 대공황으로 인한 불안과 사회주의의 확산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었다. 자본가들과 중산계급은 허약한 정부를 대신하여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랐다.또 당시 독일 국민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따른 열등의식과 부분적인 조약 당사국 특히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은 자신들의 제안을 제시하고 상대방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이나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독일의 라인란트 진주는 베르사이유 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유럽은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를 모색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프랑스)는 철저한 방어 전략으로 전환해 강력한 방어선 구축에 전념하였다.(3) 스페인 내란(1936년 7월-1939년 3월)* 스페인 내란? 스페인 내란파시즘은 대공황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계급 갈등이 심해진 유럽 국가들에게 마치 해결책인양 여겨지며 확산되었다. 하지만 파시즘의 본질이 알려지면서 파시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반파시즘 연합, 곧 인민전선을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각 국의 사회주의 정당 뿐 아니라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위협을 우려하던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전선으로 모여들어 반파시즘 세력을 형성하였다.스페인은 이탈리아만큼이나 파시즘의 기세가 높았다. 파시즘의 높은 기세와 함께 반파시즘 세력도 힘을 얻었다. 1936년, 스페인에서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인민 전선정부가 수립되었다. 인민전선정부는 교회의 특권을 박탈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와 지주, 군부의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는 인민전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파시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스페인은 이제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장이 되었다. 스페인 내란은 처음부터 이념과 세력다툼을 위한 열국의 국제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 때 이탈리아와 독일은 반파시즘 세력인 프랑코를, 소련은 인민 정부 측을 지원하였다.)? 각국의 입장- 이탈리아 : 무솔리니는 스페인에 친 이탈리아 정권이 들어서며 지중해에서 중요한 영국의 해군 기지인 지브롤터를 위협하길 원했다. 이탈리아는 영국의 해군기지를 위협하고 장차 서지중해의 지배를 꿈꿨다. 또 프랑스의 아프리카 교통로를 차단하여 5월 에티오었다.
    사회과학| 2013.07.13| 30페이지| 4,000원| 조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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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일관계
    중일관계-동아시아에서의 협력과 경쟁《 목 차 》Ⅰ. 문제의식 - 갈등의 시작Ⅱ. 중·일 간 역사 전개1. 근대 이전 시기2. 냉전시기(1) 국교정상화 이전 '비정상적 시기'(2) 국교정상화 시기와 평화우호조약 시기3. 탈냉전기Ⅲ. 현재 중·일 간의 이슈1. 역사문제(역사인식, 야스쿠니신사 참배)2. 영토분쟁(센카쿠열도)3. 대만문제4. UN개혁과 일본의 상임이사국 문제Ⅳ. 중·일 관계의 전망Ⅴ. 중·일관계가 한반도에 미치는 함의Ⅵ. 문제제기Ⅰ. 문제제기중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1972년 국교정상화 이래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센카쿠-댜오위댜오 분쟁, 역사문제,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냉랭한 관계에 있다. 특히 작년에는 일본이 센카쿠열도의 국유화를 선언한 이후, 중국 내 50개 이상의 도시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최대 반일 시위였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 역시 4일 인도 뉴델리에서 경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중국은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동중국해와 일본해(동해의 일본식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자신의 영토는 스스로 지킨다는 개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이처럼 중일관계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중국은 과거 일본에 침략당한 수모를 기억하고 있다.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중국은 그 치욕을 잊지 않고 일본의 사과를 원한다. 반면 일본은 최근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우리 조는 이렇게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중일관계의 역사와 중일 양국이 상대국에 갖고 있는 인식, 현재 중일관계의 이슈, 중일관계가 한국에 주는 함의, 중일관계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갈등의 시작이와 같은 중일 간의 갈등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중일 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왔다. 대표적인 사건은 난징대학살과 청일전쟁이다. 중국은 난징대학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③ 일본의 내부적 상황과 대중인식* 1972 국교 정상화 시기1970년대 일본은 미국이 중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시기까지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두 개의 중국 노선’)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에 대한 어떠한 통보나 협상 없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과의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으로 기존의 사토내각이 퇴진하고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추진을 표하던 다나카 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는 일본에게 차별대우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 동시에 중국과의 교류도 가능하게 했다. 일본은 그동안의 민간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을 생각하며,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 역시 생각했던 것이다.* 1978 평화우호조약 시기일본 역시 평화우호조약 시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내의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했다. 또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경제적인 기대감도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④ 국교정상화와 평화우호조약 시기 중·일관계* 1972년 국교정상화 시기- 중·일 국교 정상화를 선언한 공동성명‘두 개의 중국 노선’을 지지해오던 일본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완화됨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다나카 정부는 2개월이라는 단기간 내에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흐름의 국제정세에 따라 1972년 중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곧 중일관계의 비정상적인 시기의 종식을 의미한다.- 중·일 국교 정상화의 특징중·일 국교 정상화의 공동성명은 중국과 일본이 본래의 자신들의 입장에서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을 가진다. 먼저 중국은 국교 정상화 이전 일본에게 요구했던 전제조건 3가지를 모두 충족하지 않아도유지하던 중일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중일관계는 센카쿠 영토 분쟁으로 다시 냉각기를 맞게 된다. 현재 센카쿠는 일본과 중국, 대만의 영토로 등록되어있고, 영유권을 두고 수차례에 걸친 충돌이 있었다. 1978년 당시 덩샤오핑은 이와 관련하여, 일단 보류되더라도 다음세대에서 해결방안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고, 이러한 발언이 지금까지 중국의 외교적 입장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중국의 외교안보정책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분쟁이 격화되는 것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미국, 유럽, 일본의 경제마저 흔들리면서, G2로 부상하게 된 중국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제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취하려는 조짐이라고 볼 수 있다.2000년대 중일관계를 양국관계에서 보면 대항적 관계로 갈등이 보이지만 동아시아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일관계는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동아시아지역이라는 다국 간 협조틀이 대립하기 쉬운 중일관계를 안정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했다. 중국의 2000년대 대일본외교정책은 전략적 파트너십의 촉진과 동의, 정상회담거부라는 양국 사이에서 변화해왔다. 중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도 지역협력장에서의 양국대화는 이어졌다. 중국은 고이즈미 시기 중일정상의 상호방문을 거부할 때도 원자바오 총리는 ASEAN+3(APT)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에 응했고, 동아시아지역협력 추진을 중시하고 대일정책을 동아시아 다자외교에 포함시킴으로서 양국관계의 장애물을 완화하려고 시도했다.아베 정권시기 중일관계의 개선이후 양국 관계의 특징은 어려운 문제는 일단 보류하고 우호관계발전을 중시하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수년간의 경제교류가 양국관계를 지탱해 온 면이 강하다. 그러나 중일 간의 전략적 호혜관계라는 측면에서 양국민의 상호이해라는 공통이익의 실현은 아직 불충분하다. 양국의 전략적 이익 중 서로 공유하지 못한 것(중국에게 출된 시 주석에게 외교 경로를 통해 축전을 보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회견에서 새로운 지도자와 지도부에 축의를 표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달 15일에도 아베 총리는 중국과 긴장 관계에 있으나 새 지도부와의 대화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며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과 일대일로 회담하고 싶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날 NHK 저녁 뉴스 방송에 출연해 현재 중국 측에서 남중국해와 센카쿠 열도에서 도발적인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며 그러한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양국 지도자 사이에 의견교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상호이익을 위해 전략적 관계의 원칙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고 정상회담 개최에 의욕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긴장상태그러나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중국 항공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 항공자위대의 긴급 출격 횟수는 작년 4월부터 12월까지 160차례로 전년 동기대비 17차례 늘어났다.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01년 이후 가장 많다. 특히 센카쿠 국유화로 대중 관계가 악화한 10∼12월 무려 91차례를 기록해 4∼6월(15차례)이나 7∼9월(54차례)을 크게 웃돌았다.중국은 댜오위다오 인근 해역에 조만간 최대 규모인 1만t급 어정선(어업지도선)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최근 1만t급 어정선을 건조했고, 어업 행정 지도를 위해 댜오위다오 부근 해역에 상주시킬 계획이다.또한 중국은 아베총리의 그간 행적과 “침략의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발언논란과 관련해서 연일 일본 아베총리의 역사도발을 비판하며 미국의 일본비판 기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섰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이번 달 9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국 보스턴대 국제관계학 교수의 대일비판 글을 게재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반성하는 것은 자학이 아니다. 이웃국가들의 격노를 피하는 것이다’는 제목으로 쓰여진 이 기고문은 이날 오전 중국 대부분 언론들에 재인용되고 있다. 기고문은 “2약 350㎞, 대만의 북동쪽 약 190㎞ 떨어진 동중국해상에 위치한 센카쿠열도 8개 무인도 등 댜오위다오, 베이샤오다오, 난샤오다오, 지우창다오-, 따쩡다오 등 5개 도서와 페이라이, 베이옌, 난옌 등 3개 3개 암초)로 구성되어 있고, 총 면적은 6.32㎢이다. 현재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과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열도 분쟁은 인근 해역의 석유매장 가능성,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 경계선 미확정, 중동과 동북아를 잇는 해상교통로이자 전략요충지 등의 쟁점을 지닌 분쟁이며, 독도에 대한 일본 측 주장의 이율배반성을 이유로 분쟁 당사국은 물론 관련국인 우리의 관심도 높은 곳이다.센카쿠열도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은 센카쿠열도가 대만의 부속도서로서 1403년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문헌을 근거로 중국이 센카쿠열도를 가장 먼저 발견했으며, 댜오위다오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을 이용해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때부터 계속해서 중국이 관할권을 행사해왔으며, 여러 고지도들도 센카쿠열도를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이에 반해 일본은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 후 인근의 무인도였던 센카쿠 열도 또한 오키아와현으로 편입시켰으며, 1971년 미일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따라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반환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종전 이후 영토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중일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구분시기상호주장관할국중국일본19세기 말까지중국중국의 고유영토(역사 문헌에 기초)무주지청일전쟁 후일본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타이완, 펑후제도와 함께 강제할양강제할양과 무관 1895년 오키나와에 정식 복속(무주지 선점)제2차 세계대전 후미국중국의 거유 영토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미국에 이양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거한 적법한 신탁통치오키나와 반환일본타국 영토의 불법적 거래미국 관할에서 복귀표 센카쿠/댜오위댜오 영토의 역사적 관할권에 대한 상호주장제이다.
    사회과학| 2013.07.02| 37페이지| 4,0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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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일관계
    중일관계-동아시아에서의 협력과 경쟁중국외교안보론 중일관계 5월 14일《 목 차 》Ⅰ. 문제의식 - 갈등의 시작Ⅱ. 중·일 간 역사 전개1. 근대 이전 시기2. 냉전시기(1) 국교정상화 이전 '비정상적 시기'(2) 국교정상화 시기와 평화우호조약 시기3. 탈냉전기Ⅲ. 현재 중·일 간의 이슈1. 역사문제(역사인식, 야스쿠니신사 참배)2. 영토분쟁(센카쿠열도)3. 대만문제4. UN개혁과 일본의 상임이사국 문제Ⅳ. 중·일 관계의 전망Ⅴ. 중·일관계가 한반도에 미치는 함의Ⅵ. 문제제기Ⅰ. 문제제기중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1972년 국교정상화 이래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센카쿠-댜오위댜오 분쟁, 역사문제,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냉랭한 관계에 있다. 특히 작년에는 일본이 센카쿠열도의 국유화를 선언한 이후, 중국 내 50개 이상의 도시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최대 반일 시위였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 역시 4일 인도 뉴델리에서 경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중국은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동중국해와 일본해(동해의 일본식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자신의 영토는 스스로 지킨다는 개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이처럼 중일관계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중국은 과거 일본에 침략당한 수모를 기억하고 있다.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중국은 그 치욕을 잊지 않고 일본의 사과를 원한다. 반면 일본은 최근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우리 조는 이렇게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중일관계의 역사와 중일 양국이 상대국에 갖고 있는 인식, 현재 중일관계의 이슈, 중일관계가 한국에 주는 함의, 중일관계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갈등의 시작이와 같은 중일 간의 갈등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중일 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왔다. 대표적인 사건은 난징대학의를 대응하기 위해서도 일본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③ 일본의 내부적 상황과 대중인식* 1972 국교 정상화 시기1970년대 일본은 미국이 중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시기까지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두 개의 중국 노선’)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에 대한 어떠한 통보나 협상 없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과의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으로 기존의 사토내각이 퇴진하고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추진을 표하던 다나카 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는 일본에게 차별대우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 동시에 중국과의 교류도 가능하게 했다. 일본은 그동안의 민간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을 생각하며,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 역시 생각했던 것이다.* 1978 평화우호조약 시기일본 역시 평화우호조약 시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내의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했다. 또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경제적인 기대감도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④ 국교정상화와 평화우호조약 시기 중·일관계* 1972년 국교정상화 시기- 중·일 국교 정상화를 선언한 공동성명‘두 개의 중국 노선’을 지지해오던 일본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완화됨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다나카 정부는 2개월이라는 단기간 내에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흐름의 국제정세에 따라 1972년 중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곧 중일관계의 비정상적인 시기의 종식을 의미한다.- 중·일 국교 정상화의 특징중·일 국교 정상화의 공동성명은 중국과 일본이 본래의 자신들의 입장에서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특징을 가진다. 먼저 중국은 국교 정상화 이전 일본에게 요구했던 전제조건 3화 등으로 냉각기를 유지하던 중일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중일관계는 센카쿠 영토 분쟁으로 다시 냉각기를 맞게 된다. 현재 센카쿠는 일본과 중국, 대만의 영토로 등록되어있고, 영유권을 두고 수차례에 걸친 충돌이 있었다. 1978년 당시 덩샤오핑은 이와 관련하여, 일단 보류되더라도 다음세대에서 해결방안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고, 이러한 발언이 지금까지 중국의 외교적 입장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중국의 외교안보정책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분쟁이 격화되는 것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미국, 유럽, 일본의 경제마저 흔들리면서, G2로 부상하게 된 중국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제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취하려는 조짐이라고 볼 수 있다.2000년대 중일관계를 양국관계에서 보면 대항적 관계로 갈등이 보이지만 동아시아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일관계는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동아시아지역이라는 다국 간 협조틀이 대립하기 쉬운 중일관계를 안정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했다. 중국의 2000년대 대일본외교정책은 전략적 파트너십의 촉진과 동의, 정상회담거부라는 양국 사이에서 변화해왔다. 중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도 지역협력장에서의 양국대화는 이어졌다. 중국은 고이즈미 시기 중일정상의 상호방문을 거부할 때도 원자바오 총리는 ASEAN+3(APT)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에 응했고, 동아시아지역협력 추진을 중시하고 대일정책을 동아시아 다자외교에 포함시킴으로서 양국관계의 장애물을 완화하려고 시도했다.아베 정권시기 중일관계의 개선이후 양국 관계의 특징은 어려운 문제는 일단 보류하고 우호관계발전을 중시하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수년간의 경제교류가 양국관계를 지탱해 온 면이 강하다. 그러나 중일 간의 전략적 호혜관계라는 측면에서 양국민의 상호이해라는 공통이익의 실현은 아직 불충분하다. 양국의 전략적 이익 중 서로 공유하지 주석으로 선출된 시 주석에게 외교 경로를 통해 축전을 보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회견에서 새로운 지도자와 지도부에 축의를 표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달 15일에도 아베 총리는 중국과 긴장 관계에 있으나 새 지도부와의 대화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며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과 일대일로 회담하고 싶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날 NHK 저녁 뉴스 방송에 출연해 현재 중국 측에서 남중국해와 센카쿠 열도에서 도발적인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며 그러한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양국 지도자 사이에 의견교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상호이익을 위해 전략적 관계의 원칙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고 정상회담 개최에 의욕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긴장상태그러나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중국 항공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 항공자위대의 긴급 출격 횟수는 작년 4월부터 12월까지 160차례로 전년 동기대비 17차례 늘어났다.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01년 이후 가장 많다. 특히 센카쿠 국유화로 대중 관계가 악화한 10∼12월 무려 91차례를 기록해 4∼6월(15차례)이나 7∼9월(54차례)을 크게 웃돌았다.중국은 댜오위다오 인근 해역에 조만간 최대 규모인 1만t급 어정선(어업지도선)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최근 1만t급 어정선을 건조했고, 어업 행정 지도를 위해 댜오위다오 부근 해역에 상주시킬 계획이다.또한 중국은 아베총리의 그간 행적과 “침략의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발언논란과 관련해서 연일 일본 아베총리의 역사도발을 비판하며 미국의 일본비판 기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섰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이번 달 9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국 보스턴대 국제관계학 교수의 대일비판 글을 게재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반성하는 것은 자학이 아니다. 이웃국가들의 격노를 피하는 것이다’는 제목으로 쓰여진 이 기고문은 이날 오전 중국 대부분 언론들에 재인용되고 있다. 동쪽 약 350㎞, 대만의 북동쪽 약 190㎞ 떨어진 동중국해상에 위치한 센카쿠열도 8개 무인도 등 댜오위다오, 베이샤오다오, 난샤오다오, 지우창다오-, 따쩡다오 등 5개 도서와 페이라이, 베이옌, 난옌 등 3개 3개 암초)로 구성되어 있고, 총 면적은 6.32㎢이다. 현재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과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열도 분쟁은 인근 해역의 석유매장 가능성,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 경계선 미확정, 중동과 동북아를 잇는 해상교통로이자 전략요충지 등의 쟁점을 지닌 분쟁이며, 독도에 대한 일본 측 주장의 이율배반성을 이유로 분쟁 당사국은 물론 관련국인 우리의 관심도 높은 곳이다.센카쿠열도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은 센카쿠열도가 대만의 부속도서로서 1403년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문헌을 근거로 중국이 센카쿠열도를 가장 먼저 발견했으며, 댜오위다오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을 이용해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때부터 계속해서 중국이 관할권을 행사해왔으며, 여러 고지도들도 센카쿠열도를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이에 반해 일본은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 후 인근의 무인도였던 센카쿠 열도 또한 오키아와현으로 편입시켰으며, 1971년 미일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따라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반환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종전 이후 영토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중일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구분시기상호주장관할국중국일본19세기 말까지중국중국의 고유영토(역사 문헌에 기초)무주지청일전쟁 후일본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타이완, 펑후제도와 함께 강제할양강제할양과 무관 1895년 오키나와에 정식 복속(무주지 선점)제2차 세계대전 후미국중국의 거유 영토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미국에 이양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거한 적법한 신탁통치오키나와 반환일본타국 영토의 불법적 거래미국 관할에서 복귀표 센카쿠/댜오위댜오 영토의 역사적 관할권에 대한 상이다.
    사회과학| 2013.07.02| 37페이지| 4,000원| 조회(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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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평가A+최고예요
    2013-1 국제정치사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제 2 장. 유럽열강의 세계팽창Ⅰ. 문제의식Ⅱ. 서론Ⅲ. 이탈리아의 통일1. 국제정세와 대내적 상황2. 통일의 발단과 전개과정3. 이탈리아 통일의 의의Ⅳ. 독일의 통일1. 국제적 위치와 국내정세2. 對덴마크, 對오스트리아 전쟁3. 對프랑스 전쟁4. 독일 통일의 의의Ⅴ. 새로운 유럽 국제정치 질서Ⅵ.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비교Ⅶ. 문제 제기Ⅷ. 부록Ⅰ. 문제의식?우리나라는 세계화 시대에 통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세계화 물결에 적극대응하면서 이후의 발전방향을 예비하는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과거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불었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운동들과 결합되어 유럽 질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근대국가의 형태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 일본에까지 수출되어 세계외교사의 주요문제가 되었다. 앞서 두 나라의 통일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컸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통일 또한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나라의 통일의 배경과 그 과정, 의의를 검토하고 이를 오늘날의 한국과 연결 지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Ⅱ. 서론?1830년 7월, 파리는 복고왕정을 타도하고 새로운 왕정을 성립시켰다. 7월 혁명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벨기에를 깨워 반란을 거쳐 독립하게 만들었다. 결국, 벨기에 사태에 진입하고자 했던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동유럽 3국과, 불간섭을 내세운 영국?프랑스의 서유럽 2국은 대립하며 새로운 유럽의 구조를 세웠다. 이는 그 후 유럽 외교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후에 일어난 1848년 2월 혁명은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시켜 세계의 국제정치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 혁명이다. 1846~7년 유럽의 경제공황으로 시작 된 프랑스 내부의 사회불안은 반정부시위로 이어졌다. 그 결과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이 선포된 파리에서의 혁명을 시작으로 자유주의 헌법에 대한 요통일을 건의하려하나, 아직 이르다고 판단하게 된다.?우선적으로 구상한 북부 이탈리아를 통합하려면 롬바리디와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불가피 했다. 이탈리아 단독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그는 동맹국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영국은 상업적인 이유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으나, 유럽 내 정세에 ‘불간섭’을 선언한 경우가 많아, 그저 동정적일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이탈리아 반도 내에 법왕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 연합을 도모했고, 그 결정적인 계기로는 오르시니 사건)이 있다.?플롱비에르 비밀합의1858년 7월 20일 카부르와 나폴레옹 3세는 자국의 내각 비밀리에 밀담을 나누었다. 이는 다음해 1월 19일 양국의 조약으로 확정 되었다.[플롱비에르 협약]1. 오스트리아 전쟁의 도발은 사르디니아, 국제관계와 전쟁의 국지화는 프랑스가 담당2. 전후 이탈리아를 4개의 연방으로 정치단위 구성. 의장은 법왕을 임명3. 프랑스는 사르디니아 영토인 사보이를 합병그러나 실제 체결된 조약은 4개 연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니스를 추가로 프랑스에 할양키로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가 강력한 통일국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이탈리아 연방을 창설하려는 심산이었다.?프랑스·러시아의 비밀 합의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의 병력을 빌려 오스트리아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에게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 대가로 흑해 비무장 조항의 철폐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전쟁에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다.⑶ 전쟁의 도발과 통일의 진전(초기 통일운동)?1859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였다. 이에 영국 중심 열강이 평화적 해결을 중재하려 했으나,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프랑스와 사르디니아에 의해 실패하였다. 사르디니아의 군인이 된,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 있던, 롬바르디 사람들의 귀환 문제로 오스트리아는 4 로마 진격으로 급진적 통일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카보우르가 이를 막기 위해 사르데냐군을 법왕령에 급파하고 가리발디가 점령한 남이탈리아 지방의 피에몬테 귀속을 묻는 주민투표안을 왕에게 승낙하도록 하자 가리발디에게는 이 점령지를 왕에게 바치는 길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861년 3월에는 토리노에서 새 의회가 소집되어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일단 통일과 독립이 이루어졌다.?이후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하여 승리한 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회복한다. 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철군하자 로마를 점령하였고, 세계 1차대전 이후 트렌티노와 이스트리아, 티롤 지역 또한 병합하게되여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하게 된다.3. 이탈리아 통일의 의의?이탈리아의 통일은, 순수한 민족의 자주의식 속에서 형성되어 강력한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했던 빈 체제를 이겨내고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는 빈 체제의 한계와 오스트리아의 심각한 후퇴를 지적하고, 독일의 통일로도 이어지게 된다.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된 북부와 후진적 농업 지대였던 남부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지리상 해외진출이 쉬운 이탈리아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또한 육?해군의 강화는 이탈리아가 강대국의 지위에 설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발전한 이탈리아는 20세기 제국주의적 식민지 경쟁에도 끼어들었다.Ⅳ. 독일의 통일1. 국제적 위치와 국내 정세?중앙 유럽에 위치하는 독일의 지리적 조건은 역사적으로 독일의 외교 및 군사정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인접하는 대국들의 정책은 늘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독일의 잠재능력을 대국의 지배 아래 놓으려 하였고, 그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중립화를 시도하여 왔다. 독일인이 거주하는 중앙 유럽에서는 통일적인 정치권력이 형성되지 않아 정치적 진공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정치적 진공상태는 하나의 완충지대로서 근세 절대왕조 사이에 유럽대륙에서 힘의 균형이마크군을 격파하고 이를 마무리짓기 위한 런던회의가 1864년 6월까지 개최되었다. 그 동안 덴마크는 완전히 패하였고 비엔나 강화조약(1864년 10월 30일)은 체결되었다. 이는 아래와 같다.덴마크프로이센오스트리아슐레스비히?홀슈타인?라우엔부루크 권리포기가슈타인(Gastein) 협정:슐레스비히→프로이센, 홀슈타인→오스트리아,라우엔부르크→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금전지불)⑵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비스마르크는 근본적으로 독일인의 영토에서 오스트리아의 권위를 배제하는 길은 전쟁뿐이라고 믿었다. 그의 전쟁대비외교는 우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랑스의 중립 확보였다. 1865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벨기에를 포함한 영토적인 대상代償을 시사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최소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의 동맹은 없을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오스트리아에 양면전선의 형성을 통한 압력을 가하고자,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1866년 프로이센은 베네치아의 반환을 미끼로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1866년 프로이센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독일연방제의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 의회를 소집하고 영유권을 확립하여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에 가시타인 협약 위반이라 비난하며 홀슈타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 17일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다음날 프로이센의 對오스트리아 선전이 있었고, 이틀 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후 참전하였다.?막강한 군사력의 프로이센에 對오스트리아 전쟁은 7주만에 종결되었다. 니콜스부르크 예비조약으로 정전하였고, 최종적으로 1866년 8월 23일의 프라하 조약으로서 막을 내렸다. 이는 아래와 같다.프로이센오스트리아이탈리아하노버, 헤세-카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프랑크푸르트 병합북부 독일연방 구성,남북 독일연방 구성독일연방 해체 승인, 덴마크 영유지에 대한 영유권 포기베네치아 획득3. 對프랑스 전쟁비스마르크에게는 對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종전강화를 중개한 프랑스의 어 낸 통일은 위로부터 진행 된 국민 국가 건설 과정이었다. 전쟁은 독일인들에게 '국민 의식'과 '애국심'을 심어 주었다.?새로운 독일의 헌법은 의회를 양원제로 구성하였고, 하원인 제국의회 의원은 국민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프로이센의 왕이기도 한 황제는 외교정책을 책임지고, 군대를 통솔하며 총리를 임명했다. 의회는 모든 법률과 세금에 대한 승인 권한이 있었으나 총리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비스마르크는 독일인 대부분이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인정했다. 프로이센 토지 소유자, 귀족, 신흥 기업가들은 그를 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를 반대하는 가톨릭과 사회주의 정당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871년 이후에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으로 대외 갈등을 피하며 새로운 통일 제국이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독일제국은 통일을 이룩한 이후 선진화된 산업화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18년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왕 빌헬름 2세는 퇴위하였으며, 프로이센은 독일의 한 주(state)가 되었다.Ⅴ. 새로운 유럽 국제정치 질서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하나의 시기를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외교사가들은 이를 분기점으로 하나의 시기구분을 하고 있다. 이 시기 이후 유럽 국제 정치 질서에 나타난 중요한 새로운 양상은 대개 다음과 같다.⑴ 강대국 독일의 등장1712~1715년 위트레흐트 평화 이후 유럽을 지배해 온 강대국 영국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독일이 등장하게 된다. 아래 지표를 보면, 제 1차 세계대전 (1914년) 직전에 독일은 영국을 앞지르는 강대한 국가가 되었으며,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참고) 지로R.Girault교수가 원용한 권력지표1871년경1885년경1900년경1914년경영국66.262.159.857.3러시아51.052.053.857.6독일34.642.254.663.7프랑스48.848.746.246.5오스트리아26.321.729.62.
    사회과학| 2013.06.06| 14페이지| 3,500원| 조회(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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