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를 위한 변명참고 자료 : [사형제도(형법 제 14조)의 존폐론에 관한 연구-고시면]사형제 존폐론 논쟁은 정치 영역을 넘어서는 범사회적 화두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형제 폐지는 확실한 세계적인 추세이고 국내에서도 꾸준히 사형제 폐지 운동이 있었으며, 지난 19대 국회에서도 이미 한 차례 사형제 폐지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었던 바이다. 허나 반대로, 헌법재판소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사형제에 합헌 선고를 내렸고 국민 여론 또한 아직은 사형제 존치를 지지하는 입장에 더욱 기울어져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서 2010년 헌법 재판소의 선고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관해 ‘현행 헌법이 스스로 예상하고 있는 형벌의 한 종류이고, 이는 생명권 제한에 있어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다’ 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맞서 숱한 종교인과 인권 단체는 ‘헌법 상 어떤 구문에도 생명권 침해의 당위성에 대한 지지를 찾을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한편으로는 해당 선고가 5(합헌) 대 4(위헌)의 간소한 차이로 결정되었으며, 또 합헌 입장 중의 두 명의 재판관이 사형제의 제도 개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형제는 사실상의 위헌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두 입장의 대비는 사형제라는 제도를 형성하고 뒤받치는 신념 체계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얼마나 이질적으로 공유되는지를 선명하게 나타내어준다. 여기서 신념 체계의 충돌을 자아내는 것은 결국 국가 법 강제의 권위 수준과 사회에 선행하는 인간 윤리 속 생명의 가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우선, 사형이 가지는 형벌적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사형은 그것이 죽음을 다룬다는 것과 집행에 있어 절대적 비가역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다른 형벌과 확연히 구분된다. 따라서 사형은 가장 높은 강도의 형벌로서가 아닌, 다른 형벌로서 감당할 수 없는 독립된 영역을 관장하는 형벌로서 해석되는 것이 옳다. 바로 이 점에서 사형은 대체 불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쟁의 논점을 구체화할 수 있다. 국가 사회가 가지는 법적 강제성의 권위가 오로지 사형으로만 정의되는 독립적인 통제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일까? 풀어 말해, ‘죽어야 마땅한 죄’라는 것을 국가 사회가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잊으면 안 될 것은 바로 우리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전제하는 민주 정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한편, 우리는 사형제의 전제가 ‘사형의 범위는 사회의 윤리 상식이 허용하는 범위를 극도로 넘어선 행위의 주체로 한정한다’ 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우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윤리 가치를 더욱 중요시할까 생명의 가치를 더욱 중요시할까?’ 사실, 이 질문은 사형제 논쟁에 상당히 큰 지분을 차지하는 종교 관계자들이 주로 파고들어가는 부분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종교는 생명의 가치를 절대시한다. 허나, 실제 우리 본유의 종교성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몇 개의 신화만 훑어봐도 우리는 쉽게 이를 파악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신화 속 신들은 죄 지은 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신화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심상이 인간 본유의 종교성-본능의 깊숙한 영역-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인간 사회 보편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사형제에 열을 올리는 온갖 종교단체의 말들은 단순히 그들 종교의 역사 속 우연적으로 기술된 교리에서 근거됐을 뿐이란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말들이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심각하게 주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다시 흐름을 되돌려 앞서 끊겼던 논지를 이어가보도록 하자. 사형이 아닌 다른 형벌로는 관장할 수 없는 독립된 영역은 도대체 무엇인가? 즉, 누군가 죽어야만 마땅한 경우는 무언인가? 국가가 이를 정의할 수 있는가? 잠시 ‘사형제’의 프레임을 넘어 넓은 시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사실, 국가 사회가 살생을 저지르는 경우는 사형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전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전쟁은 국가 사회가 행할 수 있는 ‘정당한 살생’이다. 허나 분명, 생명의 가치는 국적을 불문한다. 그렇다면, 왜 이 경우 국가의 살생이 정당화되는가? 이에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답은 ‘국가의 존속을 위함’ 이다. 이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의식이다. ‘국가라는 개체에 의한 정당한 살생’이란 확실히 -적어도 인간 사회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앞서 말했던 ‘어떤 특수한 집단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보다 높게 여기는 인간의 본능’을 찾을 수 있다. 생명의 가치란 것도 결국 사회적 상황에 종속되는 가치인 것이다.초점을 내부화하자면, 사회의 고유한 질서를 바로잡고 일정부분 통제하는 것도 적국의 침입에 맞서 전쟁을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회의 존속’을 위한 것으로 넓게 해석될 수 있다. 이 질서가 곧 해당 사회의 도덕, 윤리 상식이라 풀이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사형’이란 형벌은 이 질서에 명백히 위배되고 또,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질서에 위협이 되는 자를 대상으로 집행되었다. 왕이 곧 사회의 도덕이었던 시절엔 왕을 거역하는 자를 사형시켰고, 신이 곧 사회의 도덕이었던 시절엔 신을 거역하는 자를 사형시켰다. 여기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다만, 해당 도덕의 합당성일 뿐 그것이 사형을 이용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차Ⅰ. 서론Ⅱ. 민주 국가에서의 교육Ⅲ. 교육을 통한 해결방안Ⅲ-1) 민주 시민의 능력의 필요성Ⅲ-2) 성인공교육의 당위성Ⅳ. 제도적 유용성 : 정당에 의한 성인공교육Ⅴ. 결론Ⅰ. 서론민주 국가에선 권력자의 무능은 죄가 된다는 원칙은 촛불로써 훤히 밝혀졌다. 이와 일치되는 이유로 민주 시민의 무능 또한 처벌받을 수 있는 죄로 보아야 마땅하다. 두 명제의 연관은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2항으로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 국가에서 국민과 권력자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국민’과 ‘권력자’라는 두 역할을 짊어진 지닌 인간들을 시민, 정확히는 민주 시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민주 시민은 국민의 의무와 권력자의 의무를 동시에 수행해야하는데, 바로 이는 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권력의 지배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민주 시민의 능력이다. 민주 시민의 능력이란 간략하게는 정치적 판단, 추론 능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력의 지배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수용을 할 수 있는 능력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법, 역사, 경제 등의 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보유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의 능력은 민주 시민의 능력의 필요조건이다. 두 능력을 모두 갖춘 국민만이 민주 시민이라는 호칭의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능력의 부재는 민주 시민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범죄 혐의이자 민주 가치에 대한 기만이다.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국민들은 헌법에 명시된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받는 수준을 넘어선 자의적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여기서 잠시, 권력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본 보고서는 (정치적) 권력이란 단어에 현실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소위 정치성을 가지는 능동적 권력을 공교육을 마친 국민 전부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가시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국민은 둘째 치고 국가가 공교육의 중점적 목적을 민주 시민 양성에 두기보다는 공교육에서 대학교육-이는 특수한 사회적 교육으로 볼 수 있다-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수월성 혹은 합리성에 두는 경향이 뚜렷하고, 미성년과 성인을 구분하는 시기는 공교육의 기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오래된 사회적 통념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공교육의 의무교육을 마치지 않은 국민에게도 해당 시점에 성인의 권한을 모두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 모든 논의가 현실을 추상화한 철학적 접근에 기반을 둔다는 강하지만 다소 무책임한 변명을 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본 보고서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러한 공교육의 원리에 대해 의문점을 가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과연, 현 공교육 제도만으로 국민들이 충분한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국가의 교육과 별도로 진행되는 특정 방법에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갖춘 시민들을 양성할 정당한 권한이 부여될 수 있는가?’, ‘만약, 전의 두 질문이 부정되었을 때, 현재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부여된 능동적 권력의 정당성을 입증하거나 혹은 정당성을 다시금 구축해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있는가?’ 질문들에 대한 보고서의 답변은 단호하다. 현행의 공교육은 제시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국가의 일괄적인 교육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그러한 필요를 보편적이고 당위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민주 시민의 능력은 오로지 그리고 반드시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 보고서의 논점이다. 보고서는 -위에서 줄곧 언급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을 기준으로 했을 때-현 공교육 제도의 대안으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이하 성인공교육)’을 제시하고자 한다. 말 그대로 국가가 현행의 공교육을 수료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에 뒤이어 따라왔어야 할 현 체제에 대한 반성적 고찰-정부의 권력 집중화, 국회와 사법기관의 견제 구조 붕괴, 공론장의 미비 등등-이 거의 공론화되고 있지 않다. 시민들에게 있어 이번 사건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숭고하고 완전한 체제를 위협하는 악당들의 농간’에 불과한 듯하다. 문제의 원인은 악당의 타고난 악한 품성이라고 이미 암묵적으로 결론이 내려진 듯하다. 허나, 악당의 출현이 용인된 구조적 결함을 거시적 관점에서 확인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발전적 고찰을 하는 노력 없이는 언젠가 다시금 박 대통령같은 악당이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결국, 이런 의심의 소양 부족의 원인은 민주 시민의 능력의 부족으로 귀결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교육뿐이다. 우리에겐 교육이 절실하다.위의 논의를 통해 첫 번째 질문은 입증을 하였고 뒤이어 두 번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본 보고서의 논의의 출발선상에서 제시되었던 헌법 제 1조 2항을 세밀하게 풀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민 주권 개념을 서술하는 이 헌법 조항에 대한 해석에는 루소의 주권 개념을 차용하고자 한다. 루소의 사상에서 주권은 사회가 가지는 일반 의지로 표현된다. 루소에 따르면, 이 일반 의지는 사회의 모든 개인의 의지가 중첩적으로 모인 것이기에 각 개인은 모두 전체 일반 의지에 나란히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개인은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각 개인에게 약속을 하고, 국가의 구성원으로서는 주권자에게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주권자는 그 주권자를 구성하는 개인들로 형성되는 것이므로......주권자는 주권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항상 주권자로서 가져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Rousswau 2010, 34-35)보다 현대적인 논의를 위해 루소의 개념에서 사회계약적인 함의는 묻어두고 주권자 개념에 대해서만 집중하고자 한다. 루소의 주권자는 주권에 종속된 자들 전부를 통칭하는 상징적 함의를 지닌다. 만약 이 주권자를 하나의 사회적 허나, 본 보고서는 국가의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그러한 넓은 의미의 교육이 아닌 공교육으로 특정하고자 한다. 공교육을 다른 교육 방식들과 차별화시키는 특성은 바로 그것의 보편성과 강제성에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국가의 수단으로 공교육을 시행하는 것은 그것의 정당성을 좀 더 확실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이 단락의 논의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강요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수단으로 공교육을 시행하는 것에 정당성이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또한, 이 논의에 있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차등 원칙을 차용하고자 한다.우선, 다음의 비유 상황을 통해 논의의 요점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한다. ‘A’, ‘B’, ‘C’ 그리고 관리자 K 이렇게 네 명의 사람이 있다. 어느 날, 이들이 모여 특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의 참가자는 A, B, C 세 명이고 관리자 K는 명칭 그대로 게임의 진행을 관리하는 사람이며 그 동시에 이 게임의 주최자이다. K의 절대적 의무는 게임 진행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세 명의 참가자는 모두 해당 게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이다. 허나, 다행이도 친절한 관리자 K의 배려로 세 명의 참가자는 모두 게임장에 도착하기 전 게임의 복잡한 규칙을 대강 설명하는 요약문을 편지로 받았다. 불행한건 관리자 K로서는 세 명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편지를 펴보기나 했는지 아니면, 열심히 읽었음에도 전혀 이해를 못했는지 등 참가자들의 규칙 숙달 여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세 명의 참가자는 굳은 표정으로 게임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의 관리자 K의 역할이다. 우리는 관리자 K에게는 게임 진행의 공정성을 유지해야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 상황에서 게임의 공정성 여부를 선행적으로 판단 할 유일한 기준은 바로 참가자들의 규칙 숙달 여부이다. 만일, 게임이 시작되기 전 참가자들이 각기 다른 수준으로 규칙을 숙달한 정책에 있어서 성인공교육의 당위성을 논하는 것이란 것을 상기하자. 위의 상황에서 등장하는 관리자 K는 현실의 국가 혹은 정부라고 볼 수 있다. 국가는 법과 제도 위에서 행해지는 국민들의 정치적 활동들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 국민들이 참가자라는 신분을 얻고 진행되는 이 정치적 게임장에서 법과 제도는 일종의 규칙으로 작동한다. 모든 국민이 태어남과 동시에 국민의 지위를 얻지만 곧바로 정치적 권력의 사용권이 전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법적 성인 기준인 만 19세를 넘긴 국민들에게 한해 공식적인 정치적 게임장에 입장을 허용한다. 우리는 이 정치적 게임장의 진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게임장의 규칙 숙달 여부는 곧 본 보고서에서 언급되는 민주 시민의 능력의 갖춤과 대응된다. 즉, 법적 성인들의 공정한 정치적 게임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들의 민주 시민의 능력의 갖춤인 것이다. 국가는 공교육을 통해 미성년자들에게 민주 시민의 능력을 교육하고 이를 통해 훗날 그들이 참여하게 될 정치적 게임장의 공정성 유지를 확보하려 한다. 이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허나, 본 보고서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만으로 국민들이 전적으로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타당하지 못하며 이러한 가정은 하는 것은 국가로썬 상당히 무책임한 처사다. 위의 상황에서 관리자 K가 참가자들에게 규칙 요약문을 보내 게임장 도착 전 규칙 숙달 교육을 제공한 것이 바로 현실에서 국가가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공교육을 시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관리자 K나 국가나 이러한 선행 교육만으로는 게임 진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관리자 K는 참가자들의 규칙 숙달 여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고 국가는 성인들이 민주 시민의 능력을 갖추었는지 제대로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과 사상참고 자료 :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 조희연책에선 세계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국내적으로는 사회 운동이 제도권으로 빠르게 흡수된 채 해체되어가는 시기 속 점차 흐려지는 마르크스주의를 존속시키기 위한 지식인의 웅변이 느껴졌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마르크스주의에 집착하게 하는 것일까. 그의 담론은 그것이 이미 20여년이 지난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을 상기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요지는 ‘마르크스 없이 마르크스 앞에서’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시대진단 속,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기둥으로 삼아 세워진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외연 확대의 ‘부족’에 의한 사상의 교조적 편향 그리고 권력 감시 체계의 ‘부족’에 의한 독재적 체계 고착 등 실천 과정에 있어서의 우리의 ‘부족함’이 원인이라 진단한다. ‘그분의 저작을 신봉하고 그것을 현실에 관철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전지전능한 마르크스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한탄에서 이루어진 그의 이러한 시대진단은 ‘이론 차원에서의 변혁 혹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 지평의 질적 변화’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실천 과제로 이어진다. 또한, 그는 그러한 이론적 논의가 현실의 미시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고 역설한다. 허나, 나로서는 이러한 논의들이 아무리보아도 이미 뼈만 남은 시체를 이리저리 흔들며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하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시한번 이 책이 20여년 전의 책이란 것을 상기시켜보지만 그래도 경험적으로 메꿀 수 없는 간극은 여전했다.이 책이 쓰였던 시기는 1998년으로 민중이 군부독재에 맞서 87헌법 체제라는 성과를 이룩한 지 10여년이 지난 시기이며, 그러한 형식적 민주주의를 구성한 이후 군부 민선 정권, 보수 민선 정권을 거쳐 진보 민선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실질적(규범적) 민주주의까지 급속히 발전했던 때였다. 과거 정권에 맞선 사회 운동의 주류는 제도권으로 급속히 유입됨에 따라 사상서를 손에 든 민중사회 투사에서 법전을 손에 든 시민사회의 대변인으로 변신했다. 사회 체제의 근본적 모순과 개혁을 논하던 민중적 담론은 일상의 구체적 불편을 토로하는 시민적 담론으로 탈바꿈해갔다. 더 이상 ‘혁명’은 담론의 탁상 위에 올라오는 주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회의 ‘부르주아적’ 기조의 강화라고 보는 그의 진단은 비약적이다. 또한, 사회가 창출하는 여러 억압 중 계급적 억압이 여전히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없다. 그 시절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계승과 혁신’을 통한 사회 변혁을 이루어내는 것이 진보가 나아갈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민주화 이후 30여년이 지났고 이 책이 쓰여진 지 20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 사회는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민중적 담론의 보완 체계로써 설명했던 시민적 담론은 우리 사회의 독립적인-그리고 독보적인- 담론 형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로써는 담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운동’은 그러한 방식들 중의 하나로 격하되었다. 또한, ‘운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또한 체제 밖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체제 속으로 점점 더 강하게 융합되어짐에 따라 제도권 정치와 시민운동은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졌다. 이는 그가 말하는 ‘정치 우월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함의를 지닌다. 사회의 진보 세력은 점점 더 ‘사회주의’와는 멀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는 더더더욱 멀어지고 있다. 그들의 시야는 협소해졌지만 시력은 좋아졌다. 목소리의 울림은 줄었지만 차분해졌다. 사회의 변혁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지만 그들이 논하는 주제는 상당히 달라졌다. 그들은 이제 계급이 아닌 계층을, 국가가 아닌 지역을, 사회가 아닌 개인을 주목한다. ‘혁명’이란 단어는 이미 진보적 이미지를 잃은 채 회상적으로만 실체를 보존한다.
●서론근대인을 두 덩이의 빙하로 태워 나누었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 북극과 남극의 얼음처럼 먼지 하나 서로 오갈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졌던 두 사상은 놀랍게도 꼬리를 공유한 쌍두사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이것들의 발전 궤도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궤도가 수렴되는 꼬리에는 인류사 가장 위대한 발견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짤막한 명제가 존재 한다.‘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머리에 철학을 심고 역사를 세우던 인류는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는 진보적 사상의 벽을 마주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근대의 태동을 알린 이 명제는 그 이후의 모든 철학 사상을 아울러 지배했다. 의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 그것이 곧 평등한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평등이 모든 사상을 일원화시킨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같은 하늘을 보며 다른 꿈을 꾸는 듯, 평등에 대한 인간들의 심정적 이해는 상이하게 분화되어갔다. 상이한 사상들은 논리와 결합해 서로 통합, 분화되었는데 이를 크게 두 가지 물줄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평등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사상이었고 둘째는 평등을 동등과 연결시키는 사상이었다. 전자가 자유주의 사상이고 후자가 사회주의 사상이다. 이 두 사상의 맥락은 인류와 멀어질 수 없는 본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이것이 위의 위대한 명제와 만나서 ‘평등한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로 바뀐 것이다. 이 질문이 바로 두 사상의 물줄기를 나누어놓은 거대한 암석덩어리이다.●자유주의 사상의 발전 궤도혹자는 외쳤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원하면 정치인이 될 수 있고 시장 상인이 될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 속에서 개인의 발자취를 막을 명분이 없다. 이러한 사상의 해석은 자유와 강하게 중첩된다. 평등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 모두는 똑같은 자유권,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물물교환의 단위와 매개로써 존재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돈의 연관성을 통찰했고 ‘돈’이라는 관념을 고도로 추상화 시켰다. 돈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 그렇기에, 돈은 자신이 원하는 재화를 개인의 의지를 통해 선택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원하는 재화의 획득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는 것이다. 즉, 돈은 자신의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인 것이다. 돈은 선택권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자유를 암시했다. 국가는 그들이 돈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과 획득한 돈을 지킬 수 있는 치안만을 제공해주면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돈의 유통 즉, 시장을 통한 자유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선택적인 삶의 실현,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가 된 것이다. 고도화된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프레임을 구성해내었고 이것은 자유주의와 결부되어 공생을 이어갔다. 허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국가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국가는 시장에 선행되는 위치에 존재해야 한다. 시장원리가 국가에 적용될 수 없다. 시장원리가 아닌 독자적인 국가 운영의 원리가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사상의 근원을 짚어간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렇기에 모두 자유롭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국가의 모습을 구현할 권리가 있다. 즉, 누구나 정치가가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정치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국가를 운영할 소수의 정치인 집단을 구성해야한다. 어떻게 이들을 구성할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의 원리를 강하게 적용한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국가를 운영할 정치인으로서 선택할 수 있듯이, 나 아닌 타인을 국가를 운영할 정치인으로서 선택할 수 있다. 정치인의 구성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투표제가 도입되었다.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이다. 이로써 국가 운영 원리가 수립되며 자유주의자들이 꿈꾸어오던 자유 사회의 근간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수단으로 하는 되는 것이다. 본래, 동등하게 태어나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들은 모두 동등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들의 사상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 사상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누를 그 ‘동등한 삶’은 어떤 삶이어야하는가. 그들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가 따를만한 삶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의 표본을 어떠한 위대한 한 사람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모순이다. 모두가 평등하기에 어떤 한 사람이 모두를 아우를 그런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개개인에게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시야를 넓혔다.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집단의 형태로 보았다. 평등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 그들이 평등한 삶을 누리는 사회. 그 사회 속에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는 한 가지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 개인이 아닌 ‘사회’ 라는 추상화된 인간 집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발화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속 평등한 개인들에게 관통되는 원리를 찾으려고 했다. 사회는 그 원리를 구성하고 사람들에게 제시해야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찾은 원리는 공동생산, 공동분배였다. 모두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를 받는다. 철저히 동등하게 사는 것이다. 공산주의 원리가 도입된 것이다. 이 원리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사회는 분업화되었다. 또한, 위와 같은 원리를 통해 생산된 사회 재화들을 관리하고 동등하게 분배할 집단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자들은 당이라는 정치 집단을 상정했다. 당은 사회의 모든 평등한 사람들이 동등한 삶을 살게 할 의무가 있다. 당은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일을 나누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동등하게 분배한 것이다. 그리고 생산물을 모은다. 이를 관리하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배분한다. 사회원리가 실현되면 모두가 동등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그러한 동등한 삶을 모두가 살기 위해선 모두가 사회원리를 잘 따라야한다. 즉, 사람들은 당의 관리에 그들이 본 본래적 삶은 ‘평등’이 철저하게 실현된 인간사회 즉, 동등 사회였다.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역사상의 많은 사회들 그것들의 진보의 끝은 평등한 인간의 본래적 삶이 구현된 동등 사회라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논리였다. 진보의 끝을 알아낸 그들은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발전을 가속시킬 채찍질로서 혁명을 제시했다.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고 본래적 삶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희생가인 것이다. 그들은 당을 이루고 사람들을 모아 혁명을 이루었다. 사회를 변혁시키고 공산주의 원리를 도입했다. 역사가 고대하는 본래적 삶이 실현되기 이전까지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은 당을 구성해 사회를 관리했다. 여전히 혁명은 이어지는 것이고 당은 그들의 유토피아 동등 사회의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투사로 남은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제시하고 꿈꾼 평등 사회의 모습이다.●결론같은 뿌리에서 각각의 줄기를 이룬 두 사상, 자유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은 모양도, 색도, 향기도 같이 않은 정반대의 꽃을 피워냈다. 역사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두 개의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은 인류의 역사상 전례 없는 전지구적 대립을 자아냈다. 그리고 하나의 바다를 이룰만한 인류의 출혈을 딛고 사회주의는 무너졌고 자유주의가 우리의 올바른 삶을 지배하는 유일원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 우리는 흔히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구에서 사회주의의 존재가치의 소멸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자유주의는 인간이 쌓아올린 철학탑의 완결적인 모습일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에 온전히 적용된 적이 있기는 한 것일까?보편적인 결론으로는 사회주의는 지구상에서 몰락해 없어진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 사회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중국이 아직 건재한 상태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미 세계의 손꼽히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혹자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허울뿐현재 몸담고 있는 이 국가들이 진정으로 자유 사회를 실현한 국가 혹은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강한 목적이 있는 국가인가?단연코 그렇지 않다. 사실상, 지구상에는 한 가지 사상을 온전히 구현시킬 수 있는 사회나 국가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 국가의 초시가 되었던 소련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 그들은 그들이 이상화한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할 목적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명분뿐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로 목적으로 삼고 실현시킨 사회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일 뿐이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은 그저 인민을 통제할 수단적인 족쇄였을 뿐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어떠한가?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자유 사회를 실현할 포부를 내새웠으나, 수천 년간의 비자유적 역사의 흔적을 물로 씻듯 없애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시장경제를 도입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려 했으나, 이미 그 이전에 존재하던(모두가 당연시 여기던)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묵인하거나 강제적인 통제를 가하던가 모두 그들이 내세운 자유와 모순되는 양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원리를 도입해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현대의 많은 자유주의 사회 또한 그들의 내부적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의 원리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결국, 현대의 사상의 거대한 두 맥락, 자유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은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대립을 한 것은, 각각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가들’이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국가를 한 가지 사상으로 대변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다. 한 국가의 존립을 위해선 수많은 사상이 필요하다. 이 사상들은 국가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대립, 중첩되고 변화하며 현실에 실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각 사상을 초월한 진리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이지 사상은 아니다. 협소한 시각을 항상 경계하자. 개별적인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정확히’ 보게 할 순 있어도 ‘제대로’ 보게 할 순 없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러 사상적 현
『인간 불평등 기원론 개론』루소의 세계관은 다분히 회의적이다. 루소는 문명 사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았다. 왜 인간은 불행한 것인가? 루소는 궁금했다. 루소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을 불평등으로 규정했다. 또한 이러한 불평등이 생겨나게 된 원인은 곧 사회 그 자체라고 보았다. 즉, 루소는 불평등이 인간에게 우연히 다가온 과정은 인간 사회의 발달과정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루소의 불평등의 정의를 나누어보자.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으로 이는 인간에게 별다른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둘째는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것이 바로 루소가 주목하는 불평등으로 태고의 인간에게는 없었던 불평등이다. 루소는 이 없었던 불평등이 생겨난 과정, 즉 불평등이 인간에게 다가온 과정과 사회 발달과정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노력했고 이것의 결과로 나온 책이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있다. 1부는 대부분이 루소의 상상으로 구성되어있다. 루소는 말한다. ‘인간에게 불평등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불평등의 기원을 탐구할 첫 번째 열쇠이다.’ 하지만 당시로선(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의 과거 삶을 tv에서 보듯 생생하게 볼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루소가 추론한 평등사회는 우리가 숲 속의 야생동물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이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루소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가설은 태고의 인간의 모습을 추론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게 저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는 것이다. 1부에서는 루소가 세운 가설들, 즉 그가 상상한 태고의 인간의 모습들을 다 방면으로 설명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서 진행하겠다. 1부에서 아주 먼 태고의 옛날로 돌아갔다면 2부에서는 그 때로부터 빨리 감기를 눌러가며 인간에게 없었던 불평등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는 과정들을 논증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 또한 본문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미개인들은 어떠한 종류의 약이나 의사의 처방이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그 시절 약이 없었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에 앞서 그 시절엔 아무런 질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미개인들의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것은 단지 타고난 유약함과 필연적 노화뿐이었다. 이 두 가지 위협 앞에 모든 미개인은 평등했다. 범위를 넓혀 모든 동물이 평등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시절 병균의 감염, 골절 등등의 질병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개인이 얻은 모든 질병은 자연에서 얻을 것으로 치료 또한 자연에서 할 수가 있었다. 나무에 걸려 다리가 부러진 미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상상할 수 없었던 병원이나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그의 다리를 부러뜨린 자연 속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자연은 그를 치료해주었다. 이것이 자연이 미개인을 비롯한 모든 동물에게 평등하게 건네 준 운명적 건강이다. 인간의 질병의 역사는 자연이 준 운명적 건강을 저버리는 순간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문명의 시작과 맞닿아았다. 이에 대해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과연 사냥꾼이 사냥을 할 때 허약한 동물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루소는 문명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대부분의 질병의 원천은 문명에 있다고 본다. 자연의 운명을 거스른 질병은 자연에서 치료할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문명이 점점 발전하며 수많은 의술들을 개발하고 있지만 인간은 언제나 문명이 제공할 수 있는 치료법보다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의 원인이다. 결국 인간은 미개인 시절 누리고 있던 자연이 준 운명적 건강을 내던지며 끔찍하고 불행한 질병의 악순환에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운명적 건강 속 모두가 평등했던 인간은 문명이란 바이러스 속에 내던져지며 극도의 불평등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연민을 느끼는 자.루소는 인간의 정념에 대해 언급한다. 정념과 이성은 거미줄 같이 엉켜있는 것이며 이성이 없으면 정념 또한 없다. 이는 자연 상태의 미개인과 문명인 모두에게 해언급한 ‘악덕을 몰랐기에 악덕을 행할 수 없었다’ 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루소는 문명사회에서 해악은 인간들의 정념으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인간들의 정념이 격해질수록 늘어나는 해악들을 막기 위해 문명인들은 법률을 제정해갔다. 허나 점점 더 격해져가는 인간들의 정념과 사회의 무질서 속에서 루소는 의문을 제기한다. ‘법률이 무질서를 억제하는 것일지라도 여기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법률이 그것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해악을 막아주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즉, 법률 제정을 통해 수많은 정념들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오히려 더욱 수많은 정념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미개인들이 지키고 있었던 정념의 평정은 곧 사회의 시작, 법률의 통제의 시작으로 인해 깨져버렸고 인간의 정념은 억제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는 끔찍한 불행의 톱니바퀴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미개인들의 삶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잔잔한 바다였지만 문명의 시작으로 선과 악이 소용돌이치는 폭풍 속으로 변해버렸고 난잡한 혼란 속 인간들을 그들 사이에 선이 많은지 악이 많은지. 또 그들의 선은 그들이 가진 악이 가진 해로움보다 더 유익한 것인지, 그들이 선은 악을 상쇄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언어가 없는 자.사람들에게 동물과 인간의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을 고르라면 단연 언어를 고를 것이다. 이는 미개인과 문명인의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 될 수 있다. 루소 또한 이 차이, 언어에 주목했다. 루소는 언어의 탄생은 곧 사회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보았다. 모든 발명은 필요로써 시작된다. 하지만 루소는 자연 속 미개인에게 언어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미개인에게 언어라는 의사소통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루소의 가설 속 미개인들은 지극히 고독하고 개인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혼자 사냥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낮잠을 자고 혼자 거처를 이동했다. 종의 번식을 위한 행위는 다만 간헐적이고 우연적으로 만나는 미개인간의 유는 모든 미개인들에게 공통되었으며 루소는 이를 절대적인 평등한 삶으로 보았다. 1부에서 보이는 루소의 미개인들의 삶에 대한 강한 애정은 2부에서 문명인에 대한 강한 회의감으로 표출된다.루소는 평화롭던 미개인들의 삶에서 문명이라는 불행의 씨앗이 탄생한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평화롭던 시대, 한 미개인이 들판에 나무막대를 꽂은 채 말한다. ‘이제부터 이 땅은 내 땅이다.’ 이른바, 자신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개인들 사이에 소유의 개념이 생긴 것이다. 루소는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문명을 맞이한 미개인들은 급속히 자연과 멀어진다. 온갖 법률이 생기고 사회 제도가 구성된다. 루소는 이것이 꼭 인간의 불평등의 발전 양상과 맞닿아있다고 한다. 불평등의 극화, 더 이상 불평등할 수 없는 상황 속 문명인들은 새로운 평등을 맞이한다. 기존에 자연의 미개인들이 누렸던 평등과는 다른 다분히 인위적인 평등이다. 루소는 이것이 곧 불평등한 사회의 마지막 종점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떻게 미개인들에게 ‘소유’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것일까. 또한 이 소유의 개념은 어떻게 확산되었으며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또 이렇게 변화된 삶 속 어떤 것이 미개인을 탈피한 문명인들에게 불평등을 가져다주었을까. 이를 단계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소유의 시작루소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들판에 막대기를 꽂은 미개인에게 ‘왜 그 땅이 당신의 땅이요. 자연은 우리의 모두의 것입니다.’ 라고 반문한 미개인이 있었다면 인류는 이처럼 불행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루소의 말대로 한 미개인이 들판에 막대기를 꽃을 의지를 품은 시점, 이미 인류는 평화롭던 미개의 삶에서 꾀 멀어져있었다. 소유의 개념은 그 이전의 무수한 관념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최초의 인간이 가진 유일한 관심은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었다. 초기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에만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자연은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던 안정된 생활을 안겨주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미개인들에게 정착지가 생겼고 여가 시간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과거 사냥이나 채집 따위를 하지 않던 시간은 그저 떡갈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잘 뿐이었던 미개인들은 변화된 생활 방식 속 새로운 여가 활동들을 만들어 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해 그들은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냈고 또 그러면서 꾸준히 이웃 사람과 교류를 했다. 동족과의 교류를 통해 미개인들은 과거 마음속에 이리저리 뒤엉켜 형체와 색을 알아볼 수 없었던 복잡한 감정들을 점차 분류해나갔다. 사랑이 생겨나고 미움이 생겨났으며 슬픔을 느끼고 기쁨 또한 느꼈다. 이는 그들에게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대하는 감정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웃 인간들의 좋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가치로 발전했다. 인류의 정신문명의 강력한 토대가 되는 이 시점을 두고 루소는 격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루소는 아무것도 몰랐던 미개인들이 사랑을 아는 순간 질투가 생겨났고 좋은 것을 아는 순간 나쁜 것이 생겨났으며 기쁨을 아는 순간 슬픔이 생겨났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모든 변화는 인류의 정신적 진보가 아닌 자연의 삶과 동떨어진 채 안정된 삶만을 추구함에 따라 나약하고 유약해진 정신적 퇴보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가치를 알게 된 인간들은 그 가치에 따른 기준을 만들었다. 바로 도덕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곧 법의 초시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의 탄생의 씨앗이 발아된 순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도덕이 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큰 변화가 동반되었다. 그것은 바로 부의 탄생이었다.본디, 자연 속 모든 자연을 똑같이 공유한 채 살아오던 미개인들에게는 자신만의 소유가 없었기에 그들에게 ‘부’라는 개념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루소가 판단한 부의 시작은 농업의 발명이다. 오로지 자연의 산물을 얻어먹는 방식으로만 먹고 살던 인간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자연을 빌려 자연이 자연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모방하기 시작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