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동안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혼란스럽고 화려한 카니발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느낌이다. 희생 제의의 핏빛 축제를 뚫고 살아나온 느낌이기도 하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혼돈의 축제에 빠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는 콜럼비아 혹은 중남미의 역사가 그곳에 압축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세계, 혼돈으로 가득 찬 이곳의 현실이 백 년이란 역사 속에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를 창조했다가는 점차 혼란이 잦아들게 하면서 그리고 부엔디아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을 하나씩 세계 밖으로 사라지게 하면서 결국에는 그가 창조한 세계도 최초의 무(無)로 돌려버린다.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한 나의 기억도 얼마동안 지속되다가 바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신기루의 도시, 마콘도처럼 사라질 터이다. 그러면 또다시 이 책을 손에 들 게 될지도 모르겠다.너무나 복잡하면서도 결국에는 똑같은 세대의 반복인듯한 이 소설은 독자에게 이성은 살포시 주머니에 넣어두고 감성적으로 다가가길 속삭인다. 어차피 소설이 현실이 아닌 것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으니. 마콘도는 현실이되 현실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영혼이 분리되지 않은 원시의 세계이다. 인간의 육체적 결합이 자연스레 다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곳이며, 죽은 자의 목마름을 위해 산 자가 물을 준비해두는 곳이고, 부끄러움과 인간의 욕망을 모르는 미려한 처녀가 하늘로 승천하는 곳이며, 4년 11개월 2일 동안 비가 내리다 10년 동안 메마른 가뭄이 이어지는 곳이며, 부모의 죄로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기가 멜키아데스의 양피지가 예언한 대로 개미떼에 잡아먹히는 그런 곳이다.작가가 어쩌면 창조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불경스럽기까지 한 생각을 이 책을 덮으며 하게 된다. 무한한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고, 그것을 가능케 한 중남미의 역사와 문화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마콘도는 그 자체로 생성과 소멸이 가능한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 공간으로 느껴진다.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 이구아란은 근친 간 결혼을 하면 이구아나 도마뱀을 낳을 거라는 가족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만 그 저주가 실현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르술라는 동침을 거부한다.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푸르덴시오 아귈라가 부엔디아의 성적 무능을 조롱하고는 부엔디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집안 곳곳에 나타나고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었던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는 마을을 떠난다. 함께 가길 원하는 마을 사람들과 2년 동안을 떠돌다 끝없이 펼쳐지는 늪지대가 있는 곳에 마콘도라는 도시를 세운다. 이구나아 도마뱀도 돼지 꼬리가 달리지도 않은 아이들(호세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아마란타)이 태어나는 동안 단 하나의 무덤도 만들어지지 않은 마콘도에 언제부터인가 집시들이 찾아오면서부터 외부와의 접촉이 시작된다.뚱뚱한 텁석부리 집시 멜키아데스가 외부세계로부터 가져오는 온갖 물건들에 심취해서 실험실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부엔디아를 구해내지만 가족과의 대화마저 단절된 채 죽음에 이르고, 남편과 자식들 손자들 그리고 마콘도의 번영과 몰락을 지켜본 우르술라는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바구니만한 관에 담겨 땅에 묻히고, 아우렐리아노란 이름을 가진 자손들은 보다 내면적이고 통찰력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욕망을 고민하는 인물들로 세대에 거쳐 등장한다. 우르술라와 부엔디아의 딸인 아마란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남자에 대한 복수심과 그녀의 연적이자 자매인 레베카에 대한 복수심으로 평생을 혼자 살며 자신의 수의를 짓고 태어났던 몸 그대로 돌아가고, 레베카 또한 약혼자를 버리고 육체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오빠인 호세 아르카디오와 결혼해서 그가 죽은 이후에는 철저히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부엔디아 집안의 자손들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기질과 성향대로 살아간다. 삶을 살아간다기보다는 충동 혹은 욕망대로 움직인다고 보아야 할까? 인물들의 행동을 이성적 잣대로 판단해서는 도무지 이 소설을 읽어내기란 힘겹다.근친 간의 위험한 관계가 꼬리를 물 듯 반복되고 결국엔 비극을 맞이하는 결말. 그렇다면 과연 근친 간의 사랑은 죄악일까. 여태껏 제대로 고민해본 적 없는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근친 간의 사랑에 대한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은 수학의 등호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린 죄악이라고 여긴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바로 이성에서 온다고 믿는 관념은 동물 본연의 충동과 욕망을 가두고 잘못이라고 꾸짖는다. 이 꾸지람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 질서를 망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순종은 인간 역사에서 근친상관을 금기로 못 박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근친상간을 옳다고 보진 않는다. 사회화의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 가치관의 판단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돼지꼬리가 갖는 의미는 그 금기를 다시 한 번 되짚는 상징이 아닐까. 작가는 근친상간의 결과물인 돼지꼬리가 달린 태아가 개미에게 먹혀 죽는 설정을 통해 제 가치관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그렇다면 고독은 어떤가. 아우렐리아노가 매춘을 하는 소녀를 구해야겠다고 작심한 뒤 그를 쫓아가지만 놓치고 만다. 그러나 그 뒤에 레메디오스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어린 신부는 아이를 낳다 죽고 만다. 수십 년이 지나 레메디오스의 유품을 태우던 아우렐리아노는 그때 당시에도 고독했음을 깨닫는다. 원래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태어날 때도 혼자 왔다가 갈 때도 홀로 가는 어찌 보면 가엾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고독은 바람과 같아 혼자 있다고 찾아오지도, 둘이 있다고 안 오지도 않는다. 단지 가려지고 굴절될 뿐이다. 고독에 대한 무형의 가림막은 바로 사랑이다.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인생은 고독에 휩싸여 가치 없이 멸망할 뿐이다. 그럼 사랑의 기준과 척도는 또 어디 있는가. 사람마다 다르고 달라야 한다. 이것이 천편일률적이라면 인간은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똑같은 투쟁을 하는 정말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돌아가서 아우렐리아노는 레메디오스를 사랑했지만 왜 삶의 늘그막의 고독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대답했을까. 그 사랑이 거짓이이서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랑을 잃었던 시간이 고독하지 않았던 삶의 한 토막을 덮을 만큼 커다랗기에 그는 레미디오스와 함께 했던 그 순간마저도 고독으로 규정짓게 된 것이 아닐까. 애써 손 내밀고 떠밀고 잡고 가려고 하지 않는 한 세상은 사람을 외딴 섬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책은 완벽하게 솔직하다.
한국 현대사 우상(偶像) 비판목차서론본론이승만과 극우 반공주의박정희와 레드 콤플렉스결론참고문헌서론언젠가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규율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애써 용기를 내어 줄줄이 손을 든 학생들의 대답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 자유주의로 귀결했다. 교수는 틀린 답은 아니라고 학생들을 다독였다. 곧이어 운위한 정답 ‘반공주의’는 필연적으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소환했다. 누군가의 ‘국부' 이승만과 '구국의 영웅' 박정희를 말이다.한겨울 촛불의 바다는 이 땅에 청산(淸算)의 바람을 몰고 왔다. 적폐 청산을 염원하는 열망의 근저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전임 정권의 무능과 통치자의 헌정질서 유린에 대한 책임론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근본적으로 청산을 갈망하는 까닭은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집어삼킨 이래 단 한 번도 부패한 권력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는 동일한 뿌리의 집단이 때에 따라 변장을 하고 득의양양하는 모습을 묵과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건전한 민주사회로 진일보하기 위해 더 이상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왕의 목을 자르지 못한 민족이기에 썩은 권력의 심부를 향해 청산의 칼날을 휘두르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단, 그 심판의 첨예한 칼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전적으로 감시의 책무는 시민에게 있다. 재판장이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해 피고인의 죄를 추궁하듯 청산의 재판정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긴요하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팽배한 우상(偶像), 이승만과 박정희를 톺아본다.본론이승만과 극우 반공주의피식민의 끝은 분단이었다. 일제의 시퍼런 총칼에 맞서 한민족이 쟁취한 독립은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치러진 1948년 5.10선거 결과, 제헌국회는 당해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그 이후 벌어진 악행의 주모자로서 이승만의 행적은 아무리 공적을 치하한다손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만큼 극악무도했다.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따라가보면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려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의 양민이 무참히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일제가 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을 독려해 조선인을 살해했듯, 이승만은 강경일변도의 서북청년단을 격려함으로써 집단 학살을 조장했던 것이다.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은 오랫동안 금기시했던 4.3사건을 ‘순이 삼촌’라는 소설로 복원하였는데, 인용한 대목은 서북청년단 만행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 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에서 여러 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 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그 와중에 이승만 정권은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을 빌미로 치안보안법의 쌍생아와 다름 없는 국가보안법 제정을 관철시켰다. 극우세력이 반공국가를 구축하고 민주주의를 마음껏 잠식할 수 있도록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무기를 하사한 셈이었다. 실제로 국가보안법이 군부독재정권에서 민주투사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1950년 6월 25일 박명에 북한은 남침했다. 한반도 전역이 살육장으로 변모한 뒤에도 이승만의 집권욕은 사위어갈줄 몰랐으며, 민간인 학살은 경찰과 국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단 학살로 꼽히는 ‘보도연맹원 대학살’은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 이상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갔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보도연맹의 창설 목적은 사상범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호·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좌익에 잠깐이나마 물들었던, '잘못된 길'로 빠졌던 국민을 보도(保導), 즉 '보호하여 지도'해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꼭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만이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연맹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에게 '모집 할당량'이 떨어졌고, 실적주의까지 가세해 애꿎은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아무리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정부가 자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극우반공주의로 무장한 경찰과 헌병, 서북청년단 등은 임의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살해했다. 하지만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에도 국가수반인 이승만은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은 고사하고 사과도 일절 없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도모했던 이승만은 4.19혁명이 들불처럼 일자 끝내 자진 사임을 택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떠난 노령의 독재자, 그러니까 반공주의의 백부(伯父) 우남은 졸수(卒壽)까지 살다가 죽었다.박정희와 레드 콤플렉스청년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 믿었다.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길항 없이 한국 사회는 어떠한 변혁도 이루어내지 못하리라고 그들은 믿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급진적 통일운동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산산조각이 난다.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30대 남짓의 휘하 군인들과 함께 ‘반공을 국시로 삼고 형식에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천명했다. 반공주의가 죽지 않고 다시 창궐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제2의 학살을 벌였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수많은 피학살자유족회 관계자들을 검거하고 구속했던 것이다. 심지어 피학살자 합동묘지를 파헤치고 비석들을 땅속에 묻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최고권력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7월 3일 이미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데도 반공법을 공포하였다. 박정희는 반공주의를 종교처럼 숭앙함으로써 민중들의 레드콤플렉스를 팽창시켰다. ‘빨갱이’ 딱지만 붙이면 어느 누구든 제거할 수 있다는 압제적인 공포를 사회 전면에 주입해 손쉽게 민중을 단속하려 한 포석이었다. 기실 남로당 전력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에게서 빨갱이 꼬리표는 경험적으로 확인된 공포였다. 이런 면에서 군부가 다양한 목소리를 불문곡직 탄압한 결과,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만들어진 간첩’으로 둔갑하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무구한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들까지 예사로 얼버무려졌다. 예상대로 군부의 민정이양 약속은 허위였다. 독재자는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1979년 10월 26일 결국 박정희는 자신의 오른팔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그가 저지른 무자비한 국가폭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사후 ‘광복 후 대한민국을 빛낸 정치인’ ‘국정 수행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로 꼽힌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고도의 압축성장 덕분이다.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이승만을 향한 잣대보다 첨예하게 엇갈린다. 그러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방법은 그 명과 암을 명확하게 가리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은 산업화를 이뤄 누대에 걸친 가난을 벗었다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틀을 확립하고 주체적인 경제단위를 형성해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자리잡았다. 남북간 경쟁에서도 비교우위를 확실하게 선점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반면 부정적인 면도 결코 작지 않았다.4.19혁명으로 싹튼 민주주의는 19년간 얼어붙었다. 유례없는 인권·민권의 암흑기가 도래했다. 고귀한 인명이 숱하게 희생돼 아직도 사회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남북관계는 통일을 지향하기보다는 정권의 안보·강화 차원에서 악용됐다. 낙수 효과를 내건 특권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균형 발전의 원인이 됐다. 무엇보다 영웅주의에 매몰되어 산업화의 주역인 시민들의 공로가 과소평가되었다. 이와 별개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박정희가 총칼을 앞세워 민주정권을 찬탈한 쿠데타의 수괴라는 사실이다.결론‘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ege)’란 민간인 사상자를 에둘러 표현하는 미군의 군사용어다. 이 개념을 역사적으로 확장하면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저지른 부수적 피해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심하다. 독재자의 거대한 죄과(罪過)에 깔려 신음했던 필부들의 고통이 마치 지금 이 순간까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 아픔은 현재진행중이다.이승만 정부에서 자행되었던 '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올해 초 피해자 유족들이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지만 '손해배상 청구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1975년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유신독재를 비판했던 인사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대법원 판결 18시간만이다. 국내외 법조계는 이를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 '사법 살인'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피해자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도 국가정보원에 배상금 일부를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인혁당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통해 박정희 잔재 청산은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던 만큼, 단죄되지 않은 범죄가 더 큰 범죄를 불렀다는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적폐 청산의 사후 처리 과정을 역사에 똑똑히 남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말로 끝을 맺고 싶다.“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참고문헌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2005, 웅진지식하우스현기영, 순이 삼촌, 2013, 창비이용원, [서울광장] 박정희 콤플렉스 벗기, 2005, 서울신문
스피노자식 고찰(비참할 땐 스피노자)삶은 광막한 바다와 같다. 그 끝을 모른다. 철학은 줄곧 인류에게 빛이었다. 본성의 길을 밝혔다. 청맹과니에게 취광은 부질없으며 삶의 수면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빛줄기란 부질없다. 나는 여태 맹인이었고, 그런 내게 철학은 퇴조한 빛이었다. 보편적인 청춘은 숙명처럼 어둠의 바다를 건너 자아라는 부표에 가닿으려 시도한다. 나의 행로는 그곳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어디쯤에서 표류하고 있는가. 바야흐로 등대의 관대한 인도가 절실한 시점이다. 내가 최초로 교신한 등대는 지구멸망의 날에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이다.철학이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부터 시작하자. 나는 누구인가? 자신과 타인이 누군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라면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이를 것이다. 그는 이성과 더불어 정서를 인간본성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감정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돛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감정으로부터 연유한 행동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부정당해왔다. 오로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지혜롭고 바람직한 자세라고 강요받았다. 나 또한 그랬다. 수년간 짝사랑한 끝에 이성과 연애를 시작했고 꼭 그만큼의 기간을 교제한 뒤 헤어진 친구에게 진지한 말투로 충고했다. “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도무지 불가해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정서에 대한 지성적 이해를 통해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나아가 정서의 변형을 수행하고 경험할 수 있다. 이미 범한 오류를 바로잡고 나는 다시 친구에게 말할 것이다. “네가 얼마나 괴롭고 슬플지 짐작할 수 없어. 하지만 너는 스스로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지 알 수 있어. 생각해봐.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면 저절로 네 감정이 동요하고 변화할 거야. 그걸 받아들여.” 이전의 위로에 비해 공감은 늘었지만 친절하고 구체적인 위로라고 보기엔 태부족하다. 사랑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이제 너는 없고 나만 남아 견디는 욕된 날들가을은 해마다 찾아와 나를 후려치고 그럴 때면 첫눈이 오기 전에 죽고 싶었다“_도종환, 스물몇살의 겨울 中“사랑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하는 기쁨이다”_스피노자‘너’ ‘당신’ ‘그녀’ ‘그’ 등 여타 대명사를 떼어놓고 사랑을 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용한 시 구절에서 만일 ‘너’가 없다면 애꿎은 가을이 나를 후려치고 첫눈이 오기 전에 죽고 싶은 까닭 역시 불가해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의 전제조건은 어딘가에 있을 내님이 맞다. 그런데 기쁨은 내님이 아니라 바로 내 관념에서 잉태된다. 첫사랑의 대상과 재회할 때 그 추억은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다가온다. 불행히 내가 일생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기억은 무뎌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 추억을 반추하며 동반하는 기쁨 즉 생명력은 증대할 뿐 소멸하지 않는다. 누구나 열렬히 사랑했던 기억이 있을 테다. 그 모든 사랑의 기원을 천착한다면 그곳에는 필시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사랑은 신호탄 소리에 맞춰 발 빠르게 출발한다. 반대편에서 동일한 산물이 도출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물론 상호적 사랑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엄격한 칸트라면 정언명령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지 모른다. 스피노자의 시각에서 사랑은 선의지에서 비롯하기보단 칸트가 제어해야할 요인으로 꼽은 경향성에 부합하는 형태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데이트를 하고 SNS로 연락을 주고받음으로써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행위 그 자체로 선한 게 아니라 수단으로서만 선하다고 판단되면 이것은 명백히 가언적이다. 칸트의 말대로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정언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사랑에 임할 때 과연 사랑은 기쁨이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는 고백을 받고 대답을 미루다 3년을 고민한 끝에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사랑은 때가 있는 법이다. 즉각적으로 사랑할 때 기쁨은 간명해진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스피노자의 사랑론을 지지하는 까닭이다.‘사랑할 때 가장 나답다’는 말이 있다. 스피노자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이 곧 나답게 되는 길이다. 욕망은 마치 불경한 듯 보이지만 단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를 희구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한다. 다시 말해 욕망을 추동하는 돈, 권력, 명예 등은 결국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가장 고귀한 가치다. 따라서 사랑에 의해 추동되는 욕망은 자아실현을 위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친구에게 말할 것이다. “또다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어. 그런데 너는 누군가에게서 꼭 동일한 모습의 관념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꾀해야 해.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최고의 삶은 아무에게나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선의 삶은 누구에게나 현시적으로 부과된다. 스피노자식 결정론적 필연성에 따르면 개별적인 인간은 자신의 현재 모습과는 절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 타인의 모욕과 비방도 연쇄적인 원인의 결과라고 여길 때,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 원인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를 더욱 너그럽게 이해하는 방식을 체득한다. 칸트가 제2의 정언명령에서 인간을 항시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설파했듯, 스피노자는 독자적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위해 관용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실제적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2016년 5월 강남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애초부터 여성을 살해할 계획이었다. 살해 동기는 과거 여성에게 당한 무시와 모욕이었다고 진술했다. 조현증 병력도 있었다. 스피노자의 논리대로라면, 서늘한 칼날에 억울하게 희생된 한 청춘은 가해자의 정서적 오해가 하필이면 극한으로 발현된 대상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행위공리주의는 유사한 지점에서 윤리적인 결함을 드러낸다. 행위공리주의 시각에서 만일 가해자가 완전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지 않았다면 쾌락이 증진되므로 이는 윤리적으로 더 나은 것으로 판단된다. 공리주의자는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유용성을 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그저 불행한 만남으로 인해 악이 발생했다고 보기엔 악의가 가히 압도적이지 않은가? 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스피노자의 필연성과 행위공리주의는 윤리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수동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능동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여기서 나는 규칙공리주의를 채택한다. 규칙공리주의자라면 타당한 규칙에 따라 해당 행위가 상식적으로 옳고 그른지 가려낼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의 원리’도 해법이 될 수 있다. 소극적 자유에는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서 찬연한 인간의 존엄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사상의 문제점을 얄팍한 식견으로 비판했으나 그가 주장한 필연성의 원리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개개의 사물은 이미 그 자체로 실재하는 그런 방식 안에서 그 자체로 적합하게 완전하다.” 곧 실재성은 완전성과 동일하다. 이 시각은 나와 다른 양태의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경원시하고 동정하는 유약한 존재도 나름대로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어느 것도 무시할 자격이 없다. 수세기 전 그가 던진 화두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도 여전히 유효하다.신은 모든 것에 내재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 본성과 마찬가지로 신의 움직임도 절대적으로 무한한 필연성에 따른 것일 뿐, 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보답하지 않는다. 고로 신에게 자식의 대학 합격과 부모의 건강을 간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초월성에 대한 부정이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근거가 되기 위해선 스피노자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개개의 인간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은 서로 유익하다.” 그의 주장은 공리주의의 근저와 맞닿아 있다. 초월적인 권력을 부정하고 개별적인 인간의 능동적인 욕망을 긍정한다면 이는 곧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자신만을 보존하려는 개개인의 욕망은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고 종국엔 슬픔으로 비화할 위험이 크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와 국가는 바로 이 슬픔을 회피하고 기쁨을 배양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속한다. 그러나 탄핵정국을 통과하며 시민들이 공감한 한마디는 “이게 나라냐”였다. 대중은 양도된 정치공간에서 시민들의 기쁨을 보호하지 못하고 슬픔을 양산한 구체제의 적폐를 능동적인 힘으로 혁파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비참해서는 안 된다. 어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야한다. 이것이야말로 에티카가 보증하는 최상의 가치다.
서평“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을 염원하는 가사를 담은 민족적 애창곡, ’우리의 소원’ 속 한 구절이다. 내년이면 한반도가 남북으로 두 동강난 지 70년이 된다. 분단 당시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다. 게다가 ‘김씨 왕조국가’ 북한은 자유억압, 인권유린, 식량부족 등 구시대적 폐단이 자행되는 명백한 후진국이다. 이에 따라 통일이 되면 국민 개개인이 안을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혼란은 가중될 공산이 크다. 분단 유지론이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하는 걸까. ‘민족’에 주목해보자.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의 개념을 ‘상상의 공동체’라 일컫는다.필자는 여태까지 ‘민족’의 존재와 실체를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다. 잔인한 4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눈물을 훔친 까닭은,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과 민족 구성원간의 친교(communion)가 동시에 발현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는 게 민족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가 든다. 과연 우리의 민족의식은 유구한 반만 년 역사와 시초부터 함께한 것일까.근대화 이전의 사람들은 종교공동체와 언어공동체로 양분할 수 있었다. 허나 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근대적 국가의 성립은 그들을 민족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민족은 근대적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지표였으며 통치수단의 하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대한민국도 그렇다. 왕조시대, 사람들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주로 종족에 기반한 언어공동체로 묶여 있었다. 북쪽엔 중국어를 쓰는 한족(漢族)이, 남쪽엔 일본어를 쓰는 왜족(倭族)이 있었으므로, 그 경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도래 및 팽창에 따라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됐다. 사람들은 그 특수한 상황 속에서 우리만의 공동체적 의식을 길렀다. 여기엔 인쇄자본주의의 발달로 신문과 소설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사람들에게 ‘같은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한 게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이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을 공유함에 따라 비로소 상상 속 정치 공동체, 즉 민족으로 묶이게 됐다.통일은 한민족(韓民族)의 숙명적인 과업이다. 달리 생각하면 아니라 말할 수 있다. 분단사 70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문화 그리고 언어적 공통성이 종전보다 흐려진 게 사실이고 이에 따라 민족의식도 약화됐기 때문이다. 민족재결합을 바라는 국민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도 이를 방증한다. 물론 통일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권리는 민족 구성원에게 있다. 그래도 조국 통일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뿐이다.독일 정부가 통일은 안 온다고 말한 뒤 하루가 지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하루아침에 눈사태처럼 남북통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이다. 따라서 통일을 준비하는 한민족 구성원이라면 민족에 대한 의식의 정립이 더욱 필요하다. 그래야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상의 공동체’이든 ‘역사적 실체’이든 상관없이 편견과 왜곡된 의식에 동요하지 않을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몫이다.
Q1. 국제냉전질서의 성립·전개과정과 한국정치미국과 소련에 의한 냉전질서의 시발점은 유럽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심 격전지였던 유럽은 영국만을 제외한 채 나치 독일에 의해 짓밟혔다. 당시 소련은 1939년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에는 직접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도 영국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고립주의적인 국내 여론에 부딪쳐 참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소련과 미국은 영국과 함께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는 전시대동맹을 형성했다. 물론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결합은 지극히 계산적인 필요에 의해 이뤄졌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승기를 잡고, 결국 이듬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승전의 주요 당사자였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종전과 더불어 적대적 관계로 급속히 전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려 270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던 소련은 자신의 희생에 걸맞은 보상을 원했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한 소련의 팽창은 동유럽에 그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미국은 외교·군사적으로 강경 대응했고,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은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발표했다. 마셜플랜은 서유럽 경제재건을 목적으로 했지만, 이와 함께 서유럽이 공산주의에 대해 내성을 기르도록 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소련도 몇 달 뒤 코민포름을 결성하며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소련의 통제와 주도권을 강화했다. 이렇게 마셜플랜은 유럽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8년 6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실행된 소련의 베를린봉쇄와 이에 대응한 미국의 대규모 베를린 공수는 유럽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냉전의 첫 위기였다.미·소 냉전은 유럽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치러졌던 아시아, 결국 전 세계적으로 확대됐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이라는 전략적 거점의 완충지대로 여겼고, 마찬가지로 소련은 한반도가 소련 공격을 위한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영국·소련·중국에 의한 신탁통치 방안을 마련하는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설립됐다. 하지만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좌파는 찬탁, 우파는 반탁 입장을 내세웠고, 국내갈등은 첨예화됐다.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국제연합은 신탁통치안을 파기했다.신탁통치파기로 인해 1948년 남북한에는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됐다. 하지만 미·소가 군사충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없었음에도 이승만, 김일성 남북 지도자들은 모두 분단의 장기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북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서 남침을 허락받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공산주의 세력의 세계적 팽창의 일환으로 여기며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이 서로 통일을 위해 무력행사도 불사하려 했다는 점에서 내전의 요인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소련, 중국, 북한의 남침 공모,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국과 국제연합의 대응과 관련해 한반도 외부요인이 대단히 강력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이러한 국제전적 성격은 냉전이 초기의 정치적, 경제적 경쟁과 대립에서 군사적 대결로 격화됐음을 나타낸다.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 및 군사적 차원의 세계적 대립구도는 더욱 선명해졌다. 냉전질서 작동의 본격화를 알리는 가장 특징적 현상은 미소간의 군비경쟁이었다. 양국은 핵무기 개발 경쟁에 돌입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상호확증파괴 수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한 공포의 균형은 미소간의 대립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냉전 체제하에 위험요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지속된 쿠바미사일 위기는 미소간의 갈등을 고조시켰고 극도로 위험한 긴장을 초래했다. 결국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미국에 조건을 내걸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했지만 핵전쟁의 위험은 양국을 긴장케 했다. 이로써 미·소는 양국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핵실험부분금지조약을 맺는 등의 안정을 꾀했다.1963년 이후 미소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제3세계에서의 냉전은 오히려 열기를 더해갔다.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자신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고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치러진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직접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도 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제3세계 대리전쟁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줬다. 즉, 냉전은 미소간의 직접적 충돌이 아닌 주변부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 또는 동아시아 지역의 지도적 공산국가인 중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간의 열전을 수반했던 것이다.냉전체제를 본격화시킨 열전을 치른 한국은 통일이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북진통일을 계속해 주장했고, 국내 정서는 반공질서로 휩싸였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헌법 개정을 단행하고,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사형에 처하게 하는 등의 반민주주의적 처사는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잃도록 만들었다.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저지름으로써 국민 불만은 폭발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수립된 장면 내각은 민주주의 회복과 경제발전을 국정목표로 삼아 추진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사 쿠테타로 장면 내각의 민주주의 실험은 불과 9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