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문1. 지역의 개요위치 및 면적 - 홋카이도에 속하며, 소라치(空知) 지방 동남부의 산중에 위치. 면적은 763.20 km²(부산시 765.64km²)기온 - 연평균기온은 , 최고 기온29.9도, 최저 기온-16.9도로 기온차가 큼.인구 - 10,738명 (2011년 6월 30일 기준)역사 - (발전기)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탄광 도시로 발전하여, 소라치 지방 가운데에서도 특히 많은 석탄을 산출하였다. 1960년에는 홋카이도 단코키센(北海道炭?汽船)의 유바리 광업소와 헤이와 광업소, 미쓰비시 광업(三菱?業)의 오유바리 광업소의 3대 광업소를 중심으로 광산 및 산업기계를 제조하는 홋탄 기계공업(北炭機械工業), 코크스나 화학제품을 제조하는 홋탄 화성 공업소(北炭化成工業所) 등의 사업체가 설립되는 등 관련 산업도 발달하여 도시의 인구는 116,908명에 달하였다. 한때 이시카리 탄전의 중심도시로 번영했었다. (쇠퇴기)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 일본의 에너지 공급구조에 변화가 진행되어 석탄사업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점차 없어지다가 1990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미쓰비시 광업의 미나미 오유바리 탄광(南大夕張炭?)이 폐쇄되면서 도시에서 광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탄광사업이 끝난 후 유바리시는 관광산업에 눈을 돌려 스키장, 온천, 테마파크 등 관광 인프라들을 무작위로 지었지만 이것이 모두 실패했다. 그리하여 2006년의 심각한 재정난 여파로 2007년 3월 6일, 재정 재건 단체로 지정되어 사실상 파산했다.2. 문제점유바리 시의 가장 큰 문제점 - 수요 예측 실패, 과다 투자, 노령화, 과한 부채(총 부채 약 353억엔), 방만한 운영, 복지시설 부족, 높은 세금* 현재에는 석탄사업이 망하고 나서 일교차가 큰 기후를 이용한 메론의 재배, 꽃의 재배,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의 관광산업 중심의 도시로서 재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수요 예측 실패와 과다 투자, 방만한 운영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유바리는 본래 탄광에 의해 개척되었던 도시로, 대규모의 농업을 육성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던 탓에 석탄산업 이외의 산업기반이 전무하였던 이유로 고용기반이 사라진 노동력과 청년층이 도시로 유출되면서 인구가 급감하였다. 결국 도시에는 노인들만이 남으면서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었다. 현재는 일본에서 3번째로 인구가 적은 도시가 되었으며, 인구밀도는 일본의 시(市) 중에서 가장 낮다.* 고령화는 2008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비율은 일본 내 최고인 43%* 학교가 고등학교 1개, 중학교 1개, 초등학교 1개, 유치원 1개, 보육원 4개밖에 되지 않고 의료기관은 진료소 5개, 치과 진료소 5개가 전부이다. 부산광역시 전체의 면적이 765.94㎢로 유바리시와 비슷한데, 부산광역시 전체에 고등학교와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이 하나, 병원과 치과가 5개 있는 거라 볼 수 있다.* 과한 부채 때문에 세금도 엄청나게 높고, 또한 시의원들도 대폭 줄였으며, 시의원들의 연봉도 대폭 줄여서 지금 일본 내에서 가장 연봉이 작다.3. 선정이유지금까지 본 것처럼 유바리 시는 파산까지 한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망한 도시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유바리 시는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다 죽은 것 같고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희망이 들끓고 있는 도시이다. 유바리 시의 많은 사람들은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유바리는 자연적, 문화적 가치도 많지만 그와 더불어 스토리가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지금 유바리가 안고있는 문제들, 노령화나 복지시설부족, 정부주도의 산업 인프라 건설 등을 안고있는 지역들이 많다. 그래서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안고있는 유바리를 통해 일본의 다른지역과 우리나라에서 가지고있는 비슷한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선택했다. 한마디로 유바리시가 희망의 표본이 되게 만들기 위해 선정했다.4. 프로젝트의 개요 “희망도시”keyword : 관광 산업 포용 사랑5. 프로젝트 추진 전략지역주민들의 참여, 활용도 - 일본인들은 원래 마을, 공동체 일에 참여도가 높다. 특히 유바리 시의 주민들은 간절함까지 있어서 더하다. 유바리 시 주민들이 관광객들이 돌아갈 때 손수건을 직접 선물한다. 이 정도로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 간절함이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주민참여형이 아니라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부어서 추진한 정부주도형 사업에 실패한 아픔과,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돈을 안 쓰는 쪽으로 프로젝트를 계획해서 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겠다. 그리고 유바리는 재정악화 때문에 2006년부터 시의회 의원은 18명에서 9명으로 줄이고, 의원 보수도 311,000엔에서 180,000엔으로 삭감하였다. 그래서 시위원이 되어 일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 유바리 시는 30살 최연소 시장이 전국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열심히 유바리 시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5-1. 구체적 사업 실천 계획5-1-1. 관광*희망벽화 : 마을 입구에 큰 돌을 세워 그 돌에 여태까지 겪었던 어려움, 마을의 역사와 함께, 현재 다시 일어서고 있는 유바리를 적어서 그 메시지가 희망이 되게 언제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희망이라는 것을 적는다. “희망도시 유바리”라는 글귀와 함께.ex) 태백 상장동탄광 벽화 마을은 현재 유바리와같이 탄광도시에 모습은 사라지고없어졌지만 그들이 살았던 모습과 환경을 마을 벽화에 담아 이것을 간직하고 있다. 이 모습이 과거 유바리시와 매우 비슷하다고 본다.탄광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바리시 또한 이런 주민스스로 만든 이런 벽화마을 을 가지고 지역을 재창조할수 있을거같다*에너지 박물관유바리가 의욕적으로 관광인프라를 구축하던 시절, 유바리의 정체성 구축을 위해 만든 것이 탄광박물관이었다. 이를 만든 의도는 유바리의 역사를 알리고 마을의 정체성을 확고히하여 관광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일본에는 탄광도, 폐광도 많다. 탄광박물관의 이미지도 천편일률적이다. 광부들의 모습과 당시 시대상, 탄광관련자료, 석탄은 어떻게 생겼는가를 설명하며 지역 내 고대생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차별화된 컨텐츠가 없는 이상, 관광객들이 수학여행때 이미 가본 탄광박물관을 홋카이도, 그것도 유바리까지 와서까지 볼 이유는 없다.그래서 기존의 해묵은 탄광박물관을 신재생에너지인 지열발전과 연계하여 유바리만의 컨텐츠를 찾는다. 유바리는 화석연료인 석탄채굴로 시작한 탄광도시이다. 이후 지속가능한 개발과는 거리가 먼 발전을 하였고 현재는 빚과 환경오염만 떠안고 있다. 여기에 해결책으로 기존의 탄광을 이용한 지열발전, 바이오산업에 스토리텔링을 더하여 유바리 에너지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여 개장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염도시에서 미래의 녹색 환경도시로의 도약만큼 드라마틱한 컨텐츠가 있을까?5-1-2. 산업유바리시는 석탄산업이 망하고 난 후 관광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부채만 남긴 채 더 큰 실패로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유바리시는 관광산업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관광만으로는 안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강원도의 ‘알펜시아’와 같은 일이 이미 유바리에서 벌어졌었다. 그래서 산업부분으로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농업-메론,일교차가 큰 기후를 이용한 메론의 재배. 일본 최고의 메론. 주황색 메론. 메론은 이미 인정받고 있고, 특산화 되어있다. 메론라면 유바링(도넛) 메론소프트아스크림 메론빵 메론염색약 유바리 석탄슈크림 등의 상품이 개발되어 팔리고 있는 상황.신에너지-바이오신 에너지- 지열발전폐광의 재활용으로 지열발전이 있다. 스페인 오비에도 대학에서 근무하는 2명의 엔지니어가 발표한 것으로 전 지구적으로 지표와 지하 500미터 이하의 온도차가 30도까지 상승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장점으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키고 기후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대규모 개발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지열 에너지는 직접적으로 가정, 건축물 개발, 수영장, 수조, 산업 및 상업 시설들에 이용될 수 있다.바이오 에너지다음으로는 폐광에서 발생하는 침충수를 이용한 것이다. 강릉시 영동탄광에서 최재영 카이스트 천연물소재센터 연구원 팀이 7~8월께 폐광에서 채집한 미세조류를 대량 생산할 계획이다. 방치됐던 폐광을 정화하는 한편 자원보고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그린 프로젝트’다. 2007년부터 임광탄광에서 정화기술을 개발해온 연구팀은 산성수인 광산 침출수에서만 서식하는 신균주 15종을 발견했다. 이들은 폐수의 이산화탄소를 정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바이오 디젤을 뽑아낼 수 있다. 미세조류를 이용해 광산 폐수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고 동시에 여기서 자란 조류로 바이오 디젤을 생산하는 프로젝트다.
바다가 바꿨다-주경철 교수의 ‘대항해 시대’로 본 바다에 대한 인식이 바꾼 근대 동아시아의 모습-금년 새 정부의 시작과 동시에 초미의 관심으로 떠오른 것은 인사였다. 특히 논란의 정점은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였던 윤진숙 내정인 이었는데 천진무구해 보일정도로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그의 태도에 새 정부에 비교적 호의적인 보수언론들도 기함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몇 년 만에 부활하는 해수부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대를 참혹히 밟아버리는 인사였다. 논란에 휩싸이면서까지 왜 사라진 해수부를 부활시켰을까? 복원하지 말든가 아니면 과거처럼 해무청으로 격하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수부 복원은 근대의 바다에서 우리가 겪은 교훈 때문에 바다에 대한 인식이 각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읽은 책이 ‘대항해 시대’이다. 이 책이 전 지구를 주제로 하기에 본인은 동아시아학과생의 눈으로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중세까지 전 세계 각 지역들은 스스로의 중세를 만들었다. 교역은 근접지역간으로 제한되었고 그나마 원거리 교역은 배턴 터치처럼 상품이 여러 국가들의 상인들을 거쳐야 했다. 그나마 몽골제국이 초원길을 개척하였지만 이는 얼마가지 않아 무너져서 결국 대륙 간 교역수단은 바다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교역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에서 농업 생산력이 오늘날의 GDP와 같은 개념이었다. 그런고로 동아시아 지역, 특히 지대박물한 중국은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패권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 해상에 대한 제해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명대의 영락제시절에 절정을 맞아 세계적 규모의 해상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중국의 바다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보여준다.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은 중세까지의 국력 척도인 농업생산량에서 동아시아보다 뒤쳐졌다. 벼농사의 절륜한 생산량과 발달한 수리시설, 구휼체제 등 선진적 농업 인프라가 구축된 동아시아지역의 평민들이 어지간하면 농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에 비해 유럽의 평민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선원이나 심지어 해적이 된 것을 고려한다면 중세 유럽의 식량부족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이어진 경향으로 이산을 뜻하는 ‘디아스포라’가 고대 그리스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이런 연유로 무역에 뛰어든 중세 유럽은 시대적 한계-조선술, 항해술의 미비-로 육로 교역 혹은 해상과 육로가 혼합된 교역을 하였는데 주로 중동의 제국들에게 수출입을 하는 방식이었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오스만 튀르크의 대두로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의 교역은 서양이 중동을 사이에 두고 동양의 교역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동양물품을 들여올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해진다면 경쟁논리에 의해 순탄한 교역이 가능하지만 오스만 튀르크가 중동을 제패하고 독점무역을 시행하자 무역시장의 혼란이 시작된다. 독점체제로 동양의 물산에 대한 과다한 가격이 책정되면서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이로서 등장한 것이 신항로의 개척이다. 당시 유럽의 덜 발달한 세계관에 의하면 서쪽으로 가면 동양이 나올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문제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기존의 교역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북유럽은 대 동양무역에 있어 애송이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지리적으로 중동을 통한 무역에서 소외되었지만 북유럽처럼 지역 간의 무역에 머물러있지 않았으며 대서양에 가까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군주의 야심찬 계획으로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발견’한 땅은 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 결국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였다.그러나 소 뒷걸음질에 잡은 쥐와 같은 아메리카 대륙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효자노릇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별 가치 없는 땅으로 판단되었지만 플랜테이션 농업에 기반을 둔 노예농업-아프리카 노예를 바탕으로-과 뒤늦게 발견된 금은 광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결국 두 나라는 스페인으로 통합되지만-을 식민제국으로 옹립하는 일등공신이 된다. 특히 남아메리카의 포토시은광은 당대 최대의 은광으로 전 유럽에 가격혁명이란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풍부한 채굴량을 자랑한다. 당시의 기축통화였던 은이 대량생산되자 이는 동양물산의 수입을 통해 명 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이는 명 제국의 국력 신장에 도움이 되었지만 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로 이어지는 암군의 시대를 거치며 황제의 사치와 이민족 방어를 위한 전쟁으로 소진되었다. 결국 명제국은 제국의 안정성을 위해 북쪽의 이민족을 방비하는 것에 집중하고자 해금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일본과 조선도 마찬가지로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바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였고 일본의 신 정권인 에도막부도 체제 안정성을 이유로 뒤따라 해금정책을 세운다.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유럽의 제국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해양 정책을 펼치게 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농업과 공업에서 자력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며 무역에 매달리는 기형적인 경제구조와 국민들의 사치-소비하는 물품은 전부 수입, 축제기간이 100여일이 넘었다.-로 성장 동력을 상실하자 이를 틈타 영국과 네덜란드가 각각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남아시아 진출부터 꾀하였다. 물론 동아시아의 상인들이 해금이라고 마냥 팔짱끼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구축된 지역적 이해와 네트워크 구축으로 화상(華商)들에게 동남아시아의 바다는 여전히 ‘우리의 바다’였고 동남아 곳곳에 일본인 마을이 생길 정도로 일본상인들도 동남아시아 진출도 활발하였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은 서양 상인들에게 차츰 밀리게 된다. 초기 서양 상인들의 상행위는 동아시아의 경제 규칙인 공존으로 시작하였으나 백인 라자-힌디어로 왕-라 불린 싱가포르의 아버지 제임스 브룩처럼 지역 통치자의 호감을 얻어 야금야금 통치지역을 확보하고 결국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침략야욕은 한중일에게도 훗날 아편전쟁이라는 일대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된다.
후기왜구들의 나날사료들왜구의 침공규모조선왕조실록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4월 20일(갑오) 1번째기사왜선 30여 척이 연해 지방을 침입하려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다 양광도 안렴사 조박(趙璞)이 보고하였다. “왜구(倭寇) 30여 척의 배가 연해(沿海)의 지면(地面)에 이르고 있습니다.”조선왕조실록 태조 11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4월 1일(계미) 2번째기사왜구 괴수 나가온이 병선 24척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다왜구(倭寇)의 괴수 나가온(羅可溫)이 병선 24척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3월 23일(임술) 1번째기사왜선 1척을 섬멸한 전라도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전라도 수군 첨절제사가 김빈길(金贇吉)이 왜적의 배 1척을 잡아 병기(兵器)를 거두어 바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궁온(宮?)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내려 주었다.왜구들의 기술태종 5권,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6월 11일(정사) 4번째기사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왜구를 잡기 위한 작은 배를 추가로 만들다비로소 작은 소선(小船)을 만들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왜구(倭寇)가 가끔 와서 여러 섬 가운데에 숨었다가, 우리의 불비(不備)한 틈을 타서 노략질하여 가는데, 우리 나라의 전함(戰艦)이 무겁고 커서 쫓아갈 수 없으니, 금후로는 큰 배[大艦]는 요해처(要害處)에 두고, 각도(各道)로 하여금 가볍고 작은 배 10척을 만들어서 쫓아가 잡게 하소서.”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4월 14일(계미) 5번째기사박안신이 왜구를 막을 병선을 제조할 것을 상소하다왜적의 배는 너무 빨라서 돌리고 가기를 나는 듯이 하여, 동쪽을 지향하는 듯하다가 어느 사이에 돌리어서 서쪽을 침범하니, 우리 군사가 달려 쫓아가도 적을 만나는 일이 대개 적고, 비록 혹 같이 싸워도 이기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이에로세 / 腐儒衰病獨含情산천의 형세는 금성 탕지처럼 견고하고 / 山川形勢金湯固종사의 신령 위광은 일월처럼 밝거니와 / 宗社威靈日月明사람 계책도 꼭 다 오국만 하진 않으련만 / 未必人謀皆誤國진작 용병술 안 배운 게 가련할 뿐이로다 / 自憐曾不學談兵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지리산(智異山)지리산은 운봉(雲峯)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그 서북쪽에 있는 산을 정산(鼎山)이라고 한다. 고려 말엽에 왜구들이 함양(咸陽)을 노략질하고 팔량령(八良嶺)을 넘어서 남원산성(南原山城)을 침공하여 왔다. 이때 우리 태조(太祖)가 운봉을 넘어가서 이들을 막게 되었는데 황산(荒山)에 이르러 험한 지름길을 발견하고는 왜구들을 이리로 유인해서 세 차례에 걸쳐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적장(賊將) 중에 나이가 겨우 십오륙 세가량 된 어린 자가 있었는데 무술과 용맹이 대단해서 창을 마구 휘두르면서 날뛰었다. 그는 이름을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하였는데 몸에 견고한 갑옷을 입고 또 얼굴에는 동면구(銅面具)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 맞힐 틈이 없었다. 그래서 태조가 이두란(李豆蘭)에게 그의 투구의 끈을 맞히라고 하고는 투구가 떨어지자 곧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남원(南原), 구례(求禮), 진주(晉州), 함양(咸陽), 산청(山淸), 단성(丹城), 하동(河東) 등의 고을이 모두 이 산 밑에 있다.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11월 9일(계해) 2번째기사곽충보와 이천우를 강릉도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케 하다상의중추(商議中樞) 곽충보(郭忠輔)와 전 상의중추 이천우(李天祐)를 강릉도(江陵道)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하게 하였다.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11월 23일(정축) 1번째기사삼사 우복야 권화 등을 강원도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케 하다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권화(權和)와 상의중추원부사(商議中樞院副使) 장사정(張思靖)과 한성 윤(漢城尹) 조익수(曺益修)를 강원도로 보내어 왜구를 방비하게 하였다.세종 4께서 국정에 참모(參謀)하여 비로소 병선을 설치하고 적을 제어하는 준비를 하셨더니, 경신년에 적선(賊船) 1백 척이 진포(鎭浦)에 와서 침략하므로, 병선이 포위 공격하여 모조리 불질러 없애니, 적의 형세가 곤궁하여 두 도(道)로 두루 돌아다니므로, 태조 대왕께서 군사를 떨쳐 추격하여 운봉(雲峯)에서 크게 이기시니, 남은 도적들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숨었다가 떼[?]를 묶어서 타고 살아 돌아간 자가 1백 한두 명이었습니다.효종 즉위년 국역비변사등록 左議政을 引見하여 倭의 정세를 대비해 下三道의 방비를 엄중히 신칙하는 일에 대해 논의함인견할 때에 좌의정이 아뢰기를 "지난 번 호남의 해일(海溢)에 관한 장계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근일 왜국의 정세가 염려스러운데 비상한 변이 호남에 많이 발생합니다. 대체로 왜구가 나오는 길은 전라남도 순천(順天)이 가장 편하다고 들었는데, 재변이 이와 같으니 매우 걱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로(水路)가 순탄한가?" 하니, 답하기를 "그러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편안해도 위험을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삼도(下三道)의 방비를 각별하게 엄중히 신칙하라고 감사·병사·수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왜구의 활동시기광해군 10년 국역비변사등록 下三道의 監司·全羅左右水使·東萊府使·會寧府使를 서둘러 제수하기를 청하는 備邊司의 啓아뢰기를, "남방(南方)의 신방(?防)은 곧 오늘의 급한 일인데 군정을 소집하라는 명령이 또 제도(諸道)에 내렸습니다.동사강목 제16상을묘 고려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부터, 무진 14년 6월까지 14년간을묘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8, 1375) 추7월○ 항복한 왜(倭)를 꾀어 죽이려다 성사(成事)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 처에 나누어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라도 원수(全羅道元帥) 김선치(金先致)에게 일러 그들을 꾀어 죽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3월 16일(기미) 3번째기사상선이라고 주장하는 왜선 2척을 잡다. 병마 도절제사 윤자당이 모두 죽이다경상도 수군 첨절제사(慶尙道水軍僉節制使) 김을우(金乙雨)가 왜선(倭船) 2척을 잡았는데,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윤자당(尹子當)이 모두 죽였다. 왜선 2척이 경상도 국정도(國正島)에 이른 것을 김을우가 잡았는데, 왜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둑질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역하러 왔다.”고 하고, 곧 종정무(宗貞茂)가 발급한 행장(行狀)1454) 2장을 보였는데, 그 진위(眞僞)를 밝히기가 어려워서 윤자당이 억류하여 놓고 치계(馳啓)하였다. “잡은 왜인 20인의 배 안에 실은 것이 모두 중국 물건이고, 또 대명(大明) 정해위(靖海衛)의 인신(印信)이 있으니, 실로 이들은 도둑질하는 왜구입니다. 사세가 반드시 도망쳐 갈 것 같으니, 모두 죽이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상선(商船)인지 적선(賊船)인지 분변하기를 기다린 뒤에 처치하라.”하였는데, 명령이 이르지 아니하여 왜인이 과연 틈을 타서 도망해 가므로, 이들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임금이 듣고, “황제가 일찍이 명하기를, ‘왜인(倭人)이 중국 변경을 침략하고 조선으로 향하여 돌아가니, 미리 준비하여 잡으라.’고 하였는데, 이제 빼앗은 병기(兵器)를 천자(天子)에게 바치는 것이 옳겠다.”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만약 말하기를, ‘왜놈은 또한 너희들도 미워하는 터이니, 우리가 주사(舟師) 를 보내어 칠 것이니, 너희가 이를 도우라.’고 한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하였으므로, 논의가 드디어 정지되었다.조선왕조실록 태조 9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2월 22일(경술) 2번째기사통도사에서 송림사에 옮겨 두었던 부처의 두골 사리 등을 가져 오게 하다부처의 두골사리(頭骨舍利)와 《보리수엽경(菩提樹葉經)》이 그전에 통도사에 있던 것을 왜구로 인하여 유후사 송림사(松林寺)에 갖다가 놓았는데, 사람을 보내어 가져을 추쇄(推刷)하여 왔다. 전언충(全彦忠)이라는 자는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사람인데, 을해년(乙亥年)에 나이 14세에 잡히어 팔려갔다가 지금 이예를 따라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모두 죽었었다. 그 부모의 상(喪)을 추후(追後)하여 입으려 하자, 임금이 불쌍히 여기어 겹옷 두 벌, 홑옷 한 벌, 정오승포(正五升布) 10필과 쌀·콩 아울러 15석을 하사하여 보냈다.명종 30권, 19년(1564 갑자 / 명 가정(嘉靖) 43년) 10월 23일(임진) 1번째기사간원에서 왜구의 약탈물을 부산에서 매매하는 것을 금하도록 청하다간원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왜인(倭人)을 접대하여 온 것이 지금까지 2백 년이 되었으나 수령들이 결탁하여 매매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탐욕스런 풍조가 크게 떨쳐 일어나고 교활한 방법들이 마구 생겨나 이익이 있는 일이면 온갖 꾀를 내어 차지하려 들고 있습니다. 왜구들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을 노략질한 뒤이면 명주(明珠)와 보패(寶貝)며 진기한 비단, 금은(金銀) 등이 부산포(釜山浦)에 모두 모이게 됩니다. 때문에 수령이나 변방의 장수 및 장사아치들까지도 쌀이나 베를 수레에 싣거나 몸에 지니고서 끊일 사이 없이 부산포로 몰려듭니다. 심지어는 타도(他道)의 수령들까지도 배로 운반해 오거나 육지로 수송하여 와서 물화(物貨)를 교역하여, 남녘 백성들의 명맥이 왜구의 손아귀에 모두 들어가 있게 했습니다. 만약 이 폐단을 크게 혁신시키지 않는다면 훗날 끝없이 일어날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첨사(僉使) 유충정(柳忠貞)은 한 진영(鎭營)의 주장(主將)으로서 금하고 방지하여야 하는데도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것만 알고 교역하게 하였으니 매우 무상(無狀)합니다. 그의 직을 파면하고 후임을 각별히 가려서 보내소서.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근래에 문관으로 선발하여 보낸 것은, 부산과 동래가 함께 한 곳에 있기에 그곳의 변장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감히 방자한 행동을 못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부사(하였다.
사진은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입니다. 선진국 진입의 관문이라는 엑스포의 개최가 있기까지 중국은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의 특성상 그 노력은 국영기업의 개혁이라는 뼈를 깎는 노력입니다.국영기업의 개혁에 앞서 국영기업이 속한 중국 경제의 특징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경제는 복합적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경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유고 사회경제체제 분석시 계획-시장-자주관리라는 삼중혼합경제체제 분석틀을 응용, 자주관리대신 공동원리 기반 자급자족을 추가한 다중사회경제구조로 이해해야 합니다. 중국은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가운데 사회주의적 경제 요소가 남아있는 특수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이런 경제구조속에 구축된 개혁 전의 기업의 성격을 어떠했을까요? 마오쩌둥시대의 경제는 집단소유를 기본으로 합니다. 기업은 이윤추구의 자율적 조직이 아니라 체제와 이념에 봉사하는 타율적 조직으로 정의됩니다. 기업을 구분할때 국가/집단 소유로 구분하며 중앙/지방 주관부처의 지도를 받는 정부의 수족으로 조직하며 자주권 없고 생산량 초과달성 요구받습니다. 기업의 경영조직은 공장장과 관리위원회가 관리/ 배후조정은 당서기와 당위원회가 하며 기업의 일인자는 당서기로 ‘당위원회 지도하의 공장장책임제’의 정형을 보여줍니다. 기본적 틀은 지금도 유지하나 실질적 내용은 진행되면서 변화합니다.기업 내의 정규종업원은 노동조합에 참가하나 노동자의 국가이므로 대립이 불가합니다. 노조는 사실상 복지조직이며 이런 성격은 현재까지 이어집니다. 일년에 한두번열리는 종업원대표회의로 종업원 의견 청취하고 생산계획 제시하지만 당위원회의 권한하에 형식으로 격하당합니다.마오시대 기업체제의 특징은 중앙직할 기업도 지방국영으로 전환할 정도로 지방분권화가 활발했다는 것입니다. 지방국영기업의 종류 순수 지방국영기업과 이전 중앙관할기업에서 1957년, 1970년 두차례에 지방분권화로 이관된 대형 지방국영기업으로 나뉩니다. 대형 지방국영기업은 중앙이 관여 이를 이중지도체제라 부릅니다.하지만 정치논리로 구성된 경제구조는 문제를 가집니다.첫 번째로 볼 문제는 부실경영입니다. 예산의 추가지급에 제약이 없는 연성예산제약하에 경영부실과 투자기근이 겹쳐 대규모 재정손실의 온상이 됩니다.두 번째는 부정부패입니다. 기업의 사회보장기관화하여 부실 국유기업이 정리되지 않고 정부 투자 유치증액에만 관심을 보여 시장경쟁 보단 로비경쟁이 심화되어 재정만 축내게 됩니다.세번째는 재산권의 불명확하고 이중지도 체계로 인한 대리인문제의 심화되어 국유자산 유실문제를 낳습니다.더하여 공업입지 정책의 기본이 전시체제라서 국유기업 설립시 지리/자원적 특성보다는 중앙정책에 입지하여 과도분산, 생산선의 비정상적 확장되어 경제악화에 한 몫합니다.결국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경제개혁이 실시되는데 초점은 사회주의국가답게 소유제와 관리문제입니다. 국유기업 개혁문제는 정치/경제체제 양쪽에서 고려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표로는 경영자주권확보, 노사 노동의욕 고취, 생산성 향상으로 하며 방법으로 국유자산 관리체계 개편, 주식회사화, 기업집단화, 민영화 포함 매각/임대등을 도입하였습니다. 개혁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개혁 도중 개혁의 방향에 대한 논의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있었습니다.첫 번째 주장은 리이닝이 주창하는 국공유제로 사회주의적 성격이며 공동풍요와 동시풍요는 다르며 공동풍요를 지향합니다. 여기서 공동풍요는 일종의 과정, 점진 실현. 공유제를 견지합니다. 그는 평등/효율 동시달성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주식제 전환하더라도 사회적 소유의 한 측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다음은 선택적 단계별 부국유화로 리수허가 주창합니다. 이는 국유기업을 다양한 소유/경영방식으로 개조하여 소유제 형식의 다양화를 추구하는 방법입니다. 이는 국유기업을 공공성/외부경제효과 정도에 따라 국유국영, 국유민영, 사유민영등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여 국유 중대형 기업을 빨리 주식회사로 개조/국유주식 비율 감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국유기업 개혁은 시대요청에 맞춰 비국유화과정/산업조직문제 동시 고려해야하며 기업의 소규모 분산현상 개선, 규모의 경제 달성하게 개편, 부실탈출, 국제경쟁력 확보를 주장합니다.사유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젊은 급진주의자와 외국학자로 1989년 이후 거의 중국 떠나거나 언로가 봉쇄당했습니다. 왕우점의 주장은 중국경제개혁이 계획경제와 무관한 부분에서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으니 개혁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에서 탈피할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국유기업 내재적 문제 포함 경제문제 해결방안은자유화 확대, 국유기업 특혜정책 폐지, 정부계획 포기라고 말합니다.국유 위주 주식회사화는 경영책임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유기업 주식/채권회사화 필요하며 경영책임제는 경영자가 단기이익과 보신에 치중하기 때문에 국유기업의 주식/채권회사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경영자의 경영자주권 확대와 경영감독 가능 주식회사제도 도입을 주장하며 논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점은 국가가 국유기업 소유권 유지해야한다는 점이며 차이점 국가통제, 대주주 지위 확보+소유/경영권 분리, 경영활동 전문경영인 전담, 이사들이 감독하야한다는 관점과 .소유자인 국가경영 간섭 감소, 경영의 시장화 촉진위해 국유자산 소유권을 국가/지방정부에서 각급 인민대표회의로 이전하지는 주장이 있습니다.이중주식회사제도는 양루이룽의 주장으로 국가가 기업의 대주주자리 유지하고 소유권을 국유자산관리국 담당하여 개별기업의 자유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제도를 주창합니다.현재 국공유제 옹호론은 멸종, 사유화 옹호론-1978~1989까지 활발, 이후 멸종하였고 국유위주 주식회사론 채권제론이 주류입니다.시기별 개혁의 초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혁을 경영과 이윤처리로 나눠서 보겠습니다.경영에 관련된 개혁은 시대별로 보겠습니다.1980년대의 문제점은 외부통제자/내부통제자 간 담합으로 국유자산 유실(이윤부분)된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종업원 생산의욕 향상목적 유인체제도입과 기업 자율권 확대를 중심으로 경영책임제를 도입했습니다. 경영책임제란 정부/경영인이 제품/생산량에 대해 3~5년간 계약, 생산 완료시 기업은 정부에 상납이윤 납부 후 잉여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의 부작용으로 외내부 간 상층부 담합과 내부 간 하층부 담합, 즉 이중담합을 야기하였습니다. 이중담합의 결과로 국유자산 유실되고 중앙정부, 하급 정부기관, 기업, 종업원간 이윤배분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유인체계 개선 중심 개혁은 일정분의 기업 생산성 향상과 정부/기업 분리를 달성하였지만 중앙정부 귀속분이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1990년대는 정부와 기업이 분리되고 국가의 대주주화와 경영자의 경영권 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국유 중/대기업에 대한 전문경영인/인수합병/외국기업과 제휴/소기업 매각/주식합작제(종업원지주제 형식)도입 고려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특성/국유기업 관리방식이 주는 폐해를 타파하기위해 개혁 후 선보인 분권화 시행하나 수직적 통제체제를 대체할 수평적 감독체계/시장기구 수립 지연, 기업경영에 대한 통제권이 정부에서 기업 내부자로 이전하였습니다.하지만 주식제는 시장 정비후에 기능하며 재산권 보장/보호없이 불가한 제도입니다. 또한 종업원지주제는 주식회사제의 경우 문제없으나 경영부실/손실상태의 기업이 상장되면 국가 도움없이 생존불가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주식제는 1990년대 후반에야 도입됩니다.1990년대 개혁의 부작용은 국가 대주주화와 정부/기업 분리로 외부통제자를 상실하여 내부자 통제문제 심화된 것입니다.또한 경영자의 경영권 강화되자 내부자 주도의 내/외부자 담합문제 발생하여 기업 내부자의 의사권을 장악하여 국유기업 자산 잠식(1980년대 외부통제자/내부통제자 사이 담합으로 국유자산 유실)과 부정부패, 기업 자본조달능력 악화되는 점이 있었습니다.중국정부는 소유제 개혁이 단순 경영방식 개선만으로는 경영효율 개선에 한계인 점을 인지하고 재산권을 중점으로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전환중/대 국유기업 중 일부만 엄격한 심사를 거쳐 주식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주식은 정부/기관 보유로 국공유제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내부통제를 위한 구체적 수단으로 주식제를 이용하여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가 기업 관리하여 유인체계 개혁단계의 이중담합을 경영자 위주 내부자 통제로 전환하고 경영자 인사권은 국가 감독기관, 당 위원회가 행사하는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이는 본질적 사유화 아니며 소유/경영이 분리되었고 자금조달 목적(1990년대까지)입니다. 또한 이 시대의 개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큰 것은 쥐고- 국민경제 영향을 주는 대기업에 자금/정책 중점지원과회사제로 개편/기업집단화하며 작은 것은 놓는다- 소기업은 주식합작/임대/매각/연합/인수합병, 중소기업 급격개혁, 대기업 전문경영인 도입/국내유사기업 연합/인수합병이 이루어지며 1997년에 중소기업 사유화로 중앙-지방 충돌하기도 합니다 또한 소기업 암암리한 주식합작제 인정됩니다.하지만 해결책의 부작용으로 경영자의 내부자통제= 외부자에 의해 견제 가능, 내외부자 담합 가능성 존재가 남아있습니다.2000년 말에는 중대형기업 개혁으로 부실탈출+wto가입 등으로 시장에 국제규격 도입되어 외부충격으로 인한 개혁이 이루어집니다.다음으로는 국유기업 내부자 통제문제에 관한 개혁을 보겠습니다. 기존의 기업구조에서는 일반적 주인-대리인 구조에서 나타나는 내부자통제를 제어할 외부자가 부재했고 분권화에 따른 국유기업 지배구조의 공백을 틈타 각종 문제가 발생합니다.이에 대한 개혁법으로 정부 국유자산 관리기능 분리하여 지주회사 설립하고 기존 총공사/투자회사를 지주회사로 전환, 대형 기업집단 모기업에 산하기업 소유권을 부여합니다.하지만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데 수권경영기구인 지주회사의 기업경영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고 감독자의 감독의지 보장되지 않아 유인체제 구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다음으로 볼 것은 기업 내의 잉여이익에 관련된 개혁입니다.개혁 전에는 모든 이윤을 중앙정부가 수령했다면 개혁 후 개선된 경영책임제에 비롯된 이윤상납방식 채택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기성과 위해 종업원 복지/성과급등 국유기업 종업원간 보수/복지 비교하며 인상경쟁이 일어나는 단점이 생겨 1980년대 중반부터 조세형식으로 전환됩니다.
경제현황과 부존자원목차지역구획, 면적, 최근 경제현황, 중국경제의 당면과제와 문제해소를 위한 노력, 한중경제교류, 자원지역경제 발전정책의 기본목표는 지역별 육성산업 배치, 지역간 교역, 지역과 산업의 적절한 연계를 통해 지역발전과 이를 통한 국민경제 전반 발전에 있다. 그러나 지역경제 발전에는 각 지역차가 상당하기에 발전 극대화를 위해 지역구획과 산업배치에 다음의 조건을 고려해야한다.첫째, 지역구획은 부존자원, 노동력, 자본 등 생산요소를 합리적으로 이용, 관리해야 하고 시장, 지역연계성을 감안하고 사회간접자본을 적절히 건설, 배합을 고려하여 지역특성에 맞아야 한다.둘째, 산업배치는 산업 특성에 맞아야한다. 농업은 자연조건, 공업은 원료, 연료의 생산지, 시장, 연구, 운송, 노동 생산성을 고려해야한다.각 시기별 지역경제 발전 정책은 다음과 같다.모택동 시절은 사회주의적 평등과 전시체제를 고려한 지역균형발전이다. 이 정책은 국가자원이 풍부하고 전국 동시발전의 여력이 있고 장기적 발전계획을 세울 때 쓰이지만 당시 중국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산업배치가 효율적이지 못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이에 등소평은 제한된 경제자원을 동부연해에 집중투입하여 효과적인 성과를 보였지만 지역 불균형을 낳았다.강택민시대에는 연해지역 경제가 어느 정도 발전하여서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 자원과 생산요소의 이용효율을 높이기위해 연해와 내륙이 협력하는 지역간 협조발전정책을 채택하였다. 이 정책은 지속적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빈부격차를 심화하였다.호금도는 등소평의 선부론을 포기하고 공부론을 채택해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목표로 분배위주의 정책전환을 하였고 빈부격차가 점차 축소하고 있다.지역구획중국 지역구획은 행정구획을 바탕으로 변화하였다. 행정구역 구획은 1949년 전국 50개 성급행정단위으로 20개 성, 1 자치구, 12 직할시, 5행서구, 1지방, 1지구로 시작하여 1967년 29개 성급행정단위로 21개 성 5 자치구, 3 직할시로 전환되었고 현재 대만을 제외하고 31개 1급 행정단위로 22역,신강 경제개발구 등 소수민족지역, 서장 특수경제지역을 빈곤지역으로 나눠 내륙과 빈곤지역을 비중있게 다뤘고 이는 1991년 10개 경제구 구상으로 연결된다.10개 경제구는 경제권역 특성에 적합한 특정분야를 중점 개발하는 종합적 경제발전 구상이다. 1992년에 지역발전을 위해 장강 연안, 화남 주강 삼각지, 환발해, 서남/화남 일부 성/시 지구, 서북, 중원, 동북지구에 7대 경제구가 제기됐고 주요내용은 개방지역 확대이다. 1994년 국가계획위원회는 각 지역 특성에 따라 경제지역을 가공형, 가공주도형, 자원개발형, 자원개발/가공혼합형, 특수형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전국을 중부, 동북 경제구, 환발해 지구, 장강 삼각주, 서남/화남, 서북지구, 복건, 광동의 7개 지역으로 나눠 산업별 중복투자를 없애고 효율적 외자도입을 꾀하여 균형발전을 시도하였다.면적중국의 면적은 963.4만 제곱킬로미터로 동부지역의 면적은 전 국토의 13.9%며 내륙 중서부지역은 86.1%이다. 경작지는 연해가 전국 경작지의 28.4%, 내륙이 71.6%로 서고동저 지형으로 연해에 경작지 비율이 높다.총인구총인구는 1952년 5억 5천여명에서 2009년 13억 4천만여명으로 57년간 8억여명 증가했다. 연해와 내륙 인구비중은 1952년 42.5% 대 57.5%에서 2009년 43.8% 대 56.2%로 변하였다. 70~80년대 연해인구는 60~70년대 균형발전과 문화혁명 당시 강제적 하방으로 인한 것이다. 전 국토의 13.9%에 불과한 연해에 인구가 집중한 것은 일자리와 생활수준 때문이다.노동자1952~1978년간 총인구에서 연해부중은 감소하였으나 노동자 비중이 증가한 것은 균형발전에도 불구하고 연해지역에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발전해있고 내륙은 장치산업인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한편 1978년 이후 연해중심 불균형발전에 따라 많은 인구가 연해로 이동했으나 연해노동자 비중이 거의 없는 것은 중국의 호구제도와 내륙의 높은 출산율에 기인한다. 1992w년 이후 연해 경제의 금속성장으로 상 과반수를 차지하고 그 이후 계속이어진다. 기본건설투자는 생산시설, 인프라와 복지시설 전반의 투자를 의미하며 1980년 연해 46.9%에서 2009년 52.3%로 연해의 비중이 높아진다.국내총생산국내총생산도 연해지역이 우위를 차지한다. 국내총생산은 1952년 연해 비중이 54.9%를 차지하며 건국 초부터 연해에 집중해서 1979년 이후 불균형발전 정책으로 비중이 늘어났다. 2009년 국내 생산총액은 36조 5천여억위안으로 1952년의 391.5배 증가하였다. 이 기간에 연해는 60.1%, 내륙은 39.9%로 격차가 벌어지고 있어 중국경제의 연해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1인당 국민수입1인당 국민수입은 1952년 연해 100 대 내륙 중부 81, 서부 57이었고 1978년 100:53:44로 확대되어 모택동의 균형발전정책은 효과가 없었다. 1992년 지역 불균형정책으로 연해, 내륙중부, 서부간 1인당 국민수입 격차는 100:43:37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2009년 호금도의 공부론에 의해 연해, 내륙 중부, 서부의 비율은 100:57:44로 내륙비율이 상당히 상승하였다. 지역구분을 동부, 중부, 동북3성, 서부로 비중을 고찰할 때 2005년 동부대비 각각 45%, 67%, 39%로 2007,2008년 모두 동부에 비해 성장률이 높았고 그 이후에도 이 기조를 유지한다.최근 경제현황경제정책의 기본방향2010년 공산당의 12차 5개년 계획은 경제발전의 안전과 사회조화를 추구하는 소강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한 경제발전 방식의 전환을 위한 5대 원칙은1. 경제구조의 전략적 조정 2. 기술진보와 창의성 기반 3.민생보장과 개선 지향 4. 자원절약형/환경친화형 사회 건설 5. 개혁개방을 동력으로하는 경제발전 방식의 추진이다. 이를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5대 목표는 1.안정적이며 빠른성장 2. 경제구조 조정 3. 도농 소득증대 4. 사회건설 강화 5. 개혁개방 심화이다. 또한 기존의 보팔정책대신 질과 내수위주, 중국식 성장방식으로의 전환을 천명했다. 중국식 경제발전노선의 기계 2위로 부상했다.고정자산투자고정자산투자는 2000년 10.3% 증가하였고 이후로 계속 20%넘는 금액이 투자되었다. 특히 2009년에는 30%가 넘는 증가율을 보인다. 농촌부문에 대한 투자도 도농간 소득격차 해소를 위해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소비재 판매증가율소비재 판매 증가율도 꾸준히 증가하는데 특히 요식업, 각종 소비재, 화석연료 관련제품, 자동차, 건축자재, 통신설비 부문의 증가가 현저하다. 농촌 소득증가는 완만하였지만 농민의 가전제품, 자동차 구입에 대한 보조금 지원제도인 가전하양, 기차하향등의 파급효과도 상당하며 소비증가가 이뤄졌다.물가물가는 2010년 들어 급등했다. 2008년 5.96%에서 정부 노력과 국제경제 불안으로 2009년 -0.7%로 나타냈다. 2010부터 급등하였다. 이는 국제 원자재가격 폭등, 무역흑자와 외자도입 증가세 지속, 식품가격 급등, 국내기후 불안정이 이유이다. 반면 이전 물가 상승의 원인인 부동산가격은 정부규제로 상승률이 둔화됐다.외환보유고와 환율외환보유고는 2000년에서 2010년간 약 20억배 증가하여 세계 1위의 외환보유국 자리를 유지했다. 외환보유고의 급증은 무역흑자 급증과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 위안화가치 상승을 기대한 핫머니 유입에 기인한다.환율은 상기한 외환보유고 급증으로 평가절상 압력이 수년간 이어져 2006년 1달러 당 8위안, 2008년에 7위안, 2011년 6월 말에 역 6.5위안으로 평가절상 중이다.대외무역대외무역은 수년간 급증세이다 2009년 세계금융위기로 전년대비 14% 감소했다. 2010년에는 다시 급등하여 전년대비 34.1% 증가해 전년 감소분을 보전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32.8% 감소, 2010년에는 0.79% 증가로 이런 급격한 변화는 세계금융위기에 따른 국제 수입수요 감소와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에 있다. 2010년 수출액은 기계, 전자, 선박 등의 수출 호전으로 전년대비 34.1% 중가했고 세계경제 침체,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수출증가율보다 수입증가율이 더 높았다. 수출상품 구조에서. 2010년 외국인 직접투자 계약건수와 실행액는 전년대비 각각 16.9%, 20.9% 증가하였다. 2011년 1/4분기 투자방식별 상황을 보면 독자투자가 244.4억 달러로 가장많았고 다음으로 합자투자가 53.1억달러, 합작투자가 3.3억 달러에 달한다. 주요 투자국은 홍콩이 우위에 있으며 동아시아 국가들과 미국, 싱가포르 등이 있고 조세피난처에서의 투자는 없는 상태이다. 2009년 주요투자업종은 제조업, 부동산, 임대, 도소매 등 이다. 투자업종의 중요한 변화는 도소매, 부동산, 운수, 정보 등 서비스업종의 비중이 2002년 24.6%에서 2009년 55.7%로 증가하였다. 지역별로는 연해지역에 대한 투자가 많았으나 내륙 우대조치 확대로 내륙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중국투자에 대한 특징은 중국시장에 대한 지식/경험을 슥득한 독자기업의 증가, 서비스 산업에 대한 투자 증가, 중국기업에 대한 주식인수 및 m&aqkdtlr의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중국경제의 당면과제와 문제해소를 위한 노력연해와 내륙, 도농간 지역 격차해소지역격차 해소를 위해 2000년부터 서부 대개발전략, 2004년부터 시작한 동북3성지역 발전을 위한 동북진흥, 2005년부터 시작한 중부 6성(안휘, 하남, 산서, 호북, 호남, 강서) 발전을 위한 중부굴기가 진행중이다. 또한 인프라 확충과 내륙 인프라 미비를 해결하기위해 내륙발전을 위한 서전동송, 남수북조, 서기동수 5종7횡, 4종4횡등이 전개되고 있다.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절상 변동폭 확대대량의 무역흑자, 외국인 직접투자의 지속적 유입, 급격히 증가하는 외환보유고에 대한 미국/유럽의 상품구매 압력이 위안화 절상압력이 가중되고 있어서 2006년 1달러당 8달러간 된 이래 위안한 평가절상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중국기업의 해외투자와 m&a를 적극 권장하고 해외투자 업무를 담당하기위한 외화투자공사를 설립하였다.해외직접투자 확대를 통한 경제/산업구조 재편해외직접투자는 국내의 넘치는 외화와 이로인한 위안화 절상압력을 회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