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 속곳 파헤치기 -춘향이 과연 열녀인가를 중심으로-201310048 조아영남성에게 영웅의 일대기적 구조가 있다면 여성에게는 공주의 일대기적 구조가 있다. 여기서 공주는 본래의 뜻인 왕의 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왕자, 즉 멋지고 권력 있는 남성과의 결혼에 성공하는 것을 뜻한다. 신데렐라가 그러했고, 미녀와 야수의 벨이 그러했으며,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주의 일대기적 구조가 서양에만 존재하느냐? 아니다.우리에게는 콩쥐와 춘향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콩쥐는 머리색과 눈동자색만 검은색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서양의 신데렐라와 많이 닮아 있다. 누더기 소녀는 욕심 없이 착한 일을 했을 뿐인데, 권선징악의 보상으로 멋진 남편을 얻게 되는 이야기. 물론 유리 구두며 꽃신을 흘리고 가는 앙큼한 수작을 부리기도 한다.하지만 뛰는 년 위에 나는 년 있으니 콩쥐 위에 춘향이 있다. 콩쥐가 최후의 보루로 꽃신을 장전했다면, 춘향이는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한 펀치를 끊임없이 선사한다. 쉬지도 않고 살랑살랑 흔드는 꼬리가 몽룡의 눈에도 보였으니 “날 호려 먹는 불여우냐?” 하고 물었겠지만, 그는 춘향이 자신의 간도 빼먹을 수 있을 만큼 요사스러운 년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난년 중에 난년, 성춘향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려보자.■ 조선 최고의 아이돌, 춘향‘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 많은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상이다. 남의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길거리를 지나가면 목이 꺾이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집중을 하면서, 자기 여자가 조금만 노출을 해도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남자다. “섹시한 게 좋아!” 하면서도 “여자는 자고로 정숙해야지.” 하는 두 얼굴을 가진 게 남자다. 이러한 이중 잣대를 모두 갖다 대도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는 그녀. 춘향은 요조숙녀, 현모양처, 열녀인 동시에 요부이다.춘향전은 조선 영·정조 전후에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작자·연대 미상의 작품이다. 또한 춘향전은 를 포함하여 소설의 이본이 120여 종이나 된다. 판소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소설로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이 춘향전을 주물렀을지 상상이 된다. 그 예로 춘향의 신분은 작품에 따라 기생이기도 하고, 성참판이나 성전총의 서녀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독자, 양반들의 입맛에 맞게 춘향전이 변질된 것이다.따라서 춘향은 민중이 틀을 만들고 양반, 그 중에서도 남성들이 살을 붙여 빚어낸 아이돌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강한 유교적 이념 체제 속에 가부장적이다 못해 남존여비 사상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마음대로 끊어내지도 못하는 족쇄를 차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정절 이데올로기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을 위해 지고지순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희생, 헌신 등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며 절개를 지킬 것을 강요당했다. 이는 물리적인 강압보다 무서운 정신적, 사회적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특히 문학, 이야기라는 것은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굳이 정조를 잃어 맞아 죽은 여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열녀가 지조를 지켜 암행어사와 결혼한 이야기는 충분히 대중을 ‘열녀 증후군’에 빠지도록 만든다. 한편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문란해서는 안 되고, 색을 밝혀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춘향은 몽룡과의 정사 장면에 있어서 굉장히 당돌하고 잔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분명 여성에게도 육제적, 성적 욕구 존재한다. 단지 남성보다는 여성이, 현재보다는 과거에 더욱 그 표현이 금기시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항상 남성들은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여자가 어디 남사스럽게!” 하면서도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색스러운 춘향의 모습을 담아내놓고 “열녀니까 괜찮아” 하는 합리화를 하며 좋아하는 것이다. 즉, 춘향은 남성들의 복합적인 욕망을 모두 담아낸 로망의 집합체로 그려진다.■ 계획적인 여자, 춘향신데렐라가 계획적으로 유리 구두를 흘리고 갔다면, 춘향이는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 기생이 될 것을 마다함은 물론, 어머니의 지원 아래 현모양처로서의 스펙을 쌓아 나간다. 신부 수업의 결과로 글공부며, 바느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진 춘향의 모습은 ‘여염처자’라는 말로 귀결된다. 춘향 자신도 스스로를 여염 집 사람으로 칭할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하나 같이 춘향을 금천하지절색에 만고여중군자라고 말한다. 이로써 춘향은 한 번 놀고 말 기생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할 아내가 될 자격을 갖추고 몽룡을 만나게 된다.지드래곤마저 “재주 많은 곰 No, 곰보단 여우”를 외칠 정도로 남자들은 곰보다는 여우같은 여자를 선호한다. 그런데 여우짓을 할 때 ‘나 지금 꼬리 치는 중이예요’ 하고 광고를 하는 것은 초짜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짜 고수들은 안 그런 척, 모르는 척 곰의 탈을 쓰고 티 안 나게 물 밑 작업을 한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춘향이다.그녀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밀고 당기기’를 구사한다. 첫 만남부터가 그러한데, 분명히 먼저 들이댄 쪽은 몽룡이지만 이를 부추긴 것은 춘향이다. 예쁜 처자가 보일랑 말랑 치맛자락 휘날리며 그네를 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마음이 동하지 않겠는가. 그래놓고 몽룡이 자신을 부른다니 내심 좋으면서도 애꿎은 방자에게 성을 낸다. 일단 한 번 튕기는 것인데 사실 춘향은 ‘기생 콤플렉스’을 앓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여염처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거부하는 것이다. 덕분에 몽룡은 춘향을 쉬운 여자가 아닌 도전해서 정복하고 싶은 여자로 생각하게 된다.그 후에도 춘향은 추파를 보내면서도 도도한 태도를 유지하는가 하면, 부끄러이 옷끈을 잡아놓고는 먼저 침금 속으로 들어가는 등 계속해서 몽룡의 애간장을 녹인다. 이에 홀린 몽룡이 춘향과 백년가약을 약속하지만 둘은 곧 이별을 맞는다. 그런데 이때 춘향의 태도가 우습다. 떠나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는 몽룡을 태연한 얼굴로 다독이며, 뒤 따라 올라갈 테니 집이나 사놓으라고 말한다. 갈 놈은 가는 게 맞다는 식으로 몽룡이 벼슬에 오르면 처든 첩이든 그 옆에만 있을 수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그러다가 몽룡이 그마저도 할 수 없고 불가불 이별이라고 말하자 낯색이 확 변해서는 치마도 찢고 머리도 뜯으며 발광을 한다. 이는 아무리 봐도 연인과의 생이별에 대한 슬픔을 넘어서 신분 상승의 좌절에 의한 광기로 보여진다. 그 곡소리를 듣고 찾아온 월매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딸더러 살아서 딴 놈 애간장이나 녹일 바에야 쓸데없으니 그냥 콱 죽으라고 하며, 죽은 시체라도 몽룡이 지고 가는 게 낫겠다고 한다. 이는 후에 죽을 위기에 닥친 춘향이 몽룡에게 자신을 선산 발치에 묻어주고 비문에 ‘수절원사춘향지묘’라 새겨줄 것을 요구하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악착스럽고 독한 것이 똑같다. 죽으나 사나 목표는 춘향이 몽룡 집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우리는 하트를 하나 그리려고 해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모양의 하트를 그리게 된다. 도화지 혹은 벽에, 심지어 모래 위에 하트를 그릴 수도 있고 그 도구가 연필이나 펜뿐만 아니라 물감, 스프레이, 손가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 간단한 도형 하나를 그리는데도 각양각색의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는데 사랑이라고 어찌 한 가지 모습을 나타내겠는가? , , 은 3편 모두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세 사랑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같은 틀을 가진다. 일단 그 대상이 귀신이나 호랑이가 아닌 인간이고, 동성이 아닌 이성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지만 같은 틀이라도 무엇으로 어떻게 그리냐에 따라 그 모양은 다르기 마련이다. 세 이야기 속의 사랑은 각각 어떤 식으로 칠해졌을까?♥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속 주생의 사랑은 연필로 쓴 사랑과 같다. 연필의 가장 큰 특징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쓸 때 심사숙고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손을 움직이게 된다. 생각이 바뀌면 이미 쓴 내용을 지워버리고 새로 쓰면 되니까. 주생은 어릴 때 벗이었던 배도를 만나 거침없이 호감을 표시한다. 그렇게 해서 배도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잠시, 노승상의 딸 선화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반한다. 반하기만 하면 문제가 안 될 것을 주생은 배도와의 사랑을 저버리고 선화와 정을 통한다. 그렇게 추파를 던져 배도를 유혹해놓고 막상 배도와 연정을 나눈 후에는 선화라는 미인에게 빠져 배도를 배신한다. 정말 가볍고 즉흥적이고 의리도 없는 사랑이다. 요즘은 수정펜이나 수정 테이프라는 것이 있어서 펜으로 무언가를 썼을 때도 수정이 용이하기는 하지만 그 흔적이 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생은 연필으로 비유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연필을 잡았을 때 딱히 대단한 구성을 하기보다는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그대로 끄적인다. 그래서 연필로는 낙서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사랑을 낙서처럼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마구잡이로 끌리는 대로 만들어 놓은 낙서가 상대방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말로 표현했을 때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대표주자인 주생은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사랑을 쓰려거든 물감으로 쓰세요주생이 연필이라면 최척은 물감이다. 물감은 그 농도에 있어서는 한없이 진할 수도, 연할 수도 있지만 한번 칠하면 지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종이에 칠하든 벽에 칠하든 마찬가지인데 다른 색으로 덮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나 본래의 그림을 지울 수는 없다. 또 덧칠을 하다보면 미운 모양이 되기 때문에 다소 다루기 어렵더라도 단번에 완성시키려고 한다. 세 명의 주인공이 삼각관계를 이루던 에 비해 에서는 최척과 옥영이 서로만을 사랑한다. 이들의 사랑은 참 파란만장해서 결실을 맺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어머니 심 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약혼에 골인했더니 결혼으로 가는 길은 더 험난하다. 왜적에 대항하는 의병으로 최척이 참전하면서 혼인날은 미뤄지게 되고, 심지어 심 씨는 부잣집 아들인 양생을 옥영의 짝으로 맞으려고 한다. 하지만 옥영은 변함없이 최척만을 기다리고 마침내 둘은 부부가 된다. 몽석이라는 아들이 태어나고 행복한 나날도 잠시, 정유재란으로 인해 옥영은 왜군의 포로가 되고 최척은 방황 끝에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때 의형제를 맺은 여유문이 최척을 매부로 삼으려하지만 최척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배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화에게 첫눈에 반해 양다리를 걸친 주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최척은 옥영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이 식을 수도 있고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뺏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명나라 장수 여유문의 매부 자리라면 탐이 날만도 한데 최척은 끝까지 옥영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 마침내 두 사람은 돌고 돌아 상선 위에서 다시 만나 행복을 되찾는다. 이들의 사랑은 그 과정이 순탄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변덕을 부리지 않고 처음의 스케치 그대로 부지런히 색을 칠한 결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걸작으로 그려졌다. 그 변하지 않는 은은함이 수채화 같기도 하고, 견고함과 강인함이 유화 같기도 하다.♥ 사랑을 쓰려거든 손가락으로 쓰세요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는가? 모래라는 것은 도화지나 캔버스처럼 원래 무언가를 쓰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고, 손가락 역시 연필이나 물감처럼 무언가를 그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쯤 모래사장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끄적여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별다른 도구도, 준비도 필요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홀린 듯 손을 움직인다. 그래서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그 후가 문제다. 바람이 불면 금새 흐트려지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파도가 지우개가 되어 말끔히 지워버리기도 한다. 쓰면 지워지고 또 쓰면 또 지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에 나타나는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사랑이다. 운영은 김진사를 보고 홀린 듯 사랑에 빠진다. 김진사 역시 운영에게 마음을 품어 두 사람이 정을 통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운영이 안평대군의 여자라는 것이다. 궁녀 중의 한 명에 불과하나 운영은 분명 안평대군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사랑은 지켜지기가 힘들었다. 안평대군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겼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꼬리가 잡힌다. 옥에 갇힌 운영은 자결하고, 김진사 역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운영을 따라간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다. 둘은 애초에 해서는 안될 사랑을 한 것이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모래에 글을 쓰면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오히려 쓰면 안 된다는, 끝내 사라진다는 그 점이 아련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