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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 향연
    플라톤 에로스, 그리고 행복사랑은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위한 선물이다>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거리를 지나가면 수없이 많은 사랑노래들이 우리들의 귀를 간질이며, 가슴을 뛰게 만든다. 또 봄이 다가와 꽃이 만개한 나무들 사이에서 손을 잡고 거니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사랑” 떠올린다. 조금더 나아가 보자, 우리는 부모님에게도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연인들, 동료들 친구들에게도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인 것인가?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우리의 마음을 숨기거나 포장하여 조금더 미화 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매일 저녁 일일연속극에서는 “사랑”을 소재로 하여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사랑”을 과도하게 포장하고 사랑의 의미를 한정짓는 막장드라마 라고 폄하하면서도, 그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말해주듯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라는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다!” 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막연한 것으로의 사랑만 알고 그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플라톤의 에서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우리는 흔히 에로스는 야하고 음탕한, 육체적이고 우리의 뺨을 발그스레 하게 만드는 어떤 사랑의 종류로서 생각한다. 이러한 에로스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은 우리가 에로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그러한 에로스에 대한 ‘부분적’ 역할을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양 에로스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의하고 명명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에서는 에로스를 여러사람의 대화와 각각이 내린 에로스에 대한 정리, 그리고 마지막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새로운 정의로 해결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에로스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이야기는 제목에서처럼 향연에서의 연설이 주된 에 대한 개념과 생각을 정의한다.먼저 파이드로스는 에로스를 대단한 것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칭송한다. 우리는 애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기를 원하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용기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다.(q2.1.1.2.1.1) 그래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어떤 소년을] 사랑하는(er?i) 사람이 뭔가 수치스런 일을 하다가, 혹은 누군가에 의해 수치스런일을 당하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다가, 그런 일들이 공공연히 밝혀지는 경우, 아버지나 동료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 들키는것보다 소년 애인에게 들키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하리라는 것이네.파우사니아스는 파이드로스의 말을 수정하고 그의 논리를 바로잡는데, 에로스가 없는 아프로디테는 없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므로 에로스도 둘일 수밖에 없다. 더 나이 들고 어머니가 없는 우라노스의 딸 천상의(Ourania) 아프로디테가 있고, 나이가 휠씬 젊고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인 범속의(Pand?mos) 아프로디테가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각각의 아프로디테에는 각각의 에로스가 따르고, 범속의 에로스는 단순히 육체적인것이며 성욕만을 채우는 것이며, 천상의 에로스가 바로 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천상의 에로스도 육체적인 것이지만, 천상의 에로스가 더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덕과 훌륭한 성품으로 그 자질을 갖춘 사람들만이 이러한 에로스를 향유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좋은것과 나쁜 것으로 나눈 것을 인정하나 그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의술,시가술,천문학, 예언술 등을 예로 들면서 에로스는 여러 다양한 기술들의 근원이 되는 우주적 원리로서 각갂의 영역에서의 에로스가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분되어야 하고 좋은 것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에로스가 영혼의 영역을 넘어서 실제적인 기술로서 적용되고, 자연속에서 우주적 에로스로서 작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에로고 아름다운자들(kaloi)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도 (즉 모든 동물들의 육체에도, 땅에서 자라나는것들에도, 즉 말하자면 있는 모든 것들 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 기술인 의술로부터 깨달았다고 생각하네. 그 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랄 만한 신인지, 그리고 어떻게 모든 것에, 즉 인간적인 사물들과 신적인 사물들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지를 말일세.아리스토 파네스는 신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원초적 인간은 자신의 반쪽과 하나가 되어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반쪽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은 이 욕망을 충족 시켜 줄 다른 반쪽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개인들간의 개별성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부족한 것들을 보완해주고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이 성교로서 일어나지만, 에로스는 그 속을 살펴보면 성교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완벽함”을 찾는 행위 인 것이다.아가톤의 경우에는 에로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득 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피스트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화려한 언변으로 에로스를 찬양한다. 앞서의 여러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에로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의했지만 아가톤은 에로스는 아름답고, 훌륭하고, 모든 좋은것들의 원인이므로 가장 행복한 신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가장 훌륭한 것이다 라는 논지를 화려하지만 동어반복적으로, 보는이의 정신을 빼놓는 말들로 수사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 같다.소크라테스는 앞서의 논지들을 다 틀렸다고 비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앞서의 사람들의 논지들을 넌지시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아가톤과의 이야기, 디오티마의 이야기, 그리고 최고 비의이다. 아가톤에게는 에로스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망으로서 자신의 결핍을 포현한다고 하였으며,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중간자적에서 생산되고 그것을 통해(좋은것의 영원한 소유) 불멸을 얻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고 비의에서 육체의 것에서 정신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변화하는 형상을 직관하는 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속에서의 생산은 자신을 불사화 하는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임을 이야기 한다.소크라테스는 세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의 논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에로스를 행복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의 에로스를 정의한다. 그것은 에로스 그 자체가 욕망이 아니라 에로스의 대상인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쉽게 식욕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식욕을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음식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이 내 수중에 있으면 그 음식을 간절히 원하겠는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리는 배고프기에 그 음식을 먹어 버릴 것이다. 이처럼 어떤것의 에로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 다시발해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에로스 인 것이다. 이 같은 논리 하에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에로스는 사실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원하는 에로스 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 없는 에로스와 같으므로, 아름다움이 없는 에로스를 어찌 아름답다고 할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아가톤의 논의는 반박되고 마는 것이다.그렇다면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데, 좋은것들이 아름답다면, 그는 좋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걸 거네.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기에서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의 역할,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역할로서 대변된다. 즉 비슷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다. 디오티마는 중간적인 것의 예를 제시하는데 아름답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처럼, 추하고 나쁘지도 않다. 지혜롭지 않은 것이 무지가 아니듯, 모든 것에는 중간적인 것이 있다. 이러한 중간적 존재로서의 에로스를 강조한다. 또한 에로스의 무지에 대한 지를 강조하면서, 모르는 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무슨 쓸모가 있는지, 다시말해서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디오티마는 ‘아름다운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놓고 우리가 좋은 것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 지를 되물으며 대답을 이끌어낸다. 좋은 것을 소유한 자는 행복하게 된다.그러니까 좋은 것을 얻는 목적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대답이 최종적이며 그이상의 목적은 물을 수가 없다. 따라서 에로스의 목적은 행복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좋은 것을 바라며, 에로스의 개념을 확장하여, 우리는 좋은 것을 바라므로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는 자라고 명명해지는 것이다.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일상에서 에로스를 성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정의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이런 에로스의 정의는 한정적이고 편파적인 것이다. 실제로 에로스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서 그것이 발현되어 행복에 접근하게 만드는 어떠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결핍으로서 시작된 이러한 완벽을 향한 접근은 우리의 욕망의 발현일 뿐이고, 그것을 교묘한 말로서 표현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자.우리가 왜 어떠한 것을 원하는가? 그것이 부족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을 얻으면 행복해 질 수 있는가?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그렇다.그렇다면 좋은 것이 한순간 있었다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분명히 슬플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이 계속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그러한 좋은 것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우리 욕망의 발현이다.이러한 우리의 욕망의 발현을 속된것이라 생각 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욕망의 발현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비록 그것이 육체적인 것을 비롯하여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결국은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을 이루고, 결국 이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단계적 상승을 따라간다것이다.
    독후감/창작| 2013.09.15| 6페이지| 5,000원| 조회(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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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바일 게임이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모바일 게임이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Ⅰ. 머리말모바일 게임의 특성과 그러한 특성이 우리의 일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Ⅱ. 본론1. 모바일 게임의 발달2. 일상에서 나타나는 모바일 게임의 긍정적 측면1) 여가적 측면2) 커뮤니티를 강화3. 일상에서 나타나는 모바일 게임의 부정적 측면1) 게임의 업무화2) 게임중독3) 커뮤니케이션의 약화Ⅲ. 마치며Ⅰ. 머리말사람들의 일상을 정의한다면 수많은 행위들의 집합체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영향을 주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여가’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우리의 삶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른사람과 관계를 맺고 더 나은 삶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신을 속이거나 힘든 것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것들은 바로 노동이나 직무라는 영역에서 이루어 지는데 이러한 여가는 노동과 직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직업적인 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적인 일’에서도 벗어나게 되면 사람들은 자유를 음미하게 된다. 그러한 자유를 사람들은 어떻게 즐길 것인가?몇몇 이들은 단순히 그들이 얻은 자유를 몸과 정신의 휴식을 위해 보내기도 하지만 몇몇 이들은 이러한 자유를 그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놀이’로서 활용하였고 그러한 놀이는 더욱 더 발전하여 ‘게임’이 되었다. 프랑스인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저서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에서 다음과 같이 게임을 정의하였는데, 즉 즐거움을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 승패의 여부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 것, 룰에 지배당하는 것, 현실의 활동으로부터 의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게임의 참가자가 알고 있는 것이다.(위키백과, 게임)이러한 게임은 크게 육체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과 동시에 한정적인 장소에서 두뇌의 즐거움을 추구한 게임으로 나뉘게 되었다. 전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스포츠라면 후자는 화투나화면으로 모바일 게임은 기껏해야 오목과 같은 일반 보드게임, 그것조차도 작은 화면으로 인하여 즐기기 어려운 상태의 게임만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피쳐폰의 발달로 인하여 모바일 게임은 단순, 반복적인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즐길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화된 고 퀄리티의 게임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무선인터넷(3g, 4g, wifi)등을 제공하는 스마트폰의 특성과 합쳐져 다른이들과의 커뮤니티적 성격을 지닌 게임 또한 제공 할 수 있게 되었다.모바일 기기 중에서 iPhone의 도입으로 한국에서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와 스마트폰 관련 서비스가 활발히 개발되고 있으며, 특히 모바일 게임의 영역에서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러한 열푸므로 시작된 스마트폰의 시장확대에 따라 여러 콘덴츠의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장수민, 송영준, 유재수, 2011) 단순한 보드게임 형식의 콘덴츠부터, 고사양이 요구되는 RPG게임, 액션게임, 그리고 이러한 게임들을 무선인터넷 환경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즐기고, 초대하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커뮤니티적 성격또한 제공된다. 그 대표적 예로 최근 카카오톡과 연계된 각종 게임들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무선인터넷 지원 게임의 경우는 MMORPG처럼 같이 접속하여 게임을 진행 하던 반면, 카카오톡과 연계된 애니팡, 드래곤플라이트와 같은 게임은 카카오톡으로 연계된 실제 친구들과의 점수경쟁, 친구들에게 게임을 이용 가능하게 하는 ‘하트’나 ‘날개’와 같은 이용권의 배부의 형태로 커뮤니티적 성격이 변화 하였다. 또한 기존에 존재하던 모바일게임이 컨텐츠의 고퀄리티와 함께 무겁고, 어렵우며 진입 난이도가 있는 스토리텔링 시스템을 중시했던 것 과는 대조적으로 최근에는 쉽고, 빠르고 단순하지만 중독성 있는 게임으로 더 많은 이용자들이 1분 이내의 짧은 시간내에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도록 만든다.이러한 경향으로 인하여 깊이있고, 오랜 기간 게임에 시간을 투자하는 이들은 굳이 컴퓨터 앞이 아니라도 모바일 기기만으로도 스토리텔링과은 체육이라는 교과로서 위에서 ‘부과’되어진 교육체계속에서 얻은 것이기에 여가라기 보다는 학업이라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직장인들의 ‘조기축구회’같은 경우에는 본인들의 의사의 발현으로 즐기는 것이지만 특정한 텀을 두고 일주 내지 이주에 한번 행하여지는 ‘사건’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는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같이 행동할 사람을 따로 구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여가의 필요성을 느낀다. 일과 여가의 극단적 분리가 아니라 하루중 일이라는 긴 스펙트럼과 매일매일의 반복 속에서 잠깐의 휴식시간에 즐길 수 있는 삶의균형을 찾아 줄 수 있게 하는 여가활동이 필요하였고 그것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오늘날의 모바일 게임이다.이러한 모바일 게임은 짧은 기간, 즉 45초에서 1분 이내의 시간동안 즐길 수 있게 하는 특성과 동시에 비교적 쉽게 높은 성취에 이를 수 있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게임 또는 비디오 게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여 그 성취와 보상을 얻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물론 게임이라는 특성상,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높은 수준의 지위욕을 얻을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해야 하기에 일정 시간을 투자하고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우는 반복행위를 한다면 보상은 반드시 얻을 수 있는 시스템들을 채용 하고 있지만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게임속 세상에서도 ‘그저그런’ 캐릭터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비디오게임에서 대표적인 플랫폼인 ‘몬스터헌터’라는 게임의 경우는 게임의 이용시간이 그 게임 이용자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며, 대다수의 온라인 게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랭킹중 상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매우높은 접속률과 접속시간이 전제되어야 한다.그러나 모바일 게임의 경우에는 비디오게임이나 온라인게임에 비하여 시간과 노력을 덜 투자하고도 높은 수준의 보상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컴퓨터나 비디오게임기 앞에서 몇시간동안 집중하지 않고, 일상에서 시간이 날때마다 잠깐잠깐 즐겨도. 이러한 연계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주변의 아는 사람들과의 경쟁과 대결, 그리고 이용권의 나눔, 게임 초대 등을 통하여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먼저 통계청의 2009년 국민생활시간조사에서 3시간 15분이라는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일의 영역에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를 살펴보자. 이러한 직장의 영역에서 모바일 게임은 직장내의 구성원들을 묶어줄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직장내의 구성원인 중장년층, 여성층, 젊은 남성층들에게 모두 어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모바일 게임이 젊은 남성들만의 전유물로서 여겨졌다면 최근 조사에서는 여성의 모바일게임 시장에서의 비율은 2010년 4.1%였으나 올해 36.2%까지 치솟았으며, 40~50대의 중장년층의 모바일 게임 유입도 많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미성년자인 자녀가 부모명의로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40~50대의 거의 전부가 이러한 게임을 즐긴다는 ‘착시 현상’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실제 이용자를 정확히 추산할 수는 없지만 꾸준하게 그 비율이 늘어가는 현상이 나타난다.(안재만, 2012.) 실제로 매일아침 부장님에게 애니팡의 ‘하트’를 보내주고 회사내에서 애니팡 대회를 열어 상여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 상사의 애니팡 점수를 올려줘 다른부서 간부의 점수를 이기게 되자 직장상사가 회식자리를 마련한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여러 경우처럼 모바일게임이 단순히 게임이라는 컨텐츠로서가 아니라 직장내에서의 직원들을 묶어줄 수 있는 커뮤니티적 성격을 하게 되는 현상이 존재한다.그렇다면 직장이 아닌 가정 또는 친구관계 등에서는 어떠할까? 이같은 경우도 직장에서와 같은 동일한 기재가 작용하여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기존의 명절에는 남자 어른들의 고스톱과 같은 게임들이 하나의 유희거리로서 작용했다면 이번 명절은 다소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돈이 오가는 도박이 아니며, 남자들만이 아닌 남녀노소 누구나 구분없고 다양한 연령층이순간만의 고통으로써 끝나지 않는다.매일 이용권을 직장상사들에게 보내야하며, 잠깐의 시간이 생기면 직장상사의 스마트폰을 잡고 더 높은 점수를 얻기위해 마치 시험을 보는 것처럼 집중해야 하는 현상은 게임이 오히려 직장에서 더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자신의 능력을 상사에게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스펙으로서 작용한다. 아침일찍 이용권을 보내는 것은 자신의 근면성을 보여주고, 직장상사의 스마트폰으로 높은 점수를 내는 것은 직장상사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써 자신을 어필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대중화로 인하여 게임의 점수가 집단내에서 하나의 위신재로서 작용하게 되었고, 상사가 그것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부하직원들이 보충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도래한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모바일 게임이 일상에 너무나 깊게 침투하게 되자 일어나는 부작용의 대표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업무와 여가가 분리되고 있는 경향에서 업무시간에 즐길 수 있는 작은 여가의 일환으로 모바일 게임이 그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면 그러한 영역의 지나친 확장이 오히려 여가의 영역을 침범하고 여가조차 업무화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스트레스의 해소가 목적이던 행위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여겨지게 되었고, 일상에 너무나 밀접한 경향이 있기에, 직장상사의 압박, 주변에서의 소외등을 두려워 하여 그러한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행위로의 변질에도 불구하고 모바일 게임을 중단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용권을 보내고, 직장상사의 스마트폰으로 더 높은 점수를 얻기위해 노력한다.2) 모바일 게임의 중독현상중독이라는 것은 나의 삶을 내가 기획하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있을 것이다. 즉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한 판단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날 모바일 게임이 하나의 중독현상으로서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단순히 게임을 많이하여, 눈과 어깨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의학적 소견에서부터, 이제는 이러한 중독현상으로 )
    학위논문| 2013.09.15| 11페이지| 5,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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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코 감시와 처벌 감상문
    푸코의 을 읽고들어가며..사실, 에로스 서평을 쓰게 되면서 감시와 처벌을 선택한 이유는 푸코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현대사회학 이론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서 내가 느꼇던 바는 ‘난해함’이었다. 푸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눈에 들어오기 위하여 우선 글 자체가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글 자체가 난해하게 적혀있고, 읽는 내내 이게 번역을 잘 못한 것인지 아니면 원문 자체가 이렇게 어렵게 쓰여진 것인지 하는 생각만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계속해서 읽자 어느정도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감을 잡을 정도는 된 것 같다.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져 각각 신체형, 처벌, 규율, 감옥에 대하여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이책은 감시와 처벌이라는 것이 어떠한 과정에서 권력과 연결되고, 또한 그 권력이 다시 감시와 처벌에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일면이 아닌, 그 뒤에 존재하는 이면적인 것을 파악하게 하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나는 각각의 부에 대하여 간략하게 그것을 요약하고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적는 방식으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대하여 써 내려가고자 한다.1.신체형1부에서는 형벌제도가 왜 변해왔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1장 수형자의 신체에서, 사지를 찢고, 고문을 하며 죄인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전하였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그 고통이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말한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과거에는 형벌장면이 공개되어 처벌은 축제처럼 이루어 져 있었으면 이렇게 대중들에게 직접 공개됨으로써 그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었고, 선고자와 집행자가 일치하고 처벌 그 자체를 위한 처벌로서 육체적, 신체적 괴로움을 부과하는 직접적인 고통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점차 비공개적이고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법의 분리로 인하여 집행자와 선고자가 분리되어 있으며 그 목적이 처벌 그 자체가 아니라 처벌을 통한 교정과 감화를 목적으로 하에는 그러한 것이 ‘왜 걸려서 혼이 났을까’ 라고 자책하기도 한 것이다. 인고의 시간을 겪는다는 면에서 이러한 나에대한 체벌의 변화 또한 과거 유럽에서 행해진 형벌의 변화와 어느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내가 겪은 것처럼,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처벌을 가하는 이들은 그림자를 처벌하면서 죄인의 행동을 교정하고 감화하고 치료하려고 한다. 이는 처벌이 단순히 범죄에 대한 대가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결과물로서 인간의 권력과 연관 지어져있다는 것이다. 즉 형벌이 명백한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권력이 요구하는 어떠한 것과 연관되어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권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신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신체와 정신의 관련성을 직관하여 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장에서는 신체형의 호화로움을 다루고 있다. 신체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고통의 필요성, 고통을 만들어 낼때의 규칙성, 그리고 의식의 구성이다. 이러한 규칙은 사법관에 의하여 구체화 되어졌고, 벌칙이 내려질때에 신체형은 화려함을 지닌다. 신체형을 감당하는 이의 몸은 군주의 힘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고, 신체형으로 군주의 우월성과 대중에게 공포심을 부여하는 작용을 의도하였다. 신체형으로서 군주의 위대함이 표현되고 사람들의 두려움이 증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사실상 카니발의 성격을 지닐때도 있었고 군주들은 위험을 인지하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죄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대중들을 선동하였고, 죄인들을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범죄 그자체에도 이어져 민중들은 범죄자들을 법과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자로서 카니발의 주체로서 받아들였고, 신체형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사법관의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사형을 시킬수 없었던 것과 이어져) 대단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군주가 희롱의 대상이되며 죄인은 영웅시 되어 처형의 의식이 하나의 축제화 된 것이다.물론 이러한 푸코의 예처럼 주체와 객체의 아닌 재산이 되면서 농민, 소작인 들은 주요피해자가 되었고 부르주아지의 소유권이 문제될 경우에는 그 위법행위는 ‘묵인되지 않은’ 위법행위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위법행위는 처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기존의 권리와 관련된 위법행위와 새로히 대두된 재산의 위법행위는 분리되었고, 위법행위에 따른 징벌이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일면과 함께, 군주의 권력과 민중의 위법행위의 연관성에 의하여 그것에 대한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는 처벌 제도의 규칙과 함께, 새로운 범죄입법이 형벌을 완화하고 처벌하는 권력에 대한 합의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입법의 기초에는 위법행위의 대상 변화와 권력과 민중의 연관성이 존재하고, 이러한 형벌제도느 모든 위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법행위를 차이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기 위한 장치로서 고안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또한 형벌은 범죄가 아닌 그것이 재발할 수 있는 반복성과 관련해서 측정되어야 하기에 앞으로 있게 될 무질서를 금지할 목적으로 제작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것은 징벌적 성격이 강했던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이는 ‘본보기’로서 구체화 된다. 그러나 과거의 징벌이 범죄에 대한 응답이었으면, 이제는 본보기가 범죄를 방지하는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처벌은 6가지 주된 법칙에 근거하여 개혁되었는데, 분량의 최소화 법칙, 관념성 충족의 법칙, 측면적 효과의 법칙, 완벽한 확실성의 법칙, 보편적인 진실의 법칙, 최상의 특성화 법칙이다.이제는 제재가 아닌 장애가 형벌의 새로운 코드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동 이전에는 몇가지 조건이 존재해야하는데, 비자의적, 여러힘들의 역학관계와 관련, 형벌의 조정과 배분의 효용성, 범죄자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이야기, 형벌이 시민 교육의 학습이 장이 되어야 하며,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찬양대신 법을 상기시키고 범죄를 억제시키는 처벌을 정당화 해야한다.사실 감금이라는 형벌은 징벌의 본질적인 형태가 아니었으나 어느순간 징벌을 대표하는 형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니즘으로 우리의 사회가 (학교, 병원, 군대) 구성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권력의 교묘하고 은폐된 힘에 의해 휘둘리는 꼭두각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하게 만든다.3. 규율규율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은 순종적인 신체이다. 과거의 신체는 권력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구하였으나 이제 신체는 교정과 복종, 순응하게 만들어 다양하게 변화 시킬 수 있는 순종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어 복종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규율은 여러 가지 작전과 훈련으로 인하여 신체의 힘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힘을 억제 시킨다. 신체의 소질을 개발하여 능력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에너지와 그것으로 인한 위력을 역전시켜 복종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복종하도록 강요할수록 신체의 유용성이 떨어졌던 규율이 강조되었던 반면 17~18세기에는 규율은 신체의 구속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신체의 능력을 높이게 되었다. 이는 경제적 관계에서 유용성과 정치적, 권력적 관계에서의 순종 복종을 유도하는 것과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러한 규율은 폐쇄적이고 장소가 특화된 곳에서 작동하며, 공간을 재구성하여 감시와 통제를 완성하며, 규율 중심의 공간을 체계화 하기위해 노력하며, 독방, 자리, 서열등을 조직화 함으로써 서열과 관계망 속에서 신체를 조작한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푸코는 수도원, 학교, 가정, 작업장, 병원 등에서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활동의 통제로 볼수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규율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초등학생 때 부터였지만 이제는 유치원, 어린이집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규율과 법칙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체제를 내면화 하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당황하게 된다. 우리를 교활하게 조정하고 그것에 순응하게 만드는 권력이 일차적으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로 말하여 시험은 위계질서적인 감시와 구체화된 상벌제도에 대한 것이 결합되어 규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맡게 된 것이다.우리는 시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12년의 기간동안 한번의 시험을 치기 위하여 계속해서 시험을 치며 준비를 하고, 이를 치고 나서도 더 좋은 직장을 얻기위해 계속해서 다른 시험들을 준비해 나간다. 이렇듯 우리는 시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살고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시험에 전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아마도 산에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권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훈육당하고 규율을 내면화 하면서 삶을 구성해 나간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시험의 시대 때문이다. 사회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위계질서의 시선을 던진다. 부모님께 친구이야기를 하면 가장 먼저 들려오는 대답이 그 친구는 반에서 몇등하니 이며,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조차 대학과 직장의 위계질서가 만연하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전반은 시험이라는 것에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묵인한다. 사실 수학과 국어를 못할수도 있으나 그림을 잘그리거나 노래를 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은 그러한 것 보다는 위계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구역화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시험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세뇌시킨다. 위계질서의 시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지금껏 구축해놓은 권력의 기술을 버리고 새로운 권력의 작동방식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푸코는 또한 벤담의 일망감시시설인 판옵티콘에 대하여 설명한다. 감금된 자가 판옵티콘의 중앙탑에서 언제나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권력을 가시화 한다. 그러나 동시에 봄과 보임을 분리하면서 권력의 은밀성 또한 만드는데, 중앙의 탑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알지만 그 중앙탑의 감시인은 결코 감금된 자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감시를 매우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규율 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존재한.
    독후감/창작| 2013.09.15| 9페이지| 5,0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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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조류에서 각 이론가들 요약 정리 반박 평가
    현대사회학이론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조류에서Mead에서 Blumer, 그리고 Goffman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상호작용론1.서론1.1 Mead와 Blumer, Goffman의 이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2.본론2.1 Mead의 대표적 사상2.2 Blumer의 대표적 사상2.3 Goffman의 대표적 사상2.4 Mead와 Blumer, Goffman의 비교를 통한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의의3.결론3.1 세 이론가들의 이론을 비교한 의의1. 서론(1.1) 우리 사회의 형성과 흐름 그리고 그 내적인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이론은 지금껏 계속해서 등장해 왔으며, 그러한 이론은 또한 계속해서 정리되고 수정되어 발전해 왔다. 나는 그러한 흐름중의 하나인 “상징적 교섭론”에 대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한다.“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커다란 논제는 “사회는 사람들의 ‘상징’의 사용으로서 나타나는 유의미한 의사소통과정에서 서로의 행위수행의 지속적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구조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Mead는 자아가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화의 과정에서 자아가 형성되어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논지를 밝혔으며, Blumer는 행위자는 자아를 지닌다는 Mead의 개념을 받아들여 “대상”을 자기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에게 지시하게 만든다는 입장을 지녀 “대상”과 “자기 행동”의 조화로 사회적 상호작용, 즉 교섭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Goffman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독특한 이론 전개 방식인 “연극론적 분석”을 통하여 사회는 사회라는 “무대”위에서 자신과 타인의 행동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아를 바탕으로 “인상”을 표현할 수 있는 “공연”을 수행하고 또한 그것을 관람하면서 마치 연극을 “연기”하듯 행위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는 큰 관점 하에서 이론적 전개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이들의 관심은 사회가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에서 이루어지고 작동한다는 공통된 논지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나는 상호주의론의구를 예로 든 자아형성 과정)을 전제로하는데 유의미한 의사소통과정 속에서 다른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이러한 의사소통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사소통에 사용 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이 심지어 쓰레기, 또는 벌레 등과 같이 우리가 그것을 상징이라고 쉽사리 생각하지 않는 것들이라 하여도) 상징이 될 수 있다. 다만 그중에서 가장 유의미한 상징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점에서는 부정 할 수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우리는 앞서 상징의 중요성을 살펴 보았다. Mead의 [정신,자아 그리고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이러한 유의미한 언어를 사용하여 상호간에 협조를 통하여 우리 사회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을 취득하기 위한 능력이 있는데 과연 이러한 능력은 어떠한 것이고 어떻게 이루어 지는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 당연히 가져야 될 것이다. 먼저 이러한 상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무엇일까? Mead는 그것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첫 번째는 공통적 의미를 지닌 관례적인 제스쳐를 사용하고 해석,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러한 제스쳐를 자각하고 해석함으로써 “타인의 행동”을 해보고 그러한 행동을 역할로서 취득할 수 있는 역할 취득의 능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례적 제스쳐들을 읽고 그것들을 해석함으로서 다른사람들에 대한 적응을 쉽게 해 주는 행위의 대안적 노선으로서 여러 가지 행동대안을 상상적으로 시연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은 어떻게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인가? Mead는 그것이 바로 “자아”의 형성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아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속에서 형성되며,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수 있게 되면서부터 형성되는데 이러한 것들을 유년기에 점차적으로 발전시킴으로서 자아가 발전한다. Mead는 자아발전에 여러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았고 각각의 단계들을 거쳐서 개인의 자아상이 변화하고 자신의 자아개념을 완성시켜 나가게 된다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된 타자를 감당할 수있게되면 개인이 한 공동체에 대한 전반적 전망 혹은 여러 상호작용 영역에서 신념,가치,규범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이러한 능력을 통하여 Mead는 사회속에서 개인들이 조직화되고 유영화된 상호작용을 하고 이러한 상호작용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능력의 부재는 곧 행위조정의 능력의 부정이고 그것은 곧 사회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Mead는 사회를 정신과 자아와 연결하여 이러한 개념들의 끊임없는 연결속에서 계속해서 변해간다는 입장을 지었으며 개인과 사회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2.2)앞서 이야기 Mead가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큰 틀을 마련하였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lumer였다. Blumer는 앞서 확립된 틀에 “대상”의 개념을 추가하여 이를 나와 나들의 상호적 자아들의 연관으로서 상징적 상호작용이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다른 의미들을 설명하기 행위자들이 본래의 “대상”에 내재해 있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에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여 상호작용이 일어 난다고 보았다.가장 먼저 정의할 것은 “Mead”의 이론을 도입하여 행위자의 “자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자아를 바탕으로 상호간에 교섭이 일어나고 이러한 교섭을 통하여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아”를 통하여 자기자신과 자기지시를 통하여 대상 사물을 자신에게 지시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대상”과의 상호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조정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정과 결정에는 대상이 해야할 것, 그다음에 내가 해야할 것, 이 두가지가 일어나면서 생기는 연합적인 행동의 조합으로서 작동하여 이것이 바로 사회적 교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교섭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게 작동하고 인간들의 행동을 형성하는 그 과정으로서의 의의가 존재한다. 쉽게 말하여 인간이 외부의 대상에게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근“의미”가 사회적 교섭속에서 정의된다고 할 때, 이러한 의미가 그냥 실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해석”한 뒤에 “적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무에게 수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나무의 “의미”들은 각 사람들의 상호작용과 그 당시의 환경하에서 그 의미들 중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여 “적용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식물학자가 나무를 받아들이는 것과 나무꾼이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목수가 받아들이는 것 등이 다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다.대다수의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흐름을 따르는 학자들의 이론에는 벗어 날 수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사회의 “실재”와 “명목” 사이의 갈등이다. Blumer는 앞서 이야기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행동의 과정, 상징, 의미 등과 같은 논제를 통하여 “해석”을 이끌어 낸다. 이는 바로 인간 행위자의 “능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지로 인간 행위자의 “능력”을 사용하여 그는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 Blumer는 이러한 “대상”에 대한 인간 행위자의 탐구를 통하여 사회가 이루어지는 다른 말로 하여 사회란 것은 사회를 명목론적 인지론에 입각하여 바라본다.Blumer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쫓아 나가면서 이러한 이론 전개를 위하여 기존의 연구방법과 같은 것에 일어나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자연과학 연구에서와 같이 실험실 또는 연구도구등에 의해서만 신뢰성있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기본적 생각들을 지양하고 경험과학의 중요성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학의 올바른 모습을 위하여 탐색과 정밀조사의 방법으로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어진 경험 세계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탐구해야만 하며, 기존의 과학적인 형식만을 맹신하는 것을 지양해야한다. 과학적 연구방법이 그 연구에 대한 경험적인 타당성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블러무넌 항상 생활영역에 가까워져게 어떤 인상을 보이고 있는가라는 개인의 사회적 접근을 인상관리로서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페르소나”라는 것이 등장한다. 언어적인 의미로는 이것은 연극배우의 가면이지만 사회라는 무대위에서의 공연자인 우리들에게 “페르소나”는 이성적과 의지를 지닌 연극 배우인 인간 person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연극배우들은 사회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연극이라는 형태로 서로 상호작용하게 된다.그렇다면 과연 왜 우리는 연극과 공연이라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가?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연기나 연극이 아닌 자신의 “본질”로서 행동을 행하면 안되는 것인가? 모든 상징적 상호작용 이론의 맹점인, 아니 사회이론의 맹점으로서의 가정을 해보자. “무인도에 나혼자 떨어져서 살아간다면, 과연 사회이론이 성립할 것인가?” 이처럼 사회가 구성되지 않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는 어떤 연극이나 연기등으로서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 내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사회에서 지위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다시말하여 다른사람들이 나에게 그 지위에 해당하는 연극배우의 역을, 그리고 그 배우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목적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안정화 하기 위하여 청중들을 위하여 연기를 수행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본질적 자아와는 다른 목적적 자아를 청중에게 전달하여 청중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정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Goffman은 이것을 타인이 우리에게 가지는 인상을 내가 “만들도록” 하게하는 인상관리라는 말로써 표현하였다.Goffman은 또한 “Front”와 “Back stage”라는 것을 통하여 공연의 수행을 조금더 보충하였다. 전면이란 무대 전면에서 일어나는 연기는 훨씬 고정적이고도 일반화된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은 상황을 정의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물론 상황정의를 잘 내릴 수 있게 잘 짜여진 공연의 형태로서 나타난 이러한 전면의 개념은 (그것이 “공연”의 상호교다.
    사회과학| 2013.09.15| 8페이지| 5,000원| 조회(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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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몬스터를 읽고
    몬스터를 읽고 그 것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살펴보기몬스터를 읽어보면 하나의 심리서스펜스 영화를 본 것처럼 생각 할 거리가 많아진다. 표면상에 보이는 “덴마라는 의사가 살린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기에 덴마가 그를 추적한다.” 라는 하나의 흐름속에 우리는 각각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몬스터의 이야기 속 몇가지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써내려 가려고 한다.내가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511 킨더하임이라는 고아원이다. 작품속 장소인 이 곳에서는 사람들에게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학교’로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엘리트가 아닌 사람의 감정을 거세하고, 그로인해 감정으로부터 초월 한 인물, 즉 언제나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하는 인물을 만들기 위한 장소이다. Bandura의 아이들의 폭력 모방실험이나 미드의 초기 사회와나 프로이드의 인간 성장 단계와 같이 여러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인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우리 인생 중 “초기”에 이루어지는 사회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한마디로 이러한 어렸을 적에 이루어 진 감정의 파편이 우리의 몸에 체화되어 사회화 되기도 하고, 또는 무의식의 파편으로 남아 우리의 행동에 대한 ‘보이지 않는 근원’이 되어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품속 고아원에서 행해졌던 행위들이 주인공 격이 요한 뿐만이 아니라 킨더하임이라는 고아원에 있었던 다른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고아원에서의 교육들이, 즉 어린시절의 영향이 우리의 전반적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 쉽게 단정짓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요인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작품속, 이러한 킨더하임이라는 고아원에서 자란 인물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당연 ‘초인 슈타이너’, 즉 그리머와 극의 전체를 관통하는 ‘로베르토’ 였다. 그리머라는 인물은 로베르토라는 인물과 극히 대조된다. 고아원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그들의 교육만을 내화 시키며 자란 그리머에게 남은 어린시절 기억은 ‘초인 슈타이너’라는 히어로물 이었다. 이 ‘초인 슈타이너’는 약한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면 초인이 문제를 해결시켜준다라는 이야기 인데 사실 그 초인은 약한 주인공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아원에서의 힘든 상황과, 자기 자신을 잊어가는 상황 그리고 그 곳에서의 자기를 구해줄 영웅적 존재를 갈망하면서 자기를 ‘초인 슈타이너’와 동일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분노나 위험에 처하면 기억을 잃고 폭력을 행하는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로베르토라는 인물또한 폭력과 살인으로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 또한 킨더하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었는데,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던 그에게 ‘코코아’라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준 ‘요한’에게 감명받아 그를 위하여 폭력과 살인을 행하게 된다. 이 둘의 과거는 동일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그리머는 자기 자신을 찾아 가며 ‘대자적 자아’로서 자신을 확립 해 나간다. 그리하여 결국 그 자신이 말했던 ‘킨더하임의 아이들에게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애정을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말에 반하듯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대자적 자아’를 확립하지 못하고 ‘즉자적 자아’로서 요한의 의도대로 자기자신을 사물화 시켜 나간다. 오직 자기의 과거를 찾아준 그를 위하여 말이다.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작품속에서 ‘이름’으로 나타나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잘 나타내는 극중 동화 인 ‘이름없는 괴물’이 있다.[옛날 옛적 어느 곳에 이름 없는 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괴물은 이름이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괴물은 여행을 떠나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중략...[이름을 찾았어, 멋진 이름이라구] 서쪽으로 갔던 괴물은 말했습니다.[이름같은 건 필요없어. 이름따윈 없어도 행복해. 우리는 이름없는 괴물이니까.] 사내아이는 서쪽으로 갔던 괴물을 먹어버렸습니다. 모처럼 이름이 생겼는데 아무도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요한, 멋진 이름이었는데.]이 이름없는 괴물이라는 동화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킨더하임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잃는’ 교육을 받게 되며 인성을 개조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잃은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그것이 진정한 나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요한의 말에 감명받고 그를 추종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조명해야 할 것은 요한 또한 ‘자기 자신을 잃은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잃은 존재가 다른 이들의 존재 가치, 즉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이 조금 어불성설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에 유혹당하고 넘어간다. 바로 에릭슨의 말처럼 “자신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하는 이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잣대 없이 흔들리는 부표같은 삶을 사는 이들은 하나의 단어에도 흔들리기 마련다.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정체성의 형성과 교육으로서 사람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행동하고 성격을 형성해 나간다. 작품속에서 나오는 대사중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란건 뭐든지 될 수 있거든..” 이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한마디의 말로서 나타내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또한 작품 속에서 나오는 “평화의 신”이라는 동화에서 평화의 신이 거울을 들여다 보자 거기에는 ‘악마’가 있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너는 나, 나는 너”라는 말로서 계속하여 강조된 요한과 안나라는 쌍둥이의 두가지 상반된 행보를 밝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둘은 쌍둥이이며, 같은 경험을 공유하였고,(그것이 직접된 경험이 아니라 서로간의 대화라는 간접된 경험이었을지라도 앨리자배스 로프터트의 디즈니 랜드 실험에서처럼 인위적 기억의 주입이 가능하기에) 비슷한 환경하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나는 평화의 신으로, 하나는 괴물, 즉 몬스터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품중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쌍둥이의 엄마가 아이들중 하나를 킨더하임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그녀는 어느 한 아이를 선택하여 보내게 된다. 이러한 비슷한 경험속에서 한 아이는 “자신이 보내지지 않았다.”라는 생각과 “자신이 보내지게 되었다.”라는 마음을 무의식속에 내면화 하여 그것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방향이 되지 않았을까?
    독후감/창작| 2013.09.15| 2페이지| 1,500원| 조회(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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