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사 레포트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보고 와서나는 평소 순수예술이나 시각, 산업 디자인에 대해선 관심이 있었지만, 건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5월 19일 DDP 전시회에 갔을 때 역시 건축물 보다는 디자인 제품에 대한 기대를 하고 방문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주 월요일 DDP건물이 휴관을 했다.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땐 꽤나 맥빠졌었지만, 그날 휴관을 했기 때문에 독특한 형태를 지닌 건물을 집중해서 구경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건물은 디자인 플라자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매끈한 질감의 건축물은 마치 우주선 느낌이 났고, 주변을 콘크리트 느낌이 나는 기둥들이 받치고 있었다. 주변부에 특별한 표식이 없고 상당히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나같은 길치는 길을 찾는데 상당히 무리를 느꼈다. 그러한 복잡한 느낌은 내부에서 더욱 더 심해졌었는데, 마트 등에서 사람들에 상품을 팔기 위해 내부 구조를 길을 잃기 쉬운 형태로 디자인 한다는 것 처럼 디자인 된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복잡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판 등도 없고 길을 잃기 딱 쉽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또한 보이게 아름다운 디자인만을 고려한 모양인지 엘레베이터를 탔을 때, ·▲▼버튼이 지나치게 위에 위치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등 편리함이 지나치게 모자란 감이 들어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복잡한 디자인 플라자 안에서도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구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뒷면의 사진에 나온 장소이다.지나치게 넓은, 삭막한 회색빛의 노출콘크리트 양식에 마치 새의 둥지를 연상시키는 상단의 장식물이 만나니 그토록 사랑스러운 느낌을 풍길 수 가 없었다. 마치 어린시절, 콘트리트 다리 밑을 지나가면서 보았던 새의 둥지 같은 느낌이랄까. 공간의 중간에 놓여진 식물, 나무 벤치 따위의 자연적인 요소가 추억을 연상시키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또 한가지 마음에 들었던 점은 사진의 한 가운데에 놓여진 계단 이었다. 페인트칠이라도 해 둔 벽면과 달리 완벽하게 콘크리트를 노출한데다가, 이음새까지 드러낸 계단은 위 층으로 올라가는 도구라는 쓰임새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상층이 되어 건물 내부 전체를 훑어볼 수 있는 마치 고정된 관람차와 같은 역할을 했다. 콘트리트 아래는 아늑한 느낌을 풍겼다.
디자인사 기말 레포트강의명: 디자인사디자인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로의 디자인은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디자인이라고 하면 물건을 팔기 위해 제품 등을 실체화 한다는 것을 생각했지만, 거래가 형성되고 문명이 태어나기 전에도, 옛 인류의 조상들이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든 것과 같은 행위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디자인이 존재해왔음을 알게 되었다.디자인의 역사 연구는 그 시기가 길지 않다. 70년대 이전, 니콜라스 펩스너가 건축적으로 디자인의 역사를 연구했으며, 밴 패터비가 「디자인의 역사」책을 편찬함으로서 스타일 변화가 이루어졌다. 미사루는 디자인의 개념을 변화시켰고, 베일리는 디자인사를 서사적으로 나열했다.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로부터의 디자인은 대량생산에 적합한 효율적 미술 양식에서 당대의 모더니즘이 형성되어, 산업에 어떻게 이용될 것인가의 판매 증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 시기 필립 B 맥스는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책을 편찬하여 디자인을 삶을 위한 도구로 정의 내리고 기술과 스타일의 변화를 중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디자인의 역사를 고대의 문명으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이는 디자인사의 큰 전환점으로 인간에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후 90년대 부터는 다양한 학자들이 디자인사와 관련된 책을 편찬하였으며, 디자인의 목적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다각도로 탐구하였다.디자인 역사 연구의 특징은 실무 중심적이라 그 이론과 사상이 타 역사학보다 떨어지는 감이 있다. 또한 기록과 유물(제품 도면)의 연구를 변행하며, 정치·사회·경제·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들을 이해·바탕으로 하여 위문의 디자인적 특징을 분석한다. 이러한 디자인의 역사는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로 인간적이고 공예적인 디자인에서 기계적이고 산업적인 측면으로 변화하며, 미적 감성(미학)보다도 유행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또한 인간 공학, 재료 공학 등 과학의 발달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방식에 주목 하는 것 또한 디자인 역사 연구의 특징이다.이러한 디자인의 탄생은 인간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BC350만년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들이 탄생했고, BC200년전 도구를 사용하면서 디자인이 태어났다. BC25000년 경에 여인을 재현하고 재의의 의미로 풍요를 기원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이 조각되어다. 또한 BC15000년부터 동굴 벽화가 그려졌었고, BC8000년부터 문명이 탄생되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도시의 개념과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겼고,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간은 지식을 축적 할 수 있게 되었다. 종이의 탄생은 인간에게 지식을 전파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탑문이 돈과 노력과 시간을 많이 소비하였기 때문에 보편화 되기 힘들었다. 또한 두루마리에서 책으로 넘어오면서도 인류는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두루마리가 기승전결로 연결되면서 반복이 힘든 반면, 책의 경우는 앞 뒤가 확인 가능해지면서 인간의 논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활자의 탄생은 글을 보편화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동양에서 사용하는 한문은 그 글자의 수가 많아 활자를 만들기가 어려워 글의 보급이 적었지만, 서양의 알파벳의 경우 활판을 만들기가 쉬웠기 때문에 보편화되기 쉬웠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디자인은 과거부터 단순히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까지도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인간의 문명이 발달한 이후, 다양한 사조의 예술 운동이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역사의 가장 큰 획을 그은 산업혁명 이후, 기계적이고 공업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미술공예운동 시기에 대해 내 생각을 써 보려고 한다.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예술과 디자인이 인간중심적이거나 공예적인 요소가 강했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디자인은 산업적이고 기계적인 측면이 강해졌다. 증기기관과 방적기가 발명되고, 수공업 생산에서 기계적 대량생산과 분업화가 이루어지는 산업화가 도래함에 따라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본격적으로 촉진되던 사회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의 전유물 이였던 예술이 물건의 소비를 위해 디자인의 형태로 일상생활에 침투하였다.이 시기에 미술공예운동이 탄생하였는데, 19세기 후반 산업사회의 삭막함에 반기를 든 이들은 미술·공예·건축 등을 통해 사회를 정신적으로 보다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였다.(미술공예운동시기의 도자기->)따라서 작품을 디자인 할 때 자연적인 것에서 모티브를 얻었는데, 형태와 모양은 단순했고, 식물의 줄기에서 보이는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를 응용하여 제작되었다. 그들은 예술가들의 창작성과 손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는데, 즉 기계의 대량생산이 인간의 유기적인 공동체성을 파괴했다고 생각해며, 공동체성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기계가 아닌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토피아로서의 디자인을 추구했다.미술공예운동 사상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인 사회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존 러스킨은 건축에 있어서 장식은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의 감성과 노동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 의 창작성을 중요시 했는데, 당시 산업 생산품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형태였기 때문에, 예술가들과 수공업자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물건의 가치를 하락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디자인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반영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연적인 형태와 재료가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식물의 줄기에서 보이는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를 응용하여 제작된 문양들. )당시의 제품들은 기계의 속이 모두 보여서 미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대량생산을 위해 다양한 디자인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수많은 수공업자와 예술가들이 그 일자리를 잃고, 부르주아는 점점 더 부유하게 되는 반면, 서민들은 그들의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노동자로서 밖에 존재 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산업사회에 반한 미술공예운동가들은 중세시대의 성당 건축과 마찬가지로 건축가, 디자이너, 공예가가 결합하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건까지도 예술가의 손으로 만들어 보다 공동체적이며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산업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인 사고에 기반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노동이 없는 물건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본가인 부르주아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이념에 걸 맞는 조직 형태는 중세의 건축가와 공예가, 미술가들의 조직인 길드를 모델로 삼았다. 길드는 중세의 장인 조직으로 하나의 건축물을 건축하고 장식하기 위해 건축가, 공예가, 미술가가 서로를 도와 통일된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미술공예운동기들은 이러한 길드를 모델로 하여 자신들의 조직을 건설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존 러스킨의 세인트 조지 길드가 있다. 세인트 조지 길드의 구성원은 공동 작업와 그에 따른 이윤을 공동 분배하였으며 노동과 생활의 통합화를 추구하였다. 예를 들면 구성원은 그들의 수입 중 10분의 1을 공동체를 위해 헌납하여 그 돈은 토지을 구입하는 것에 사용되었는데,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여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사회주의 사상을 길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다.(세인트 조지 길드 홀의 사진)일상생활에서 예술의 혼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의 작품들은 과거 예술이 귀족이나 종교에 복무하였던 한계를 넘어서 일상생활로 침투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근대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점차 대두되는 기계화를 거부하려 하였기 때문에 반근 대화 운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그들은 디자인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였지만,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의 연합과 실천에만 그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제품들은 기계로 대량생산된 것보다 값이 훨씬 비쌌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 물건을 구입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들은 과거 중세의 양식을 완벽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과거의 양식들을 모방하거나 절충하는 것에 그쳤다.결국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20세기부터는 디자인이 철저히 자본주의 체계에 예속되었고, 그에 따라 결국 미술공예운동의 이념이 상실되고 디자인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건을 외관상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것에 국한 되었다. 끝내 그들이 추구하는 수공예적인 제품은 어쩔 수 없이 고가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용 할 수 없는 부유층을 위한 디자인으로 밖에 남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