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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해제
    『高麗史』목 차1. 머리말2. 『고려사』의 편찬1) 편찬 과정2) 편찬 의도3. 『고려사』의 체재1) 서술 방식2) 내용과 구성4. 간행과 유통1) 간행과 보급2) 유통5. 『고려사』의 평가 문제1) 역사관2) 객관성6. 맺음말1. 머리말『고려사(高麗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2대 정사(正史)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가 고려 중기 귀족의 삼국시대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준 것이라고 한다면, 『고려사』는 조선 초기 사대부의 전(前) 왕조 고려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 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서(史書)는 그 책을 편찬한 주체에 따라 관찬사서(官撰史書)와 사찬사서(私撰史書)로 나누어진다. 관찬사서란 왕의 명(命)에 의하여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된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사적인 동기에 의해 개인이 쓴 사찬사서에 비해 분명한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관찬사서는 체재가 전형적인 역사 서술법을 따른다. 따라서 체재적인 면에서의 균형이 중시된다. 이는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관찬사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사서의 내용에 국가적인 목적이나 통치자의 목적이 작용하기 쉽다. 역사의 서술이 창의적인 해석을 내리는 것이 아닌, 원전(原典)을 줄이거나 추가하는 정도에 그치는 전근대의 동양적인 역사서술에 있어서 그 목적은 주로 역사적인 사건에 붙인 논찬(論撰) 또는 사평(史評)이라는 찬자(撰者)의 견해서술이 나타나고 있다.조선 왕조가 개창된 이래로 100년 후인 성종(成宗)대에 이르러서는 그 통치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세종(世宗)·세조(世祖)·성종대에 걸친 문화의 발달로 인해 관찬의 문화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시대에 편찬된 사서는 대부분이 관찬사서라는 특징을 가진다. 『고려국사(高麗國史)』,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사략(東國史略)』,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관찬사서를 비롯하여 박상(朴祥)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이나 정하였고, 4월 6일에는 우왕과 창왕의 처리문제를 논의하여 열전에 편입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고려사』는 개수 작업을 시작한지 2년 7개월 만에 총 139권의 규모로 완성되었다. 문종이 지적했듯이 다른 시기의 개수 작업에 비하면 짧은 기간 안에 이를 완성한 셈이다. 더욱이 정도전의 『고려국사』가 37권 규모였던 데 비하면 양적으로도 4배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이를 2년 동안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원이 수사관(修史官)으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편찬 당시 수사관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희생되어 그 명단에서 빠진 김종서를 포함하여 정인지 등 모두 33명이나 되었다. 『고려사』는 수사관들이 그 내용을 분담하여 편찬하였다. 세가·지·연표는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양성지·이예(李芮)·윤기견(尹起?)·윤자운(尹子雲) 등이, 열전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 등이 분담하여 찬술하였으며, 김종서·정인지·허후(許?)·김조(金?)·이선제·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은 이를 산삭(刪削)·윤색(潤色)하였다.이처럼 『고려사』가 완성되기까지에는 몇 차례에 걸쳐 개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태조 4년 정도전·정총의 『고려국사』가 편찬된 후, 태종 14년 5월 하륜·남좌(南在)·이숙번(李叔蕃)·卞季良 등에 의해 개찬작업이 시작되었다. 세종 원년부터 3년까지는 유관·변계량이, 세종 5년부터 6년까지는 유관·윤회에 의해 개찬작업이 진행되어 『수교고려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세종 13년경부터 권제·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 등이 개찬작업을 담당하여 세종 24년 『고려사전문』이 완성되었으나 반포되지 못했고, 마침내 문종 원년에 현재 전하고 있는 기전체 『고려사』가 빛을 보게 되었다. 이같이 『고려사』가 완성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편찬체재의 변화는 물론 소략했던 내용이 보충되고, 인물평가 문제 등 오류가 어느 정도 시정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ⅱ. 고려의 제도와 법규는 사서에 대부분 누락되거나 생략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와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 및 여러 사람의 잡록(雜錄)에 나오는 기록을 뽑아 각지(志)를 작성했다.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고려사』 지가 『원사』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 언급했듯이 『고려사』 지의 범례 자체도 본기, 지, 표, 열전, 논찬의 구성을 지닌 「찬수원사범례」를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ⅱ에서는 『고금상정례(古今祥定禮)』와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 및 여러 잡록을 이용하여 작성한다고 하였는데 『고금상정례』는 고려 예종 때 禮儀에 관한 내용을 편찬한 상정고금예문을 뜻하며, 식목편수록은 법식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이들 책이 여러 잡록들과 함께 지를 작성하는 데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③ 표「찬수고려사범례」에서 『고려사』 표에 대한 편찬원칙을역대의 사서의 연표를 상고해보면 어떤 것은 상세하고 어떤 것은 간략하다. 이제 『고려사』 표(表)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三國史)』를 기준으로 삼아 연표(年表)만을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의 표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아 연표만 만든다고 하여, 이에 따라 『고려사』 표는 연표만으로 간소화한 것이다. 실제로 『고려사』의 표를 보더라도 삼국사기의 연표와 양식이 동일하다.④ 열전「찬수고려사범례」를 통해서 열전은 2가지로 파악하여 볼 수 있다.ⅰ. 먼저 후비(后妃), 다음은 종실(宗室), 다음은 제신(諸臣)으로 하고 반역(叛逆)을 끝으로 하였으며, 공적이 뛰어난 자는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따로 열전(列傳)을 세우고 나머지는 각기 유형별로 첨부했다.ⅱ. 신우(辛禑) 부자는 반역자 신돈(辛旽)의 서자(庶子)로서 왕위를 16년 동안 도둑질했으니, 여기서는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을 기준으로 강등해 열전(列傳)에 기록함으로서 역적을 물리친다는 뜻을 뚜렷이 했다.ⅰ의 내용은 열전의 구성과 입전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며, ⅱ의 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고려는 무신정권기 이후 폐행, 간신, 반역이 많이 배출되어 나라가 쇠망해 졌다.’ 라고 하는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편찬자들은 열전을 가장 중시했고 여기에 힘을 기울였다.열전임에도 불구하고 후비, 종실, 공주 등 왕실관계 인물이 50권중에서 5권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매우 크며, 둘째로 역신, 반역, 충의전이 13권으로 차지한다. 또한 공신전이라는 항목을 따로 개설치 아니했다. 이는 신료들에 대한 기술은 가능한 축소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역대 중국 정사에서 본기와 열전의 비율이 1대 6인데 반해 『고려사』는 비율을 1대 1로 두고 있어 신료들에 대한 비율이 중국에 비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열전에서조차 왕권과 관련된 기록을 강화하고 있음으로써『고려사』의 친왕적 성격을 잘 나타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4. 간행과 유통1) 간행과 보급『고려국사』에서부터 『고려사』편찬 작업은 50여년이라는 상당 시간을 소요하였고, 그 편찬과정 또한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그 간행과 반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그 배경에는 본래의 수찬자 대표인 김종서 등이 계유정난으로 숙청당하는 정치적 사건의 발생과 『고려사』내용에 대한 군신 간 입장의 차이 등이 있었다. 현전하는 『고려사』판본은 을해자본(乙亥字本)과 이를 저본으로 한 복각 목판본 두 종류가 있다. 초간본이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려사』의 최초 간행이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을해자본의 간행시기도 막연히 성종 연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복각본의 경우는 내사기(內賜記)를 근거로 광해군 5년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 문종 1년(1451) 8월 25일,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은 총 139권 규모의 기전체 『고려사』가 수찬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아닐까 한다.18세기 이후 『고려사』의 유통은 더욱 확산되어, 그 이해와 활용의 폭도 확대·심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집필하기 이전 『고려사』 전체를 읽어가며 두주(頭註)를 붙이는 형식으로 하여, 이를 바탕으로 『동사강목』을 집필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아언각비(雅言覺非)』, 『상례사전(喪禮四箋)』, 『상의절요(喪儀節要)』, 『강역고(疆域考)』, 『대동수경(大同水經)』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면서 『고려사』에서 관련 기록을 널리 발췌하여 활용하였다. 또한 그의 두 아들에게 『고려사』에 대해 공부하라고 질책할 정도로 폭넓게 활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고려사』는 지식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각종 저작에 활용되고 있었다. 목판본 『고려사』는 근대 활자로 개판되거나 영인본 형태로 보급되기 이전까지 지식인 사회가 공유하는 사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연의 자료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인물의 문집 편찬, 족보와 가계 기록의 확인, 기문이나 시문의 작성, 지리 고증, 상소와 논평 등에서 『고려사』를 인용하고 있었다.5. 『고려사』의 평가 문제1) 역사관『고려사』는 전조사(前朝事)에 대한 조선왕조의 정사(正史)이다. 이는 조선왕조에 의한 공식적인 전조사의 정리로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대고려사관(對高麗史觀)이 표현되어 있다. 『고려사』는 기전체 편찬의 방법에 따라 과(科)를 나누어 일을 맡는 분찬(分纂)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찬 방식에 따라 하나의 집약된 편찬원칙의 설정이 필요하였고 그것이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사』에 나타나는 역사관이란 공식적인 정부기구인 춘추관의 대고려사관이며, 그것은 수사관(修史官)인 조선 초기 유학자들의 집약된 역사의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 편찬자의 역사의식을 살피는 데 고려하여야 할 것은 편찬과정에서 언급하였듯이 먼저 『고려사』가 일시에 된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여러 번의 역사편찬의 경험위에 이룩되었다는 것과
    인문/어학| 2013.10.19| 28페이지| 3,000원| 조회(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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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중국사 시대구분 논쟁
    일본의 중국 중세사 시대구분 논쟁목 차1. 머리말2. 일본의 중국 중세사 시대구분 논쟁1) 경도학파의 입장2) 동경학파의 입장3. 맺음말1. 머리말1945년 太平洋戰爭 敗戰은 일본의 軍國主義·帝國主義에 대한 자국민의 불신과 비판을 낳았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인 페리 제독에 의한 개항 이후로 시작된 明治維新은 일본의 近代化를 이끌었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은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빨리 접어든 국가였고, 자신들 또한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이러한 자부심은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지 확보라는 대외적 확장 정책에 눈뜨게 만들었고 조선과 중국으로 식민지 개척을 나서게 된다. 일본의 이 정책은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앞서 말한 태평양전쟁에서 자신의 근대화 모델이었던 西歐 列强들에게 패전했다. 그 결과로 자신보다 열등한 국가로 생각했던 중국은 승전국이 되어있고, 1949년 중국에서 半封建운동인 社會主義革命이 일어나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연구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은 자만과 독단에 빠진 일본사관에 대한 비판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중국사의 停滯性論을 世界史의 보편적 발전 단계의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서 타파하고자 한 것이다.이렇게 일본의 학자들은 중국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자신들의 식민지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장했던 '중국의 역사적 정체'가 아닌 '중국의 역사적 진보'로 관점이 변화한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를 펼치게 되는 주제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중세사에 해당하는 시기를 언제로 설정할 것인가'이다. 中世란 古代와 近世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시기가 존재하므로, 이 중세의 시기만 설정한다면 3분법에 의한 중국사의 고대·중세·근세의 발전 단계는 자동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東京學派와 京都學派, 이 두 학파가 논의를 펼치게 된다. 경도학파는 나이또오 도라지로오(內藤湖南)와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를 필두로 文化史的 입장에서 시대구분을 하고자했고 동경학파는 가토 시게시(加藤繁)와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외부의 힘이 반작용적으로 내부에 미친 방향, 이 2개의 방향의 상호작용에 착안하여 구상된 것이다. 나이또오 도라지로오는 『支那上古史』에서 '東洋史'를 중국문화의 발전의 역사로 정의한다.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요동하는 움직임을 의미하는 역사의 일반적 경향을 관찰함으로써 의미 있는 시대구분을 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내부로의 움직임은 주어진 시기에 중국 안에서 발전한 문화가 사방으로 확산하는 것이고, 외부로의 움직임은 중국 문화가 그들의 고토에 확산되어 옴으로써, 그들 자신의 가치를 자각한 중국 주변의 야만 종족의 반동적인 힘이 외부로부터 미쳐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의 상호적인 면에서 나이또오는 중국사를 네 시대로 나눈다.①제 1기. 開闢부터 後漢 중엽(기원후 100년경)까지 상고 - 중국 문화가 이 시대 전반에 형성되어 외부로 확산되었고, 후반에는 전 동아시아 세계를 압도한다.②제 1과도기. 후한 후반부터 西晉까지(기원후 100년~307년 무렵) - 중국 문화의 외부적 발전이 정지되었다.③제 2기. 五胡十六國시대에서 당 중엽(기원후 307년~756년 무렵)까지 중세 - 주변 민족 의 힘이 중국의 내부에 영향을 미쳤다.④제 2과도기. 당말부터 五代까지(756년~959년) - 중국에서 외부 세역의 영향이 절정에 이르렀다.⑤제 3기. 근세 전기. - 宋·元시대.⑥제 4기. 근세 후기. - 明·靑시대.그는 중국의 상고 시대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이 시대는 민족의 역사자각의 시기이다. 전설상의 자각과 기록상의 자각이 그것이다. 전설에 대해 자각을 할 때 전설의 편찬을 진행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詩經』이다. 그리고 『史記』와 같은 기록의 편찬이 뒤따른다. 진정으로 순수한 기록에서 역사저작으로 바뀐 것은 『漢書』에서다. 그러므로 후한 중엽이 동양문화사의 변화기이며 곧 중국 상고의 중세로의 이행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후한 시대에는 전한 시대만큼 외국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행사하지 못했지만 주변지역에 대한 문화부에서 받아들인 양자인 것"이라 말한다.경도학파는 송 이후가 근세적이라는 것은 많이 논증하였으나 당 이전 사회가 중세라는 것에 대한 논증은 미약했는데, 지난날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漢代와 南北朝隨唐史를 연구하던 가와찌 쥬우조오(河地重造)와 다니가와 미찌오(谷川道雄)가 미야자키 주장에 동조하여 당 이전을 중세로 보는 논증을 함으로써 경도학파의 목소리는 상당히 커졌다. 그 한 성과로서 이루어진 『中國中世史?究』의 저자들은 중국사의 독자적 발전설을 취하고, 중국사 자체의 발전을 추진한 주체적 요인이 '共同體'에 있다고 보고, 진한고대제국에서 육조귀족사회에의 변이를 '里共同體'로부터 '豪族共同體'에의 변이, 즉 '공동체'의 자기발전으로서 파악하려는 입장을 내세웠다. 『중국중세사연구』는 육조사회를 '호족공동체사회'로서 성격짓고, 이 공동체구성의 원리로서 사대부계급의 정신적 논리성과 그 바탕인 향촌사회의 자율적인 향론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전체에 일관된 공통성이라 할 것이다. 즉 전중국사를 공동체의 자기방전의 역사로서 파악할 것을 시도한 것이다.「중국중세사사연구에 있어서의 입장과 방법」에서 가와가쯔 요시오(川勝義雄)와 다니가와 미찌오는 종전후 일본의 학계동향을 비판하고, 중세사파악을 위한 새로운 시점으로서 '豪族社會共同體論'을 제시하였다. 한때 학계를 지배하였던 세계사발전법칙의 안이한 만용에 대한 반성으로서 나타난 동경대학의 니시지마설(西嶋設)도 중국사의 특수성을 專制主義에서 구하는 한 '전제'라는 개념이 유럽적 시각에서 파악된 것인 이상, 민중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지한 면만 剔出하는 바 되어 새로운 "아시아적 정체론에 그치고 만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중국사자체의 발전을 추진해온 주체적 요인에 주목하여 그것이 내포하는 諸矛盾을 극복하면서 자기발전해온 과정으로서 그 자신의 시대구분을 하여야함을 강조하고 중국사를 움직인 주체적요인은 '공동체'에 있다 하여 '공동체의 자기발전'에 의해 중국사의 발전을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래서 한제국의 기반은 '리공동체'에 구 시대라는 특징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2) 동경학파의 입장마에다의 주장을 시작으로 동경학파는 당말 고대 종말설을 기본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마에다는 「동아시아에서의 고대의 종말」에서 경도학파가 주장하는 중국 중세사 시기 설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위의 논문에서 근대자본주의가 도입될 무렵에 중국·일본·한국의 사회구조가 비슷했으므로 삼국의 역사발전에는 평행성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나이또오의 가설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중세는 중국보다 5·6세기 이상 뒤늦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또오가 당·송 변혁의 특징으로 제시했던 획기적 변화들을 인정했으나 근세가 아닌 중세가 송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마에다는 진·한과 육조·수·당 시대 사이의 질적인 시대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당대까지는 고대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송대 이후를 중국의 봉건적 중세로 보는 것이다. 마에다가 이 설을 제기 함에 있어 몇 가지 강조하는 점이 있는데, 그 하나는 육조수당 시대의 경작노동이 노예적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마에다는 그의 스승인 가토 시게시의 설에 따라 육조시대 대토지소유의 주된 경작자는 노비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定役·雜? 등 가혹한 부담을 지고 있던 당대의 균전농민은 반노예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균전법 붕괴를 전후하여 노예농경이 쇠퇴하고 전호농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경도학파의 미야자키와 우쓰노미야 등이 육조의 佃客, 당의 균전농민을 일종의 중세적 농노로 보고 있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앞서 말한 비판의 초점은 경작에서 예농과 노예 중 어느 것이 주된 역할을 했느냐에 관한 물음이었다. 우쓰노미야는 「한대의 대사유지에 있어서 소작자와 노예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전한대에는 노예에 의한 경작이 지배적이었지만 후한대에는 소작자의 수가 노예를 훨씬 능가했다고 설명했다. 마에다는 우쓰노미야가 의거란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토 시게시를 좇아 균전제가 붕괴될 때 까지는 소작농이 노예노동을 대체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중국사에 있어 예농에 대해 천민으로서의 노예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이상, 적어도 미야자키가 주장한 대로 이른바 중세에는 호족이 예농에게 경작시키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전한과 위진남북조에서 대토지의 주요 경작자로서 노예와 예농의 차이가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는 당송변혁이란 중국에서 고대 노예제도로부터 중세 봉건농노제로의 사회경제 구성상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후에 주장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초기에 제기된 그의 진한-노예제사회설은 자신에 의해 철회되고, 그 대신에 진한제국론을 주장한다. 그는 마에다가 경도학파의 중세설에 대해 고대설을 주장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어떠한 고대였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함을 알고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에 니시지마는 家父長的 家內奴隸制設을 주장하고 노예제의 중국적 형태를 추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황제와 일반 백성의 관계는 個別人身的支配關係로 이루어졌으며, 자작농을 總體的 奴?制의 중국적 변형으로 간주함으로써 당말까지의 기본적인 생산관계는 노예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古代國家의 權力構造」에서 진한시대가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때의 노예제가 중국형 노예제라는 것이다. 호족계급은 노예를 수용하여 가부장적 가내노예제를 성립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잔존하고 있는 주변의 공동체사회의 일부에게 소유지를 빌려주고 가전민으로 만들어 이들을 수탈하였다. 이러한 노비와 가전민과의 복합형태가 중국형 노예제인 것이다. 이처럼 니시지마은 진한시대가 중국형 노예제 사회였으며, 위진남북조 수당시대에는 총제적노예제가 존재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니지시마의 진한-노예제사회설과 관련해 당송변혁의 의의를 밝힘으로써 신 학설에 기여한 사람은 호리 도시가즈(堀敏一)였다.생산관계의 변화란 점에서 당송 사이를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혁의 주요 요소라고 설명하는 사람으로서는 호리 도시가즈가 있다. 호리는 중국 고대사회에는 두 절정의 시기, 즉 진한제국 시대와 수당제장한다.
    인문/어학| 2013.10.12| 8페이지| 2,000원| 조회(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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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2차 동학농민전쟁
    제 2차 동학 농민 전쟁목 차1. 머리말2.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배경3.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전개1) 재봉기2) 논산대회3) 일본군의 동학농민군토벌작전4. 동학농민군의 항일전투1) 이인전투2) 우금치전투3) 대둔산전투5.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의의6. 맺음말1. 머리말제 2차 동학농민전쟁은 항일민족적(抗日民族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1894년 7월 22일 일본군의 경복궁(景福宮) 점령사건은 전국적인 반일 봉기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당시 전라·충청도를 중심으로 관(官) 협력 하에 또는 독자적으로 비교적 평온하게 폐정(弊政)을 개혁하던 농민군은 이 사건 직후 곧바로 각 지역별로 제 2차 기병을 조직했다. 동학 농민군은 조선에 불법 침입하고 국왕을 위협·내정간섭을 자행한 일본의 '보호국 정책'에 반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이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지 않고, 조선에 주둔한 채 본격적인 침략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봉준을 지도자로 한 동학 농민군은 1894년 10월 11일 재봉기하여 일본 침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전봉준은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 재봉기 동기에 대해 그가 체포된 후 재판관측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일본이 개화라고 일컬어 애초부터 일언반사(一言半辭)도 없이 민간에 전포(傳布)하고, 한편으로 격서(檄書)도 없이 솔병(率兵)하고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야반(夜半)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主上)을 경통케 하였다고 하기에, 초야의 사민(士民)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으로 강개하지 않을 수 없어 의족(義族)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접전(接戰)하게 되었다.아래의 글에서는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고,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전개한 항일전투와 패전으로 인한 해산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에는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 의의를 밝혀 동학농민군이 1894년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2.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 배경동학 농새벽에 경복궁을 침범하여 국왕과 왕비를 감금하고, 민씨 척족(戚族) 세력을 정원에서 몰아내고 대원군을 받들어 새로 정부를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제 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인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조선군에 대해 강제로 무장 해제를 시킴으로서 어떠한 무력적 반항이 일어날 수 없도록 했다.일본은 7월 25일에는 서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 대한 포격을 가하여 청에 대해 전쟁을 도발했다. 이로써 청일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 정부에 기존에 청과 맺었던 모든 조약을 폐기하도록 강요했다. 일본군은 풍도 해전과 성환(成歡) 전투에서 청군을 압도하여 전세가 유리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전란의 뒷수습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었다. 즉, 동학군 봉기에 의한 변란은 종식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조선에서 철병시키지 않고, 도리어 동학군의 폐정 개혁을 위한 봉기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 허위선전을 했다. 당시 미국 공사 오가스트 하아드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설사 일본군이 지금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에 있어서 평화와 안녕 이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해고, 이 이상 불행한 협약을 맺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 정부에 대해서 일본의 강력한 정책이 시작되게 된다는 직접적인 통고였다. …… 모든 사태를 참작하여 동학 운동의 모두가 서울의 일본 공사관에서 조정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다. 나 자신은 당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동학이 설사 스스로 지각(知覺)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일본인의 책략에 놀고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아주 최근의 사건들에 비추어 보아서 그곳(일본 영사관)에서 일으켜진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거의 방조되고 선동되지는 않았나 의심할 만한 것이다.당시 일본은 동학을 그대로 두고서는 조선 침투와 상업·무역 활동이 막대한 지박영효(朴泳孝)가 일본의 알선으로 귀국하여 갑신정변 당시의 대역죄가 사면되고 정계 복귀가 추진되었다. 중앙정부의 이러한 친일적 경향의 강화는 종래 군국기무처의 개혁에 암묵적 기대를 걸고 있던 동학농민군에게 중앙정부를 교체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군과 전봉준 등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배경으로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혀가는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따라서 제 2차 동학농민정쟁의 동기는 1차적으로 일본침략을 막아내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 항일 민족혁명전쟁(民族革命戰爭)의 동기를 갖고 출발한 것이었다.3. 제 2차 동학농민전쟁의 전개1) 재봉기일본이 7월 22일 경복궁을 침범한 사실이 알려지자 즉각 전국적으로 2차 기병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전라도 장성에서는 7월 30일 동학농민들이 관아에 난입해 무기를 모두 탈취했다. 장성뿐만 아니라 고부· 부안·김제 등지의 농민군 역시 재봉기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때 전라도 상황은 다음의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8월 5일자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동학교도인) 우리는 전(1차 봉기)에 폐정을 개혁한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조유(詔諭)를 만나 초토사(招討使)와 화약을 맺고 …… 잠시 무기를 내려놓고 있었지만 일본은 대병(大兵)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 궁중의 일을 물을 겨를조차 없으므로 먼저 일어나 일병(日兵)을 막아내어야 한다.충청도에서 8월 3일 보은에서 접주 임규호(任圭鎬), 황하일(黃河一) 등의 지휘 하에 반일 봉기를 위해 수백명이 집결했다. 강경에서도 7월 2일경부터 농민군이 경복궁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군수물자를 민간에서 징수했고, 이후 청군과 연합애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공주로 가서 그곳에서 서울로 쳐들어간다는 소문이 난 것처럼 재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8월 6일에는 이인(利仁)의 농민군도 반일 봉기를 준비했다. 10월초부터는 지역별로 산발적 봉기가 일어났다. 10월 1일에는 대접주 김인배(金仁培)가 봉기루(井上馨)는 11월 6일자의 조선 정부 외무대신 김충식에게 보낸 서한에서귀국정부(조선정부)는 이런 사유로 각진각대장(各陣各隊長) 및 연도(沿道)의 지방관에게 칙령(飭令)을 내리되, 전진과 후퇴를 하는데 있어서는 모두 우리(일본) 사관의 지휘를 따르게 하고 아울러 사관(士官)과 병정들에게 칙령을 내려 이 말을 준수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여 일본군이 주도적으로 토벌에 나설 정도로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은 거세게 봉기했다. 또한 경상도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용궁현(龍宮縣)의 무기고를 점령하고 탈취했으며, 성주(星州)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이러한 현상은 경기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성과 음죽(陰竹)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무기고를 탈취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만연되어감에 따라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자기 고을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무장의 이유 다음으로 전봉준은 추수(秋收)가 끝나기를 기다리기 위해 삼례에 머물렀다. 동학농민군은 무기만 놓으면 일반 농민이었기 때문에 전봉준의 격문에 호응하여 아무리 농민전쟁에 참가하고 싶을지라도 추수기 도중에 무기를 들고 봉기하려고 하지 않는 농민이 많았기에 이를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2) 논산대회전봉준이 논산에서 재봉기한 농민군의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선봉대(先鋒隊)를 파견한 것은 11월 3일경으로 추정된다. 이 남접의 선봉대는 11월 4일 논산의 은진(恩津)을 점령하고, 이어서 논산대회의 개최지역을 전진 보위하기 위해 대전(大田)에 진출했다가 충청도 영병(營兵) 80명과 조우하여 한밭전투를 치른 후에 이를 격파하고 영장(營將) 염도희(廉道希)는 생포해 불태워 죽였다. 전봉준은 약 4천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11월 8일 삼례를 출발해 다음날 논산에 도착했다. 전봉준은 논산에 도착하자, 격서의 일종으로 우선 경군과 충청도 영병에게 고시(告示)하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다음과 같이 국문으로 된 고시문을 발표했다.고시 경운여영병(京軍與營兵) 이교시민(而敎示民) 무타(無他)라. 일본과 조선이 개국 진격하자 청과 전쟁 중인 일본군은 토벌작전 계획에 따라 출동했다. 일본 정부는 전봉준의 지휘 아래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했다는 보고를 받고 무엇보다 동학농민의 봉기가 북부 함경도 지방까지 파급되어 러시아가 개입할 구실을 만들게 되지않을까 두려웠다. 이에 동학농민군에 대한 신속한 조기 진압과 동학군 봉기가 북부 지방으로 파급되지 않도록 적극적 대책을 수립할 것을 일본공사에 10월 31일자의 훈령으로 긴급 지시했다. 이 훈령을 받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동학군 토벌만을 담당할 1개 대대 병력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가 특파한 부대는 이른바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독립 제19대대였다. 일본 정부와 주한일본공사는 제19대대가 조선에 상륙하자 동학 농민군 진압의 원칙으로서 다음 사항을 엄수하도록 명령했다.1. 동학당은 현재 충청도 충주·괴산 및 청주지방에 군집해 있으며, 그 밖의 나머지 동학당은 전라도·충청도 각지에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괴멸시켜라.2.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다음 항에서 지적하는 세 개의 길로 분진(分進)하여 조선군과 협력, 연도에 있는 동학당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함으로써 동학당이 재흥(再興)하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장차 출발할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모두 우리 사관의 지휘명령을 받아야 될 것임.처음부터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항일세력인 동학농민군을 뿌리까지 색출해서 다시는 재흥하지 못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 일본군이 조선관군도 지휘·명령하도록 해서 이른바 동학농민군 토벌을 사실상 일본군이 전담했다. 동학농민군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 부대는 제19대대 병력뿐만 아니라 청일전쟁의 병참보급로 확보와 병참 조달을 위한 후비보병 제6연대와 제10연대 및 후비보병 제18대대가 있었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은 전국적으로 봉기한 것이므로 일본은 한반도 내 일본군 병참부의 수비대 병력을 모두 동학농민군 토벌에 투입했다.일본은 전라도·충청도·경부로의 세 방향으로 나누어 출동하는데, 동전했다.
    인문/어학| 2013.10.12| 14페이지| 1,0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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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공산당의 혁명 운동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目 次1. 머리말2. 중국 공산당의 창당3. 제 1차 대혁명과 노농운동4. 무장봉기1) 남창봉기2) 추수봉기5. 대장정과 중화소비에트1) 다섯 차례의 초공전2) 홍군의 퇴각3) 준의회의4) 대장정5) 대장정의 의의6. 맺음말1. 머리말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중국은 1840년 중·영 전쟁으로 인한 난징조약(南京條約), 1884년 중·불 전쟁으로 인한 중법신약(中法新約), 1894년 중·일 전쟁으로 인한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했다. 이는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1900년에는 8개국 연합국이 베이징(北京)을 함락시키고 청(淸) 정부를 압박하여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했다. 그 배상금은 4억 5천만량(兩)으로, 이는 1901년 청 정부의 총 수입의 16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후 중국의 봉건통치제도는 날로 부패해져만 갔고, 정부는 점차 제국주의의 중국으로의 침략 도구가 되었다. 당시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독립적이지 못했고, 대내적으로는 민주적이지 못한 사회였다. 외국의 자본이 중국의 경제를 통제하여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이 심각한 장애를 받는 반식민지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 근대사회의 주요 모순은 제국주의와 중화민족간의 모순, 봉건주의와 인민대중과의 모순이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1850년 태평천국운동, 1898년 무술변법, 1900년 의화단, 1911년 신해혁명, 1919년 5.4운동 등의 반제·반봉건 투쟁이 일어났다. 특히 5.4운동을 계기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사회주의적인 노동운동과 노동조합들이 등장했다. 중국에서 마르크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1899년 선교사인 티모시 리차드(Timothy Richard)가 발행했던 『만국공보(萬國公報)』였다. 이어서 1906년에는 국민당원인 주집신(朱執信)이 사회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예방 혁명의 차원에서 『민보(民報)』에 「공산당 선언」의 일부를 번역하여 게재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전파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이 조직된 것은 아니었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진보적친 청년들을 단결·교육시켜 혁명에 참가시키고 마르크스주의를 학습시키기 위해 상해 공산주의 소조에서 1920년 8월에 상해 사회주의청년당을 조직했다. 유수송(兪秀松)이 서기를 담당하였고 단원은 30명 정도였다. 이후 각지에 사회주의청년당 장정(章程)을 보내 북경, 광주, 장사, 무한, 천진 등지에서 사회주의청년당이 조직되었다. 1920년 11월에는 상해 공산주의 소조에서 「중국 공산당 선언」을 제정하고 이를 당원 수용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선언은 임시 당강의 역할을 했으며 당의 지도사상과 건당원칙을 발표한 것이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공산주의자의 목적은 공산주의자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가 실현되려면 먼저 현재의 자본제도를 전복해야한다. 자본제도를 전복하려면 자본가의 국가를 강력하게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선언은 당의 제1차 전국대표회의에서 통과된 강령의 지도사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1921년에는 각지에 분산적으로 조직된 공산주의 소조를 통일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6월 3일, 중국에 부임한 코민테른 대표 마린은 정식적으로 전당대회의 개최를 추진했고, 상해 소조는 각 지역에서 대표들을 선출해 파견할 것으로 요청했다. 그러자 7개 지역에서 공산당원 53명을 대표하는 12명이 1921년 7월 23일부터 8월 5일까지 상해 프랑스 조계와 가흥(嘉興) 남호(南湖)에 모여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은 상해 대표 이한준·이달, 북경대표 장국도·유인정, 호북대표 진담추·동필무, 호남대표 모택동·하숙형, 광동대표 진공박, 일본대표 주불해, 산동대표 왕진미·등은명이었다. 또한 코민테른의 대료 마린과 니콜스키도 참석했다. 회의의 목적은 각 지역대표들이 기왕의 활동상황을 보고하여 경험을 교류하고, 당 강령과 결의안을 통해 당의 목표와 실제 공작 방침 및 구체적 계획을 결정하며, 중앙기관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회의 결과, 진독수가 중앙국의 서기로 선발되었으며월 14일, 상해방직공장에서 일본 자본가가 이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시킨 것에 대한 항의로써 파업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28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상해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반제운동 확대와 5.30대시위 조직」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0일, 상해의 2천여 명 학생 및 대중이 공동 조계의 큰길에서 시위·강연을 하고 전단을 뿌리자, 제국주의는 무장경찰관을 출동시켜 1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발포하여 10여 명이 죽었다. 이 운동의 여파는 상해에서 북경, 광주, 홍콩, 청도(靑道), 무한, 천진, 당산 남경, 구강, 남창, 장사, 항주 등의 도시로 확대되어 각 도시의 노동자와 학생, 시민은 집회를 열고 시위행진을 벌이며 5.30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1,200만 명에 달했다.노농대중운동은 북벌전쟁의 진군을 지원했고, 또 북벌전쟁의 승리는 노농운동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도시에서의 노동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여 노동조합원은 북벌 전 100만 여명에서 1927년 3월에는 280만 명으로 증가했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노동자의 의식이 향상되면서 파업투쟁이 고조되었다. 1926년 10월부터 1927년 3월까지, 상해 노동자 계급은 북벌전쟁에 호응하여 3차례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 1·2차 봉기는 실패했으나, 제3차 무장봉기는 주은래, 조세염, 나역농(羅亦農)의 지도 아래 3월 21일 상해의 80만 노동자들은 대파업을 단행한 후 무장봉기에 들어가 30여 시간의 격전을 벌인 끝에 군벌의 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농촌에서는 농민운동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북벌군이 호남을 점령한 이후, 호남성 전체의 농민 협회 회원은 40만여 명에서 136만 명으로 급증했다. 호북에서는 1927년 4월까지 성 전체 농민협회가 54개현으로 확장되었으며, 농민협회 회원은 7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1927년 초가 되면 전국농민협회 회원은 이미 1,000만 명에 이르게 된다.북벌전쟁의 승리와 노농운동의 전개는 제국주의의 중국 식민주의통치와 중국에서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따라서덕·유백승(劉伯承) 등의 지도 아래 봉기부대는 적군 3천여 명을 섬멸하여 남창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중앙위원 선언」을 발표하여 장개석·왕정위 집단이 삼민주의를 왜곡하고 3대정책을 짓밟아 이미 손문의 죄인이 되었음을 비난하는 동시에 모든 혁명적 국민당원과 지사인인(志士仁人)은 손문의 혁명유지를 계승하여 반제·반봉건주의와 토지혁명의 실행을 호소했다. 남창봉기는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독립적으로 지도하고 혁명군대를 창건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3년 7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는 매년 8월 1일을 중국 홍군(紅軍) 건군 기념일로 결정하게 된다.2) 추수봉기중국공산당은 8.7 회의 이후 호남·호북·광동·강서성에서 계속해서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호남·강서 경계 추수봉기는 실패 후 정강성으로 들어가 혁명근거지를 건립했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 특파원 신분으로 호남성 장사에 도착하여 호남지구 추수폭동을 조직·지도했다. 8월 18일부터 모택동은 호남성 회의에 참가하여 호남의 실정과 연계하여 추수봉기의 계획을 토론하고, 총으로 정권을 탈취해 정권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최초의 지역적 토지강령 초안을 기초해 모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이게 분급해 경작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호남성 위원회는 8월 말 호남 추수봉기의 구체적인 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정했다. "호남성 위원회는 국민당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독립적으로 추수폭동을 지도한다. 노농혁명군을 조직한다. 대·중·소지주의 토지재산을 몰수한다. 폭동은 공산당의 홍기를 치켜든다. 노농병 소비에트 정권을 조직한다." 9월 초, 모택동은 전위위원회의 서기로써 국민혁명군 제 4집단군 제 2방면군 총지휘부 경위단, 평강 및 유양의 노동의용군, 강서 서부 안복(安福) 등 현의 농민자위군, 안원 노동자규찰대 및 광산경비대, 호북성 숭양(崇陽)·통성(通城) 농민자위군 일부 합계 5천여 명을 통일하여 노농혁명군 제 1사 제 1·2·3사단으로 편성했다. 9월 9일, 호남성위원회는 일부 혁명대중을 조직하여감행한 제1차 초공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장개석은 1931년 5월, 20만 병력을 동원해서 제2차 초공전을 벌였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7개 방향에서 소비에트 지구를 공격한 국민당 군대 가운데 6개 방면군이 홍군에게 격파 당하였다. 홍군은 14일 동안 행군하면서 6번 전투를 벌여 모두 이겼다. 한 달 뒤에 장개석은 3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제3차 초공전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 80리씩 소비에트 중심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런데 3만에 불과한 홍군 주력부대는 빠른 기동전을 통해 5일 동안 35개의 국민당 군대 부대를 공격하여 수많은 포로와 총포·탄약 등을 얻었다. 때마침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기 때문에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제 3차 초공전을 중단하고 남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기가 오른 홍군은 12월 정식으로 중앙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으로 선출하였으며 복건성과 광동성 쪽으하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그리고 주덕을 홍군 총사령관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위협을 느낀 장개석의 남경 정부는 1933년 4월, 제4차 초공전을 시작했다. 홍군은 25만의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벌인 첫 전투에서 사단장을 포함하여 2개 사단을 통째로 사로잡았고 낙안현 대룡평에서 치른 전투에서는 포로 1만3천을 잡고 엄청난 물자를 노획했다. 국민당 군대 52사단과 11사단은 전멸했다. 홍군은 전투를 할 때마다 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빼앗은 무기로 더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었다. 장개석은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90만 대군을 이끌고 제5차 초공전을 벌였다. 국민당 군대는 수도 많았지만 비행기 4백 대와 기관총 등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은 독일 군사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도로와 토치카를 건설하면서 매우 느리게 진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펼쳤다. 예전처럼 유격전을 하기가 어려워진 홍군은 국민당 군대의 진지전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국민당 군대는 홍군의 유격전을 봉쇄하기 위해 점령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쫓아내는 된다.
    인문/어학| 2013.10.12| 13페이지| 1,000원| 조회(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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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목 차1. 임진왜란에 대한 명칭2. 임진왜란 전의 동아시아1) 조선의 정치 상황과사림의 집권2) 명의 쇠퇴와 북로남왜3) 일본의 전국시대 통일3. 동아시아 각국 대외관계1) 사대와 교린의 조선2) 대외관계 중심의 명3) 무역국으로 성장한 일본4. 국제전으로써 임진왜란의전개1) 전쟁의 발발과 전개2) 수군과 의병의 활약3) 강화회담과 정유재란5.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1) 전후 조선의 대내외 상황2) 명의 쇠락과 왕조 교체3) 일본의 정권 교체와조일 국교 재개1. 임진왜란에 대한 명칭1592년(선조 25)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년의 전란은 같은 해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 병선 7백여 척과 1만 8천여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만에 나라의 운명을 뒤흔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이라 부르고 있다. 또 중국에서는 '만력동원(萬曆東援)' 혹은 '만력원조(萬曆援朝)'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임진조국전쟁'이라 칭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Hideyosi's Invasion of Korea : 1592-1598'이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 것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임진년의 왜적' 또는 '임진년의 변란'이라고 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정착된 것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임진왜란이란 명칭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있었던 일본과의 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한말(韓末)의 교과서나 일제시대의 한국 측 서술에서는 '임진난'으로 표현되다가 1946년 김성칠의 『조선역사』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이란 용어가 사용되어 한국사의 학술용어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명칭이 변하지 않고 4백여 년 동안 사용되었다는 것은 임진왜란을 보는 시각이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끌어들인 것, 누르하치와 결탁했던 이성량과 같은 인물을 무장으로 기용한 장거정의 집권이 오히려 명의 붕괴를 촉진했다는 평가도 있다.명이 이렇게 쇠퇴의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몽골의 위협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15세기 중반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확대를 촉구하면서 명에 수차례 침공했다. 토목의 변 이후 명은 장성(長城)을 정비하고 북방의 방어 체제를 강화했다. 한편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 타타르의 알탄 칸 세력이 커지면서 매년 명으로 침입했다. 다얀 칸의 손자이자 징기스칸의 직계를 표방한 그는 이미 1530년대부터 조공을 요구하며 명을 침략하여 물자를 약탈하고 한인(漢人)을 납치했다. 특히 1542년 대동(大同) 지역으로 침입하여 산서(山西)를 중심으로 13위(衛) 38(州縣)을 휩쓸면서 20만 명 이상의 주민을 살해하여 명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당시 명의 변방에는 스스로 장성을 넘어 알탄 칸의 휘하로 귀순하는 농민과 군인, 백련교도(白蓮敎徒)가 적지 않았다. 빈궁한 생활과 과도한 세금, 요역 등에 시달리던 이들은 몽골 지역으로 들어가 판승(板升)이라 불리는 중국식 성곽도시를 건설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16세기 몽골이 명의 북방을 수시로 침입했던 배후에는 무역 문제가 있었다. 1550년에는 알탄 칸이 대동,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통주(通州)까지 진격해 옴으로써 북경(北京)을 포위했다. ‘경술(庚戌)의 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명은 알탄 칸을 회유하기 위해 1551년 마시(馬市)를 개설했다가 1년 만에 중단시켰다. 그러자 알탄 칸의 침략은 이후 20년 동안 거듭 되었다. 1571년 명은 알탄 칸을 순의왕(順義王)으로 책봉하고 마시를 허용함으로써 융경화의(隆慶和議)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1575년 명은 알칸 칸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귀화성(歸化城)이라는 호칭을 내렸다. 귀화성 주변에는 수만의 한인이 알탄의 지배 아래 농경에 종사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명이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방에 신경 쓸 무렵 동남지역에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른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서 비파를 타는 격'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개돼지의 소굴에 들어와서 개돼지와 뒤섞여 형세가 고단한데 그 위태로움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위에 보이는 김성일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그들을 '개돼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정적이다. 이렇게 일본을 오랑캐로 경멸하는데 반해, 자신은 스스로 '중국(中國)'이라 여기는 인식은 비단 김성일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16세기 후반 무렵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을 명(明)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중화국(中華國)으로, 일본을 예의도 모르는 '만이국(蠻夷國)'으로 인식하고 있었다.오히려 조선 조정에서는 실질적인 전쟁 대비 대책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征明)계획을 명에 알려야하는지 어떤지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고, 결국 '왜적이 상국을 범하려 하고 있다'는 취지의 자문(咨文)을 작성하여 성절사(聖節使)편에 부쳤다. 그러나 이 정보가 통신사를 통해 입수되었다는 사실은 발설하지 않고 일본에서 송환되어 온 조선인 김대기(金大璣)에게서 얻은 정보라고 하여 상주하기로 했다. 통신사의 일본행이 알려지면 명측이 조선과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오해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절사가 1591년 7월 경 명에 입국했을 때는, 이미 봄에 류쿠를 경유하여 제공된 일본의 명 침공 소문이 유포된 상태였다. 이에 성절사는 예부(禮部)에 해명 문서를 제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 결과 명이 조선에 품었던 혐의는 일단 해소되었다. 이처럼 통신사 귀국 후 1591년부터 조선은 국내의 정쟁 및 오보가 빚어낸 조선에 대한 명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정작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서는 충분한 군사적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은 시작되었다.2) 대외관계 중심의 명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는 중화와 주변국 사이의 주종관계로 이루어진 조공질서로 해석된다. 이는 조공·책봉체제와 한자를 매개로 중국을 중심폈으나 패하였다. 충주에 도착한 김여물은 신립 장군 휘하의 병사 5천 명으로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신립은 충주벌판에서 달천(達川)을 등에 지고 배수의 진을 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여물은 먼저 문경세재를 막는다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해상방위론을 주장했던 김여물은 신립과 같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편 이일 등이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 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대마도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군의 총 병력은 약 20만 이었다. 4월 25일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 3군과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이끄는 제 4군도 성주에 이르렀고 추풍령을 넘어 청주성을 함락시키고는 서울로 향하였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 1군은 4월 26일 새재를 넘어 계속 북상하였다. 조선에는 부산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는 중로(中路)?좌로(左路)? 우로(右路)가 있었다. 일본군이 전쟁 기간 한양으로 이르기까지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제 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 2군은 좌로로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 3군은 우로로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 등 3로로 나뉘어서 북상하였다.[그림1] 임진왜란의 전개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선조는 4월 30일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을 단행했다. 선조는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순화군(順化君)을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였다. 왕의 서천(西遷)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병력으로 큰 병력의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정면 공격을 피하고 기동력과 매복, 기습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반격작전은 더욱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를 정비하여 관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관군의 전투능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작전이 보다 조직성을 갖게 되었다.3) 강화회담과 정유재란전란이 모두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간의 강화교섭이 개시되었다. 조선의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했던 가토는 명의 교섭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간 후 2~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도요토미가 ① 명의 황녀(皇女)로서 일본의 후비(后妃)를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 관선(官船)·상선(商船)을 왕래시킬 것, ③ 조선의 경기·경상·전라·충청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④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할 것 등 7개 조항의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의 회담교섭은 결렬되었다. 조선이 처음부터 반대했던 명과 일본의 화의는 전승자로서의 태도와 조선을 요구하다 결국 결렬되고만 것이다.이에 심유경은 이 조선을 명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처음부터 그 요구를 숨기고 거짓으로 명황제에게 '도요토미가 왜왕의 책봉을 희망한다.'고 보고하였다. 명은 심유경의 보고에 따라 1596년에 양방형(楊方亨)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에 봉한다는 책서(冊書)와 금인(金印)을 가지고 일본으로 보냈다. 이로써 화의는 결렬되었고 명의 국서를 본 도요토미는 대노하여 재침(再侵)을 명령하게 된다.1596년까지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3년에 걸친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1597년(선조 30년) 7월 28일 2차 침공을 개시하니 이것이 1598년까지 이어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1597년 1월에 도요토미는 고니시와 가토 등에게 14만 대군을 주어 도오도오 다카도라(있다.
    인문/어학| 2013.10.12| 24페이지| 2,500원| 조회(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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