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소설의 역할과 기능-이광수『무정』을 중심으로1. 머리말2. 시대적 배경과문단의 상황3. 이광수『무정』줄거리4.『무정』에 나타나는 소설의 역할과 기능(1)표현론적 관점(2)모방론적 관점(3)효용론적 관점(4)존재론적 관점5.이광수『무정』의 제목과 소재가 갖는 의미6.맺음말참고문헌1. 머리말소설의 역할은 소설이라는 문학 장치를 존재 가능하게 하는 3가지 요소, 즉 작가, 작품, 독자에 있어서 효용이나 기능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에 대한 소설의 역할과 소설작품의 인식론적 역할과 독자에 대한 소설의 역할로 볼 수 있다.소설의 역할에 대한 문제는 이른바 그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생애, 업적 등과 관련해 작품을 분석하는 ‘표현론적 관점’이 있고, 작품에 반영된 시대적 배경을 중점으로 개별 작품을 이해하는 ‘모방론적 관점’이 있으며,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경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독자가 문학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관련된 ‘효용론적 관점’이 있다. 끝으로 위 3가지 관점과는 전혀 달리, 작품의 외적 요소에 치중하지 않고, 작품의 내재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자품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존재론적 관점’이 있다.먼저 시대적 상황과 문단의 상황을 알아보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춘원의 최초 장편 소설인 에 소설의 역할과 기능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2. 시대적 배경과 문단의 상황1910년은 무단통치기로 일제의 강제에 의한 한일합방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총독부의 식민지 지배기로 헌병경찰통치기라고도 한다. 1910년 일제는 조선강점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등을 탄압하면서 군사·정치·문화 활동을 모두 금지하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행정·경제·사회·문화 등 전부분에 걸쳐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해갔다.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해 무력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를 정비했으며 식민지 경제 수탈을 강행하여 민족 산업의 발전은 완전히 정체되기에 이른다. 또 이 시기 사회·문화정책은 우민화·황민화 정책으로 조선의 민족적 고유문화를 말살하고 총독부 기관지 이외의 모든 언론을 금지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또 교육에서는 조선인에게 열등의식을 주입시키면서 천화주의를 강요하고 미신과 원시적인 민간신앙을 조장했다.이처럼 역사적 상황의 모순이 전반적으로 첨예화 하여 감에 따라 1910년대 중반부터 정치·경제·종교·교육계 등 여러 방면에서 민족적 방향 모색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여 신지식, 신사상을 흡수하고 돌아온 신 지식층에 의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현실대응 방식은 크게 두 부류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비판의식’을 갖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비판적 신 지식층이고, 하나는 ‘허위의식’을 갖고 일본의 문명개화노선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었던 친일적 신 지식층이다.문단의 상황은 일제의 검열 정책 강화로 정치·문화적 공백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합방 직전에 일본은 신문지법(1907)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언론 규제법을 만들고 출판법(1909)을 시행하게 된다. 조선 총독부가 설치된 뒤에는 개화 계몽시대의 최대의 민간지였던 를 강제로 인수하여 총독부 기관지 (1910. 8. 30)로 개제하여 발간하였고, 여러 사회단체의 기관지나 잡지는 모두 폐간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적인 이념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매 반포 금지도서로 지정되어 폐간되거나 압수하게 되었다. 때문에 1908년 11월에 창간되어 1910년부터 이광수와 홍명희가 집필자로 활동했던 도 계몽적 내용으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정간을 당했으며 1911년에는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문학작품 발표지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국내에서는 , 등과 일본유학생들이 발간한 이 있었고 이어서 가 나왔다. 그리고 1910년대는 소설에 이광수, 시(신체시)에서는 최남선이 주로 활약했다고 하여, ‘2인 문단 시대’라고도 한다.3. 이광수『무정』줄거리서울 경성 영어 학교 교사 이형식이 장안의 부호 김 장로의 고명딸인 선형의 영어 개인 지도를 부탁받고 첫 번 방문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이형식은 동경 유학을 마친 당대 일류 지식인이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역경을 겪은 데다 내성적 성격이라 여성 교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뛰어난 미모인 선형에게 반한다. 그리고 그날 밤 하숙집에 돌아와서 형식은 뜻밖의 손님인 박영채를 만나게 된다.영채는 이형식이 어릴 때 고아일 적에 형식을 데려다 기르고 자식처럼 대하여 준 은사 박진사의 딸인데 장차 형식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청혼했었다. 그러나 박진사의 개화 운동이 세상 사람들의 개화 문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실패하고 집안이 망하자 이형식은 영채와 이별하게 되었는데, 7년 만에 해후하여 그 뒤 영채가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도우러 기생이 되고 형식을 사모하며 수절해 왔다는 전말을 듣게 된다.이 과정에서 형식은 눈물을 흘리는 한편, 그녀가 기생이라는 혐오감과 미인이라는 유혹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에 형식은 선형에 대한 연정과 은사의 딸이자 지난 날 아내로 암시되었던 영채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 또, 기생인 영채를 구해낼 돈 천 원이 없음을 한탄하는 사이에 영채는 지금까지 형식을 위해 지켜오던 정조를 배학감(배명식),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인 김현수 일당에게 유린당하고 만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러 평양행 기차에 오른다.그녀의 유서를 쥐고 눈물을 뿌리며 영채를 만나려 뒤따라 평양에 간 이형식은 소득 없이 돌아와서 오히려 학생들에게 기생을 따라갔다는 오해만 사고 이에 분격하여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는 김현수가 거짓 소문을 낸 까닭이었다. 이런 형식에게 뜻밖에 김 장로 댁 선형과의 결혼 신청이 들어오고 형식은 이를 받아들여 약혼식을 치른 후에 함께 미국에 유학을 갈 준비를 하게 된다.한편, 자살 길에 오른 영채는 차 안에서 소위 신여성인 병욱을 만나 그녀의 황주 집에 한달간 머무는 동안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근대적 합리주의로 정신적인 발견을 이룬다. 그리고 병욱의 호의로 함께 동격 유학길에 오르던 중, 기차 안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을 만나게 된다. 이리하여 형식은 새삼 애정과 의리 간의 갈등에 빠지게 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는 삼각관계의 불협화음이 생긴다.기차는 삼량진 수재 현장에 이르러 연착하게 되고 여기에서 네 젊은이는 고통을 당하는 수재민을 위해 자선 음악회 등 함께 봉사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 간의 개인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그 대신 토론을 통해 허물어진 민족의 장래를 담당할 역군으로서 사명을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인물들의 근황이 소개되고 작가의 계몽 의식이 서술된다.4.『무정』에 나타나는 소설의 역할과 기능(1)표현론적 관점: 표현론적 관점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생애, 업적 등과 관련해 작품을 분석하는 관점을 말하는데, 작품에는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광수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에서, 조선 민족은 인·의·예·용과 같은 근본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지만 게으름·허위·비사회성 등과 같은 가변적이고 부속적인 민족성이 있다고 말하고, 이러한 부속적인 민족성은 개조가 가능하므로 이 개조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무정』에서도 이형식의 입을 빌려 표현되고 있다.“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참 있다가 병욱이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 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한다.그렇지요, 불쌍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물론 문명이 없는 데 있겠지요-생활하여갈 힘이 없는 데 있겠지요”“그러면 어떻게 저들을……저들이 아니라 우리들 이외다……저들을 구제할까요?”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중략)“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어떻게요?”“교육으로, 실행으로”(123회)형식은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하였다.“우리가 하지요!”“옳습니다.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가 공부하러 가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돈이며 가서 공부할 학비를 누가 주나요? 조선이 주는 것입니다. 왜? 가서 힘을 얻어오라고, 지식을 얻어 오라고, 문명을 얻어 오라고……그리해서 새로운 문명 위에 튼튼한 생활의 기초를 세워달라고……이러한 뜻이 아닙니까”(중략)형식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게으르고 힘없던 우리 조상을 원통히 여기는 것을 생각하여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고마운 조상이라는 말을 듣게 합시다.”(124회)(2)모방론적 관점: 작품에 반영된 시대적 배경을 중점으로 개별 작품을 이해하는 관점을 말하는데, 문학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소망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무정』에 등장하는 영채와 선형은 각각 전통적 여성과 신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들을 통해 이 작품이 씌어진 당시에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이 혼재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 시조1. 서언서언에서는 시조의 개념과 여성시조를 우리가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시조는 한국 고유의 단형 정형시이며 전통적 양식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가창되었습니다. 3장 12구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식과 절제된 언어, 시상의 흐름을 알맞게 통제하면서도 개별적 변이를 소화해내는 서정구조와 담백·온아한 미의식을 특징으로 합니다.본래 시조는 단가(短歌)라 하여, 장가(長歌: 고려가요·경기체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형식의 노래를 의미했는데, 영조(英祖) 시대를 풍미한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에 의해 '시조'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당시의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유행가의 약칭으로서 시절가(時節歌)·신조(新調)·시조(詩調)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조선시대는 시조가 본격적으로 융성·발전한 시기였습니다. 간결·담백하게 절제된 시조의 언어와 형식이 사대부층의 미의식과 부합하였던 바, 시조는 한시(漢詩)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감흥과 정취를 노래하는 표현형식으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었습니다.17세기 후반(조선후기) 중인가객들이 시조의 새로운 담당층으로 부각되면서 『청구영언』(김천택)과 『해동가요』(김수장)같은 가집(歌集)이 간행되었고, 그와 더불어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시조는 한시보다 더 가치있는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시조의 내용은 애정과 별리, 인정물태(人情物態), 사회비판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중장이 대폭 확장된 사설시조가 융성한 것도 이때입니다.여성시조를 우리가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여성시조는 여성의 문학 활동이 금기시 되었던 전통사회를 지나오면서 재능과 지식을 소유한 많은 여성들의 주옥같은 문학 작품들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여류 가운데서도 천민이며 남성들의 노리개로 취급받던 기녀들의 한시 또한 그 양이 매우 적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지 못한 실정에서 남아있는 기녀들의 시조를 정리하고 연 1980년대에 걸쳐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연구의 절정기에 도달합니다. 석영수, 김장현, 김동욱에 의해 기녀의 사회학적 연구가 진행되었고, 1970년대에는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주로 작가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녀시조에 대한 작품의 주제나 형식, 그리고 조선조 여류 문학사에서의 기녀시조의 위치와 평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전규태, 황재군, 김용숙, 이화영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기녀시조에 대한 페미니즘적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시조의 작가인 기녀들의 작품이 문학성이 뛰어난 이유를 찾다보면 당연히 기녀라는 집단이 존재했던 사회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녀시조의 형성과정과 기녀문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1.1. 시조&여성 시조의 개념시조는 고려 말부터 현재까지 8백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고유의 시가 문학입니다. 선인들의 사상과 생활 속의 체험의식을 반영해 온 중요한 문학형식중의 하나이며, 다른 문학양식과는 달리 동시대의 보편적인 의식세계를 반영하는 문학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장르입니다. 조선조 사대부들은 유교적 보편질서를 중시하여 관념적 성격의 시조를 지었으며, 정치현실에서 밀려났을 때는 은일하여 자연을 예찬하는 내용의 시조를 지었습니다.반면 조선 여성시조는 규방가사나 한시 등이 조선조 여성들의 호응을 얻은데 반하여 시조는 일반 부녀자들의 소외 속에서 대부분 기녀들에 의하여 전승되고 향유되었을 뿐입니다.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창작 편수가 저조한 편입니다. 조선조 여성시조시인들은 연회석에서 사대부들을 상대로 시조창을 부르기 위한 가사를 지어 시조형식을 빌어 불렀으며 실제로 창을 매개로하는 청각적 전달이었기 때문에 음악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2.여성시조2.1. 여성 시조의 시대고려시대 여성들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고려 말에 이르러 주자학의 전래는 모든 사회적 윤리 도덕의 변천을 가져왔고 여성들의 생활은 규제를 받기 시며 그들은 사대부들의 취향과 문화를 공감해야 했고, 그들의 언어와 감정, 사고방식을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수중의 교양이 요구되었으리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녀는 지배층의 남성들을 상대하면서 자엽스럽게 그들의 생각과 사상, 언어양식, 행동 등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고 모방해 나감으로써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익혀 또 다른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시조의 흐름이 19세기 박효관, 안민영의 「가곡원류」를 통해 조선의 여성시조 역시 조선 초기부터 19세기 무렵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시가 창작에 참여한 시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난 후부터입니다.2.2. 여성시조의 특징&성격기녀시조는 평시조의 정형으로만 전하는데, 이는 그들이 사대부와의 관계 속에서 시조를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부와 공존관계에 있으면서 그들의 문학을 익혀 모방 단계를 거쳤습니다. 한편 운율면에서는 사대부 시조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휘적 측면에서는 개인적인 심회를 솔직하게, 다양한 수사와 순수 우리말을 써서 표현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자연보다는 인간사를 중심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즉흥적, 담화성의 작품이 많고 종장 끝구를 생략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기녀시조가 주로 사대부와의 수창 자리에서 이루어졌으며 창으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조선 기녀들의 시조작품은 남녀 간의 애정을 바탕으로 이를 ‘한의 멋’으로 승화시키거나, 정한, 좌절, 고독, 인생무상 등 당대 여성들의 보편적인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기녀들이 사대부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애정을 싹틔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고 사랑을 완성하기까지의 심리적 추이 및 상대화의 관계 변화과정과 일치합니다. 조선조의 여류시조는 유교적 가치관 때문에 일반 여성들의 작품은 볼 수가 없고 기녀들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그들의 관심사는 주로 애정문제에 치우쳐 있어서 사회의식적인 측면에서의 작품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작가의 범위가 확대되고 소재도 다양해위한 가사를 지어 시조형식을 빌어 불렀습니다.고시조인 기녀시조도 본래 오늘날의 개념같이 시행을 나눠서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창을 매개로 하는 청각적 전달이었기 때문에 장의 구분이나 배열은 음악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기녀시조는 사대부들이 주로 짓는 평시조(초장3·43·4/중장3·43·4/종장3·54·3을 기본으로 한 3장 6구 12음보로 총 45자 내외의 구성을 가진 정형시)를 주로 지었으며, 엇시조 사설시조와 같은 변형시조는 한 수도 없습니다. 사대부들과 어울리려면 흥을 돋구어야하고 노래와 춤만으로는 부족하니 창을 해야 했고, 화답하는 즐거움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긴 엇시조나 장시조보다는 평시조가 알맞은 형식이었을 것입니다.3.주요 작가와 작품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여성 시조 작가로는 황진이와 송이, 홍랑, 정몽주의 어머니 등이 있습니다.먼저 황진이부터 소개를 하겠습니다.3.1. 황진이황진이는 정확한 출생 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황진이는 개성(開城)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서녀였고,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황진이는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어려서 교방(敎坊)의 동기(童妓)로서 기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대의 명사인 송공(宋公)의 대부인(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가창과 미모가 아름다워 유명해졌고, 명나라 등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습니다. 기녀가 된지 수년 안에 그녀의 재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녀의 명성은 한성과 전국 팔도에까지 회자화 되었습니다.황진이는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으며,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고,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했습니다.당대의 석학의 한사람이던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버혀 내어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론님[6]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더디게 펴리라-풀이-위 시조는 황진이가 이사종이라는 사람과 6년간의 사랑에 속에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여러 기녀 시조 작품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을'시간'을 통제하면서까지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밤'이라 시간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지만 황진이는 그 밤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런 마음을 촉발하는 것이 바로 임입니다. 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앞에서 밤이라는 자연의 순리조차도 야속한 것입니다.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靑山裏(청산리) 碧溪水(벽계수)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청산리 벽계수야 쉽게 떠나감을 자랑하지 마라.一到滄海(일도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일도창해로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明月(명월)이 滿空山(만공산)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명월(明月)이 만공산할 때 잠시 쉬어 간들 어떠리.-풀이-'청산'은 영원한 자연을, '벽계수'는 덧없는 인생을, '수이 감'은 순간적인 인생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명월'은 황진이 자신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황진이는 자신이 원하는 왕족과 자신을 물과 달이라는 자연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벽계수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속이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대남성적 욕망은 다른 기녀의 시조에서도 자주 드러납니다.송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작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3.2. 송이송이는 18C 중반에 활동한 기생입니다.내 思郞 남쥬지말고 남의 思郞 탐치마소우리의 思郞에 雜(잡)思郞 셧길세라아마도 우리 사랑은 類(류)ㅣ 업슨가 하노라-풀이-위 시조는 18C 중반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녀 송이의 시조입니다. 이 시조는 황진이의 시조보다 더 직설적입니다. 송이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당당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진이가 자연물에 비유하여 떠나는 임을 붙잡고 있다면 송이는 그 기상처럼 '탐치마소' 라는 명령에 가까운 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