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566응용생물과학과이주헌나 혼자 밥을 먹고.졸린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기어나온 한쪽 팔이 휴대폰 홈 버튼을 누른다. “07:00” 이 액정을 기습적으로 가득 채우며 내 눈을 괴롭힌다. 그래도 여름엔, 이 시간쯤 되면 제법 밝았었는데. 이제 겨울이기 때문인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둑어둑하다.그래도 알람 소리를 놓치지 않고 제때 깨어났으니까. 오늘은 제법 운이 좋은 날이다. 이럴 때 방에서 어물쩍거리다간 아침 시간을 또 허무하게 날려버릴 테니까. 아직도 잠에 취한 몸을 힘겹게 이끌고 홀로 기숙사 식당을 향해 내려간다. 기숙사 현관 손잡이에, 뽀얗게 서리가 내렸다. 오늘도 정말 추울 모양이다. 맨손으로 손잡이를 짚으며 힘껏 바깥으로 밀자, 칼바람이 목덜미로 스며든다. 각오는 했지만, 절로 욕지기가 치민다. 이맘때의 부산은, 그래도 이렇게 춥지는 않은데. 서울의 겨울은, 정말 토할 듯이 춥다.식당 입구의 개찰구에 들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식당에 사람은 별로 없다. 카드를 들이밀자 “삑” 하는 비프음과 함께 게이트가 열린다. 비프음 대신에, ‘그 추운 길을 걸어 여기까지 들어오느라 고생했다는 내용의 녹음이 들린다면 어떨까. 아니면 오늘도 힘내세요 라거나. 아이러니하게 들릴까?’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국을 퍼주는 식당 아주머니 앞까지 다다랐다. 기계적으로 국을 그릇에 담아 넣은 아주머니가 내게 “맛있게 드세요” 하고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건넨다. 나를 쳐다보고 말을 하고 있기는 한 건지. 나도 건성으로 고맙다고 답례를 하고는, 먹을 반찬을 주섬주섬 집어서 대충 식판에 담고, 아무 데나, 맘이 내키는 대로 한 자리를 골라 주저앉는다. 오늘따라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하필이면 망가진 의자에 앉은 것 같다. 다른 자리에 앉아도 되겠지만, 소리가 좀 클 뿐이니까. 귀찮으니까 그냥 먹기로 하고, 주변을 한 바퀴 휙 둘러본다. 당연하게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함은 아니다. 이건 이번 학년에 새로 생긴 버릇이다. 왠지 혼자 밥을 먹게 되면, 이렇게 한번 식당 내부를 빙 둘러보게 된다. 머쓱함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식당 안을 쭉 훑어보다 보면, 의외로 혼자 밥먹는 사람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무슨 자신감인지, 식당 한가운데에 당당히 홀로 앉아 아침을 해결하고 있는 저 오타쿠같이 생긴 아저씨는 오늘도 밥을 혼자 먹고 있다. 식당에서 밥을 해결하고 바로 학교로 가려는 듯 제법 외출복을 차려 입었다. 하지만 셔츠 단추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저 저 셔츠가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퇴식구 근처엔 모자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깡마른 아저씨가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저렇게 뒤집어쓰고 먹으면 후드 끈이 국에 들어갈 텐데. 아무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저쪽엔 크레용팝 소율을 닮은 아가씨가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까만 코트까지 입고 식사를 하는 걸 보니, 저 아가씨도 밥 먹고 바로 학교에 가려는 모양이다. 이 시간에 저렇게 꾸미고 식당에 나오려면,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혼자 밥을 먹고 다닐 사람 같아 보이진 않지만, 아무튼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저 사람들의 사연이 어떻든 간에, 어쨌든 지금은 나처럼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동류들과 함께 식사를 한 후, 하루를 보낸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현역 애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제일 먼저 강의실에서 나간다. 영화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I열 한가운데의 좌석을 예매해서, I열의 잔여좌석수가 짝수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막아내며, 즐겁게 영화를 관람한다. 군 제대 후 복학한지도 어느덧 한 학년이 다 되어 가지만, 혼자 이렇게 산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남들의 눈짓을 받으며 혼자 밥 먹는게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아마릴리스 - 한 개 삼천원 두 개 오천원.5년 이상 묵은 구근부터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종류에 따라 빨강, 흰색, 복색의 꽃을 피우고, 향은 약하지만 꽃의 크기가 커서 관상용으로 그만이다. 성장이 빨라서, 꽃을 보는 데엔 한달이면 충분하다. 겨울엔 월동을 하며 꽃눈을 저장하고, 월동이 잘 된 구근은 다음해에 몇 번이고 꽃대를 만들어낸다. 구근은 하나에 삼천원. 두 개 사시면 오천원에 드린다.이 아마릴리스라는 꽃은, 군입대 전 잠깐 고속도로 휴게소 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우리 좌판에서 내가 판매를 담당했던 물건이다. 그 좁은 좌판에서 팔만한 게 있어봐야 얼마나 된다고. 물건에 담당 판매자까지 두고 장사를 하냐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한 알에 삼천원, 두 알에 오천원에 판매한 아마릴리스 구근은, 견습으로 일을 배우던 첫 2주를 제외하곤 일매출을 100만원 이상으로 올리는 일이 우스울 정도로 날개 돋친 듯 잘 팔렸다.이 꽃의 가장 큰 장점은, 꽃이 계절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근 안에 꽃눈이 있기만 하면, 한 해에 적게는 세 번, 많게는 열 번도 넘게 꽃대가 올라오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꽃대 하나당 꽃을 피우는 데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한 번에 한 개의 꽃대가 올라올 수 있게 조금만 신경 써 준다면, 일년 내내 꽃이 피고 지는 광경을 감상하는 기적같은 일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엔 작은 비밀이 하나 있다. 상인들은, 당연하게도 물건을 판매하며 그 비밀을 손님에게 귀띔해주지 않는다. 그 손님이 다음에 다시 내 가게를 방문해서 의아하다는 듯이, 혹은 따지려는 듯이 “그때 사간 꽃, 한번 꽃대 올라오고 그만이더라.” 라고 푸념을 늘어놓을 때를 위해 그 비밀을 남겨두는 것이다. 대체로 그 비밀을 듣고 난 손님들은 고마운 마음에 꽃을 한 뿌리 더 사가곤 하니까.일년 내내 꽃을 피우는 비밀은, 사실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울 만큼 소소하다. 바로 꽃 안의 암술과 수술이 수정을 하기 전에, 꽃을 자르는 것이다. 수정이 일어나 버림과 동시에, 그 구근의 그 해의 개화기는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정이 되기 전에 꽃을 자르면, 구근은 다시 수정을 시키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꽃대를 위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것은 화분의 주인에게 또다시 한 달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에밀리 디킨슨의 Apparently with no Surprise를 감상하다 발견한 다섯째 줄의 “Blond assassin passes on”이란 표현을 읽으면서, 내가 휴게소 노점에서 팔던 아마릴리스가 떠올랐다. 우연히 목을 베인 꽃들은 그것으로 자기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꽃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꽃대를 위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 행위 덕분에, 그 식물의 아름다움은 계속된다. 에밀리 디킨슨도 계속해서 꽃대를 만들어내는 식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식물에게는 Blond이고, 어떤 식물에게는 Assassin인 서리의 속성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이 다섯 번째 줄이 참 마음에 들었다.
프로스트의 위로1. 불안어제, 부동산학과에 재학중이던 10학번 한모군(21)이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건국대학교 상허관 7층에서 투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한모군은 곧 건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심폐소생술을 시술 받던 도중 자신의 목적을 이뤄버리고 말았다.201012566응용생물과학과이주헌나는 응용생물과학과 학생으로, 당연하게도 정반대의 분야를 전공했던 고인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하지만 내가 늘 점심을 먹으려고 지나다니는 길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건물의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몸을 던졌다니. 심지어 그 누군가가 나와 같은 10학번의 동문이라니. 일면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의 자살은 내게 몹시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그의 사인은 우울증인 것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그를 우울하게 한 걸까. 그를 창밖으로 밀어낸 그 불안의 정체는 뭘까.나는 어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친구로부터 이 소식을 접하고, 고흐와 멘델이 떠올랐다. 고흐는 생애 동안 지속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주변의 푸대접 속에서 결국 권총자살을 시도한 화가다. 멘델은 유전학이라는 학문을 열 위대한 실험을 수행한 과학자이지만, 그의 논문은 당시의 학계로부터 공상과학소설과 마찬가지의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즉, 외부의 몰이해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이다. 고인의 죽음을 멘델과 고흐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틀림없는 비약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고인의 삶에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다.물론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나도 알고 있다. 그 친구와는 달리, 그들에겐 주변의 몰이해에 대한 자기만의 확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면,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그림의 가치를 깨닫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내 그림이 돈으로 따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멘델 또한 자신의 발견이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결국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참이 되었다.그들이 범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그들이 가졌던 확신이란 것은 그들의 삶 전체를 보고 내린 우리들의 평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몇몇 사람들의 삶을 위대한 역사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위한 그 인물의 몸부림의 기록이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나는 그들 또한 자신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름 모를 한모군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2. 프로스트의 위로그러던 중 오늘 프로스트의 영시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을 만났다. 이 시를 읽고, ‘쾌락을 경계하며 자기계발에 매진하다’ 라는 주제를 읽어내는 것은 무척 쉽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빨간 목도리일 뿐이라도 그것에 눈시울을 붉히는 사연이 담겨져 있을 수 있듯이, 이 시는 나에게,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이 경험에 비추어 떠오른 또 다른 주제만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줄 뿐이었다.우선 시의 등장인물은 셋이다. ‘나’는 절경을 이루는 그의 설림을 보며 감탄하는 존재이다. ‘그’는 절경의 설림을 소유했지만 ‘그’는 숲에서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기에 ‘나’가 이곳에서 자신의 설림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망아지’는 ‘나’로 하여금 눈감기 전에 지켜야할 맹세를 이행하라고 부추기기 위해 마구를 흔들며 재촉하는 존재이다.‘나’는 지나가다 ‘그’의 숲을 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숲에 ‘나’가 왔다는 사실도, 자신의 숲이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을 만큼 그렇게 아름답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한편 ‘나’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재촉해야하는 입장인 ‘망아지’는 당혹스럽다. 전진만을 아는 망아지의 눈에는 가장 어두운 저녁 날의 얼어붙은 호숫가라는 기괴한 장소에 위치한 설림에 취한 ‘나’가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망아지’는 숲을 아름답게 만드는 숲의 심연도, 어둠도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망아지’는 마구를 마구 흔들어, ‘나’의 주의를 그가 지나가야할 솜털 같은 눈발과 산들바람으로 돌린다. ‘나’로 하여금 지켜야할 맹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한 확신 없이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A와, 그 사람을 보며 그 진가를 알아채는 B. B는 A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하며 A를 칭찬하여 A에게 용기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B도 A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누군가가 멈춰 서서 감탄할 숲을 갖고도 모를 수 있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B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그런 감상은 접어두고 어디론가 가야하는 것이다.
201012566응용생물과학과 이주헌성 과 시경군을 제대한 후 복학한지도 어언 2학기째 접어들었지만, 나의 동기들은 아직도 군대에 있거나, 피트를 준비한다며 휴학하거나, 다른 과로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 과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가끔 다른 과 친구들과 밥을 먹는 경우를 제외하곤,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무척 많은 편이다. 그런 내게, 우연히 수업을 같이 듣는 같은 과 후배와 점심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다른 과 친구들의 지루한 전공과목 이야기나, 공감되지 않는 취업 이야기들을 귓등으로 흘리며 고개만 주억거리던 지금까지의 무료한 점심식사와는 확실히 달랐다. 우리 과 교수님들, 우리 과에 관련된 취업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신나서 밥이 식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이야기의 화제가 내가 듣는 교양 과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 화제가 내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오빤 이번학기 교양 뭐 들으세요?”“저 동서양 문학비교랑 인류학 입문요.”“아~ 그러시구나~ 저도 저번 학기에 문학 쪽으로 교양과목을 들었는데.. 교수님이 너무 성 적인 주제로만 말씀하셔서 뭔가 거부감도 들고 불쾌하더라구요. 학점도 잘 안 나오구..”사실, ‘저런~ 제가 들었어도 정말 불쾌했을 것 같아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엄청 감명 깊게 읽은 나로서는(여태까지 읽은 현대 소설중 가장 멋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학을 배우러 갔는데 교수님이 ‘성’을 말씀하셔서 불쾌했다니. 문학은 사람의 생활을 그려내는 예술이고, 그 중에서도 ‘성’에 관한 부분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부분인 만큼, 사람의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아닌가? 학창시절엔 만나지 못했던 낯선 단어들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부분은 열린 마음으로 이해할 생각을 해야지. 한 학기 동안이나 그 이름 모를 문학교양 수업에서 문학 속 ‘성’에 대해 귀가 아프도록 듣고도 여전히 문학 속 ‘성’의 모습을 불쾌하게 여긴다니. 사실 나도 문학에서 나타나는 성의 모습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아가씨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한마디 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결심 따윈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다.“교수님이 문학 강의를 하시는데 성 드립을 하셔서 불쾌하다구요?, 저기요, 문학 작품에서 어떻게 성을 떼어놓고 얘기를 해요? 교수님이 문학 얘기를 하면서 성 이야기를 하게 되는건 당연하죠. 왜냐하면...”여기까지 말하는데, 어느새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배도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나도 가급적이면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그 후배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곧 동서양문학비교 수업이(이날이 목요일이었다) 시작할 시간이어서 빨리 산학관으로 가야만 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잘 들어가라고 인사한 후 그 후배와 헤어졌다. 그날 이후로, 그 여자 후배는 물론이고, 간혹 눈인사 정도는 주고받던 그 여자 후배의 친구들도 과에서 마주치게되면 어째 나를 본 체 만 체 한다. 단단히 변태로 찍힌 것 같다. 겨우 친해지기 시작한 첫 후배인데, 뭔가 억울하다.나의 경험에서처럼, 일상 대화의 주제로 ‘성’은 낯선 주제다. 물론 그것은 대화 당사자들이 ‘성’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욕망과 호기심이라는 성의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온 ‘성’에 대한 이야기의 욕망의 대상을 대화의 상대방이 자신으로 오인하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열등감 혹은 자만심이 각각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감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그 욕망의 대상이 대화의 상대방이 되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덕분에 ‘성’이라는 주제는 공공연한 대화거리로 사용되기보다는, 정말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사용되어왔고, 그 역사 또한 매우 깊다.이처럼 우리는 ‘성’에 대한 주제로 공공연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여기지만,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성’의 욕망 부분을 너무 확대해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성’에는 욕망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은 종을 이어가는 방식이고, 타인에대한 배려심과 숭고함, 그리고 사랑을 포함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의해 얼마나 놀라운 기적들이 이뤄졌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류라는 종 자체가 존속될 수 있는 수단이었고, 수많은 예술가들은 ‘성’에 대한 경험을 통해 놀라운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헤리엇 스미슨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갈망이 없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랬다면 그가 작곡한 환상 교향곡 역시 그 제목대로 ‘환상’이 되어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성을 포함한 걸작들은 문학에서도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오늘 감상한 시경의 애정시들은 ‘성’을 담아낸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들 중 하나로 꼽힌다. 대개 우리의 조상 하면 산과 강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며 여색을 멀리하는 선비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글 속에서 나타난 문학 작품 속의 모습이 그런 상상과는 달라서 무척 놀라웠다. 그것도 사서 삼경에 들어가며, 공자가 사특한 생각이라곤 없다고 말한 바 있는 시경에서 이런 직설적인 표현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 거듭 놀랐고, 역시 과거에도 사람 사는 모습은 오늘날과 다를 게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친근감도 들었다.
첫 경험201012566응용생물과학과 이주헌조그만 방에서 평소 마음으로 존경하던 그에게 모든 걸 줬다. 설렘과 두려움도 잠시, 모든게 끝난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런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일까. 하얀 색 위에 선명하게 찍힌 빨간 흔적.. 내가 실수한건 아닐까? 하지만 후회하진 않을 거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그 사람이 잘못한건 없다. 친구들에 비하면 난 오히려 늦은 편이니까.스물한 살. 그래.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밀려드는 이 허무감..아, 투표란 이런 것일까?.. http://cafe.naver.com/ehon/466137대선이 열리는 해 연말만 되면 어김없이 하루종일 개표방송을 한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시청하던 TV속에선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이 화면을 스쳐지나갔지만, 사실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껏해야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선거에 표를 던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그런 내게 18대 대선이 찾아왔다. 성인이 되면 꼭 해보고 싶었던 대통령 투표. 5년만에 한번 있는 선거니까,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리한 공약은 없을까 하고 공약집도 찾아보고, 후보토론회도 꼼꼼히 시청했다. 그리고 투표 당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후보자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붉은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었고,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투표장을 나왔다.지금의 대통령은 붓으로 그리는 시대입니다.어느 대통령을 그릴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내가 뽑은 대통령 저기 보내놓고.너 5년 전세잖아. 주인은 우리다. 하는 겁니다.누구를 그리든, 국민의 권리는 영원한 거니까요.김제동, 게릴라 투표 장려 콘서트 中투표권은 민주주의의 꽃이다. 하지만, 굳이 투표권을 논하지 않더라도, 국민이 나라의 근본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대통령은 단지 국민들의 대리인으로써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대리 수행하는, 국민의 신하와 같은 직책인 것이다.이러한 간접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로의 직접 민주주의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동양의 역사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동양의 통치의 중심에는 군주가 있었는데, 통치의 명분은 하늘로부터 받았다 주장하기도 하고, 군주의 덕을 명분으로 세우기도 해왔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통치를 그 통치방식으로 하는 동양의 군주제는 서양의 그것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였고, 그러한 차이는 근대까지 지속되었다.그러나, 놀랍게도 서양과는 방향부터가 전혀 다른 통치 방식임에도 그 핵심은 같다. 바로 백성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민본 사상을 그 전제로 한 것이다. 그 민본 사상의 근원은 선진 시대에 씌여진 좌전에 휼민, 이민, 중민, 귀민 사상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지난 시간에 배운 민본 사상 중에서도,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염유에게 가르친 공자의 민본 사상이야말로 현대인들이 계승해야할 민본사상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논어 자로편 中공자가 평생동안 ‘忠’, ‘恕’와 같은 내면적인 가치를 추구할 것을 가르쳐온 것과는 상반되게도, 공자는 염유에게 백성이 스스로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라고 가르친다. 이는 듣는 이를 혼란스럽게 할 만한 관점이다.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화학 반응으로 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를 한 유리병에 모아 넣고, 그곳에 불꽃을 튀겨 주어야 한다. 그러면 유리병 내부의 두 기체는 엄청난 열을 순식간에 발산하면서 서로 반응하여 물이 만들어지고, 물은 유리병 표면에 뿌옇게 맺힌다. 화학 반응을 시작하기 위해서 튀기는 처음의 불꽃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백성을 부유하게 하라’는 가르침에 해당한다. 충분히 많은 백성이 모였으면, 부유함이라는 작은 불꽃을 그들에게 전달해주어야만 도의 추구라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성을 우선 부유하게 한 후에 가르치라는 공자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원형 그대로 계승해도 좋을 만한 시대를 초월한 민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