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과연 도래 하였는가?-자본과 권력이라는 이름의 선언문The end of art, really did come?The name of Declaration is power and capital제출일2013.12.2전공과목학번담당교수이름최현아Ⅰ. 머리말1Ⅱ.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ⅰ. ‘예술의 종말‘의 시작.3ⅱ. 모던과 컨템퍼러리4ⅲ. 탈 역사의 시대6ⅳ. ‘예술의 종말’ 이 가지는 의의8Ⅲ. 종말에 대한 다양한 견해ⅰ. 예술의 종식 - 헤겔9ⅱ. 비판적인 견해 - 폴 크라우더11Ⅳ. 예술의 종말의 오류 - 본 고의 시각ⅰ. 탈 역사의 불가능12ⅱ. 아서단토의 ‘선언문’13Ⅴ. 본 고의 결론ⅰ. 자본이라는 이름의 선언문16ⅱ. ‘권력주의 선언‘ 의 가능성19Ⅵ. 마치며33< 참고문헌 >Ⅰ. 머리말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Three Studies of Lucian Freud,1969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얼마 전 미술계를 다시 들썩이게 한 일이 있었다. 기사 제목도 요란하고 자극적으로 과 같이 쓰여 졌다. 바로 영국 표현주의 화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가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에 낙찰 된 것이다. 이 세 폭의 회화 작품의 수수료를 포함한 낙찰가는 1억 4,24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528억 원에 이른다. 물론 기사 문구 말마따나 그 전까지만 해도작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990만 달러에 낙찰 된 뭉크의 가 그 기록을 세웠었다.이 뿐만 아니다 앤디워홀의 ‘죽음과 재난’ 시리즈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실버 카 크래시’ (2중 재난)은 지난 13일 1억 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1,120억 원에 팔려 자신의 작품 최고 가격을 갈아치웠다.이처럼 미술 시장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이미 어떤 이들이 생각했던 예술이라는 아웃사이더 영역을 벗어나 확대되고 있다.이처럼 예술계(정확히 말하면 미술시장)가 우리의 삶에 까지 대두되고 있는 마당에 ‘예술의 종말’ 이라는 테제를 내민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서 단토는 컨템퍼러리의 패러다임을 막스 에렌스트의 “콜라주란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실재가 이것들 모두에게 낯선 하나의 평면 위에서 만나는 것” 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유하였는데, 차이점은 서로 구별되는 예술적 실재들에게 낯선 하나의 평면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이 실재들 모두가 이제 서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런 특징의 근거는 컨템퍼러리 아트가 미술관의 원리에 근거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미술관에서는 모든 미술이 합당한 위치를 차지하여야 한다거나 그 미술이 어떠한 것으로 보여 져야 하는가에 대한 선천적인 기준도 없으며 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내용물 모두가 맞아 들어가야 하는 특정한 내러티브도 존재하지 않는다.이런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인 개념미술가인 조셉 코수스의 설치작업을 떠올리면 되겠지만, 이런 것들도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흔한 것이 되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예술가가 직접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미술관의 자원을 갖고서 서로 간에 역사적이거나 형식적인 연관성이 없는 사물들의 전시회를 조직해 내기도 한다.이런 특성도 차이가 있지만 사실 아서 탄토는 모더니즘은 어떠한 물음과 동시에 종료되었다고 보았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한갓된 실재 사물, 즉 예술로서 공민권을 획득한 그 어떠한 사물에 의해서건 구성될 수 있다면 “왜 나는 예술 작품인가?” 하는 질문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 모더니즘 회화에서의 질문은 “나는 가지고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미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단 한가지의 질문이었다.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컨템퍼러리의 패러다임에서 볼 수 있듯이 컨템퍼러리는 다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법, 선대의 선배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 작품화 시키면서도 그 정신, 예술로서의 자아와 주체만은 현대에 머물러 있다.이처럼 예술은 어떠한 선상위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그 이전과는 다르게 현대에는 이미 그 일직선으로 놓여있던 선상을 벗어났다. 위한 단토의 의견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모더니즘 회화는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을 강조하여 회화임을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단토가 정의한 컨템퍼러리에서의 작품들은 어떠한 특정한 형태가 없다. 그것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정신성(헤겔식의) 이 중요한 것이다.왼쪽 오른쪽 아서단토가 정의한 모더니즘인 추상표현주의 예술은 물질성이 앞선다. 반면 컨템퍼러리인 브릴로 박스는 정신성이 앞선다.이렇듯 단토가 자신을 헤겔의 제자라고 지칭했듯이, 헤겔에게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이 아이디어를 얻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단토는 자신의 의견과 헤겔의 예술의 종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그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종식과 종말의 차이일 것인데, 역자의 표현에 의하자면,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은 연극에서의 제 1막이 끝나고 제 2막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면, 헤겔의 종식은 이제 정신성이 압도하는 시대이므로 어떠한 하나의 학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단토의 종말이라는 이 단어는 Death가 아닌 end, 1막이 끝났지만 그것은 2막이 다시 오르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헤겔의 종식은 예술의 정신성이 물질성을 압도하면서 물질로서 현현되는 예술의 기반을 상실하고 이로인해 예술이라는 주체가 종식되었다고 본 것이다.거기에 단토의 시대와 헤겔의 시대는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단토는 자신을 가리켜 거듭 태어난 헤겔리안(bon-again Hegelian)이라고 말할 정도로 헤겔을 따랐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미학을 헤겔과 구분 짓는다. 그 근본은 헤겔의 종식에서 오는 것과 진배없으나, 단토는 자신이 처한 1960년대를 헤겔이 예언한 역사개념이 붕괴되는 시기로 보았으며, 헤겔이 이런 개념을 언급했을 시기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으므로 헤겔의 철학을 비판 없이 모두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그리고 그는 일상적인 것의 변용, 즉 앤디워홀의 브릴로 박스라든지 마릴린 먼로를 우상화 시킨 팝아트 작품이 일상적인 소재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였다.물론 그의 작품은 후세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마네의 과 피카소의 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평가가 격상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고, 해석에 있어서 심리학적 분석보다는 작품 그대로를 해석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그 이유는 감상자의 태도가 주체적으로 자신이 보는 그대로로 해석하는,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바라볼 때 “이 작품은 고야가 비굴하기 때문에 결코 참혹하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이러한 작품을 남기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당연시 되는 것이, 감상자가 예술가의 목적과 해석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야의 이 작품이 정치적인 목적성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것이다.이처럼 예술작품을 바라 볼 때 결코 우리는 그것을 예술가의 목적 그대로에 따라 해석하지 않는다. 즉, 아서 단토의 의견 또한 그 자신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라는 객관적인 역사판단의 잣대로서 제시했지만, 예술의 종말, 즉 선언문의 종말을 이야기 하면서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고전미를 탐구하는 것을 어떠한 시대착오적이고 고전적이며, 컨템퍼러리 예술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즉, 아서 단토의 이론은 종말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이 부분은 단토 또한 언급했다.)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이 결코 현상제시만이 아니다. 이것은 인과적인 것으로 봐야한다.그의 이러한 현상제시로 인해 컨템퍼러리 시대라는 것을 인식 하게 된 사람들은 현대예술에서 (단토의 현대 = 컨템퍼러리) 그 이전에 해 왔던 것을 예술로서 보지 않는다.그것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모나리자를 미술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뒤샹의 ‘L. H. O. O. Q 수염난 모나리자'는 미술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왼쪽 오른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모나리자/르네상스/15세기경/유화고 있기 때문에, 강압적인 형태를 띠지 않고 있다. 본 고에서는 강압적인 선언문의 형태로 변모할 가능성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단, 본 고에서 언급하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표상한 사회에서의 정부에서 나오는 정치적인 권력에 한정한다.자본에 대해서 언급했다시피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본과 권력이 동시에 운용되어 예술이 가능케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치 가 자체가 상인출신 곤팔로니에레(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고위 민간 행정관)인 코시모 데 메디치로부터 시작되기에, 자본과 권력을 함께 가지고 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웠다.대표적으로 앞서도 언급했던 보티첼리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많은 작품에서 메디치가에 대한 경배를 느낄 수 있다.메디치가의 직접주문에 의해 탄생한 작품 와 은 곳곳에 정치적인 지물(地物)이 숨어있다.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 베라 두 작품 모두 붉은 천을 들고 있거나 입고 있는 인물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천에 문양이 있다. 이 문양은 메디치가의 표식으로 에서는 마치 메디치 에서 갓 탄생한 비너스를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인다. 게다가 등장하는 월계수 및 오렌지 나무는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데다 오른쪽에 비너스를 감싸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플로라 여신은 피렌체의 의인화이다.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또한 마찬가지다. 비너스의 탄생과 유사한 점을 많이 나타내 한 쌍의 그림이라고도 불리는데, 같은 의미의 플로라 여신이 등장하며, 왼쪽 끝의 헤르메스와 비너스의 붉은 천 또한 같다.헤르메스는 학문의 수호신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그는 의학지식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메디치가에서 이 신을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한 건 이 때문이었다. 즉, 의학의 신인 헤르메스, 머큐리가 가진 이 메디쿠스(Medicus:의사)의 성격이 우연히 메디치가(‘메디치’는 라틴어 ‘메디쿠스’의 복수)의 이름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디치가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상인다.
[미술과 사상표현 : 탈정치화의 가능성에 대하여]Ⅰ. 머리말Ⅱ. 권력에 의한 미술 보티첼리, 다비드, 고야ⅰ. 르네상스 산드로 보티첼리, 메디치가를 위해 살다.ⅱ. 신고전주의 자크 루이 다비드, 정치적 미화의 대가ⅲ 낭만주의 고야, 6년 뒤에 그려진 Ⅲ. 러시아 구성주의와 2차 세계대전 노골적인 선전의 정치미술Ⅳ. 나치와 미술의 통제Ⅴ.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정치화의 가능성Ⅵ. 반면교사와 롤 모델ⅰ . 반면교사 반딧불이의 묘에 나타난 일본의 제국주의ⅱ . 롤 모델 국적 없는 케테 콜비츠ⅲ . 반딧불의 묘와 케테 콜비츠의 차이점Ⅶ. 마치며Ⅷ. 참고문헌Ⅰ. 머리말얼마 전 대법원 형사 2부(주심 김 소영 대법관)는 일종의 행위예술인 “플래시 몹(flash mob)”도 정치적 내용을 담았다면 의 신고 대상이 된다는 판결을 하였다.지난 대선 때 홍 성담 작가의 여러 작품들 또한 많은 질타를 받았다. 박 대통령(당시 박 후보자)의 출산장면을 연출한 ‘골든타임-닥터 최 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는 새누리당이 “예술은 예술이어야 한다. 예술이 정치수단화가 돼 사용되면 예술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며 “여성들과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숭고한 순간인 출산을 비하하면서 박근혜 후보를 폄훼한 그림을 내건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제제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이는 정치와 미술을 배타적이라고 판단한 사례들 중 몇 가지들인데, 타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렇듯 정치적 색채가 들어간 미술에 대해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법적인 제제 또한 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현시점 우리나라는 예술의 탈정치화에 대해 모색하는 부분이 엿보이는데, 표현의 자유라는 예술가의 권리와 상충하면서 많은 담론을 조성하고 있다. 이는 가능한 것인지, 본 연구에서 역사적 사례를 살펴 현 미술계의 상황에 접목시켜 탈정치화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도출해 제기된 문제 사례가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고,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하여 본 연구의 성과를 보이도록 하겠나폴레옹에게 매료된 수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마치 사보나롤라에게 매료되어 말년의 보티첼리가 그의 그림을 불태웠듯이, 사상의 문제는 화가에게 강력한 것임에 분명하다.어찌됐던 다비드는 화가로서 정치 선동에 복무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마라와 로베스 피에르를 영웅으로 그리는 일을 주저 하지 않았다.마라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신고전주의 / 1793년 / 유화/캔버스에 유채 / 128×165cm / 벨기에 왕립 미술관 소장「미술, 정치선동의 도구가 되다」, 박선영, 2010.6.29., 머니위크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 , 1793년 7월 13일에 자신의 집에서 지롱파의 열혈 당원 코르데에 의해 살해당한 마라. 그는 공포정치로 무수한 정적을 만들어 낸 혁명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미술은 대중을 교육시키는 도구가 돼야 한다.’ 고 주장했던 다비드의 역작으로……. (중략)……. 그림 속 마라는 그리스도 순교자의 모습과 같이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듯 묘사돼 있다.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어둡게 표현된 배경에 실제 비례보다 길게 표현된 근육질의 팔은 그의 건강하고도 강인한 육체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얀 천에 물든 선홍색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Stigmata)을 암시하는 쇄골에 난 상처는 그의 죽음이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현실 속의 마라는 고질적인 피부병에 시달리는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괴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의 현장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해, 미술을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기능 이외에도 시대적 상황을 전달하는 정치적 메시지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마라의 죽음을 고귀하고도 억울한 희생으로 묘사해서 민심의 동요를 얻어내려 한 다비드는 그림의 배경과 욕조의 색을 달리해 3개의 작품(현재 이들은 루브르 미술관, 랭소 미술관,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을 대중에게 선보였다.그의 의도로 많은 사람들이 마라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지롱파 탄압에 찬성표를 던지며불지 않았다. 거기에 들라로슈의 그림에는 안내인이 있다. 사실 모든 병사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간 뒤 안정적인 노새를 타고 안내인에 따라 산을 올랐다고 한다. 우리가 책이나 역사에서 읽어왔던 영웅적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사실이다. 즉, 다비드의 그림은 사나운 날씨와 험준한 산세의 위험 속에서도 침착하게 병사들을 승리로 이끄는 영원한 영웅 나폴레옹의 모습을 강조하는, 기록화가 아닌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하기 위해 미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마치 “민중은 단순하다. 빵 한 덩어리와 왜곡된 정보만 주면 국가에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고 말한 괴벨스(나치의 국민계몽과 프로파간다의 책임을 맡고 문화 예술, 언론을 통제한 인물) 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ⅲ 낭만주의 고야, 6년 뒤에 그려진 고야, 그보다 명예로운 별명을 가진 화가가 있을까? 새로운 증인으로서의 화가, 민중의 고발 자이자 시대를 앞선 자, 혼돈의 시대를 기록한 화가, 등 후세에 기록되는 화가들 중 가장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그러나 그의 일생을 살펴보자면 프로메테우스라기보다는 그 덕에 평생을 곪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잡은 독수리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입장으로 그가 화가로 성공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재산의 보전과 확대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죄악시하기 어려운 입장은 있다. 그러나 그는 부르봉 왕조, 종교 재판소, 프랑스 군 , 영국군 모두를 위해 일했고 어떤 쪽으로부터도 특별히 해를 당하지 않았다. 물론 훌륭한 예술가 중에 철두철미하게 대의에 충실했던 사람을 찾아보긴 어렵다. 혁명적인 예술가도 예술가로서만 혁명적인 경우가 많다.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치엔테스(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1814 / 낭만주의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266×345cm / 프라도 미술관예술 지상주의자들이 예술가의 일생을 파헤쳐 심리학적 분석으로서 작품을 해설할 때고 매도당하게 되면서 구성주의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러시아 내에서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사진과 포스터의 발전,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미술의 정치적 특성은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전쟁을 선동하는 포스터로 발전하게 된다. 다소 비약하자면, 구성주의 예술가 중 가장 그 이상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엘 리시츠키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보는데, 독일의 발달된 인쇄기술과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적 특성으로 인해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작자 미상 작자 미상 이처럼 1차 세계 대전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 까지, 미술은 현 정부를 옹호하며, 전쟁을 정당화 하고, 더 나아가 민중을 선동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물론 독일만 포스터를 내건 선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등 유럽 국가에서도 이 ‘대단한 발상’을 시도했다.처칠이 루즈벨트에게 영국은 지금 파시즘과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941)양의 탈을 쓴 늑대 겁이 없거나 좀 바보 같은 늑대야, 갈기갈기 찢겨 죽고 싶어?그러나 가장 효과적이었던 포스터는 전쟁에 늦게 참여한 미국의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를 가장 처음 본 곳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였는데, 전쟁 당시 포스터의 예시로 든 단 하나의 도판이었다. 그만큼 이 포스터는 유명하다.1차 세계 대전 모병 포스터「[김석의 미디어 책읽기(40)] 프로파간다(에드워드 버네이스, 2009)」, 김 석 , 공존1916년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를 슬로건으로 반전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그때까지 반전 국가였던 미국을 전쟁에 참가시키기로 한다. 그러자 무엇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선전 기관 ‘연방공보위원회(United States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이 탄생했다. 조지 크릴(Geor험한 통제가 시작된다. 위의 분서갱유가 그 시작을 알렸고, ‘직업 공무원 복원을 위한 법’을 제정하여 교수로 있던 수많은 현대 미술가들을 잘랐다.1934년 제 6회 전당 대회에서 히틀러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유파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그런미술에 대한 비평문을 쓰는 것도 모조리 금지했다. 이 모든 것들은 유대인이 독일의 본질을 약하게 하는 음모라고 주장하였고, “이후에는 주례사 같은 미술 감상문이 판을 친다.”이 시기에 미술 분과 의상을 맡은 치글러는 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예술의 고귀함과 저속함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한다. 1937년 7월 18일에 열린 ‘위대한 독일 미술전’과 바로 다음날 열린 ‘퇴폐 미술전’이 그것이다. 히틀러가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머릿속에 그려 본 바 있다고 하는 위대한 독일 미술을 위한 집이 있다.마치 그리스 신전과도 같다.위대한 독일 미술전 포스터와 그걸 관람하는 히틀러이 전시는 히틀러의 취양에 부합하는 고전주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은 작품들로 이루어졌다.건물 또한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크기의 건축물이며, 신전이라 불린 이곳에 어올 리는 작품들로 채워졌다.바로 그가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진 화가 아르노 브레커 같은 자들의 작품 말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두상을 조각하고 있다.)아르노 브레커 플로라신전같은 미술관 안에 그리스 미술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다면 이와 반하는 전시였던 퇴폐 미술전은 과연 어땠을까?수많은 사람들이 전시장 앞에 서있다. 이 전시에는 총 20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니 그 수만 생각하면 굉장히 성공한 전시였음에 분명하다.그러나 성공하도록 설계한 전시였겠는가? 앞서 언급한 위대한 독일 미술전과는 매우 대비되는 전시였음에 분명하다. 이 전시로 나치는 현대미술이 얼마나 불쾌한 것인지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단 매우 좁다. 골목길처럼 설계가 되어 많은 사람이 서로 부딪히며 그림은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달기도 하고, 너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