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Ⅱ. 본론1. 과 속에서 나타난 티베트의 모습2. 티베트의 역사와 중국과의 관계3. 중국의 티베트 공격과 오늘날의 티베트Ⅲ. 맺음말Ⅰ. 머리말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 그 중 중국사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그 영향을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막대하게 받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은 다수인 한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도 채 안되는 소수민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10%도 채 되지 않는 민족들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수의 역사가 아닌 소수의 역사를 공부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이에 소수민족이라는 주제를 과제의 포인트로 정했다.이 과제를 받고 어떠한 방식으로 과제를 풀어나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많은 생각 끝에 본인이 쉽게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영화로 소수민족을 알아보는 것으로 결정을 했고, 많은 영화들 중 가장 인지도가 높고 유명한 작품인 을 선택했다. 동시에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라는 작품 역시 감상했다. 같은 시대, 같은 인물, 같은 역사를 그리고 있는 이 두 영화는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듯 한 분위기를 풍기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다. 나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티베트의 역사와 현재 모습까지 담아 이 리포트를 작성하기로 했다.Ⅱ. 본론포스터 포스터 1. 과 속에서 나타난 티베트의 모습우선 설명하기에 앞서 이 두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은 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임신한 아내를 뒤로한 채 히말라야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낭가파르바트로의 원정을 떠난 하러. 강인함과 냉철함 그리고 이기적인 성격의 하러는 혹한의 산정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이것은 그의 험난하고 기나긴 여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영국군 포로수용소의 생활, 죽음을 건 탈출, 귀향을 위 국경지대에서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 세 살배기 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는 1941년에 출생하여 세 살 때 쿤둔의 자리에, 16세에 달라이 라마에 등극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 새 정부의 첫 번째 임무로 구영토의 회복을 외치면서 평화의 땅 티베트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중국은 티베트의 합병을 천명하고 총칼을 앞세우며 평온했던 영혼의 나라 티베트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격해 오면서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자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티베트의 분리 독립을 위해 애쓰는 달라이 라마, 그의 생애를 담담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13대 달라이 라마의 예언서를 읽는 티베트 승려 장면죽은 승려들 사이에 서 있는 악몽을 꾸는 달라이 라마 장면 이 두 영화 속에서 티베트와 중국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특정 장면들을 통해서 설명하려 한다. 먼저 에서 나온 장면이다. 하러와 그의 동료 페터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후 산에서 마주친 티베트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가까스로 티베트 마을로 들어가려 하지만 두 명의 티베트인에 의해 “외국인은 안 된다”고 쫓겨난다. 그 이유는 13대 달라이 라마의 예언서에 “언젠가 티베트는 외국인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이니 미리 예방하지 않았다가는 모든 승려와 사원들이 외세의 지배하에 놓이게 도리 것이며 달라이 라마가 외국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받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중국을 외국인(외세)로 지칭함으로서 티베트가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두 번째 장면은 중국의 티베트 침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씬으로 과 두 영화 모두에서 보여 진다. 바로 달라이 라마가 꾼 악몽이다. 중국인민군이 무자비하게 티베트사람들과 승려들을 살해하고, 어린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를 총으로 쏴죽이게 하는 장면이 달라이 라마의 꿈속 나타난다. 달라이 라마는 련과 탄압을 받으며 살게 되었을지 함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기도 하다.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부터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는 에서의 한 장면에서 나타난다. 중국이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자 (초대 조건은 경호원 없이 달라이 라마 혼자 오라는 것이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붙잡고 그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의 종교적 최고 존재인 달라이 라마에 대한 염려, 중국으로부터 티베트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는 1959년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다. 티베트인들은 중국이 티베트를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걱정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쓰는 등 티베트인들의 희생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난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된다. 에서는 인도로 망명하는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달라이 라마가 인도로의 망명길을 떠나 무사히 국경에 이르니 국경에 이르니 국경수비대가 다가와 묻는다.“감히 여쭈오니 그대는 누구시옵니까?”“보시다시피 미천한 비구일 뿐이오.”“당신이 부처이시옵니까?”“나는 그림자일 뿐이오. 물 위에 비친 달처럼 나를 통해서 그대들 자신의 선한 그림자를 보길 원할 뿐.”-의 한 장면, 인도로 망명하는 달라이 라마의 모습-두 영화를 감상하면서 티베트의 아픈 역사와, 티베트인에게 불교란 종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두 영화의 주인공인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해 간략하게 조사해 보았다.14대 달라이라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자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 통치권자이다. 달라이(Dalai)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듯이고, 라마(Lama)는 티베트어로 ‘스승’이라험과 의식을 통해 달라이 라마로 선택되고 18세가 되면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에 즉위된다.2. 티베트의 역사와 중국과의 관계티베트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초기 티베트는 문자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놓은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티베트가 알려진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 시기 중국과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이다. 원래 티베트의 영역은 오늘날의 티베트와 청해, 그리고 사천성의 서북쪽 일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오랜 역사과정 속에서 티베트의 모든 지역은 지도에서 보듯 중국 속으로 모두 합병되어 버리고 말았다.조캉사원 7세기 초기 티베트 지역에서는 민족의 영웅인 송찬간포(송첸감포)가 등장하여 티베트의 여러 부락과 부족을 통일하고 티베트고원에서 명실상부 통일국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정식으로 왕조이름을 ‘토번’이라 정하고 수도를 지금의 라사로 정했다. 송찬간포는 당왕조의 정치문화와 생산기술을 흡수하고자 하였고, 이에 그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결혼관계를 맺자고 청혼하였다. 결국 641년 당나라에서 온 문성공주를 처로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종이 만드는 기술 등 중국문화가 전해졌고 또한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고 티베트 문자가 만들어 졌다. 그러나 842년에 이르러 왕실 내에 내홍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부족 간의 투쟁이 벌어져 분열,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 것처럼 수많은 지방 세력이 일어나 상호간 정벌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3세기 중엽에 이르러 몽고제국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자 그에 따라 몽골과의 관계를 맺었다. 몽골제국이 정식으로 국호를 원으로 지칭하면서 티베트 역시 통합된 중앙정부에 직접 통치를 받는 하나의 지방행정구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이후 명왕조가 성립하자 명은 티베트와의 관계에 있어서 원 왕조의 방식과는 다르게 취급하였다. 사대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여 티베트 역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책봉체제를 이용하여 티베트 역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 가장 큰 업적은 티베트를 뒤덮고 있던 귀족제도를 완전히 폐지시기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통일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1644년, 명조가 멸망하고 청 왕조가 성립하였다.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청 왕조는 티베트에 대하여 봉건적 책봉관계를 적용하고 종주국의 개념으로 티베트를 통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러시아가 그들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해 일부 티베트 상류층과 결합, 중국으로부터 티베트를 분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는 30년부터 중국 관리를 티베트에 파견하였고, 1934년에는 수도 라사에 몽장위원해 주(駐)티베트 사무소를 설치하여 중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유지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 티베트는 독립정부를 구성했으나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군에 의해 1950년 침공을 받게 되었다.3. 중국의 티베트 공격과 오늘날의 티베트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티베트는 스스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했다. 동시에 티베트는 자립적인 독립정부를 구성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무시하고 1950년에 인민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공격하고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티베트에서의 제국주의 세력을 척결하고 티베트의 해방을 위한다는 명분이었다.중국의 티베트 점령 장면 중국의 공산군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라마에 즉위한 텐진갸초는 유엔의 티베트 문제 개입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였고 인도정부의 평화적 해결 요구 역시 내정간섭이라 하여 중국으로부터 묵살 당한다. 그리고 1951년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다.티베트 망명정부.인도 북부 다람살라 위쪽 맥그로드 간지에 위치한다. 언덕아래 보이는 지역이 다람살라이다. 1950년 이후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의 집회가 계속되어 왔다. 그러던 중 1959년 3월 10일 대한다.
제 1장 왜 경영이 중요한가경영자는 모든 종류의 조직에 있어서 활력을 불어넣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경영자가 리더십을 발휘해 경영활동을 하지 않으면 모든 생산요소는 다만 자원 그 자체로서 머물 뿐 결코 생산물이 될 수 없다. 더욱이 자유 경쟁 경제 체제하에서는 무엇보다도 경영자의 자질과 능력이 그 조족의 성공과 생존을 결정한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경영자의 능력과 성실성 그리고 성과는 자유 세계 국가 전체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영자란 무엇인가? 이는 오직 경영자의 기능과 역할을 분석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제 2장 경영의 기능과 의미경영이란 무엇인가? 1) 경영의 과업은 서로 다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 경영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은 문화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3) 모든 기업은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와 가치관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4) 경영은 또한 조직과 그 구성원들이 새로운 요구와 기회, 그리고 변화에 맞추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5) 기업은 커뮤니케이션과 개인의 책임을 바탕으로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6) 수익률 같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경영과 기업에 대한 적절한 성과 측정 지표가 될 수 없다. 7) 경영의 결과는 언제나 기업 외부에 나타난다.제 3장 경영의 세 가지 과업경영은 조직으로 하여금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또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 과업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첫째, 조직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특히 기업이라는 조직에 있어 사명은 경제적 성과를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 혹은 이데올로기가 어떻든지 간에 기업 경영은 이익 창출이라는 자신의 특수한 사명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 조직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모든 조직은 인적 자원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듦으로써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조직의 역할에서 그 구성원으로 하표는 어떻게 수립해야 하는가? 1) 목표는 ‘우리의 사업은 무엇이며, 무엇이 될 것이고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도출되어야한다. 2) 목표는 구체적인 작업으로 전환될 수 있어야만 한다. 3) 목표는 회사의 모든 자원과 노력을 가능한 한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어야한다. 4) 목표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여야 한다. 5) 목표는 기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부문에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경영의 8가지 주요영역(마케팅, 혁신, 인적자원, 재정자원, 물적자원, 생산성, 사회적 책임, 이익)에 대해서는 반드시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제 5장 기업 이론을 정립하라기업 이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조직의 환경에 대한 가정으로서 사회와 그 구조, 시장, 고객 그리고 기술에 대한 가정들이다. 둘째는 조직의 구체적인 사명에 대한 가정들이다. 세 번째는 조직의 사명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 역량에 대한 가정들이다. 이 모든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타당한 기업 이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수년간에 걸친 노력과 심사숙고, 그리고 시행착오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떤 조직이든 성공을 하려면 기업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기업 이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에는 기업 이론의 4가지 명세서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환경, 사명 그리고 핵심 역량에 대한 가정들은 현실과 부합해야 한다. 2) 환경과 사명 그리고 핵심 역량에 대한 가정들은 상호 부합해야 한다. 3) 기업 이론은 조직 전체에 걸쳐 알려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4) 기업 이론은 끊임없이 재검토되어야 한다.제 6장 비영리조직에게 배우는 교훈조직의 경영이 사명과 사명의 완수로부터 출발하나다는 것은 아마도 기업이 비영리 조직에게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일 것이다. 사명에서 출발한다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조직, 특히 대규모 조직의 가장 일반적인 퇴행성 질병들을 예방할 수 있다. 비영리 조직들은 외부세계, 즉 환경과 공동체 그리고 잠재 고다.제 7장 성과를 올리고 부를 창출하라연금 기금이 기업의 새로운 소유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보유 주식을 처분할 수 없고, 오너 경영자가 될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소유주이다. 그들은 기업 경영자에게 성과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해야 하고, 또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경영자는 그럴듯한 숫자로 표현된 좋은 의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와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독일과 일본의 기업들이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판단해 보아도, 부의 창출 능력을 극대화하는 경영이 이해 관계자들의 이익을 최대한 균형 있게 만들기 위한 경영, 또는 주주의 단기 자본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영보다 훨씬 더 높은 성과를 올리는 것만은 확실하다.제 8장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라어떤 조직이든 필연적으로 사회와 지역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조직의 사회적 챔임이 발생하는 영역(조직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사회 자체의 문제)에 경영자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조직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경영자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직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닌 이상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완전이 제거해야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한다. 기업의 경영자에게 사회 문제들은 해결해야 할 도전인 동시에 커다란 기회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회 문제의 해결을 사업 기회로 전환함으로써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는 동시에 기업의 목적도 달성하는 것은 기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한계로서의 권한 문제는 조직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책임과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순전히 우발적이고 비의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영향 자체가 이미 조직이 권한을 행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경영자는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조직의 성과 달성 능력을 위태롭게 하거나 손상시킬 우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졌다. 첫 번째 종류의 가정들은 경영의 원칙에 관한 것들이고, 두 번째 종류의 가정들은 경영의 실제에 관련된 것들이다. 먼저 경영의 원칙에 대해 설명하자면 첫째, 경영은 ‘기업’경영이다. -경영은 모든 종류의 조직들의 독특하고 구체적인 기관이다. 둘째, 세상에는 ‘단 하나의 올바른 조직 구조’만 존재한다. -조직의 구조는 그 조직의 과업에 맞추어져야 한다. 셋째, 세상에는 ‘단 하나의 올바른 인적 자원관리 방법’이 존재한다. -인적 자원 관리란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인적 자원 관리는 사람을 리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장점과 지식을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 이다. 경영 실제에 관한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 시장 그리고 최종용도는 ‘주어진 것’이다. -기술도 최종 용도도 경영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가 아니다. 둘째, 경영의 범위는 ‘법적으로’ 규정된다. -경영의 범위는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경영의 범위는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규정 된다. 경영은 전체 프로세스를 포괄해야만 한다. 그것은 경제 사슬 전체에 걸쳐 발생하는 결과와 성과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셋째, 경영의 범위는 ‘정치적 국경’에 의해 규정된다. 넷째, 경영의 영역은 ‘조직 내부’이다. -경영에 있어 국가적 경계는 일차적인 제약 요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경영의 범위는 정치가 아닌 경제적 실체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제 10장 부를 창출하기 위한 정보기업은 어디까지나 부의 창출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경영자가 의사 결정을 내릴 때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네 가지 정보, 즉 기초정보, 생산성 정보, 역량에 관한 정보, 자본과 인재에 배분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먼저 기초 정보란, 경영 진단 도구로서의 정보를 말한다. 둘째로 생산성 정보. 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 간에 오직 노동자들의 생산성만 측정하는 것은 더 이상 경영자에게 필요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경 연결되지 않으며 자본과 사람은 기업이 우수한 성과를 올리게 될지 혹은 빈약한 성과만을 올리게 될지를 결정 한다.제 11장 목표관리와 자기관리목표 관리와 자기 관리에 의한 경영은 모든 경영자로 하여금 기업과 개인의 공동의 번영을 자기 자신의 목표로 인식하도록 해준다. 경영자는 누군가가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에 행동한다. 어떤 기업이든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팀을 구성하여 개개인의 노력을 공동의 노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기업의 각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공헌해야만 한다. 각 부문의 경영자들의 목표는 회사 전체의 목표 달성을 위해 사업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자신이 공헌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제 12장 인사관리의 기본원칙경영자가 수행하는 모든 의사 결정들 가운데 사람에 관한 결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조직의 목표달성 능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인사 관리에 대한 의사 결정을 좀 더 효과적으로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사 관리에 대한 의사결정을 좀 더 잘하기 위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경영자는 많지 않다. 인간 존재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마셜과 슬로언만큼 서로 자른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인사 관리에 대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만큼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원칙을 따랐다. (인사 관리의 4가지 기본 원칙) 첫째, 어떤 직무에 사람을 배치했는데 그 사람의 성과가 신통치 못하다면, 그 의사 결정은 잘못된 것이다. 경영자는 그 사람을 비난할 이유가 없고, ‘피터의 원칙’을 들먹이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다. 잘못은 경영자가 한 것이다. 둘째, 조직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최소한 책임감 있는 구서우언들로 하여금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경영자의 의무이다. 셋째, 경영자는 인사관리에 대한 의사 결정을 좀 더 효과적으로 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넷째, 신
1. 배분협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협상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한쪽이 좀 더 많이 차지하면 다른 쪽은 그만큼 덜 가져가게 되는 그러한 광경이다. 이와 같이 밀고 당기는 경쟁관계 속에서 한쪽이 더 큰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되면 상대방은 그만큼 적게 차지하게 되는 협상을 흔히 배분협상이라고 한다.협상의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배분게임이다. 게임을 해서 한쪽이 이기면 상대방은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되고, 한정된 자원이나 예산분배의 경우와 같이 한쪽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쪽은 그만큼 적게 가져가야하는 협상상황을 배분적 협상상황(distributive bargaining situ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협상상황은 또한 승패의 협상상황(win-lose bargaining situation) 혹은 경합적 협상상황(competitive bargaining situation)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협상상황에서 협상 당사자는 당연히 손에 쥐게 되는 몫을 극대화하기 위한 협상전략을 선택한다.배분협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1) 영합적(zero-sum) 상황. 2)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 3) 자신의 양보를 최소화. 4) 제한된 정보만을 교류. 배분협상에서는 나와 상대의 근본적인 이해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협상과정에서 상대의 처치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협상당사자들은 상대방과의 공통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상대와의 차이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오직 서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상대에게 제공한다. 자신에게 이득이 보장되는 정보만 상대가 접할 수 있도록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상대로부터는 최대한의 정보를 유도하여 자신의 협상력을 높이려 하고,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여 궁지에 몰아붙인다.배분협상은 다음 목차에서 다루는 통합협상(integrative bargaining)과는 다르다. 통합협상은 파이의 크기를 크게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통합협상은 갈등의 창의적 해석을 통해 공동이익의 규모를 크게 하는 작업이지만, 통합협상도 결국은 최종 단계에서 배분협상의 사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점 때문에 협상을 좀 더 직선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분협상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배분협상을 하는데 있어 체크해야할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먼저 첫째,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 협상상대와 계약을 하는 체결하는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다. 협상력의 주요한 원천이자 마지노선)에 집중하는 것이다. BATNA는 협상 참여자의 저항점과 협상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저항점은 BATNA보다 좋은 합의결과를 의미한다. 협상 참여자들은 저항점보다 좋지 않는 결과가 예상될 때 협상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강력한 BATNA의 존재는 높은 저항점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배분협상에서 강한 협상력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상대의 저항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배분협상을 위한 전략전술의 핵심은 상대의 저항점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저항점을 재평가하도록 만드는ㄴ 것이다. 상대의 저항점은 협상이슈들에 상대방이 부여하고 있는 가치, 그리고 협상과정에서 치르게 되는 비용을 감안하여 정해진다. 따라서 상대의 저항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로는 1) 특정 결과물(목표값)에 상대가 부여하고 있는 가치, 2) 협상의 지연 및 난관에 대한 상대의 기대비용 3) 협상결렬에 대한 생대 기대비용 등을 고려해야한다. 셋째,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높은 목표값을 가지라는 것이다. 목표점은 초기 제안과 관련이 있다. 목표값은 협상 이익의 상한성을 의미한다. 대부분 초기 제한은 ZOPA(Zone of Potential Agreements, 합의가능영역) 범위 밖의 상한선에 가까운 값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높은 기대치를 가진 협상가는 높은 목표값을 가지고 있다. 기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더 높은 목표를 가진 협상가가 더 나은 협상결과를 거둔다. 넷째, 초기 제안은 먼저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초기 제안은 교섭과정의 착점이 되기 쉽다. 협상이 초기 제안값을 중심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있고, 상대의 역제한도 초기 제안을 중심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배분협상에서는 초기값을 누가 선점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협상과정에서 착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양보는 점진적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보를 하는 경우 연속으로 양보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양보를 얻어낸 다음 자신의 추가 양보를 제시하는 것이 좋다. 양보는 주고받는 것이어야 한다. 배분협상에서 합의과정은 공정성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양보는 공정성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논리가 전혀 없는 협상에서는 부족한 논리도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2. 통합협상앞에서 서술한 배분협상은 고정된 파이를 두고 협상 당사자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협상형태였다. 통합협상은 배분협상과는 달리 협상 당사자들 간에 고정된 파이가 아닌 파이 자체의 크기를 늘리는 것을 통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승리공유의 상황을 만들어 가는 협상이다. 이러한 통합협상은 참가자들이 모두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문제해결 전략을 수용할 때 가능한 협상이다.모두가 문제해결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참가자들 간에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적이고 협동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적이고 협동적인 관계를 통해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가능해야 한다. 배분협상에서는 정보의 교환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배분협상에서는 정보자체가 협상력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유리한 정보를 상대에게 전달하고 상대의 BATNA와 관련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목차Ⅰ. 머리말Ⅱ. 탕평책 실시의 배경Ⅲ. 영조대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정비Ⅳ. 정조대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정비Ⅴ. 맺음말Ⅰ. 머리말Ⅱ. 세도정치의 성립Ⅲ. 세도정치의 성격Ⅳ. 세도정치의 전개Ⅴ. 맺음말머리말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상호 유기적 연결을 가진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는 탕평론 및 세도정치의 전개라는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물론 18세기 탕평론이 제시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었고, 영조대에 전개된 완론탕평(緩論蕩平)의 입장과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준론탕평(峻論蕩平)은 각기 상이한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이 시대에 탕평론이 제시된 배경과 그 전개, 또한 그것을 이끌었던 왕정체제 모습들을 알아보고자 한다.Ⅰ.탕평책 실시의 배경1. 붕당 정치의 전개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속에서 위정자들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통치 질서를 개편하고 수취 체제를 조정하여 당면한 위기에서 우선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붕당 정치를 통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고자 하였다.붕당 정치는 사림의 집권과 더불어 모색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주재하였다. 그런데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림들은 붕당을 조성하여 정치 질서를 개편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2. 붕당 정치의 변질양반 지배 세력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었던 붕당 정치는 붕당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면서 변질되어 갔다. 그러나 이른바 경신환국 이후 붕당 사이의 대립 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즉, 집권당은 철저한 탄압으로 상대당이 재기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부터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 붕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히 행해졌고, 외척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져 갔으며,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미치는 등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탕평론과 탕평운동은 영조 초기의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정치운영 원리로 발전해가야 할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Ⅱ. 영조대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정비1.탕평책의 시행영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종전과는 다른 방식을 채용하였다. 왕은 요, 순과 같은 고대 성왕(聖王)을 자처하면서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썼다.탕평을 표방한 정국운영 논의는 숙종 초(17세기말)에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당시는 붕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상호 공존 원칙이 무너져 갔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후 격렬한 당쟁을 겪고 나서, 50년 뒤인 영조대에 와서야 현실정치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다. 곧 이 정책은 이전 단계의 정국운영이 가지는 문제점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바탕에서 실시된 것이었다.영조5년 기유대처분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붕당을 타파하는 것이라는 정국운영 원칙이 전면에 표방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편 정치집단은 모든 당파에 있었고,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를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고도 한다. 곧 완론의 탕평론은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표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정치현안이라는 점을 긍정하는 입장이었다.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힘은 강력한 왕권에 있다고 보았다.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이른바 탕평파를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영조는 만년에 탕평책 아래서 군주의 위치를 “집 짓는데 비교한다면, 한쪽 가장자리에는 옛 재목을 쓰고 한쪽 가장자리에는 새 재목을 쓰는데, 그 위에다 대들보를 올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곧 각 당파의 인재들을 쓰되, 최종적인 의리는 국왕이 장악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군주권 건설의 의지가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영조는 실제로는 완론탕평파를 주로 중용하고, 이들을 자신의 외척으로 끌어들여서 정국의 안정을 도.편파적인 상황을 타파하려는 탕평 원칙은 정국운영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파악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역시 국왕의 신민으로서 다른 신민들과 함께 그 처지를 개선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파악해서, 지위가 열악한 이들에 대한 처우 개선책을 계속 강구하였다.정조는 재상에 대한 국왕의 인사결정권을 아주 중요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정국의 변화에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또한 정치운영의 원칙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파적 의리의 경우에는 영조와 같이 정국운영을 시비의 차원으로 이끌므로 탕평정국을 파기하는 가장 나쁜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었다.2. 정조대 탕평정국의 특징정조대의 정국운영 역시 영조대처럼 일관되게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추구되면서, 영조 치세에 탕평정책의 성공을 위해 실시했던 제반 제도의 개혁과 운영원칙의 변화들을 대체로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정조의 탕평정치의 특징을 보면 첫째로, 재상의 정책 결정권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주권 강화의 보조적 장치로 재상의 존재를 규정한 데에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통제가 강화되었다. 이미 영조 연간에 마련된 바 있었던 팔도구관당상제도 계속 실시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정조 연간에는 암행어사를 비롯하여 어사제도가 강화되었다. 정조는 어사제도를 통해서 지방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성장하는 사회세력과 발전의 성과물에 대한 동태적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정조는 기층세력의 저항을 포함하여 제반 사회변화를 국왕이 직접 파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강화시켰다.전체적으로 보면 정조대 탕평정책도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로 효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대 탕평정국에서는 새로운 청요직인 규장각 건설과 국왕 친위군영의 강화로 군주권 및 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이루어진 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 서얼, 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의 성장을 정치구조 속에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을 유치하여 상업도시, 농업도시, 군사도시로 키우려 하였으며 화성은 정조의 혁신정치를 상징하는 시범적인 자급도시였다.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안정과 문화부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폈다. 정조는 계지술사(繼志述事)를 내걸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외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국가 경영을 혁신하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통공정책을 써서 시전상인들의 자유상인 통제권(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 상업을 진작시키고, 전국 각지의 광산개발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서울은 인구가 집중되어 도성밖에 새마을(신촌)이 곳곳에 형성되는 등 도시발전이 이루어 졌다.맺음말18세기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시기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전반에 걸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혁의 바람을 타고 탕평론이 대두되었다. 탕평론은 붕당정치의 폐단에서 벗어나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고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순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영조 후기에는 외척이 득세하여 기존의 붕당정치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조는 외척을 멀리하고 더욱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정치를 시도했으나, 체제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사후 왕실 외척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도정치로 이행되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탕평정치 시기의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한계도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Ⅰ.머리말영조와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정치를 시행하였지만, 이를 하나의 정치체제로 확립하지 못하였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렇게 한번 줄어든 왕권은 이후 여러 왕들이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 정조 사후 순조부터 시작된 세도정치는 순조와 헌종, 철종을 거쳐 행해지며 각 시기 나름의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와 전개를 살펴보고자 한다.Ⅱ. 세도정치의 성립1. 세도의 의미원래 세도(世道)란 세상을 사람답게 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이 지켜가는 길을 말하는 일원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식년시의 경우라도 서울 출신들은 상위인 갑과와 을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추세는 도당록의 운영에서도 나타났다.도당록은 문과급제자들을 대상으로 당상관이 될 일차적 후보 집단을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이다. 도당록에 든 인물들의 거주지를 볼 때 서울75.8%, 경기도가 8.8%로서 도당록에 들어 중앙 정치에서 주도적 활동을 한 문과급제자의 3/4는 이미 서울에 거주함을 의미한다. 고위 관직자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과 더불어, 소수 유력 가문에 집중되는 현상이 강하게 드러났다. 전주 이씨, 안동 김씨를 비롯한 15개 성관 출신들이 문과급제자의 31.9%를, 도당록 입록자의 53%를 차지한 것이다.이상의 수치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서울에 사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라는 조건이 중앙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유리한 요소였던 동시에, 특정세력에 대한 정치 권력의 집중을 구조화 시켰다. 당시 정치의 중심이던 비변사에서 무반과 정치력이 별로 없는 관직을 빼면 약 300명 정도가 권력을 장악한 핵심이었다. 이러한 정치 집단의 구성 요인 중 가장 큰 비중을 갖게 된 것은 혈연이었다.2) 권력의 주체세도정치기에는 권력 담당자들의 사회적 기반이 전체적으로 축소되고 중앙 정치 권력이 특정 소수가문에 집중됨을 배경으로 극소수 권세가들이 국왕을 능가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한 권세가들은 한 시기의 世道를 책임진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었다. 정조 대와 19세기 초반까지 비 외척인물도 세도를 자임하는 자가 나왔지만, 점차 외척의 권력 독점이 지속화 되자 산림이 외척의 보조자로 격하되는 등 다른 인물들이 세도를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외척 권력가들은 국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신분을 적극 활용하였다. 순조 연간 이후 임금이나 왕실 고위인물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왕실의 가까운 외척들이 궁궐에 들어가 대기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국왕에게 사적으로 접근 하는 것이 권세가의 권력 독점에 힘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이다.
1.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문화적 차이2. 문화적 커뮤니케이션 속 갈등1.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문화적 차이1) 언제 말을 할 수 있는가?미국의 인디언 부족 중의 하나인 오싸지(Osage)종족은 같은 종족끼리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낯선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침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유럽계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말을 선호한다. 우리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처음만난 사람들과 부담 없이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하고 즐기는 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오싸지 종족과 유럽계 미국인이 만났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쪽을 대화로 가까워지려하고 또 다른 한쪽은 가까워지기 전에는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니 말이다. 이러한 만남은 이문화인에 대한 편견과 같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에서 하지 않는 인디언들이 부루퉁하고, 비협조적이며 심지어 멍청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으며, 반면 인디언들은 친구도 아니면서 친구인 척 하는 미국인들이 터무니없이 수다스러우며, 위선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Wieder & Pratt, 1990)2) 누가 말을 할 수 있는가?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프로그램인 를 시청하면 미국인 방청객들이 자유로이 공개 토론에 참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때로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사적인 이야기도 주저 없이 말한다. 이렇게 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이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을 보노라면 미국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실천하는 대표적인 국민들임을 느낄 수 있다. 수업 시간 중의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미국 학생들, 상사가 참여하는 스태프 미팅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의견을 치력하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사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말단 사원, 심지어 3살짜리 딸에게 까지도 의견을 물어보는 엄마를 보노라면 이러한 느낌은 더 강해진다.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경우에 대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남녀가 섞인 동년배들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에서는 남자들이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 아직은 수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이 의견이 교환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물론 이전보다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태도는 여전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특정한 소수에 의해 토론이 끌려간다. 또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어린 사람의 당당함이 무례하거나 버릇없이 비춰질 수 있다.3) 얼마나 말해야 하나?미국에서 살다 온 한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가 미국인들이 주최하는 파티에 가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파티에 참석했을 경우 할 말도 없고 어색해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도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대화를 끝없이 잘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ㅂ면 별로 중요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주고받는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는 피상적이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이렇게 한국인들이 미국인에 대해 갖는 편견은 어떠한 상황에서 얼마나 말을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피어스(Pearce, 1994)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처음 대화를 시작 할 때 말이 많은 반면 대만인들은 처음에는 말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서로 간에 공통점을 발견하면 그때부터는 미국인들보다 더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알지 못할 경우 역시 이문화인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 있다.4) 무엇을 말해야 하나?일단 말을 해야 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적절한가? 어떤 말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문화마다 다르다. 호주의 앱오리지널(Aboriginal)이라고 불리는 원주민들은 절대로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질문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므로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한다(Scollon, 1982).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 문화적 관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가능하면 질문을 잘하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흔히 당혹해하는 것이 한국인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질문도 하지 않고 알아들은 척하는 한국인을 그들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해서 아는 척하거나 질문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언어 능력을 중시하는 서구 문화와 달리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눈치 빠르게 알아듣는 청자의 듣기 능력을 중시한다.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보다 눈치 없이 상황 판단을 못하는 것을 더 문제 삼는 문화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별 생각 없이 알아들은 척하기도 한다. 정직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체면의 문제로 보는 것이 문화적인 관점에서 더 타당하다.5) 어떻게 말해야 하나?똑같은 내용이나 자료를 갖고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에는 문화적 차이가 확실히 존재한다. 말을 하는 방식이 다를 경우,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갖기 쉽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논리적인 설득법도 문화마다 다른데,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같은 서구에서는 서론-본론-결론으로 이루어진 삼단 논법으로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주안점을 향해 한 단계 나아간다. 즉, 서론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소개하고 본론에서 더 상세히 부연설명하고 최종적으로 결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내세우는 직선적 형태를 취한다. 반면, 아랍인들은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반복하여 말한다. 반복법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영어 사용자의 관점에서 보면 아랍인들의 주장은 전혀 설득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게 들린다. 이는 같은 애용이라도 말하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비즈니스 석상에서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서로에게 당황해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 측 비즈니스맨들은 비즈니스 미팅에서 인사 후 곧 바로 비즈니스와 관련된 대화로 들어가며 대화 내용도 숫자나 통계와 같은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이나 정보에 집중한다. 이와 달리, 일본인들은 비즈니스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저런 사담(small talk)을 통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치중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양측은 서로에게 불만을 가질 수 있으며 비즈니스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2. 문화적 커뮤니케이션 속의 갈등커뮤니케이션에서 문화는 한 집단의 사고방식, 가치관 관습과 규칙,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 등을 포함하며, 이러한 무형의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형성, 유지, 변화된다. 즉,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서 그 집단의 문화적 사고방식, 가치관, 관습과 규칙, 정체성 등을 엿볼 수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변함에 따라 문화도 변함을 알 수 있다.특히 친밀한 관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의 갈등들은 주로 문화적 차이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은 동일한 문화인들 간에 생길 수 있는 문제( 상황이나 관계의 특이성, 또는 개인마다의 다른 특성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에 문화적 차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첨가되기 때문에 모든 커뮤니케이션 상황 중에서 갈등의 빈도 수나 심각도가 가장 크고 문제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여 해결하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사례)한국인인 지수와 미국인인 데이브는 미국에 있는 한 대학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 연인사이이다. 이들은 어느 날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중 지수가 잘 아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지수는 잡고 있던 데이브의 손을 가만히 놓고 몇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지수는 그들에게 데이브를 그냥 학교 친구라고 소개하였다. 한국인들과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누고 헤어진 후 데이브는 실망감과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며 지수에게 한국인들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당황한 지수는 한국인들은 외국인과의 교제를 안 좋게 생각하므로 그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할 것 같아 그랬다고 하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를 몇 번 당한 데이브는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다그치며 한국인의 편견과 지수의 솔직하지 못함과 당당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데이브는 외국인과의 교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수는 체면이나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인 자신을 이해 못하는 데이브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몇 차례의 논쟁 후 둘은 화가 나서 대화를 중단하고 침묵하기 시작했다. 미국인 데이브는 지수가 더 이상 말을 안 하자 자신과 더 이상 말할 의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작별인사를 대충하고 헤어졌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처럼 자신이 삐친 것을 눈치 채고 자신의 화를 풀어주길 기대했던 지수는 그런 데이브가 더 냉혈한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