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그 나라의 자부심이며 민족의 근간이다. 실제로 역사는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그 나라의 힘을 말해 주기도 한다.일본의 경우 짧은 역사와 우리나라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아시아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현재 많은 부분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이를 빨리 시정해야 할 것이다.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역사왜곡이 바로 일본군위안부문제이다. 일본군위안부는 오랫동안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신대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시대 노동인력으로 징발되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이들은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강제로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하였으며, 전후에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여성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여성들이 가장 많았다. 각국 피해자들과 민간 단체 및 정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가 일본에 진상규명과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도 은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총 숫자는 적게는 5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 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당시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끌려간 여성들의 나이는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식당종업원, 간호사, 여공 모집 등 취업사기에 속아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거나 군의 협조 하에 민간인이 동원을 담당하였다.끌려간 여성들은 열악한 군위안소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고, 위안소는 군부대 주둔지 근처에 별도의 건물로 들어서거나 군용 막사나 트럭이 이용되기도 했다.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위안부가 같이 생활하는 위안소는 변변한 위생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피해 여성들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소모품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인간과 동물의 다른점이 무엇인가, 인간은 인격과 존엄성을 가진 동물이다. 그런 인간을 물건취급을 했다는 건 동물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이런 일본의 잘못된 태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왜곡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가 치미러 오른다.보통 위안부 여성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했고, 군인들은 요금을 지불한다고 하지만 지불한 요금은 위안부에게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으며, 아예 무료로 운영된 위안소도 있었다. 또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외출도 엄격히 제한했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2 -게다가 어렵게 살아남은 피해 여성들의 이후의 삶 또한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던 이들은 가족과 이웃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부 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1992년 2월부터 정부에서 피해자신고센터를 운영한 결과, 2003년 현재 200여 명이 피해사실을 신고했으며, 이 중 52명은 사망하였다.해외에도 상당수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생존하고 있으며, 북한에도 218명의 신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정부에서 생활지원금이 나오고 임대 아파트도 우선적으로 입주할 수 있게 하는 등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그러나 피해 여성들이 가장 원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배상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이처럼 피해 여성들과 각국 정부가 한 목소리로 일본 정부의 범죄 사실 인정과 진상규명, 정당한 배상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일본 정부는 1990년까지는 민간 업자의 소행이었다며 일본군의 관여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된 위안소 관련 자료가 공개되자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형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 보상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게다가 미래를 이끌어갈 일본의 아이들에게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사실들을 배우게 함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선진국답지 못한 추태를 부리고 있다.일본군위안부 말고도 후소샤 교과서에는 총 11개의 여러나라의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수업시간에도 배운 임나일본부설이다.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이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3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은 말이 모순된 부분들이 존재한다. 첫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글씨체가 서로 다르고, 또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마다 글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더욱 신빙성이 없는건 없던 글자가 새로 생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시기 한반도 남부에 일본식의 묘제나 유물 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년이나 지배했다면 젓가락이나 사소한 그릇조각같은 유물이라도 나와야 정상인데 이는 분명 다른 역사적 사건에 비교하여 볼 때 많이 다르고 인정할 수도 없다.그 결과 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의 50년간의 연구 결과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학설이 되었고, 지금 까지도 실체를 밝히기 위해 두 나라 모두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고 있다.지금까지 못 풀고있는 숙제가 또 하나 있다. 국민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공격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왜란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전쟁이므로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 및 권율 등의 명장들과 각 지방의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 자발적 저항에 부딪혀 7년만에 일본이 패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결과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으며 국토가황폐화 되었고 전쟁으로 많은 인구가 감소되었다. 한편 노비문서가 불태워져 양반의 위신이 떨어지고 신분제가 흔들려 전국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또 문화재 손실과 일본에 많은 문화재를 약탈 당해 선조들의 멋과 얼을 잃게 되었다. 정말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위기이자 극복이였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였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구분하기도 한다.이 슬픈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국이 18세기 중엽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을 단행하였을 때, 30만명의 왜인들이 조선에 상륙을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의 패배로 조선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4 -하지만 1994년에 일본인 사학자 마쓰시타 이데아키(駕撒 彛顧)의해 '정말로 그 많은 왜인들이 한반도에서 살해 당했을까?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왜인들이 조선인들에 섞여서 살아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학계에 던지면서 일본 사학계 내부에서 엄청난 이슈가 된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전에도 일제시대 때에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실록 및 문헌자료등에 관한 비밀문서가 정부 관료에 의해 폭로되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어느정도 드러난 부분이 있었지만 이슈화 되기 시작한건 1994년이 최초였을 것이다.
1.봉사활동 기간 : 2011.03.14 ~ 2011.06.102.봉사활동 장소 : 춘천시 청소년 문화의 집3.봉사활동 내용 : 청소년 유해환경에 대한 미디어 모니터링 및 캠페인4.봉사활동에 대한 느낀 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숙사나 학점을 목적으로 봉사활동에 수동적인 자세로 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처음 명동으로 캠페인을 나가고 청소년들을 위한 여러 가지 보조진행을 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느낌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사활동은 상대방을 돕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이 한층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있다면 첫째로 동아리 오디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디션 당시 저는 오디션에 참여한 학생들을 카메라에 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비록 작은 동아리에 불과했지만 한사람, 한사람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자신의 목표와 꿈을 위해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는지 아직까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못한 제가 너무 작아 보이기만 했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은 YWCA에서 했던 동아리 발대식입니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너무 덥고 습한 탓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아리와 관련된 수많은 학생들과 부모님께서 YWCA를 찾아 오셨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발대식을 기획하고 준비하셨던 선생님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제가 가장 힘을 많이 썼던 봉사가 아니었나 싶기에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게다가 고생했다고 맛있는 저녁까지 사주셔서 더욱이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이번 봉사활동을 하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들과 기관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대학생 신분으로써 또 봉사자의 입장으로 청소년 문화의 집을 알게 되었지만 봉사활동을 하기 전까지 즉, 저의 청소년 시절에는 이런 곳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가끔 청소년을 위한 곳이 나오면 그곳은 불우하거나 문제아들이나 드나드는 곳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런 봉사를 해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더 많은 홍보를 하여 지금보다 더 많은 청소년들이 이런 활동들을 알고 참여하며,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막고 건강한 정신으로 무장한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청소년 문화의 집을 접하게 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찾아 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너무 잘 대해 주셨던 선생님들과 재밌게 봉사활동을 한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 또 다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긴 시험기간 때문에 봉사활동 일정에 많이 불편을 드린 점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책임감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청소년 문화의 집에 신청을 하고 제일 먼저 하게 된 봉사활동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지구 시민이 되자”라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 할 아이들에게 지구의 소중함을 인식시켜 주고, 지구를 아끼는 법, 지구를 맑게 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아이들의 꾀나 진지한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했던 봉사활동으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쳐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강사님 하시는 말씀 한마디마다 저 또한 관심 갖게 되는 걸 보니 확실히 저와는 많이 달랐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아이들의 경청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여러 관련 동영상들을 보고 청경채를 심어보는 체험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많이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결국 봉사활동을 하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 되었던 것이죠. 역시 “신청을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사실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런 봉사기관이 얼마나 존재 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홍보가 많이 부족 했었겠지요. 이번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솔직히 봉사활동이 선생님들의 철저한 주관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크게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그 나이에 맞는 짓궂음과 장난치는 정도의 수준이었지요. 저는 많은 아이들이 이런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약 50여명정도의 학생들만이 참여하였는데, 전체 초등학교의 규모를 감안 했을 때 턱없이 적은 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우리 대학생들과 어른들에게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고등학교부터 지금까지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그것이 성적과 대학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다른 요구조건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를 통해 조금씩 바뀌고 깨닫는 걸 보니 앞으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계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면 좀 더 발전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의심치 않습니다. 아이들은 우리를 통해 그리고 더 나은 배움을 통해 점점 좋은 세상, 좋은 지구를 만들어 나가는 상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작년부터 지금까지 좋은 봉사활동을 하게 해주신 춘천시 청소년 문화의 집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망설임 없이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네요.
태어나서 한번쯤 게으름을 안 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게으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게으름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게으름의 정확한 이해와 게으름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인생을 꾸려야 할 지 작은 나침반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이 책에서 말하는 게으름이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룬다는 의미를 전제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피하거나 쓸데없이 작은 일들에 매달리는 경우라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도전적이지 않고 열정적이지 않으며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행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나와 그렇게 먼 얘기만도 아니다. 나는 꽤 늦은 요즘에까지 거칠고 험한 경험없이 부모님 품에서 자라왔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기숙사에서 독립했지만 끼니도 거르기 일수였고 앞으로 어떻게 혼자 해쳐 나가야할지 겁도 났다. 무언가 틀에 얽매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항상 짜여진 시간표에, 부모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홀로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게 큰 부담도 됐고 뭐든지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외로움과 우울함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책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 중 도전적 자세로 긍정적 요소들을 먼저 지각하고 할 일은 분석하여 기한을 부여하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목표달성이라는 큰 그림을 놓치지 않고 작게 나누어진 일에 점차적으로 몰입하라, 이게 바로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또 한계에 부딪쳤을 때는 이를 평가하고 재도전하라. 이처럼 내가 게으름을 조금이나마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우연히도 책과 맞물려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완벽히 극복한다는 것이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게으름의 원인에는 기질적요인, 심리적요인, 환경적 요인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벗어나는 가장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한 가지 방법은 도전과 재도전으로 이어지는 삶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게으름 자체를 극복하기 어렵다면 도전과 재도전정신으로 무장하는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으름의 원인을 하나하나 극복하기보다 이런 도전정신들을 갈고 닦는 게 게으름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좀 더 빨리 밝은 세상에 발을 내딛을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게으름이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조건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바 게으름이 계속 누적되고 누적되면 해어 나오기는 더 힘들어 지고 심하면 병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짧은 내 생각이지만 경제상황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비록 작은 힘이라도 게으름의 극복이 먼저 선행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서양에서는 게으름을 최악의 악이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가끔 여유와 게으름을 혼돈하기도 하는데, 여유는 능동적 선택에 의한 것이고 게으름은 선택을 피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다. 여유는 할 일을 하면서 충분히 쉬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할 일도 안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재충전이 되었다면 여유이지만 후회와 오히려 피로만 더 쌓였다면 이는 게으름이다. 이 내용은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책을 안 읽었더라면 아직까지 나도 여유와 게으름을 혼동하고 게으름을 여유로 합리화 시키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과제나 빨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너무 피곤하니까 잠을 자고 하자 그러면 더 잘 될 거야”라고 합리화를 시키고 일을 미룬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피로가 풀리기보다 점점 쌓여져만 가는 피곤함과 산더미 같은 일거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