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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안중근의거의 역사적 배경과 세계사에 미친 영향-
    세계문화사-안중근 의거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목차-1.서론 :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2.시대배경1)세계정세 : 팽창주의와 제국주의, 일본의 등장2)국내 상황 : 열강의 수탈기3.인물배경1)안중근 : 爲國獻身 軍人本分, 의병 정신을 이어가다2)이토 히로부미 : 脫亞論,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4.본론 : 6발의 총성1)조선통감의 심장에 총알을 박다2)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5.느낀 점 : 역사의 수레바퀴1.서론 :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역사를 공부하거나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말 그대로 역사에는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스럽다고 해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약’을 배워야만 한다. 지나간 일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하며 역사를 통해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되 올바른 일은 본을 받아 시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이 만약이다.만약 역사가 저리 흘러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과연 우리가 선택한 사항이 올바른 일일까. 모두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역사 속 ‘만약’이라는 가정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일들이다. 즉, 만약이라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또한 역사라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거대한 흐름에 대해 알아보고 그 흐름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며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그 흐름이 바뀌는지를, 마지막으로 흐름이 바뀜으로써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이를 위해서 우리가 가정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하는 역사적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대표 닥치게 된 것이다.2)국내 상황 : 열강의 수탈기전 세계에 식민지 바람이 몰아치던 당시 조선은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이 고요하고 조용한 정세를 이루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은 청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며 일본은 미개한 나라에 불과하다는 허상에 빠져있었으며 빈번히 요청되는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의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쇄국정책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정책으로 외국과의 모든 수교와 교역을 금지하였다.으로 조선의 문을 걸어 잠근 체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걸어 잠근 조선의 문은 강화도에서 운요 호의 대포소리와 함께 깨지고 말았다. 일본의 정한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정한론을 앞세우던 일본은 강화도에 신식 군함인 운요 호를 파견하였으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하던 초지진(강화도 내 해안요새)에서는 위협을 느껴 공격을 가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를 빌미로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무력을 내세워 조선정부의 사과와 외교수립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포함외교의 방법이다. 포함외교를 통해서 미국에게 개항을 한 일본은 이 방법을 고스란히 조선에게 사용하였다.이에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힘의 차이를 느껴 어쩔 수 없이 강화도조약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그 내용은 하나같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석을 준비한 조항들로 조선정부에겐 불평등 조약, 일본정부에겐 조선 식민지화의 첫 발판이 되었다.을 맺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세계열강들과 그들의 신문물이 폭발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은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과 통상조약을 줄줄이 체결하였다.과거 일본과 마찬가지로 급작스레 유입된 신문물은 조선사회를 크나큰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이를 이용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 왕실의 분란을 유발시키며 개화를 지원한다는 명목 하에 차관을 도입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등 조선이 일본에 의지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또한 당시 조선 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정부와 일본 정부에게 자신이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자신의 신분이 군인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자신의 의거가 그저 테러행위나 살인행위가 아닌 일본정부에 대한 대한정부의 선전포고이자 교전을 의미하는 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즉,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유묵인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스스로 행함으로 우리 민족과 후배 군인, 독립 운동가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 가기까지의 시대적인 배경을 조선의 시대 흐름과 같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위에서 알아본 조선의 모습은 외국 열강들 특히 일본에 의해서 피탈을 당하는 나약하고 힘없는 모습을 위주로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그저 무력하게 일본의 침략에 당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선 스스로 열강의 힘에 저항하고 자립하고자 했던 많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자주개혁과 의병활동으로 볼 수 있다.먼저 조선의 자주개혁의 흐름을 보기 위해서는 과거 북학파와 실학자의 계보로 이어져 시작해야 하지만 본 보고서에서는 간략하게나마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부터 시작하고자 한다.19세기 말 열강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조선의 품에서 근대화의 꿈을 안고 성장한 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는 동의하였지만 그 방법에 차이가 있어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고 이 두 개화파는 각각 조선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하여 정책을 펼치는데 그 시발점이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으로 보고자 한다.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가 주축이 되어 우정총국의 개국 연회를 빌미로 정변을 일으켜 기존의 정부체제를 전복 시키고 자칭 개혁정부를 수립하여 14개조 개혁정강 청국에 압송된 대원군의 환국 요청과 더불어 청에 대한 사대관계 종결, 문벌타파 등을 내세운 개혁적이지만 토지개혁의 미비점 등 보수적인 정책을 발표하는 등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으킨 정변으로 비록 일본의 후원을 받아 일으켰다는 오성이라 불리던 하층계급인 국민들의 자주적인 사회제도의 개혁과 근대화의 요구로 이는 후에 의병활동에 있어 백성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결정적인 사상으로 이어져 이후 2차 동학농민 운동과 을미의병, 정미의병 등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하지만 이런 농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고자 청국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이에 톈진조약 임오군란 이후 청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동시출병을 골자로 하고 있다을 빌미로 일본군마저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키자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일본에 맞서 일어나니 제 2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1차 운동이 사회개혁 등 반봉건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일본에 직접적으로 대항해 일어난 2차 운동은 반외세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결국 황토 현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농민들은 수적 열세와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 하고 패배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은 끝이 나지만 외세에 대한 백성들의 자주적인 저항의식 역시 이후 의병활동에 강한 사상적 뒷받침을 해준다.두 차례의 동학농민 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 될수록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을 이어 받은 의병들이 매번 들고 일어나며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고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나갔으며 이런 의병들의 자주적이고 반외세적인 의병들의 정신은 안중근 의사가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발사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의 근대화를 향한 조선의 자주의식과 동학농민운동, 을미의병, 정미의병 등으로 이어진 조선을 침략하는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고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2)이토 히로부미 : 脫亞論,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이토 히로부미가 활약하던 당시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 이면에는 막부와 개화파 간에 피 비린내 나는 암투와 전쟁이 존재했다. 개화파에 속해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 자신의 명성을 떨친 것은 시모노세키 전투 영, 프, 미 등시, 모든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 시켰는데 여기서 일본만의 특징적인 쇄국정책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모든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되 나가사키라는 지역에 한해서 네덜란드만이 교역을 할 수 있게끔 허용 한 것이다.이는 매우 이색적인 쇄국정책으로 이후 조선의 흥선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조선의 쇄국정책 역시 서양의 천주교 포교로 인해 신분제가 동요할 것이 우려되어 나라의 모든 문을 틀어막은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포교의 위험성이 낮은 네덜란드만큼은 교역을 허락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소극적인 쇄국정책이었다.결과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의학과 무기 등 자신들에게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만큼은 꾸준히 받아들인 일본은 미국의 강제 개항으로 인한 무분별한 신문물의 유입에도 비교적으로 안정적으로 받아들여 개화파가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그 발판은 일본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 주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도 일본 정계의 최고위로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는 길의 발판이 되어주었다.이토 히로부미의 등장과 성장의 결정적인 배경이 메이지 유신이라면 이토가 하얼빈에서 저격을 당하게 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비롯해 타국을 침범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상은 바로 탈아론 더 정확히는 문명개화론을 포함하고자 하나 일본 중심의 침략을 뒷받침 하는 주장을 중시하기 위해 탈아론을 내세웠다.이다.탈아론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 운동가로 그 유명한 ‘문명개화론’을 집필한 인물로 조선의 급진개화파의 사상을 뒷받침 해주었으며 동시에 탈아론을 통해 일본 중심의 문명 발전을 주장한 인물이다.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3개월 후에 발표한 이론으로 그 주된 골자는 “아시아의 못난 국가들과 어울리지 말며 일본은 서양 열강들처럼 아시아 국가들을 대해야 한다.”이다. 즉, 아시아는 우매하고 질 나쁜 국가들이 모여 있는 국가군(群)이므로 일본은 이런 아시아에서 벗어나 마치 강성한 서양 열강들였다.
    사회과학| 2014.05.14| 14페이지| 1,000원| 조회(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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