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 교수님의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연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의 주도세력은 보이틴스키를 필두로 하는 국제당 동방부 임원들과 서울의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준비위원회 연합 그룹이고 보이틴스키·조훈·남만춘 그룹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거해 당준비회를 배제하고 창당대회 소집의 주도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한다. 본문의 347쪽, 352쪽조선 내지의 공산주의 그룹이 해외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주도했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아왔지만 본문의 348쪽논문의 저자는 이에 의문을 밝힌다. 이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해서 살펴볼 수 있다.첫 번째로, 상해에 체류 중이던 동방부 간부 보이틴스키와 서울에서 밀파된 국내 공산그룹의 대표자가 회견한 것이다. 논문의 지은이는 상해에 밀파된 국내 대표자인 김단야가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를 근거로 활동하는 국내 공산그룹이 당준비회를 경원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본문의 352쪽이 회견에서 마련된 4월 당대회 기획안은 블라디보스톡 당준비회와 맺어오던 연계를 끊을 것, 그 대신에 국내 공산그룹이 직접 국제당 본부와 연계를 맺을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의 351쪽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두 번째의 논거에서 밝히고자 한다.두 번째로는, 당준비회측 문서에서 보이틴스키가 당준비회를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논문에 따르면, 당준비회의 열렬한 지지자인 이동휘는 국제당 간부회 앞으로 보내는 서한에서, 보이틴스키가 당준비회 임원진 내부에 균열을 가져왔다고 통렬히 고발했다. 본문의 352쪽심지어 당준비회 위원인 남만춘은 당준비회 책임비서였지만 국제당과 국제공청의 동방부 요인들이 주도한 4월 당대회 준비과정에 은밀히 가담했는데 당준비회를 위해서는 일하지 않고 있어 당준비회지지자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지칭하였다는 표현에서, 당준비회가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배제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두 번째, 저자는 ‘조선공산당 선언’을 1925년 4월 당대회의 강령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저자인 임경석 교수님은 4월 당대회에서 규약, 당건설안, 대중운동에 관한 정책과 같은 조직 문제 논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강령은 채택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강령이 채택되지 못한 이유를 지적했는데, 4월 당대회 대의원들 사이에 내재한, 조선혁명의 성격과 목표에 관한 견해차이가 강령 채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저자의 주장을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논문에 제시되어 있는 당의 조직 세력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동호는 합동 열성자 대회를 연 세력은 중립당, 이르쿠츠크파, 상해파, 북풍파 네 개의 공산주의 그룹이라고 주장했으나, 저자는 이르쿠츠크파는 중립당으로 해소되었고 이렇게 확대된 중립당은 화요회로 불려 화요회, 상해파, 북풍파의 3개 그룹이 통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논문에서는 화요파 공산그룹 출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론과 소비에트공화국 건설을 표방한데 반하여, 북풍파와 상해파 공산그룹 출신자들은 민족해방 및 민주주의 혁명론과 민주공화국 건설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본문의 374쪽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위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남녀노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운동의 참가자는 200만명, ...일본은 경관과 군대를 동원해서 3.1 독립운동을 진압한 뒤, 종래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다소 발언권을 인정하는 등의 회유책을 취했다. 이와 동시에 동화정책을 강화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의식의 배제를 꾀했다.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정형, 다락원(2009), 36페이지삼일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책의 방향에까지 변화를 주게 됐다. 삼일운동은 일본에 어떤 의미였을까?저자는 논문에서 두 가지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고 했는데 첫 번째가 삼일운동 피검자들에게 적용된 법률과 형량과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48인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자의 형량의 차이를 표로 분석했는데 최고 형량이 손병희, 한용운 등에게 내린 3년이 최고형으로 출판법으로는 최고형량이었지만 장신은 이들에게 적용된 법조항도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뿐이었고 소요죄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높지 않은 형량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민족이 지배하는 법정에서 이렇게 무죄나 가벼운 형이 선고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근대적 사법권에 대한국제적 위신이 추락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학자도 있다. 한겨레 신문, ‘국사범’에 노벨평화상을? 논설위원·변호사(1990)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탑골공원의 시위로 촉발된 조선민중들의 거대한 소요의 물결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재판과정의 심문 기록에서 권동진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독립의 뜻을 잊지 말라는 의미지 반항하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지도자들도 폭동을 선동할 의도가 없었으며 조선의 독립 갈망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답했다. 또한 그들의 목적 중 청원서 제출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특히 임시정부 수립은 애초 계획에도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일본은 이들의 죄는 인정하면서도 ‘조선만세소요사건’의 실질적인 주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뉴스웨이브,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에게 선고된 가벼운 형량(3부), 김상구 컬럼니스트(2011)그래서 나는 최고형량이 3년이었다는 것에 주목을 해본다면 일제가 삼일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처벌보다 민중이 중심이 된 운동의 성격자체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도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약 2백만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은 분명했다. 이 논문에서는 최고형량이 2년이고 개개인의 정치적 언설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제정된 보안법으로는 한계를 느낀 조선총독부는 삼일운동으로 검거된 이들에게 중형을 가하기 위해서 가혹한 조항이 담긴 제령제7호를 제정하고 내란죄를 적용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 논문의 저자인 장신은 ‘48인사건’뿐 아니라 다른 연관이 있는 사건에서도 가담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시키지 않았지만 삼일운동이 무섭게 확산되던 1919년 4월, 삼일운동 참가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을 가할 수 있는 내란죄를 적용한 것은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내린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삼일운동의 대응책으로 제정된 제령제7호의 혐의를 받은 것이 6.2%로 70%의 보안법과 24%의 소요죄에 비하면 현저하게 낮은 수치인 것을 비교해볼 때,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도 파악했듯이 삼일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만큼 위협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에서 제령제7호가 법의 제안에서 공포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말한 것에서 보면 이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시급하게 제정된 법으로 내란죄의 적용이 사법부 내에서 철회되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논문을 읽으면서 나는 사법부도 총독부와 마찬가지로 시위를 진정시키고자 했음에도 내란죄의 적용을 무슨 이유로 철회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제식민지배의 방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데 총 네 가지의 유형에서 조선에 해당하는 세 번째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제국의 일부로 강제 편입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일본 헌법의 적용 지역에서 제외되어 독자적인 법률에 의해 통제되는 특수지역, 독립지역으로 남아 있던 곳이 있다.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2, 권태억, 서울대학교출판부(2005), 46페이지
이 논문의 지은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에 대한 검토’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밝히고 있다.첫째, 상해의 임시정부는 비밀리에 조직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논문의 97쪽에서 “임시정부안이 국내의 동의를 얻어 확정·발표되기까지는 그 내용이 비밀에 부쳐졌는데 이런 절차를 밟지 않고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조직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을 때, 그 대표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독립운동진영의 내부 분열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저자는 이광수의 말을 그대로 빌려, “독립선언을 했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삼십 삼인의 의사를 듣지 아니하고 우리가 여기서 중부를 조직한다면....저마다 정부를 조직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리되면 우리 독립운동이 분열할 염려가 있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저자인 고정휴는 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전 임시사무소가 임정수립의 대표성 확보를 위해 은밀하게 활동한 흔적을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확고하게 했다. 고정휴는 현순이 이승만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전보를 보냈는데 아직 임시사무소의 임시정부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확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미주와 파리에서는 임정의 수립을 바라던 차에 현순의 전보가 오자 그 전보에 담긴 임시정부안이 확정된 것이 아님에도 신한민보에 곧바로 공개되어 읽는 이들에게 각각 나름대로의 해석을 제공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는 부작용을 언급했다. 이렇게 현순과 이광수가 국내와 미주의 이승만에 국민회의 의사를 타진하는 동안, 논문 111-112쪽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상해의 독립신보와 천진의 대공보에는 서울에서 조직, 선포되었다는 임정의 명단이 실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해외의 다른 신문에도 임시정부안이 실렸는데 이들 임시정부안이 강대현이 상해에 갖고 온 것과 같은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정휴는 매우 조직적인 선전활동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음을 다시 한 번 짐작했다.둘째, 홍진의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대외적으로 공인받으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의 저자는 국내에서는 3개의 임시정부가 조직·선포되었는데 그 중 신한민국정부의 조직안이 강대현이 상해에 가지고 갔던 정부조직안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강대현과 그 배후의 홍진의는 신한민국정부를 조직하고 선포한 세력들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강대현이 상해에 도착할 때쯤, 대공보에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고 보도되었기 때문에 국내의 임시정부를 통합하기 위해 국민대회개최를 제안한 사람은 홍진의였다고 주장한다. 논문의 116쪽에도 나와 있듯이 “홍진의는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자신들이 만든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이런 사실을 ‘특전’으로 중국내의 여러 신문사에 통지함으로써 대외적으로 공인받으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논문에 따르면, 한성정부 세력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홍진의는 신한민국정부의 성립을 알리는 데에 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멈추지 않고 홍진의는 이들 세력들이 구상한 집정관제 임시정부안을 강대현이 상해의 임시정부세력들에 가지고 가도록 했다고 하지만 임시사무소는 정부 청사를 미리 마련해둘 정도로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준비를 비밀리에 진행시켜왔기 때문에 홍진의의 집정관제 임시정부안을 존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논문의 119쪽의 ‘임시정부의 직제와 각료명단’에서 임시사무소의 구상과 경성독립본부(집정관제 임시정부안), 그리고 확정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교해 봤을 때 분명해진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 인선은 임시사무소의 대통령제 임시정부안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상태는 1920~1930년대 민족주의계열의 주요세력으로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를 꼽았다. 저자는 두 단체의 조직과정과 사상적 배경, 구성원의 성격, 주요 활동상황, 강제해산된 배경을 논문의 내용으로 담으면서 이들 활동의 운동에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조명했는데 이 논문에는 저자의 두 가지 논지가 나와 있었다.첫 번째로, 이 논문의 지은이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가 각각 브나로드운동과 YMCA농촌사업을 벌이지만 이들의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일제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은 세계대공항 파탄에 이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농민층이 전체 인구의 8할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단체들은 브나로드운동과 YMCA농촌사업을 각각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농촌사회의 피폐화에 대한 원인을 동우회는 민족성개조와 인격수양론에 근거해 농민층의 무지와 도덕성의 결여, 생활구조에서 찾았다고 한다. 또한 흥업구락부의 경우에도, 농촌에 대한 문제를 도덕적 문제의식에서 찾았기 때문에 정신적 소생이나 문맹타파, 농사개량 등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농촌사회의 근본적인 몰락 원인이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정책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농촌경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인식하지 못해 적합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논문에서도 말하듯이, 춘궁과 부채에 허덕이는 농민층에 문맹을 타파하자는 운동이나 위생지식을 습득하자는 움직임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1932년부터 총독부에 의하여 전개된 농촌진흥운동을 합리화시켜주는 꼴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총독부의 농촌정책이 농민들의 가난은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선전 본문의 249쪽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논문은 말하고 있다.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농촌활동은 점차 일본의 농촌계몽운동에 포섭되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두 번째로, 논문의 저자 김상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는 이 단체들의 잠재력 때문에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잠재력을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해외 운동세력과의 연계 부분에서는, 미국 유학 중 흥사단원이 되었던 사람들이 귀국과 함께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고 일제는 미국 흥사단과 국내 동우회의 연계활동에 대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고 말한다. 흥업구락부의 경우에도 이승만이 지휘하는 동지회의 자매단체로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흥업구락부원들이 수차례 미국을 다녀오는 것에 대해 일제는 이들의 연계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의 253쪽
서론그 동안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 존재하던 역대 정권들은 각기 해방 이후 자기 정권에 정통성이 있다고 강조하며, 동시에 상대 북한 정권보다 더 정통성이 있음을 교육하여 왔다. 그만큼 정통성은 해당 정부가 세워지는 과정과 정부 수립 이후의 상황에 댛나 국민들의 인식을 전화하여 충성심을 유발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정권적 차원의 정통성 확보 노력은 국가 건설과 전개 과정이나 주민 설득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식 과정이었다. 또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해야 하는 문제는 남북한 모두 당대의 절박한 문제였던 자립 경제와 자주 국방건설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 시기는 남북한이 근대화된 자본주의 국가 혹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시기였고, 그것은 통치자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사회 분야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국민의 인지와 동의를 바탕으로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남과 북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해방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한 제 3세계 피식민지 국가로서 이후 건국의 과정에서 국가와 정권의 정통성 논의에서 독립투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근간이 된다. 때문에 남한에서는 일제시기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작업을 통해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일제시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성시하고 있다. 남과 북은 1948년 정권을 수립해 분단이 고착화 된 이후 현재까지 60년간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각각의 체제 유지와 우월성에 대한 경쟁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남과 북의 정통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남과 북의 국`내외적인 상황과 함께 남북 간의 경쟁적인 정치관계도 함께 고려하여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남북관계와 국제정세 파악을 통해 남과 북에서 강조되고 있는 정통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남과 북의 국가 정통성 만들기는 국가가 정권의 유지와 강화를 위한 치사에서 항일운동의 전통이 역사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임시정부왕의 갈등으로 인해 상해를 떠난 이후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이승만은 김구 주석의 공로는 치하했지만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원조경제에 의해 권력을 유지했던 이승만 정권은 합법적인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역사적 '전통'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해방되기 이전의 '항일'의 역사보다는 그 이전(조선시대)의 역사 및 역사속의 실재 인물의 업적을 기렸다. 특히 이승만 정권 초기 그리고 위기였던 한국전쟁시기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이미지를 재생산시켰다. 이순신을 택한 이유는 항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닌, 먼 역사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의 좌절이다. 국가가 새롭게 형성되어 이전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국가 지도자가 실천하는 것이다. 당시 집권자인 이승만은 통합력보다는 반공의 효율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판단은 후세의 역사가가 하는 것이고, 통합을 이루는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을 다른 방향에서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또한 1953년 휴전 이후 이승만 자신의 우상화 작업에 더욱 적극적이었고 195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승만 개인과 관련된 조형물들이 대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1956년 3월과 8월에 서울 탑동공원과 남산에 세워진 동상이다. 1956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의 일환으로 탑동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앞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진행되었다. 헌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남한의 정통성은 삼일 운동의 독립정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를 실현하고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은 1952년부터 기념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정치적 명분이 위협받을 때마다 적시적지에 기념동상을 건립함으로써 대내외적으합시킨 민족주의 담론을 기반으로 한 정책들로 체제유지와 정권의 공고화를 이뤄냈다. 박정희는 민족주의 활용을 통해 근대화의 주체를 국가로 끌어올리면서 강력한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같은 이유에서 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은 반민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은 물질적 성장과 같은 서구적 근대화를 목표로 하면서도, 그것을 달성하는 정신적 원동력은 민족주의에서 구하였다. 1960년대 후반은 1967년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던 때였고, 1968년 초, 북한의 도발 등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월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 북한과의 경쟁은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획득을 위해 추진해온 정책들에 힘을 실어주어 결과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후 1972년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주요한 이념적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또한 민족문화를 경제발전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가져오기 위해 호국선현과 국방유적을 집중적으로 정화하기 위해 단순히 유적을 보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며 주변 환경을 정화하였다. 하지만 항일시기의 인물보다 조선시대의 위인들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근대시기 민족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던 일제식민시기 항일운동가에 대한 발굴이 당시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박정희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 정권의 경우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에 공헌한바 있는 위인들을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 옹립에 활용하였다. 박정희의 지시대로 "일제가 가장 무서워할 인물"로 선별된 충무공원 1968년 이어지는 북한의 도발로 국가안보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반공이데올로기와 항일이데올로기를 선전함으로써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전두환 정권도 박정희 정권과 유사하게 취약한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사 항일무장투쟁 역사가 정통성을 가족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혁명전통의 내용이 확립되고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이 당내 김일성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첫째, 혁명전통의 확립 시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당내 여러 정치집단들과 공존하면서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빨치산파는 1950년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치집단들과의 투쟁과정에서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김일성의 정치권력 강화 노력은 한국전쟁의 발발이후 가중되었다. 전쟁 중에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의 최대실력자, 그리고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하였다. 1955-56년 소련파와 연안파와의 '종파투쟁'을 거치면서 '혁명전통'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어지기 시작한다. '혁명전통'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그의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국가의 정통성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북한에서는 혁명전통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로 독점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체', '자주' 등의 단어로 함께 표현되었다. 그리고 당시 혁명전통에 대한 상징은 '보천보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과 그 장소에 집중되어졌다. 이렇게 북한에서 혁명사상에 대한 고취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배경으로는 북한 지역 내 세력들이 공산 세력들만 남아있게 된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한이 전권을 잡고 소련 군정의 힘을 입어 지주 세력이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나 재산권 몰수가 신속하게 전개된 것이다. 전쟁을 통해 이에 불만을 느낀 지주 세력들은 대거 남하했으며 북한에서의 친일 세력의 제거는 그 세력들의 남하나 북한 사회체제의 수용을 통해 강제적으로 결정되었다. 북한 정권을 잡은 공산 세력들은 그들 중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남한에 비하여 적극적인 세력들로 구성된 것이다. 둘째, 1967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가 비밀리년 이후에는 김일성의 유일권력을 바탕으로 김정일로의 정치권력의 계승을 준비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빨치산파가 권력의 핵심부분을 독점한 이래 그들의 역사가 복원되어 강조되었고, 이데올로기에서의 '독자성'이 추구되었다. 다음 시기인 혁명전통의 계승기에서는 김정일이 당내에서 김일성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후계자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김정일 후계체제의 공식등장과 함께 이 체제를 뒷받침할 지도부가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인물로 대거 등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은 1970년대 초 김정일 후계체제가 부상하면서 권력의 승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보다 정교화 된 것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김정일은 1986년 "후령, 당, 대중은 하나의 정치적 생명으로 결합되어 운명을 같이 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유기체론'을 제시하였다. 혁명의 대를 이어갈 후계자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사회정치적 생명은 그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김정일의 이러한 혁명전통에 대한 강조는 소련과 중국에서 개혁의 바람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필요 때문이었다. 즉 '자주', '주체', '우리것'이라는 문구들이 더욱 강조되어야 했다. '우리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소련이나 중국을 맹목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그 나라 인민들만이 그 나라의 혁명과 개혁을 주도할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나라의 역사를 바로알고 그 전통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자기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혁명전통'의 중요성과 그것의 계속성 즉, 혁명전통의 계승성과 순결성의 정당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마지막 시기인 혁명전통의 유지기에서는 북한은 '혁명전통의 계승기'에 지도부의 세대교체와 제도의 법의 정비로 인해 김정일로의 후계체제를 완성하였고, 김정일의 공식적인 정치활동과 '혁명전통'과 관련 이데올로기의 정립을 통해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30여 년간의 권력세습의 과정을 통해 김일성에서의 김정일로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