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바이오테크놀로지책 제목에서 생명공학 지식들을 영화를 통해서 소개할 거란 걸 알 수 있었고, 내용이 흥미진진할 것이란 생각에 이 책을 봤다. 영화 줄거리도 맛 볼 수 있고, 신기하고 놀랍기도 한 생명공학에 대해 알아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 내가 봤었던 영화들도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어떤 생명과학이 쓰였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지 불가능한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본문은 영화 '쥬라기 공원'과 '아나스타샤'를 통해 DNA의 정체와 속성을 설명했다.쥬라기 공룡은 상당히 깊은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영화의 비과학적인 제목으로 논란이 제기 된 바 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룡들이 쥐라기시대가 아니라 백악기 시대에 번성했던 공룡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화포스터에 그려져 홍보를 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티라노 사우루스도 쥐라기 공룡이 아닌 백악기 공룡이란 지적이 있다. 이 영화와 거의 동일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어 실제 수행되고 있는 과학 기술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매머드 복제 프로젝트’이다. 매머드는 빙하기 시대에 수백만년 동안 살다가 빙하기 말기에 멸종한 거대한 동물이다. 빙하기 말기, 매머드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시베리아에는 매머드의 잔해들이 종종 발견 되는데, 영구동토층에 묻혀있는 이들 매머드의 몸체는 부패의 원인인 산소로부터 차단되어 왔기 때문에 잘보존된 매머드의 DNA를 얻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베리아에서 발굴한 매머드 조직의 세포에서 핵을 분리하여 코끼리의 난자에 주입한 후, 그 난자를 코끼리의 자궁에 착상시켜서 임신시킴으로써 매머드를 탄생시키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의 방법은 영화‘쥬라기 공원’에서의 공룡 부활 방법과 거의 유사하다고 한다. 이렇게 공상과학영화가 나오고, 그뒤에 실제로 영화 속에만 있을 법한 그런 놀라운 일들이 과학기술 발전과 더불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생명 공학 기술로 자신이 러시아 비운의 공주인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던 한 여성이 죽고 난 뒤 실제 아나스타샤가 아니었음을 밝혀냈다고 한다. DNA를 시신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또한 최근 영국 하원은 최근 희귀병을 앓는 자녀의 치료를 위해, 질병 유전자가 없고 특정한 유전 형질을 지닌 정상적인 배아를 골라 ‘맞춤 아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구세주 형제법안’을 통과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법안의 찬성론자들은 불치병 치료를 위해 불가피하단 입장이지만 원하는 유전자를 선택하도록 허용하면 지능이나 체력, 외모 등을 염두에 둔 아기들이 태어날 것이라며 우려도 만만치 않다.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알려진 평가와 비평은 식민지로부터 독립 후의 연구에 중요한 배경을 형성했다. 그의 연구는 개인적이고 학문적, 정치적 수준에 받아들여지는 다양한 생각의 패러다임에 질문하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가정의 오류를 강조한다.용어동양은 동양을 서구적 학습, 의식, 서부 제국으로 가져간 정치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진 주장 체계를 의미한다. 동양은 서구를 위해 존재하고, 서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보다 열등하고 이질적인 거울의 형상입니다.오리엔탈리즘은 조직화된(또는 오리엔탈화된) 글, 통찰력, 그리고 연구의 방법이고, 강제적인 원칙, 사고방식,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편견들이 표면상 동양에 적합하다는 것에 의해 지배받는다. 그것은 동양이 생각과 학문의 전체 체계로서 표현하는 이미지이다.동양 사람은 이 같은 생각으로 표현된다. 그 사람은 여성스럽고, 약하지만, 백인 서양여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위험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여자는 지배되기를 열망하고 눈에 띄게 이국적이다. 오리엔탈은 하나의 이미지, 대체적인 일반화, 무수한 문화와 국가의 경계를 넘는 고정관념이다.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무엇인지에 대한 무의식, 의심할수 없는 확실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기본 내용은 변화가 없고, 이의가 없다. 동양은 분리되있고 , 이상하고, 뒤떨어진, 조용히 다른, 세속적이고, 그리고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양은 독재를 향하고 진보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적인 투입성과 무기력한 순응을 나타낸다. 그것의 진보와 가치는 서부에 의해서 평가되고, 서부와 비교해서 그것은 항상 다르고. 정복적이고 열등하다.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은 말해지고 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생각에서 보여지는 정책 결정 뿐만 아니라 동양에 관한 지식에서의 변화와 정보를 포함한다. 그것은 정보와 동양에 대한 지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에 설립된 동양 생각이 포함 되어있다. 그것은 잠재된 오리엔탈리즘의 단어와 행위의 표현이다.초기 오리엔탈리즘최초의 오리엔탈리스트는 실로 영향력있는 식민지 정복은 정복된 사람들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동양의 글들을 영어로 번역한 19세기 학자였다. 힘으로서의 지식의 이 사상은 사이드의 비평을 통해 존재한다. 동양을 앎으로써, 서양은 동양을 가질수 있다. 동양은 연구되고, 보여지고, 관찰되고, 목적이 되었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은 학생이었고, 선지자, 관찰자, 주체였다. 동양은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서양은 활발했다.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구성 중 하나는 그 자체의 동양이다. 무엇이 동양을 무수한 문화와 나라들을 넘어 펼쳐지는 광대한 지역이라 여겨지게 하는가. 그것은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대부분의 아시아를 포함한다. 응집력있는 통합체로서 연구되어 질 수 있는 이 하나의 동양의 묘사는 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의 가장 강력한 업적 중 하나이다.그것은 추출한다. 오리엔탈 원형의 이미지를 - 문화적 후진, 독특한, 변하지 않는 생물적 열등 - 지배와 성적인 측면에서 묘사되어 진다.오리엔탈리즘의 담론과 시각적 이미지는 힘과 우월성의 개념과 같이 엮여, 서부의 일부분에 대한 식민지 임무를 촉진하기 위해 당초 공식화되고, 다양한 담론과 정책을 통해 영속화시켜졌다. 언어는 그 구성에 비판적이다. 여성스럽고 약한 동양은 서부의 지배력을 기다린다. 그것은 무방비 상태와 존재하기 위한 무지한 통합체이고, 그 관점에서 그것의 서부 상대물이다. 그리고 측면에서, 그 서양 국가이다. 이런 구성의 중요성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하나의 주제, 다른 무언의 이전 관념의 편집을 만든다. 동양의 개념은 오리엔탈리스트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 동양의 정체성은 동양에 생명을 준 학자에 의해 정의된다.현대 오리엔탈리즘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랍”문화의 현재 서양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The불합리하고, 위협하고, 신뢰할 가치도 없는, 반 서구적, 신뢰할 수 없고, 아마 가장 중요하게 - 원형적인 아랍의 묘사는 오리엔탈리스트 학문을 발전시켜온 생각이다.이러한 개념은 서양에 의해 개발된 이념 및 정책을 위한 기초로서 신뢰 되어 진다.사이드가 썼다: 이 악기들을 마음에 가지는 것은 그들 주위에 기관들을 짓는 것으로써 커진다. 모든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는, 말 그대로, 비틀거리는 권력의 지원 시스템, 오리엔탈리즘을 보급시키는 신화의 덧없음을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 시스템은 지금 그 주의 시설들로 최고점에 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랍 오리엔탈 세계에 관해 쓰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권위와 함께 쓰는 것과 절대적인 힘에 의해 절대 진리의 의심하지 않는 확실성과 함께 하지 않는 거슬리는 이데올로기의 단언과 함께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중 ?애러비? 자세히 읽기?애러비?는 한 소년의 사랑과 욕망, 그리고 좌절을 다룬 작품이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사랑의 열병이 찾아온다. 그 사랑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며 ‘나’를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학업으로부터 격리시킨다. ‘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애러비’에 가기를 소망하고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 갔지만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이 바자회는 ‘내’가 꿈꾸던 사랑을 확인해 주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라 ‘나’의 그릇된 욕망을 비웃는 곳임을 깨닫는다.권태롭고 남루한 소년의 삶에 찾아든 사랑?애러비?는 근본적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1인칭 서술자 시점을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 소년의 사랑과 꿈, 그리고 환멸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랑과 절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는 현재 소년의 삶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노스리치먼드 가는 막다른 골목으로, 기독교형제수도회의 학생들이 학교가 파해 몰려나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적막한 거리였다.작품의 주인공인 소년은 더블린의 변두리 노스리치먼드 가에 살고 있다. 이 거리는 화려하고 부유한 주택가가 아니다. 길 양편에는 이 곳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듯 칙칙한 모습의 갈색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길의 끝은 현재의 처지를 벗어나려는 이들의 희망을 부인하기라도 하듯 막다른 골목이다. 이 거리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소년이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뛰어 노는 곳이다.주인공인 소년은 고아이다. 부모 대신 아저씨와 함께 산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뒤쪽 응접실은 전에 세 들어 살던 신부님이 임종한 방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고, 부엌 뒤 쪽 작은 창고에는 누렇게 바랜 문고판 책들이 흩어져 있다. 집 뒷마당 황량한 정원 한 복판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덩그렇게 서 있고, 그 한 쪽 구석에는 누군가가 사용하던 녹슨 자전거 펌프가 놓여 있다.소설이 시작되는 첫 세 개의 문단을 지배하는 색조는 어두움이다. 칙칙한 갈색의 주택들, 어둡고 밀폐된 방, 땅거미 지는 거리, 보랏빛 하늘을 희미하게 밝히는 가스등. 이러한 소설의 공간은 곧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소년의 삶이 남루하고 우울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황량한 정원의 한 복판에 서 있는 한 그루 사과나무는 인류의 조상이 원죄를 저지르고 추방된 낙원과 같은 세계 속에 소년이 살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이렇게 답답하고 권태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소년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소년은 이웃에 사는 맹간의 누이에게 연정을 품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과 그의 연모의 대상이 되는 소녀의 정확한 나이가 작품 속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초반임을 추측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는 소년이 소녀에게 매혹되는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몇 개의 에피소드가 삽화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소년이 소녀에 대해 품는 연정은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리고 10대 초반 소년들이 품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반영하여 다분히 성적인 환상을 포함하고 있다.그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쯤 열린 문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몸매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누나가 시키는대로 하기 전에 언제나 그녀를 놀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난간 옆에 서 있곤 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한들거렸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채가 좌우로 흔들렸다.소녀에 대한 소년의 사랑은 은밀하고 소극적이다. “우연히 몇 마디 말을 나눈 일 이외에” 그녀에게 속 시원히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 거실 바닥에 몸을 누이고 내려진 차일 뒤에 숨어 건너편 소녀의 집을 지켜보다가 소녀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면 서둘러 뒤를 따른다. 그리고는 소녀의 “갈색 몸매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걷다가, 갈림길에 이르면 걸음을 재촉하여 그녀를 앞질러 가는 일을 되풀이한다. 이러한 소년의 소극적인 태도와는 관계없이 소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스스로 자라고 발전한다. 소년의 현실이 무미건조하고 절망적인 것이었기에 갑자기 찾아든 사랑의 감정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며 그를 변화시킨다.소녀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키워 가는 과정에서 특기할 것은 소년이 자신을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상상한다는 점이다. 아주머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면, 술주정꾼들과 상인들, 지저분하고 소란한 시장 거리를 걸으며 소년은 자신이 성배를 운반하는 기사라고 생각한다.그녀의 영상은 로맨스와는 거리가 가장 먼 곳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토요일 저녁마다 아주머니가 시장을 보러 갈 때, 나는 짐꾸러미들을 들어 주기 위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술주정꾼들과 물건을 흥정하는 여인들에게 떠밀리며, 일꾼들의 욕지거리, (중략) 점원들이 반복하여 외치는 날카로운 소리들, (중략) 거리의 가수들의 콧노래 소리를 뚫고, 번지르르한 거리를 헤치며 걸어갔다. 이러한 잡음들이 한데 모여서 나에게 내 삶에 대한 단일한 느낌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이 순간 나는 수많은 적의 무리 속을 지나 성배를 가슴에 안고 운반하는 기사가 된 듯 싶었다. 이따금씩 그녀의 이름이 내 입술에 떠올라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기도와 찬송이 되었다.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이고 심장이 터져서 가슴 속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이 장면에서 소년은 가슴에 품은 장바구니를 성배로 상정하고, 주위에 늘어서 걸음을 방해하는 상인, 점원, 거리의 악사들을 무찔러야 할 적들로 상상한다. 자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성배를 운반하는 기사이며 시장에 가는 행차는 성모 마리아의 영광을 위해 수행하는 고행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흠모하는 소녀는 바로 기사의 모험을 통하여 명예를 얻는 귀부인이 되는 것이다.소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소년이 자신을 낭만적인 소설-여기서는 중세 기사의 모험담-의 주인공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사춘기 소년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경향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그의 가정에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신의 삶이 가장 무기력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드 단테스로 가상하고 상상 속의 로맨스를 키워 나간다. 또한 돌아가신 신부님의 골방에서 색이 바랜 문고판 책들-월터 스코트의 ?승원장?, ?경건한 성찬배수자?, ?비도크의 회고록?-을 소년이 찾아내서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소년의 이러한 낭만적 기질을 드러내 보여주는 보조 장치라고 하겠다.그런데 로맨스에 심취하여 감정을 가꾸어 나가는 소년의 모습은 바로 그의 사랑이 어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갖지 못하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요컨대 그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좌절과 환멸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성배를 운반하는 기사가 되었을 때, 소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기도와 찬미의 대상이었다가, 그의 몸이 하프가 되면, 그녀는 그 악기를 연주하는 섬세한 손길이 된다. 지속적인 사랑의 열병은 그를 눈물과 한숨으로 인도하고 그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정열 속으로 빠져든다.어둡고 비가 내리는 저녁 무렵,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깨진 창문으로부터 빗방울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 바늘 같은 가랑이가 촉촉이 젖은 화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나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 고마웠다. 나의 모든 감각은 감추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고, 내 스스로 이런 감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느낌이 들자, 나는 손바닥을 마주 대고 누르며 ‘오, 사랑! 오 사랑!’하고 수없이 속삭이며 몸을 떨었다.비 내리는 어두운 저녁, 소년은 신부가 돌아가신 골방에 들어가 온 몸을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된 것을 감사하며 소년은 자신의 온 마음을 소녀에 대한 정염으로 불태운다. 이러한 소년의 모습은 그의 사랑의 증상이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애러비’ 이국적 마력과 구원의 단서소년이 늪처럼 빠져들어 키워온 은밀한 사랑을 공공연하게 표현할 전기가 어느 날 찾아온다. 맹간의 누이가 그에게 ‘애러비’에 갈 것인지를 물어왔던 것이다.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만큼 성숙해진 소년에게 친구들의 장난은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놀이로 여겨진다. 그 대신 그는 소녀와 어른스런 대화를, 무언의 의사소통을 나누는 중이다. 그의 시선은 가로등 불빛이 되어 그녀의 흰 목덜미와 어깨, 머리카락, 그리고 손을 어루만진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속치마의 하얀 가장자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소년의 삶은 철저히 일상에서 벗어나고 만다. 집과 학교에서 그는 책장 위에 아른거리는 소녀의 환상과 환청처럼 들리는 ‘애러비’라는 소리에 사로잡혀 학업이며 심부름, 모든 일상적인 일들이 “어린애 장난, 보기 흉하고 단조로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진다. 그의 영혼은 온통 ‘애러비’에 매혹되어 그 곳은 그의 사랑을 이루어줄 구원의 장소, 낭만적인 사랑의 성소로 여겨진다. 소년은 소녀와 짧은 대화를 우연히 주고받고 막연한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현할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러비’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시장이 열리기까지의 지루할 나날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사랑의 환상, 그리고 환멸‘애러비’에 가는 토요일은 소년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짐하였지만 그날따라 아저씨의 귀가가 늦어진 것이 그가 조바심 내며 며칠을 기다려온 모험을 첫 단계부터 어긋나게 하였다. 바자회에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아저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바자행 특별열차를 타고 ‘애러비’에 간다. ‘애러비’라고 쓰여진 “마력의 이름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홀의 대부분이 어둠에 잠겨 있는” 파장 분위기였다.
비극적인 셰익스피어 희극의 세계셰익스피어라 하면,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과 4대 비극인 ‘오셀로(Othello)’, ‘리어 왕(The King Rear)’, ‘맥베스(Macbeth)’, ‘햄릿(Hamlet)’을 떠올린다. 물론 위에 열거한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많은 걸작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많이 공연되고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있었던 작품은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이다. 흔히 비극은 진지하고 학구적인 것이고 희극은 가볍고 흥미위주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비극의 주인공은 신분이 고귀하고 지략이 뛰어나며 용기가 있고 선량하지만 안타깝게도 딱 하나 있는 인간적인 결점으로 인해 불운한 신세로 전략해야 한다는 편견과 마찬가지로 그저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비극의 경우 그 어떤 교활한 속임수와 오해가 플롯 속에 작용하더라도, 그 방향성은 주인공의 파멸만을 향해 나아가기에 결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복잡해질 수가 없다. 반면에 희극은 골치 아픈 문제로 시작해서 갖은 지혜와 계획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를 이루어내야 하다 보니 얘기가 얽히고 설키어 그 복잡함만으로 따지자면 비극보다 어렵다. 즉, 비극은 단순 하강 구조이고, 희극은 상승->하강->상승을 반복하는 순환 구조이기 때문에 비극보다도 희극이 그 구조가 복잡하며 해석 역시 다양하다. 이는 각기 개성적인 연출을 통한 의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여 수 세기가 흐른 현재까지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시대와 발 맞추어가며 재해석되고 있다.문제는 그 해석의 가능성이 무척이나 다양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단순히 희극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희극은 넓게는 웃음을 유발하는 모든 연극을 일컫고, 좁게는 소극(farce)과 구별되는 수준 높은 해학극을 이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는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고, 단순한 소극과 차별화되는 정교한 구조와 해에 이른다. 그리고 드미트리어스가 꿈에서 깨어나고도 여전히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덕분에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헬레나는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는 헬레나와, 테세우스는 히폴리타와 합동 결혼식을 올린다. 소동에 일조했던 요정들의 왕과 여왕, 오베론과 티타니아가 함께 세 쌍의 결합을 축하하면서 극은 끝난다.언뜻 한 편의 우스운 소동을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곡들처럼 한여름 밤의 꿈 또한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여름 밤의 꿈에는 테세우스와 히폴리타, 오베론과 티타니아, 라이샌더와 허미아, 드미트리어스와 헬레나 모두 네 쌍의 연인이 등장한다. 각기 현실 세계와 환상의 세계, 성숙한 사랑과 미숙하면서 열정적인 사랑, 화합을 이루는 한 쌍과 불화를 일으키는 한 쌍을 대변한다. 이러한 대립쌍은 1:1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에 복잡함을 더한다. 테세우스와 히폴리타는 왕과 왕비라는 지위로써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대립쌍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사랑이라면 점에서 라이샌더와 허미아와도 대립쌍을 이룬다.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환상 세계의 왕과 여왕이자 부부싸움을 일으키는 연인으로써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대립쌍이기도 하지만, 아내인 티타니아의 바람기는 드미트리어스의 변덕과 병행한다. 대위법으로 작곡된 음악처럼 이들의 관계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표면적인 관계에 등장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사랑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활동기인 16세기는 대위법이 가장 엄격하게 지켜졌던 시기로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 속에도 대위법의 구조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주제 선율이 시간차를 두고 다시 등장하고, 몇 음 위에서나 아래에서 모방되기도 하고,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는 모습은 한여름 밤의 꿈의 전개과정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그러나 그 모든 변형된 형태는 바로 주제 선율에서 따온 것이며, 우리는 파헬벨의 캐논을 들을 때에는 이를 의식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함을 생각해보라. 한여름 밤의 꿈 또한 하나의 주제 선율이 변주되고 있을 미아에게 눈 돌리기 전).4. 마니아(Mania) : 마니아 상태는 격정적인 사랑을 말한다. 광기와 분이 계속되는 상태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환희와 절망이 성난 파도처럼 교차되는 폭풍 노도 시대, 그러나 종말은 갑작스런 파탄을 가져올 확률이 많다.- 사랑의 물약으로 인한 사랑:티타니아와 보톰, 드미트리어스와 라이샌더의 헬레나에 대한 사랑.5. 프라그마(Pragma) : 프라그마는 보다 현실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사랑이다. 상대가 여러모로 자기에게 맞으니까 사랑한다는 타입이다. 성격고 맞고 조건도 그만하면 됐으니 한번 사귀어 보자고 하다가 시작된 사랑이다. 그러다 서로 더욱 마음이 맞으면 진한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테세우스와 히폴리타.6. 아가페(Agape) : 아가페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랑이다. 이해와 양보와 희생을 통해 이루어 가는 사랑을 말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기본 패턴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힘든 사랑이어서 돈 주앙의 경우처럼 우리의 생각이나 이상 속에서만 살아 있는 실체다.- 헬레나의 드미트리어스에 대한 사랑. 허미아의 라이샌더에 대한 사랑. 오베론의 티타니아에 대한 관용.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며, 이들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새로 사랑을 시작하는 테세우스와 히폴리타는 강압과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관계다. 언젠가 오베론과 티타니아처럼 시시때때로 부부싸움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한 때 사이좋은 부부였지만 티타니아의 바람기 때문에 분란을 맞았다. 라이샌더는 허미아만을 사랑한다 하였지만 사랑의 묘약 때문이라고는 해도, 허미아를 잊고 헬레나에게 사랑을 바쳤다. 그는 언젠가 사랑의 묘약이 가져다주는 환상없이도 헬레나나 다른 여인에게로 사랑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드미트리어스 또한 언제고 다시 이유없이 입맛을 잃듯이 헬레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불변하는 사랑은 없다. 여성들은재평가를 받으면서 제 이름 그대로 폭풍우에 휩싸였다.그 줄거리는 이와 같다.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는 마법 연구에만 매달려 나랏일을 소홀히 하다, 나폴리 왕 알론조의 원조를 등에 엎은 동생 안토니오에게 축출당한다. 나라에서 쫓겨난 프로스페로는 세 살 된 딸아이 미란다와 함께 쪽배를 타고 바다를 표류한다. 다행히 그의 자문관 곤잘로가 챙겨준 양식과 마법이 깃든 지팡이와 옷, 마법책 덕분에 프로스페로는 무사히 작은 섬에 당도한다. 그 섬은 마녀 시코락스가 지배하던 섬으로 이제 시코락스는 죽어 사라지고 그녀의 아들인 야만적인 칼리반이 섬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로스페로는 시코락스에게 반항했다가 나무 사이 끼어 고통 받는 공기의 요정 아리엘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일정 기간 동안 그녀를 부하로 두기로 한다. 한편 칼리반과는 글을 가르쳐는 등 문명화시키려는 노력 중에 그가 미란다를 강간하려 한 이후로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 그렇게 프로스페로는 이제 장성한 딸 미란다와 아리엘, 칼리반 위에 군림하며 섬의 지배자가 된다. 극은 프로스페로가 나라에서 쫓겨나고 12년 뒤, 완전히 섬의 주인이 된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나폴리 왕 알론조와 그의 동생 세바스찬, 왕자 퍼디난드, 밀라노의 왕이 된 프로스페로의 동생 안토니오와 익살꾼 트링큘로와 주방장 스테파노를 태운 배가 섬의 옆을 지나간다. 이를 발견한 프로스페로는 복수와 복권의 기회이자 딸 미란다에게 적절한 짝을 찾아줄 때로 여겨 아리엘에게 명령해 폭풍을 일으키고 난파한 배가 섬에 안착하도록 한다. 또 아리엘에게 이들을 서로 헤어지게 하여 여러 무리로 나누고, 왕자 퍼디난드만을 그의 거처로 유인해온다. 퍼디난드와 미란다는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 사랑에 빠지고, 프로스페로는 내심 이에 대해 흡족해하면서도 퍼디난드를 애태우기 위해 겉으로는 둘의 결혼을 반대하고 퍼디난드에게 갖은 시험을 치르게 한다. 이 때 다른 일행들은 퍼디난드가 죽은 것으로 알고 상심해 있다가 프로스페로의 명을 받고 온 아리엘에 의해 세바스챤과 안토니아만 제외게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해주어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로스페로가 섬에서 미란다, 아리엘, 칼리반을 다스렸던 방법을 생각해보면 설령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더라도 그 시간은 어디까지나 폭풍전야로써 조만간 온 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섬에서 프로스페로는 전제 군주로써 마법의 힘을 사용하여 반항하는 자에게는 가혹하게 벌을 주고 충성하는 자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주는 무척 단순한 방법으로 섬을 지배했다. 미란다, 아리엘, 칼리반은 최대한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남성이자 왕으로써 프로스페로가 지배해야할 여성, 신하, 노예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로스페로는 미란다는 자신의 취향대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철저하게 무지하고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고, 아리엘은 적당한 보상을 대가로 걸고 부려먹으며, 칼리반은 그의 야만성을 이유로 내세워 최소한의 존엄성도 인정치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한다.그 결과 미란다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생동감 없는 여성으로 등장하며 프로스페로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고 순순히 따르는 모습, 때때로 보여주는 여성을 폄하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여성이란 남성들의 교육의 산물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존재가 매우 미미한 미란다의 생모처럼, 프로스페로의 세계에서 여성의 존재란 아주 미미한 것이다. 미란다의 존재는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이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의 한정된 교육임을 잘 보여준다. 프로스페로는 이처럼 순진한 미란다를 이용하여 퍼디난드를 꼬여내고 알론조 왕을 농락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면 미란다는 퍼디난드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되고, 이는 아버지가 아닌 남성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굴레가 여성에게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나라의 공주인 미란다가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고, 장차 왕과 왕비가 될 예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버지 없이 타국에서 생활.
여성 중심 비평 (Gynocriticism)1. 영미 페미니즘과 여성 중심 비평영미 페미니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 Sexual Politics』(1969)에서는 일상적 삶을 경험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러한 밀렛의 입장은 경험주의적 휴머니즘에 근거한 영미 페미니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밀렛 자신이 보여준 가장 귀중한 교훈은 바로 남성 중심적 텍스트들이 정전화되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문제인 동시에 독자들의 텍스트 읽기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준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삶의 경험이 남성 독자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여성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어내는 방식 또한 그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의 체험에 근거한 독자 반응 지향의 책읽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여성 이미지 비평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여성 이미지 비평으로 요약되는 1970년대 초반 페미니즘 문화 비평이 한 작업은 장구한 역사의 문학 전통을 지배해 온 남성중심주의와 그러한 영향 아래에서 쓰인 문학 텍스트들 속에서 부정적인 여성의 이미지들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모든 문학 정전에 성차별적 사유가 배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삶의 체험이 그 속에 재대로 반영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의 정치학』에서 시작된 여성 이미지 비평은 문학 텍스트를 읽어내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 주기는 하였지만 그 자체가 여성문학의 전통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이론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이론적 성찰을 위해서는 남성의 글쓰기와는 다른 여성 특유의 의식과 체험을 반영하는 글쓰기가 그 동안 존재해 왔으며 성차에 따른 글쓰기가 그 동안 존재해 왔으며 성차에 따른 글쓰기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는 여성 문학의 일관된 전통을 전착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즉 여성들만의 문학적 전통을 수립하는 작업은 페미니즘 문학비평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필수적인 작업이며 글 읽기와 글쓰기 작업을 통하여 ter)의 『그들만의 문학 A Literature of Their Own : British Women Novelists from Bronte to Lessing』(1977), 그리고 산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잔 구바(Susan Guba)가 함께 쓴 『다락방의 미친 여자 The Mad Woman in the Attic : The Woman Writer and the Nineteenth-Century Literary Imagination』(1979)등의 저술이 이른바 “여성중심비평(Gynocriticism)”의 중요한 업적들이다.2. 여성 중심 비평여성을 단지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는 수동적인 독자로서가 아니라 창작을 하는 여성작가로 보려는 입장이다. 이를 “여성 중심 비평”이라고 한다. 여성중심 비평이 다루는 주제는 여성이 쓴 작품의 역사와 문체, 주제, 장르 그리고 구조이다. 또한 여성의 독창적인 심리역학과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 집단으로서의 전문직 여성의 조사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여성중심 비평가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보이는 논리의 엄밀성과 고정된 분류와 같은 객관성의 추구에서 나타나는 특질들이 '여성의 글쓰기'에서는 어떤 대안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엘렌 식수스(Helene Cixous)는 여성적 글쓰기를 눈여겨보았다. 여성의 글쓰기 작업은 명백히 '문화의 해체'를 뜻한다. 남성의 지배문화는 여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소외되어 왔다. 즉 여성의 의미가 지배 문화로부터 생성된다는 점과 그 지배문화가 남성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이중적 소외된 것이다. 결국 여성은 언어나 사고방식, 정서, 태도 등 모든 면에서 종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성적 글쓰기는 이러한 종속성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문화 해체화'작업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다.여성적 글쓰기가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은 창조적 저술로서 문학과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일상어간에 구분된 분업적 구도를 깨있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구속하기 때문이다.3. 앨런 모어즈(Ellen Moers)모어즈의 『여성 문학인들』은 17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위대한 여류작가들의 이력을 조사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 문학의 ‘서사시적 시대(Epic Age)'의 설화 문학을 제공하려는 데 있다. 그는 여성의 소설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고 주제, 이미지, 전통, 생활 등을 중점적으로 관찰한다. 이 책에서 그는 50쪽에 달하는 『여류 문인 사전 목록』을 준비하여, 사포(Sappho)로부터 안나 아크마토바(Anna Akhmatova)에 이르기까지 약 250명의 여성 문인들의 대표적 작품들과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그는 모든 나라와 모든 시기에 여성만의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며, 문학에 있어서 여성만의 스타일, 즉 동질적이고 본질적인 여성의 의식, 문학 전통, 또는 스타일 등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문학을 균질화 시키려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4. 일레인 쇼월터(Elaine Showalter)'여성 중심 비평'을 대표하는 인물은 일레인 쇼월터이다. 쇼월터는 『페미니스트 시학을 위하여』(1979)에서 현대 페미니즘 비평을 남성작가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독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 비평(Feminist Critique)'과 여성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남성과는 다른 여성 특유의 경험과 문화 및 역사를 연구하는 '여성중심 비평(Gynocritics)'으로 구분하고 '페미니스트 비평'에서 '여성 중심 비평'으로의 전이를 강조하였다. 쇼월터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비평'은 근본적으로 남성 지향적이고, 따라서 남성비평가들의 성차별주의나 여성의 왜곡된 이미지를 연구하는 일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각을 탐색하는 의미 없는 작업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여성의 감정과 경험을 규명하기 위한 진정한 '여성중심비평'은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역사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접근법을 채택하여야하는 것이다. 쇼월터의 공적은 남성발전과정을 하위문화와 견주어서 전통적인 지배양식, 가치를 모방, 내면화하는 첫 번째 단계, 이에 저항하는 두 번째 단계, 지배문화와의 대립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추구하는 자기발견의 세 번째 단계로 분류하였는데, 여성작가에게 맞는 용어로 이 단계들을 이름 붙여서 각각 “여성적(feminine), 여성 해방적(feminist), 여성의(female) 단계”라는 용어로 불렀다. '여성적 단계'의 여성작가들은 지배문화인 남성들의 규범과 가치관을 모방하고 있었으며, 남성들의 전유물인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여성작가들은 남성의 이름으로 필명을 사용해야 했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 바로 이 시기에 속한다. '여성 해방적 단계'의 여성작가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위치에 대한 항의와 무시되어 온 여권의 옹호를 주장했는데, 엘리자벳 로빈스(Elizabeth Robins)같은 작가가 이 시기에 속한다. '여성의 단계'의 여성작가들은 여성의 독특한 경험과 특성에 가치를 부여했는데, 여기에 속하는 초기 여성작가로는 캐서린 맨스필드(Catherine Mansfield)가 있다. 여성의 글쓰기의 발전과정을 단지 세 단계로만 분류했기 때문에 쇼월터의 설명은 상당히 개괄적이다. 하지만 쇼월터의 연구는 브론테 자매(the Brontes)로부터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공유되고 강화되어온 문학적 의식, 다시 말해 이전까지 인식되지 못했던 문학적 의식의 복잡하고 연속적인 발전과정을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쇼월터는 여성의 글쓰기를 하나의 고립된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그 자체의 전통 속에서 읽어냄으로써 많은 통찰들이 얻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또한 쇼월터는 비평가들에게 여성이 쓴 작품의 성격에 관한 네 가지 모델을 제공하고 있어 페미니즘 비평의 몇몇 주된 관심거리들에 부응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성의 신체가 많은 문학적 이미지게 형성해 가는지를 탐색하는 문화적 유형이 바로 그 것이다.5. 산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잔 구바(Susan Guba)'여성 중심 비평'을 연구할 때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남성 중심적 문학 풍토 속에서 여성 작가가 느끼는 갈등과 불안에 주목하여,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추적한다. 이들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 아래 창작 활동이 곧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시기에 창작을 해야 했던 여성들의 불안한 심리, 이를 반영하는 표리부동한 서술 전략, 이에 따른 이중적 담론이라는 여성 문학의 특성을 찾아내었다. 길버트와 구바는 여성의 작품이 대체로 이중 담론의 형식 -침묵과 순종을 다룬 표층의 이야기와 이에 전복적인 심층의 이야기는 가부장 문화 속의 여성의 종속적 위치를 부각시키지만, 이면의 숨은 이야기는 여성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길버트와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19세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 여성 작가들이 천사 같은 아름다움, 온순, 순종, 침묵 뒤에 광기, 분노의 괴물을 숨기고 있었던 이중 전략을 논의한, 초기 페미니즘의 대표적 저술이다. 그녀들은 여기에서 매리 셸리(Mary Shelley),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엘리자벳 브라우닝(Elizabeth Browning), 에밀리 디킨스(Emily Dickens) 등 19세기 주요 여성작가들에 관한 고찰을 통해, 여성문학의 전통과 여성의 저술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가부장적 지배문화가 어떻게 저술을 남성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여성으로부터 창의력을 빼앗았는가를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특히 여성들이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하고 남성들이 부과해 놓은 규범에 복종해야 했던 19세기 빅토리아조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는 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