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부 성서 고고학의 발달사22부 고고학과 성서81부 성서 고고학의 발달사이 책은 크게 1부, 2부로 구성 되어있다. 1부에는 ‘성서 고고학의 발달사’로 중요한 발굴 작업, 유물, 그리고 저명한 고고학자들에 관한 개요를 설명한다. 먼저 성서 고고학은 현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그리고 시리아를 에워싸는 지역을 연구하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의 분과 학문이다. 이는 많은 학자에게 있어서 고대인의 삶과 관습을 알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자료이다.다시 1부에서는 총 6장으로 구성 되어있다. 1장에서는 ‘19세기 초창기의 탐험가들’을 살펴본다. 성지에서 처음으로 고고학적 시도를 한 사람들은 신학자들, 성서학자들과 기술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숙련된 고고학자는 아니었음에도 이후 성서 고고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미국인 목사 ‘에드워드 로빈슨’이 있다. 성서의 의문점들을 연구한 최초의 탐험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가장유명한 인물이었다. 회중교회의 목사로 성서학자이자 탐험가인 그는 아랍어에 능통한 미국인 선교사 엘리 스미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는데 팔레스타인의 역사 지리학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히브리어 지명을 현대 아랍어 지명과 맞추어보는 방법으로 지금의 ‘베이탄’이 고대 도시 ‘벧엘’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로빈슨과 스미스는 특별한 장비가 없었음에도 100여곳의 성서 유적을 발견 해냈다. 로빈슨은 계속되는 연구를 하던 중 수십여 곳이 넘는 성서 유적과 여러 고대 유산을 발견했는데 이 중 예루살렘 ‘성전산의 아치’가 있다. 물론 로빈슨의 식별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찾고자 했던 것이 모두 성공적으로 발견된 것은 아니다.로빈슨 탐험 이후 1865년에는 영국에서 ‘팔레스타인탐사기금’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 ‘찰스 워렌’ 이라는 영국군 장교를 예루살렘의 고대 유산을 탐사하고 기록하게 하기 위하여 파견하였다. 워렌은 1867년을 시작으로 몇 년 간 탐사를 진행하며 고대 예루살렘의 급수 시스템과 지하 구조를 조사하였다. 일부들이 높은 도시들보다 이른 시기에 건설 됐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통해 수 천 년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파괴와 재건축이 한 곳의 유적에서 파악되었다. 페트리는 ‘순서배열법’과 ‘형식분류’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수천 조각의 토기 파편들을 분류하였고 여러 도시들과 다양한 층의 연대를 결정했다. 이 개념은 주전 700년 고대 리디아에서 동전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하다. 그가 도입한 방법과 유물에 관한 논문은 초기 단계 성서 고고학 분야를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성서 고고학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 중 한명으로 기록되고 있다.2년 뒤에는 파라오 메르넵타의 신전 발굴 중 메르넵타의 제위 다섯 번째 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비문도 발견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례이고 성서 고고학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 중 하나이다.1903년에서 1905년에는 미국의 고고학자 ‘고틀리프 슈마허’의 주도로 므깃도에서 대규모의 발굴이 진행되었다. 북이스라엘 왕들 중 ‘여로보암’의 신하가 소유한 인장과 주전 제2천년기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포함해 중요한 발견을 해냈지만 발굴방법에서 보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슈하머는 므깃도 언덕을 발굴하는 데 언덕 전체를 가로지르는 트렌치(도랑)을 파는 방법을 택했다. 여기서 여러시대 지층과 유물을 간과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이 시기에 아일랜드 고고학자 ‘로버트 알렉산더 스튜어트 매캘리스터’가 다른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1898년부터 1909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적을 발굴했는데 ‘게셀’에서의 발굴작업은 팔레스타인에서 큰 규모중 하나였다. 그러나 빠른 발굴작업으로 대부분 유물들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하는데 실패했다. 페트리와 비교했을 때 토기와 층서학에 대해 신경을 덜 썼다. 하지만 게셀에서 가나안 ‘산당’(높은 제단)과 ‘게셀 달력’을 발견했다. 게셀 달력은 팔레오-히브리어 또는 페니키아 문자로 새겨져 있고 기본적인 농업 활동을 기록하여 성서시대 사람들의 삶의 이해를 높였다.비슷한 시기에 하버드대그는 전도유망한 고고학자들을 가르쳤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성서고고학학교와 예루살렘 캠퍼스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또한 양 대전 사이 기간동안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와 고고학자들은 ‘므깃도 유적’에서 연속적으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1925년에서 1939년까지 므깃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발굴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므깃도 유적을 발굴할 때 고고학자들은 ‘수평발굴’로 알려진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는데 텔의 층서를 위에서 아래로 한 층씩 파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세 번째 층을 파낸 후 자금이 부족해져 전통적인 수직발굴로 전환하여 진행했다. 이는 언덕의 옆면에 계단식 트렌치를 파는 방식인데 이로써 유적의 연속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주전 3000년-3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약 20개 도시가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한 흔적인 고대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들을 많이 발견 했다. 한편 시카고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솔로몬 시대에 이뤄진 수공예 기술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병거도시’를 근거로 솔로몬 시대에 속한 것으로 추정했다. 199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 발굴팀은 또 다른 ‘마구간’을 발견했지만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같은 시기에 또 다른 고고학자들로 이루어진 ‘합동탐사단’이 고대 사마리아 유적에서 새로운 발굴을 진행했다. 이중 ‘캐슬린 케니언’도 포함된다. 사마리아는 그녀의 첫 번째 발굴지였다. 그녀는 영국의 휠러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발굴 방법을 이용했는데 토양과 고대 유물의 색, 조직 그리고 다른 특성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을 주목하는 방식이었다. 차이점이 발견될 때 토기와 유물이 담긴 양동이도 바뀌어야하고 이로써 식별이 가능한 층서에 따라 발굴이 진행될 수가 있다. 한해가 끝나면 고고학자들은 겹겹이 쌓인 층의 단면을 사진으로 보관하고 발굴보고서로 발표한다. 이렇듯 이 층서학적 발굴은 ‘케니언-휠러 발굴방법’으로 알려지고 가장골이 가족 유해가 아니라 혈족 관계가 없는 여러명의 사람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마사다에서 거행하던 선서식을 중단했다.5장에서는 6일 전쟁 이후의 새로운 조사와 계획을 주된 내용으로 다룬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전에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에 속했던 영토를 점령하게 되자 성서 고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새로운 발굴조사에 영향을 준 것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고고학계의 동향이었다. 이는 ‘신고고학’ 또는 ‘과정고고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 고고학자 ‘루이스 빈포드’에 의해 주도됬다. 신고고학은 과거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고자 과학 이상으로 고고학을 강조했다. 팀은 주로 5-15명으로 구성되어 직접 조사 현장을 확인하며 눈에 띄는 점을 기록한다. 또한 조사결과는 각 시대의 여러 유적들과 더불어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이스라엘은 고고학 조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는데 그 당시 주요 고고학 조사 중 많이 알려진 것은 ‘모셰 코하비’의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골란 지역에 대한 긴급 조사’와 1978-88년 ‘루돌프 코헨’의 ‘네겝 지역에 대한 긴급 조사’였다. 그 결과 분열왕국시대의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왕국에서 살았던 인구의 수가 유적의 수에 근거해 추정되었다.1971년에는 이스라엘에서 페트리가 처음 발견한 ‘텔 엘 헤시’를 새롭게 발굴했다.책임자인 ‘래리 툼즈’는 앞장에서 살펴본 ‘케니언-휠러 발굴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오늘날 미국, 이스라엘, 요르단 지역의 발굴에서 사용되는 몇가지 새로운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한편 6일 전쟁의 뒤를 이어 윌리엄 G. 데버는 성서 고고학 분야 연구에 대한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서 고고학이란 명칭 대신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자고 했다. 이제는 다양한 고대 근동의 사람들과 문화를 연구하려는 것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고학자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1980년대에는 있게 됐다. 텔 카브리 유적에서 전기 비저항과 자력계인 두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중기 청동기시대 가나안 궁전의 인근 지역에 땅에 묻혀있던 벽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가나안 궁전이 이전 발굴자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2배 큰규모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러한 방법들이 앞으로 고고학의 전망을 밝게 해줄 것으로 예상했다.2부 고고학과 성서2부 7장에서는 노아의 홍수부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인의 가나안 정복까지를 다룬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증명하거나 반박하기 보다는 고대 일상생활의 세부사항을 알아내려는 데 관심이 많다. 지난 100여 년간 걸쳐서 근동 유적에는 주전 제2천년기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고 굉장한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이 히브리어 성서에 있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같은 실질적인 이야기에 대해 해명해주지 못하는게 사실이다.이에 반해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 갈라진 후인 주전 제1천년기의 분열왕국시대는 비문 기록등과 같이 성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다. 15년전 T. E. 로렌스와 네겝의 조사를 수행했던 영국의 ‘레너드 울리’는 현재 이라크에 속한 고대 유적 ‘키시’를 발굴작업 중 고대의 홍수로 인해 몇 피트에 걸쳐 쌓여있던 침적토 지층을 발견했다. 지층 아래와 위의 지층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토기류가 발견됨으로 그 유적은 홍수의 전과 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울리의 아내는 “노아의 홍수를 발견했다”고 소리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전 세계적인 범람이 아닌 국지적인 것이라고 정정하고 노아홍수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사실 메소포타미아의 주변 지역은 국지적인 홍수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는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자주 범람하기 때문이다.또한 1997년 미국의 두 지질학자인 ‘윌리엄 라이언’과 ‘윌터 피트만’은 7500년 전 흑해 주변에 비슷한 사건을 기록한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들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흡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홍수의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
정보전과 사이버전의 차이점과 사이버전 발전방향1.‘정보전’과 ‘사이버전’의 차이점현재 군과 민간에서 정보전과 사이버전을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두 개념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우선 정보전과 사이버전의 정의와 개념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정보전’이란 자신의 정보, 정보기반 프로세스, 정보시스템 그리고 컴퓨터 기반 네트워크를 보호함과 동시에, 정보의 압도적 우위에 기초하여, 적의 정보, 정보기반 프로세스, 정보시스템 그리고 컴퓨터 기반 네트워크에 우리의 의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정보전은 정보기술을 통한 지휘?통제?통신?컴퓨터 및 정보/첩보?감시?정찰체계의 효과적인 통합과 운영을 통해 전력 시너지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첨단 전쟁수행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보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정보‘작전(I0: information ope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정보우위 달성을 목적으로 전?평시 가용한 수단을 통합하여 아군의 정보 및 정보체계는 방어하고 보호하면서 적의 정보 및 정보체계를 공격하거나 영향을 주는 군사 및 군사관련 작전활동 이라고 설명한다.여기서 포괄적인 의미의 I0 수행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개념이 ‘컴퓨터 네트워크 작전(CNO: computer network operation)으로 바로 이것이 ’사이버전‘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즉 컴퓨터 및 네트워크와 관련된 기반장비를 토대로 하는 군사 및 군사 관련 영역의 컴퓨터네트워크 상 공간에서 적 컴퓨터네트워크와 정보를 공격하여 붕괴시키거나 정보활동을 통해 적의 컴퓨터네트워크를 이용하는 한편 아군 컴퓨터네트워크와 정보를 방어하는 무형적인 정보작전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즉 CNO는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수행되는 각종 작전이라고 단순하게 정리 할 수 있지만 실제 이것이 사이버전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사이버전은 전자폭탄 등을 활용한 물리적 공격 등 첨단 전자통신전과 동시에 실시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컴퓨터네트워크에서의 작전을 의미한다. 즉 정보전은 정보작전으로 사이버전은 CNO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전은 기본적으로 정보전이고 사이버전으로 전개된다는 게 새로운 추세이다.2.사이버전 발전방향이러한 사이버전에 대한 대응은 민?관?군 어느 한 부분에서만 해서는 효과가 없고 사회 각 부분이 유기적인 연계체계를 구축하여 능동적으로 대응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사이버 안전을 총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국가정보원과 정보통신부, 사이버전에 대한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의 ISP와 정보보호 산업체, 침해사고대응센터, 정보공유분석센터, 네트워크 시큐리티 포럼 등을 유기적으로 엮어 이들 상호간 원활한 정보 공유를 통해서 사고 발생 시 효율적으로 대처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암호기술을 필두로 한 정보보호를 위한 기술적 방법은 현재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으나, 기술의 활용을 담보할 수 있는 법 제도적인 방법이 병행하지 않는다면 정보보호의 완전성을 이루기는 어렵다. 새로운 전장 환경에 대한 인식을 명문화하여 사이버전 대응체계의 근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새로운 유형의 사이버전이 네트워크와 정보통신시스템을 위협함에 따라 이를 예방하고, 수습해야 할 정보보호기술도 환경변화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전
평택항 경쟁력 강화 방안Ⅰ.왜?평택항이 주목을 받는가Ⅱ.동북아 지역의 환경변화Ⅲ.평택항의 입지여건Ⅳ.평택항의 SWOT분석Ⅴ.평택항 활성화 정책방안Ⅵ.지속적인 마케팅 전략4pⅦ.결론Ⅰ.왜?평택항이 주목을 받는가최근 동북아 지역은 중국의 항만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가운대 세계 최고 무역국중 하나로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 추세가 연간 8.1% 성장세를 나타낼 것이라는 전망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무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항만 개발이 아주 절실히 필요한 시정이다. 환황해권 주요 항만 동북아 경제권의 해상물동량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동북아의 물류거점으로써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의 항만개발 및 해운.물류 기능 강화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환황해권 항만의 항만 및 물류단지 개발 계획은 모두 대중국, 대북 교역 및 물려거점화를 목표로하고 있는 평택항이 이에 적극적인 대응과 개발 전략을 수집하지 못하면 교역 물류거점 지접으로써 효율적인 항만개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진하기 힘들다.이에 따라 동북아 물류허브의 거접으로써 동북아 지역 중추항만으로 조기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계속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평택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동북아 경제권의 허브항만으로 거듭나고 있다. 대중국교역의 전초기지, 환황해권 거점항만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평택항은 중국 영성과는 338㎞, 청도·위해·연태 등과는 500㎞이내, 천진과는 778㎞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등 중국과 근접해 대중국 교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특히 평택항은 수도권의 중심항만으로 항만배후에 국가 및 지방 산업단지가 밀집해 풍부한 물동량을 제공 받을 수 있으며 반경 80㎞이내에 서울·수원·천안·청주 등의 대도시가 밀집돼 있는 산업 및 소비중심지인 수도권의 관문항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경기도는 지난 2003년 평택지방해양수산청 설치를 비롯 세관, 검역소, 출입국관리소, 합동청사, 감시초소, 부두근로자휴게소, 창고건립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국제여객터미널 및 수화물 회사와 물류·컨테이너 지원·가공포장시설, 상업·업무 및 연구벤처시설 등이 갖춰진 48만평 규모의 평택항 배후단지 공동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이에따라 평택항의 물동량 처리 비율이 높아졋다.평택항이 이처럼 급속한 성장을 지속해 온 것은 성장 잠재력이 국내 어느 항만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산업과 소비의 중심지인 수도권과 중부권의 화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하며, 주변지역에서 발생하는 화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자동차,철재,컨테이너부두 등의 항만시설을 확보한 결과이다.따라서 국제물류 구도의 변화와 국내 항만들의 경쟁적 항만 및 배후단지 개발전략에 대응하여, 21세기를 내다보는 구체적이고 차별적인 비전을 수립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평택항이 21세기 환황해권의 물류거점으로 우뚝 서기 위한 평택항의 경쟁력 확보와 과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동북아 지역의 환경변화1)경제발전 충심축의 이동21세기는 전세계의 정책적 힘이 아시아태평양으로 집중됨으로써 서계 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 국가들로 이동할 것으로 전망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강 무역국인 우리나라가 그러한 물동량 대비에 늦어 부산항, 광양항 에 치우치게 될 경우 일이 밀릴 수밖에 없는 시점이 다가오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항을 물동량에 맞게 발전시키고 처리할 경우, 아시아권은 물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2)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블록화태평양연안국들의 지역경제블럭화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수출다변화를 증진시키고 연내국들에 대한 수출입 물동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준다. 태평양연안국들의 경제블럭화는 21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거대 시장으로 성장함으로써 이에 우리나라는 항만의 입지조건과 특성을 살려 기능의 다각화와 경제적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신손한 변화에 대응해야한다.3)중국 컨테이너 물동량 변화중국의 WTO가입은 중국의 엄청난 물동량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물동량의 변화는 곧 이웃국인 우리나중추역할을 담당 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또 육지에 둘러써야 해일과 태풍 등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항로 및 항로폭:30km/0.4~1km, 조수간만의 차:9~10m, 평균수심:11~18m(평균14), 안개일수:26.3일폭풍일수:6.8일2)지리적 여건평택항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80km거리에 있고, 평택항을 중심으로 반경 100km이 내에 서울, 인천, 대전, 군산 등의 대도시가 위치하고 있어 엄청나게 물류유통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며, 최소의 물류비로 경쟁력을 베가시킬수 있다 아시아역내 경제권의 부상과 중국을 비록한 역내 국가들과의 근접한 연계로 역내 물동량을 효율적으로 처리할수 있고 아울러 평택항과 연계하여 개발되는 포승국가산업단지에 임해업종이 중심적으로 배치될 예정이다.경부고속도로평택·안성IC ⇒ 38국도 ⇒ 안중 ⇒ 평택·당진항서해안고속도로서평택IC ⇒ 평택·당진항동서고속도로서평택-안성-음성-삼척간 고속도로 시발점국도연결동서간 38-82번, 남북간1, 38, 43, 45번 도로와 연결평택당진항-안중-평택간 산업철도경부선 연결, 2004~2011년까지 부설 예정수원-평택-천안간 전철수도권 전철 연결야목-예산간 서해단선철도75.5km 부설 계획인천국제공항외곽순환도로 - 서해안 고속도로 - 서평택IC - 평택항김포공항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 서평택IC - 평택항청주공항경부·중부고속도로 - 38국도 - 평택항Ⅳ.평택항의 SWOT분석SWOT 분적을 통하여 평택항만의 차별화된 서비스를 바탕으로 활성화 방안을 기여할수있음.강점-지정학적으로 중부권 및 수도권 화물량유 치조건 유리 (수도권물류거점)-내륙접근 및 연계성용이(광역교통망)-항만배후지의 확보 및 발전전망 양호-3대 국책향만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관심 및 참여도가 높음-중앙 정부의 평택항 개발 및 운영 활성화 정책 지원-관련 SOC 확충 가능약점-국제기간 향로에서 이격-조수간만의의 차가 조금 있음-신설항이라 다른 항만의 비해 인지도가 떨어짐-인프라가 아직 미약-다른 유명 항만에서의 전문일력설 계획 추진 및 항 만운영 경쟁 심화-기업 등에서 기존 물류체계 유지로 화물 유치 어려움-대형 선사들의 종합물류업자로의 전환에 따른 경쟁력 심화1)강점 및 기회평택항에 대한 SWOT분석 결과는 지금 보다 더 항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선박과 화물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강점은 우선 항로와 화물의 분기점 등과 운송시스템과 관계가 깊을 수 있다. 즉, 형택항만의 장점이라고 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화물유치에 유리하고 배후 비지를 확보했고, 가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발전 잠재력이 높다는 것이고.기회적 요소는 대내적으로는 거리 및 비용 상의 우위가 확보되고 대외적으로는 대중교역의 머리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광역 교통망 등으로 물류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하고 선항으로 계획 개발하여 발전가능성이 있으며, 동북아 경제권의 부상과 함께 권역 내 무역, 물류의 중심항 중 하나로 성장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2)약점 및 위협한편 약점으로는 국제기간 항로에서의 이격, 항만개발 및 발전을 위한 유인책 제도적 지원의 미흡등을 들 수 있다위협적 요소로는 국내외 항만간의 경쟁이 치열하고 군산, 장항항지역의 집중개발 등으로 국가재원의 확보하기 까다롭고 전문인력이 부족한 부분이 위협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이에 따라 평택항을 종합물류기지로서 규제가 완전히 자유화 되고 고도의 정보체계를 이룩하여 원할히 물류의 흐름을 보장하고 부가가치 창출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한다.또한 평택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경인지역 및 중부지역의 대 중국 수출입 활몰을 집중적으로 유치하는 집중화 전력 또한 중요한 전략적 대안이 될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선사들에 대한 집중적인 마케팅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평택항의 장점인 수도권의 관문으로서의 역할확대, 배후 물류활성화를 위한 집중적 개발로 차별화 및 집중화, 고품질, 저가서비스 전략의 추구가 요구된다.Ⅴ.평택항 활성화 정책방안1)컨테이너 부두의 조기 개발장기적인 항만 정책과 대규모 항만 개발 게획에도 불구하고 컨테이너 시설이너 물동량 급증이 예상 되는 가운데 지역 중심항만이 되기 위해서는 컨테이너부두의 조기 개발이 시급하다 또한 국가적으로 수도권 화물의 내륙운송비 절감과 분담 처리 등을 위해서는 컨테이너 선석의 추가 확보가 필요하다2)수도권의 종합물류기지 개발 촉진평택항 지역을 수도권의 종합물류기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들 수 dLT다 평택항의 지리적 입지, 항만요율에서의 유리한 점을 활용하여 영남권 및 전남권과 수도권 남부간 이동화물을 유치한다. 또 종합물류단지계획은 관세자유지역의 개념을 도입하여 내륙물류유통단지와의 차별화를 추진 한다. 평택항과 인접 배후지에 대하여 관세자유지역을 설정하고 공업단지, 물류단지, 유통단지 및 업무단지를 유치하여 재수출상품에 대해 관세면제를 통한 제조업 활성화, 물류.유통의 연계성 강화를 통한 효율적인 수도권 물류지원 체제를 구축 한다.마지막으로 평택항 배후물류 단지는 배후지를 광역적으로 설정하여 종합물류거점의 기능을 부여하여 서해안 항만의 물류중심지로 부각시킨다.3)배후단지 활성화평택-중국 동남아의 활로 개선 및 다수 신사유치 전략의 수립과 더불어 산업단지와 항만 내 배후단지 설치, 평택항 IC개설이 시급하며 배후 산업 단지의 분양가격을 인하하거나 대금 납부조건을 완화해 배후 산업단지의 조기 활성화와 외국인 기업전용단지제도의 도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 화주 및 선사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포트세일즈를 벌여야 한다, 특히 현재까지는 평택항 개발에 있어서 민자유치의 의존도가 높아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의 시간이 높아 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민자의존율을 낮추고 정부의 참여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4)교통망의 확충경기권역의 장래 증가할 인구.산업규모에 따라 교통수여 역시 급증할 것이다 따라서 장래 교통수요를 수용하기 위해 제기되어 온 기존 계획안들의 주요 개념은 남북과 동서로 간선도로와 철도를 격자형에 가깝게 유도함으로써 주요활동의 거점을 연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통일을 대비한 교통망 확장도 유념해야한다.5)마케팅 활동 강화포트세일즈 사업 추홍보한다
1.독도를 둘러싼 분쟁오랜 옛날부터 우리 대한민국과 일본은 반도, 섬나라이므로 서로간의 무역을 통해서 많은 교류를 해왔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그만큼 오래된 무역의 역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서로간의 의지하는 부분도 크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에 앞서 고려시대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 에 있어서 점점 악연의 국가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 잦은 침략으로 우리나라를 괴롭혔고 점점 심해져 조선시대 임진왜란 을 일으켜서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최대 암흑기이자 일본과의 악감정이 최대점 으로 오른 일제 강점기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위안부, 역사왜곡, 군강제집행 등 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강점기가 지나고도 일본은 계속적인 역사 왜곡을 통해 일본 시민들을 가르친 결과 예전부터도 독도는 항상 분쟁이였으나 최근와서 독도의 숨겨진 값어치를 알고 왜곡된 역사를 통해서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2.독도의 중요성먼저 독도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를 보면, 독도 주변의 바다는 북한 난류와 동한 난류, 대마 난류 등이 만나면서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 연어, 송어, 대구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많이 잡힌다. 그리고 바다 속에는 다시마, 미역, 소라, 전복 등 해양 동물과 해조류가 풍부하다.군사적 가치를 보면 우리는 독도에 고성능 방공 레이더 기지를 구축해 전략적 기지로 관리하면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일본 및 북한 해ㆍ공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동북 아시아 및 국가 안보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얻을 수 있다.또한 경상북도는 독도 북서쪽 800m 해상에 50평 규모의 해양 과학 기지를 설치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독도 주변의 해양 상태를 파악하고, 정확한 날씨 예보도 가능하며, 지구 환경을 연구하고 해양 산업 활동과 해양 오염 방지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것으로 기대된다.독도는 해저의 지각 활동에 의해 솟아나온 용암이 굳어져 생긴 화산성 해저산이다. 그래서 독도는 해저산의 변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 유적이다. 또한 독도 바다 속의 동해 울릉 분지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 곳곳에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묻혀 있어서 개발을 통해 풍부한 해양 자원을 얻을 수 있다.3.일본의 영유권 주장1952년 1월18일 이승만 정부는 해상위에 ‘라인’을 그엇다. 독도를 기점으로 한 바다의 주권을 명시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를 ‘평화라인’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 어선의 ‘맥아더 라인’ 침범이 잦아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맥아더 라인은 1945년 9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일본 주변에 선포한 해역선이다.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업이나 해로 방면에서 가치를 느끼게 된 일본은 열흘 뒤인 1.28일본 정부는 평화라인 선포에 항의했다. 항의에만 그치지 않고 독도에 대한 한국 영유권부정하라는 외교문서까지 보내왔고 이것이 영유권 분쟁의 시작이였다.4.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 우기는 이유독도 문제에 있어 한국은 지키려는자 이고 일본은 빼앗으려는 자이다 지키는 쪽도 빼앗으려는 쪽도 나름 논리는 있어야하다. 일본은 틈만 나면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기정사실화 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왔다. 올해도 일본은 2012 방위백서에 독도를 일본땅 이란 주장을 담아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홍보하다 우리 정부로부터 강력항의를 받은바 있다 바로 최근이였던 2012 7.31일 이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근거는 크게 네가지 이다.첫째 일본의 고유 영토설이다 이에 따르면 독도는 원래 일본 땅이였다는 점을 고지도를 통해 주장 하고있다.둘째 주인없는땅 이른바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운다. 일본의 주장에 의하면 1905년 이전까지 독도는 주인이 없었다는 거이다.셋째 일본 본토와의 거리설이다. 측량 결과 독도는 일본과 더 가깝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마지막으로 2차 대전 패전국이었던 일본이 48개국과 맺은 대일본강화조약 (일명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침략으로 일본 영토에 복속되었던 여러 섬들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에서 독도는 빠져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5.우리나라의 반박근본적으로 우리 정부는 독도는 일본과 왈가왈부 할 사안이 없는 명백한 우리 영토라는입장을 갖고 있다. 이런 입장을 갖고 우리 정부는 일본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하고있다.첫째 고유 영토설의 근거가 되는 고지도에는 독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된 지도만도 100만장 이 넘고, 이 지도는 모두 일본이 제작한 것들이다. 1936년 일본 육지 측량부가 발행한 정부지도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으로 표기돼 있다.둘째 2005년 일본 오끼섬에서 발견된 안용복 조사보고서는 당시 안용복이 휴대한 지도를 참조해 조선 팔도의 이름을 기술하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서의 강원도에 부속됨 섬 임을 표시하고 있다.셋째 독도와 일본이 가까우니 일본 영토라면 부산과 더 가까운 대마도는 대한민국 영토인 가??넷째 조선이 독립하고 독도 등 고유한 영토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확립한것은 1952년 4월 발효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때문이 아니라 1945 8월 일제의 패망을 기해서다6.독도가 우리땅인 이유1. 독도, 서기 512년부터 한국영토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이 신라 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2.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 서기 1737년, 프랑 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왕국 영토 로 그려져 있다.3. 일본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 1667년의 일본 관찬 고문헌 ‘은주 시청합기‘ 에도 울릉도와 독도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글자를 써 넣었다.4. 17세기 말 일본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 1696년 일본정부는 일본 어부 들의 울릉도(및 독도) 고기잡이를 엄금했다.5.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공문서,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 일본 외무성의 일 본외교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있다'라는 실증자료가 수록되어 있다.6. 일본 내무성,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 일본내무성은 시마네현에게 울릉도와 독 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임이라 고 결정하였다.7. 일본 최고국가기관(태정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결정 일본 태정관 또한, '울릉도 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 마음에 익힐 것)할 것'이라는훈령을 내무 성에 내려보냈다.8. 19세기말 대한제국 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히 표시 갑오개혁 후 작성된 근대적 한국 지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9.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세계에 공표 대한제국은 1900년, 독 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세계에 공표하였고, 서양 사람들은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 이 라고 호칭하였다.10. 일본, 1905년 독도 강제 편입 일본은 1905년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다케시마'로 명명하였다.11. 연합국, 1946년 1월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군령 발표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5년, 한반도 주변의 제주도·울릉도·독도등을 일본 주권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 시켰다.
목차제1장 서론제1절 연구배경과 목적제2절 연구방법과 내용제2장 한류의 동향과 각 국의 한류역사와 성장과정제1절 한류란?제2절 한류의 원인1)내부적 요인1)1.한국의 놀라운 인프라1)2.세계적으로 까다로운 한국 음악시장1)3.한국의 문화 보편성1)4.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국가의 지원2)외부적 요인2)1.동북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일본문화에 대한 거부감2)2.낮아진 문화장벽3)3.동아시아의 가치 공유제3절 한류의 형성제4절 국가별 한류의 역사1)중국 2)대만 3)일본 4)몽골제5절 한류의 성장과정1)한류1.0 2)한류2.0 3)한류3.0제3장 한류 현상과 파급효과제1절 한류의 인기1)한류의 주요 컨텐츠2)한류 컨텐츠의 이용3)한류 컨텐츠의 호감도4)한류 컨텐츠의 수출제2절 한류의 파급효과1)경제적 파급효과1)1.소비재의 파급효과1)2.해외투자의 파급효과1)3.관광에서의 파급효과2)문화적 파급효과3)정치적 파급효과제4장 한류의 문제점과 발전방안제1절 한류의 문제점1)불합리한 계약관행과 수익배분 문제2)국제 경쟁력을 지닌 기획사의 부재3)반한류 정서4)컨텐츠의 부족5)언어의 장벽6)가치의 대립제2절 발전 방안1)각국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한 시장조사2)품질 보증3)한류 자산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4)정부의 협조5)현재의 열풍이 아닌 진정한 문화교류제5장 결론제1장 서론1)연구배경과 목적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드라마를 필두로 촉발된 한류 열풍은 2000년대 중~후반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K-Pop 열풍으로 인해 한류 2.0시대로 진화하였다. 일부 컨텐츠 및 국가를 중심으로 촉발된 한류 현상은 1.0과 2.0시대를 넘어 현재는 한류 3.0 시대의 개막을 위한 발전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이다. 한류가 확산, 진행됨에 따라 국내에 경제적 효과가 발생한다.우선 한류 현상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이와 연관된 대중문화 콘텐츠 수출 증가를 견인하는 직접적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류로 인한 국가 이미지 제고 또 우리나라 기업 및, 서비스업의 이미지 개,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복합적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는 일본·홍콩-한국·대만-중국·동남아시아의 순서로 경제 발전이 이어졌고, 경제적 교류에 이은 문화적 교류의 결과로 항류(港流)와 일류(日流)에 이어 한류가 발생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원조라는 외환위기와 더불어 IT(Information Technology) 산업의 거품이 빠지며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이 때 1980년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이 당시 세계적인 문화콘텐츠의 성공사례를 참고하여 정책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한국 대중문화의 경쟁력 상승 배경의 내적 요인으로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1987년부터 시작된 개방정책과 국내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성장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80년대 음악 산업의 발전과 함께 1990년대 영화, 게임, 인터넷 등 대중문화 산업 전체가 급성장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일본 콘텐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새로운 한국의 콘텐츠가 홍콩과 대만 그리고 중국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전체로 한류가 퍼질 수 있었다. 또한 아시아 전반에 걸친 반일감정이 한몫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그러나 한류의 발생시점과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지역에서 다른 수용자를 대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진출시점을 볼 때, 한국 TV드라마의 인기가 시작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인기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1993년 TV드라마 〈질투〉가 처음으로 수출되었고, 1997년부터 〈사랑이 뭐길래〉 등이 인기를 얻으며 1998년 클론, H.O.T 등의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류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핵심 요소는 단연 연예매니지먼트 산업이다. TV드라마와 대중음악 등의 유행은 한류스타를 탄생시켰고,되게 되고, 드라마가 식상하게 될 쯤 아이돌로 재편성된 K-POP이 상륙하면서 한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가요 분야에서는 김완섭과 장호철이 일찍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여 한국 가요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이후 대만의 대형 음반회사인 'Rock Records'에서 대만 가수들의 한국어 번안곡을 유행시키면서 한국 가요가 활성화되었다. 1990년대 말에는 클론이 를 히트시켰는데, 1998년 3월에 가진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음반도 40만장이나 팔았다. 클론의 뒤를 이어 SES, 디바, 유승준 등이 인기를 끌었고 이 추세는 H.O.T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다.퍼포먼스 중심의 한국의 댄스 그룹은 이전까지 홍콩 4대 천황의 발라드만이 주류였던 대만 가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ENERGY,K ONE,S.H.E,SUPER 7,나지상,반위백 처럼 한의국 스타일을 모방한 그룹도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자작곡이 드문 대만 가요계에서는 이전까지 자주 사용되어오던 일본 번안곡 대신 한국 가요를 번안(혹은 표절)하는 케이스가 많아졌다고 한다.3)일본초창기에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한 멜로 드라마의 인기로, 한류스타나 한류가 '한류=아줌마 전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젊은층으로부터 무관심이나 혹은 조소를 받는 경향[11]이 있었으나 동방신기를 시작으로 한국 아이돌 그룹이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12], 일본 아이돌 그룹에 비해 댄스와 가창력, 외모가 뛰어나다는 인식과 함께, 일본에서 대중화되지 않은 오토튠이 사용된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많은 K-POP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젊은층에서도 신한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다. 음악 이외에도 음식, 패션, 화장품 등 젊은이들의 여성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제가 유행하며 브랜드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명 모델들의 블로그나 패션지에서의 소개들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일본 내 한류의 가장 큰 특징은 팬들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걸그룹들의 팬덤은 대다수가 남성팬인데 비해 일본에 진출해 있는 카라, 소녀시대 등의 걸그라마 음악 등 일부 콘텐츠 중심으로 한류 현상이 지속될 경우 콘텐츠의 획일성 및 지나친 상업성으로 한류 수용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 발생 우려가 제기되면서 한류 컨텐츠의 차별성을 부각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 현재 한류는 외연 확대를 넘어 실질적인 내실 강화를 위해 대중문화 중심에 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산하려는 발전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다.제3장 한류 현황과 파급효과제1절 한류의 인기1)한류의 주요 콘텐츠처음 우리의 한류 열풍이 불었던 것은 바로 드라마부터 시작돼 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k-pop이다. 좀전의 한류 1.0시대를 지나 2.0 좀 더 나아가 3.0 시대로 가고 있는 증거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k-pop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나 참여 인원수가 많다고 가정했을 경우 한식, 한글, 한국관광 등 한국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서도 무시 못하는 수치이다 또 스포츠 대표적으로 박지성,김연아,박태환,류현진 등 스포츠 스타들과 우리나라 제품 대표적인 현대,삼성 등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그림한류 콘텐츠 조사출처:한국 문화산업 교류재단2)한류 컨텐츠의 이용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드라마 영화 k-pop을 비교했을 때 감소폭이 제일 적은 것은 영화이며 상승폭 역시 또한 적다 하지만 1년후 예상 그림을 봤을 때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이미 과거 추격자가 리메이크가 돼고 최근 설국열차 등 해외에서 반응이 뜨겁다 이로서 우리나라 영화가 해외에서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출처:한국 문화산업 교류재단3)한류컨텐츠의 호감도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드라마 게임 영화 뿐만 아니라 게임 산업도 해외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게임회사로는 nc소프트 넥슨이 있는데 이 두 게임회사의 대표적인 게임 리니지와 카트라이더 메이플 스토리는 이미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류는 이미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출처:한국 문화산업게 예정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일인당 국민소득 5천달러에서 1만 달러 사이일 경우에 가장높은 해외여행 성장률을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의 경우에도 1987년 해외여행 자유화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당시 우리나라 소득이 5천에서1만달러 사이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해외여행겸비가 저렴한 인근국가로의 여행목적지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향후 중국관광객의 유입 증가는 지속 될 것으로 보이며, 다른 동남아 지역 역시 그러하다 한류 바로 k-pop울 중심으로 한류는 동남아, 일본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유럽, 중앙아시아 등 전세계로 확산 중이다. 따라서 k-pop에 대한 해외의 관심과 열기는 국내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는 k-pop장르를 따로 분류하고 또한 2011년에 k-pop 동영상을 클린한 횟수는 무려 22억 8천여건이나 된다.출처:문화체육광광부,한국은행2)문화적 파급효과한류의 문화적 가치는 매우 크다 한류의 문화적 가치는 단군이래 우리 민족의 문화가 이웃 민족들에게 광범위하게,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거의 첫 사례라는 데 있습니다. 과거 우리 문화의 일부가 중국과 일본에 일부 전파된 것이 사실이지만, 한류처럼 광범위하고 전폭적으로 이웃민족을 열광시킨 적은 없었다.한류가 가져다 준 가장 큰 문화적 효과라면 바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꿨다는 것이다. 사실 다른 나라와 민족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그렇게 강하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못했다. '조그만 나라', '분단국' 등이 주를 이뤘고, 그나마 긍정적이라면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 정도로 문화적인 측면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이다.그러던 차에 90년대 중후반부터 '한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본토는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중국인의 시선을 사라잡았고, 대만에서는 댄스그룹 '클론'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한류'라는 말은 우리가 아닌 중국 언론이 지은 단어입니다. 워낙 그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