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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철론 『鹽鐵論』, 새로운 변화로의 야기
    『鹽鐵論』, 새로운 변화로의 야기Ⅰ. 序論Ⅱ. 『鹽鐵會議』의 정치적 배경Ⅲ. 儒家와 法家의 대립Ⅳ. 『鹽鐵論』에 보이는 대외정책Ⅴ. 法治와 禮治Ⅵ. 『鹽鐵論』을 통해 본 한 대 정치 와 사회, 사상Ⅷ. 結論※ 참고문헌Ⅰ. 序論『鹽鐵論』은 전한(前漢)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BC 81)에 전한의 조정에서 열렸던 회의의 토론내용을 선제(宣帝)때에 환관(桓寬) 유자(儒者)가 정리하여 편찬해낸 책이다. 무제(武帝)때부터 비롯된 소금?철 및 기타 술 등의 전매(專賣)제도 등 일련의 재정정책을 무제 사후에도 존속 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전국에서 추천을 받고 참석한 자들 사이의 논의 즉, 염철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책은 제1권 「본의(本義)」편부터 제 60권「잡론(雜論)」편까지 주제에 따라 모두 60편으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는데, 각 편마다 염철회의에 참여한 토론의 쌍방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대화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鹽鐵論』의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기 전에 『鹽鐵論』의 배경인 염철회의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염철회의는 위에 말한 것처럼 전한(前漢)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 2월에 담당 관리와 군국(君國)이 천거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에게 황제(皇帝)가 백성의 아픔과 고생을 묻고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제도에 대해 의논하여 혁파하게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시원 5년 한 소제가 조칙을 내려, “삼보(三輔)와 태상(太常)으로 하여금 현량(賢良)을 각 2인씩 천거케 하고 군국(君國)에서는 문학고제(文學高第)를 각 1인씩 천거케 하며, 중이천석(中二千石) 이하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작(爵)을 각각 차등 있게 사여(賜與)하게 하라” 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시원 6년에 조서를 다시 내려 승상(丞相)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하여금 이미 천거된 현량(賢良) 문학(文學)과 의논하여 민간의 어려움을 알아보게 하였다.” 이때 현량(賢良)으로는 무릉현(茂陵縣) 출신의 당생(唐生)과 문학(文學)으로는 노국(魯國)출신 鹽鐵會議를 제 1권 「본의(本義)」 편부터 제 60권 「잡론(雜論)」편까지 주제에 따라 60편으로 정리했으며, 각 편에는 회의에 참가한 쌍방이 서로를 힐난하는 장면이 대화체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첫 번째 편인 「本義」 에서는 회의의 핵심 토론 대상이 武帝시기에 실시된 소금, 철, 술에 대한 전매 정책, 그리고 균수와 평준이라는 관영 상업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이를 지지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이에 반대하는 민간의 文學들이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御史大夫와 민간의 文學의 대립은 당시 정부의 기존 관료 세력과 신진 관료 세력의 권력 다툼이라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 이번 단락에서는 鹽鐵會議에서 보인 대립각이 단순히 정권 다툼이나 정치적 음모로 해석될 수는 없다는 다른 관점에서 논지를 진행시키고자 한다.鹽鐵會議는 단순히 昭帝가 전국의 현자들을 모아 부국강병만을 논하려던 회의가 아니었으며, 부국강병이라는 표면적 소집 이유를 들추면 정치적 음모 등의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존재했다. 그러나 鹽鐵會議를 정치적 음모에 인한 정권 다툼의 도구나 정략의 수단이었다고만 바라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鹽鐵會議는 정략의 수단이라고만 정의내리기에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소제조(昭帝朝)의 중국인들에게 무제(武帝)에 의해 통치된 바로 앞의 시기와 그보다 앞선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특히 文帝의 치세를 평가하고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이 두 시기는 서로 이어져 있었음에도 지배계층이 추구한 방향과 시대정신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먼저, 文帝 시기에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이래 진한지제(秦漢之際)에 이르는 긴 전란의 상황이 낳은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 주로 책정되었다. 당시 국가 권력은 개국공신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春秋戰國 이래로 지속된 토지의 사유화에 의해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豪族)들이 소농민을 장악하는 경우가 횡행했다. 文帝와 景帝는 이 상황을 황로술(黃老術)이라 불리는 도가적(道家的) 무위이는 점에 있다. 文學은 이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서 御史大夫가 주도하는 정책이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경고했다.御史가 말했다“문학들은 중니(仲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그의 덕을 칭송하면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노(魯)와 위(衛) 일대에서 도를 닦고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근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그 제자들은 그로 인해 변한 것이 없었고, 세상은 그로 인해 다스려지지도 않았으며, 魯의 국력은 점점 더 쇠약해졌습니다. …(중략)… 이처럼 유자(儒者)들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군주를 받은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실효를 거둔 적이 없습니다.문학이 말했다.“채찍과 회초리가 없으면 조보라 할지라도 수레 끄는 말을 다룰 수 없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없으면 순(舜과) 우(禹)라고 하더라도 만민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孔子께서 이르시길, ‘봉황이 오지 않고 황하서 도(圖)가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어찌할 수 없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벼운 수레에 좋은 말을 매었어도 이를 달리게 할 방법이 없었고 성덕(聖德)과 인의(仁義)도 이를 펼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후략)이는 論儒의 일부분으로, 御史와 文學의 사상적 대립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御史는 儒家가 성현으로 숭배하는 孔子와 맹자(孟子)를 포함한 다수의 유생들이 현실 정치에서는 무능하였으며 옛날의 도를 고수하고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고루한 인물들이었다고 비난했는데, 文學은 孔子와 孟子 등 유교의 성현들이 당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은 儒家의 성현들이 현실 정치에서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제후들이 그들을 중용하지 않아서라고 예시와 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한다. 또한 儒者들이 도를 고수하는 것은 그것이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儒家적 노선을 대변했다.가장 대표적인 대목으로 저 두 편을 들어 설명했지만, 이밖에도 鹽鐵會議에는 기존 기득권층인 法家 사상가들과 신진 세력인 儒家 사상가들의 수많은 대립이 기록되어 있다. 도입부에서도 전술했듯, 이 대립, 밭에는 오곡을 심지 못하였으며, 백성은 술지게미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으니, 어찌 귤이나 유자를 실컷 먹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傳)』에서는 ‘큰 전쟁 이후에는 수대에 걸쳐 원기를 회복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지금 각 군국을 보면 밭은 있지만 농사짓는 사람이 없고, 성에는 방이 있지만 거주하는 사람이 없으니, 변군에 무슨 풍요로움이 있겠는가?”이처럼, 대부(大夫)는 기본적으로 흉노를 정벌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흉노를 정벌함으로써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한, 이전의 화친 정책이 실패한 것을 언급하여 화친정책의 비현실성을 부각시켰다.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은 인의와 덕을 바탕으로 대외 정책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대외정벌의 경제적 타당성을 부정하였고, 흉노를 교화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덕으로 다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의 통치는 먼 곳보다 가까운 곳이 우선임을 근거로 대외정벌을 반대하였다.대외정책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차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이다. 대외정벌의 기조를 이어나갈 것을 주장한 대부(大夫)는 중앙정부의 관료로써 염철전매제도를 실질적으로 운영해나가던 관료였다. 때문에 그들은 대외정벌의 전비를 담당해야할 당사자가 아니기도 하였지만, 국가의 관료로써 한(漢)나라의 천하 평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흉노와 화친을 하게 되면 관계를 유지하고자 무기한의 비용이 소모될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외정벌의 기조를 이어나감으로써 선대에 자신들이 수립한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이에 반해, 지방 호족이었던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은 흉노 정벌의 전비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그간의 성과를 보아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고, 전쟁의 기한도 정할 수 없으면서 같은 기간에 화친에 소모되는 비용보다 더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함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대외정책이 경제적 이를 다스리던 방법으로 빈곤하고 피폐한 백성들을 다스리자고 하니, 이는 마치 머뭇거리고 꾸물거리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점잖게 서로 인사하고 사양하면서 불을 끄려는 것과 같습니다.”문학(文學)이 말했다.“周 문왕(文王)이 흥기하자 백성들이 착한 일을 좋아하게 되었고, 유왕(幽王)과 여왕(?王)이 일어나니 백성들이 포학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이는 백성의 본성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풍속이 그렇게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商)과 周가 창성하고 걸(傑)과 주(紂)가 패망하게 된 것은, 탕(湯)과 무왕(武王)이 백이(伯夷) 같은 백성을 얻었기 때문에 잘 다스렸던 것이 아니고, 傑과 紂가 도척(盜?)과 장갹(莊?) 같은 백성을 만났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던 것도 아닙니다.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는 원인이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략)”「大論」 편에서 御史大夫는 시대가 바뀌면 다스리는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전제를 깔며 인정이 많고 순박했던 시기의 법을 계속 적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음을 들며 지금은 法治를 행할 때라고 주장하자, 文學은 백성의 本性은 바뀌지 않으니 치란의 원인이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禮治를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御史大夫 측이 孔子의 행적을 들어 그를 비난하는데, 文學이 이를 논박하며 孔子를 변호한다.大夫가 말했다.“문학(文學)이 성지자(聖知者)라고 칭송하는 孔子는 노(魯)를 다스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고, 제(齊)에서는 쫓겨나고 위(衛)에서도 기용되지 않았으며, 광(匡)에서는 포위되고 진(陳)과 채(蔡)에서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무릇 자신이 기용될 수 없는 때임을 알고서도 유세하며 다닌 것은 억지를 부린 것이고, 곤란함을 알고서도 그만두지 않은 것은 탐욕을 부린 것이며, 자신을 속인 줄도 모르고서 간 것은 어리석었기 때문이고, 곤욕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중략)… 상군(商君)은 경감(景監)을 통해서 왕을 만날 수 있었고, 응후(應侯)는 왕계(되었다.
    인문/어학| 2017.05.08| 18페이지| 4,500원| 조회(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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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의 탕평정치
    1.정조의 탕평정치정조의 탕평정치는 영조의 탕평책, 소위 말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완론탕평은 각 붕당의 의리와 명분보다는 붕당간의 조정과 화합을 추구하던 중도적 성향의 ‘탕평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완론탕평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어느 붕당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명백히 가려내기 보다는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간의 대립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미봉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아젠다를 ‘개혁’으로 선포한다. 이는 정조 2년, 민산(토지), 재용(재정), 인재(인재등용), 융정(군사)의 4가지 항목을 개혁의 핵심으로 정리하여 「대고(大誥)」를 반포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의지를 주자학 의리론과 도통설에 입각하여 정당화 하였다. 또한 그는 유교의 도통(道統)을 스스로 계승하고자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영조가 산림(山林)을 부정한 것을 이어 받으면서 스스로 ‘의리주인(義理主人)’,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임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공자이래로 갈라진 도학과 정치를 하나로 합치는 일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하지만,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에 집권하고 있던 노론벽파는 정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이들을 포용하기도, 견제하기도 하면서 개혁정치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여 자신의 개혁정책을 구현해내고자 하였다. 실재로 정조는 임오화변과 관련된 임오의리 조차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탕평정치의 실현을 추진하였으며, 일련의 과정들을 ‘권도론(權道論)’으로 정당화 하였다. 또한 최근 발견된 정조의 어찰집이 공개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비공개 서신을 통해 자신의 뜻대로 여론을 주도했음이 밝혀졌다.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자면, 홍국영의 실각과 관련된 사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을 예로들 수 있다. 『한중록』을 보면, 헤경궁 홍씨가 “그 후에 종수가 차자하여 국영을 쳤으니 이는 선왕(정조)이 친히 시키신 일이라.” 라는 기록을 남겨놓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심지어 정조 스스로도 1797년 2월 5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종수가 올린 상소의 초본이 사실은 자신이 지어서 보낸 것이라 밝히고 있다.뿐만 아니라, 정조는 척신세력들을 척결하고 본인의 정치적 개혁노선을 지지할 새로운 세력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반정은 타락하여 가는 문체를 순정한 문체로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것으로 노론 벽파계열인 박지원 일파의 신체문(新體文)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당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정조 스스로 사색을 타파하는 탕평이야말로 문체반정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드러내는 발언을 함으로써, 문풍의 진작 뿐만이 아니라 ‘탕평’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문체반정을 추진하였음을 드러내었다. 즉, 당론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론벽파를 회유하여 자신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시파(時派)중심의 정계구도로 재편하려는 정조의 의도가 노론 벽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문체반정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어서 정조는 영조의 관제개혁을 계승하여 사림정치, 공론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파붕당(波朋黨)을 통한 대신 책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개혁 세력을 육성하기 위한 제도 마련에도 주력하였다. 정조는 자신을 지지해줄 새로운 인적자원의 확보를 위해 인재의 ‘선발’이라는 측면에서는 과거제의 개혁을 통해, 인재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인재충원문제에 접근하고자 하였다.2.정조 탕평정치의 의의정조는 조선사회의 전환기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마주하고 있던 현실의 정치는 정조에게 우호적인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정조는 이러한 상황을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타개하고자 하였고, 우리는 여기에서 정조가 펼쳤던 탕평정치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정조가 도입한 초계문신제도와 규장각은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고 재교육시키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조선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는 데에 기여하였다. 실재로 이후 공경대부의 대부분이 초계문신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인재양성의 목적은 충분히 성취되었으며, 국왕 친위세력이라는 목적 또한 일정부분 감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정조는 군주도통설에 근거한 강력한 군주권을 바탕으로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온 향반과 서얼같은 중인계층을 정치구조 속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집권력 강화, 공적 영역의 확장, 공법질서의 확립을 통해서 신분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해소 하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3.정조 탕평정치의 한계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를 비판하고 그것을 개선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정조의 탕평정치도 역시 한계점과 부작용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당쟁의 근원이 되었던 이조 전랑과 한림의 특권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왕이 통제할 수 있는 이조, 병조의 판서와 참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와 함께 정조는 왕과 백성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는 중간세력의 발호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국정을 직접 관장하여 일일이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개입은 관료제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왕권을 강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관료제 내부의 견제장치를 무너뜨려 세도정치의 출현 조건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삼사의 언론을 주도하는 이조전랑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두고, 사관까지도 국왕의 영향력 하에 둘뿐만 아니라,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함으로써 국왕의 정치적 존립기반을 오히려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와 ‘고가대족(故家大族)’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운영 방식은 국왕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공론정치의 붕괴와 견제장치의 부재 속에서 절대화된 권력, 즉 세도정치가 등장할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인문/어학| 2017.05.08| 2페이지| 1,0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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