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은 조선후기 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판소리계 소설로 · · · · · · 등으로도 불린다. 이본은 사본으로 · 등 6종, 판본으로는 경판본만 20장본 · 25장본 2종이 전한다. 흥부전 경판본과의 비교에 있어 신재효의 박타령을 선택한 이유는 다양한 이본 중 신재효본이 가장 강한 독창성을 가졌기에 두 이본이 극단적인 편차를 가지고 있어 전개 양상의 차이점을 찾아보기 쉽기 때문이다. 신재효가 전래의 를 으로 개작한 것은 대략1870년대로 추측되는데 개작 당시에 신재효의 독창성이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흥부내외가 가난에 못 이겨 자살 소동을 벌이고, 도승이 나타나 명당을 점지하여 그 자리에 집을 짓는 부분 등은 개인적 창작이다. 신재효의 개작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놀부의 당당한 양반으로서의 격상, 흥부의 타락한 인물로의 전락, 작품의 서민적 삶의 발랄성 거세, 또 주제를 다분히 윤리 도덕적으로 바꾸어 놓은 점 등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두 이본은 지역적 배경, 흥부와 놀부의 기본적 신상에서부터 차이를 가진다.신재효본에서는 흥부와 놀부의 거주지가 충청 · 전라 · 경상 삼도의 어름이라고 하였는데, 경판본은 경상 · 전라 양도의 어름이라고 하였다. 또 경판본에서는 성이 없이 놀부 · 흥부로만 하였는데 신재효본에는 박 씨라고 나온다.분량이 정해져있는 관계로 본 글에서는 흥부전 경판본과 신재효본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을 위주로 다룰 것이다.첫 장면부터 경판본과 신재효본은 차이를 보인다.신재효본은 판소리계 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판소리적 서두로 글을 시작한다.요순임금 시대에도 사흉이 있으니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도 악한 인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작자의 사설으로 시작된다.아동방이 군사지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십실지읍에도 충신이 있고, 칠세지아도 효제를 일삼으니 무슨 불량한 사람이 있겠냐만은, 요순임금에 사흉이 있고, 공자님 당년에 도척이 있으니, 아마도 일종 여기는 어쩔 수가 있느냐.놀부의 악행이 나열된 부분은 경판본과 신재효본이 약간의 차이 외에는 거의 유사하지만 놀부의 악행만을 언급한 경판본과 달리 신재효본은 흥부의 선행 역시 언급한다. 언급된 흥부의 착한 성품은 대부분 자신의 일보다는 남의 일을 돕는데서 기인한 것인데 놀부가 흥부를 싫어하는 이유를 남의 일만 하느라고 돈 한 푼 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악인인 놀부에게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또한 경판본과 신재효본은 흥부가 놀부를 내쫒는 장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놀부 심사 무거(無據)하여 부모 생전 분재 전답을 홀로 차지하고, 흥부같은 어진 동생을 구박하여 건넛산 언덕 밑에 내떨고 나가며 조롱하고 들어가며 비양하니 어찌 아니 무지하리.하루는 놀보가 흥보를 불러 “흥보야! 네 듣거라.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것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 된다. 너도 나이 장성하여 계집자식 있는 놈이 사람 생애 어려운 줄 조금도 모르고서 나하나만 바라보고 유의유식하는 거동 보기 싫어 못하겠다.부모의 세간 살이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될 데, 하물며 이 세간은 나 혼자 장만하니 네게는 부당이라. 네 처자 데리고서 속거천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여서는 살육지환 날 것이니 어서 급히 떠나거라!”경판본에서는 탐욕스러운 놀부가 부모님의 재산을 전부 다 가진 채 동생 흥부를 내쫒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신재효본에서는 놀부가 자신의 능력껏 마련한 살림에 앉혀 사는 흥부를 보기 싫어 쫒아내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놀부가 온화하고 자애로운 형이 아닌 자신의 욕심이 앞서는 군상으로 묘사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극악무도한 존재로만 그려지는 경판본과는 달리 신재효본의 놀부에게는 나름의 일리와 타당성이 존재한다. 또한 경판본이 흥부와 놀부를 극단적으로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로 나눠 놀부의 악행만을 강조하였다면 처자식이 있는 엄연한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유의유식하는 흥부의 모습 역시 어김없이 비추고 있다.한편 신재효본에서는 쫓겨나는 흥부가 유식한 어휘를 쓰며 제발 살려 달라 사정하자 놀부가 하는 말에서 놀부의 비뚤어진 성품의 형성에 대한 실마리 역시 찾아볼 수 있다.“아버님 계실 적에 나는 생일 시키고서, 작은아들 사랑옵다 글공부 시키더니, 너 매우 유식하다! 당태종은 성주로되 천하를 다투어서 그 동생을 죽였으며, 조비는 영웅이나 재주를 시기하여 그 아우 죽였으니, 나 같은 초야농부 우애지정을 알겠느냐?”이 대목을 읽자마자 한 여름에 동생만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동생은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글공부를 할 때 자신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밭을 매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을 놀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절대적인 애정을 받아야할 존재인 부모님에게 무조건적으로 차별받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흥부 놀부 형제의 모습에서 성경 속의 형제인 에서와 야곱이 겹쳐보였다. 어머니의 차별로 본래 축복을 받았어야 할 형 에서는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고 동생 이삭은 축복을 받았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에서가 아버지에게 고기요리를 가져다주고 축복을 받을 순간에 야곱의 손을 에서처럼 털로 뒤덮이게 꾸며주고 고기를 구할 곳을 알려주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 야곱이 받게 한다.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권선징악적 규칙이 지배하는 고전소설에서 착한 흥부가 복을 받아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만 흥부가 착해지고 놀부가 악해지게 한 것은 부모님의 차별이 가져온 저주와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놀부가 흥부에 비해 개인주의적, 또는 이기주의적인 성품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놀부가 양보와 우애의 미덕을 모르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모진 행동만을 하는 것은 분명 어렸을 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날 때부터 놀부는 악인, 흥부는 선인이었고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했던 경판본과 달리 이렇듯 신재효본은 인물의 성격 형성에 있어 나름의 당위성과 입체적인 인물들을 보여준다.신재효본의 인물의 입체성은 경판본에서 놀부가 끝까지 악인으로 남아서 용서 받지 못하는 것과 달리 놀부가 회개하며 흥부와의 우애를 회복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드러난다. 경판본의 결말에서 놀부는 집이 온갖 똥에 뒤덮여 돌아갈 곳이 없자 구걸할 바가지라도 가져올 것을 후회하며 끝까지 깨우치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평면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놀부가 타는 박에서 끊임없이 가야 금장, 노승, 상전, 팔도 무당, 등 짐꾼, 광대, 양반, 사당패, 만여 명의 이야기꾼 등에 장비까지 나와 놀부에게 모욕을 주고, 겁박하고 때리며 모든 재산을 빼앗아가도 이는 선과 악의 대결에서 악의 패배의 결과일 뿐 독자들에게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반면 신재효본의 놀부는 탐욕스럽고 천성이 비뚤어짐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악행에 있어 어느 정도의 당위성과 인간적 면모들을 보여 경판본의 놀부보다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다.경판본에 비해 놀부가 박에서 나온 이들에게 곤욕을 당하는 장면이 훨씬 짧다는 것, 장비가 경판본에서는 놀부를 실컷 괴롭히다가 사라졌지만 신재효본에서는 개과천선한다면 재물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것 등은 신재효본의 합리성과 함께 앞서 말한 놀부라는 인물의 이본 간 성격의 차이점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또한 흥부전 경판본과 신재효본에서는 놀부 뿐 아니라 흥부의 성격과 흥부를 비추는 시각에서도 차이를 보인다.흥부가 놀부에게 내쫒긴 후의 행적을 보면 경판본과 신재효본 모두 흥부가 허름한 집에서 지내는 것은 똑같다. 다만 경판본의 흥부는 수수대로 집을 짓는 등 나름의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주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신재효본의 흥부는 풀밭에서 숙박하기도 하고 강가와 산 등을 한참을 떠돌며 방랑민으로 살다가 고향 근처의 복덕촌의 빈 집에 정착한다.흥부는 집도 없이 집을 지으려고 집 재목을 내려갈 양이면 만첩청산 들어가서 소부등(小不等) 대부등(大不等)을 와드렁 퉁탕 베어다가 안방 ·대청 · 행랑 · 몸채 · 내외 분합(分閤)물림퇴에 살미살창 가로닫이 입구자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놈은 집재목을 내려하고 수수밭 틈으로 들어가서 수수깡 한 단을 베어다가 안방 · 대청 · 행랑 · 몸채 두루 짚어 말집을 꽉 짓고 돌아보니, 수숫대 반 단이 그저 남았구나.이번에는 흥부가 놀부에게 쫒겨난 후의 행동양상과 그에 관련한 경판본과 신재효본의 관점의 차이를 살펴볼 것이다. 흥부가 가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그려지며 그러한 흥부의 모습을 따듯한 시각으로 비추는 경판본과 달리 신재효본에서 흥부는 복덕촌에 정착하기 전 상당히 철없고 염치없는 모습을 보이며 실제로도 ‘염치없는 흥보’라고 서술되고 있다.
종교란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동일한 종교체험이나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 조직체를 이룬다. 종교의 믿음체계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적 선을 제시하며 새로운 세상인 이상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고 종교는 그 이상세계의 구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초기의 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불교는 산중불교를 주장하는 등 속세와 분리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종교가 뿌리를 둔 곳이 사회이며 초월적인 이상 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현실세계에서 실현하고자 함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자신들의 종교 이념에 따라 다양한 종교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종교의 사회운동 중 가장 보편적이고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은 자선을 비롯한 사회복지 활동이다. 종교사회복지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거나 시장 논리에 매몰되기 쉬운 정부나 기업에서 행해지는 복지사업과 달리 정치적 역학 관계나 경제 논리와는 무관한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복리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종교 사회복지의 중요성은 1970년대에 접어들며 복지국가 위기론이 대두되어 민간의 복지 역할 확대와 복지다원주의에 대한 주장이 등장하며 재강조 되었다. 한국의 종교사회복지 활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행해지며 민간 사회복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개선해야 할 점 역시 많다. 첫째로는 종교의 사회복지의 이념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교리’를 분명하게 개발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종교사회복지 활동이 선교나 포교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속적 차원에서의 종교의 목표가 신자수와 사회적 영향력의 증대임을 볼 때 종교 사회 복지활동이 인간애의 사회적 표현이 아닌 종교의 자기 팽창의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교가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몰락한 이후 일정한 지배종교 없이 다양한 종교가 지배 종교로 성장하기 위해 영향과 함께 1960년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1년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 역시 불의한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관심이 증폭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여러 차례의 시국 메시지, 1973년 11월에는 지학순 주교 등의 민주 시국 선언을 발표 등이 잇달았다. 이후 민청학련 소속 학생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후 서울과 지방에서 여러 차례 기도회가 열렸고 점차 반유신체제운동이 확산되었으나 통일된 체제의 부재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발하였고 그 대응으로 사제단이 출범하였다. 사제단은 긴급조치의 무효화와 반(反)유신, 국민의 생존권과 언론보도,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주장하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사제단의 결성에 이어서 1975년에는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러한 천주교회의 사회참여 활동은 교회 내외에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내부로는 신앙을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닌 현실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외부로는 독재 정권의 강력한 탄압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사회정의운동을 활발하게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유신 체계의 붕괴 이후 정치 상황에 대해 올바른 현실 인식 없이 한계를 드러냈다. 이 상태로 한국 천주교회는 신군부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을 계기로 군부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더욱 민중 지향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천주교 사회운동 조직들은 전체 교회 속에 통합되지 못하고 개별적이고 분산적으로 각 부분의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한국 천주교 사회운동 부문들은 1984년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를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는히 소통하여 상황에 따라 효율적으로 조직력과 재원을 주고받는 시스템이 절실한 것 같다. 천주교회의 체계화되고 중앙집권화된 조직적 특성은 천주교 사회운동에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으나 이러한 조직적 특성을 개발, 발전시키는 것이 천주교만이 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절실한 것으로 보인다.앞서 살펴본 천주교의 사회운동 역사가 주로 민주화에 집중된 것과 비교해보았을 때 개신교 역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긴 했지만 정치색과 그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교단별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개신교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보다 보수적으로 비춰진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해 유사한 종교적 메시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양상의 종교사회운동이 전개된 것이 흥미롭다. 19세기 말 기독교 초기 사회운동은 저항적이거나 민중적이기보다는 개인의 의식 개혁을 통한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는 관점 하에서 조선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선교사들에 의한 계몽적인 생활운동이 그 중심을 이룬다. 당시의 생활 계몽 운동은 개인과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부터 교육, 의료기관과 복지시설의 설립까지 굉장히 포괄적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독립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자 국내에서의 기독교 사회운동은 농촌운동으로 전환된다. 한국 인구의 79%가 농촌인구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농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전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YMCA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사랑의 실천에 따라 의료와 복지 기관을 설치했고 6.25 이후에 수많은 전쟁고아가 출현하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1960년대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1970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후에는 신앙적인 모든 차이와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근본적인 연합 운동인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한국 기독교 수용 초기에 에큐메니칼 운동은 각 교단의 연합을 의미했고 연합된 교단은 조선의 독립이나 일본 수탈에 대해서는 불간섭의 원칙을 자연보호 활동이다. 기독교의 사회운동을 정리해보자면 성과 면에서 근대화와 민주화 양면 모두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에큐메니칼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대립은 기독교회가 종교 단체의 정치화와 보수화 사이에서 바람직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며 종교 사회운동이 가지는 난점을 드러낸다. 종교사회학자 벨라는 정치 제도와 종교 제도의 긴밀한 통합과 지나친 분리 모두 사회 발전을 방해한다고 보고 종교가 초월적 이상에 비추어서 현실의 사회 체계에 대하여 비판하고 도전하며 정교간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기독교계 역시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교단간의 이념 대립보다는 개신교가 추구하는 종교적 가치를 사회에 전파하는 데에 주력을 두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불교의 사회운동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불교 사회운동이 펼쳐지는 영역인 불교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불교 시민사회란 일반 사회에 대응하는 불교계 자체일 수도 있고 불교계 내부의 비구-비구니, 출가승려-재가신도 등의 하위 체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불교 시민사회 개념의 이중적 성격은 불교 사회운동을 대사회적 불교운동과 대내적 불교운동으로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불교 사회운동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체의 것을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불교 사회운동의 목표도 일반 사회와 불교계 내부의 이러한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사회운동의 과정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불교 사회운동의 전개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불교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불교적 방법에 의해 수행될 때 비로소 진정한 불교 사회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이라는 비불교적 방법에 의해 진행된 정화운동은 성공적인 불교사회운동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위의 불교시민사회와 불교적 방법에 대한 정의에 근거했을 때 불교사회운동이란 불교계 혹은 불교적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불교적 방법에 의해 불교적 가치를 실현 불교계가 겪은 시대·사회적 상황이 열악하였다고 해도 천주교와 기독교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의 우리 사회와 함께 자라온 토착 종교인데 비해서 그 사회운동의 성과가 미미한 것 같다. 또한 초기 불교 사회운동은 불교적 가르침을 사회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파하기보다 불교적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통해 불교에 대한 사회인식을 스스로 평가절하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교 사회운동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졌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불교만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분리하면서도 현실 정치의 정당화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면 불교는 그러한 이분법을 거부하고 현실 세계에서의 깨달음과 그 실현을 중요시 여기기에 기독교계 문제해결에 실마리를 줄 수도 있다. 또한 ‘풍경소리’가 은은히 부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 듯 전하는 것처럼 불교는 지금껏 타 종교가 행해온 포교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미친다. 그 증거가 기독교의 ‘사랑의 편지’보다 풍경소리가 더 늦게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도인을 포함한 더 많은 사람들이 풍경소리를 읽고 있는 데에 있다. 포교가 교세 확장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속세구원을 위한 것임을 볼 때 같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자극적인 색채로 쓰인 ‘불신지옥’과 사람들의 마음에 은은한 울림을 주는 ‘풍경소리’ 이 두 포교방법 중 어떠한 것이 이상적인 선을 위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에 의해 창립된 신종교로 전통과 근대성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근대성의 수용과 민족 자본의 형성, 민중 계몽을 함께 추구해 사회적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1917년 저축조합운동, 1918년 정관평 방언공사, 1945년 전재동포구호사업 등이 원불교의 종교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교단이 확장되며 여러 사회 부문에서 전문 NGO활동, 대안교육활동, 외국인 노동자 및 다문화가정 지원, 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