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한 제국의 스파르타한번 생각해보자. 세계의 역사에서 의지가 관철하며 강한 힘을 지닌 국가가 어디였을까?일반적인 사람들은 로마 제국이나 4대 문명의 나라들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 달리 평소에 우리가 입에서 써왔지만 그것이 나라인지는 잘 알지 못하는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스파르타' 제국이다. 무언가 일을 했을 때 거침없이 하자는 식으로 '스파르타하게 하자!' 라는 말을 서슴없이 쓴다. 이처럼 우리가 몰라왔지만 이미 우리 의식 속에 스파르타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다가온 제국인 스파르타를 스크린으로서 재구성되어 보인 것이 바로 영화 '300'이다. '300'이 처음 개봉되었을 때 나는 저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영화를 보아야만 알 수가 있었다. 300명의 정예군사가 전쟁을 치른다고 해서 '300'이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내용은 그 300명의 군사가 그리스를 치려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과 나라와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이번 영화는 몇 년 전 한번 보았던 기억이 있어 이번엔 내용보다 대사에 치중하면서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스파르타의 위대한 업적(?)을 봄과 동시에 그들의 사상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문득 들은 생각이 이것은 너무 허구성이 짙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하였다. 게다가 단지 스토리와 전투장면에만 중점을 두다보니 누구나 다른 장면에 대해선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나 또한 잘 생각나지 않아 '300'이라는 영화는 시시껄렁한 영화로 저평가를 내린 기억이 있다.솔직히 다시 봤다고 해서 저평가를 했던 영화가 고평가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생각이 잘못 되었는지 다시 보는 것은 그것을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300'의 주인공은 스파르타의 왕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나 나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겉으론 스파르타의 왕이 이야기를 이끌지만 전체적으로 스파르타 자체가 주인공이라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하는 것은 왕 뿐만이 아니라 스파르타 전 시민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최소의 인원으로 페르시아와 맞선 것이다. 페르시아 왕이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경험으로서 배운 것이 있기에 그러한 것을 원치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스파르타 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한 명의 '배신'으로 300명의 강력한 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그 어느 누구가 자신에게 가장 신뢰하고 그것을 무기로서 싸울 수 있는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수난과 경험을 쌓아온다 할지라도 스파르타 인들처럼 살아가기란 힘들다. 강자만이 살고 약자는 죽는다는 법칙이 그 세계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강자만이 살아남은 그들은 다른 국가들 보다 용맹하고 강인하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를 그들에게 비추어보자. 현재 우리의 모습은 마치 벌벌 떨고 있는 쥐 마냥 두려움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서 겁부터 먹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것보다 육체적 이기심만이 존재하여 자기 몸 사리기가 바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파르타 인들의 생활을 수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부터도 그들의 모습에 반할 정도로 부럽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적용하여 좀 더 자신감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300'을 보다보면 궁금한 점이 있다. 아무리 역사와 다르고 그 시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렸다지만 얼마나 많은 싱크로가 있을 것인가 이다. 왕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주술사들과 신탁녀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에게 의존하는 시대라지만 왕이란 존재는 단순한 인간의 집행자였던 것이었을까. 내가 생각하기론 그것은 주술사는 존재했겠지만 그 역할은 거의 '의회'와 같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국이 해왔던 것처럼 옛날 시대에도 의원들이 있었고 '의회'가 존재하였다. 결국 왕은 주술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왕은 단순한 명령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이다.게다가 주술사로 인해 더욱 궁금해진 존재가 있다. 바로 주술사들이 왕에게 말을 전하기 전에 그 말을 주는 여자-신탁녀-이다. 영화에서 신탁녀는 마을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난 자이며 주술사들의 성욕을 만족시켜주는 존재로 표현되어 매우 충격적이었다. 정말 신탁녀는 신의 말을 들었던 것이며 그냥 주술사들의 노리개로 쓰였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의 신은 매우 위대한 존재이지만 그 매개체로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진실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연구 중에 있지만 우선 신탁녀에 존재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론 그녀들은 화산가스를 마셔 환각의 증상으로 하는 말들을 주술사들이 마음대로 지어낸 것이라 하셨다. 이렇게 보면 신탁녀는 존재하였지만 역시 주술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존재일 뿐 그들의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에서 의원의 조종으로 신탁녀의 말씀을 지어낸 것은 실제와 거의 일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영화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겠지만 매우 과장되어있다. 나 또한 화려한 그래픽이 너무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대상과 다르게 감독의 취지가 많이 담겨져 있었다. 영화가 만화 원작이라는 것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이 만화다보니 더 화려하고 웅대한 모습이 보여야 독자들이 흥분하고 재미에 빠져들기 때문에 본래 역사와 다르게 영화는 거대한 스케일로 스크린에서 우리(관객)를 압도한다.
1. 중국 하가점 문화와 상·하층문화 차이1) 하가점 문화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에 위치하는 하가점 문화는 홍산과는 다른 성격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홍산문화 조사가 이루어지던 중 성격이 다른 청동기 문화층이 발굴되었다. 하가점은 서요하의 남쪽 상류인 노합하의 중류에 있으며 적봉에서 동쪽 15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 청동기 문화층에는 기원전 14세기를 기점으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문화가 존재했다. 학계에서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로 이를 구분하여 동일계열의 청동기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대한 기준점을 삼고 있다.2) 하가점 상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견 이래로 요서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어 이에 대한 정확한 논지를 행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각기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의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의 문화 형태를 추론할 수 있다.분포되어있는 유지는 하가점, 홍산후, 용두산 등이 있다. 이 유적들의 주 분포지역은 동으로는 노노아호산산(努魯兒虎山山)에 이르고, 서로는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지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하북성 동북부 지역, 북으로는 서납목윤하 유역이 이른다. 지리적 환경은 서고동저의 지형이며 초원이 발달하였다.그리고 유지와 유물 또한 다수 분포되어있다. 유지는 집자리, 구덩이, 무덤, 제련유지, 제사유지가 있다. 집자리는 반움집과 움집, 지상식으로 분류되며 반움집은 불을 땐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주동과 문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돌과 나무를 사용하여 돌덧널 나무관무덤과 돌널무덤, 나무널무덤, 돌덧널무덤, 민무덤, 돌뚜껑무덤이 있다. 돌널무덤의 경우 돌덧널 돌널무덤과 대석석관묘로 분류된다. 나무널무덤의 경우 네 벽은 정제되어있고 건평 수천 중층의 무덤에는 무덤 봉토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도 있다. 돌덧널무덤은 대부분은 주인이 청년과 아동이며 껴묻거리가 적다. 매장 방법은 대부분은 앙신직지장, 측신직지장이다. 무덤 주인은 아동부터 장년까지 다양하며 껴묻거리의 유무가 있다. 또한 동물 전체를 묻은 것과 한 부분만 묻은 것도 있다.제련유지는 적봉시 임서현 대정에 위치하며 동광석 채취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당지에서 채광하여 당지에서 제련하였고 직업의 분업화가 이루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제사 유지는 극십극등기 유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구덩이에 1명~6명까지 버려져있었다. 층위관계나 출토유물을 볼 때 긴 시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유물은 도기, 청동기, 금기, 석기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청동기가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지점 대부분이 무덤의 수장품인데 종류나 수량면에서 볼 때 요서지구의 청동기문화 시대에 가장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다. 지역적으로 남부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며 초기보다 후기에 많이 보인다. 종류별로 공구, 무기, 차, 마구, 예기, 장식품이 있다. 장식품에서 동경식이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청동기의 주요 특징을 보면 첫째, 청동기의 발달은 후기에서 발전하였다. 둘째, 분포지역은 동남부지역에 주로 분포하였다. 셋째, 청동기가 외부에서 유입된 것도 적지않지만 주로 변화 발전시켜 하가점 상층문화 고유 인소로 만든 것이 많다.3)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하층문화는 내몽고 적봉시의 하가점유적을 표지유적으로 한다. 라오하유역을 중심으로 요서부터 하북성 북부까지 분포한다. 요녕성 내에는 풍하 문화라 칭하며 유물 포함층은 두텁고 장기간의 정주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이에 앞서 홍산문화와 소하연문화를 계승 발전한 것으로 보여 하가점 하층문화의 시작점은 황하유역 후기 용산문화기와 병존관계에 있었다고 본다.하층문화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유형이 분류된다. 지역적으로 적봉 · 조양 중심의 연북지구와 북경, 천진, 당산의 삼각지대인 연남지구로 구분한다. 이를 다시 3개의 유형으로 세분한다.① 연북지구의 약왕묘(葯王廟)유형② 연남지구 동부의 대타두(大?頭) 유형③ 하북성 울현을 중심으로 한 호류하(壺流河) 유형토기는 다양한 종류가 분포되어있는데 력(?), 언(?), 호(壺), 두(豆) 등이 보이며 맹(孟), 규(?), 작(爵) 등은 청동제기를 모방하였다. 이외에도 소형 청동기와 청동무기, 장식품이 있다.발전 단계는 3시기로 나뉜다. 제 1기는 하대 조기에 상응하며 범위가 넓지 않다. 구성 용인에는 용산문화의 영향, 교섭이 간주된다. 제 2기는 하대 만기에 상응하며 범위가 확대된다. 하층문화의 발전기로 보며 소형 청동기가 사용되고 씨족 공동묘지에는 묘장의 배열로 보아 빈부의 계층차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제 3기는 상대 전기에 사응한다. 문화 발전에서 불평균성이 나타나고 대타두 유형 문화의 부장품에는 청동예기와 청동무기가 나타난다.토기는 력(?), 언(?) 등 중원 상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세발솥의 그릇들이 많이 나타나낟. 또한 채도로 나타난 토기는 상대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 형태를 가진다. 이를 통해 주변 선진문화를 섭취하면서 자발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대전자(大甸子) 분묘에서 발견된 토기 중에는 요북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대산 문화의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무리는 하가점 하층문화과의 공통점을 보인다.이를 통해 하가점 하층문화 분묘 부장 토기는 피장자의 등급과 신분을 표시하는 예기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층문화의 고유한 특징이다.위에서 언급한 하가점 하층문화의 세가지 유형에서 약왕묘 유형과 대타두 유형의 형성 이후에 호류하 유형의 형성된다. 즉 호류하 유형의 문화요소에는 거친 외면과 마연, 무덤의 부장토기의 홍, 백, 황의 채색회도는 약왕묘 유형과 유사하고 청동제 귀걸이와 마연의 절견력은 대타두 유형과 유사하다. 그러나 약왕묘 유형과 대타두 유형의 시발점은 같지 않다. 각자의 기원이 달리하기 때문에 하가점 하층 문화는 하나의 문화군에 속하면서도 독자성을 가졌다.또한 석기와 관련해서 시기와 관계없이 나타나 농공구를 통해 목축과 잡곡재배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각 유적과 토기에서 피와 조가 출토됨으로 확인 할 수 있다.오한기 대전자촌에서 발굴된 주거지를 통해 주거지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구조는 반지하식으로 마을을 방어하는 담이 있고 적봉 서산근 유적에서는 성축성벽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방어시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4) 상·하층 문화와의 차이상층문화와 하층문화는 같은 지역에 분포했으나 시기적으로 다르다. 두 문화가 계승 또는 별개인지 여전히 논하고 있으나 서로 상반된 견해가 팽배하다.우선 두 문화는 별개의 관계라 주장하는 입장을 보면 그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의 유지의 경우 집자리는 돌을 사용하여 담장을 쌓으며 구덩이는 원형 구덩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하가점 상층문화의 집자리는 대체적으로 움집이며 돌이나 흙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구덩이는 역사다리꼴 형태가 많다.하가점 하층문화의 무덤은 토갱수용묘(土坑竪?墓)가 주를 이루는데 반해 상층 문화는 돌덧널에 나무장구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층문화에서 청동기의 경우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며 도기가 매우 발달하였다. 초, 중기에 가장 많은 비율이 차지한 것이 내사갈도이며 니질흑도, 니질회도, 니질홍도 순으로 나타난다. 또한 력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며 채회도가 나타난다.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를 사용하였다. 상층문화의 경우 청동기의 발전이 두드러지는데 용기나 무기류, 공구류 등이 매우 발전하였다. 도기는 붉은 간도기가 주를 이루며 채회도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또한 하층문화에는 많은 성터가 보이나 상층문화는 하층문화의 성터를 그대로 이용하였다.이와 반대로 공통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입장이다. 연대가 서로 이어지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두의 형식이 하층문화에서 래원한 것과 복골의 형태로 보아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두 문화현상이 같은 계통으로 보기 어려우나 완전히 단절된 문화로 보기 어렵다.
푸코의 권력과 지식의 관계, 그리고 원형감옥Ⅰ. 목차Ⅱ. 본문1. 서론2. 본론가. 배경1) 1968년 프랑스2) 푸코의 정치적 형태3) 권력/지식, 원형감옥나. 사례3. 결론Ⅲ. 참고자료1. 참고문헌Ⅱ.본문1. 서론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사람들은 그 구조 속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고 이를 통해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맞추어 국가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시민들이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참여하여 현 상황을 적응하고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강제성을 띄어서 행하는 것이 아닌 시민들 모두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통제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을 권력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권력과 지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Foucault, Michel, 1926~1984)이다. 그는 현재 사회에서 행해지는 것은 권력기구의 통제 아래 이며 이것을 권력과 지식에서 더욱 연장하여 원형감옥론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권력기구와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주장하였다.2. 본론가. 배경1)1968년 프랑스푸코의 이론들을 알기 위해서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과 정치상을 알아야한다. 또한 푸코의 내면도 알아야 한다. 우선 푸코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프랑스 태생으로 프랑스의 정치적 사건과 그의 사상은 많은 부분이 교집합으로 되어 있고 1968년은 그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더불어 푸코는 어떠한 주제와 초점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밑바탕에 두었다. 이론적 확립을 위해서 단순한 정의가 아닌 자신과 결부시켜 그는 주제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였던 것이다.푸코는 학문의 중점은 철학이었지만 심리학과 언어 등 다양한 분야를 하였다. 그리고 인간과 관련되거나 정치 또는 사회와 관련된 서적을 두루 집필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한 곳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닌 다양한 역할에 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당시 프랑스는 세계의 영향을 받는 국가 중 하나였다. 1968년은 국가 정부를 뒤흔드는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틴 루터 킹 암살에 항의하는 궐기대회, 독일 학생운동 등 혁명 사건에 힘입어 프랑스는 역사상 최대의 총파업으로 프랑스 전체가 마비되는 상태였다. 이러한 혁명 상태가 이루어진 배경으로는 1960년대 반 권위주의적 경향이 일어났고 이것이 점점 퍼져나가면서 마르스크주의적 경향도 보이기 시작했다.이때 푸코는 “정치성의 경계가 바뀌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신병, 감금, 치료와 같은 주제도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치성의 정의가 확장되고 재정립되는 것이었다. 이후 저항문화가 더욱 확장되어가면서 푸코의 권력과 정치의 관한 문제는 인지되어가기 시작한다.2)푸코의 정치적 형태젊은 시절 푸코는 공산당에 가입을 하였었다. 그는 니체에 관심이 있었지만 마르크스에게 무관심은 아니었으며 실존주의에 대한 불만으로 가입을 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을 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와 다른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정된 정치적 형태를 지니지 않았다.사실 나는 정치라는 체스판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각형 위에 서 있어본 것 같다. 때로는 사각형 하니씩을 옮겨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입장에 동시에 서 보기도 했다. ………여러 역할에 섰던 그는 정치학을 대표자가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닌 사회적 변화(그의 경험)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학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상상력 빈곤을 주고 과학 담론·국가철학이나 계급 이데올로기 등의 마르크스주의는 총체적인 권력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이것을 해방해야 한다고 하였다. 새로운 정치학을 구성하여 푸코는 급 진보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맞추었다. 그리고 이런 정치학은 권력과 지식으로 연장되어갔다. 수많은 권력의 굴레에서 그는 권력과 지식의 불가분적인 결합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확립된 형태의 사회적 권력을 볼 수가 있다.3) 권력/지식, 원형감옥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깊은 분석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식으로 인해 절대적 권력을 얻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온다고 하였지만 그는 권력이 현대 사회서 어떻게 순환되며 작용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세세하고 분석적으로 이해하였으며 지식과 권력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를 알아내었다. 또한 그는 지식이 다른 정보보다 더 우월한 정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사상의 물적 조건에 관한 문제도 보았다. 그리고 푸코는 오늘날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문분야 속에서 있으면서 초월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에만 몰두한 시선이 아닌 초월적인 시선을 통하여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모든 지식은 하나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하고 그 뿌리를 그물망처럼 퍼져있으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보아서도 각자의 영향이 있다. 그리고 서로 행하는 분야에 따라 서로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는 것이며 이것을 권력에 맞추어 어떻게 순환되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권력 관계가 구조화가 되어 비지식인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 통제 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여 통제된다. 이것으로 지식 체계는 전문성으로 다시 권력 관계를 생산하게 된다.푸코는 생체권력에 대해서도 보았을 때,신체도 정치적 장에 직접 관여하며 권력 관계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배한다. 권력은 신체가 직업을 수행하거나 의식을 행하며 기호를 나타내도록 투자하고, 표시하고 훈련하며 고문하고 강요한다.이를 통해 근대 국가는 시민들의 유지 및 통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체를 기호화 한다는 것은 사회 규범에 맞추어 기호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순한 신체로서 체계에 적응과 동조 욕구, 그리고 협동하여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참여하는 시민은 처벌하지 않은 채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자율적 순응하고 감시 제도가 내화되며 순응하고 행동하도록 만든다.푸코는 이것에서 더욱 확장하여 권력의 지배가 커지고 지배받는 사람들은 점점 개체화가 되어 한 장소로 몰아넣어 감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판옵틱 구조로 이루어진 원형감옥이다. 원형감옥은 원통의 모습으로 한 곳에서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어 죄수들은 언제나 누군가 자기를 응시하고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유의지를 상실하는 상태를 보인다. 이처럼 감옥의 형태로 권력은 제도적 장치로 지배와 예속을 사용하여 유기체들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지배한다.푸코는 정치해부학으로 분과된 지식들을 무시하고 학문들을 위에서 통제하는 정치적 기술과의 상관관계를 통찰하여 인 서적에서 보듯이 규율장치 속으로 유기체들이 들어와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규율에 맞추어 자신들이 이미 하나의 개체가 되어 활동을 하여 제도적 안정이 된다는 것이고, 상층에 지식은 하층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나. 사례이와 같은 사례를 현대에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직장이나 공장으로 가보면 많은 사원과 인부들이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자신에게 다그치는 일도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만큼을 일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사원들이 쓰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중앙정보처리와 전산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정보들은 상관에게 전해지고 인사 발령 시 불이익으로 접목될 수가 있다. 여기서 일반 사원이 상관의 권력 관계에 놓여있고 원형감옥과 같은 형태의 감시가 이루어져 있다. 공장 또한 cctv를 통해 사장이 인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직원과 인부들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직원 카드이다. 그들의 정보를 마치 주민증과 같은 형태로 중앙 감시자(상관)은 그들의 출·퇴근과 출입 관련에 대해 감시하고 있다. 그들이 모르는 불명확한 존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자신들은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제도화된 기구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 관계와 연관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라는 정의를 내릴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본 것뿐이지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포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죽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형상하는 소재들은 기괴하고 사나우며 공포감을 유발한다. 종교에서 나타내는 지옥의 그림만 보아도 알 수 있고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저승사자의 모습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죽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그러나 '오구'에서는 달랐다. '오구'는 일반인이 알던 것에 완전히 반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연극을 기반으로 해서 영화까지 만들어진 우리 민족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노인이 죽기 전 신나는 굿판을 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의 선조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보여준다.작품을 보기에 앞서 '오구'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오구'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알던 바리데기 공주의 아버지인 '오구대왕'이다. 그가 바로 무속신앙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빌어 '오구 굿'이라는 굿이 있다. 바로 이 '오구 굿'이 작품 속에서 할머니를 극락세계에 보내기 위한 굿이다. 이 굿은 지방에 따라 다른 이름과 형식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같다. 이처럼 굿이란 옛날 샤머니즘 시대부터 이어온 하나의 문화로 본다.영화 '오구'는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며 든 첫 생각은 '어색하다'였다. 죽음을 보는 시선이 축제라는 것이 굉장히 어색하였다. 굿이란 단어를 들으면 드는 생각은 칼춤과 부채 등을 떠올리는데 '오구'에서의 굿은 처음부터 신명나는 거리행진과 춤판이 줄을 이었다. 굉장히 생소한 장면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의 굿에 반가워하고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바로 그들에게 굿은 축제라는 인식이 잡혀 있던 것이다. 어색함이 전혀 없이 같이 어우러져 신명나게 논다.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여 연원을 시작으로 한 굿은 할머니를 놀리는 모습의 해학적으로 보여주었다. 보면서 어느 새 나도 같이 웃고 있었다. 굿이란 것이 무섭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들이 말씀해주시어 상상한 무서운 굿판이 아니라 어깨가 들썩거리고 웃게 만드는 그런 굿판이었다. 이러한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장례절차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구'에 나온 굿판과 같이 춤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하나의 문화였다. 마치 축제와 같이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음식도 만들고 놀이도 하면서 수다를 떠든다. 그때 또한 '어색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축제의 행위로 보았던 것을 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슬픈 분위기에 장례를 생각하였던 것이다.그러나 모두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동안의 쌓인 눈물과 아픔이 담겨져 있었다. 한참을 웃고 나니 어느새 슬픈 굿을 마음을 저렸다. 구슬픈 아쟁 소리에 자식을 두고 떠나간다는 얼마나 불쌍한 이야기인지를 푸는 굿을 듣고 슬펐다. 누구나 한번 왔다 한번 가는 인생을 노래로서 나와 할머니의 슬픈 심정이 공감하였다. 굿에는 인간의 삶이 들어있다. 인간의 한평생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인간의 끝을 마무리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들이 굿을 통해 인생이란 여행을 마무리 했을 것이다.하지만 요즘 시대에 들어 굿은 안 좋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가 넓게 퍼져 미신이란 이유도 있고 꽹과리나 징을 울려대며 시끄러운 것 때문에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작품 속에서도 황씨 할머니께서 굿을 원하지만 자식도 처음에 반대하였고 동네 어른들마저 반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굿은 점점 사람들에게서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 같이 오랜만에 굿에 흥겨워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세월이 지나서 일까. 현대인들에게 굿은 생소하다. 나 또한 단순 미신적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굿판의 소리는 우리의 민속가락과 유사하였다. 그 때문에 굿과 멀리 떨어진 내가 친숙함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요즘 시대에 만약에 서울에서 굿판을 연다고 하면 반발하는 무리들이 많을 것이다. 비관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영화 '오구'에서처럼 모두가 웃고 춤을 추며 보는 축제와 같이 행하는 모습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 의문이다. 하지만 일부가 비관적으로 본다하여도 오구 굿은 우리 민족의 전통이 담겨져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처음에 영화에서 나오는 굿하는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여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시 듣고 보니 노랫말은 정해진 틀이 없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귀를 기울이며 우스운 이야기, 한 서린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서 노래를 부르며 냇가에 모여 물로 몸을 씻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굿판을 벌이기 전에 굿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의 때를 벗겨내어 청결하게 하기 위해 하얀 옷을 입고 몸을 씻는 모습이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굿 또한 정결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모습이 마치 신선 세계에 살던 신선들이 인간세계에 목욕하러 온 장면이 연상되었다. 주고받으며 하는 노래에 우리 민족의 집단의식과 민속놀이의 모습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여유와 정감이 느껴진다.굿하는 여자의 독백도 인상이 깊었다. 슬픈 곡조를 부르며 할머니의 한 많은 세월을 읊는 노랫말과 악기소리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마치 우리 어머니의 삶을 보듯이 마음 한편이 슬펐다.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시고 이제 흙으로 돌아가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우리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도 이와 같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시다가 이제 좀 살려고 하니 하늘이 데려가려 하시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우리 어머니들은 다 똑같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은 같았다. 한번 와서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그 한번이 너무 안타깝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한 여자의 죽음의 길을 위해 노래를 읊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한 서린 감정이 담겨져있다.영화 속에 등장하는 특정 요소들 또한 눈길이 갔다. 영화의 시작에서 한 폭의 그림같은 하늘이 나타난다. 그것을 보고 저승사자는 말한다. 나는 구름이다. 구름이라 부르기에 구름이다. 또한 마을에 나타난 저승사자들을 구경거리가 되고 아무렇지 않게 마을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아 저승사자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 가까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사람들이 웃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숙한 모습을 해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그렇다면 저승사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은 오구대왕의 명을 받아 황씨 할머니를 데려오고자 지상세계에 내려왔다. 할머니를 데려가는 것만이 그들의 역할은 아니었다. 오구대왕의 생각이였을까. 한 분은 황씨 할머니의 남편, 한 분은 굿하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왜 오구대왕은 그들과 가까운 관계인 자들을 그곳에 보냈을까. 그것은 하늘에선 모든 것을 보고 그 인연을 통해 지상과 저승은 가까이 연계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오구대왕의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에 대한 관계는 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작품에는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민간신앙이 보이는데 개가 있으면 사자가 못 온다던지 돌 인형 앞에 사자들이 먹으라고 놓는다던지 대문 앞에서 그릇을 깨는 행위 등이 나타난다. 이 같은 미신적 행위가 남아있음이 보인다.영화 끝에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인간세상을 여행하는 것은 즐겁다.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축제를 한다.'. 이 대사는 사실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축하를 받고 축제를 연다. 그리고 영화에서 본 것과 같이 마지막까지 축제를 연다. 본래 태어나서 축제를 여는 것은 맞지만 죽을 때에도 축제를 연다는 것은 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보통의 죽음은 슬프고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울면서 님을 떠나는 보내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오구'는 그러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죽기 전에도 동네주민들과 춤을 추면서 굿 한판을 즐기고 장례행렬에서도 칼춤과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린다. 마치 좋은 날인 듯이 축제가 행해진다. 어찌보면 인생의 운명이 다하여 하늘로 갔으면 축하할 일이다. 슬퍼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또 다른 삶이 이어진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남은 이들이 축제로서 배웅해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있는 지상세계에 인간들의 깊은 인정에서 오는 것이다.
차 례Ⅰ. 서론Ⅱ. 생애Ⅲ. 송석원시사와 천수경1. 옥계시사, 송석원시사2. 송석원시사와 천수경Ⅳ. 천수경의 시세계Ⅴ. 결론1. 서론조선시대 후반, 위항문학은 당시 중인 문학인들의 사상과 뜻이 서려있다. 그를 통해 우린 당시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을 엿볼 수 가 있다. 그 시대에 중인들은 경아전으로 관직의 자리에 올라 사대부 양반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양반으로서 살아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은 서로의 동질감을 주축으로 하나의 시사를 결성하여 그들의 문학을 써 내려 가기 시작한다.여항문학은 아직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여항문학은 굉장히 멀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 당시 중인들에게 있어 여항문학은 중요한 요소였고 사대부 양반과의 경계의 역할을 하였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자면 현 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문학을 이해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양반 문학에 익숙해진 현재의 사람들은 여항문학에 대해서 의무감이 가질 만큼 우리에게 격리 상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문학이 그 당시 조선시대의 계급 안에서 천민과 양반의 중간자로서 당시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어릴 적부터 지식인들은 주요 문헌이나 교육관에서 옛 선조들의 많은 작품을 배워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역사라 보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 온 대부분의 작가들은 사대부 양반과 왕족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역사서를 통해 단지 양반이 아닌 이하의 계급은 농사를 지으며 착취를 당한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을 계기를 통해 필자는 사대부의 작가가 아닌 중인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학을 알게 되어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중인-여항시인-의 신분적 한계 때문에 적지않은 불만을 가졌다. 경제적, 교육적 불만을 가지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행위를 통해 개혁을 일으키려 하였고 문학과 모임으로서 자신들의 생각을 방출했다. 그것이 바로 자자하여 공경대부들도 특별히 대우하여 자를 부르고 직접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폐백(幣帛)과 학당의 봉록으로 땔나무와 물을 대기에 충분하여 걱정이 없었으며, 평소에 마음이 강직하여 부호나 세력가라도 조금만 예의를 벗어나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곧장 신발을 신고 돌아왔다. 집에는 다만 사방의 벽만을 대하고 있어도 근심하는 모습이 없었다. 대개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것은 그 본성이 그러한 것이었다.거처하고 있는 옥류동(玉流洞) 골짜기는 소나무가 있고 돌도 있어서 자호하기를 '송석도인'이라 하였다. 석벽의 '송석원'이라는 벽과 예서는 완당 학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일찍이 수헌(睡軒) 김태욱(金泰郁)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팔뚝을 긋고 통곡하여 "이 팔은 잘라버려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모이니 그 수가 어찌 열 명, 백 명에 그치겠는가마는 이런 글씨를 쓸 사람이 유독 한 명도 없어서 남의 손을 빌려 쓰게 한단 말인가!" 라고 하니, 그 위항문인들의 기개를 승상함을 볼 만하다.동인들과 더불어 옥계시사를 결성하여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린 것이 비는 날이 없었고, 고금을 이야기하고 의론한 것이 죽 이어져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천수경의 계첩(계帖)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영광을 삼았다.학산(鶴山) 윤승선(尹承宣)은 자주 칭찬하기를 "그의 고시와 근체시는 두보 · 한유와 더불어 나란히 전할 만하다. 만약 깨달아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세상에 마땅히 이 노인을 추대하여 한 걸음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명한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아녀자와 어린애 그리고 하인들까지도 송석원 천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는 서당 훈도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달에 60전씩 받으면서, "하루에 책 읽는 것이 어찌 2문의 가치도 없겠느냐?"고 할 정도로,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하였다. 자기의 집에다 송석원시사를 조직하여 맹주가 되었다.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송석원시사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지적능력을 뽐내었다.1. 청풍 산기슭의 푸닥거리(楓麓修? 초가을,음력 7월)2. 국화 핀 뜨락의 단란한 모임(菊園團會한가을, 8월)3. 높은 산에 올라가 꽃구경하기(登高賞華한봄, 2월)4. 시냇가에서 갓끈 씻기(臨流濯?늦여름, 6월)5. 한길에 나가 달구경하며 다리밟기(街橋步月초봄, 1월)6. 성루에 올라가 초파일 등불 구경하기(城臺觀燈초여름, 4월)7. 한강 정자에 나가 맑은 바람 쐬기(江?淸遊늦봄, 3월)8. 산속 절간에서의 그윽한 약속(山寺幽約늦가을, 9월)9. 눈속에서 하롯가에 술 데우기(雪裏對炙초겨울, 10월)10. 매화나무 아래에서 술항아리 얼기(梅花開酌한겨울, 11월)11. 밤비 더위식히기(夜雨納凉한여름, 5월)12. 싣달 그믐날 밤 새우기(臘寒守歲늦겨울, 12월)그래서 이들은 을 선정하여 실제로 열두 달 기록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경험에 따라 시 짓기에 알맞은 장소들을 미리 선정하여 돌아다닌 것이다. 그리하여 시사 시인들은 자신들의 감각을 글로 표현한다.또한 이들 '옥계사'는 하나의 모임으로서 임득명의 서문에 결성과정이 드러나 있다. 모임은 옥류동 청풍정사(靑楓精舍)에 모여 수계(修?)를 행하고는 밤 늦게까지 소나무에 둘러 앉아 풍류를 즐기다가, 마음과 덕이 맞는 벗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가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계(契)와 다르다고 한다.임득명의 서문에는 '범례(凡例)'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옥계시사의 범례-정관-이다. 22조의 범례를 보면 이 모임이 문학을 넘어서서 일생을 함께 하자는 성격이 있다.1) 여러 동인들이 서로 사귀는 도리로는 미쁘고 솔직하기에 힘써야지,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해야 하며,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안과 밖이 따로 있어서는 안되며, 금란지계(金蘭之契)의 맹세를 저버려서는 안된다.1) 우리 동인들 가운데 만약 부모나 형제의 상을 당하게 되면 한냥씩 부의(簿儀)하고, 종이와 초로 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임은 신분적 속성을 내포한 동질적 부류로서의 횡정 유대감인 '우정'을 근거로 더욱 결속되었다. 이것을 장혼은 이리 말한다.같은 무리가 서로 구하고 같은 소리에 서로 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 사귐이 친밀하고 사는 집이 가까우며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여기 있어서, 산수를 즐기는 모임과 풍월의 기약으로 하나의 계를 모은다면. 이 또한 기이한 일일 것이다. 그 정취가 아주 비슷하다. 병오년(1786) 6월 어느날, 내가 먼저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장기나 바둑으로 사귐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권세나 이익으로 사귐은 한해를 넘기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은 오래 계속될 수가 있다. 이제 나와 그대들이 모두 시사 조직하는 것을 좋아하니, 한 달에 한번씩 모여…"이에 글쓰는 사람은 서(序)를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은 그려서, 일이 다 마쳐졌다. 그래서 서로 읍하고 말하였다. "옥계의 물가에 시사를 세웠으니, 글로써 모이고 덕으로써 규범을 삼는다.이들의 주요 활동은 시회의 개최와 시축이나 시첩을 만드는 일을 하고 모여 시를 주고 받으며 함께 몇 구절씩 지어내어 연구를 이루었다. 주로 두 사람이 함께 연구를 하였고 최대 아홉 명이 함께 연구를 지었다.송석원 시사는 1791년에 을 엮었고, 여러 권의 시축을 거쳐 1797년에는 선배 시인들이 를 간행했던 60주년을 기념하여 천수경이 을 엮고, 장혼이 교정을 맡았다.천수경이 1818년에 죽은 뒤로 송석원 시사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예전과 같이 시를 짓는 모임은 이어지지 않고, 예전에 엮었던 시축과 시첩들도 떨어져 얼마 남지도 않게 되었다. 그 후 10년을 전후하여 송석원시사의 동인들이 죽자 활동도 악해지며 1840년대 조수삼과 박윤묵이 시사를 유지해가며 크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시사로 분류되었다. 이와 동시에 기술직 중인이 재등장하여 시사의 모습은 변하였다.3.2 송석원 시사와 천수경송석원시사는 천수경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며 그는 맹주의 자리에 서 있었다. 천수경은 '옥계원시사의 동인들과 시를 지으면서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논하며 시사의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그는 '옥계시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잘 나타냈는데 에 대해서 이것을 유흥의 명목을 절기에 특성에 따라 세분하여 문자화 한 것이지만 그 유흥은 비속하지 않고 이 정서를 "우리들의 청흥(淸興) 언제 끝나랴. 어느 사이 옷과 두건에 취한 흔적 서렸다."라고 표현하였다.또한 천수경은 지덕귀의 '번잡한 세상사 잊은 지오래'라는 말을 통해 '생활현실로부터의 이탈'에 대해 의 서문에 적었다.등림(登臨) ? 유관(遊觀)은 군자가 마음을 기르는 바다. 마음이 그 길러줌을 얻으면 능히 진애()를 초월할 수 있고, 절로 신체가 넉넉해지고 편안해져 뜻과 기운이 굳게 정해진다.'등림(登臨)'의 원의(原義)는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한다는 것이며, '유관'은 문자 그대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등림과 유관'은 '산수를 찾아 노는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생활현실로부터의 이탈은 산수를 찾는 행위라고 본다.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가 풍류를 즐기는 과정 속에서 현실의 번잡함을 잊는 것을 천수경은 '양심(養心)'을 거론하며 표현하였다. 그리고 천수경은 산수를 즐기는 의의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지금 여러 군자(君子)들은 모두 석거(石渠)에 매인 몸이라 직무에 이바지하기에 겨를이 없으나, 일찍이 천석(泉石)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휴가를 얻으며 반드시 술과 시로 운수(雲水) 사이에서 노닐되, 하루 종일 혹은 하루 저녁을 지내고 돌아간다. 즐김에는 사죽(絲竹)의 시끄러움이 없고 물소리와 산빛 가운데 둘러앉아 주미(?尾)를 휘두르고 청담(淸談)을 나누면서 등림(登臨)의 기쁨을 극진히 하고 술잔을 잡고 눈썹을 들면서 유관(遊觀)의 즐거움을 한없이 누린다.이처럼 생활현실을 동인들은 벗어나 산수를 찾아가며 즐기는 행위를 형상화 하여 시로서 창작함으로서 시사의 기본 형식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는 송석원에는 세상의 번잡한 일이 없기에 사랑하는 것으로 현실이탈적 산수취미의 추구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