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래여행계획유럽에 가본적이 없지만 항상 유럽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탈리아를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주로 프랑스혁명 이전 고대나 르네상스의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있고 지방색이 뚜렷하여 각 도시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기에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탈리아 패스(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일정을 계획해보았습니다.저는 나폴리, 로마, 바티칸, 피사, 피렌체, 베네치아, 베로나, 밀라노의 순서로 여행할 계획입니다. 즉, 지도와 같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보통 여행사에서 유럽여행 경로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순이라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로 여행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저는 이와 반대로 가면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터키항공에서 판매하는 한국에서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나폴리 행 항공료가 저렴하기에 나폴리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경로를 계획했습니다.첫번째 여행지는 나폴리입니다.저는 이탈리아 남부의 평온하고 목가적인 도시, 나폴리를 첫 여행지로 골라보았습니다.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인 나폴리는 고대 그리스 이후 남부 이탈리아의 중심도시로 발전해왔으며 오랜 역사에 걸맞게 역사의 소중한 유물, 유적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나폴리 역사 지구 :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인 나폴리 역사 지구에서 산타 카테리나 포르미엘로와 몬테올리베트 복합 단지 등 르네상스 교회건축물을 구경할 것입니다. 2,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다양한 역사 건축물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산 카를로 극장 : 부르봉 왕가 때 지어진 건물로 이탈리아의 3대 극장으로 로시니, 푸치니 등의 유명 작곡가들과 관련이 깊은 장소입니다. 여러 가지 재난과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나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페라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습니다.또한 나폴리에는 2개의 부속 섬이 있는데 카프리섬과 이스치아섬입니다. 이 두 섬은 나폴리만에서 페리로 1시간정도 걸리면 닿을 수 있는데요, 여행 첫날 저녁에 둘방 → 원형의 방 → 그리스십자의 방 → 촛대의 방 → 아라찌의 방 → 소비에스키의 방 → 성모마리아의 방 → 라파엘로의 방 →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방 → 비밀의 방 → 엘리오도르의 방 → 서명의 방 → 보르고의 방 → 시스티나 소성당) → 베드로 대성당 → 베드로 대광장→ 천사의 성의 순서로 관람할 것입니다.콜로세움 : “이탈리아”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린다는 장소로, 문헌에 기록된 이름은 ‘플라비우스의 원형극장‘입니다. 이곳에서는 검투경기, 해상전투 재연, 야생 맹수 사냥, 그리고 고대 신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등 대중들을 위한 각종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잔인한 경기를 금하면서 콜로세움은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로마시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진실의 입 :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한쪽 벽면에 전시된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지름 1.5m의 크기의 원형 대리석 조각으로 원래는 BC 4세기경 만들어진 하수도 뚜껑이라고 합니다. 중세시대에 범죄자를 심문할 때 진실이 아니라면 손이 잘려도 좋다는 서약을 하게 한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트레비 분수 : 트레비 분수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상수도 시설 중 하나로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곳은 〈로마의 휴일〉, 등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전을 한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이혼하게 된다고 합니다바티칸 박물관 :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곳을 세계 권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유명 예술가들을 초대해 건축과 장식을 맡겼다고 합니다. 때문에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 수많은 거장들이이곳에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후 역대 로마 교황의 거주지였던 바티칸 궁전을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지금의 바티칸 박물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내부에 위치한 피나코테카에서 12세기부터 19세기의 걸작들을 관람하고 솔방울 모형으티누스 황제 때,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립 된 성당입니다. 성당의 건립 당시 시민들에게 면죄부를 팔아 성당의 건축 자금을 마련하였는데 이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성당이며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들이 가득합니다.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를 제외한 다른 주요 작품은 바로크시대 이후에 속하며, 근대의 작품으로서는 현관랑 좌단의 만즈의 작품 ‘입구문’이 있습니다.세번째 여행지는 피렌체입니다.꽃과 예술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중심도시로,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제작된 거장들의 작품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때문에 도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저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과 미술품을 중심으로 피렌체를 관람하고자 합니다.두오모 성당 :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성 피에트로 성당을 지을 때 두오모보다 크게 지을 순 있어도 아름답게 짓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상징성 때문에 피렌체의 상징으로 불리는 건물입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으로 꾸며진 외관이 화려합니다.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꽃의 성모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성당에서 거대한 붉은 돔 '쿠폴라'의 464개에 이르는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빨간 지붕으로 뒤덮인 피렌체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중세와 르네상스 작품들이 가득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님의 몸을 여러 사람이 부축하는 장면을 묘사한 피렌체의 피에타도 이곳에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그가 24세에 제작한 바티칸의 피에타와 비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산타 크로체 성당 : 13~14세기에 건설된 고딕 양식의 교회입니다. 내부 지하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피렌체 출신 유명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한 시인 단테의 기념비도 이곳에 있습니다. ‘피렌체의 판테온’이라고도 불리며, 페르치 가의 예배당과 발디 가 예배이 매년 다녀간다고 합니다.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과 다빈치의 작품인 동방박사의 경배가 이곳에 있습니다.베키오궁전 :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유서깊은 정부 청사입니다. 14세기에는 피렌체 공화국 공화정부당국, 즉 최고행정기관 자체를 지칭하는 시뇨리아가 열리는 장소였고 이후 다양한 피렌체의 정치지도자들이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베키오 궁에는 옛 피렌체의 부와 권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복제품), 바초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코스,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등이 내부에 존재합니다.마지막 여행지는 밀라노입니다.이탈리아의 경제적인 중심지 밀라노는 해발 122m의 롬바르디아주의 주도로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이자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밀라노는 밀라노 패션위크로도 유명한데, 패션뿐만 아니라 음식, 밀라노 부오노 대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으로도 유명합니다. 밀라노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가 있는데 이곳에서 쇼핑을 즐기고 오랜 전통의 카페와 부티크 관광을 하고자 합니다. 또한 수많은 전시회가 열리기에 볼거리가 풍성할 것으로 여겨집니다.밀라노 두오모 :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은 1386년 경 장 갈레아초 비스콘티 공의 예술 진흥 정책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총 500여년의 세월이 걸려 지어졌다고 합니다. 현재는 밀라노의 상징이자 이탈리아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로 손꼽히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오모 성당 왼쪽 문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밀라노 칙령'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성당 앞의 광장은 밀라노의 중심으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스칼라극장 :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를 초연했던 곳으로 비스콘티 가의 부인, 스칼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페라 극장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폐허가 되었지만 곧 템페라(tempera)를 사용하여 습기에 약한 두 층의 회벽에 작업했기 때문에 이후 많이 손상되었고 최근 20년간 복원 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성당 뒤에 위치한 안뜰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기타 소도시들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베로나,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카르카손, 물의 도시 베네치아,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등 주변의 다른 도시들도 함께 둘러보면 더 알찬 여행이 될 것입니다.참고문헌네이버 지식백과 - 나폴리 ( Hyperlink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74456&mobile&categoryId=200001277"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74456&mobile&categoryId=200001277)- 로마 ( Hyperlink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88183&mobile&categoryId=200001277"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88183&mobile&categoryId=200001277)네이버 캐스트 - 로마 ( Hyperlink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1&contents_id=2487&leafId=75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1&contents_id=2487&leafId=757)- 피렌체 ( Hyperlink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0&contents_id=1686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0&contents_id=16865)- 밀라노 ( Hyperlink "ml)
2013학년도 제2학기짧은 학술적 글쓰기한국광고에서의 백인모델:왜 하얀 얼굴을 선호하는가?제출일 : 2013년 12월 17일Ⅰ. 서론며칠 전, 모 여대 앞에 잘생긴 백인 모델들이 웃통을 벗고 나타났다. 이는 한 외국 의류업체의 홍보를 위한 행사였는데, SNS 등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원하던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업체가 인종차별, 외모지상주의를 신봉하고 그에 걸맞게 백인모델만을 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업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매운동을 벌이고자 했으나 아직도 이 의류업체는 한국 의류시장에서 높은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한국사회는 백인우월주의에 관해 관용적이고 그다지 거부감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무수히 많은 백인모델들이 한국광고에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백인모델들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백인우월주의나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감 때문일까? 한국광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백인모델들은 한국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Ⅱ. 본론한국에서 백인모델 선호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원인으로 크게 세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문화 제국주의, 동서양 공통의 백색 선호 전통, 그리고 특이하고 생소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다. 이 세가지 요인들이 한국사회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백인우월주의, 나아가 백인모델에 대한 선호를 가져온다.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서구화된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일제 치하 36년간 서양문물이 한국에 대거 유입되었다. 당시 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서양 외의 지역은 대부분 식민지화되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여온 학문에 내재된 사회진화론, 백인우월주의, 오리엔탈리즘도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과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중화사상이 만연해 있던 조선사회에서 일제의 영향으로 중국(청)이 몰락하고 그 빈자리를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서양 열강들이 차지하면서 서구문물의 유입은 자연스레 서양에 대한 동경과 백인우월주의의 도래를 야기했다. 이는 문화 주의 주장도 이와 일맥상통한다.반면 서양사회에 대한 열등감이나 사대주의만이 백인모델 선호현상을 초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은 오랜 전통이다. 고려시대엔 분꽃의 열매를 빻아 만든 분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를 창백하게 연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얼굴이 희어야 귀티가 나고 양반상이라 생각해 하얀 분으로 세수를 한 후 맑은 물로 다시 헹궈냈을 정도다. 일본에서는 예부터 ‘하얀 피부는 일곱 가지 결점을 감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에 대한 열망이 특별했다. 그래서 그들만의 온천 문화를 십분 활용해 쌀과 황백, 대추, 식물 뿌리 등의 재료를 욕탕에 넣어 사용하거나 쌀겨를 곱게 갈아 천으로 감싼 후 얼굴에 문지르는 등 하얀 피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또한 다르지 않다. 양귀비나 서시처럼 미인으로 회자되던 이들은 모두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으며, 시대마다 선호하는 체형은 달라져도 피부색만큼은 여전히 하얀 것을 좋아한다고려시대엔 분꽃의 열매를 빻아 만든 분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를 창백하게 연출했고 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얼굴이 희어야 귀티가 나고 양반상이라 생각해 하얀 분으로 세수를 한 후 맑은 물로 다시 헹궈냈을 정도다. 일본에서는 예부터 ‘하얀 피부는 일곱 가지 결점을 감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에 대한 열망이 특별했다. 중국에서도 양귀비나 서시처럼 미인으로 회자되던 이들은 모두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다. 고려시대엔 분꽃의 열매를 빻아 만든 분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를 창백하게 연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얼굴이 희어야 귀티가 나고 양반상이라 생각해 하얀 분으로 세수를 한 후 맑은 물로 다시 헹궈냈을 정도다. 일본에서는 예부터 ‘하얀 피부는 일곱 가지 결점을 감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에 대한 열망이 특별했다. 그래서 그들만의 온천 문화를 십분 활용해 쌀과 황백, 대추, 식물 뿌리 등의 재료를 욕탕에 넣어 사용하거나 쌀겨를 곱게 갈아 천으로 감싼 후 얼굴에 문지르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에 대한 열망이 특별했다. 그래서 그들만의 온천 문화를 십분 활용해 쌀과 황백, 대추, 식물 뿌리 등의 재료를 욕탕에 넣어 사용하거나 쌀겨를 곱게 갈아 천으로 감싼 후 얼굴에 문지르는 등 하얀 피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또한 다르지 않다. 양귀비나 서시처럼 미인으로 회자되던 이들은 모두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으며, 시대마다 선호하는 체형은 달라져도 피부색만큼은 여전히 하얀 것을 좋아한다 고려시대엔 분꽃의 열매를 빻아 만든 분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를 창백하게 연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얼굴이 희어야 귀티가 나고 양반상이라 생각해 하얀 분으로 세수를 한 후 맑은 물로 다시 헹궈냈을 정도다. 일본에서는 예부터 ‘하얀 피부는 일곱 가지 결점을 감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피부에 대한 열망이 특별했다. 그래서 그들만의 온천 문화를 십분 활용해 쌀과 황백, 대추, 식물 뿌리 등의 재료를 욕탕에 넣어 사용하거나 쌀겨를 곱게 갈아 천으로 감싼 후 얼굴에 문지르는 등 하얀 피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또한 다르지 않다. 양귀비나 서시처럼 미인으로 회자되던 이들은 모두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으며, 시대마다 선호하는 체형은 달라져도 피부색만큼은 여전히 하얀 것을 좋아한다이 하얀 피부에 대한 선호는 서양도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흔히 ‘백인’ 또는 ‘백색인종’이라고 부르는, 하얀 피부를 가진 그들도 하얀 얼굴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1760년에 납 중독으로 27세에 죽은 영국 코벤트리 백작 부인처럼 납가루와 비소를 섞은 분으로 유령처럼 창백한 화장을 고집하며 죽어가는 유럽 여성들이 속출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조건을 일곱 가지 항목으로 나눴는데 그 중 하나가 ‘얼굴이나 피부가 하얗거나 장밋빛일 것’이었다. 왜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얀 얼굴, 하얀 피부를 선호한 것일까? 백색 선호는 농경생활에서 비롯된다. 농경사회에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부들은로 백인이 하얀 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마지막으로 유추할 수 있는 요인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새롭거나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자극이나 상황에서 쉽게 유발된다. 그 예로 소리 없는 영상광고 같은 색다른 형태의 광고가 호기심을 유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호기심은 또한 탐색적 행동 동기가 되는 새로운 감각적 경험과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욕구로 정의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사상을 강조하며 외국인의 출입을 꺼렸다. 때문에 한국에서 외국인, 외국물건, 외국사상은 매우 낯설고 생소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양에서 외꺼풀의 황인모델이 독특하고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자주 기용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백인들은 한국인에게 낯선 서양의 문화를 대변하는 낯설고 신비로운 존재로서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특히 여행, 의류 등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다양한 광고에 많이 기용된다. 한국인들이 서양문화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는 환상을 자극하여 이를 곧 상품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Ⅲ. 결론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인 이유로 인한 백인 우월주의 사상, 동양의 하얀 얼굴 선호 전통,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국광고에서의 백인모델 기용을 촉진시켰다. 이외에도 한국인들이 직접 인지하지 못할 뿐, 다양한 원인들이 백인모델들이 출연하는 광고의 범람을 야기했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한국광고에서 백인들이 등장하여 아름다운 미소로 한국인들의 상품 구매욕구를 자극한다. 백인모델의 한국광고 출연은 표면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이면에 내재된 문제가 있다. 바로 그들의 모습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의 기준을 백인의 얼굴로 삼게 하여 더 나아가 문화 제국주의, 획일화 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한국인들이 자국 문화를 보호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하고, 나아가 문화 사호인스(2000), 『미디어 소사이어티』, 전석호 (역) (사계절, 2001)도선재, 황장선(2008), 「TV 광고의 모델 사용 유형에 대한 내용분석」, 『광고학연구』 제19권 5호류강석, 박종철(2004), 「광고모델의 인종구성이 소비자반응에 미치는 영향: 제품유형과 제품원산지의 역할을 중심으로」, 『광고학연구』 제15권 4호마셜 매클루언(2003),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김상호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유승엽, 김재영(2007), 「광고모델의 인종과 메세지 강도 및 문화가치에 따른 광고효과」, 『한국심리학회지: 소비자 광고』 Vol.8, No.1윤석태, 정상수(2012), 『텔레비전 광고제작』, 커뮤니케이션북스이성은(2008), 「"인종형성" 이론을 통해 본 『보이지 않는 인간』」, 『영어영문학연구』 제34권 제4호이재준, 「WP "한국, 中'日보다 인종차별 심하다"」, 『조선일보』, 2013.5.18. 14면.이종일(2009), 「다문화 교육을 위한 과학적 인종주의에 대한 맥락적 연구」, 『사회과교육연구』 제16권 제2호이종일(2011), 「한국 인종편견 형성과정과 요인」, 『사회과교육연구』 제18권 제2호이종일(2012), 「다문화 교육을 위한 제도화된 인종주의 고찰」, 『사회과교육연구』 제19권 제2호임도경, 김창숙(2011), 「대학생들의 다문화 인식 및 선행요인에 관한 연구」, 『커뮤니케이션학 연구』 제19권 1호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정작 '창조'가 필요한 곳은 외교 분야다」, 『조선일보』, 2013.10.24. 30면.정용교(2013), 「다문화시대 세계시민교육의 현황과 대안모색: 사회과교육을 중심으로」, 『사회과교육연구』 제20권 제2호조성래(2001), 「외국인 모델의 특성이 광고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 청바지 광고를 중심으로 -」,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2001학년도 석사학위 청구논문』주선희, 구동모(2012), 「독특성 추구성향과 호기심이 아트 콜라보레이션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감정에 미치는 영is
What Made the Woman Mad?In the 19th century, Arthur Schopenhauer claimed that "A woman is by nature meant to obey." In the same century, Ralph Waldo Emerson said, "Woman should not be expected to write or fight or build or compose scores; she does all by inspiring men to do all." The author of ‘The Yellow Wallpaper’, Charlotte Perkins Gilman lived in this male-dominated society. Therefore, she had many obstacles to write and to express her feelings or thoughts. She wanted to criticize this situation and therefore wrote an autographical novel, "The Yellow Wallpaper". Like Gilman, the narrator of the story is oppressed not to write things. Her husband asserts his authority as a physician to control her and this makes her to become depressed and finally, to be insane.The narrator, later referred to as Jane, describes herself that she is just resting in a country mansion, but actually, readers can easily notice that she is confined in the strange room with repulsive yellow wallpaper in it and forced to do nothing but sleep. She can’t communicate with other people and therefore writing about her feelings and thoughts is the only thing she can do to express herself. While confined in the room, the narrator becomes more and more insane and hysteric. However her husband diagnoses her as temporary depression or a mild hysteria.One day, after examining the yellow wallpaper in her room, she starts to think that there are women confined in the wallpaper. This repellent wallpaper symbolizes the society of that time, when women were oppressed and confined by men. Even though the narrator didn’t tell the readers that the women inside the wallpaper are obviously the reflections of her, the readers can notice this. The narrator wants to help the women, and tears the wallpaper to “release herself (or the women)” from male-dominant society. The yellow wallpaper which surrounds the room is, therefore, symbolizing the imprisonment of women by their husbands and marriage.Ostensibly, she just looks going insane. Her writing becomes shorter and shorter. She laughs a lot and doubts her husband and his sister. Her hysteric behavior becomes worse and strange. However, a story about woman who becomes crazy and destroys her room is not what Gilman wanted to say. There is more behind. The narrator is actually using her lunacy and express her hysteria to avoid her role as a traditional wife. Her hysterical writing and behavior are her refusal to be ‘a good wife’ in that era. She becomes free from her duty and obligations the society demands her to follow.In the end of the story, the narrator destroys the wallpaper and tears it apart. She looks to be possessed by the spirit of a woman behind the wallpaper and losing herself. However, actually, this means that she is now true herself on her own. She is now free to do anything she wants. Maybe she is completely mad outwardly, but she would be much happier than before because she is now free from her husband and all the society. She is crying out that she is a human being before a wife or a mother.References Hyperlink "http://www.newfoundations.com/WOMAN/Intro.html" l "links" http://www.newfoundations.com/WOMAN/Intro.html#links
내가 바라는 민주사회;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I. 서론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이 시대에 중시되는 가치는 개인과 집단의 자유, 그리고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분위기가 선행되어야 나머지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를 가장 존중할 수 있는 사회는 분명 자유주의 사회이다. 허나 자유주의만으로는 모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어렵다. 자유주의 제도 자체가 다소 방임적이기에 무한 경쟁과 부의 양극화 등을 초래하여 오히려 소시민의 삶과 그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유주의를 인정하고 그 체제 하에서 단순한 자유보다는 좀 더 약자를 배려하며 그들의 자유도 보장하고자 한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이념이라고 여겨진다.II. 본론과거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되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를 위해 개인이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사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본질은 이러한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다. 사회주의는 공동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자원을 분배하고 올바른 노동의 대가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를 지향한다. 실제로는 자유주의 체제에 순응하나 다만 어느 정도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인 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에서는 이윤추구가 금지됨에 따라 노동에 대한 동기 부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모든 사유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통념과 달리 공장의 기계 등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금지하는 제도이고 개인의 재산권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전체주의이자 독재의 이념으로 사용되는 공산주의 국가이론으로 오해되는 것과 달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가의 이익만을 강조하기보단 힘없고 재산이 없는 개인의 교육권이나 건강권 등 기본권의 평등을 강조하여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인 권리 행사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오히려 고전적인 자유주의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더욱 온전히 보장하는 제도로 적용될 수도 있는 사상이다.사회주의는 사회적 평등과 공동체를 강조하며 자유주의 체재 하에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하고자 한다. 이는 즉,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이념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보완하고 수정하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한국 등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에도 개인의 자유와 그에 대한 권리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모든 개인, 특히 약자를 위해 모든 국민의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공동 생산과 자원의 공동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어찌 보면 너무 이상적이기에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는 생각이다. 사회주의 하나만으로는 국가를 이끌어 나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정부의 통제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오히려 국민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이를 자유주의와 결합하고 수정, 보완한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대표적인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가인 존 듀이나 모티머 아들러 등의 설명에 의하면, 개인은 사회의 근본이므로 모든 개인은 교육, 경제적 기회, 거시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와 같은 기본적인 필수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보장을 개인의 권리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는 곧 사회주의 사상의 근본이념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사회적 자유주의는 모든 생산수단을 공동의 소유로 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시장경쟁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어느 정도 허락하고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하도록 하는 복지국가를 주창한다. 이는 곧 적극적 자유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실제로 북유럽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에서 수용하여 현재의 복지제도 등을 수립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정책은 정부의 통제가 너무 심해질 경우 오히려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에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유지가 잘 이루어져야 하고 그만큼 청렴하고 슬기로운 정부가 필요하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시대와 오늘날의 문화정책 간의 차이서론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면 프랑스, 나아가 유럽의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절대적인 권력은 지금의 북한 등 독재국가의 지도자들보다 더 강력했을 것 이라고 여겨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72년(1643~1715)이라는 기나긴 통치기간동안 어떻게 그처럼 귀족들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혼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본론루이 14세는 다섯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어 섭정을 받았지만 1661년, 이십여년간 권력의 중심이었던 마자랭의 죽음을 계기로 섭정을 거부하며 직접 통치를 선언했다. 그는 마치 신과도 같은 왕이 되고자 하여 왕권의 강화를 모색하고 그 일환으로 자신이 애호하던 문학과 예술을 장려하는 문화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프랑스의 왕립아카데미학술원은 막대한 지원 덕에 번영했고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페로, 르브룅 등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왕을 위한 작품들을 만드는데에 전념하여 루이 14세의 신성화 작업에 큰 공을 세웠다.루이 14세는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가 집단을 기반으로 자신을 태양신 아폴론에 견주어 스스로를 신성시하였고, 실제로 아폴론 등 그리스 신처럼 분장한 모습으로 화려한 발레를 선보이며 귀족들과 일반 국민들에게 경외감을 일으키게 했다. 또한 평생에 걸쳐 국고를 어마어마하게 쏟아 부은 거대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축조하여 온 유럽의 군주들의 동경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실제로 수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새로 궁을 짓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너무 거대하고 장엄하여 화려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인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서, 당시 프랑스 민중들은 루이 14세에 대한 존경심과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루이 14세는 수많은 귀족들과 예술가들을 마치 호의를 베풀 듯 베르사유로 불러들여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게 하였고 그 결과, 귀족들의 모든 행동과 말은 왕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귀족들이 지배하던 지방에 자신의 직속 관료들을 보내 귀족들이 누리던 권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왕에게 모든 권력이 예속되게 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전두환 대통령이 추진했던 우민화정책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땡전뉴스'라고 불리는, 그 자신을 항상 헤드라인으로 하는 뉴스를 통해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존재를 각인시켰고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프로야구 창설 등을 통해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하는 소위 3S (screen, sports, sex) 정책을 펼쳐 마음대로 여론을 조작하고 조종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비단 1980년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문화정책은 이렇게 정치가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커다란 행사를 국민통합에 이용하고, 언론을 권력집단의 대변인 격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하지만 루이 14세가 군림하던 절대왕정기의 문화정책과 지금의 문화정책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점도 존재한다. 우선, 둘의 목적이 다르다. 절대왕정기 당시에는 왕을 신성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 하며 귀족들의 관심을 권력에서 예술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면 현재는 예술이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정치선전물이 되기도, 혹은 사회 풍자물이 되기도 하는 등 보다 다양한 목적을 갖는다.또한 절대왕정기 당시에는 예술이 신과 같은 신성한 존재인 왕에게 속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감히 예술가들이 왕을 비판할 수 없었다. 물론 루이 14세가 총애했던 예술가들이 성직자나 권력을 가진 귀족들을 희극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풍자, 비판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안이었고 존엄한 국왕 루이 14세는 예술에 의해 도전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는 권력과 예술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상호보완하는 한편, 권력이 예술을 탄압하거나 예술이 권력을 비판하는 등 보다 더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루이 14세가 예술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이용하고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절대왕정과 달리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사람들의 생각도 더욱 다양해졌고 정치의 노선과 사상이 다양해져 예술이 정치권력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비판할 때는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어찌보면 예술이 권력에서 좀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발전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예술이 정치권력이나 어느 개인의 대변인, 혹은 시녀 역할을 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결론루이 14세에게 예술이란 그가 독점할 수 있고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쳐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정치 권력을 통해 예술이 발전하기도, 탄압을 받기도 하며 권력 또한 예술로 인해 더욱 공고해지거나 비판을 받는다. 루이 14세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예술이 정치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는 절대왕정기보다 현대에 좀더 예술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많은 정치권력이 예술을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예술이 민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문화정책이 어떻게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기에 그의 권력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는지, 현재 우리의 문화정책은 어떤지 조사하면서 내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예술이 순전히 아름다움과 심미성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면에 다양한 계획과 의도가 내포되어있음을 깨달았다. 루이 14세의 문화정책이 결과적으로 성공했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드높였지만 과도한 재정낭비와 사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대에도 국가나 정치권력의 기득권유지, 혹은 정치선전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도 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권력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권력이 예술의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야지 예술을 장신구나 여론몰이의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된다. 예술 역시 권력의 시종 역할, 대변인 역할에 안주하지 말고 비판과 의견제시를 통해 권력과 상호발전을 꾀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참고문헌유럽의 절대왕정시대 – 김장수, 푸른 사상서양근대사 - 노먼 F.캔토, 혜안서양문명의 역사-하 – E.M.번즈, 소나무서양사 총론1 – 차하순, 탐구당